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 데 타이스 헤메라이스 에케이나이스 파라기네타이 요안네스 호 밮티스테스 레뤼쏜 엔 테 에레모 테스 유다이아스
개역개정,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새번역,1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 ㉠또는 '침례자'
우리말성경,1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며
가톨릭성경,1 그 무렵에 침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영어NIV,1 In those days John the Baptist came, preaching in the Desert of Judea
영어NASB,1 Now in those days John the Baptist came, preaching in the wilderness of Judea, saying,
영어MSG,1 While Jesus was living in the Galilean hills, John, called "the Baptizer," was preaching in the desert country of Judea.
영어NRSV,1 In those days John the Baptist appeared in the wilderness of Judea, proclaiming,
헬라어신약Stephanos,1 εν δε ταις ημεραις εκειναις παραγινεται ιωαννης ο βαπτιστης κηρυσσων εν τη ερημω της ιουδαιας
라틴어Vulgate,1 in diebus autem illis venit Iohannes Baptista praedicans in deserto Iudaeae
히브리어Modern,1 בימים ההם בא יוחנן המטביל ויהי קרא במדבר יהודה לאמר׃
성 경: [마3:1]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그 때에 - 이 구절의 뜻은 (1) '결정적인 어느 때'(Hill)를 말할 수도 있고, (2) '예수와 그의 가족이 나사렛에 살던 무렵'(Broadus)을 뜻할 수도 있다. 마태는 구약에서 어떤 특정한 시점(時點)을 나타내던 표현 방법(창 38:1;출 2:11, 23;사 38:1)의 영향을 받아 뒤에 이어지는 기록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강조하고자 이런 표현법을 사용한 것 같다. 한편 '그 때'는 2장과 약 30년의 차이가 있는 주후 28년 정도가 될 것으로 추측된다. 즉, 디베료 가이사(Tiberias Caesar) 재위 15년(눅 3:1, 2) 되던 해, 곧 세례요한 내지 예수의 나이가 30세 된던 때였다. 여기서 '30'이란 나이는 모세 율법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민 4:3, 42-45). 이는 결국 율법의 완성자요 인류 구속의 과업을 실행키 위해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의 사역을 인준해주는 하나의 중요한 증거 자료가 된다.
세례 요한(*, 요안네스 호 배티스테스) - 히브리어 요하난(*)이란 이름에서 유래한 '요한'은 제사장이자, 유대의 지도자로서 B.C.106년에 사망한 요한 힐카누스(John Hyrcanus) 이래로 유대인들에게 흔히 사용되는 이름이었다. 이 이름은 신약에서 4, 5명 정도 등장하는데, 특히 본문에서 '요한'이란 이름 앞에 '세례'(Baptist)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자주 나오는 다른 이름과 구별하기 위해서 일 뿐 아니라 그의 사역의 중점이 '세례'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히브리인의 이름에는 (1) 할례명(이 이름은 거룩한 이름으로 종교적 목적과 의식에서만 사용한다)과 (2) 개인명(個人名, 즉 세속명으로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이다) 및 (3) 그밖에 한 개인에게 관련된 공적 임무, 정신적, 신체적. 신분적, 도덕적 특성을 일컫는 이름이 있었다. 여기 '세례 요한'이란 이름은 바로 (3)번의 공식 임무에 관련된 직능적(職能的)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Jesephus)도 '세례자 요한'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편 세례요한은 엄격히 말해서 율법 시대에 속한 자요, 죄를 책망하여 회개를 촉구한 구약 최후의 선지자였다. 그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은혜'와 연관된 것처럼 그는 구약의 율법 시대를 마감하고. 신약의 은혜 시대를 예비하는 준비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였다. 세례 요한의 탄생 경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누가복음 1장을 참조하라.
유대 광야에서(수 15:61;삿 1:16) - 여리고 남쪽과 사해 서쪽 고원 지대에 걸쳐 펼쳐진 황량한 석회암의 굴곡으로 되어 있는 광야이다. 군데군데 오아시스가 있고, 엔게디 근처에는 폭포도 있어 목초지로 이용되던 땅이었다(시 65:12;욜 2:22;눅 15:4). 이곳은 '십 황무지'(삼상 23:14, 15), '마온 황무지'(삼상 23:24), '엔게디 횡무지'(삼상 24:1), '예루엘 광야'(대하 20:16)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는데, 그 모든 땅이 유다 지파에 속하였기 때문에 전통에 따라 '유대 광야'로 지칭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 광야에는 소수의 사람들이 칩거(蟄居) 생활을 하며 흩어져 살았는데 예수 당시의 극단적 유대교 종파의 하나인 엣세네파(the Essenes)도 그 중에 하나였다. 세례 요한의 성장지와(눅 1:80) 초기 사역지(요 3:23)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에 그를 엣세네파의 일원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유대인들의 역사성으로 볼 때 '광야'(Desert, NIV)는 단순히 소외된 지역으로만 여겨지지 않고 '예언적 의미'를 갖고 있는 특수 지역이었다. 그 예로써 율법이 광야에서 계시되었고 열심당원들(Zealots)도 광야를 은신처로 삼았었다(24:26;행21:38). 이러한 의미에서 학자들은 세례요한의 활동 무대였던 광야가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고 있다(Bonnard, Maier). 더불어 '광야에서'란 말 중에 '에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기네타이'(*)가 3인칭 단수 현재형으로 '그가...에 와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이는 단순히 장소를 강조한 말이 아니라 그의 사역의 현재성을 강조한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로 세례 요한의 사역의 현재성과 역사성을 생동감있게 전해주며, 그의 사역의 예언적 특성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전파하여 - 이에 대한 헬라어 '케륏손'(*)은 '유앙겔리조마이'(*)와는 달리 말씀을 선포하는 그 자체로서의 사건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선포의 방법과 의미에 관계된 것이다. 즉 그는 메시지를 선포하되 단지 하나님께서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말씀만을 고(告)하는 것이 그의 사명의 전부이었음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그가 광야를 사역 장소로 택한 것도 하나님의 지시(사 40:3)에 따른 것이었다. 실로 세례 요한의 전파지로 택하신 광야야말로 이스라엘의 피폐(疲弊)한 영적 상태를 적절히 묘사했다 할 것이다.
카이 레곤 메타노데이테 엥기켄 가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개역개정,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새번역,2 말하기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였다.
우리말성경,2 말했습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가톨릭성경,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영어NIV,2 and saying,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near."
영어NASB,2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영어MSG,2 His message was simple and austere, like his desert surroundings: "Change your life. God's kingdom is here."
영어NRSV,2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has come near."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λεγων μετανοειτε ηγγικεν γαρ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2 et dicens paenitentiam agite adpropinquavit enim regnum caelorum
히브리어Modern,2 שובו כי מלכות השמים הגיעה׃
성 경: [마3:2]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회개하라 - 이 말의 원어 '메타노에이테'(*)는 고전 헬라어에서 순수한 의미로는 '마음을 바꾼다'는 뜻을 가지며, 통속적으로는 단순히 '무슨 일을 후회한다'라고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도입된 이 단어의 용례(用例)는 '새 행실로 돌아 온다'는 히브리어 '슈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백성들로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로 돌아오라는 예언자의 외침이다. 즉 유대인 중에도 믿음없는 자가 있고, 우상 숭배자가 있기에 그러한 불신과 영적 음행(淫行)에서 돌이키라는 구약적 의미인 것이다(Alford). 실로 이 말은 머리로서만 계획을 수정하고 감정적으로만 후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와 죄책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Turn ye) 전인격적인 참회(懺悔)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메시야를 영접하는 마음과 행위의 철두 철미한 변화 전반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의 행위가 근본적으로 올바른 궤도를 이탈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철저한 변화가 절대 요청되는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롬 3:10). 한편 이 같은 회개는 합당한 열매를 맺음으로서만 참 회개임이 증명된다.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 요한의 설교의 두번째 주제로서 회개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이 땅에 실현되는 날에는 그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구별될 것이기 때문이다(25:31-46). 따라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천국' 또는 '하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톤우라논)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마가와 누가에는 '하나님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로 표현한다. 한편 이 표현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 왕국에서 유래한 것으로서(단 2:44;7:13, 14,27)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 곧 '왕국'(*, 말쿠트)의 주요 의미는 '통치'(reign)이다. 이것은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왕국'을 뜻하는 '바실레이아'(*)는 간혹 영토를 뜻하는 경우도 있지만(4:8) 대부분이 역동적인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암시한다. 이는 당시 천국을 영적인것으로만 해석하고 인간의 마음안에 있는 것로 간주하던 랍비들의 해석이나 메시야 왕국이 이뤄질 때 로마의 지배가 무너지고 정치적 평화와 번영이 도래하리라던 A.D. 1세기 당시의 유대인들의 극단적 해석과는 달리 역동적(dynamic)으로 이 땅에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에서는 대적들을 멸망시키고 이 땅에 공평과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실(사 9:7) 하나님의 강림(降臨)과 통치에 대한 기대로 고조되어 (1) 다윗 언약 성취에 대한 대망으로 나타나기도 하며(삼하 7:13,14). (2) 여호와의 날로서 심판의 어두움(암 5:18,19)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그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 땅에 구체화될 천국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영원한 천국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본문에 제시된 세례 요한의 선포는 바로 예수의 초림으로 구체화될 천국에 관한 언급인 것이다. 한편 여기서 '가깝다'(*, 엥기켄)라는 말은 천국이 갖는 역동적 의미와 함께 결합되어 '천국은 예수와 그의 말씀과 이적과 함께 왔고, 그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왔으며, 이 시대의 종말에는 완성된 모습으로 올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하늘나라는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 즉 온 세계에 왔고, 마침내는 영원히 존속될 것이다. 한편 마태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피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를 꺼려했던(출 20:7) 유대인의 일반적인 완곡어법(婉曲語法) 때문일 것이다.
후토스 가르 에스틴 호 레데이스 디아 에사이우 투 프로페투 레곤토스 포네 보온토스 엔 테 에레모 헤토이마사테 텐 호돈 퀴리우 유데이아스 포이에이테 타스 트리부스 아우투
개역개정,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새번역,3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 ㉡사 40:3(칠십인역)
우리말성경,3 세례자 요한은 바로 예언자 이사야가 말했던 그 사람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의 소리가 있다. ‘주를 위해 길을 예비하라. 주의 길을 곧게 하라.’” 사40:3
가톨릭성경,3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 ”
영어NIV,3 This is he who was spoken of through the prophet Isaiah: "A voice of one calling in the desert,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make straight paths for him.'"
영어NASB,3 For this is the one referred to by Isaiah the prophet when he said, "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 MAKE READY THE WAY OF THE LORD, MAKE HIS PATHS STRAIGHT!'"
영어MSG,3 John and his message were authorized by Isaiah's prophecy: Thunder in the desert! Prepare for God's arrival! Make the road smooth and straight!
영어NRSV,3 This is the one of whom the prophet Isaiah spoke when he said, "The voice of one crying out in the wilderness: 'Prepare the way of the Lord, make his paths straight.'"
헬라어신약Stephanos,3 ουτος γαρ εστιν ο ρηθεις υπο ησαιου του προφητου λεγοντος φωνη βοωντος εν τη ερημω ετοιμασατε την οδον κυριου ευθειας ποιειτε τας τριβου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3 hic est enim qui dictus est per Esaiam prophetam dicentem vox clamantis in deserto parate viam Domini rectas facite semitas eius
히브리어Modern,3 הלא זה הוא אשר נבא עליו ישעיהו הנביא לאמר קול קורא במדבר פנו דרך יהוה ישרו מסלותיו׃
성 경: [마3:3]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저는...자라(*, 후토스 가르 에스틴) - 본절의 내용은 2절에서 세례 요한이 천국을 전파하는 공적인 근거가 된다. 그런 측면에서 본 문장은 이유와 원인을 나타내는 '가르'(*)에 의미를 살려 '왜냐하면 저가...자이기 때문에'로 고치는 것이 더욱 완전한 번역이 된다. 한편 본절은 예언과 성취라는 구조(flufillment formula)로 묘사되어지지 않은 구약 인용 구절 중의 하나이다. 즉 본문의 경우는 단순히 문자적 예언 성취가 아니라 하나의 모형적, 종말론적 성취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예언은 다른 복음서에도 공히 취급되고 있다(마 1:2, 3;눅 3:4-6;요 1:23). 특별히 세례 요한 자신은 요 1:23에서 '나는...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하였고, 예수께서도 마 11:10에서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하심으로써 이사야가 예언한 내용의 궁극적인 성취자가 바로 세례 요한임을 확증하고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 사 40:3은 바벧론 포로 생활에서 그의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실 뿐만 아니라 더불어 귀환하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이다(McNeile). 여기서 '외치는 자의 소리'는 하나님의 선구자를 가리킨다. 특별히 여기서 '소리'란 어떤 의지나 의미가 개입된 주체적 발언이 아니라 물리적 음파일 뿐이다. 이는 '로고스'(*), 곧 말씀으로 표현된 예수의 주체적 발언과 그인격을 소개하는 세례 요한의 메신저(messenger)로서의 기능을 확실히 드러내 준다. 그리고 '외치는 자'는 하나님이시요, 듣는 사람은 선지자 이사야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포로에서 귀한하는 것에 대한 이 예언은 온전한 성취가 못되었고,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따라서 이 예언은 필연적으로 보다 온전한 성취, 즉 메시야 왕국(하늘나라)의 선포와 도래에 관심을 갖게 된다(Alford). 여기서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단순히 역사적 측면에서의 포로 귀환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영적으로 죄의 노예로 전락한 인류를 해방시키고 당신의 나라로 귀환시키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 예수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해토이마사테) - '주'를 뜻하는'퀴리오스'(*)는 하나님에 대한 신적 칭호로서 히브리어로는 '주인'을 뜻하는 '아도나이'(*)에 해당한다. 이는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된다는 십계명 중 제 3계명(출 20:7)의 금기(taboo)를 철저히 따른 것으로 여호와의 대(代)명칭이다. 한편 '예비하라'는 말은 정확하게 준비되었다는 뜻의 '헤토이모스'(*)에서 유래하여 불편함 없이 적절히 준비하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시는데 불편없도록 모든 것을 '예비하는' 선구자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예비된 길을 따라 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천국'을 또한 '예비하셨다'(요 14:2, 3).
첩경(捷徑)을 평탄케 하라 - 여기서 '첩경'(*, 트리부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실라'(*)는 곧게 뻗은 대로(high-way)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는 마차가 힘차게 달릴 수 있었던 '마차로'로 이해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 길은 분명 '왕의 대로'로 손색이 없는 길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어지는 '평탄케 하라'는 말의 헬라어 '유데이아스'(*)는 '곧다', '기쁘다', '바르다'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주의 길'을 회개로 표현한 은유법이다. 즉, 평탄케 하라'는 말은 단순히 물리적 측면에서 길을 곧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일치하도록 '바른' 질서를 유지하며, 정의를 이루라는 말이다. 이말이 당시 세례 요한의 역할이었다면, 지금은 모든 성도들이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인 것이다.
아우토스 데 호 요안네스 에이켄 토 엔뒤마 아우투 마포 트리콘 카멜루 카이 코넨 데르마티넨 페리 텐 오스퓐 아우투 헤 데 트로페 엔 아우투 아크리데스 카이 멜리 아그리온
개역개정,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새번역,4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다. 그의 식물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우리말성경,4 요한은 낙타털로 옷을 지어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둘렀습니다. 그리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가톨릭성경,4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영어NIV,4 John's clothes were made of camel's hair, and he had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His food was locusts and wild honey.
영어NASB,4 Now John himself had a garment of camel's hair and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and his food was locusts and wild honey.
영어MSG,4 John dressed in a camel-hair habit tied at the waist by a leather strap. He lived on a diet of locusts and wild field honey.
영어NRSV,4 Now John wore clothing of camel's hair with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and his food was locusts and wild honey.
헬라어신약Stephanos,4 αυτος δε ο ιωαννης ειχεν το ενδυμα αυτου απο τριχων καμηλου και ζωνην δερματινην περι την οσφυν αυτου η δε τροφη αυτου ην ακριδες και μελι αγριον
라틴어Vulgate,4 ipse autem Iohannes habebat vestimentum de pilis camelorum et zonam pelliciam circa lumbos suos esca autem eius erat lucustae et mel silvestre
히브리어Modern,4 והוא יוחנן לבושו שער גמלים ואזור עור במתניו ומאכלו חגבים ודבש היער׃
성 경: [마3:4]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출현]
약대 털옷 - 검소하고 금욕적인 구도자(求道者) 본연의 모습올 상징한 옷차림으로서 엘리야의 의상과 의도적 일치를 이룬다(왕하 1:8). 이는 결국 요한이 엘리야 재현 예언(말 4:5;눅 1:7)의 성취자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실로 투박한 털옷은 선지자들이 주로 입는 옷으로 알려졌으며(슥 13:4).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들이 백성의 죄를 자신이 대신하여 슬퍼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입었다 한다. 이 옷은 약대(낙타)의 가죽 옷이 아니라 단지 낙타 털로 거칠게 짠 옷이었다. 한편, 약대 털옷을 입은 세례 요한의 모습은 당시의 죄악된 현실을 부정하며, 회개를 선포하는 그의 사역과 일치한다.
가죽띠 - 풍성한 겉옷올 허리에 단단히 묶기 위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메뚜기(*, 아크리데스) - 이는 몸집이 큰' 종류의 메뚜기로서 레위기에서도 식용(食用)으로 허락된 정결한 식물이었다(렘 11:22). 지금도 동양에서는 메뚜기를 식용으로 삼는데, 유대에서는 하층 천민들이 음식으로 사용했다.
석청(*, 메리 아그리온) - 석청(石淸)은 야생꿀로서 나무의 수액(樹液)이라는 견해(Meyer, Burce, Diodorus)도 있고, 야생 벌꿀(Bengel, Carr)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으나, 구약 셩경에서 이 단어가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바위 틈새에 만들어진 야생 벌꿀(삿 14:8, 9;삼상 14:25-29;시 81:16)로 생각된다. 메뚜기와 석청은 광야 생활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연상시키고, 철저한 자기 절제와 고독한 삶을 살았던 예언자들의 경건한 행위를 암시해 준다. 실로 세례 요한은 의복과 음식으로 백성들에게 회개와 임박한 천국을 전했던 것이다(Bengel).
토테 엨세포류에토 프로스 아우톤 히에로솔뤼마 카이 파사 헤 유다이아 카이 파사 헤 페리코로스 투 요르다누
개역개정,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새번역,5 그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부근 사람들이 다 요한에게로 나아가서,
우리말성경,5 예루살렘과 온 유대 지방과 요단 강 전 지역에서 사람들이 요한에게로 몰려왔습니다.
가톨릭성경,5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영어NIV,5 People went out to him from Jerusalem and all Judea and the whole region of the Jordan.
영어NASB,5 Then Jerusalem was going out to him, and all Judea and all the district around the Jordan;
영어MSG,5 People poured out of Jerusalem, Judea, and the Jordanian countryside to hear and see him in action.
영어NRSV,5 Then the people of Jerusalem and all Judea were going out to him, and all the region along the Jordan,
헬라어신약Stephanos,5 τοτε εξεπορευετο προς αυτον ιεροσολυμα και πασα η ιουδαια και πασα η περιχωρος του ιορδανου
라틴어Vulgate,5 tunc exiebat ad eum Hierosolyma et omnis Iudaea et omnis regio circa Iordanen
히브리어Modern,5 ויצאו אליו ישבי ירושלים וכל יהודה וכל ככר הירדן׃
성 경: [마3:5]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이 때에...다 그에게 나아와 - '이 때에'는 세례자가 '회개'와 '천국' 선포 사역을 시작한 때(1절)를 가리킨다. 실로 400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영적 기갈'의 암울한 시대의 절망 속에 살아가던 백성들은 세례 요한이야말로 그들의 영적 가뭄을 해갈(解渴)시켜줄 단비로 여겼으며 그중에서도 어떤 이는 그를 예언된 메시야로 기대하며(눅 3:15;요 1:20) 그에게 모여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나오는 지명(地名)들은 2:3과 마찬가지로 장소를 의인화시킨 것으로 성도(聖都) 예루살렘이 회개자로서 제일 먼저 광야로 향한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긔고 '온 유대'에서 '온'이라는 말은 그 당시 백성들의 열화와 같은 환대(歡待)를 암시한다. 그리고 '요단 강 사방'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이두매, 베레아, 사마리아등의 이른바 종교적으로 소외된 지역 전반을 가리키며, 또 요한 사역의 본거지가 요단강인 것과 사역의 내용이 '회개 촉구'와 '세례 베푸는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카이 에밮티존토 엔 토 요르다네 포타모 휲 아우토 엨소몰로구메노이 타스 하마르티아스 아우톤
개역개정,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새번역,6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6 그들은 요단 강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가톨릭성경,6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았다.
영어NIV,6 Confessing their sins,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영어NASB,6 and they were being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as they confessed their sins.
영어MSG,6 There at the Jordan River those who came to confess their sins were baptized into a changed life.
영어NRSV,6 and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river Jordan, confessing their sins.
헬라어신약Stephanos,6 και εβαπτιζοντο εν τω ιορδανη υπ αυτου εξομολογουμενοι τας αμαρτιας αυτων
라틴어Vulgate,6 et baptizabantur in Iordane ab eo confitentes peccata sua
히브리어Modern,6 ויטבלו על ידו בירדן מתודים את חטאתם׃
성 경: [마3:6]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사역]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 이는 자기들이 범한 죄를 조목조목 고백했음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역사가 요세푸스이(Josephus)는 '그들이 자신들의 범죄와 율법에 대한 죄를 고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죄의 고백은 율법에 규정된 의무로서 범죄한 당사자의 책임(레 5:5;26:40)이자 제사장의 의무 중 하나였다(레 16:21). 이스라엘이 영적 분위기가 고조되었을 때는 이러한 고백이 순조롭게 이뤄졌으나(느 9:2, 3;시 32:5) 영적 기갈 상태에서는 침묵하고 있을뿐이었다. 한편 막 1:4과 눅 3:3에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한다. 그러나 마태는 세례의 선행 조건으로 '죄의 고백'을 언급했을 뿐 '죄 사함'은 예수가 죽을 때(26:28)까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의 세례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제까지 이스라엘 역사상 개인적인 '죄의 자복'이 이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 적이 없었다. 바야흐로 메시야 도래의 기운이 전국적으로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요단강 - 히브리어 '야라드'(*, 내려가다)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빨리 흐르는 강'을 의미한다. 이 강은 헤르몬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바다를 경유(經由)한 다음 사해에 달하는 강이다. 요단의 수원(水源)에서 사해까지의 직선 거리는 약 217km인데, 전장(全長)은 강의 굴곡과 경사 때문에 400km 이상이 된다. 요단은 팔레스틴 최대의 강이며, 이스라엘 산업의 젖줄이 되는 중요한 강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와도 필연적인 깊은 관계를 갖게 되는 바, 아브라함과 롯의 분가(창 13:10)로부터 야곱의 밧단아람 피신(창 32:10), 여호수아의 가나안 입성(신 3:26-29), 사사시대에는 에홋(삿 3:26-30), 기드온(삿 7:24,25), 입다(삿 12:5,6)의 전장(戰場)으로, 엘리야의 승천(왕하 2:6-11), 엘리사의 나아만 치유(왕하 5:1-14) 등으로 유명하다. 그러므로 바로 이곳에서 세례 요한이 사역을 시작한 것은 의미 심장한 일이라 하겠다. 한편 요단강은 물살이 매우 빠르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그 중 한 여울에 자리잡고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을 것이다.
세례를 받더니(*, 카이 에밥티존토) - 할례(circumcision) 아브라함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전에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계약 의미가 부여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시 세례 행위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세례에 죄에 대한 고백과 씻음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부가된 것은 요한에게서 유래한다. 이에 대해 요세푸스(Josephus)는 증언하기를 세례자 요한이 세례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예비 행위로서 의로운 행위, 곧 죄 고백을 요구했다고 한다. 따라서 요한이 회개하고 세례받음으로써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자고 강력히 촉구한 점으로 보아 적어도 공개적으로 죄와 인연을 끊는 것이 세례의 전제 조건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편 또한 쿰란(Qumran) 종파는 제의적 부정(祭衣的 不淨)을 제거키 위해 정결례(淨潔禮)를 행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랍비들은 유대인이 아닌 한도내에서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여하튼 요한의 세례가 온몸을 물에 잠기게 하는 침례(浸禮)를 행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나 세례 의식이 침수(浸水)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의식이 상징하는 '회개와 사죄', 그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새 생명'이 중요한 것이다. 요한은 계시 수준의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께서는 완성된 사역의 서례를 베푸셨다(26:28).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였고 유대 민족을 새 생명의 길로 불러내고 있었다(Robertson).
이돈 데 폴루스 톤 파리사이온 카이 삳두카이온 에르코메누스 에피 토 밮티스마 아우투 에이펜 아우토이스 겐네마타 에키드논 티스 휘페데잌센 휘민 퓌게인 아포 테스 멜루세스 오르게스
개역개정,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새번역,7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7 그러나 여러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베풀고 있는 곳으로 몰려오는 것을 보고 요한이 말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더러 다가올 진노를 피하라고 하더냐?
가톨릭성경,7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영어NIV,7 But when he saw many of the Pharisees and Sadducees coming to where he was baptizing, he said to them: "You brood of vipers! Who warned you to flee from the coming wrath?
영어NASB,7 But when he saw many of the Pharisees and Sadducees coming for baptism, he said to them, "You brood of vipers, who warned you to flee from the wrath to come?
영어MSG,7 When John realized that a lot of Pharisees and Sadducees were showing up for a baptismal experience because it was becoming the popular thing to do, he exploded: "Brood of snakes! What do you think you're doing slithering down here to the river? Do you think a little water on your snakeskins is going to make any difference?
영어NRSV,7 But when he saw many Pharisees and Sadducees coming for baptism, he said to them, "You brood of vipers! Who warned you to flee from the wrath to come?
헬라어신약Stephanos,7 ιδων δε πολλους των φαρισαιων και σαδδουκαιων ερχομενους επι το βαπτισμα αυτου ειπεν αυτοις γεννηματα εχιδνων τις υπεδειξεν υμιν φυγειν απο της μελλουσης οργης
라틴어Vulgate,7 videns autem multos Pharisaeorum et Sadducaeorum venientes ad baptismum suum dixit eis progenies viperarum quis demonstravit vobis fugere a futura ira
히브리어Modern,7 ויהי כראותו רבים מן הפרושים והצדוקים נגשים לטבילתו ויאמר להם ילדי הצפעונים מי השכיל אתכם להמלט מן הקצף הבא׃
성 경: [마3:7]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바리새인(*, 파리사이온) -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 함께 마카비 독립 운동시대 초기(B.C. 167)에서 대제사장 요나단(B.C. 159-143)치하 사이에 기원(起源)된 경건주의자들로 보여지며, '바리새'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나타난 것은 요한 힐카너스 당시(B.C. 135-105)로 보인다. 그런데 이 이름은 히브리어 '파라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구별하다'란 의미를 가진다. 즉 바리새인은 '성별된 자'로서 율법과 구전(口傳)된 조상들의 모든 전통을 엄격히 지키고 영혼 불멸, 부활과 내세, 천사의 존재 등을 신앙하며 배타성이 강한 일단의 무리들을 가리킨다(행 23:8). 그러나 그들의 분리주의는 율법의 순수한 정신과 내면적 경건을 무시하고 형식주의적인 위선과 의모를 중시하는 외식주의로 전락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었다(눅 11:43,44;12:1). 그렇다고해서 그들의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신앙으로 인하여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의 본래의 모습은 율법의 수호자(守護者)로 자처할 만큼 율법 준수에 철저했고 의로운 이스라엘을 고대하며, 장차 도래할 메시야 왕국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 온 것은 메시야에 대한 그들의 지대한 관심을 겉으로 나타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회개의 메시지가 선포되는 현장에 회개에는 유념치 않고 외식의 옷만을 걸치고 거만하게 나타난 것이다. 한편 '많은'이라는 말에서 그들의 수(數)를 측정할 수는 없겠지만 요세푸스(Josephus)에 따르면 대헤롯이 죽을 때 바리새인들은 6천명 이상이나 되었다 한다.
사두개인(*, 사두카이온) - 이 명칭의 기원에 대하여는 (1) 알렉산더 대왕 당시의(B.C. 323) 사독이란 사람에게서 유래하였다 (2) 히브리어로'체디크'(*), 헬라어로 '아포 디카이오쉬네스'(*), 즉 '의'라는 말에서 근거하였다(Epiphanius)는 견해가 있으나 유대의 전승에 따르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왕상 1:38)이란 인물에게서 기원하였다(Thayer, Carr)고 한다. 이들 중 후자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이들은 민족주의자들로서 바리새파, 엣세네파와 함께 유대의 3대 종파의 하나이며 바리새인들과는 적대적인 파당이었다. 또한 그들은 바리새파보다 숫적로 열세였지만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한 위치에 있었고 특히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은 합리주의자들이었으며 제사장급의 고위층이었다. 그들은 모세 오경 이외에는 모든 전승을 부인하였고, 내세도, 부활도, 천사도, 심지어 하나님의 섭리도 믿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유전(遺傳)의 위험은 피하였지만, 무익한 세상적인 열심과 인간의 이성에 절대적 기준을 두는 오류(mistake)에 빠져 들어갔다(Alford).
오는 것을(*, 엘코메누스)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을 한 부류로 묵어 기록한 것은 본서에 5회(16:1, 6, 11, 12) 나타난다. 상호 적대적인 두 파가 함께 왔다는 데에는 이의(異意)가 없으나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혤라어 본문에서는 그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지 세례 장소에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지 분명한 구별을 짓지 않고 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세례 요한의 질책(叱責)으로 보아 그들은 세례 모습을 관찰하러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Bruce). 실로 이 두파는 종교적 목적에서는 상호 적대적이었지만 예수를 정치적으로 대적하는 목적에서는 연합하였다 (16:1;22:23, 34;행 4:1).
독사의 지식들아 - 이는 예언적 전통에 속한 선언이다(사 14:29;30:6). 요한은 광야에서 흔히 블 수 있는 독사들을 보며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간교한 뱀을 연상하였을 것이다. 현대처럼 저속한 욕설이 없던 시대에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였던 그들에게 저주받은 뱀(창 3:14)의 후예라고 욕한 것은 위선과 변절, 기만 등으로 길들여진 그들을 향한 신적 권위에 의거한 화(禍)의 선포였다. 예수께서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해 같은 책망을 하신 적이 있다(23:33). 이 욕설은 '아브라함의 자손'(9절)으로 자랑하던 그들에게 사단의 도구인 뱀의 후예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한 실체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누가...피하라 하더냐 - 이 말은 '너희가 무슨 근거로 나는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뜻의 질책성 질문이다. 엘리야로 예언된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등장하여 천국을 선포(2절)할 때 이미 '임박한 진노'가 암시되어 있었다(말 3:1, 2;4:1, 5). 그런데 세례 요한의 이 당황스런 질문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단지 임박한 진노를 당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을 자각케 하고 끝내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하려는데 있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노란 말은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감정을 인격화한 표현으로서 이것은 하나의 정태적(靜態的) 감정이 아니라 참으로 무서운 실제적이며 존재론적 극형(極刑)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한편 '임박한 진노'는 이방인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 영접을 준비(회개)하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홀연히 다가오는 종말론적인 것이다(살전 1:10). 물론 이 진노는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훼파됨으로서 1차 성취되었지만 예수의 재림으로 인한 마지막 심판 때에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계6:16, 17).
포이에사테 운 카르폰 맠시온 테스 메타노이아스
개역개정,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새번역,8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우리말성경,8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으라.
가톨릭성경,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영어NIV,8 Produce fruit in keeping with repentance.
영어NASB,8 "Therefore bear fruit in keeping with repentance;
영어MSG,8 It's your life that must change, not your skin!
영어NRSV,8 Bear fruit worthy of repentance.
헬라어신약Stephanos,8 ποιησατε ουν καρπους αξιους της μετανοιας
라틴어Vulgate,8 facite ergo fructum dignum paenitentiae
히브리어Modern,8 לכן עשו פרי הראוי לתשובה׃
성 경: [마3:8]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한 참된 방법이 제시된다. 즉 사단이 그들에게 귀뜸해준 위선적 종교 행위와 같이 단지 형식적인 세례 행위로는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운)외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참된 회개(2절 참조)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란 말이다. 여기서 '합당한'(*, 앝시오스)이란 단어는 '같은 분량의'란 뜻으로서 마음속의 실제 회개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행위(열매)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을 뜻한다.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으로는 많은의로운 일들(righteousness actions)을 행하였으나 그들의 내면은 결코 의롭지 않기(not righteousness) 때문에 하나님의 기준에는 합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사람이건 외견상 의로운 행동들을 할 수 있으나 그에 합당한 열매는 맺지 못한다. 즉 내면이 청결한 사람만이 오직 의로운(올바른, 좋은) 행동들과 하나님께 기억될만한 열매들을 추수할 수 있는 것이다(Bruce). 한편 여기서는 열매가 단수(*, 칼폰)로 묘사되었는데 비해 본절과 평행 구절인 눅 3:8에는 복수(*, 칼푸스)로 표현되었다. 이 차이는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조화가 가능하다. 즉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변화된 삶에 따른 여러 종류의 은혜로 여겨지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될 수 있으며(21:3), 그 열매들의 뿌리는 오직 하나라는 점에서 단수(갈 5:22)로 묘사될 수 있다(Pulpit Commentary).
ㅋ카이 메 돜세테 레게인 엔 헤아우토이스 파테라 에코멘 톤 아브라암 레고 가르 휘민 호티 뒤나타이 호 데오스 에크 톤 리돈 투톤 에게이라이 테크나 토 아브라암
개역개정,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새번역,9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우리말성경,9 너희는 행여나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일으키실 수 있다.
가톨릭성경,9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 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영어NIV,9 And do not think you can say to yourselves, 'We have Abraham as our father.' I tell you that out of these stones God can raise up children for Abraham.
영어NASB,9 and do not suppose that you can say to yourselves, ' We have Abraham for our father'; for I say to you that from these stones God is able to raise up children to Abraham.
영어MSG,9 And don't think you can pull rank by claiming Abraham as father. Being a descendant of Abraham is neither here nor there. Descendants of Abraham are a dime a dozen.
영어NRSV,9 Do not presume to say to yourselves, 'We have Abraham as our ancestor'; for I tell you, God is able from these stones to raise up children to Abraham.
헬라어신약Stephanos,9 και μη δοξητε λεγειν εν εαυτοις πατερα εχομεν τον αβρααμ λεγω γαρ υμιν οτι δυναται ο θεος εκ των λιθων τουτων εγειραι τεκνα τω αβρααμ
라틴어Vulgate,9 et ne velitis dicere intra vos patrem habemus Abraham dico enim vobis quoniam potest Deus de lapidibus istis suscitare filios Abrahae
히브리어Modern,9 ואל תחשבו בלבבכם לאמר אברהם הוא אבינו כי אני אמר לכם כי מן האבנים האלה יכול האלהים להקים בנים לאברהם׃
성 경: [마3:9]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 신구약 중간 시대에 일어난 공적신학(功積神學, merit theology)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사용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용어는 이스라엘의 선민 사상과 족장들, 특히 아브라함의 공적이 그 후손에게 효력을 미친다고 생각케 했다(Carson, Divine Sovereignty, pp.39ff). 유대인트리포(Trypho) 순교자 저스틴(Justine)과의 대화에서 이러한 생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육신을 따라 다윗의 흩어진 자손들에게 저희가 죄인이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패역한다 할지라도 영원한 나라가 주어지리라는 생각에서 당신들도 그것을 준행하였고'라는 내용이 있는 것이다(Alford). 랍비들의 교훈에도 '할례를 받은 자 중에 지옥에 갈 자는 아무도 없다'라는 말이있다. 여기서 '생각지 말라'(*, 메 독세테)는 부정 명령법의 단호한 명령으로써 요한 자신과 그들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커다란 괴리(estrangement)가 존재하고 있음을 명백히 나타낸다(Robertson). 그리고 '속으로'(*, 레게인 엔 헤아우토이스)라는 표현은 그들의 외적 상황(아브라함의 혈통)이 마음의 생각(구원받을 것임)으로 변한 동작을 표시하는데 사용된다(Beck). 그러나 구원의 참된 조건은 육적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고믿음으로 영적 자손이 되는 데에 있는 것이다(롬4장). 이처럼 자신들의 종교적 특권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오해는 사실 단순한 오해가 아니라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을 탐하는 가증한 위선적 범법 행위였다. (1) 하나님이 그들을 선민으로 삼으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구속사 전개의 중심이요 도구로 삼기 위하신 것이었지 그들을 무조건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2) 구약이 한결같이 증언하는 바대로 그들이 선민이 된 것은 결코 무슨 공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또한 그들이 선민의 지위를 유지하여 온 것은 하나님의 끊임없는 용서 덕택이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도 여느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타락과 교만의 역사였음을 보여 준다. (3) 따라서 그들이 선민의 혈통에 끼이게 된 것은 그저 감사할 조건일 따름이지 결코 아무때나 내세우는 특권층 신분증명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돌들로도(*, 에크 톤 리돈투톤) - 이것이 요한의 발 밑에 있던 요단 강변의 돌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고(Carr, Virnect), '아브라함의 자손'과는 무관한 이방인을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다(Chrysostom). 그런데 문맥상 이 견해들을 모두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히브리어나 아람어에서 '자손들'(banim)과 '돌들'(abanim)은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 풍유(諷諭)가 가능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은 '돌'처럼 여기는 아브라함의 '자손'(유대인)들의 악한 교만 때문에 그들이 마찬가지로 '돌'처럼 여기는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들어 약속의 '자손'으로 만드실 것이라는 예언이다. 실로 하나님은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듯이(창 2:7) 당신이 원하시기만하면 발 밑의 돌이나 아니면 유대인들의 발 밑의 돌처럼 천하게 여기는 이방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재창조하실 수 있는 것이다(롬 4:17)여기서 요한은 이방인 역시 선민의 대열(교회)에 들어와 아브라함의 특권과, 품성을 소유할 수 있다는, 그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에데 데 헤 맠시네 프로스 텐 리잔 톤 덴드론 케이타이 판 운 덴드론 메 포이운 카르폰 칼론 엨콮테타이 카이 에이스 퓌르 발레타이
개역개정,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새번역,10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
우리말성경,10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조리 잘려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가톨릭성경,10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영어NIV,10 The ax is already at the root of the trees, and every tree that does not produce good fruit will be cut down and thrown into the fire.
영어NASB,10 "The axe is already laid at the root of the trees; therefore every tree that does not bear good fruit is cut down and thrown into the fire.
영어MSG,10 What counts is your life. Is it green and blossoming? Because if it's deadwood, it goes on the fire.
영어NRSV,10 Even now the ax is lying at the root of the trees; every tree therefore that does not bear good fruit is cut down and thrown into the fire.
헬라어신약Stephanos,10 ηδη δε και η αξινη προς την ριζαν των δενδρων κειται παν ουν δενδρον μη ποιουν καρπον καλον εκκοπτεται και εις πυρ βαλλεται
라틴어Vulgate,10 iam enim securis ad radicem arborum posita est omnis ergo arbor quae non facit fructum bonum exciditur et in ignem mittitur
히브리어Modern,10 וכבר הושם הגרזן על שרש העצים והנה כל עץ אשר איננו עשה פרי טוב יגדע וישלך באש׃
성 경: [마3:10]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이미...놓였으니 - 메시야의 진노가 임박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미', 곧 시간적 여유가 더이상 없는 바로 이 시점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별하는 일이 시작되었다(Broadus). 한편 세례 요한은 '열매 맺음'을 언급할 때에 '타작마당'(12절), '나무와 뿌리, 알곡과 쭉정이, 도끼질과 사르는 불' 등을 연상했을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무리들에 대한 심판을 도끼로 나무를 찍는 일에 비한 사실은 구약의 관용적인 용어(사 10:33, 34;렘 46:22 등)에 준해서 심판을 묘사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이제 천국이 가까이 옴(2절)과 동시에 심판도 가까이 왔다. 이 천국과 심판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역동적인 것으로서 천국을 선포하는 것은, 곧 심판의 도래를 선언하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회개를 선포하는 것이다. 더욱이 세례 요한은 그 도끼가 줄기 혹은 가지에가 아니라 '뿌리에' 놓임으로 심판이 완전할 것임을 명백히 했다. '놓였으니'(*, 케이타이)는 현재 완료형으로 시행할 준비가 끝났음을 암시한다. 더욱이 이 현재적 시상이 '찍어', '던지우리라'는 말에까지 영향을 미침으로서 심판 준비가 다 되어 있음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불에 던지우리라 - 심판은 성경에서 곧잘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는 불로 묘사된다(말 4:1;마 13:40;18:8, 9;막 9:43;요 15:6). 이 심판은 그 나라와 의를 위하여 선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임할 것이다(히 6:8).
에고 멘 휘마스 밮티조 엔 휘다티 에이스 메타노이안 호 데 오피소 무 에르코메노스 이스퀴로테로스 무 에스틴 후 우크 에이미 히카노스 타 휘포데마타 바스타사이 아우토스 휘마스 밮티세이 엔 프뉴마티 하기오 카이 퓌리
개역개정,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새번역,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11 나는 너희가 회개하도록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실 분은 나보다 능력이 더 많으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도 없다. 그분은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가톨릭성경,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침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실 것이다.
영어NIV,11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after me will come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fit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영어NASB,11 "As for me,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He who is coming after me is mightier than I, and I am not fit to remove His sandals;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fire.
영어MSG,11 "I'm baptizing you here in the river, turning your old life in for a kingdom life. The real action comes next: The main character in this drama--compared to him I'm a mere stagehand--will ignite the kingdom life within you, a fire within you, the Holy Spirit within you, changing you from the inside out.
영어NRSV,11 "I baptize you with water for repentance, but one who is more powerful than I is coming after me; I am not worthy to carry his sandals.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fire.
헬라어신약Stephanos,11 εγω μεν βαπτιζω υμας εν υδατι εις μετανοιαν ο δε οπισω μου ερχομενος ισχυροτερος μου εστιν ου ουκ ειμι ικανος τα υποδηματα βαστασαι αυτος υμας βαπτισει εν πνευματι αγιω και πυρι
라틴어Vulgate,11 ego quidem vos baptizo in aqua in paenitentiam qui autem post me venturus est fortior me est cuius non sum dignus calciamenta portare ipse vos baptizabit in Spiritu Sancto et igni
히브리어Modern,11 הן אנכי טובל אתכם במים לתשובה והבא אחרי חזק הוא ממני אשר אינני כדי לשאת נעליו והוא יטבל אתכם ברוח הקדש ובאש׃
성 경: [마3:11]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나는...세례를 주거니와 -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란 말이 막 1:8이나 눅 3:16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은 마태가 요한을 예수보다 하위에 두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취한것으로 보려는 학자도 있으나(Hill), 막 1:4과 눅 3:3에서도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한 사실과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에 이말은 단지 '나는 회개와 관련한 세례를 준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즉 그의 '물로'(*, 엔 휘다티) 세례를 베푸는 행위는 예수의 속죄사역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서 예수께서 베푸신'성령과 불'의 세례가 없다면 물 속에 침수하는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례 요한의 사역이 근본적으로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는 선구자적인 사역에 불과한 것임을 요한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내 뒤에 오시는 이 - '내 뒤에'(*, 오피소 무)는 시간적 순서로 '후에'란 의미이다. 요한은 이 표현에서 자신과 메시야의 사역적, 개인적 관계를 서술한다. '오시는 이'(*, 호 엘코메노스)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에 대한 정치적인 색채를 피한 칭호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메시야에 대한 잘 알려진 관용적 표현으로써 '실로가 오시기까지'(창 49:10)와 같은 구약의 진술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즉 본 구절은 요한이 담대하게 사역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로 인식되는 것을(눅 3:15) 스스로 불식시키기 위하여 자신은 단지 메시야의 전구(前驅)임을 명백히 밝힌 표현이다.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 '뒤에 오는 이'가 능력이 더 많고 귀하다는 것은 정상적인 경우가 아니다. 왜냐하면 보통 덜 귀한 사람이나 제자가 뒤를 따르는 것이 상례(常例)였기 때문이다(16:24). 특히 '능력있다'(*, 이스퀴로스)라는 말은 후천적인 지위나 능력이 아닌 자생적 권위와 능력이 있다는 뜻으로 하나님께 적용하고 있으며(렘 32:18;사 40:10;단 9:4), '능력이 많으시니'(*, 이스퀴로테로스)는 능력의 자의적(自意的)이고 인격적인 소유를 말한다. 더욱이 선지자보다 나은 자인 세례 요한이 노예들이나 하는 일인 신을 들고 다니는 일조차 감당치못할 그러한 분은 누구인가. 이러한 표현은 세례 요한의 지극한 겸손이지만 과장된 겸손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오시는 이'는 바로 '말씀'(*, 로고스)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의 신을 들기도 - 고대 중근동 지방에서는 아주 천한 신분의 노예가 자기 주인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고, 제자들이 스승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Edersheim). 그런데 요한은 자신이 그러한 천한 일 조차도 수행할 수 없는 비천한 존재임을 극구 시인하고 있다.
감당치못하겠노라 - 이는 자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도덕적, 영적으로 그 일을 수행할 만한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실로 요한의 이 고백은 예수의 충만한 신성(神性)을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가능했다(사 6:5).
그는 성령과 불로...세례를 주싶 것이요 - 마태와 누가는 공히 '성령 세례'란 말에 '불'이란 단어를 추가하고 있다(눅 3:16). 그런데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1) 신자에 대한 구원 이후에 나타나는 불신자에의 심판이다. 즉 '성령'(*, 프뉴마)을 '바람'으로 해석하여 신자들이 성령의 거룩한 바람에 불려가고 그나머지는 심판의 불에 태워진다는 이동적 의미의 해석이다(Bruce). (2) 성령은 의인에게 임하는 성령의 은사(恩賜)요, 불은 악인 위에 내리는 맹렬한 심판이다. 그러나 위의 견해들보다 가장 당한 것은 두 단어를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성령의 역사로 보는 것이다. 즉 원문에서 '...으로'라는 한 개의 전치사인 '엔'(*)은 성령과 불을 모두 받음으로써 이 둘을 한 개념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불'은 성령의 사역과 마찬가지로 연단하는 자의 불로(말 3:2, 3), 정결케 하는 불로(사 6:6;슥 13:9;벧전 1:7), 또는 성령 강림의 상징으로(행 2:3) 나타나기 때문에 두 단어는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는 상이한 표현이라 하겠다. 한편 여기서 물 세례가 눈에 보이는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하는 신앙 고백적, 공식적 의식이라면 성령 세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씻음과 연합에 대한 하나님의 유효한 인정의 결과이다. 한편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은 구약적인 배경을 가진 것으로서(겔 36:25-27;39:29;욜 2:28) 신약 성경에만 사용되는 특별한 용어가 아니다.
후 토 프튀온 엔 테 케이리 아우투 카이 디아카다리에이 텐 할로나 아우투 카이 쉬낰세이 톤 시톤 아우투 에이스 텐 아포데켄 토 데 아퀴론 카타카우세이 퓌리 아스베스토
개역개정,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새번역,12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있으니,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우리말성경,12 그분이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깨끗이 해 좋은 곡식은 모아 창고에 두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가톨릭성경,12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영어NIV,12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gathering his wheat into the barn and burning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영어NASB,12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thoroughly clear His threshing floor; and He will gather His wheat into the barn, but He will burn up the chaff with unquenchable fire."
영어MSG,12 He's going to clean house--make a clean sweep of your lives. He'll place everything true in its proper place before God; everything false he'll put out with the trash to be burned."
영어NRSV,12 His winnowing fork is in his hand, and he will clear his threshing floor and will gather his wheat into the granary; but the chaff he will burn with unquenchable fire."
헬라어신약Stephanos,12 ου το πτυον εν τη χειρι αυτου και διακαθαριει την αλωνα αυτου και συναξει τον σιτον αυτου εις την αποθηκην το δε αχυρον κατακαυσει πυρι ασβεστω
라틴어Vulgate,12 cuius ventilabrum in manu sua et permundabit aream suam et congregabit triticum suum in horreum paleas autem conburet igni inextinguibili
히브리어Modern,12 אשר בידו המזרה וזרה את גרנו ואסף את דגנו אל אוצרו ואת המץ ישרפנו באש אשר לא תכבה׃
성 경: [마3:12]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요한의 선포]
손에 키틀 들고...타작 마당을 - 먼저 '키'는 풍력(風力)을 이용하여 곡식의 쭉정이를 분리해 내는 일종의 소쿠리이다. 한편 '손에'(*, 토 프투온) 든 키는 10절의 '놓여있는' 도끼보다 더욱 강렬한 심판의 상징이다. 한국과 유사한 유대 농촌을 연상시키는 이런 심판의 비유는 구약에서도 자주 보인다(4:1). 키를 '손에 든' 메시야는 '타작 마당'(시 1:4;사 5:24;단 2:35;호 13:3)으로 비유된 자신의 세상에서 신자로 비유된 알곡과 불신자로 비유된 쭉정이를 철저히 나누실 것이며, 또한 그각각을 심판 내지는 구원이라는 하나의 단위로('모아') 취급할 것이다. 한편 '곡간'은 중근동지방에서 주로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지하 또는 토굴에 설치해 두었었다. 물론 본문에서는 구원받은 자들의 영원한 피난처, 곧 어떤 악한 세력에도 노출되지 않는 안전한 처소로 이해할 수 있다(시 71:7). 계속해서 '꺼지지 않는 불'은 어떤 한 시점에 이르러 소멸되는 불이 아니라 어떠한 결핍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화력을 지닌 불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벌의 영속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종말론적인 심판과(사 34:10;66:24;렘 7:20), 지옥을 의미하기도 한다(5:22). 현실에 반드시 존재할 이 무서운 '불'에 알곡 아닌 모든 쭉정이를 남김없이 태워 자신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실 것이다. 한편 '정하게 하사'(*, 디아카다리에이)의 '디아'(*)와 '태우시리아라'(*, 카타카우세이)의 '카타'(*)는 완료형이며 종료(終了)의 뜻을 가지고 있어 악한 자를 멸절시키는 최종 심판이 철저하고 완전한 것임을 강조한다.
토테 파라기네타이 호 예수스 아포 테스 갈릴라이아스 에피 톤 요르다넨 프로스 톤 요안넨 투 밮티스데나이 휲 아우투
개역개정,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새번역,13 그 때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셨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13 그때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에서 요단 강으로 오셨습니다.
가톨릭성경,1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영어NIV,13 Then Jesus came from Galilee to the Jordan to be baptized by John.
영어NASB,13 Then Jesus arrived from Galilee at the Jordan coming to John, to be baptized by him.
영어MSG,13 Jesus then appeared, arriving at the Jordan River from Galilee. He wanted John to baptize him.
영어NRSV,13 Then Jesus came from Galilee to John at the Jordan, to be baptized by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3 τοτε παραγινεται ο ιησους απο της γαλιλαιας επι τον ιορδανην προς τον ιωαννην του βαπτισθηναι υπ αυτου
라틴어Vulgate,13 tunc venit Iesus a Galilaea in Iordanen ad Iohannem ut baptizaretur ab eo
히브리어Modern,13 ויבא ישוע מן הגליל הירדנה אל יוחנן להטבל על ידו׃
성 경: [마3:13]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이 때에(*, 토테) - 세례 요한의 등장(1절)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현재 접속사를 사용하여 전절과 적접 연결된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이 절정에 달해 있을 바로 그때에 예수께서 오셨다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 이 장면의 평행 구절인 막 1:9에는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본서 2:23의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라는 말과 연결시켜 볼 때 예수께서 애굽에서 귀국하신 이래 계속해서 나사렛 동네에 거주하고 계셨음을 알 수있다. 한편 요단강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 '톤'(*)이 제시된 것은 그 당시 세례 요한의 세례 사역지로 잘 알려진 요단강의 바로 그 지점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행위에 대해서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메시야적 소명을 인식하고 있었으며(눅 2:49), 요한이 메시야를 위한 자신의 선구자적 소명을 자각하고 있듯이(11절) 예수께서도 세례 요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죄에 대해서 무관하신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가 이다. 이는 예수께서 개인적인 죄 의식을 느끼셨기 때문이(Bauer, Strauss) 아니고, 요한의 세례를 보증하기 위한 것도(Kuinoel, Kern) 아니고, 그가 율법에 복종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Hoffmann, Krabbe, Osiander)도 아니다. 예수의 수세(受洗)의 참 뜻은 말씀에 표현한 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요(15절;신 6:25), 그가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죄를 담당하시기(사 53:4-6) 위함이다.
호 데 요안네스 디에콜뤼엔 아우톤 레곤 에고 크레이안 에코 휘포 수 밮티스데나이 카이 쉬 에르케 프로스 메
개역개정,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새번역,14 그러나 요한은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말렸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14 그러나 요한은 이를 말리면서 예수께 말했습니다. “제가 오히려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게 오시다니요!”
가톨릭성경,14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영어NIV,14 But John tried to deter him, saying, "I need to be baptized by you, and do you come to me?"
영어NASB,14 But John tried to prevent Him, saying, "I have need to be baptized by You, and do You come to me?"
영어MSG,14 John objected, "I'm the one who needs to be baptized, not you!"
영어NRSV,14 John would have prevented him, saying, "I need to be baptized by you, and do you come to me?"
헬라어신약Stephanos,14 ο δε ιωαννης διεκωλυεν αυτον λεγων εγω χρειαν εχω υπο σου βαπτισθηναι και συ ερχη προς με
라틴어Vulgate,14 Iohannes autem prohibebat eum dicens ego a te debeo baptizari et tu venis ad me
히브리어Modern,14 ויוחנן חשך אותו לאמר אני צריך להטבל על ידך ואתה בא אלי׃
성 경: [마3:14]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말려(*, 디에코뤼엔) - 미완료 과거형으로 그저 한번 '말려보는'(*, 코뤼오) 정도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집요하게 만류했음을 암시한다. 요한은 예수의 종교적, 윤리적인 우월성과 순결한 자태에 강렬한 인상을 받고 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지극히 비천함을 느꼈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세례 요한은 30년전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했던 일(눅 1:39-45) 그리고 예수가 자기의 출생 사건보다 더 놀라운 출생 사건을 통해 태어났으며, 어린아이로서는 경이로운 성경 지식을 가졌었다는 사실(눅 2:41-52)을 알고 있었올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직.간접의 지식보다 자신 앞에 서신 예수를 직접 대면하고나서 그의 탁월한 성결성과 영적 심화력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한은 성령의 하강(descent)하시는 신적 표적이 있기전까지는 아직 예수의 메시야성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요 1:31-32의 평행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세례 받는 것을 만류한 이유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1) 요한은 예수가 메시야이신 것을 알아보고 그에게서 성령과 불로 세례 받기를 원하였다. 이 견해는 마태복음의 주제가 성령이 아니고 의(義)란 점에서 동감하기 어렵다. 예수의 답변을 보더라도(15절) '의'가 강조되고 있다. 더욱이 마태는 예수가 누구에게나 성령과 불의 세례를 주는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을 맞춰 기록하고 있는것이다. 사실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한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행 2장) 이후였기 때문에 마태는 성령의 세례가 주어진 것은 그가 기록하려는 시대보다 뒤의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또한 11:2-12에서는 세례 준 후에도 요한이 예수를 완전히 '알지' 못하였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2) 요한의 세례는 종말론적 의미만 가진 것이 아니라, 죄의 고백과 회개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은 겸손한 인물로서 예수가자기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는 알고 있었으나 예수에게는 회개해야 할 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예수가 자기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실로 마태는 요한이 언제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깨달았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마태는 예수의 무죄함과 하나님 아버지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 세례 요한의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요한이 흠(欠)이 있는 자신으로서는 순결 무흠한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었다.
아포크리데이스 데 호 예수스 에이펜 프로스 아우톤 아페스 아르티 후토스 가르 프레폰 에스틴 헤민 플레로사이 파산 디카이오쉬넨 토테 아피에신 아우톤
개역개정,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새번역,15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그제서야 요한이 허락하였다.
우리말성경,15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 그러자 요한은 그대로 따랐습니다.
가톨릭성경,15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영어NIV,15 Jesus replied, "Let it be so now; it is proper for us to do this to fulfill all righteousness." Then John consented.
영어NASB,15 But Jesus answering said to him, "Permit it at this time; for in this way it is fitting for us to fulfill all righteousness." Then he permitted Him.
영어MSG,15 But Jesus insisted. "Do it. God's work, putting things right all these centuries, is coming together right now in this baptism." So John did it.
영어NRSV,15 But Jesus answered him, "Let it be so now; for it is proper for us in this way to fulfill all righteousness." Then he consented.
헬라어신약Stephanos,15 αποκριθεις δε ο ιησους ειπεν προς αυτον αφες αρτι ουτως γαρ πρεπον εστιν ημιν πληρωσαι πασαν δικαιοσυνην τοτε αφιησι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15 respondens autem Iesus dixit ei sine modo sic enim decet nos implere omnem iustitiam tunc dimisit eum
히브리어Modern,15 ויען ישוע ויאמר אליו הניחה לי כי כן נאוה לנו למלא כל הצדקה וינח לו׃
성 경: [마3:15]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이제 허락하라 - 본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최초의 말씀이다. 여기서 '이제'(*, 알티)라는 말은 특별한 시점을 암시하고 있다. 즉 예수는 요한의 반대(14절)가 원칙적으로 옳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제'(지금), 즉 구속사 중에서 지금 이 시점에서는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예수가 종의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 보여야 했고, 그분이 스스로 벡성들과 같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셔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예수께서 수세(受洗) 전부터 자신의 메시야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이다. 여하튼 메시야이신 주님만이 이러한 명령을 세례 요한에게 할 수있었다. 실로 요한은 예수에게 세례를 베풂으로 그리스도의 영적 아버지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위에 자신을 복종시킨 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 예수께서 '나'라는 1인칭 단수 명사를 쓰시지 않고 '우리'라는 복수 형태를 취하신 것은 예수와 요한, 곧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모든 의를 이루어야'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이어지는 '이와 같이 하여'란 말은 단순히 세례와 같은 어떤 절차를 강조하는 말이라기 보다 모든 의를 이루기위한 순종의 자세, 또는 순종의 마음을 강조한 말이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 여기에 대한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1) 예수의 세례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의'를 성취하는 것이다(O. Cullmann). 이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사 53:13-53:12)에도 나타나듯이 예수가 당할 죽음의 세례를 예시한 것이다. 그러나 '의'를 예수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2) 예수는 하나님의 명령('모든 의')을 모두 순종('이루다')해야 했으며 세례도 그 명령 중 하나이다. 이 견해는 세례가 '의'가 아니라 '회개와 죄의 고백'의 관계에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는 부적당하다. 가장 적당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3)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뜻('모든 의')이며, 예수께서 요한과 함께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그의 의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사적 생애를 마감하고 메시야 직무를 수행하는 공생애로 들어가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Bruce, Erdman). 더욱이 예수의 수세의 주제는 모든 죄인을 대신한 고난이다. 사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적 메시지에 따르면 예수는 고난받는 종(사 42:1-9;49:1-6; 50:4-9;52:13-53:12)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은 세례를 베푼 후 즉시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 불렀고, 예수 자신도 자신의 대속적 고난을 세례로 표현했다(눅 12:50).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 요한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는 예수의 설명을 듣고 난 후 무흠한 신성(神性)의 소유자이시지만, 그분 곧 메시야에게 합당한 세례를 베푼다. 이로써 예수와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동역자의 선상에 서게 된다. 한편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데는 몇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이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시기 위해서였다. 즉 공생애에 앞서 예수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직의 자격과 능력이 구비되었으나 인간적 수준에서 또 인간들의 이해를 위해서도 교회의 선한 전승(inheritance)에 순종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이런 예수의 자세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16절의 성령 강림과 17절의 천성(天聲)을 통해 예수가 모든 의를 갖추신 자임을 공표(公表)하셨다. (2) 이를 통해 세례 요한은 메시야가 도래했음과 메시야의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공적으로 선언했다(요 1:31-34). (3) 회개, 세례가 필요없었던 예수는 수세를 통해 죄로 타락된 인간과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켰고 우리를 대신하는 일을 시작하셨다(고후 5:21). (4)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를 믿는 자에게 보이신 수세의 모범이었다.
밮티스데이스 데 호 예수스 유뒤스 아네베 아포 투 휘다토스 카이 이두 에네오크데산 아우토 호이 우라노이 카이 에이덴 토 프뉴마 투 데우 카타바이논 호세이 페리스테란 카이 에르코메논 엪 아우톤
개역개정,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새번역,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 때에 하늘이 열렸다. 그는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와 자기 위에 오는 것을 보셨다. / ㉨또는 '침례'
우리말성경,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속에서 올라오셨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자신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다.
가톨릭성경,16 예수님께서는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영어NIV,16 As soon as Jesus was baptized, he went up out of the water. At that moment heaven was opened,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lighting on him.
영어NASB,16 After being baptized, Jesus came up immediately from the water; and behold, the heavens were opened,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as a dove and lighting on Him,
영어MSG,16 The moment Jesus came up out of the baptismal waters, the skies opened up and he saw God's Spirit--it looked like a dove--descending and landing on him.
영어NRSV,16 And when Jesus had been baptized, just as he came up from the water, suddenly the heavens were opened to him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alighting on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6 και βαπτισθεις ο ιησους ανεβη ευθυς απο του υδατος και ιδου ανεωχθησαν αυτω οι ουρανοι και ειδεν το πνευμα του θεου καταβαινον ωσει περιστεραν και ερχομενον επ αυτον
라틴어Vulgate,16 baptizatus autem confestim ascendit de aqua et ecce aperti sunt ei caeli et vidit Spiritum Dei descendentem sicut columbam venientem super se
히브리어Modern,16 ויהי כאשר נטבל ישוע וימהר לעלות מן המים והנה נפתחו לו השמים וירא את רוח אלהים יורדת כיונה ונחה עליו׃
성 경: [마3:16]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예수께서...곧...올라오실세 - '곧'(*, 유뒤스)은 '올라오실세'(*, 아네베)에 속하는 말로서 예수가 세례받은 후 곧바로 물에서 나왔다는 사실 뿐 아니라 성령의 증거도 역시 즉각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그런 점에서 이 말은 성령이 임하실 때에는 그가 물 속에 있지 않고 강둑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물에서 올라 오실세'란 말을 근거로 예수의 침례설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세례를 준다'는 뜻의 '배티조'(*)란 단어는 원래 '잠그다'의 의미뿐 아니라 '물로 무엇을 깨끗이 씻는다'는 뜻도 지닌다(막 7:4;딛 3:5). 그리고 관용적으로 어떤 것에 충만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적 접근을 통해 예수의 수세를 침례 또는 세례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그 자체가 지니는 영적 의미와 거룩한 정신을 외면한 채 세례냐 침례냐의 어떤 외적 의식만을 절대적 규준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죄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세례의 참의미를 무시하는 형식주의적 독선이 될 수 있다. 한편 '올라 오실새'는 비둘기같이 '내려'(*, 에르코메논)란 말과 연결되어 마치 땅과 하늘이 화답하는 것같은 미묘한 대조를 이룬다.
하늘이 열리고(*, 아네와데산 아우토) - 이 구절은 구약성경의 환상들(사 64:1;겔 1:1;행 7:56;계 4:1;19:11)을 연상시킨다. 고대 신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표현은 '모든 의를 이루신' 예수께 대한 하나님의 비상(非常)하신 역사 개입이지 예수의 한낱 환상이 아니다. 한편 어떤 사본들(에브라임, 베자)에는 이 부분이 '하늘이 그에게 열리고'로 표현되어 하늘이 예수에게만 국한되어 열렸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즉 다른 그 누구도 아무런 경험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 이때 예수의 선지자였던 요한은 하늘의 열림을 직접 목격했었을 것이다(Olshausen). 그리고 대중들도 하늘의 열림과 동시에 하늘로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인류의 조상이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창 3:24) 극히 부분적으로만 열렸던 하늘이 예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열려 하나의 새릅고 신비한 교제(交際)가 가능케 된 사실을 강조해주고 있다.
비둘기같이(*, 호세이 페리스테란) - 여기 사용된 직유법은 성령과 비둘기를 명백히 관련시킨다. 즉 이 말은 성령 강림의 방식이 비둘기 같다는 뜻도 되고, 성령이 비둘기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는 뜻일수도 있다. 누가복음에는 후자의 견해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형체로'(*, 소마티코 에이데이)가 첨가되어 있다. 한편 성령에 관하여 이와 같은 유추적 표현이 나오는 구약성경은 창 1:2 뿐이다. 탈무드(Talmud)에는 창1:2이 '하나님의 신은 비둘기같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로 해석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어느 합리주의자는 비둘기 한마리가 예수의 머리 위에 날개치고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이것이 환상적 장면이든 아니든 분명 성령이 신인(God-Man)이신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도록 돕기 위해 예수 위에 임하신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성령의 적극적이고도 완전한 후원을 받으신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 웨스트코트(Westcott)는 '예수의 참 인간으로써 합당한 은사인 성령을 받으심으로 공생애의 첫 발을 내디디셨다. 주관적으로 볼 때 신인을 연합시킨 성령이 육화(肉化)하신 말씀(예수) 위에 임하셨고,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계시되셨다'고 설명하고 있다(Pulpit Commentary). 한편 성경 문학적으로 비둘기는 성령의 교통하는 힘의 온유(11:29)와 순결(1:16)과 생명의 충만(창 1:2;요 7:37-39)을 상징하는데, 이것들은 예수의 품성과 사역의 특질과 좋은 비교가 되고 있다.
자기 위에 임하심 - 예수께 성령이 임하심은 시 45:7에 예언된 관유(灌油, 기름부음)의 성취였다. 실로 율법에 있어서도 흠 잡을 것이 없는 예수께서는 율법에 정한 나이 30세(민 4:3) 때에 공개적 절차를 통해 공식적인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가 되심으로 우리의 선지자, 대제사장, 왕으로서 취임하셨던 것이다(Luther). 여기에서 물과 불과 성령의 삼각 세례가 완성되었다(Alford).
카이 이두 포네 에크 톤 우라논 레구사 후토스 에스틴 호 휘오스 무 호 아가페토스 엔 호 유도케사
개역개정,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새번역,17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하였다. / ㉩또는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자다'
우리말성경,17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한다.”
가톨릭성경,17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영어NIV,17 And a voice from heaven said, "This is my Son, whom I love; with him I am well pleased."
영어NASB,17 and behold, a voice out of the heavens said,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pleased."
영어MSG,17 And along with the Spirit, a voice: "This is my Son, chosen and marked by my love, delight of my life."
영어NRSV,17 And a voice from heaven said, "This is my Son, the Beloved, with whom I am well pleased."
헬라어신약Stephanos,17 και ιδου φωνη εκ των ουρανων λεγουσα ουτος εστιν ο υιος μου ο αγαπητος εν ω ευδοκησα
라틴어Vulgate,17 et ecce vox de caelis dicens hic est Filius meus dilectus in quo mihi conplacui
히브리어Modern,17 והנה קול מן השמים אומר זה בני ידידי אשר רצתה נפשי בו׃
성 경: [마3:17]
주제1: [메시야를 위한 두 증언]
주제2: [세례 받으신 예수]
헬라어 원문에는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감탄사 '보라'(*, 이두)가 문두에 언급되어 있다. 이 '이두'는 어떤 사건의 중요성.급작성을 강조하거나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 본문에서는 위의 두기능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하늘로서 소리 - 본문의 '하늘로부터 들린 소리'에 관해 어떤 학자들은 랍비 문학과 연관시켜 해석하려 한다. 즉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통로였던 영(靈)과 예언자가 잠잠해진 400년동안의 침묵기에 하나님의 영의 소리를 반영해 전달해 주는 수단을 통털어 히브리어로 '바트콜'(*)이라 불렀는데, 번역하면 '소리의 딸'이란 의미이다. 물론 그 수단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여 본문을 단순한 '바트 콜', 즉 지금까지 있어 왔던 평범한 하늘의 계시정도로만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문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이보다 더 강력하다. 실로 이 '소리'(*, 포네)는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침묵을 깨뜨리시고 다시 자신을 인간에게 알리시는 계시이다. 결국 이것은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분명한 징조요, 그것을 공적으로 입증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소리였던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이 말은 소위 '고난받는 종의 노래'라 일컬어지는 사 42:1을 반영하고 있으며, '너는 내 아들이라'고 노래한 시 2:7의 변형구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의 사역이 시작되는 시점에 들려진 하늘의 소리는, 곧 그를 '고난받는 종'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런데 여기 '이는 내 아들이요'라는 말은 예수 주위에 있는 어떤 다른 사람도 하늘의 증거를 들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아마도 많은 무리가 있었는지 모른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태의 주관심사가 아니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내 아들'로 부르심으로 2:15을 확인하고 있고 다음 장에서 사단에 의해 즉시 사용되게 된다(4:3, 6). 이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아들로 공적 인준(認准)을 받고 신격(神格)의 제 2위이신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확증된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 성령, 성삼위의 거룩한 해후(邂逅)가 이루어지며, 성부의 음성은 변화산상(17:5)에서와 수난기간(요 12:28)에 다시 들린다. 한편 영지주의자들(Gnostics)은 예수가 세례를 받고 성령 강림이 있은 후 위와같은 하나님의 공적인 인준이 있기 전까지 육체에 속한 한 자연인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리고예수가 하나님의 인준으로 신적 본질을 가지게 되었지만 십자가 상에서 성부 하나님의 버리심을 고백(27:46)할 때에 그 신성이 다시 벗겨졌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요일 4:2,3). 그러나 이는 예수의 영원 현존성과 영원하신 신성을 간과한 이단적 견해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아들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심령을 반영한 용어인 '사랑하는'(*, 아가페토스)이란 말은 질적인 측면을 강조한 '유일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기뻐하는'(*, 유도케사)이 초시간적인 부정과거인 점으로 보아 이 '사랑하는'이란 용어는 심정적인 측면 뿐 아니라 '선택'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직역하면 '내가 그를 선택함으로 인해 기뻐하였던 자'이다. 이는 메시야를 시간이 있기 전, 곧 영원 전에 선택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결국 예수의 영원성을 강력히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요단강에 성육신(Incarnation)하여 우뚝 서 계신 아들의 영원한 신적 선택의 위대한 역사적 사실이 성부 하나님에 의해 선포된 것이다. 정녕 아들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될 때 아버지께서는 감추어진 방법으로 그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고, 백성들의 대표자이며, 고난받는 종으로 동시에 나타내 보여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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