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 The Epistle of Jude
이것은 비록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3. C. 150215) 시대까지는 어떤 초대 교부에 의해서도 인용되기나 심지어 언급조차 되지 않았지만, 가장 먼저 알려진신약성경의 서신서들 중에 포함된 일반서신서들 중의하나이다. 오리겐은 이 책에 대해 '아주 적은 구절들이지만 하늘의 지혜의 전능한 말들로 가득차 있다'고평하였다.
1. 저자와 기록연대. 시작하는 구절에서는 저자를'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로묘사하고 있다. 이 사람은 아마 야고보와 예수의 형제'유다' 라는 사람과 동일인물일 것이다(마13:55-56;막6:3). 그러나 그와 기록 장소에 관해서는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고, 이 편지가 기록된 정확한 날짜도 알 수없다. 우리가 단지 알고 있는 것은 이 책이 이야기하고 있는 문제들은 이단이 증가하고 있던 1세기 후반에아주 보편적인 것들이었다는 것이다.
2. 목적. 저자는 그의 독자들인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해서 힘써 싸울 것을 긴급하게 호소하고 있다. 이 책이 쓰여질 당시에는 기독교의기초 자체가 위기에 있었다.
3. 내용. 유다서는 내부로부터 교회들을 위협하는새로운 이단에 대해 다루면서도 그것이 무엇이었으며, 지지자가 누구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들의 문란한 생활 양식과 교회에 대한 치명적인 영향에대해서는 알 수 있다. 유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부딪히는 피할 수 없는 반대, 죄인들에 대한 자비의 필요성, 그리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에 관해 상기시키고 있다. 진실한 믿음을 손상시켰을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그의 목소리는 정당한 분노로 높아진 것처럼 보인다.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간시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그들이원하는 바를 따라서 행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어떤사람' 들이 기독교 사회에 침투하였다(유416절). 영지주의 이단들은 도덕과 종교는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러한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진정한속성을 잘못 이해한 것이었고, 기독교를 이방종교의방탕함의 수준으로 저하시켰던 것이다. 가장 충격적인 상징들(비 없는 구름, 마른 나무들, 방황하는 별들)을 사용하면서, 유다는 그들 뒤에 오점을 남기고 마음은 부패해 있으면서 경건한 체하는 사람들을 경고하고 있다. 유다는 그의 독자들에게 사람들, 천사들, 그리고 더 잘 알았어야 할 도시들에게 임한 구약성경에나와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은의심의 여지없이 여전히 죄를 벌하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남겨두고 있다.
유다서 17-25절은 지속적으로 인내할 것을 간곡히타이르고 있다. 여기서는 또한 말세에 기록하는 자들이 나와서 세상을 사랑하며 믿는 자들 가운데 불화를심어놓을 것이라고 사도들이 앞서 말했다는 언급이있다. 그러나 경계하고, 기도하며,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배교자들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없다. 유다는 분명히 죄의 두려움, 즉 긴장과 유혹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어떤 사례들은 강력한 징계를 요구하며, 다른 사람들은 자비와 올바른 관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편지는 그분에게만 영광이 속해 있고, 결국 그의 모든 가족들을 깨끗하게하시고 완전하게 하시어 그분의 임재 앞에 영원히 인도해 가실 하나님께 대한 영광을 견고히 찬미하며 마무리한다.
유다인
<보라> 유대인
유대 Judea
바벨론에서 귀환한 대부분의 포로들은 유다 지파에 속하였으므로 그들은 유대인으로, 그들의 땅은유대로 불리우게 되었다. 바벨론 포로 전기의 유다는기본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의 남쪽만을 점유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하에서는 예루살렘주위의 적은 지역만을 포함하였으며 주로 유다인 총독에 의하여 다스려졌었다(학1:14;2:2). 넓은 의미에서독립된 마카비 정부는 거의 모든 팔레스타인 지역을포함하였는데 이 넓은 '제국'은 팔레스타인의 한 구역인 사마리아와 갈릴리와 함께 더 작은 유대에 의하여 다스려졌다. 로마 시대에 헤롯 대왕은 이 지역을다스린 왕이었다. 헤롯의 아들이자 총독인 아켈라오의 유대 영지는 갈릴리와 베레아를 제외한 이두매와사마리아 지역이었다(마19:1;눅23:5;행 10:37). 헤롯의아들 아켈라오가 추방되자 결국 유대는 로마의 수리아 도로 합병되어 로마가 지명한 총독에 의하여 가이사랴에서 다스림을 받았다 (눅 3:1;RSV 총독 'govemor'). 그들의 직속 상관은 안디옥(눅3:1)에서 다스렸던 수리아 지방의 총독이었다. 이곳은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실 때도 그대로였다. 지리적으로 유대는 남북으로 92km이며 동서의 길이도 같아서 지중해에서 사해까지 이른다. 북쪽 경계는 욥바이며 남쪽 경계는 가사로부터 몇마일 떨어진 남쪽에서 사해의 남부까지이다. 그러나 정확한 경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유대 광야는 세례 요한이 설교한 곳이요(마 3:1), 예루살렘과 헤브론 사이, 사해와 중심의 구릉 사이에 있는 황량한 지역이었다.
유대광야 wilderness of Judea
세례 요한이 하늘나라에 대하여 외치기 시작한 장소로(마3:1) 사해 서쪽에 펼쳐 있는 광야를 말한다. 이곳은 예수께서 40일간 금식하셨던 곳이며,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곳이기도 하고, 그 후에 공생애를 시작하신 곳이다(마4:1-11). 후대에는 은둔 생활의 장소로도 사용되어졌는데 쿰란 교도들도 이곳을 사용하였다.
유대교 Judaism
1. 정의. 유대교는 유대인들의 종교로 구약의 종교와는 구별된다. 유대교의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의 소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것은 서곡일 뿐이며, 유대교는 바벨론 포로와 더불어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바벨론 포로에서 A. D. 70년에 이르는 시기의 유대교는 구약 개념들의 수정이나 확대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유대교는 A. D. 70년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후에 본격적으로 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 따라서 그리스도 시대의 유대 종교를 '후기 유대교'라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이다. 에스라에서 그리스도에 이르는 시기의 유대 종교는 '신구약 중간 시대의 종교' 라고 표현하는 것이 타당하다. 원시 기독교는 에스라 이후 4세기 동안의 모든 역사적 발전을 거부하거나 무시하지는 않았으나 유대교의 율법관이나 율법해석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유대교는 기독교 및 구약과 분리된다.
유대교는 A. D. 500년에 완전 개화되어 성장과 변화를 거듭해 왔으나 여기에서는 유대교의 주요 개념들이 명확해지게 된 미쉬나의 완성 시기(A. D. 200)까지만 주로 살펴 보려고 한다.
2. 유대교 발흥. 유대교의 출현은 B. C. 621년 결정에 이른 요시야 종교개혁에 의해 불가피해지게 되었다. 합법적 제사를 예루살렘 성전에 제한시킨 것은 많은 사람들의 종교가 점차 성소와 제사와 멀어지도록 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경향은 바벨론 포로에 의해 더욱 가속화되었다. 바벨론 포로는 회복을 기다리는 시기였다. B. C. 538년 귀환을 거부한 대다수는 유대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의 종교를 생명력 있게 수정하였다. 그러나 제사 없는 예배를 발전시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였기에, 성소와 완전분리될 수 있는 삶의 전망이 필요하였다. 이 삶의 전망은 모세 율법에서 발견되었다. 율법은 법전으로서보다는 모든 생활 영역에 적용될 수 있었고 적용되어야 하며, 유대인으로 남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구속력을 지니는 일련의 원리들로 해석되었다( '토라' 라는 말 자체가 '법'보다는 '가르침'을 뜻한다). 에스라는 진정한 '유대교의 아버지'였다. 에스라는 새로운 율법이 아니라 옛 율법을 지키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고 시행하기 위해서 바벨론에서 귀환한 지도자였다. 그 후 제사장과 다른 부유층은 에스라의 정책에 결연히 반대하였다. 이들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B. C. 175-163) 치세 때 헬라화에 앞장서는 지도자들이 되었다. 대다수 평민들은 율법을지키는 데 있어서 명확한 의미가 드러난 것이 아니면 모두 피하려 하였다. 유대교의 발전에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은 예루살렘의 지도급 제사장들의 헬라화정책에 승인한 하스몬가의 제사장-왕들의 타락이었다. 경건한 유대인에게 성전 예배는 기쁨이 아닌 의무로 변하였다. 쿰란 서약자들은 성전이 악한 제사장들에 의해 더럽혀져 있다하여 성전에 등을 돌렸으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율법 연구를 통하여 그의 뜻을 발견하는 주요한 수단을 회당으로 여겼다. 그 결과 그리스도 시대에는 예루살렘에만 수백 개의 회당이 존재하였다.
바리새인들은 A. D.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으로 충격을 받긴 했으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시대 이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주 성전이 더럽혀졌던 경험들로 인해 그 충격이 다소 완화되었다. 이들의 회당 중심적 종교는 새로운 사태에 신속히 적응할 수 있었고, 다른 종교 집단들이 무력해짐에 따라 그것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A. D.90년경 바리새파의 지도자들인 랍비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이단으로 여겨진 자들을 회당에서 축출할 수 있을 만큼 힘이 있다고 느꼈다. A. D. 200년에 이르러 격렬한 투쟁을 거친 후 이들은 유대인으로 남고자 하는 평민들을 유대교 신자가 되도록 강요하였다. 이때로부터 유대교가 근대 사상의 영향을 받기 시작할 때까지 유대인이란 말과 규범적 랍비적, 정통적 혹은 전통적 유대교라는 말은 본질적으로 동일선상에 있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은 항상 소수 집단이었지만 이들의 견해가 승리를 거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들이 대중적 인기를 얻지 못한 경우는 자주 있었지만 이들의 견해는 포로기 이후의 시대 상황에 구약을 가장 논리적으로 적용시킨 것으로 보였으며, 회당을 활용함으로 인해 그것은 공동의 자산으로 되었다.
3. 유대교의 교리.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바울 진영과 그 주요 적대자들의 진영 간의 충돌이 아무리 격렬했던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충돌의 면모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양 진영은 -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 동일한 성경을 받아들였으며,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성경을 거의 비슷한 방법으로 해석하였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초기 랍비들의 가르침의 짙은 유사성은 오래전부터 인식되어 왔으며, 쿰란 사본의 발견으로 헬레니즘이 신약시대에 미친 영향은 지엽적이란 인식을 가속화시켰다. 그러므로 유대교 교리의 상당 부분은 구약이나 보수적 기독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다룬 문제들에 있어서는 A. D. 500년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승리한 기독교와 맞서 오랜 기간 생존 투쟁을 벌여오는 동안 유대교는 자주 그들의 강조점을 바꾸었으며, 이로 인해 기독교와의 일치점이 줄어들었다는 점은 기억하여야 한다.
(1) 이스라엘. 유대교의 기본이 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존재와 소명이다. 이스라엘의 구성원은 주로 출생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개종자도 정상적으로는 환영을 받았다. 개종자의 경우 할례, 세례, 제사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구약의 '남은 자' 교리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모든 이스라엘은 장차 올 세계에 참여할 자격을 갖는다'는 말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자격을 갖는 데 유일한 장애물은 배교(이는 신축성을 지닌 용어이다)로 여기는 것이 정상적이었다.
이스라엘 안에서는 모두가 형제로 간주되었다. 사회의 자인적 구분은 결코 부정되지 않았으나 하나님 앞에서의 서열은 율법에 대한 지식과 율법의 실천에 의해 정해졌다. 이에 따른 회당 예배에서 지도자의 유일한 자격 요건은 경건, 지식, 재능이었다. 랍비는 제사장이나 목사가 아니었으며, 이들은 어떠한 형태의 안수도 받지 않았다. 랍비는 율법을 가르칠 만큼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로 랍비가 되는 데에는 몇몇 인정된 랍비들의 인정을 받는 것으로 충분했으며 심지어 예외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공동체의 인정을 받아 랍비가 되는 경우도 있다. 여자는 그 남편의 권위 아래 있어 율법의 특정한 규정들은 이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남자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근본적인 면에서 유대교는 항상 창세기 2:18의 진리와 여자의 본질적 존엄성을 유지해 왔다.
(2) 부활․ 비록 후대에 기독교와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영혼 불멸 교리에 다소 소극적인 동의를 하긴 했으나 유대교는 항상 구약 정신에 매우 충실하여 사후의 진정한 삶에는 몸의 부활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했던 기독교 신앙과는 달리 유대교의 부활의 희망은 구약의 몇 안 되는 구절에 근거하였으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시대 이래 경건한 유대인들의 영적 고뇌 속에서 정련되었다. 현세와 내세가 분명히 구분되고, 내세는 항상 이 땅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보다 헬라화된 흩어진 유대인들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현세와 내세는 '메시야 시대' 에 의해 연결되었으며, 메시야 시대는 한정된 시기로 생각되었다.
(3) 율법.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관해 사두개인과 쿰란 서약자들 사이의 중간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두개인들은 예언서의 가치를 반드시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 권위는 부정했던 반면 쿰란 서약자들은 훌륭한 주석자의 손에 들려지는 예언서에 높은 권위를 부여했다. 바리새인들은 예언서를 그들이 하나님의 뜻의 최종적인 완전한 계시로 여긴 모세 오경에 관한 신적 영감을 받은 주석으로 여겼다.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표적을 구했던 주된 이유는 그리스도가 모세의 권위에 호소하지 않고 자신의 권위에 호소했던 데 있었다.
랍비들은 율법의 역할과 가치를 매우 존중하였기 때문에 율법 준수가 이스라엘의 존재를 설명하고 정당화시키는 요소가 되었다. 후에 정치적으로 승리한기독교회와 마주치면서 유대교는 율법에 우주적 위치를 부여하였고, 율법이 창세 전에 존재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유대교에서 율법은 기독교에서의그리스도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정통 유대인들이 죄를 드러내기 위해 율법이 주어졌다고 주장한 바울을 싫어했던 이유를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그러나 유대교에서 모세 오경은 성문 율법일 뿐이다.율법 준수가 모든 경건한 유대인의 개인적 관심사가되고 그 규정들이 생활의 전체 영역에 미쳐 이스라엘의 본질적 통일성을 조성하도록 확대되기 위해서는접근 방법과 주석의 원리들에 관한 일치가 존재하여야 했을 것이다. 이 원리들의 대체적 윤곽은 아마도에스라 시대에 이미 확정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손을 씻는 것과 같은 고대의 관습들과 함께 이 원리들은시내산의 모세에게로 직접적으로 소급되는 전승에 기초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 원리들과 일상 생활의 적용은 구전 율법을 형성하게 된다. 구전 율법은 성문 율법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 성문 율법은 구전 율법없이 올바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전 율법의 발전 과정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성문 율법은 그 안에 있는 실제 계명들을 찾아내기 위해 연구되었다. 실제 계명은 전부 613개 - 적극적 계명248개, 소극적 계명 365개 - 로 계산되었다. 이 계명들은 새로운 법들을 만듦으로써 보호되었다. 이 새로운법들의 준수가 기본적인 계명들의 준수를 보장해 주었다. 이것을 '율법에 울타리를 친다'고 한다. 끝으로확대된 법들은 유추에 의해 생활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었다. 구전 율법은 문명의 변화와 더불어 그것을 적용해야 할 새로운 상황들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결코 완결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구전 율법은 탈무드에서 그 한계가 정해진 형태로 나타났다고 간주된다. 구약전체에 대한 공식적이면서도경건생활 위주의 주석들(학가다)을 모아놓은 미드라쉬(Midrash)도 탈무드에는 못미치지만 구전 율법으로어느 정도 그 한계가 정해진 형태이다. <보라> 탈무드
탈무드는 두 부분으로 나누인다. 미쉬나는 랍비예후다 하나시(Yehuda ha-Nasi, 200년경의 인물)를 주축으로 하여 성문화되어진 구전 율법서이며, 대부분의 미드라쉬와 달리 미쉬나는 생활 법률(할라카)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실상 모세 오경의 법률적 측면에 관한 주해서이다. 또한 아람어로 된 게마라는 미쉬나에관한 풍부한 주헤서로서, 그것은 애매한 점들을 정확히 밝혀 줄 뿐만 아니라 초기 유대교의 모든 측면들에관해 한없는 빛을 던져 준다. 미완성의 팔레스타인 형태보다 긴 바벨론판은 사실상 500년에 완성되었으며,전자는 그보다 약 1세기 앞서 단절되었다. 탈무드를신약성경과 비교하기보다 교회 교부들과 비교하는 편이 훨씬 공정하다.
(4) 인간과 율법 준수. 유대교에 율법주의가 널리퍼지긴 했으나 유대교를 단순한 율법주의로 단정하는것은 매우 부당하다. 율법주의를 입증하기 위해 탈무드에서 단골로 인용되는 구절들은 법을 생활에 결의론적으로 적용하기 위하여 어떤 편람을 찾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율법주의의 경향은 율법 준수는 바른의도를 지녀야 하며, 율법은 결과적인 어떤 보상을 위해서가 그 자체를 위해서 실천되어야 한다는 랍비들의 주장에 의해 완화되었다. 랍비들은 율법의 수여를최고의 은혜의 행위로 간주하였으며, 율법 준수는 사랑의 응답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같은 체계는 율법준수의 실패보다 성공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따라서'주목할 만한 죄의 가증스러움과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실천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은 과소평가되었으며, 이런 경향은 70년 제사가 없어지면서 강화되었다. 유대교에는 기독교의 원죄의 교리와 진정으로비교될 수 있는 것을 전혀 모른다. 인간은 악한 성향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이 악한 성향은 이와 동등하게 타고난 선한 성향에 의해 균형을이루었으며, 이 선한 성향이 율법 연구에 의해 강화되면 악한 성향을 누르게 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죄와인간 본성에 대한 이런 과도한 낙관적 관점은 유대교전반에 걸쳐 발견된다.
이보다 중대한 것은 율법에 정통한 사람의 자율성문제이다. 율법이 절대적 권위를 갖긴 하지만 하나님은 율법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율법의 요구가 어떤 것이 될 수 있는가를 발견하도록 허용하신다. 탈무드에는 심지어 랍비 아키바가 모세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모세의 율법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에 모세는 그의 주해를 이해할 능력이 없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선에 배치된다고 하며 명시적인계명들이 고의적으로 회피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 가장 좋은 예가 신명기 15:1-3의 안식년 규정이다. 또한 대중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는 규정을 줄이려는 경향도 보였다. 이것은 마23:4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그의 지식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것은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의 특권이다.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의 위선성을 비판하셨던 배후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의 계시를 마음대로 통제하고 주무르는 이들의 이같은 태도가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겸손에 대한 랍비들의 끊임없는 훈계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모르는 대중을 무시하는 태도(요7:49)는 유대교 문헌에서 너무나 자주 보인다. 유대교는 율법의 준수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전면적으로 강조하고, 하나님의 계명의 전체 영역을 찾아내는데 지적 역량을 총동원하였던 탓에 기독교권의 해악이 되어온 신학적 논쟁으로 시달린 경우는 별로 없었다. 하나님의 완전한 일체성과 유일무이성, 율법의 절대 권위와 궁극성, 이스라엘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율법의 요구를 지키는 사람인 경우 철학적이며 신비적인 이론들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유대교가 정통 교리라기보다 정통 실천(바른 실천)이라는 주장은 타당하다. 바리새파의 견해가 승리를 거둔 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사회의 심각한 분열은 율법 해석의 원리문제로 8세기에 단 한번 있었을 뿐이다.
(5) 메시야. 유대교에는 메시야에 대한 매우 다양한 전망이 존재하였지만 A. D. 200년까지 메시야에 어떤 초자연적 요소가 있을 것으로 믿은 흔적은 전혀 없다. 메시야는 먼저 외국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해 주실 위대한 구원자이며, 그런 후 율법을 진정으로 준수하게 하실 자이다. 메시야 시대는 내세와의 연결고리이며, 그 기간은 제한되어 있다.
(6) 하나님. 하나님에 대한 랍비들의 어느 문헌을 보아도 대부분의 경우 구약 계시에 충실하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신관과 다른 점은 대략 다음과 같다. 지상에 임할 내세는 하늘에 임할 내세 개념만큼 영원자와의 긴밀한 접촉을 내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 거룩하심을 함축된 의미로 나타내는데 대한 관심이 적다. 빈번히 나타나는 신비가들의 경우가 아니면 영적 교제보다 섬김을 더 강조하기 때문에 '속죄'의 문제가 충족되는 경우가 드물다. 아무튼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화목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성육신의 개념은 선험적으로 배제되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간극이 또한 너무 크다.
유대교는 승리한 교회와 갈등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초원성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진정한 내재성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유대교의 경건에서 끊임없이 강조되는 내재성은 항상 반(半)범신론적인 요소를 지닌다. 하나님의 일체성은 삼위일체 교리를 가증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용어로 규정되었고, 하나님은 점점 더 부정적인 용어로 서술되어 그가 하시는 일들을 통해서가 아니면 인식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유대인에게 구약의 기초가 너무나 강력하여 오랫동안 이런 입장에 만족하기는 힘들었으며, 그리하여 늘 반복하여 신비주의를 통해 그 출구를 모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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