영적 은사
<보라> 은사
영접하다 receive
'손님을 맞아서 응접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귀한 손님을 맞이하려고 뛰어나가는 주인의 태도처럼 우호적인 영접을 나타낼 수도 있고(창18:2;삿4:18), 어떤 사람을 인정하거나 그의 환심을 사려고 맞이하러 나오는 경우도 있다(삼하19:20), 적대적인 뜻으로 군사적인 적을 대항하여 대면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사21:14). 신약에서 이 단어는 환대와 관계있는 식사, 잔치를 의미하게 되었고, 누가복음 9:11에서는 예수께서 군중에게 표시하는 환영을 가리키며, 바울에 대한 영접(행 18:27;21:17), 마을로 오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바울의 환영(28:30)을 지칭하는 데 이 단어를 사용했다. 또 이 단어는 복음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마10:40;눅16:9; 요1:12;5:43;13:20).
영존/-하다 live forever
'영구하게 존재한다'는 뜻으로, 이사야는 온 세상의 왕으로서 정사를 메신메시야의 명칭을 소개하면서 '영존하시는 아버지' 라는 표현을 썼다(사9:6). 시편의 한 기자는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면서 영원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신성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영원한 존속을 기도하는데, 그는 여기서 주는 '영존하신 분'으로 묘사하였다(시 102:26), 신약에서도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영원하심과 피조물의 변화 무쌍함을 대조하면서 주는 . 영원한 현재에 머물러 계신다는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히1:11).
영지 province
토지로 성립되는 국가의 영역, 곧 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지역을 말한다(스 4:16;23:34).
영지주의 Gnosticism
영지주의라는 용어는 '지식' (knowledge)을 뜻하는 헬라어 그노시스(gnosis)에서 유래하였다. 근대까지 이 용어는 초기 기독교의 교회 교부들에게서 비판받았던 이단적 가르침에만 적용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학문에서는 이 용어가 보다 느슨하게 사용되어 어떤 종류의 이원론이나 비밀스러운 지식을 소유했음을 강조하는 모든 형태의 종교적 신념에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조로아스터교, 만다야교(Mandaeism), 헤르메스 문집, 사해 사본, 심지어 신약까지도 모두 '영지주의적인' 것으로 지적되었다.
1. 영지주의의 정의. 영지주의를 정의하는 문제는 오늘날 가장 뜨거운 쟁점 가운데 하나가 되어있으며 좁게 정의하는 학파와 넓게 정의하는 학파로 크게 둘로 나누어지고 있다. 윌슨(R.Mcl.Wilson)과 같은 보수적인 영국 학자들로 대표되는 학파는 '좁은' 정의를 지지하여 영지주의란 용어를 2세기의 기독교 이단들에게만 한정하여 적용한다. 이와 달리 불트만과 루돌프(K.Rudolf)와 같은 독일 학자들에 의해 특히 대중에게 알려진 학파는 '넓은' 정의를 지지하여 비슷한 관점을 지닌 다른 집단들도 영지주의에 포함시킨다.
영지주의를 '넓게' 정의하는 데 따르는 난점들이 있다. 이 경우 '영지주의' 라는 말은 내포의 범위가 너무 넓어 거의 어떤 특수한 내용을 갖지 못하게 되며, 단지 이원론의 색채를 현저히 띠었던 헬레니즘 사상의 최소 공통분모만을 가리키게 될 뿐이다.
그러나 영지주의를 보다 정확하게 정의하는 데에도 난점은 있다. 초기 교회의 발렌티누스파(Valentinians)와 나세네파(Naassenes)와 같은 일부 집단들은 영지자(영지를 지닌 자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교회 교부들은 이런 집단들의 공통점에 대해 동일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였다. 이레니우스는 “이런 신비적 교리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수만큼 많은 구속론들이 존재한다" (「이단논박」 1. 21. 1)고 평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해할 만한 정의를 내리는 일이 어렵기는 하지만 이들 2세기의 집단들은 우리가 기본적인 영지주의적 신념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공통점을 지녔었다. 영지주의 신념의 초석은 창조된 세계는 악하고 영의 세계와 완전 분리되어 대립한다고 믿는 철저한 우주론적 이원론이었다. 최고 신(supreme God)은 영의 세계에 근접할 수 없는 광채 속에 거하며 물질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았다. 물질은 열등한 신(Demiurge)에 의해 창조되었다. 이 열등한 신은 그를 돕는 자들(archöns)과 함께 인간을 물질적 존재 안에 감금해 놓고 개별 영혼들이 사후에 영의 세계로 올라가는 길을 막았다. 신성한 불꽃(영, pneuma)을 지닌 사람들만이 육적인 존재에서 도피할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이런 불꽃을 지닌 사람들도 자동적으로 피하지는 못하였고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의식하기 위해 영지(gnosis)의 각성을 받는 것이 필요하였다. 영지는 우리가 누구였다가 무엇이 되었으며, 어디에 있었다가 어디로 가며, 무엇으로부터 구속(구원)을 받으며, 태어남이 무엇이며 또한 다시 태어남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다. 교회 교부들이 보고하고 있는 대부분의 영지주의 체계에 의하면, 이 각성 (enlightenment)은 구속신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구속신은 영의 세계에서 위장하고 내려오며, 흔히 기독교의 예수와 동등시된다. 따라서 영지주의자에게 구원은 그의 신성한 영의 존재에 유의하면서 이영지의 결과로 죽을 때 물질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도피하여 가는 것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이 모든 것을 고도의 신화적 형태로 개념화하였으나 그것이 대응한 현실들은 물론보다 실존적 성격을 띠었다. 영지주의자는 자신의 정체성(identity)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사실을 안 탁월한 정신의학자 칼 구스타브 융(Jung)은 고대 영지주의를 기초로 하여 그가 인간본성에 관해 관찰한 많은 것을 이해하려 하였다.
전통적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영지주의적 사고는 매우 낯설다. 구속에 관한 영지주의의 신화적 배경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역사적 사건들을 경시하게 만든다. 또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그 견해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중요성을 부정하게 만든다. 영지주의의 맥락에서 ‘구원’ 은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닌, 실존적 자아실현(existentialself-realization)의 한 형태로 이해된다.
2. 영지주의에 관한 자료 우리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자료에서 영지주의 종파들에 관한 지식을 얻고 있다.
(1) 교회 교부들의 저술들. 이 방면에서 가장 중요한 저술은 이레니우스의「이단논박」(Against Heresies)이다. 그 외에도 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로마의 히폴리투스가 동일한 주제들에관해 많은 글을 썼다. 이 저술들의 일부는 상호의존하고 있으며, 모두가 비슷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이 모든 저술들은 정통 가톨릭 기독교의 입장에서교부들이 올바로 견지하고 있다고 믿은 '원래' 의 사도적 기독교를 타락시킨 것으로 보이는 점들을 논박하기 위해 씌어졌다. 이것은 교부들의 저술들이 영지주의 신념들에 대한 공정한 설명이라기 보다 경향성을 지닌 것임을 말해준다. 교부들의 저술들은 또한 간접적인 지식을 토대로 씌어졌다. 영지는 그 성격상 비밀스러운 것이었고 그에 따라 외부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으므로 이는 불가피한 일이기도하였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이 직접 쓴 저술들과비교해 보아도 교회 교부들의 설명들이 세부 사항에서 항상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전체 윤곽 면에서는 공정하고 신뢰할 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 영지주의 문서들. 영지주의 문서들은 교부들의 설명에서 오는 불리한 피해를 하나도 입지 않고 영지주의 정신의 산물들을 직접 들여다 보게 한다는 점에서 영지주의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간에도 고립된 영지주의 문서들이 더러 알려져왔다(이중 중요한 것으로는 Pistis Sophia, Booksof Jai, Apocryphon of John 등이 있다). 그러나 1945년 12월 남부 이집트의 자발 알 타리프 산의 낙 함마디 (Nag Hammadi) 마을 근처에서 영지주의 문서들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 이 가족 묶인 13권의 책들은 콥트어(애굽 원주민의 언어로 씌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원본은 헬라어로 된 것이다. 이 책들은 초기 기독교의 한 종파가 수집했던 도서의 한부분으로 AD 400년 경에 방기된 것이었다. 이 13권의 책(codex)은 52개의 개별 문서로 이루어져 있다. 이 문서들을 해석하는 과제는 아직 초보 단계에있어 그것을 평가하는 문제는 잠정적이고 시험적일수 밖에 없다. 우리 나라에도 이 문서들을 기초로하여 영지주의 복음을 소개한 번역 책이 1989년에선을 보였다(E.Pagels, The Gnostic Gospels, NewYork: Random House, inc, 1981.방건웅 · 박희순옮김, 성서밖의 예수, 정신세계사, 1989).
낙 함마디에서 발견된 잘 알려진 작품들 가운데일부는 이른바 '복음서들'을 포함하고 있다. 공관복음서의 Q자료와 같이, 도마복음(Gospel of Thomas)은 예수의 말씀을 모아 놓은 것으로, 그중 일부는신약 복음서들에 나오는 말씀들과 병행하고 있다.그러나 그외 다른 말씀들은 예수의 진정한 말씀으로볼 수 있는 것도 더러 있지만 대개는 전혀 내용을달리한다. 전체적으로 보아 도마복음은 특수한 종파적인 입장에서 편집한 것이 명백하다. 빌립복음(Gospel of Philip), 진리의 복음(Gospel of Truth),애굽인의 복음(Gospel of Egyptians), 마리아 복음(Gospel of Mary)은 신약 복음서들과 공통점이 적으며 보다 명백하게 영지주의적 성격을 보여준다.
다른 낙 함마디 문서들은 다양한 기도집들(Collections of prayers)을 포함하고 있다. 그외비전(秘傳)의 이름이 붙은 야고보 비전(Apocryphonof James)과 요한 비전(Apocryphon of John), 묵시의 이름이 붙은 바울의 묵시(Apocalypse), 야고보 묵시, 아담의 묵시, 베드로의 묵시를 포함하고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작품들이 동일 유형의 영지주의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작품은발렌티누프파의 것으로 보이지만, 모든 작품이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이 문서들에 의해 제기되는 중요한 한 문제는 기독교에 대해 갖는 영지주의의 성격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영지주의는 교부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이 기독교 이단이었는가, 아니면 영지주의는 비기독교적인 신념 형태로서 일부 집단들가운데서 기독교 사상으로 겉치장을 하게 되었던것인가? 지금까지의 증거를 살펴볼 때 낙 함마디문서들은 비기독교적인 영지주의의 형태들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점은 축복받은 유그노스토스(Eugnostos the Blessed)와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sophia of Jesus Christ)를 비교할 때 가장 명백히 알 수 있다. 이 두 작품은 매우 밀접하게 병행되고 있어 동일한 문서를 각기 달리 번역한것임이 명백하다. 그런데 전자의 작품은 부활하신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부활 후에 하신 강화의 형태를 띤다. 지금까지 이 두 문서를 세밀히 연구해본 결과 축복받은 유그노스토스가 원래의 번역이고,이 번역이 그후에 기독교화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지혜라는 작품으로 나타나게 되었음을 확인해 준다. 이외의 다른 문서들(예를 들면 Apocalypse ofAdam, Paraphrase of Shem)도 또한 비기독교적인 형태의 영지주의를 나타내 주는 것으로 보인다.
3. 영지주의의 기원. 영지주의는 어디서 왔는가? 교회 교부들은 기독교를 왜곡시킨 것이 영지주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드러난 증거와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거의받아들이지지 않는다. 그러나 영지주의의 이런 저런 관념이 어떤 다른 종교들의 개념들과 친근성을갖는 것을 알기는 쉬우나 영지주의 사상의 실제 기원을 보다 정확하게 규명해내기는 매우 어렵다.
어떤 이들은 영지주의는 유대교의 다양한 형태중의 어느 하나와 어느 모로든지 관련이 있었다고믿는다. 구약적 관념들이 항상 본래의 구약 사상의 구조와는 분리된 맥락에서이긴 하나 영지주의적사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의심없는 사실이다. 또 어떤 이들은 영지주의와 헬라 철학자들의저술들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론원과의 유사성을지적하기도 한다. 플라톤의 ‘공화국’ (Republic)의일부가 낙 함마디에서 발견된 것은 플라톤의 관념들이 영지주의자들의 성향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이 양자 사이에 어떤 내재적 연관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기는 어렵다.
영지주의의 다른 한 기원을 이단 종교에서 찾아보려는 노력도 있었다. 영지주의의 관점이 진통적기독교보다는 조로아스터교에서 유쾌한 동방 종교들의 순환적 개념들과 훨씬 가까운 점은 부인하기어렵지만, 여기서도 단정하기는 증거가 불충분하다.
영지주의의 기원을 정확하게 규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영지주의적 사고는 그 본질상 매우 혼합주의적이었고 그 신봉자들은 항상 다양한 많은 근원에서 온 종교적 관념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목적에봉사하도록 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영지주의에 단일한 기원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4. 신약 해석상의 쟁점들. 신약 연구자가 부닥치는 두 가지 중요한 쟁점은 영지주의 연구에서 온다.
(1) 기독교 이전의 영지주의. 라이첸슈타인(불트만과 다른 많은 독일 학자들이 그의 뒤를 이었다)에 의하면, 기독교가 헬레니즘 세계에 처음 등장하였을 때 사도들은 하나의 포괄적인 세계관이 이미존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포괄적인 세계관은 헬라 사상과 동양 사상을 결합한 것으로 인간의 영혼들을 구원하려 내려 온 신적 구속자(a divineredeemer)를 믿고 있었다. 이런 '영지주의적’견해가 처음 기독교인들에게 그대로 인수되어 이들의예수 경험에 적용되었고, 이에 따라 예수는 천상적구속자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신약 자체를기독교화된 영지주의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영지주의가 기독교보다 먼저 존재했다고 보는견해에는 많은 난점이 있다. 첫째, 라이첸슈타인에게 알려진 문서나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문서 어디에서도 그 증거가 하나도 없다. 낙 함마디 문서들은 비기독교적인 영지주의 형태들이 존재했음을 보여 주었으나 이것이 기독교 이전의 영지주의의 존재를 입증하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신약을 영지주의의 한 형태로 보는 관념은 어떤경우에도 타당성이 없다. 그것은 영지주의자들의관점과 신약 저자들의 관점 사이에는 중대하고 근본적인 차이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순환적인 시간 개념을 지녔으며 역사의 관념은 이들에게 무의미했다. 영지주의의 구속(구원)은현세에서는 결코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었으며, 오직 현재의 존재에서 영의 세계로 도피하는 데서만 의미를 지닌 수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구약과 신약은 시간과 역사가 중요하며 신적인 의의를지닌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창조주와 구속주로 역사의 진전 과정에개입하셨다. 영지주의자에게 하나님은 역사에서 도피함으로써만 알려질 수 있는 반면, 기독교인에게하나님은 역사 안에 개입하심으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개입하심으로 인해 가장 잘 알려지실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의 구원은어떤 영롱한 '영적' 세계에서보다 이 세계의 지금여기에서 향유되는 것이다.
(2) 이단과 정통. 그러나 영지주의가 신약 연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영지주의적 신념의 흔적들을 여러 신약의 글들 속에서, 특히 고전 1장에 반영된 고린도 교회의 신념들 속에서 가장 뚜렷하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린고 교인들은특별한 '지식'을 지니고 있으므로 정상적인 사회 규범들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주장했으며, 현재의 물질적 상태에서도 고양된 '신령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주장하였다. 이들에게 부활은 이미 과거의 사건이되었다. 이들은 많은 영지주의자들과 같이 부활을영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영지주의자들과 같이 이들은 기독교 성례전의 이른바 주술적 성격(magical properties)을 매우 강조하였다.
골로새서도 골로새 교회에 이와 같지는 않으나비슷한 견해가 있음을 지적한 것으로 흔히 가정되어 왔다. 계1-3장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은소아시아 동일 지역의 다른 교회들 안에 비슷한 '영지주의적' 관념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해 준다.목회서신들은 '거짓되어 일컬는 지식' (딤전6:20)을명백히 규탄하기까지 하고 있으며, 요한일서도 모종의 ‘영지주의적' 배경을 감안하여 씌어졌던 것으로보인다.
신약 저자들은 이런 관념들을 단죄하고 있다. 그과정에서 영지주의 용어들을 가끔 사용하기도 하지만 신약 저자들은 이 용어들의 영지주의적 의미들을 수용하지 않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동시에, 이런 관념들이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에 흩어진 교회들 안에 존재하였고, 넓게 퍼져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은 이단과 정통의 차이가 1세기에는 이후 가톨릭 교회의 영지주의를 반대하던 교부들에 의해서 된 것 만큼 그렇게 선명하게 규정되었던 것은 아니라는 바우어(W. Bauer)의 가설에 이정도의 신빙성을 부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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