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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전대 / 전도(하다) / 전도인(전도자) / 전도서

전대 bag

돈이나 물건을 넣어 몸에 지니도록 만들어진 양쪽 끝이 터진 자루를 지칭한다(수9:4). 성경에서는 은을 담는 자루를 말하기도 하며(왕하5:23), 또는 도적질한 물건을 한 곳에 두자는 의미(잠1:14), 구멍난 전대에 돈을 넣음이 된다는 표현의 헛된 수고를 상징하기도 하였다(학1:6). 신약에서는 돈주머니, 즉 전도하러 다니는 데 쓰이는 경비를 비유적으로 묘사하였는데, 예수께서는 전대를 지니고 다니지 말라고 하셨다(눅10:4).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전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전도/-하다 preach

신약성경에서 전도란 '비기독교 세계를 향하여 기독교 신앙을 공표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열리지 않초신자들에게 하는 종교적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구속 활동을 숨김없이 공공연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1. 어원. 가장 독특한 것은 '전달자로서 공포하다’라는 뜻을 가진 '케륏소' 이다. 고대에 전달자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정직하고 평판이 좋은 사람은 왕이나 국가에서 임용하여 공개적으로 알리는 일을 맡겼다. 전도하는 것은 전달하는 것이다. 선포되는 메시지는 구원의 기쁜소식이다. 다른 하나는 '좋은 소식을 가져오다' 라는 뜻의 '유앙겔리조마이' (어원, 유스 '좋은' +앙겔로 '알리다' )로서 메시지 자체의 특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전도하는 것(케뤼그마 '공적인 선포')과 가르치는 것(디다케 '윤리적 교훈')을 구별하는 것이 이례적인 것은 아니다. 마태가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간추려 말한 구절에서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가르치시며 ・・・ 전파하시며・・・고치시니" (마4:23)라고 말하고 있으며 바울은 로마서 12:6-8과 고린도전서 12:28에서 성령의 은사로 언급하고 있다. 이 두 활동들이 관념적으로는 별개의 것이겠지만 모두 동일한 밑바탕에 근거하고 있다. 케뤼그마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선포하는 것이며 디다케는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위하여 그 일이 내포하고 있는 바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의 본질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좁은 의미로 전도를 정의했다고 해서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전례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신의 강권 하심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했던 히브리 선지자들은 분명 사도적 전도자의 선구자들이었다. 요나는 '선포하라' (욘3:2 히. 카라 부르다')는 명령을 받았으며 노아는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 (벧후2:5, 새번역)으로 명시되었다. 칠십인역은 30회 이상 '케륏소' 를 사용하는데, 일반적인 의미로서 왕의 행정적인 공표에 대해서도 사용되었지만 예언의 말씀들에서 종교적인 의미로 더욱 자주 언급된다(참고, 욜1:14;슥9:9;사61:1).
2. 신약성경에서의 특징. 신약성경의 전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아마도 신이 강권하신다는 사상일 것이다. 마가복음1:38에 기록되기를, 예수께서는 그의 치유능력을 갈구했던 자들에게 되돌아 가시지 않고 타지역의 전도를 위하여 길을 재촉하셨다("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공회의 구제에 대하여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행4:20)고 말했으며, 사도 바울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음이로라”(고전 9:16)고 했다. 전도는 윤리적으로 공정한 진리들을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오시고 결단을 요구하시면서 만나시는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이러한 전도의 태도는 종종 저항에 부딪히는데, 바울은 고린도후서 11:23-28에서 복음을 위하여 자신이 겪은 고난들을 열거하고 있다.
사도적 전도의 또다른 특징은 메시지와 동기의 명백성이다. 전도는 믿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달변의 지혜와 고상한 언어로는 그 결과가 불분명하다는 것(고전1:17;2:14)이 실로 중요하다. 바울은 기교를 부리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새번역 '왜곡하지' 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써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를 천거(새번역 '떳떳하게 내세웁니다' 하고자 했다(고후4:2). 사람의 마음과 양심에서 일어나는 급격한 변화인 거듭남은 설득력있는 미사여구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직접적인 제시에 의하여 오직 복음의 단순성과 능력안에서 그것의 직접적인 제시로 말미암는 것이다.
3. 전도의 본질. 복음서에서 예수는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오신 자로 묘사된다. 누가복음4:16-21에서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장차 오실 종으로서의 메시야(결국 그로 말미암아 실현될)에 대한 예언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신다. 이 나라에 대한 가장 적절한 이해는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 내지는 '주권적인 행동'이다. 그 나라에 속한 어떤 국가나 백성을 가리키는 것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예수의 케뤼그마의 기본적인 내용은 하나님의 영원한 주권이 악한 세력들의 나라에 의해 침범되었고 결정적으로는 승리를 거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공관복음으로부터 나머지 신약성경으로 옮겨가보면 용어상의 중요한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대신에 '그리스도'가 선포되는 메시지의 내용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양하게 표현되었는데,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고전1:23), '그리스도께서 ・・・ 다시 살아나셨다' (고전15:12),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고후1:19) 또는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 (고후4:5) 등이다. 이러한 강조점의 변화는 그리스도께서 그 나라에 계신다는 사실로써 설명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즉 그 나라가 전우주적으로 세워지기를 기대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것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주권이 인간의 역사속으로 실현된 결정적인 행동이었다. 구속의 역사를 따라서 사도적 교회는 왕에 대하여 보다 명료하게 결정된 용어를 가지고 그 나라를 전파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를 전도하는 것은 곧 그 나라를 전도하는 것이다.
근래 신약성경 학자들이 이루어 놓은 매우 중요한 성과들 가운데 하나는 다드(C. H. Dodd)가 원시 케뤼그마(초대교회에서 전도한 복음의 내용)를 구체화시킨 것이다. 그의 접근(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의 말투와 바울의 신앙고백적인 단편들을 비교하는 것)을 따르기는 하지만 약간 강조점을 달리해서 자료들을 해석한다면, 우리는 사도적 메시지의 내용이 예수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에 대한 선포였다는 것과 이것이 예수의 인격을 주님이시요 그리스도라고 인정하게끔 했으며 사람들이 회개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써 제시되었고 죄의 용서가 약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전도는 보다 넓은 주제인 계시와 관련해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계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이며 믿음이라는 응답으로 깨달을 수 있다.골고다 사건은 하나님의 완전한 자기 계시이기 때문에,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과거의 사건을 통하여 오늘 자신을 드러내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그 대답은 전도이다. 왜냐하면 전도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깨달 사이를 시간을 초월하여 연결해 주기 때문이다. 전도는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적인 자기계시를현재화 시키고 사람에게는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는기회를 주는 매개체인 것이다.

전도인/전도자 evangelist

일반적으로 전도하는 사람으로, 성경에서는 간혹 복음 전하는 자로 번역되어 초대교회에 나타난 직분자 중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들은어떤 교회에 연고를 두지 않고 자유롭게 나가서 복음을 전파했는데(엡4:11),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을 전도자라고 불렀으며 (행21:8),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전도인의 일을 하며 직무를 다하기를 부탁한다(딤후4:5). 그러나 구약에서는 이 말이 단순히 전도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전1:1).

전도서 The Book of Ecclesiastes

전통적으로 이 책의 저자는 솔로몬이라고 인정되어 왔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사실에 기초한다. 먼저 이 책의 첫 구절은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전1:1)고 되어 있다. 또한 저자 자신의 지혜에 관련된 언급(1:16), 잠언에 대한 언급(12:9), 그리고 성전과 왕궁의 건축과 관련된 것 같은 언급(2:411) 등은 이 책의 저자가 솔로몬일것이라는 추측을 강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루터 이후의 많은 학자들은 이 책이 솔로몬의 저작이라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전도서에는 실제로 저자로서 솔로몬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다. 단지 '예루살렘에서 된 이스라엘의 왕' (전1:12)이라고만 밝히고 있는데, 그것이 솔로몬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확정짓기는어려우며, 전도서에 쓰여진 언어들은 솔로몬 시대보다후대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전도서는 하나님을 멀리한 삶의 비극을 묘사하고있다. 자연과 인생을 깊이 관찰한 전도서 기자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들의 삶에 그 어떤 목적과 의미를 부여해 주지는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한다.그는 자연의 끊임없는 순환을 관찰하고(1:2-11) 그 안에서 허무를 발견하였다. 만물은 만족을 제공해 주지못하여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다" (1:8). 심지어 지혜(1:16-18;2:12-17), 즐거움(2:1-8), 수고(2:18-23)도 다 헛된 것이라고 말한다. 거기에는 만족이 없으며 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1:17). 전통적으로주석가들은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구절을 통해 이 책의 성격을 '쾌락주의'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저자의 진정한 의도가 쾌락주의에 있다고보기는 어렵다. 저자는 '즐거움' 도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2:1). 전도서 기자는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3:16-22) 사람이 동물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그가 내린 이 결론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자기 자신을 깨닫게 될 때 진리로 드러난다(3:18-19).
전도서에는 만족의 신학이라고도 불릴 수 있을 만한 긍정적 인생관이 발견된다. 비록 인생의 본질과 의미가 헛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전도서는 읽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즐거워하라고 권유한다. 왜냐하면바로 하나님 그분께서 우리에게 특권을 부여하시기때문이다(2:2426). 그러나 만족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아니며, 죄인의 일은 헛된 수고일 뿐이다. 그러므로인간에게 있어서 '만족함'이 최선은 아니다. 전도서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심판하시게 될 미래의 때가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이것은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던전도자의 결론이다(12:14). 그러므로 전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에게 복종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날 모든 것이 계산될 것이기 때문이다(13-14절). 본서가 정경에 든 것은 그것의 인기와 솔로몬의 글이라는 까닭 때문이다.신약에서는 본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독일 시인하이네는 본서를 '회의주의의 소개 (小)라고 불렀으며, 루난은 “유대인이 쓴 책 중에 오직 하나의 매력이있는 책으로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문헌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