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Jerusalem
하나님의 계시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도시로, 그분의 구속 사역을 인간에게 성취해 가신 장소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지상 위에 설립하신 단 한 나라, 곧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바로 이곳에 성전이 건립되었고 이곳에서 왕정 시내에 율법적인 제사가 드려졌다. 예루살렘은 선지자의 도시이자, 다윗 반열의 왕들의 도시이다. 이곳에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이 일어났다. 또한 이곳에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사 기독교 교회를 탄생시키셨고 첫번째 교회 회의가 이곳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곳은 바로 역사가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빼신 성 예루살렘" (왕상 14:21)이라고 적절히 표현했던 그곳이다. 1세기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는 예루살렘을 "고대 동방의 가장 유명한 도시"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 도시는 2000년이 넘도록 수많은 순례자들이 다녀간 곳이며 예루살렘에 있는 무덤 교회를 회복하기 위해 십자군이 결성된 곳이기도 하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예루살렘과 같이 자주 인용되고 찬양된 장소는 없다. 세계 어느 곳에도 예루살렘과 같이 최종적 영광과 영원한 평화가 약속된 곳은 없다.
1. 명칭. 예루살렘이라는 단어가 셈어이긴 하나 히브리 사람들이 처음부터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다. 아마르나 문서(B. C. 1400)에 의하면 고대에는 ‘우루살림’, 곧 살림의 도시라고 불림으로써 '평화의 도시' 라는 의미로 쓰였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이 말이 여호수아 10:1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예루살라임' 이라고 쓰였다. 에스라 4:8,20,24;5:1의 아람어 표기는 ‘예루쉘렘’ (??)이다. 그리고 산헤립의 기록에는 '우르살라무'로 나와 있다. 시리아어로는 '우리쉴렘' 이고 70인역에는 '히에루살렘’ 으로 되어 있다. A.D. 135년의 하드리안 시대에는 '엘리아 케피톨라이나' (Aelia Capitolina)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지금 아랍인들은 이 도시를 '알 쿠드스 알 샤리프’ (Al-Kuds al-Sharif)라고 부른다.
한편 '살렘' 이 가나안 신의 이름에서 취해졌다고 해서 살렘 신의 도시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주장할 이유는 없다. 아마도 살렘은 예루살렘 도시의 초기 명칭으로, 아브라함과 살렘 왕 멜기세덱의 대화 내용에서 유래하게 된 이름인 듯하다(창14:18;시76:2). 이 도시의 진짜 이름은 평화를 의미하며, 이 장소에서 하나님이 평화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학2:9).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루살렘의 평화를 빌라고 권면받기도 한다(시 122:6).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위대한 예언을 다한 후에 "이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같이... 주리니" (사(6:12)라는 주제로 되돌아온다. 이 '살렘' 이라는 말은 아랍의 인사말인 '샬람'과 유대의 인사말인 '샬롬' 의 기초가 되며, 이 두가지 모두 '평화가 당신과 함께 하기를' 이라는 의미이다. 유대의 랍비들은 성경에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들이 60가지나 나온다고 말한다. 이것은 과장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들은 굉장히 많다.
예루살렘이라는 말만 해도 구약성경에 600번이나 나온다. 욥기, 호세아, 요나, 나훔 하박국, 학개서에서는 나오지 않는데도 말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예루살렘이라는말이 사도행전에서 가장 많이 나오며, 로마서의 결론부에서 4번(15:19,25-26,31), 고린도전서 끝부분에서 1번(16:3), 갈라디아서 등에서도 나온다. 예루살렘의 다른 이름 중에 가장 자주 사용되는 것은 '시온'으로 구약성경에서 100번 이상 등장한다. '시온'이란 단어는 열왕기하 19:21에서 처음 나오며 시편과 이사야(1:8;4:45;62:11)에서 가장 자주 사용된다. 신약성경에서 '시온'은 예수의 말씀에서 2번(마21:5;요 12:15), 로마서에서 2번(9:33;11:26), 그리고 베드로전서 2:6과 요한계시록 14:1에서 등장한다. 예루살렘은 종종 '다윗 성'으로 불리기도 한다(삼하5:7,9;6:10-16;느3:15;12:37;사22:9). 이 이름은 후에 베들레헴에 적용되었다(눅2:4,11).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어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성' 이다. 이 말은 시편과 신약성경에서 몇 차례 사용되었다(시 46:4;48:1,8;87:3;히12:22;계3:12). 예루살렘은 또한 '여호와의 성읍' (사60:14), '여호와의 산' (2:3;30:29), '만군의 여호와의 산' (슥8:3),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시온' (사60:14) 등으로도 불렸다. 여호와 자신이 이 곳을 '나의 성읍' (사45:13)이라고 한번 말씀하셨고, ‘나의 성산' (사11:9;56:7;57:13;65:11,25;66:20)이라고 수 차례 말씀하셨다. 이곳은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말씀하신 그분의 도시이므로 종종 '거룩한 성'이라고 칭해지기도 한다(느 11:1-18;사 48:2;52:1). 이 거룩한 성이라는 이름은 마태에 의해 두번(마4:5;27:53), 요한에 의해 1번(계11:2) 사용되었고, 성경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의 '영원한 하늘의 집'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21:2;22:19). 일반적으로 '거룩한 산' 이라는 말은 이 도시를 가리킨다(시 48:1;사11:9;27:13;단11:45), 예루살렘은 한때 헵시바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의 의미는 '나의 기쁨이 그녀 안에 있다' 라는 것이다(시62:4). 그리고 이사이는 이 성을 '아리엘' 이라고도 부른 적이 있는데 이는 '다투다' 라는 의미이며(사 29:1.2.7) '하나님의 사자'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예언서를 시작하면서 이 성읍에 두 가지 상반되는 표제어를 붙였다. 즉 이 성읍의 사악함을 지적하면서 '소돔과 고모라' (사 1:10)로 표현하였고, 곧이어 이 성읍이 '의의 성읍' (사 1:26)으로 회복될 날이 올 것이라는 약속을 제시하였다.
2. 위치. 중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겪었던 대부분의 도시들과는 달리 예루살렘은 언제나 같은 위치에 남아있다. 예루살렘은 지중해에서 동쪽으로 약 60km 정도 떨어진 지점과 사해에서 서쪽으로 약 23km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으며, 해발 약 777m의 높이에 위치해있다. 지정학상 이 도시는 3개의 언덕 위에 놓여 있다. 남동쪽 언덕은 원래 여부스족의 도시였다가 다윗이 빼앗아 후에 시온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길이 390m에 너비 2m의 거대한 발바닥 모양을 하고 있다. 이에 반해 므깃도 요새의 면적은 약 121㎢이다. 북쪽의 언덕은 솔로몬이 대성전과 자신의 오벨 궁을 지은 곳이다. 아마도 밀로는(삼하5:9;왕상9:15-16) 고트발드(Gottwald)가 말한 것처럼 “오벨의 북쪽 방어를 위한 요새이거나 성벽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둘러싸기 위해 바위와 흙으로 쌓아올린 곳일 것이다. 이 두 언덕의 동쪽에 기드론이라고 알려진 깊은 골짜기가 있었다. 그리고 도시의 남쪽에는 힌놈이라고 불리는 또다른 깊은 골짜기가 있었다. 도시의 중심부를 따라 북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곳에서 세번째 골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바위로 덮여 있어서 바위층의 등고선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이는 티로포에온 골짜기로 불린다. 한편 서쪽 언덕의 끝부분에는 게헨나의 골짜기가 있었는데, 이는 힌놈 골짜기의 연장이다.
오늘날 이 골짜기들에는 60-90m 정도까지 암설이 가득차 있기 때문에, 원래의 깊이를 알 수 없다. 이 도시가 넓은 영역을 점유한 적은 한번도 없다. 헤롯대왕치세 때에도 이 성벽 안의 면적은 그 길이가 1.6km를 넘지 못했으며 너비로는 1km를 넘지 못했다. 이 도시는 거대한 대상들이 다니던 행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진입할 수 있는 강이나 바다에 인접해 있지도 않았다. 따라서 이 도시는 배타적인 지리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약 3km, 사마리아에서 남쪽으로 약 1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이스라일의 중심부로서 수도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예루살렘에 다녀온 많은 여행가들은 시몬즈(J. Simons)가 말한 것처럼 "어떤 방향에서 접근하든지 예루살렘은 오직 그가 서있는 부근의 정경만 볼 수 있어서 갈 때마다 새로운 놀라움과 기쁨을 얻게 된다"고 증언하고 있다.
3. 성벽과 성문. 이스라엘의 성벽과 성문에 대한 문제는 하도 복잡하여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방식으로만 이야기하겠다. 예루살렘에는 동쪽과 남쪽과 서쪽에 깊은 골짜기들이 있었으므로 오직 북쪽만 적으로부터 침입당할 가능성이 많았다. 동쪽과 서쪽의 성벽은 이 골짜기들의 등성이 위에 세워졌다. 남쪽의 성벽은 아마도 현재의 남쪽 성벽보다 훨씬 아래로 뻗쳐져 있었던 듯하다. 첫번째 북쪽 성벽은 '자파 문'이라 불리는 곳에서 대성전의 중심부에까지 걸쳐 있었다. 두번째 북쪽 성벽은 자파 문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뻗쳐 있었고, 거기에는 동쪽으로 굽이쳐서 '안토니아 탑' 까지 뻗쳐 있었다. 현대의 성벽은 서쪽 성벽의 북쪽 끝에서 현재의 동쪽 성벽의 북쪽 끝까지 북쪽과 동쪽으로 확장되어 있다. 세번째 북쪽 성벽은 현대의 발굴로 인해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성읍의 성벽에 관하여는 느헤미야서에 가장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한편 초기 성벽의 남동쪽 끝에서 시작하는 것이 분문이고, 그곳에서 북쪽으로 가면 샘문이 나오고 옛 성전의 성벽 중앙부에 그 유명한 황금문이 있다. 그리고 현대의 북쪽 성벽에서 서쪽 방향으로 돌면 ‘헤롯의 문'이 나오고 그 다음으로 '다마스커스 문'이 나오며 이 북쪽 성벽의 끝에 새문이 나온다. 서쪽 성벽에서 다시 왼쪽으로 돌면 마지막으로 자파문이 나오며 이곳으로부터 지중해로 향하는 길이 뻗어 있다. 현재의 성벽은, 물론 많은 부분이 더 이른 시기에 지어졌겠지만 A. D. 1540년에 솔로몬 2세에 의해 세워졌고 길이 4km 정도에 높이 12m 정도의 모습을 갖고 있다.
4. 역사. 예루살렘의 초기 역사는 캄캄하게 감추어져 있다. B. C. 2000년 전에 사용하던 도기가 예루살렘의 알 뷔케이라에서 발견되기는 하였으나 그토록 이른 시기에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보통의 역사책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바로 14세기의 아마르나 편지에서이다. 이 편지에서 이 성의 통치자였던 압두 힙파(Abk-Khiba)는 이집트의 바로 왕에게 '자신의 성이 위협을 당하고 있으며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이집트인들이 주지 않고 있다' 고 불평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미 창세기 10:15-19에 여부스 성, 곧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이부스족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대한 언급이 처음으로 나타나는 곳은 아브라함이 살렘 왕 멜기세덱과 대화한 곳에서이다(창 14:17-24), 이곳에서 '제시장' 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과 멜기세덱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이스라엘이 건립되기 전에, 아마도 다윗이 이 지역을 탈취하기 800년 전에 이미 이곳에서 진정한 하나님에 대한 증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견해마다 다르긴 하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친 그 장소(창22:2;대하3:1)가 바로 그로부터 수세기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건립한 그 장소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요세푸스도 예루살렘이 아브라함 생전에 존재했다고 단언하였다.
예루살렘이라는 명칭이 실제로 처음 나타나는 곳은 여호수아 10.5이다. 이곳에서 예루살렘 왕이 4명의 다른 왕들과 연합하여 여호수아를 패배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같은 여호수아서에서 이스라엘인들이 여부스족을 몰아내지 못하였다는 고백이 나타난다(15:8,63;18:28). 그러나 사사기스라엘인들이 아도니 베섹을 포함하여 많은 무리를 무찔렀을 때 '아도니 베섹을 예루살렘으로 끌고 왔다'고 하는 말이 나온다. 이로 보아 이스라엘인들이 짧은 기간 동안 예루살렘 성읍의 일부를 차지하긴 하였으나 이것을 고수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삿1:21).
여호수아의 죽음 이후부터 다윗이 이곳을 점령(삼하5:6-10-약 B. C 998년)하기까지의 기간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그 외의 역사책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틀림없이 다윗이 점령한 요새는 후에 시온이라고 불리게 된 곳일 것이다. 이곳은 남동쪽 언덕 위에 놓여있으며 현재의 성벽 바깥에 있다. 크레일링(Kraeling)은 다윗 치세시 이 성의 인구는 1,230명을 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후에 다윗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삼하24:18;대상21:18-28)을 사는데 바로 이곳에 솔로몬의 대성전이 건립되게 된다. 이 성전을 다 지은 후 솔로몬은 성전 북쪽에다 웅대한 궁전을 지었으나 오늘날에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솔로몬이 죽음과 동시에 이스라엘의 영광은 퇴색하기 시작했으며, 예루살렘의 영광 역시 이울어갔다. B.C. 917년 르호보암 5년에 애굽의 왕 시삭은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몰수히 빼앗고 또 솔로몬의 만든 금방패를 다 빼앗"(왕상 14:26;대하12:9)아 갔다. 이것이 예루살렘 성전을 첫번째로 약탈해간 경우이며, 그로부터 300년 내에 예루살렌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일곱 번이나 더 약탈당하게 된다. 이 성전의 부는 워낙 대단했는데다 이스라엘이 한창 번영할 당시 신앙심 깊은 백성들이 갖가지 보물을 바쳤기 때문에 그 부가 굉장했다. 그 후 아사 왕(B. C911-871)이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남은 은금을 몰수히 취하여… 벤하닷에게"(왕상15:18)보내 그를 매수한 일이 일어난다. 그 후에도 솔로몬이 죽은 지 몇 년 지나지도 않아 두 번이나 더 유다의 왕들이 성전의 보물로써 적들을 매수하게 된다. 그리고 여호람 치세(B. C. 850-843) 시에는 아라비아인들과 블레셋인들이 "왕궁의 모든 재물과 그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하여 갔다(대하21:16-17).
솔로몬이 죽은 지 150년이 되기도 전에 요아스(B.C. 837-800)는 적들을 매수하기 위해 네번째로 성전의 보물을 갖다주게 된다. “유다 왕 요아스가 그 열조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취하여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내었더니 하사엘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왕하12:18), 이렇듯 지금까지의 매수는 다 외국의 왕들에게 행해졌지만, 다섯번째 경우는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B. C801-786)가 직접 가지고 간다.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은과 모든 기명을 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아가지고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왕하14:13-14;대하25:23).
아하스왕 치세(B. C. 733-714) 당시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예루살렘을 침략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간 일이 있으며(왕하16:5), 또한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였을 때 "아하스가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방백들의 집에서 재물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으나 유익이 없었(대하28:20-21) 던 일도 일어났었다. 한편 B. C. 701년에는 성경에서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함락된 사실보다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한 사건이 일어난다. 즉 산헤립이 히스기야 왕(B.C. 704687)의 면전에 대고 재차 모욕을 주면서 유다의 모든 도시가 포위되었는데 예루살렘이라고 안전할 수 있겠느냐고 협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산헤립의 군대는 이상한 파멸을 겪게 되고 그 협박을 이루지 못한 채 앗시리아로 돌아가고 만다(왕하18-19장:대하32장,사36장),그 다음 세기의 예루살렘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B. C. 005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유다 왕 여호야김으로 하여금 항복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3년 후, 유다 왕의 무모한 대형으로 인하여 결국 느부갓네살이 B. C. 597년 예루살렘을 최종적으로 함락시키고 만다. 이때 6000명 가량의 시민들이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으며 성전에 남아있던 보물들도 모조리 빼앗기게 되었다가 후일 에스라 시대에 다시 채워지게 된다고 성경은 언급하고 있다(왕하 24:125:21:대하36:1-21:렘 52장), 예레미야는 이 일에 대해"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열왕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도다" (4:12)라고 하여 과거를 생생히 회상시켜 주고 있다.
에스라 느헤미야의 바벨론 포로기 후의 예루살렘에 관한 내용이 성경에는 상세히 나와 있으나 여기서는 두 가지 주된 사건만을 다루기로 하겠다. 스룹바벨은 다리우스 1세로부터 성전 재건 허락을 받아내어B.C.538년에 착공에 들어간다. 그러나 여러 형태의반대에 부딪혀 B. C. 516년에 가서야 비로소 완공을 보게 된다. 그 후 약 60년이 지났을 때,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1세의 술 관원이었던 느헤미야가 성벽의 재건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루며(느1-6장) 에스라의 지도하에 이스라엘인들의 대각성이 일어나게 된다(느8-9장).그러나 이렇듯 위대한 지도자들의 인도에도 불구하고이 도시는 번영을 맛보지 못했다. 어쩌면 유대인들은예루살렘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성 바깥에서 성 안으로 들어와 살도록 하기 위해 지도자들은 갖은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느1:1). 그 다음 세기의 예루살렘의역사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는 별로 없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었을 때 이집트와 남방의 통치자는 프톨레미왕조였고, 시리아와 북방의 통치자는 셀류쿠드 왕조였다고 전해진다. B. C. 320년에 예루살렘은 프톨레미1세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그 후 100년이 지나자이 도시는 셀류쿠드 왕조에게로 넘어갔으며, B. C. 199년에는 애굽이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을 회복하였다.그러나 애굽은 1년밖에 지배하지 못했다. B. C. 198년에는 안티오쿠스 대제 3세가 이 곳을 지배하였다. 이대제가 예루살렘을 지배하자 유대인들은 이제 행복한날이 올 것이라고 기대하였으나 그 기대는 잘못된 것임이 밝혀졌다. 바로 그 다음 세대에 적그리스도 격인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돼지를 제단에 바침으로 성전을 모독하였고 유대인의 희생 제사와 할례를 방해하였으며 안식일 준수도 하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성경을 복사하여 소지하고 있는 유대인이 발견되면 살해했기 때문에 이때 굉장히 많은 인구가 학살되었다.
이후에 이어지는 사건들에 대하여는 간단히만 언급하겠다. B. C. 165년 예루살렘은 유다 마카비에 의해모진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 후 이날을 기념하여 유대인들은 하누카, 혹은 빛의 절기로서 기념하게 된다. 그로부터 2년 후, 안티오쿠스 4세(유파터)가성전과 성벽을 허물어뜨렸으나 얼마 가지 않아 예루살렘 성은 다시 유대 권력자들의 손에 넘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평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시기와 분파가 난발하자 알렉산더 얀나이우스(Alexander Jannaeus) 자신이 바리새인 800여명을 십자가에 처형하게 된다.
그 후 로마인의 지배가 시작되고, B. C. 65년에 예루살렘은 로마의 장군에 의해 포위되긴 하나 그는 이 성읍을 단념하고 떠나가며 B. C. 64년 폼페이에 의해 성벽이 훼파되게 된다. 그리고 성전은 B. C. 55년에 크라수스에 의해 다시금 약탈당한다. 그 후 유명한 헤롯 대왕이 B. C. 49년에 등장하였는데,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영토를 소유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B. C. 37년에 가서야예루살렘을 손에 넣게 된다. 그도 역시 다른 많은 로마인들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건물을 세우는 일에 열정을가지고 있어서 결국 헤롯 성전을 건축하게 된다. 아마이 건물이 성지 예루살렘에 세워진 건축물 중 가장 중요한 것일 것이다. 그는 이 성전의 건립을 B. C. 20년에착공했으나 B. C. 4년에 죽고 말며, 그 후 A, D. 62년에가서야 완공을 보게 된다. 예수께서 살아계실 당시 제자들은 이 성전의 아름답고도 훌륭한 풍경 앞에 놀라움을 안고 서 있던 적이 있었다(마24:1).
예수와 예루살렘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만쓰인 책들도 여러 권 있다. 4복음서 저자들 중에 예루살렘 성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은 바로 이방인 의사 출신의 누가였다. 주께서 태어나실 때 이 성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수록하고 있는 책은 공관복음서 중 오직 누가복음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 사건들을 수록하고 있는 것도 오직 누가복음뿐이다. 먼저 성전의 제사장이었던 사가랴에게 수태고지가 전해지고, 그 다음으로 아기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장면이 나온다(눅1:5-22;2:22-38), 이어서 12살 되시던 해에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기록이 나온다(눅2:41-52).
한편 주가 사시던 마지막 해의 주요 일화들은 오직 요한만 기록하고 있다. 예수의 죽음이 A.D. 30년에 일어났다고 한다면 첫번째 성전 정화 작업은 A,1). 27년 4월에 발생하였다고 할 수 있다(요2:13-25), A, 1), 28년 4월에는 베데스다 못의 병자가 고침을 받게 된다(5:1-47). 10월 29일에 예수는 장막절을 지키시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7:2;10:21), 12월 29일에는 헌신의 절기(Feast of Dedication)를 지키시려고 예루살렘에 계셨다(눅10:3842), 물론 예수의 마지막 주간은 예루살렘 성과 그 부근에서 보내졌다(마26:1-27:66; 막 11:115:47;눅19:29-23:56; 요12:12-19:42),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 주간에 다섯 번 나타나신 것 중 네 번이 오직 누가 복음에만 기록되어 있고(눅24장), 1주 후에 예루살렘에서 여섯 번째 나타나신 일은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20:26-29).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모든 제자에게 나타나셨으며(눅24:49;행1:1-8) 근처의 감람산에서 승천하셨다(눅24:50-53).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대해 네번에 걸쳐 중요한 언급을 하셨는데 네번 다 슬픈 이야기이다. 먼저, “예루살렘 밖에서는 선지자가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13:33)고 하셨다. 성주간 화요일에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이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23:37)라고 외치셨다. 누가 복음에는 예수께서 이 성을 보시고 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나온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다"(눅19:42),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건물과 성벽이 허물어질 것을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고 덧붙이셨다(마24:2;막13:2;눅21:24).
사도행전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여 앉아 그리스도의 약속, 곧 위로부터 능력이 임할 것이라는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그리하여 교회가 오순절날 예루살렘에서 탄생하게 된다(행2장). 그리고 이 초기의 신자들을 향한 박해가 예루살렘에서 발생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정죄했던 산헤드린은 이제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점점 커지는 현상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1차 총회가 열려 구원이란 은혜로 받는 것이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님 (행 15장)이 천명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바로 이 도시에서 사도 바울이 체포되고 습격받으며 거짓 고소된다(행 21-22장).
그 후 디도가 인도하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143일간 포위하였다가 함락시킨 사건은 복음서에서 예언되긴 하였으나 신약성경에서 실제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이 무서운 사건이 있기 전에 유대인 60만명이 죽임을 당하며 수천명이 포로로 잡혀가게 된다. “예루살렘 함락 이후 60년 동안은 예루살렘에 역사가 없었다"(C. R. Conder). 그 후 유대인들이 로마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A, D. 134년 거짓 메시야 바코바의 지도하에 무모한 반역을 꾀하게 된다. 이 반역은 완전히 진압되었고 예루살렘 성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로마인들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지금 '엘리아 케피톨라이나'(Aelia Capitolina)로 불리어지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새로운 성으로부터 약 2세기동안, 곧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지배가 있기 전까지 엄격히 추방되었다. A. D. 4세기 초에는 황제의 모후였던 헬레나의 열렬한 헌신으로 말미암아 '아나스타시스' (åváoraors, ‘부활’)라 불렸던 ‘성무덤 교회' 가 세워졌다. 이 때부터 예루살렘은 순례지가 되었다.
예루살렘의 후속 역사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만 적을 수 있다. A. D. 614년 '코스로에스' (Chosroes) 2세 치하의 페르시아 장군이 예루살렘을 습격하여 그리스도인 6만명을 학살하고, 35,000명 정도를 노예로 삼았다. A. D. 628년, 헤라클리우스는 침략자 '코스로에스'(Chosroes)의 아들과 화친을 맺고 황금문을 통해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한다. 637년 아랍의 칼리프 오마르는 '칼리프'는 애굽의 왕들을 '바로'로 통칭하듯이 부른 아랍의 지도자, 왕을 가리키는 듯하다) 조건부 항복을 받아내고 이 성에 무혈의 입성을 한다. 그리고 688년에 첫번째 '뿌리의 바위', 즉 세계의 토대가 되는 바위라고 부르는 장소에 금박을 입힌 웅장하고 화려한 '바위 건물' 을 건립한다.
마호멧은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에 대해 다소간 알고 있었으므로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에게 신성한 도시였던 예루살렘과 어떤 식으로든 동화되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이슬람 교도들은 그들의 코란에 있는 한 구절을, 마호멧이 기적적으로 예루살렘에 옮겨져서 그곳에서 거룩하게 바쳐졌다고 번역하였으나 이에 대한 사실적 증거는 없다. A, D, 969년에 예루살렘은 애굽의 '칼리프' (Shia' h Khalif)의 권세 아래 있게 된다. 1009년에는 그리스도인 모친을 두었던 '칼리프 하킴' (Caliph hakim)이 성무덤 교회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예루살렘의 파괴 작업은 시작된다. 그리하여 1014년까지 팔레스타인에 있던 3만여 개의 교회가 불태워지거나 약탈되었다. 1077년에는 셀주크 투르크의 장군이 애굽인들을 축출하고 그 성벽 안에 살고 있던 3만여 명의 거주민을 학살하였다.
이제 예루살렘에는 새로운 시대-가련하고 슬프고 부끄러운가 시작되고 있었다. A.D. 1099년 7월 7일에 첫번째 십자군의 기독교 군대가 예루살렘 앞에 진을 쳤다. 이들은 7월 14일에 이 성을 장악하고 소위 그리스도인 기사들이라는 자들이 무서운 학살을 자행하였으니 이 일을 회교 세계에서는 결코 용서하지도, 잊지도 못할 것이었다. 그 후 80년간 이 성에는 다른 적들이 침입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이 이슬람 교도를 거느리고 1187년 9월 20일에 예루살렘 성 앞에 진을 치게 된다. 그는 10월 2일에 입성하여 약 1세기 전에 십자군이 자행했던 것과 같은 폭력을 결코 행사하지 말라고 군인들에게 명령하였다. 그는 이러한 자비를 보임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평화를 알지 못할 운명이었다. 1229년, 예루살렘은 다시금 프레드릭 2세가 협상을 통해 손에 넣게 되었다. 1244년에는 카레즈미안타르타스(Kharezmian Tartas)에게로 넘어간다. 1247년에는 다시금 애굽인들이 장악하게 된다. 1260년에는 다시 타르타스에게로 넘겨지고, 1517년에는 오스만 투르크 족이 장악하게 되며 이후 400년간 지배하게 된다. 1917년 12월 9일, 영국의 알렌비 장교가 걸어서 이성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1918년 10월 31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며 400년간의 터키 실정이 끝을 보게 된다.
1920년 4월 24일, 팔레스타인과 트랜스요르단에 대한 위임 통치령이 대영 제국에 내려지며 이후 30년간 영국은 이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곤란을 겪게 된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통치가 막을 내리고 텔아비브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이스라엘 국가가 선언된다. 이렇게 되자 팔레스타인에는 더 혹독한 전쟁이 자주 있게 되었으며, 그 결과 백만 명 정도의 아랍인들이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1949년 봄까지 이스라엘은 45개의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아랍권 국가들과의 다툼은 불행히도 계속 이어졌다. 1967년 구도시(Old Cin)에 대한 아랍의 통치권이 상실되고 이스라엘 공화국이 예루살렘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받음으로써 한 차례의 전쟁이 끝나게 된다. 예루살렘은 1950년에 이스라엘 공화국의 수도로서 천명되었으나 유엔(UN)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었다. 1980년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인구는 448,200명이었다.
5. 예언서에 나타난 예루살렘, 도시나 강이나 국가에 대한 예언이 성경에 많이 나타나고 있지만 이 예언들을 적절히 관련시키는 일들은 별로 행해지지 않고 있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에 관한 예언 중 극히 요약적인 것만 살펴보겠다.
(1) 신명기 12장에서 비록 그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장차 성소가 될 장소에 대한 언급이 6차례 나온다(참고. 왕상8:29,48).
(2) 산헤립이 이 성읍을 점령하려 하나 실패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진다(왕하19:32-34;사29:7;30:19;31:45).
(3) 느부갓네살에 의해 이 성읍이 훼파되리라는 예언이 주어진다(왕하22:16-17;23:7;대하34:24-25;사4:35:10:11-12;22:9-11;8:9;24:10).
(4)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이 성읍이 모독될 것이라는 예언이 주어진다(단8:11-14;11:30,32).
(5) 디도 치하의 로마인들에 의해 이 성이 훼파될 것이라는 예언이 주어진다(단9:26; 마24:2; 막 13:2;눅13:33-35;19:41-44;21:6,20,24).
(6) 현 시대의 예루살렘에 관련된 예언이 있다(단 9:26;즉12:3;눅21:24).
(7) 마지막 때에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이 주어지면서 때로는 예루살렘이 특별히 언급되기도 한다(3:1). 또한 이 거룩한 성에 어떤 다른 성전이 세워질 것에 대해서도 예언된다(사55:11;60:1-3; 렘 31:89;단9:27;12:11;마24:15;13:14,살후2:3-4).
(8) 두 증인이 이 성에서 순교당할 것이라는 예언이 제시된다(계11장).
(9) 지상의 열국이 이 성에 마지막 공격을 퍼부을 것이라는 예인이 제시된다(사 29:1-7;욜39-12;1413),
(10) 이 성의 영적 혼잡문을 다 제기하여 깨끗이 하시겠다는 예언이 제시된다(사 1:25-26;4:3-4;욜3:17;슥14:1-3).
(11) 궁극적으로,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와 (사 62:2; 겔 43:1-2) 평강과 (시 122:6-9;사 60:17:66:12), 기쁨(시53:6,사5:11)을 알게 될 한 성이 예언된다.
(12) 열방이 가르침과 축복을 받기 위해 이 성에 모여들 것이라는 예언이 제시된다(시 102:21-22;사2:2-4).
'GOODWILL CHURCH > 성경사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사전) 예배 / 예복 / 예비하다 / 예비일 / 예산 (0) | 2022.10.09 |
---|---|
(성경사전) 예루살렘 회의 / 예리 / 예물 (0) | 2022.10.09 |
(성경사전) 예레미야서 / 예레미야 애가 / 예렛 (0) | 2022.10.08 |
(성경사전) 예고 / 예델 / 예드야 / 예라 / 예레미야 (0) | 2022.10.08 |
(성경사전) 옆 / 옆걸음 / 옆구리 / 예1 / 예2 (0) | 2022.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