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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압비아 / 압비오 저자 / 압살롬 / 압제 / 앗나

압비아 Apphia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낸 서신의 인사말에서 나오는 이름이다(2절). 빌레몬의 이름 다음에 거론되고 있다는 점에서 빌레몬의 아내로 추측되기도 하지만 정확한 근거는 없다.

압비오 저자 Appiu-forum

바울이 로마로 갈 때 도중에 체류했던 장소. 로마에서 동남쪽으로 약 69km 지점에 위치한 압비오성읍의 시장을 말하는데, 여행자들에게는 하룻길에 해당하는 거리였다. 로마의 교인들은 바울이 로마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까지 마중 나왔다(행28:15).

압살롬 Absalom 

다윗과 그술왕 달매의 딸 마아가 사이에서 낳은 셋째 아들인데(삼하3:3), 외모가 준수한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동생 다말이 이복형 암논에게 강간 당한 사건은 그의 비극적 인생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는 암논에게 능욕당하고 비참하게 쫓겨난 동생 다말을 위하여 신의 집에 거처를 만들어 주었다. 다윗 왕은 이 사실을 알고 분히 여겼으나 암논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았다. 이것은 압살롬을 분노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 일로 암을 증오하던 압살롬은 양털깎는 때에 형제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암논을 살해하고, 그술에 있는 외조부 달매에게로 피신하였다(13장). 이곳에서 3년을 머문 후 요압의 주선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는 있었으나 왕궁으로 들어와 다윗의 얼굴을 보기까지는 다시 2년의 시간이 더 걸려야 했다.
그 후 예전의 위치로 복권된 압살롬은 자신이 왕위의 계승자임을 주장하여 방자히 행하였으며, 민심을 동요시켜 아버지 다윗에 대하여 반란을 계획하였다. 그는 왕궁의 비행을 과장하여 다윗에 대한 백성의 신뢰에 손상을 입히고 다윗 왕권에 불만이 있는 세력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였다(15:1-12). 그는 각 지파에 사람을 보내어 모반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다윗의 통치 초기 수도였던 헤브론으로 모이게 하고 그곳에서 반란을 꾀하였다. 압살롬의 반란 소식을 들은 다윗은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마하나임으로 피신하였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을 장악하자 다윗의 심복이었던 후새가 그곳에 남아 압살롬의 환심을 산 후 거짓으로 그의 반란에 참여함으로써 반란자들의 계획을 교란시켰다(16:15-19;17:5-14.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략에 따라 다윗의 후궁들을 백주에 범하였으나 군사를 동원하여 즉시 다윗을 추격하여야 한다는 그의 조언은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압살롬은 오히려 다윗에게 시간을 벌어 주려는 후새의 계략에 말려들었는데, 성경은 이것을 압살롬을 패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 이라고 말한다.
길르앗과 마하나임에 각각 진을 친 압살롬과 다윗의 군대는 에브라임 숲에서 첫번째 전투를 벌이게 되었는데, 결과는 압살롬의 완전한 패배였다. 압살롬은 자신의 노새를 타고 도망가다가 상수리나무의 가지에 평소 그가 자랑스러워 하던 아름답고 긴 머리가 걸려 공중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요압이 달려가 아들의 생명을 해하지 말라고 한 다윗의 특명을 무시한 채 창으로 찔러 그를 살해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심히 슬퍼하였다. 이 사건은 다윗 통치 기간 중 가장 위협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것은 다윗의 통치권에 이미 많은 누수 현상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을 예고하는 사건이 되기도 하였다(13-18장).
압살롬에게는 세 아들과 다말이라는 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4:27). 그러나 사무엘하 18:18에는 그의 후사가 없어서 골짜기에 그의 기념비를 세웠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마도 압살롬의 아들들이 모두 어려서 죽었음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압제 

<보라> 압박

앗나 Adna

바핫모압 자손으로 포로 귀환 후 에스라의 권고로 이방 여인과 이혼한 사람이다(스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