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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석회 / 선 / 선가 / 선객 / 선견(자)

석회 plaster

생석회로 불리는 산화칼슘(CaO)과 소석회로 불리는 수산화칼슘(CaCoH2)을 통틀어 일컫는 말. 고대에는 기억해야 할만한 사건이나 법률 같은 것을 여러 사람이 볼 수 있게돌에 새겼는데, 이때 새긴 글자를 명확하게 드러나게하기 위한 방법으로 석회를 바른 후 글자를 새겼다(신27:3). 한편 석회(개역성경에서는 횟돌로 번역됨)를 태운다는 표현은 완전한 파멸을 의미하였다(사33:12).

선 good

히브리어 '토브' (‘유쾌한’ ‘기분좋은' '마음에 드는')는 일차적으로 감각을 만족시키는 것을 뜻하며, 여기서 파생하여 미적, 도덕적 만족을 주는 것을 뜻한다. 70인역 성경은 '토브' 를 물질적으로 유익하거나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뜻을 지닌 헬라어 '아가토스'로 번역하고 있으며, 때로는 '칼로스' (문자적 의미는 '아름다운' 인데, 여기서부터 성경 헬라어에서나 고전 헬라어에서 '고상한', '존경할 만한', '칭찬할 만한', '훌륭한' 이란 뜻을 지니게 됨)로 번역하기도 한다. 신약은 이 용법을 그대로 이어받으며, 이 두 형용사를 서로바구 쓰기도 한다(예를 들면, 롬7:12-21). 바울은 70인역 성경을 따라 그리스도인의 선행을 강조하는 뜻에서 그리스도인의 선을 명사형인 '아가토쉬네' 를 사용하여 표현한다(롬15:14;갈5:22;엡5:9;살후1:11). 바울은 또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표현하기 위해 '크레스토테스' 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선' 이란 말이 모든 언어에서 여러가지로 사용되지만 그 공통된 의미는 내재적 가치나 이로운 결과면에서 혹은 이 양면으로 긍정적임을 가리킨다. 성경이 사물에 대해 '선하다' (개역성경 '좋은')고 말하는 다양한 비도덕적 의미면에서는 특이한 점이 하나도 없다.들면 소금은 좋은 것이며(마5:13;눅14:34), 정금(gold of that land is good, 창2:12, 공동번역 ‘좋은 금’)이나 좋은 암소(good cow, 창41:26)는 품질이 우수하고, 좋은 나무(good tree, 마7:17) 좋은 땅(good soil,눅8:8)은 많은 소출을 가져온다. 그러나 도덕적이며영적 선에 관한 성경적 개념은 철저히 신학적이며 헬라인들이나 헬라 전통의 후기 사상가들에 의해 발전된 인간 중심적 선에 관한 관점과는 첨예한 대조를 이룬다. 이 성경적 관점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시고 놀랍도록 관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선하신분으로 인정하는 것이 도덕적 선에 대한 모든 성경적사고의 기초이다. 성경에서 '선' 은 추상적 성질이다.세속적 인간의 이상과 같은 것이 아니다. '선'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속하며('여호와는 선하시다', 시100:5), 이에 따라 그가 행하시고, 창조하시고, 명령하시고, 수여하시는 것이 선하며, 마지막으로 그가 그의피조물의 삶에서 허락하시는 것이 선하다. 성경의 저자들도 선행하는 선의 개념에서 하나님을 평가하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심의 의미로 그에게 일상적인 선이란 말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성경의 저자들은 선이란 말에 깊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이들은 하나님에 비추어 선을 규정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만이 무조건적으로 선하시다는 것이 성경의 입장이다(막 10:18과 병행구절).
또한 하나님은 피조물의 선의 규범과 기준이 되시며 선을 결정하고 판결하시는 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는 한에서만 선하며 사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신의 가치척도를 전도시켜, 하나님이 악하다 하신 것을 선하다 하며, 선하다 하신 것을 악하다 하는 자에게는 화가 미친다(사5:20).
구약에서 하나님의 선은 감사의 주제와 기도의 논거로 자주 등장한다(참고, 대하30:18;시86:5). 그의 선하심은 그가 행하시는 선(시119:68), 그의 선한 영(신)의 자비로운 활동(느9:20;시 143:10), 다방면으로 베푸시는 그의 우주적 관대성(시1459)에서 나타나지만 곤궁한 자에 대한 친절과 그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시25:8;73:1;애3:25;나1:7). 시편 기자는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것을 반복적으로 권하고 있다(시106:1;107:1;118:1;136:1. 참고. 대상16:34; 대하5:13;7:3). 이 시편 구절은 예레미야에 의해 이스라엘 예배의 특징적 주제로 인용되고 있다(렘33:11).
2. 하나님이 하신 일들은 선하다. 왜냐하면 그가 하신 일들은 그의 지혜와 권능의 속성을 보여 주며(시 104:2431), 그가 인정하신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창조가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창 1:31. 참고. 4,10,12,18,21,25절). 하나님의 솜씨로 이루어진 모든 만물은 선하다(딤전4:4. 참고, 롬14:14). 성경에는 마니교의 이원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3. 하나님의 선물은 선하다. 그 선물은 그의 관대하심을 나타내며 선물을 받는 자에게 복이 되기 때문이다. 선의 형용사형의 표준적인 세속적 의미는 '유익한', '이로운' 이며, 선의 명사형의 의미는 '번영'과 '행복' 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모든 선물은 의도와 결과 양면에서 좋은 것이라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좋은(선한) 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선물(은사, 약 1:17. 참고. 시4:6)이라고 가르침으로써 이 용법을 그 신학에 통합시킨다. 곤궁한 자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예수의 특징이었듯이(막 3:4행10:38) 하나님의 특징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의 일상적 섭리 속에서 모든 인간에게 선을 행하시며 자연의 축복을 쏟아 주신다(시 145:9; 눅6:35;행 14:17).
그리고 완전한 아버지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자녀가 된 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실 줄 아신다(마7:11). 그의 백성에게 '선을 행하시겠다' (개역 성경 '복을 주기 위하여', to do them good)는 하나님의 약속은 포괄적인 축복의 약속이며(렘32:40, 참고. 24:6-7), 하나님에게 '선을 행하시기' 를 비는 것은 이축복을 받기 위한 포괄적 기도이다(시 51:18;125:4). 이 구절들에서 문제의 '선'은 언약에서 약속된 축복이다. 그것은 '구원' 과 다름없다(참고, 사52:7), 물질적인 면의 '선' (개역성경 '복'은 옛 언약에서 약속된 축복이며 '악'은 이와 반대로 축복이 거두어진 상태이다(신30:15). 영적 특권의 영역에서의 '선'은 옛 언약 아래서는 향유하지 못했던 것으로 새 언약의 선물이다(히9:11;10:1). 그러나 신구약 모두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좋은 때에 참으로 좋은 모든 것이 이들의 것으로 될 것임을 믿고 안심하도록 해준다(시 84:11;34:10; 8:32;1:3).
형용사형의 '선' 은 인간에게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활동과 관련되어 여러 가지 도구적 의미로 사용된다. 축복을 알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하며, 이 축복을 향유하도록 행동하는 것이 선한 길이며, 이 축복을 경험하는 날이 좋은 날이다(왕상8:36,56;스 7:9;8:18;시73:28;39:8;렘6:16;29:10;빌1:6;히6:5;벧전 3:10. 참고, 시34:12). 설사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서 외적 번영을 거두시고 그 대신 '악' (역경)을 가져다 주시는 때라도(참고, 욥2:10) 하나님의 뜻은 이들에게 선을 행하시려는 데 있다. 이런 고통을 맛보는 것은 인간에게 '유익하다'. 고난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바로잡게 되어 유익함이 생기며 (참고, 히12:10) 믿음과 인내와 순종의 훈련을 받아 강건해진다(시 119:67,71. 참고. 애3:26-27).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보다 가까이 가도록 해주는 것은 어떤 것이나 인간에게 유익하며, 하나님 아래서 그리스도인이 잠시 받는 환난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하기 위한 것이다(고후4:17). 바울은 이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고통도 포함하여)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환경을, 그것이 아무리 불만스러운 것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좋은 선물로, 유익한 목적을 위한 표현으로 여기고, 올바로 이용만 한다면, 자기의 지속적 유익을 위한 확실한 수단으로 간주하여야 한다.
4. 하나님의 계명은 선하다. 하나님의 계명은 그의완전한 도덕적 성품을 표현하며, 또한 그를 기쁘시게하는 방도를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축복받는 길을 정해 주기 때문이다(시119:39:롬7:12;12:2), 성경에 나타난도덕적 이상은 그의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부자 관원이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물었을 때 그리스도는 곧바로십계명을 지적하셨다(마19:17이하). 법없고 무정한 세계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되는 대로 행동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고 악에 직면하여 율법이 규정하는 '선'을찾고 선에 굳게 서야 한다(롬12:9,21;살전5:15,21).
5.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선하다. 그것은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 뿐만 아니라(딤전2:3),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딛3:8). 구속받지 못한 사람들은 '죄 아래' 속박당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을 뿐만아니라 지킬 수도 없다(롬3:9이하;8:7-8). 좋지 않은 나무(아담 안에 있는 사람)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나무가 좋아지도록 해야 한다(참고. 마12:33-35). 그러나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이 명하는 의를 실천할 수 있도록 죄의 속박에서 해방을 받았다(롬6:12-22).이같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적인 순종을 가리키는 신약의 특징적인 언어는 '선한 일' 이다. 선한 일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필생의 사업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바로 이 선한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을구원하셨다(마5:1416;고후9:8;엡2:10;골1:10;딛2:14). 그리스도인은 그의 환경이 허락하는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하도록 소명을 받고 있으며(딤후2:21;딛3:1), 따라서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는 그리스도인될 자격을 잃게된다(딛1:6. 참고. 약2:1426. 선한 일은 그리스도인의아름다운 장식이다(딤전2:9-10), 하나님은 선한 일을 기뻐하시며 그에 보답해 주실 것이다(엡6:8).
선한 일은 세 가지 관점에서 선하다. 선한 일은 첫째, 올바른 기준(성경, 율법 : 딤후3:16-17)에 따라 둘째,올바른 동기(사랑과 구속에 대한 감사 : 살전1:3히6:10. 참고, 롬12:1이하)로부터 셋째, 올바른 목표(하나님의 영광 : 고전10:31. 참고, 마5:16; 고전6:20;벧전2:12)· 가지고 행해진다는 점에서 선하다. 선한 일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롬13:8-10. 참고,마22:36-40).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올바른 동기이상의 것은 요구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중요한것은 계명이 규정하는 구체적 행위들은 사랑의 다양한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계명은 성취될 수 없다. 하지만올바른 정신만 있으면 율법의 문자를 지키지 않아도된다는 것이 아니다. 문자에 정확하더라도 사랑의 자세가 결여된 상태에서는 율법을 결코 성취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선한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에 다름 아니다. 참으로 의로운 사람은 율법의 문자만이 아니라 그 정신도 지키는 것처럼(참고. 마5:18-20)참으로 선한 사람은 율법의 정신만이 아니라 그 문자도 지킨다. 참으로 선한 사람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로마서 5.7에서 바울은잠시 선한 사람을 가치면에서 의로운 사람보다 우위에 두고 있지만 그의 말은 대중적이지 신학적인 것이아니다. 세상은 의를 단지 소극적 청렴, 정직으로 생각하고, 선한 사람의 표시인 친절과 관대성은 의 이상의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적 신학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실상 사랑임을 주장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의와 선을, 선과 의를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선한 일은 사랑에서 우러난 일이며, 사랑의 본질은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엄청난 희생도 각오하는 인격적 헌신으로표현된다(참고, 마리아의 '좋은 일', 막14:3-6. 인간에대한 사랑은 '선'을 행하여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덜어 주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 놓으며, 가능한모든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구하는 것으로 표현된다(갈6:9-10;엡4:29. 참고, 시34:14:37:3,27). 예루살렘 교회의 구빈 제도(행2:44 이하;4:34이하)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모금(참고, 고후7-9장)은 이를 예시해 준다. '친절', '관대' (선대, 관용)는선한 사람을 묘사하는 일반적인 세속적 표현이다(참고, 삼상25:15;벧전2:18), 성경은 이를 기독교 윤리면으로 이해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친절과 관대의 모델과 기준으로삼고 있다(참고, 요13:14,34;엡5:1-2).
이렇듯 율법을 성취하려고 하는 신앙인은 '선한 양심'을 지닌다(행23:1;딤전1:15,19;히13:18;벧전3:16-21).그것은 신앙인이 스스로를 죄없는 완전한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신앙인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참 믿음과 회개에 기초하여 올바른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그의 이웃들에게 '착한 사람'으로 나타날 것이다(행 11:24의 바나바의 경우처럼).

선가 fare

배에 사람이 타거나 물건을 실을 때 내는 값을 말한다.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선가, 즉 배삯을 치렀다(욘1:3).

선객 company in ship

여객선에 탄 손님을 말하며, 요한계시록 18:17에서는 바벨론의 멸망으로 인해 값진 상품을 잃고 이로 인해 애곡하는 선장과 선원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선견/-자 providence/seer

꿈이나 이상(異像)이나 말씀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시(啓示) 등을 미리보는 일을 '선견' 이라고 하며 (행24:3), 하나님의 부르심을 맡은 사람을 '선견자' 라고 한다. 사무엘상 9:9의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 라는 말로 보아 '선견자'가 더 이전의 말임을 알 수 있다(대하16:7,10;사30:10;암7:12). '보는 자’, ‘보는 것'과 깊은 관련을 지닌 '선견자'는 환상을 통해 계시가 주어지는 일에 대해 특히 사상(事象)의 판단에 의해 장래를 예견하는 기능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선지자'와 동의어로 쓰였다(삼하24:11;왕하17:13;사29:10;미3:7). 사무엘(삼상9:19), 갓(삼하24:11), 헤만(대상25:5), 잇도(대하9:29), 하나니 (16:7), 아삽(29:30), 여두둔(35:15) 등이 선견자로 불리웠고, 이들은 주로 왕궁에 있었다. <보라> 선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