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portion)
한계를 정하여 갈라놓은 지역으로, 지리적인 경계선이나 영토 전체를 명시하는 데 사용된다. 한 나라에 속한 땅의 경계나 그 나라 안의 세분된 땅의 경계, 또는 개인이나 집단이 가진 소유의 최대한의 확장 범위를 의미하기도 한다(창36:43;겔45:1,6).
구원/-하다(salvation)
1. 구약적 의미. 구약성경에서 구원을 가리키는 핵심적인 히브리어 단어는 '야샤'이다. 이 단어의 기본적 의미는 '넓은 환경으로 데려다 놓는다'(참고. 시18:36;66:12)는 것이며, 처음부터 이 단어는 '제약에서 자유함'과 그 수단을 뜻하는 은유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제한하고 압박하는 요인들로부터 구함을 받는 것을 뜻한다. 이 단어는 병(사38:20), 환난(렘30:7), 혹은 원수들(삼하3:18;시44:7)로부터 구함을 받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이런 경우 거의 압도적으로 구해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의 양떼(겔34:22)와 그의 백성(호1:7)을 구해 주시는데, 이들을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며(호13:10-14) 그 외에 다른 구원자는 없다(사43:11). 그는 열조를 애굽에서(시106:7-10), 그 자손들을 바벨론에서(렘30:10) 구해 주셨다. 그는 그의 백성의 피난처요 구원자이시다(삼하22:3). 그는 달리 도움을 받을 길 없는 가난하고 곤고한 자를 구해주신다(욥5:15;시34:6).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14:13)는 모세의 말은 구약의 핵심 사상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며(호13:4), '하나님'과 '구주'(구원자)는 구약에서 실질적으로 같은 말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한 범례는 출애굽이었다(출12:40-14:31). 홍해에서 하나님의 간섭을 통해 이루어졌던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구원은 하나님의 본질과 활동에 관한 그 이후의 이스라엘의 모든 성찰을 좌우하였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역사 드라마에 대한 그 이후의 모든 해석의 틀이 되었다. 출애굽은 예배 속에서 찬양되었고(시66:1-7), 이야기도 전해졌으며(신6:20-24), 의식 속에서 재연되었다(출13:3-16). 따라서 출애굽으로부터 나타나게 된 구원관은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 행위의 차원으로 지울 수 없게 각인되었다.
이 의미심장한 요소는 다시 구원 사상에 대한 구약의 더 발전된 주요한 공헌인 종말론의 기초를 놓았다. 과거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경험은 그 신앙을 그의 미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을 기대하는 데로 투사하게 하였다. 여호와는 모든 민족의 주요, 온땅을 창조하고 지배하시는 자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또한 그는 의롭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장차 그는 그의 원수들에게 완전한 승리를 거두시고 그의 백성을 모든 질곡에서 구해 주실 것이다(신9:4-6;사43:11-21;겔36:22-23). 보다 초기에 이 구원의 희망은 이스라엘의 신원을 위한 직접적인 역사적 간섭에 보다 집중되고 있다(참고. 창49장;신33장). 그러나 선지자의 시대에는 이 희망이 구원과 함께 심판이 이루어질 '주의 날'로 표현된다(사24:19-20;25:6-8;욕2:1-2,28-32;암5:18-19;9:11-12). 바벨론 포로의 경험은 이 희망을 새로운 출애굽으로 표현하기 위한 구체적 이미지들과 배경을 제공해 주었다(사43:14-19;48:20-21;51:9-10. 참고. 렘31:31-34;겔37:21-28;슥8:7-13). 그러나 그 회복의 결과가 제한적으로 실망스럽게 이루어지자 이 희망은 다시 미래로 투영되어 초월적이며 종말론적인 것으로 변화되었다(사64:1-2;65:17-18;66:22). 곧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의로운 성품이 만민 가운데 드러날 새로운 세계가 현 시대의 종말에 출현할 것을 희망하게 되었다.
우리는 또한 70인역 성경이 '소테리아'로 번역하고 있는 다른 관련된 단어들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 히브리어 어근 '가알'은 타인의 손에 넘어간 재산을 회복하는 것, 흔히 돈을 주고 '되사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되사는 혹은 구해 주는 사람을 고엘이라 부른다(참고. 레25:26,32;룻4:4,6).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고엘이시다(출6:6;시77:14-15). 이 용법은 이사야 후반부터 '야샤'의 파생명사인 '예샤'와 동의어이다(사41:14;44:6;47:4). 이 단어들은 이사야 43:1-2;60:16;63:9에 병행적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은 이 구원을 수행할 특수한 인물 메시야-종의 관점으로 확대, 심화되고 여호와는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 구원의 임무를 띤 특수한 인물들을 고용하실 수 있지만(창45:7;삿3:9,15;왕하13:5;느9:27) 오직 그만이 그의 백성의 구원자이시다(사43:11;45:21;호13:4). 그러나 이 일반적 주장은 구약에 나타난 구원 희망의 발전의 맥락에서 수정이 요구된다. 종의 노래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도덕적 구원이 인격적으로 재현된 것을 볼 수는 있으나 이 종이 직접적으로 구원자로 언급되지는 않고 있다. 여기에는 집단적 이미지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으나 종의 사역의 인격화는 본문에서 분명히 나타나며 신약 성취의 관점에서 보면 더 이상의 변호가 필요하지 않다. 이사야 49:1-6의 종의 노래에서 종은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 도구로 나타난다. 마지막 종의 노래(사52:13-53:12)에서는 구원 사상이 죄와 죄의 결과들로부터 구해낸다는 의미로 도처에 나타난다. 이리하여 구약은 마침내 하나님이 그의 구원자-메시야를 통하여 그의 백성을 구해내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2. 신약적 의미. 신약에 오면 도덕적, 영적 구원이란 '종교적' 용법이 거의 압도적으로 나타난다. 구원의 비종교적 용법은 위급한 상황에서 생명을 구해낸다는 것에 거의 제한되고 있다(막15:30;행27:20,31;히5:7).
(1) 공관복음. 구원이란 말을 예수가 언급한 경우는 단 한번 뿐이다(눅19:9). 여기서 이 말은 삭개오를 용서하며 구원을 가져다 준 예수 자신을 가리킬 수도 있고, 삭개오의 변화된 행동으로 증거된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구하다'를 비롯한 관련된 말들을 사용하실 때에는 첫째, 그의 오신 목적을 나타내고(암시적으로, 막3:4; 직접적으로, 눅4:18), 둘째,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을 나타내기(마10:22;막8:35;눅7:50;8:12;13:24) 위해서이며,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볼 때 구원은 통회하는 마음, 어린아이와 같은 수용적 의존성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할 것 - 이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충족시키기 어려운 조건들이다 - 을 요구하는 것이 드러난다. 우리 주님의 구원 활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증언은 간접적으로도(막15:31) 직접적으로도 나타난다(마8:17). 또한 그의 이름에 대한 증언도 나타난다(마1:21,23). 이 모든 다양한 용법들은 구원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특히 그의 죽음에 현존하였음을 시사한다.
(2) 요한복음. 요한복음은 구원의 서로 다른 여러 측면들을 제시해 준다. 요한복음 1:12-13에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다. 요한복음 2:5에서는 그리스도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행함으로써 어려운 상황이 타개되며, 3:5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수적이다. 그러나 요한복음 3:14,17은 이 새 생명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믿지 않으면 불가능하며,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임을(3:18) 분명히 한다. 요한복음 4:22에서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나며 -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전해진 계시에 의해 - 구원은 인간을 내면적으로 변화시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준비시키는 은사이다.
요한복음 5:14에 의하면 온전하게 된 사람은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5:39에서 성경은 생명 곧 구원이 아들에게 있음을 증거한다. 생명과 심판은 아들에게 맡겨져 있으며, 5:24에서 믿는 자들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있다. 한편 6:35에서 예수는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선언한다. 영생의 말씀은 오직 그에게 있다(6:68). 물은 예수가 영광을 받으신 후에 오실 성령의 상징이다(요7:38,39).
요한복음 8:12에서 요한은 빛의 인도를 받는 것이 안전함을 보여주며, 32,36절에서는 진리를 통한 자유가 아들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9:25,37,39에서 볼 때 구원은 영적으로 눈을 뜨는 것이며, 10:10에 의하면 양떼가 안전하고 풍성한 생명을 얻는 길은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11:25-26에서 부활과 생명은 믿는 자에게 속한 것이다. 11:50(참고. 18:14)에는 그의 죽음의 구속적 의도가 부지중에 서술되어 있다. 죽음에서 들린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끄시며(12:32), 그가 처음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13:10) 구원을 뜻한다('온 몸이 깨끗하니라'). 한편 14:6에서 그는 아버지께로 가는 진리와 생명의 길이며, 포도나무 되신 그분 안에 있는 것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비결이다(15:5). 16:7-15에서 성령이 그를 위하여 구원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구원의 실현을 준비해 주실 것이다. 17:2-3,12에서 그는 참 하나님과 그를 아는 자들을 안전하게 지키신다. 19:30에서 구원은 완성되며, 20:21-23에서 그의 성령의 선물에는 평강과 용서의 말씀이 동반된다 21:15-18에서 그의 치유하시는 사랑이 그의 제자에게 사랑을 고취하며 재차 섬김을 당부하신다.
(3) 사도행전. 사도행전은 구원의 선포가 미친 영향을 추적한다(참고. 16:17). 제일 먼저, '이 패역한 세대에서'(2:40) 회개(회개 자체가 구원의 한 선물이며 구원의 일부이다, 11:18)와 죄사함과 성령을 받음으로 구원을 받을 것을 권면당하는 무리들에게 미친 영향을, 두번째로, 자신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을 모르다가 우리가 구원을 받을 오직 한 이름인 예수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는 한 병자에게 미친 영향을(3:6), 세번째로,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16:30)하고 물었던 간수의 집에 미친 영향을 추적한다.
(4) 바울 서신. 바울은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구원 얻는 길을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딤후3:15이하) 온전한 구원을 얻는 데 필수적인 요소들을 제공한다. 신약의 구원하는 의를 예시했던 구약의 하나님의 의의 개념을 확대 적용하면서 바울은 율법에 의해서는 구원이 불가능한 이유를 밝힌다. 율법은 죄의 현재성을 지적하고 그 반동적 활동을 자극하며,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한 책임으로 인간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롬3:19;갈2:16). 구원은 자격없는 죄인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사로 제공된다. 자격 없는 죄인은 믿음의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죽으심으로 죄인을 구속하셨고, 그의 부활로 죄인을 의롭게 하셨다.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은 공로없는 죄인을 의롭게 만드셔서(곧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죄인의 것으로 치부하여 마치 죄를 범하지 않은 것처럼 여기셔서)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의 십자가 피로 화평을 이루신'(골1:20)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시며(롬5:11;고후5:18) 그를 그의 아들로 받아들이시고(갈4:5-6) 그에게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게 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고후1:22;엡1:13). 성령으로 죄인은 구원의 자원을 힘입어 새 생활에 진입하여 점차 몸의 행실을 죽여(롬8:13) 마침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되고 그의 구원은 영광속에서 완성을 보게 된다(빌3:21).
(5) 히브리서. 히브리서의 '위대한' 구원은 구약의 구원의 그림자들을 초월한다. 신약의 구원은 제사의 언어로 서술된다. 주로 무의식적인 죄를 처리하고 피상적인 구원만을 제공해 주었던 구약 제의의 자주 반복된 제물은 ,구원하는 제사장이자 동시에 제물이신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제사로 대체된다(히9:26;10:12). 그의 죽음으로 생명의 피를 쏟으신 것이 속죄의 효과를 나타냄으로써 이후부터 깨끗해진 양심을 가진 인간은 그의 중보자를 통하여 하나님에 의해 비준된 새언약에 의해 하나님을 뵈올 수 있게 되었다(히9:15;12:24). 영원한 구원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의 고난과 죽음으로 죄를 처리하신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를 강조하는 히브리서는 그의 재림을 대망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제 죄를 처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의 구원을 완성하고 그에 따르는 영광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9:28).
(6) 야고보서. 야고보는 오직 믿음만이 아니라 행함이 동반됨으로써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2:24). 그는 의로운 행위를 낳는 마음의 변화 없이 하나님의 존재를 단지 지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의 환상을 깨뜨리는 데 관심을 쏟는다. 야고보는 참 믿음을 무시하기보다는 그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한다. 이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는 참 종교의 구원의 에너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야고보는 죄인을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여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데 누구 못지않은 관심을 갖는다(5:20).
(7) 베드로전후서. 베드로전서는 선지자들이 찾고 예언했던 값비싼 구원(벧전1:19)에 대해 히브리서와 비슷한 음조로 말한다. 이 값비싼 구원은 전에는 길잃은 양과 같았다가 영혼의 목자에게로 돌아온 자들에게 이제 현재적 실재가 되고 있다(2:24-25). 구원의 미래의 모습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은"(1:5)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베드로후서에서의 구원은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정욕을 통하여 세상에 오염되는 것을 피하는 것을 뜻한다(1:4). 죄의 맥락 속에 있는 신앙인은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열망하면서도 주의 재림의 지연은 주의 오래 참으심 때문이며, 주의 오래 참으심은 우리의 구원을 위함임을 인식한다(3:13,15).
(8) 요한일이삼서. 요한1서에는 히브리서와 같은 제사적 언어가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한 화복 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되시며,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흘리신 생명의 피에서 우리의 죄를 덮으시고 우리를 깨끗게 하시는 사랑을 나타내신다. 요한복음서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나며,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소유하며, 하나님 안에 거하고, 그가 그의 영으로 사랑을 통하여 우리안에 거하심을 아는 것으로 이해된다(3:9;4:6,13;5:11). 요한3서에는 영혼이 잘됨과 아울러 범사가 잘 되고 몸도 강건해지기를 비는 의미 심장한 기도가 있다(2절).
(9) 유다서. 유다서 3절은 '일반으로 얻은 구원'(함께 받은 구원)을 말하는 가운데, 디도서 1:4의 '같은 믿음'을 생각하면서 이 '믿음'(참고. 엡4:5)을 지키기 위해 싸울 것을 권고한다. 이 구원은 그의 다양한 독자들에게 공통적인 구원 진리, 특권, 요구, 경험들로 이루어진다. 한편, 유다서 22-23절에서 유다는 의심, 위험, 타락에 빠진 여러 집단들에게 이 구원을 긴급하게 제시하려고 한다.
(10)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에서 해방시키며 믿는 자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신 구원의 주제를 되풀이해서 말한다(1:5-6). 시편기자를 상기시키는 방식으로 요한은 구원을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귀속시킨다(7:10).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들은 구원을 만국 백성을 치료하는 생명나무 잎사귀들(22:2)로 묘사한다. 구원의 도성과 같이 이 생명나무의 경우에도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이 접근이 허락된다.
3. 다른 구원관들과의 관계
(1) 에센파. 사해 사본이 발견된(1947년) 이후 유대교 안의 이 수도원적 운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왔으며, 이 운동이 신약의 기원에 끼친 영향을 평가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져 왔다. 구원론에 관하여 쿰란 에센파는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의 타고난 죄성에 대한 성경적 감각을 갖고 있었으며,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신약의 구원관과도 매우 근접하는 점이 있다. 그러나 쿰란 서약자들이 시편과 구약의 대 선지자들에게 힘입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으 그리 놀라운 일만은 아니다. 여기서 일치점들만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른 점들에서 신약의 가르침과 병행되는 점은 훨씬 더 희박하다. 기독교 복음의 보편주의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구원은 죄인인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에 대한 쿰란의 이해는 논란이 많지만, 이 예언은 이 공동체 내부회의에서 성취된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신약 어디에서도 에센파를 명백히 언급한 곳은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2) 영지주의. 영지주의 가르침의 정확한 연대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고 , 기독교가 영지주의 사상에 의존한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 또한 오늘날 매우 불확실한 일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 안에는 초기 교회가 후대 영지주의 교리들에서 구체화되었던 견해들과 신약의 구원의 가르침을 구분시켜야 했다는 증거가 존재한다(참고. 고린도전후서;골로새서;디모데후서;디도서;요한1서;요한계시록). 기본적으로 영지주의는 하나님에 관한 직접적 지식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였다. 이 지식은 도덕적이기보다 지적이었으며, 입회자들의 엘리트 서클에만 국한된다는 점에서 비전적이었다. 영지주의는 또한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을 가르치면서 구원을 위해서는 영혼만이 중요하다고 여겼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여러 등급의 영적이며, 천사적인 존재들을 믿었다. 구원은 이른바 '영지적 구속자 신화'(gnostic-redeemer myth)에서 표현된 신적 세계의 '소명'에 응답하여 '영지'에 도달함으로써 낯선 우주적 세력들과 인간의 정욕의 지배를 피하는 것이었다. 영지주의의 구원 신화에 의하면 천상적 인간이 이 신비한 지식을 나누어 줌으로써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기'위해 천상적 빛의 세계로부터 강림하였다.
이미 암시한 바대로, 이같은 영지주의의 견해를 기독교 이전 시기에 설정하고 그것을 신약의 구원 사상들의 배후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별 신빙성이 없다. 그보다는 당시의 혼합주의적, 종교적 분위기에서 어떤 잠재적인 영지주의적 경향들이 2세기와 3세기에 기독교의 구원 동기들과 결합되어 우리가 앞서 개략적으로 소개했고, 신약 이후 시대의 이레니우스와 같은 저술가들이 전하는, 영지주의적 종파들의 교리들을 산출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다. 이같은 구원관의 초기 형태들에 대항하여 성경 저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적 성격, 그 기본적인 도덕적 본질, 중보자의 참 인간성과 참 신성,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삶, 죽음,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적 행동들에 구원의 초점이 있음을 강조한다.
(3) 밀의 종교들(the mystery religions).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밀의 종교들로부터도 기독교의 구원관을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밀의 종교들은 A.D.1세기에 나타난 현상으로 헬레니즘적 요소와 고대 풍요제의에서 유래된 동방적 요소들이 결합된 것이었다. 밀의 종교들은 운명에서의 '구원'을 약속하고, 현세의 불행하고 억압적인 조건들로부터 해방되는 불멸의 생명을 약속하였다. 구원은 특정한 제의들을 정확하게 거행하는 것으로 획득되었다. 신약과 유사한 언어가 여러 점들에서 나타난다. 디오니시우스(Dionysius)와 같은 신들은 '주와 구주'라는 칭호를 얻었다. 거룩한 정화와 엄숙한 식사에서 신들과 연합한다는 사상이 알려진 이후로 기독교 신학과의 관련성이 특히 성례전 차원에서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대충 살펴 보더라도 초기 기독교 메시지 및 초기 기독교 공동체 생활과의 차이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밀의 종교들에서 구원은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이었다. '구원받은' 신도는 그의 믿지 않는 이웃보다 더 훌륭한 인간이 될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으로도 그렇지 않았다. 합리적 요소란 미미했으며, 위대한 구원 행동들도 전혀 없었고 따라서 대단한 공통적인 신학적 주장들도 없었다. 기독교(바울적) 세례와 성만찬 가르침과 병행된다는 주장들 또한 거의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오히려 바울은 성경의 구속사에 의지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행위를 중심으로 삼았다.
(4) 황제 숭배. 정치 권력과 조직을 통한 구원을 기대하는 전통어린 신기루가 1세기의 황제 숭배에 반영되었다. 그 백성을 구원하고 시혜를 베푸는 신과 같은 왕(a God-king)의 신화도 고대 세계, 특히 동방에서 다양한 형태로 폭넓게 나타난다. 로마에서 황제 숭배의 동력은 B.C.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후 로마의 평화를 수립한 아구스도의 경력에서 유래한다. 아구스도는 '세계의 구원자'인 소테르로 불리웠으며, 쥴리어스 시저와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구스도의 경우에는 조심스럽게 살펴야 할 점이 있었다. 그것은 소테르라는 칭호가 황제에게 국한되지 않았고, 이 칭호에 완전한 동방적인 의미가 항상 부여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세기의 아구스도 다음의 황제들은 황제 숭배에서 그들을 위한 주장에 보인 열의의 정도가 다양했다. 갈리굴라, 네로, 도미티안 황제는 신적 지위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에게 이 칭호(구주, 구원자)가 사용되는 것은 어느 정도는 황제에게 이 칭호가 붙여지는 것에 저항하는 의미가 있다(참고. 딤전1:1;4:10;딛1:3;3:4;요일4:14;유24절;계7:10;12:10;19:10).
(5) 요약. 전반적으로 볼 때 언어상으로 병행되는 점들은 분명히 있지만 기독교의 구원의 가르침이 당시의 어떤 한 운동이나 그 모든 운동에 의존했던 것이 아님은 분명해진다. 신약의 전도자들과 저자들은 복음을 동시대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구원의 언어를 포함하여 그 메시지를 1세기의 사고 패턴으로 번역할 각오가 없지 않았으나 그 구원 언어의 근원은 이 세계 밖에,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명에서 집중되고 성취되었던 구약의 구속사 전통에 존재한다.
4. 성경적 구원의 요약
(1) 구원은 역사적이다. 역사적인 신의 개입을 통해 결과된 구약의 구원관은 신약에서 충분히 존중되는데, 영지주의와 달리 인간은 지혜에 의해 구원받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유대교와 달리 인간은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공로에 의해 구원받지 않는다. 헬레니즘적인 밀의 종교들과 달리 인간은 종교적 제의에 의해 구원받지 않는다. 로마 황제 숭배와 달리 구원은 정치적 질서나 자유와 동등시 되지 않는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역사 안에서 취하신 하나님의 행동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롬4:24;5:10;고후4:10-11;빌2:6-7;딤전1:15;요일4:9-10,14). 예수의 탄생, 삶, 사역이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죽음과 부활이 더 강조된다(고전15:5-6). 우리는 그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을 받는다(행20:28;롬3:25;5:9;엡1:7;골1:20;히9:12;12:24;요일1:7;계1:5;5:9). 이 메시지가 선포될 때 인간이 듣고 믿음으로 응답하게 되면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롬10:8-9;고전1:18-25;살전1:4-5).
(2) 구원은 도덕적이며 영적이다. 구원은 죄와 죄의 결과들로부터의 구속, 곧 죄의식(롬5:1;히10:22), 율법과 그 저주(갈3:13;골2:14), 죽음(벧전1:3-5;고전15:51-56), 심판(롬5:9;히9:28), 두려움(히2:15;딤후1:7,9-10), 종의 멍에(갈5:1-2)로부터의 구속을 가리킨다. 구원의 부정적 의미, 곧 기독교의 구원이 의미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지적하는 것도 중요하다. 구원은 물리적 번영이나 세속적 성공을 뜻하지 않으며(행3:6;고후6:10), 육체의 건강이나 안녕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부정적 의미를 과도하게 강조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분명히 놀랄만한 치유들이 일어났고 '병고침'은 교회에 준 성령의 한 은사이기 때문이다(행3:9;9:34;20:9-12;고전12:28). 하지만 치유는 불변의 것이 아니며,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도 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는 것은 아니다(고후12:7-9;빌2:25-26;딤전5:23;딤후4:20). 또한 구원은 물리적 역경이나 위험에서 구속받는 것이나(고전4:9-13;고후11:23-28) 비극적 사건들로부터 보호받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마5:45). 구원은 사회적 불의와 학대에서 면제되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고전7:20-24;벧전2:18-25).
(3) 구원은 종말론적이다. 구원의 의미를 너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예수가 직접 구원에 대해 언급한 경우는 매우 적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의 중심 범주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였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2:10에서 구원과 그 나라는 실질적으로 동일시 된다. 요한계시록의 저자에게 구원은 예수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과 같으며, 요한복음의 증거처럼 영생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복음의 모든 내용이 종합된 것이다. 구원은 죄와 죄의 모든 결과들로부터 구속받는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령한 축복을 받는 것(엡1:3)과 미래에 복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이 미래의 관점이 매우 중요하다(롬8:24;13:11;고전5:5;빌3:20;히9:28;벧전1:5,9). 지금 구원에 관해 알려진 모든 것은 주의 재림 때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는 완전한 구원의 예비적인 미리 맛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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