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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삼월 / 삼위일체

삼월 the third month

팔레스타인의 3월은 태양력으로는 5,6월을 가리키는데, 히브리명으로 '시완월' 이다(에8:9). 이때에 곡식 추수가 시작되어 7월, 즉 태양력으로 9,10월에 과일 추수를 끝으로 추수를 마치게 된다. <참조> 달2

삼위일체 Trinity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삼위일체라는 말이 2세기말 터툴리안에 의해 사용되긴 했으나 4세기까지는교회의 신학 안에 공식적인 자리를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앙의 특수하고 매우포괄적인 교리이다. 삼위일체론에는 3가지 주장이담겨 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고, 아버지, 아들,성령은 각기 구분되는 인격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삼위일체론은 이런 형태로 터툴리안, 아다나시우스, 어거스틴의 손에서 최초로 완전히 체계화된이후 교회 신앙으로 되었다.
1. 유래. 삼위일체론은 어떤 정식화된 형태로 성경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계시의근저에 놓여 있으면서 구약에서 잠재적으로, 신약에서는 명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구약에서는 삼위일체의 계시에 관해확언할 수는 없지만 이 교리의 실체가 신약에서 계시된 이상 이에 관한 많은 암시들을 구약 안에서거슬러 올라가 읽어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1) 구약. 계시 종교가 이교적 우상숭배의 환경속에서 존립해야 했던 시대에서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위태롭게 할 만한 어떤 주장도 자유롭게 제시될수 없었던 사정은 이해할 만하다. 이 시대에는 살아계시고 참된 한분 하나님의 존재를 선언하는 것이 으뜸가는 지상명령이었고 구약은 주로 이 과제에 전념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 첫 머리에서부터만물의 존재와 존속이 삼중적인 근원에 기인하는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그의영이 함께 나타나는 귀절들이 있다. 예를 들면, 창조설화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말씀과 영으로 세계를 창조하신 것으로 나타난다(창1:2-3). 창1:26도 동일한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사람을 만들자"고 하신 다음 이를 성취하는 단계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사람을 창조하신" (창1:27)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복수와 단수를 교체하여 쓰는 두드러진 한 경우로 단일성 안의 복수성을 시사해 준다.
이외에도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영이 결과의 공동 원인' 으로 함께 나타나는 다른 많은 귀절들이있다. 사63:8-10에는 말씀하시는 분이 세분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계약의 하나님 (8절), 임재의 사자(9절), 그리고 백성들의 반역으로 근심하는 영(성신, 10절)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창조활동과 통치는 더 이후 단계에서 '지혜'로 인격화된 말씀(잠8:22;28:23-27)과는 물론 모든 복을 베풀고 체력,용기, 문화, 통치의 근원이 되시는 영(출31:3;민11:25;삿3:10)과도 결합된다.
창조에서 나타났던 삼중적 근원은 구원사의 전개과정에서 한층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초기 단계에서 신적 존경을 받는 여호와의 사자와 관련되 주목할 만한 현상들이 나타난다(창 16:2-13;22:11-16).여호와의 사자라는 명칭은 그것이 나타나는 모든구약 구절에서 신적 존재를 가리키지는 않는다. 삼하24:16; 왕하19:35과 같은 구절들의 경우 이 명칭은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는 것으로 인해 신적 권위를 부여받은 피조된 천사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구절들의 경우 여호와의 사자는신의 이름을 지닐 뿐만 아니라 신적 위엄과 권능을가지며 신적 구원을 베풀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합당한 경의와 숭배를 받는다. 요컨대 메시야는 하나님과 구별되는 인격으로 간주되는 때에도 그에게귀속되는 신성을 갖는다(사7:14;9:6).
하나님의 영(신)은 또한 계시와 구원과의 관련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영은 메시야가그의 일을 할 수 있게 하고(사11:2;42:1;61:1) 그의백성이 신앙과 순종으로 응답하게 하는 임무를 갖는다(욜2:28;사32:15;겔36:26-27). 이렇듯 천사 -사자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던 하나님은 영 안에서 영을 통하여 구원의 영역에서 모든복과 은사를 베푸시는 분으로 자신을 주관적으로계시하셨다. 아론에게 지시하신 삼중적 축복선언(민6:24-26) 또한 신약 사도의 축도의 원형으로 지적되어야 한다.
(2) 복음서. 구약이 삼위일체의 교리에 대한계시가 분명하게 주어지기 이전에 씌어졌던 것과대조적으로 신약은 그 이후에 씌어졌다. 신약은 이계시는 특히 아들 하나님의 성육신과 성령의 부어주심 가운데서 주어졌다. 그러나 옛 시대에서는 그빛이 아무리 희미했더라도 신약의 아버지와 아들과성령은 구약에서와 동일한 분이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강림을 준비하여성령은 말라기의 예언 사역 이후 알려지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의식에 찾아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은 보다 특별하게 성령의 임재와 부르심을 의식하였다. 그의 설교는 삼위일체적 관련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회개, 장차 올 메시야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였으며, 성령 세례를 언급하면서, 자신은 하나의 상징으로 물세례를 베풀었다(마3:11).
삼위일체 계시의 획기적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① 고지. 성육신에서 삼위일체의 작용은 천사의 고지(예고) 속에서 마리아에게 드러났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고지하였다(눅1:35). 이렇듯 아버지와 성령은 아들의성육신에서 작용하신 것으로 드러났다.
② 그리스도의 수세. 요단강에서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으셨을 때 세 인격을 구별해 볼 수 있는데아들은 세례를 받으시고 아버지는 하늘에서 그의 아들을 인정하는 말씀을 하시며 성령은 비둘기라는 객관적 상징으로 내려오신다. 이렇게 아버지와 성령의 증거를 받으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권한을 받으셨다. 세례 요한은 성령이 메시야와 함께 할 뿐 아니라 메시야에게서 오실 것을 매우 분명하게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제 3인격은 하나님의 영이시면서 아들의 영이기도 하였다.
③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가르침은 철두철미 삼위일체적이다. 그는 아버지를 그를 보내신 분으로, 그 자신은 아버지와 성령을 계시하는 분으로,성령은 그와 아버지가 성령에 의해 활동하는 분으로 말씀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상호관계가철저하게 강조되고 있다(참조, 요14:7,9-10), 그는“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요14:16-26)고 강력히 선언하셨다. 이렇듯 세 인격 사이에 구분이 이루어지면서도 또한 동일성도 존재한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을 보내셨다. 이것은 성령의 '이중 발현' (double procession)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유대인들과논쟁하면서 그리스도는 그의 아들되심이 단순히 다윗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그를 다윗의 주로 만들어주신 근원에서 온 것이며, 다윗이 이 말들을 할 때에도 그가 계셨음을 주장하였다(마22:43). 이것은그의 신성과 선재성을 가리킨 것으로 여겨진다.
④ 부활하신 주님의 분부. 그리스도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그의 메시지를 온 세계에 전할것을 분부하셨다. 이 분부 가운데서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것을 특별히 지시하셨다. 이름은 하나이지만 이 한 이름의테두리 안에 구분되는 세 인격이 존재함은 의미심장하다. 삼일성(tri-unity)으로서의 삼위일체가 이보다 분명하게 표현될 수는 없었다.
(3) 신약 저술들.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의 저술들의 증거만으로도 그리스도께서 이 교리에 관해제자들에게 어떤 복음서 기자의 기록 이상으로 크게 가르치셨다는 것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신약의 저술들은 구원의 삼중적 근원으로서의 삼위일체의 교리를 혼신을 다하여 선포한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성령의 인격성을 훨씬 더 현저하게 보여주었으며 이와 동시에 성령으로부터 새로운 빛을 아들에게 비춰주었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베드로는 그것을 삼위일체의 활동으로제시한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2:32-33). 이같이오순절 교회는 삼위일체 교리 위에 세워졌다.
고전 12장에는 “은사는 여러가지나 성령은 같고직임은 여러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언급되어 있다(고전12:4-6).베드로는 구원을 이와 동일한 삼위일체적 근원에서 찾고 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 "(벧전1:2)라고 말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있을찌어다" (고후13:13)는 사도적 축도는 사도적가르침을 요약한 것일 뿐 아니라 기독교인에게서경험되는 삼위일체의 심원한 의미를 해석하여, 아들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교통하심에 접하게 한다고 풀이한 것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하나님을 세 분 속에 있는 한 분으로고백하는 이 신앙이 오랜 세기 동안 유일신 신앙에 젖어왔던 사람들에 의해 갈등이나 논쟁 없이 생겨났다는 사실과 기독교회에 입문하면서 이들이 자신들의 고대적 신앙과의 아무런 단절도 의식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2. 정식화. 성경은 정식화된 삼위일체 교리를 제시해 주고 있지 않지만 그것에 관한 풍부한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어 이것들로부터 신학은 교리를 구성해내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신성 안에서 서로 구분되는 한 분 한 분의 참다운 인격성을 증거해 주면서 또한 이 세 인격들 간에 존재하는 관계들에 관해서도 빛을 던져준다. 이것으로부터 삼위일체 교리를 정식화하는 과제는 신학에 남겨졌다. 삼위일체 교리를 정식화해야 할 필요성은 외부 세력에 의해 교회에 제기되었으며, 처음으로 교회가 신앙의 기준(rule of faith)을 확립하기 위해 온전한 삼위일체 교리를 체계화할 의무에 직면케 된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는 신앙을 수호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레니우스와 오리겐은 터툴리안과 함께 그 체계화에 대한 책임을 나누고 있는데, 이 책임은 주로 카톨릭 교회의 것으로 남아있는 때이다. 아다나시우스의 영도 아래 삼위일체교리는 니케아 회의(AD325)에서 교회의 신앙으로선포되었으며, 한 세기 이후 어거스틴의 손을 빌어그것은 체계화되어 이른바 아다나시우스 신조 안에담겨 있으면서 오늘날까지 삼위일체적 교회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 이렇게 정식화된 삼위일체 교리는칼빈의 손에서 한층 더 명료하게 해명된 이후 개혁신앙으로 수용되었다.
세 인격들 사이의 관계에는 아래와 같이 구분하여 인식해야 할 점들이 존재한다.
① 다양성 속의 일치성. 대부분의 정식(formulary)에서 이 교리는 하나님이 신적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면서 세 인격으로 존재하며, 이 세 인격은서로 분리 구분된 개인들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말로 표현된다. 이 세 인격은 신적 본질이 존재하는 양식 또는 형태이다. 그러나 인격이라는 용어가분리된 이성적이며 도덕적인 개인을 가리킨다면 이진리를 표현하기에는 불완전하다. 하나님의 존재안에 세 개인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 세 인격적인 자기구분이 존재할따름이다. 이 경우에더 인격성이란 말은 그 인격에 특유한 행동으로 이끄는 의지와 행동과 감정의 독립성을 함축하기 쉽지만 삼위일체의 경우에는 이런생각을 할 수 없다. 삼위일체의 각 인격은 자의식적이고 자발적이지만 결코 독립적으로나 반대적으로 행동하시는 법이 없다. 하나님이 하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체적으로 삼중적인 생명의 중심이시긴하지만 그의 생명이 셋으로 갈라지는 것은 아니라는것을 뜻한다. 그는 본질과 인격성과 의지에서 하나이시다. 하나님이 하나 가운데 셋이라는 말은 다양성 속에 일치성이 존재하며 다양성은 인격과 성격과 사역 속에 나타난다는 것을 뜻한다.
② 평등한 존엄성. 하나님의 세 인격들 사이에는 본성, 영예, 존엄성 면에서 완전한 평등성이 존재한다. 부성은 제일 인격의 바로 본질에 속하는것으로 영원 전부터 그러하였다. 부성은 “하늘과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엡3:14-15)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이다.
아들은 '독생자'로 불리우는데 그 뜻은 아마도파생적 존재를 나타내기보다 유일무이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스도는 항상 아버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주장하셨으며, 그의 말을 들었던 유대인들은 그가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신" 까닭에그를 죽이려 하였다(요5:18).
성령은 홀로 하나님의 본성의 깊이를 아시는 분으로 계시된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사정도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0-11). 이것은 성령이 '그의 존재의 가장 심원한 본질에 있어서 바로 하나님 자신' 임을 말하는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세 인격들은 평등(동등)하시다는 교리에 관해 신약의 가르침이 보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③ 사역의 다양성. 특히 인간을 구원하는 면에서 신성 안에 있는 각 인격에게 귀속되는 기능 측면에서 일정한 정도의 종속성이(본성 면에서가 아니라 관계 면에서) 포함되는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가 먼저이고 아들이 두번째이며 성령은 세번째이다. 아버지는 성령에 의하여 아들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이런 뜻에서 그리스도는 "내(표준새번역)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28)"고 말씀하실수 있다. 아들이 아버지의 보냄을 받듯이 성령은아들의 보냄을 받는다. 아버지를 계시하는 것이 아들의 직무였듯이 아들을 계시하는 것이 성령의 직무이다. "그(성령)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요16:14).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경험의 자연스런 표현으로 생기게 되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초기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아버지 하나님과 화목하게되었다는 것, 이 화목은 아들의 속죄 사역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이 화목은 성령에 의해 체험으로 중재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듯 이들에게 삼위일체는 교리가 되기 이전에 하나의 사실이었으며 그것을 교회의 신조적 신앙에 보존하기 위하여 교리의 체계화가 필요했다.
3. 삼위일체 교리의 의미. 이 교리의 의미는신학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경험과 생활을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1)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될 수 있음을 뜻한다.태양이 빛을 비추듯이 계시는 하나님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떤 피조물도 존재하기 이전에 삼위일체 안에 자기 계시가 존재하여, 아버지는 아들에게계시하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에게 계시하고 성령은 하나님의 존재 안에 이 계시를 전달하셨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려 하셨을 때에도 하나님의행동 안에서는 아무런 변화를 뜻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계시를 그의 피조물에게 외향적으로 비추게 허락하는 것일 뿐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계시의영을 통하여 이 일을 행하셨다.
(2) 그것은 하나님이 전달될 수 있음을 뜻한다.태양이 빛날 때는 빛과 열과 에너지를 전달한다.이와 같이 하나님이 자신 안에서 삼위간의 교제로존재할 때 그는 이 교제를 그의 피조물에게 나아가도록 하여 그 수용 능력에 따라 자신을 피조물에게전달하실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러 오셨을 때가 그 극치를 이루었다. 하나님은 그의 교제를 굽혀 버림받은 인간에 도달하여 인간을 구원하여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므로 함께 나눌 것을 가지신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의 생명과 교통이다.
(3) 그것은 삼위일체가 세계 안의 참된 모든 교제의 기초가 됨을 뜻한다. 하나님은 그 자신 안에서 하나의 교제로 존재하시므로 그것은 그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그의 도덕적 피조물들이 오직 교제 안에서 생명의 풍성함을 발견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결혼, 가정, 사회,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 안에 반영된다. 교회의 코이노니아는 하나님의세 인격들의 교제 위에 세워진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교제는 지상에서 가장 신성한 일로, 신적 생활을지상에서 호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하셨던 기도가 이점을 분명히 밝혀 준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 . . ” (요17:21).
(4) 그것은 우주의 삶에 다양성을 준다. 우리가이미 살펴 보았듯이 하나님의 삶에는 다양성이 존재한다. 아버지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아들 하나님은 창조하시며 성령 하나님은 일깨우신다. 참으로그 삶과 사역과 활동은 다양하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우주가 하나님의 현시라면 피조된 우주 전체안에서도 삶의 다양성을 기대할 수 있음을 깨달을수 있다. 이른바 자연의 획일성(uniformity)이란진실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된다. 창조의 모든 기이한 일들, 온갖 형태의 생명, 우주 안의 모든 운동은하나님의 다양한 삶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자연은살아계신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의 다면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단조로운 동일성이나 대규모적인 획일적 양식도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