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ressurection
1.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 제임스 오어(James orr)는 말하기를 “성경은... 학계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추상적인 영혼 불멸(an abstract immotality of the soul)에 대해서 전혀 알고 있지 않다. 또한 구속이란 단지 영혼(soul)만의 구속이 아니라 몸(body)도 포함된다. 그것은 몸과 영혼(body and soul) 모두의 전인적(全人的)인 구속이다"라고 하였다.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성경적인 사고에서 볼 때, 하나님 안에서 우리 믿음의 성격이 지니고 있는 어떠한 불멸성도 부인하는 것이다(마22:31-32;막12:26-27;눅20:37-38), 영혼은 죽은 후 부활하기까지 육체와 분리된 상태에서 존재한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중간 상태(intermediatestate)에 있는 사람은 불완전(incomplete)한 것이며,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이다(롬8:23. 참고, 고후5:3이하;계6:9-11).
구약성경에서 부활에 관하여 가장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구절은 다니엘 12:2로서 부활과 죽었던 자들에 대한 영원한 심판을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다. 이와 거의 비슷하게 부활을 명백히 언급한 곳은 이사야 26:19 이다. 문맥상 이 구절은 11-15절에 대응된다(parallel). 여기에서 하나님의 약속들과 그것들이 성취되기를 기대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목소리가 반복되어 들려온다. 1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어 실의에 빠져있는 당신의 백성들 앞에 희망을 선언하시고, 그들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판결을 확정하신다. 이러한 설명과정에서 '이슬' 이 언급되는데, 이슬은 은유적으로 폭넓게 사용되어 지상의 행복에 기여하는 하늘의 것을 나타낸다. 죽은 자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기까지 티끌에서 기다린다. 소생시키는 이슬이 그들에게 내려오고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한다. 또한 이사야 25:8도 주의 날에 죽음 그 자체가 사라져서 다시는 보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욥기 19:23-27이 의미하는 바는 많은 논란이 있어왔고, 히브리 본문을 번역하는 일도 결국 쉽지 않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맥락을 따르는 해석상의 번역이라면 별 무리없이 이해될 수 있다: “나의 이 가죽(예를 들면, 병으로 소진되어 가는 현재의 나의 삶), 이것(몸)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더 나은 지위에서, the vantagepoint of) 하나님을 보리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계시(revelation)는 단번에, 완전하게 나타나는 명료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점진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신경을 써 주시는 선생님처럼 당신의 백성을 진리에서 시작하여 진리에 이르는 교육을 하셨다.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필요에 따라서 영적인 생활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향유하기에 충분한 빛이 주어졌다. 불멸에 대한 완전한 계시는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 신"(딤후1:10) 구원자 우리 주님께서 나타나심으로 비추어졌다.
신약성경에서 부활의 헬라어 '아나스타시스' 는 죽은 자의 생명을 다시 살리는(소생)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누가복음 2:34에서는 어쩌면 여기에서도 역시 부활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예외적인 것이다(개역 ‘흥함’, 새번역 '일어나게', 공동번역 ‘일으키기도'), 일반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일어서는 행위, 또는 누운 자가 일어나 앉는 행위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의 신학적 해석은 문자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이 말이 사용된 문맥에도 달려있다.
부활의 교리는 바울이 총독 벨릭스가 주재한 로마 법정에서 행한 말들 가운데 간단한 형식으로 분명하게 언급되었다.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행24:15). 이중(二重) 부활교리가 가장 자세히 언급되는 곳은 계시록 20:415이다. 예수의 말씀 가운데, 이중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게 암시되는 곳은 유일하게 요한복음 5:25,28-29 이다. 요한은 우주적인 관점(cosmic perspec-tive)을 가지고 있어서 이로부터 종말론적인 고정의식(complex)이 성육신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참고. 요일2:18). 요한복음 5:25 예수께서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하시면서 죽은 자들을 선택적으로 살리시는 그의 능력을 '지금' (개역'이 때' ) 행하신다는 사실을 언급한다(비교, 요11장, 나사로의 부활눅7:11-17, 나인성 과부 아들의 부활,마27:50-53, 잠자던 성도들), 요한복음 5:28-29은 미래의 일을 가리키며, 다니엘서 12:2에서의 구분을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점을 요한은 계시록 20:4-15에서 발전시켰다.
어떤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전서 4:16-17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죽은 자는 구속받은 사람들과 동시에 부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이것은 또한 고전 15:20-28에도 암시되어 있는 것일 수 있다. 요한복음 5:28-29에서 죽은 자의 부활은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그분의 능력에 확고하게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후에 바울이 벨릭스 앞에서 했던 말의 본질을 가르쳐준다(행24:15).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는 살아날 것이다.
고린도전서 15:23에서 바울은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부활을 포함하여 부활의 세 가지 '순서' 들을 열거한다. (1) 첫 열매인 그리스도의 부활. (2) ‘그에게 붙은 자'들의 부활. 이 두번째 부활 순서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일어날 것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3) '그 후에는 나중이니'. 문맥상에서 '나중' (새번역'마지막', 난외주에서는 '안식'으로도 봄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의 부활이 있은 다음에 일어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고 그분의 모든 대적들에 승리하신 때를 포함한다. 마지막 대적인 사망은 정복될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나머지 죽은 자들이 크고 흰 보좌 앞에 서는 날에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계20:11 이하).
바울이 말하는 첫번째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므로, 그가 말하는 두번째와 세번째 부활의 '순서'는 요한이 말하는 미래의 '첫번째 부활'과 '나머지 죽은 자들' 의 부활과 일치하는 것이 분명하다 (계 20:4-15).
2. 그리스도의 부활. 기독교의 중심적인 교리로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지 3일만에 다시 살리셨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라고 말하였다(고전 15:14), 부활은 예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분명해진 정점(頂)이다(롬1:4). 그래서 신자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게 된다. 만약 예수의 부활이 없었다면 교회와 기독교는 없었을 것이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고전15:17). 그래서 예수의 부활은 중요하다(significant), 이렇듯 비록 부활이 중추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신약성경의 부활 기사 중에서 많은 부분들이 자주 학자들의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의 부활 이후에 관하여 여섯 군데의 기록이 있다.
사복음서에 각기 한 기사씩 있고(마28장,막16장;눅24장요20-21장), 그 외 다른 두 기사(행1:1-11;고전15:111)가 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떠나시기 전에 40일동안 그의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현현하신 것에 대해 체계적이고 연대기적으로 존 웬헴에 의해 신뢰할 만한 노작이 쓰여졌다(The easter Enigma, 1984).
(1) 설화들.
부활에 관한 간단한 기사들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긴 설화들과 대조적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수의 죽음에 관해 유대인들은 “예수가 참 메시야라면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있는가? 모세 율법에 의하면 그런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로 인한 것일 수 있지 않은가?(참고. 신21:23)”라고 물었으며, 이방인들은 “예수가 유대인의 참된 왕이라면 어찌 그의 백성에게 배척을 받았는가?"라고 물었다. 이런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부활에 관한 물음들은 근본적으로 입증에 관한 문제였다. 이에 따라 여섯 개의 기사들은 빈무덤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를 보았다고 주장한 목격자들의 증언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긴 서술이 필요가 없었다.
(2) 역사 안에서, 그리고 역사를 넘어서
신약을 기초로 그리스도인들은 통상 예수의 부활에 관해 비교되는 두 가지 주장을 한다. 첫째, 예수의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건이었으며 이런 점에서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 탐구에 열려있다. 둘째, 예수의 부활에는 역사적 탐구로는 알 수 없는 중요한 차원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역사적 사건 이상의 것이다. 역사 속에서 일어난 한 사건으로서 부활에 대한 증거는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다.
① 예수의 무덤은 그가 장사된 지 36시간 가량 지난후에 비어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시체를 훔쳐 다른장소에 매장하였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유대인들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체는 그들이 말한 훔친 사람에 의해서도, 또한 다른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발견되거나 제시되지 않았다. 더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기절하셨다가 차가운 무덤 속에서 소생하셨다는 가설을 입증하기란 불가능하다.
② 제자들은 예수께서 실제로 나타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의식이 또렷한 상태에서 예수를 보았다. 이들이 본 것은 주관적 환상(일종의 환각으로, 상상 속에서 일어난 환상)도 객관적 환시(예수의 본질적참된 영은 살아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심)도 아니었다. 이들은 지상에 계신 예수를 실제로 본 부활의목격자들이었다.
③ 부활현현을 서술하는 설화들의 냉정성, 부활자체를 서술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보이지 않으며, 여러 저술가들 사이에 자료를 손질하거나 꾸며내려한어떠한 공모도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 역사상 가장 놀라운 사건이 경탄할 만큼 절제되어 서술되고 있다.
④ 제자들의 변화와 교회의 설립. 겁이 많던 사람들이 두려움을 모르는 전도자들이 되어 교회를 설립하였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이들이 예수께서 부활하여영원히 살아계신다는 것을 온 마음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께서 지금은 주님과 구주로 살아계신다는 복음을 전하였을 때 이들은 살아계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생명들을 보았다. 20세기에 들어와 교회 안에는 예수의 부활이 역사 속의 한 사건임을 무시하거나 가볍게 여기려는 경향이 생겼다. 예수의 부활이 역사 안에서 (우리가 살고있는 곳과 같은 우주의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셨다고 신약이 주장하는 사건은 역사 안에서 있는 우리에게는 적용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불식되어야 한다.예수의 몸의 부활(고전15장)은 근본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경시되거나 도외시될 수는 없다. 역사 안에서 일어난 진정한 사건인 부활은 그러나 역사적 인과관계에 의해 완전히 설명될 수는 없다. 거기에는 역사와의 연속성과 함께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그 연속성은 앞서 열거된 증거들과 같은 정보에서 드러난다. 그 불연속성은 교회가 이 부활에 관해 받아들인 교회의믿음이라는 측면에 있다. 예를 들면, 부활은 하나님의나라의 드러남이며, 새 피조물이 낡은 피조물에 침입함이며, 두번째 아담이자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안에서 새 인간성의 기초가 놓여짐이라는 믿음이다. 이런'신학적 진리들'은 종말의 때에만 입증될 수 있다.
3. 어떤 종류의 몸인가? 예수의 부활 이전의 몸과이후의 몸에는 차이점과 함께 유사점이 있다. 기본적으로 동일성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변화 속의 동일성' 에 관해 말할 수 있다. 예수에게 몸의 부활은 변화를 동반한 소생을 의미하였다. 곧 몸의 부활은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의 경우와 같은 소생만이 아니라 또한 썩을 육체적 몸이 생명과 몸을 창조하신 하나님의능력으로 변화된 영적이고 썩지 아니할 몸으로 되는몸의 변화를 의미하였다. 물 위로 걸으시는 등의 몇몇개별적 사건들을 제외하면 부활 이전의 예수께서는물질적, 공간적 제약을 받으셨다. 예수께서는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걸어가셨고, 문을 거쳐 방으로 들어가셨으며, 계단을 거쳐 지붕에 올라가셨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의 예수께서는 이런 제약들에 얽매이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봉인된 무덤, 잠겨 있는 문을 통과하셨고 기척도 없이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셨다. 예수께서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나타나셨다. 이것은변화된 인격으로서의 그의 참된 본질적 상태가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불가시적이며 비물질적이었음을 말해준다.
4. 부활의 신학
(1)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심으로써 그가 참 메시야이심을 변호하셨다. 예수의 죽음의방식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다는 인상을 주었다.“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기" (신21:23;갈3:13)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하심으로 더 이상 그의가르침과 행위로 메시야되심을 암시적으로 주장하지않으셨다. 그는 이제 사실과 진리로 메시야이심이 증명되었다. 베드로는 십자가 처형 일년 전부터 "주는그리스도" (마16:16 주장하였고, 부활 후 50일이 지난 뒤에는 예루살렘 군중들에게 "그런즉 이스라엘 온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말하였다. 그 후 베드로는 시편 118편의 한 구절을인용하면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예수를 변호하였다.
그는 예수께서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행4:11)고 주장하였다. 바울은 예수에 대하여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롬1:34) 기록하였다. 예수께서는 항상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이러한 아들되심을 실제적으로 변증해 준 것은 부활이었다.
(2) 하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심으로써 그의 가르치심과 속죄 사업을 변호하셨다. 부활은다 이루었다' 하신 예수의 외침에 대한 하나님의 '아멘'이다. 부활은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살아나셨다”(롬4:25). 이 부활을 생각하면서 바울은“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 자랑할”(갈6:14 수 있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죄인된 인간들에대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계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은 부활 속에서 새 시대를 동트게 하셨다. 예수께서 죽음으로부터 일어나시고 그의 몸이 변화되신 것과 더불어 새로운 차원의 존재가 시작되었다.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 다가올 영광스러운 시대에속한 것이 이 악한 현 시대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바울은 이 점을 신중히 생각하여 부활하신 예수를다가올 시대의 수확의 '첫 열매' (고전15:20,23)라고 하였다.
신약에서 부활의 신학은 승천의 신학 또는 승귀의 신학과 분리될 수 없다. 신약에서 ‘부활’ 이란단어는 승천의 관념을 포함하며, '승귀’ (exaltation)는 부활과 승천을 모두 포용한다.
부활절 Easter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축일로서 성탄절과 함께 교회에서 지키는 가장 기쁜 축제이다.
초기 기독교 수세기에 걸쳐서 부활절은 '파스카' (유월절, 히. '페사흐' TOP 에서 옴)로 불리었다. 이는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사건이 유월절 기간에 일어났으므로,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날에 기독교사상을 주입시켜 자신들의 새로운 신앙의 중심사건인 그리스도 부활 축제로 변용하여 지켰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은 파스카의 어원을 '파스케인' (고난을 당하다)에서 가져왔고, 이로부터 유월절 양과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의 유비관계를 이끌어 냈다(순교자 저스틴,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반면에 어거스틴은 이러한 해석을 거부한다. 그는 파스카의 어원을 고난을 의미하는 헬라어가 아니라 '넘어가다' 라는 히브리어의 의미에서 찾으면서, 우리 주님께서도 “내 말을 듣고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고 하신 말씀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넘어감을 암시하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에 의문이 생긴다. 이들 초기 저술가들은 파스카를 통하여 의미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파스카는 수난을 기념한 것인가, 아니면 부활을 기념한 것인가?
사람들은 처음 3세기 동안에 명칭과 실제적인 절기 준수에 관하여 어느 정도 의견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많은 자료들로 미루어 볼때, 부활과 수난은 동일한 날에 기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니산월 14일에 지켰던 '14일주의자들'의 경우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또한 이것은부활절을 주일에 지켰던 자들의 경우임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주일에 앞서 행해진 금식은 언제나 단 하루 동안이었고 금요일은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AD 4세기의 자료에 의하면, 수난을 기념하는 날로서 부활절 이전 금요일은 언급되지 않고,다만 축제의 준비일로서 나타나고 있다. 수난과 부활은 명백히 함께 기념되었던 것이다.
AD 2세기 이후 이러한 부활절을 언제 지키는가에 대하여 논쟁이 벌어졌다. 초기 유대인 기독교도들의 관습을 따르는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와 복음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부활기사(마28:1 평행구절)를 따르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 사이의 논쟁이 그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한대로 소아시아의 교인들은 부활절이 주중에 어떤 날이 되든지 상관없이 유월절 금식이 끝난 다음날인 니산월(유대력의 첫달, 태양력의 3월 15일 ~ 4월 14일) 14일에 지켰다. 그러나 로마와 그밖에 여러 지역의 교회에서는 날짜와는 상관없이 니산월 14일이후 첫 주일을 부활절로 지켰다. 전자는 아마도 주님의 죽으심에 우선 강조점을 두고, 후자는 주님의 부활에 주된 강조점을 두고 지켰던 것 같다. 이 논쟁은 AD 197년 로마 교황 빅토르 1세가 소아시아 기독교인들을 출교시키려고 시도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여러 차례 일어났던 논쟁들은 AD 325년 니케아(Nicaea)에서 개최된 동·서방 교회 공의회에서 일단락 된다. “주님의 파스카는 전세계적으로 한 날 한 시에 지켜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라는 314년 아를르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언급된 내용을 기초로 하여 “부활절을 춘분 다음 첫 만월(滿月)후 첫번째 주일로 지킨다"는 교령을 발표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사용하는 역법(曆法)의 차이로 인하여 동방교회는 서방교회보다 5주 정도 늦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으나 20세기 이후 차츰 그레고리우스력으로 통일되어 갔다. 또한 그리스어와 라틴어권에서의 ‘파스카’는 점차 영어와 독일어권에서 '이스터' (Easter)로 바뀌어졌다. 일찍이 AD 8세기 경부터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이 명칭은 앵글로 색슨족의 여신(Eostre나 Ostara)이나 혹은 동방의 여신(Estara)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해마다 유월절 시기(봄)가 되면 여신제(祭)가 열렸다고 한다.
개역성경에서는 '부활절'로 번역된 곳이 전혀 없는데 비해서, 영어성경은 흠정역 사도행전 12:4(유월절 후에, after easter)에서 유일하게 번역되고 있다. 초기 번역본에서 '이스터'는 '파스카' 의 번역으로 자주 사용되었으나, 마지막 개정판에서는 이 구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월절로 바뀌었다. 이것은 번역자의 일관성 결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이며, 이로부터 우리는 이 역본의 사도행전 역자가 작업할 때, 가장 적합한 단어보다는 일상적으로 익숙해져 있는 상당어구를 선택한다는 원칙에 입각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부활절의 기념 전례들을 살펴보면, AD 300년 이전에 대한 자료는 지극히 적다. 디다스칼리아(Didaskalia)에 의하면 부활주일 전 월요일에 금식이 시작되어 점점 엄격하게 토요일까지 지속되었고, 토요일 밤에는 철야제로 지켜졌는데 특히 유대인의 경우에는 기도에 전념하고 성서를 낭독하였으며, 심지어 이교도들도 그날에는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그런 후 주일에는 빈부를 가리지 않고 모여서 애찬과 성만찬을 함께 나누었다. AD 300년 이후 중세 시대에는 부활절이 한 해의 가장 즐거운 축제로 여겨졌다. 부활절 일요일과 그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주일은 특별한 종교적인 축하행사들이 벌어졌고 각 요일에는 고유한 설교가 행해졌다. 교회의 예배는 모세 율법과 예언서와 주의 수난 설화들을 낭독하는 것으로 구성이 되었으며 세례와 견신례를 집전하고 성만찬으로 마무리 되었다. 촛불을 사용하는 것이 보편화 되어서, 어거스틴은 촛불을 켜서 들고 들어오는 것이 하나의 풍습이었다고 전하고 닛사의 고레고리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가는 양초와 등불을 가져왔다고 전하고 있다. 부활절은 또한 선물을 교환하고 의연금을 나누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희랍과 라틴 교회들에서 행해지는 부활절의 종교적 축하행사들 속에는, 고대 관습들이 가지고 있던 실질적인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여러 개신교에 의해 대륙 전역에서 지켜지고 있다.
부활절 음식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달걀이다. 고대에는 달걀이 봄과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해의 시작인 봄이 되면 달걀을 서로 주고 받았다. 중세기에는 사순절 시기에 달걀을 먹는 것이 금지되었으므로 달걀을 주고 받는 풍습을 부활절 주일로 옮겨 행했다. 오늘날의 부활절 달걀은 주님께서 살아나셔서 부활의 새 생명을 얻으셨던 바위 무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벨기에와 스위스를 포함한 유럽 내륙국가들에서는 이날 어린양, 십자가, 별 등의 모양으로 과자나 사탕을 직접 만들어서 가족과 이웃간에 나누어 먹는다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 국가,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에서는 이날 아침 식단이 양고기 요리 위주로 짜여진다. 목축이 성해서 양고기가 흔한 탓도 있겠지만, 역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상징되는 우리 주님의 승리를 기념하고자 함이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양고기 대신 특별히 훈제 처리된 햄이라든가 소시지 따위와 밀가루에 호밀과 귀리 가루를 섞어 부풀려 만든 부활절용 빵과 이날을 위해 준비해 둔 포도주 등이 부활절 특별 요리로 등장한다.
그밖에 풍습으로는 유럽 여러 지역에서 지켜지는 것으로서 부활절 행진을 들 수 있다. 부활절 대미사가 끝난 후 사람들은 꽃이나 부활절 촛불로 장식된 십자가를 앞세우고서 행렬을 지어 기도문들을 음송하고 부활절 찬송들을 부르며 읍이나 마을 밖으로 행진한다. 이 전통적인 부활절 행진은 종교개혁 이후 본래 지녔던 종교적 성격을 상실하여 오늘날에는 재미만 남은 것들이 많다.
마지막으로 의상을 보면 초대교회에서는 새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부활절 주일 동안에 흰 옷을 입어야 했고,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어 부활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새 옷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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