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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K BIBLE

헬라어 로마서 14장 전체 원어 원문 성경 공부 주석 강해 설교 해설 해석

 

톤 데 아스데눈타 테 피스테이 프로슬람바네스데 메 에이스 디아크리세이스 디알로기스몬

 

개역개정,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새번역,1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 ㉠또는 '확신'
우리말성경,1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사람을 받아들이되 그의 견해를 논쟁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가톨릭성경,1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나 여러 견해를 두고 논쟁생각으로 그렇게 하지는 마십시오.
영어NIV,1 Accept him whose faith is weak, without passing judgment on disputable matters.
영어NASB,1 Now accept the one who is weak in faith, but not for the purpose of passing judgment on his opinions.
영어MSG,1  Welcome with open arms fellow believers who don't see things the way you do. And don't jump all over them every time they do or say something you don't agree with--even when it seems that they are strong on opinions but weak in the faith department. Remember, they have their own history to deal with. Treat them gently.
영어NRSV,1 Welcome those who are weak in faith, but not for the purpose of quarreling over opinions.
헬라어신약Stephanos,1 τον δε ασθενουντα τη πιστει προσλαμβανεσθε μη εις διακρισεις διαλογισμων
라틴어Vulgate,1 infirmum autem in fide adsumite non in disceptationibus cogitationum
히브리어Modern,1 ואת החלוש באמונה אותו קבלו ולא לדין את המחשבות׃


 

성 경: [14:1]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강한 자와 연약한 자]

󰃨 믿음이 연약한 자를(*, 톤 데 아스데눈타테 피스테이) - 한글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접속사 ''(*, '한편')12:1-15:13에 이르기까지의 대 문단 내의 새로운 소 단락으로서 새로이 주제가 전환됨을 표시해 준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말은 4:19'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라는 말을 상기시켜 준다.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에 의하면 본절의 '연역한 자'(*, 아스데눈타)란 말과 4:19의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스데네사스)란 말이 모두 '약하다'를 의미하는 '아스데네오'(*)의 변화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서 살펴볼 때 즉 4:19'약하여지다'는 여기 본문의 구절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4:19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약화, 다시 말해서 불리한 환경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신뢰하지 못한 행위를 의미하지만, 본절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구원의 근본 원리로서의 '믿음'이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고전 8:7, 9, 10;9:22'아스데네스'(*, '약한')나 고전 8:11, 12'아스데네오'(*, '약하다')를 통해 알 수 있는 성격의 약함이다. 즉 본절에서 말하는 믿음의 연약성은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의 연약성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일을 행하는데 있어 확신이 약하다는 뜻이다(Sanday and Headlam).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볼 때 '믿음이 연약한 자'란 아직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모르거나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8:26). 그런데 본절의 경우에 있어서 '믿음이 연약한 자'란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엇을 먹어야 하고 어떤 날을 예배일로 지켜야 되는지에 관한 율법 사항들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나치게 세심한 신자들을 가리킨다. 즉 교회 내부의 유대적 요소를 지키기를 주장하는 자들을 말한다. 이런 자들은 그들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려야 할 자유를 지각(知覺)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Calvin, Harrison).

󰃨 너희가 받되(*, 프로슬람바네스데) - 이 단어는 '받아 들이다', '환영하다', '영접하다', '친절하게 대하다'를 가리키는 '프로슬람바노'(*)2인칭 복수 현재 명령형으로 '너희들이 받아 들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명령의 대상이 되는 '너희들'은 대체적으로 '강한 자들'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강한 자들은 음식물에 관한 이전의 구약성경의 규례를 문자적으로 지키기를 거부하고 또한 어떤 특정 음식을 피하는 일에서 자유로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약한 자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 자신들의 동아리 안에 그들을 받아 들이고 동시에 그들을 솔직하고 거리낌없이 교제하며 같은 주님을 믿는 형제들로서 따뜻하게 인정해야 했다. 또한 이 단어는 공동체 전체 안에서의 공식적인 인정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교제에서 형제로서의 용납을 의미한다(Kasemann). 그런 의미에서 '프로슬람바노'는 행 18:2728:2에서도 같은 용례로 사용되었는데 모든 일에 있어서 마음 속에서 우러 나오는 환영을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을 암시한다(welcome;RSV, LB).

󰃨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 바울은 여기서 연약한 자를 받을 때 특별히 주의할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형제를 받아들이는 일은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는 성향이 있는 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연약한 자는 그가 주장하는 대로 그리스도인 형제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행동의 기초가 되는 생각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강한 자들이 해야 할 일은, 연약한 형제로 하여금 자기의 연약함으로 인해 공동체 안에서 열등감이나 결함, 혹은 색다름을 느끼지 않도록 그를 받아들이는 사랑을 베푸는 일뿐이다. 여기서 '비판'을 가리키는 '디아크리세이스'(*)'다툼', '구분', '판단', '결정', '논쟁' 등의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며 '의심'을 가리키는 '디알로기스몬'(*)'추론', '생각', '의견', '거리낌', '주저함' 등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디아크리세이스''비판', 혹은 '판단'이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고 '디알로기스몬'의 가장 적절한 의미는 '거리낌'인 듯하다(Cranfield). , 약한 형제가 꺼려하는 일들을 비판 내지는 판단함으로써 그 형제를 받아들이는 일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의미에서 이 조건을 도입한 것이다. 아울러 이 구절은 강한 자들이 누리는 내적 자유에 대한 외적 표현을 약한 자들에게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는 바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Sanday and Headlam).

 

 

 

호스 멘 피스튜에이 파게인 판타 호 데 아스데논 라카나 에스디에이

 

개역개정,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새번역,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습니다.
우리말성경,2 어떤 사람은 모든 음식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으나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습니다. 
가톨릭성경,2 어떤 사람은 무엇이나 다 먹을 수 있다고 믿지만, 믿음이 약한 이는 채소만 먹습니다.
영어NIV,2 One man's faith allows him to eat everything, but another man, whose faith is weak, eats only vegetables.
영어NASB,2 One man has faith that he may eat all things, but he who is weak eats vegetables only.
영어MSG,2  For instance, a person who has been around for a while might well be convinced that he can eat anything on the table, while another, with a different background, might assume all Christians should be vegetarians and eat accordingly.
영어NRSV,2 Some believe in eating anything, while the weak eat only vegetables.
헬라어신약Stephanos,2 ος μεν πιστευει φαγειν παντα ο δε ασθενων λαχανα εσθιει
라틴어Vulgate,2 alius enim credit manducare omnia qui autem infirmus est holus manducat
히브리어Modern,2 יש מאמין כי נכון לאכל כל דבר והחלוש יאכל רק את הירק׃


 

성 경: [14:2]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강한 자와 연약한 자]

󰃨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 음식물에 관한 금기(禁忌)가 바울 당시에는 흔히 있었다. 유대적 전통(11:1-47)도 있었고 생명있는 것을 꺼린다는 당시의 통념에 사로잡힌 자들도 있었다. 물론 고대에는 식물도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개념이 아직 발전되지 않았다. 또한 금욕 생활을 하고자 하는 열정에서 음식을 절제하는 자도 있었다. 이런 시대적 경향들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동조하는 자도 있었고 그렇지 않는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믿음이 있는'(*, 피스튜에이)이란 말의 의미는 그 반대말 '연약한 자'(*, 아스데논)란 말에 의해 결정된다. , 연약한 자와는 달리 거리낌없이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는 뜻이다(Meyer, Godet). 바울 역시 믿는 자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견을 같이 한다. 이것이 바울의 기본 입장이었다(딤전 4:3, 4). 한편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음식물을 채소로 제한한다. 여기서 '채소를 먹느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라카나 에스디에이'(*)로서 육식과 정반대되는 채소만 먹는다는 뜻이다. , 채소 외의 다른 것을 먹지 아니한다는 것이다(9:3;15:17;Godet). 그들이 음식물에 대해 이 같은 태도를 취한 데에는 의도적으로 부정한 음식을 피한다는 종교적 이유(11), 고기를 먹지 않으면 보다 건강하게 된다는 건강상의 이유, 그리고 살아있는 것을 먹기를 꺼려하는 의식적인 이유 등이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연약한 자들의 이 같은 자기 제한(먹거나 안 먹거나 하는 문제)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이 지닌 신앙의 분량에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이다(12:3).

 

 

 

호 에스디온 톤 메 에스디온타 메 엨수데네이토 호 데 메 에스디온 톤 에스디온타 메 크리네토 호 데오스 가르 아우톤 프로셀라베토

 

개역개정,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새번역,3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말성경,3 먹는 사람은 먹지 못하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3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은 가려 먹는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고, 가려 먹는 사람은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영어NIV,3 The man who eats everything must not look down on him who does not, and the man who does not eat everything must not condemn the man who does, for God has accepted him.
영어NASB,3 Let not him who eats regard with contempt him who does not eat, and let not him who does not eat judge him who eats, for God has accepted him.
영어MSG,3  But since both are guests at Christ's table, wouldn't it be terribly rude if they fell to criticizing what the other ate or didn't eat? God, after all, invited them both to the table.
영어NRSV,3 Those who eat must not despise those who abstain, and those who abstain must not pass judgment on those who eat; for God has welcomed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3 ο εσθιων τον μη εσθιοντα μη εξουθενειτω και ο μη εσθιων τον εσθιοντα μη κρινετω ο θεος γαρ αυτον προσελαβετο
라틴어Vulgate,3 is qui manducat non manducantem non spernat et qui non manducat manducantem non iudicet Deus enim illum adsumpsit
히브리어Modern,3 האכל אל יבז את אשר לא יאכל ואשר לא יאכל אל ידין את האכל כי קבל אתו האלהים׃


 

성 경: [14:3]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강한 자와 연약한 자]

󰃨 업신여기지 말고 - 바울은 믿음이 강한자와 약한 자가 범하기 쉬운 두 가지 위험한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 먼저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에 대해서 '업신여기지 말아야'(*, 메 여수데네이토)할 것을 명령한다. 여기서 이 용어는 '여수데네오'(*)의 현재 중간태 명령법으로 '업신여김', '멸시함'(contempt, NEB) '경멸함', '얕봄'(despise, KJV)의 의미로 쓰여졌다.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소심한 태도를 멸시하는 눈초리로 대한다면 그리스도의 공동체에서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가 단절되고 말 것이다(Godet).

󰃨 판단하지 말라 -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는 강한 자에 대해서 '판단하지 말라'(*, 메 크리네토)고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대하는 태도를 언급하면서 '정죄'(*, 카타크리시스)라는 표현보다 '판단'(*, 크리네인)이란 단어를 쓴 것은 주로 강한 자들의 행위를 비판함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Lenski). 음식을 채소로만 제한하는 연약한 자들은 모든 음식을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자유를 가진 믿음이 강한 자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그들을 성급하게 판단하였던 것이다.

󰃨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 이 말씀은 믿음이 강한 자나 연약한 자 양쪽 다 언급한 것으로 특별히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좀더 강조점을 둔 것이다(Godet). 강한 자나 연약한 자는 결코 서로 멸시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바울은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저를 받으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강한 자든 연약한 자든 구별치 않고 양쪽 모두 자신과의 교제 관계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容納)하셨던 것이다(Robertson).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 사이에 서로 멸시하고 판단하는 일에 계속된다면 그것은 아무 조건 없이 그들 모두를 용납하셨던 하나님을 배척하게 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Calvin).

 

 

 

쉬 티스 에이 호 크리논 알로트리온 오이케텐 토 이디오 퀴리오 스테케이 에 핖테이 스타데세타이 데 뒤나테이 가르 호 퀴리오스 스테사이 아우톤

 

개역개정,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새번역,4 ㉡우리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비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지 넘어지든지, 그것은 그 주인이 상관할 일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할 수 있으시니,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 ㉡그, '당신이'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말성경,4 여러분이 누구기에 남의 종을 판단합니까? 그의 서고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께서 그를 세우실 수 있으니 그가 세움을 받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4 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영어NIV,4 Who are you to judge someone else's servant? To his own master he stands or falls. And he will stand, for the Lord is able to make him stand.
영어NASB,4 Who are you to judge the servant of another? To his own master he stands or falls; and stand he will, for the Lord is able to make him stand.
영어MSG,4  Do you have any business crossing people off the guest list or interfering with God's welcome? If there are corrections to be made or manners to be learned, God can handle that without your help.
영어NRSV,4 Who are you to pass judgment on servants of another? It is before their own lord that they stand or fall. And they will be upheld, for the Lord is able to make them stand.
헬라어신약Stephanos,4 συ τις ει ο κρινων αλλοτριον οικετην τω ιδιω κυριω στηκει η πιπτει σταθησεται δε δυνατος γαρ εστιν ο θεος στησαι αυτον
라틴어Vulgate,4 tu quis es qui iudices alienum servum suo domino stat aut cadit stabit autem potens est enim Deus statuere illum
히브리어Modern,4 מי אתה כי תדין את עבד האחר הן לאדניו הוא יקום או יפל אבל יוקם כי יכל האלהים להקימו׃



성 경: [14:4]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강한 자와 연약한 자]

󰃨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 바울은 위와 같은 사실을 논증하기 위해 하인과 주인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 반문의 형식은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 즉 먹는 자와 먹지 못하는 자를 엄히 질책(質責)하고 있는 것이다. 집 주인을 제쳐두고 서로 멸시하거나 판단하는 하인이 있다면 그 같은 행동은 주인의 영역을 월권(越權)하는 행동이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주인 앞에서 정당화 될 수 없다(Harrison). 하인들의 행위는 오직 주인만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인들의 행위는 주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하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둘로스'(*, '노예')가 아니라 '오이케텐'(*, '가사를 돌보는 머슴')이다(Bruce).

󰃨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 바울은 계속해서 종의 행위에 대한 전적인 책임은 그를 세운 주인에게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 퀴리오스)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진실로 집 주인이다(Godet). 그는 그의 집 하인들을 다스릴 '권능'이 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나테이'(*)는 바울의 서신서에서만 발견되는 동사(고후 9:8;13:3)로 하인을 다스릴 수 있는 주인의 왕적 능력을 묘사하고 있다(Dunn). 이 처럼 믿음이 강한 자나 약한 자에게 있어서 멸시하고 판단하는 행위는 그를 세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을 판단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바울은 서로를 멸시하고 판단하는 일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

 

 

 

호스 멘 가르 크리네이 헤메란 파르 헤메란 호스 데 크리네이 파산 헤메란 헤카스토스 엔 토 이디오 노이 플레로포레이스도

 

개역개정,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새번역,5 또 어떤 사람은 이 날이 저 날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이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각각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말성경,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이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각자 자기 마음에 확신을 가지십시오. 
가톨릭성경,5 또 어떤 사람은 어떤 날이 다른 날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다른 사람은 어느 날이나 다 같다고 여깁니다. 저마다 자기 판단에 자신을 가져야 합니다.
영어NIV,5 One man considers one day more sacred than another; another man considers every day alike. Each one should be fully convinced in his own mind.
영어NASB,5 One man regards one day above another, another regards every day alike. Let each man be fully convinced in his own mind.
영어MSG,5  Or, say, one person thinks that some days should be set aside as holy and another thinks that each day is pretty much like any other. There are good reasons either way. So, each person is free to follow the convictions of conscience.
영어NRSV,5 Some judge one day to be better than another, while others judge all days to be alike. Let all be fully convinced in their own minds.
헬라어신약Stephanos,5 ος μεν κρινει ημεραν παρ ημεραν ος δε κρινει πασαν ημεραν εκαστος εν τω ιδιω νοι πληροφορεισθω
라틴어Vulgate,5 nam alius iudicat diem plus inter diem alius iudicat omnem diem unusquisque in suo sensu abundet
히브리어Modern,5 יש מבדיל בין יום ליום ויש אשר כל הימים שוים בעיניו ויהי כל איש נכון בדעתו׃


 

성 경: [14:5]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본절에서는 날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다루었다. 바울은 사람들이 날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일반적인 성향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특별히 종교적 의무와 관련하여 안식일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인류 사회가 길일(吉日)과 흉일(凶日)을 구분하여 날들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에 복음이 전하여졌을 때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분명히 있고, 비록 복음이 전해진 사회에서도 성도의 자유 문제와 연관지어서(4:9ff.;2:16) 안식일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 '혹은...혹은...'(* ... ..., 호스멘...호스 데...)은 앞뒤 문장이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지시 대명사이다(Robertson). 본 구절은 사람들이 날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성향을 말하고 있는데, 어떤 날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다른 날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 헬라어 본문에는 '같게'(alike)라는 말이 없다. 그러나 모든 역본들(공동번역,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KJV, RSV, NASB, NIV, NEB)에서는 앞뒤 문장이 대조를 이루는 것을 감안하여 의미상 '같게'라는 말을 첨가하였다. 모든 날을 같게 여긴다는 것은 모든 날들이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되어야 할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Bruce). 이에 바울의 가르침대로 따른 자도 있었지만, 종교적 양심으로 인하여 따르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바울은 날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시키면서 ''에 대한 논쟁을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 이는 다른 사람이나 종교적인 규례로부터 영향을 받지 말고 주체적인 신앙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모든 날이 주의 것이라고 가르치고, 날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자들은 이러한 자유함을 육체의 기회로 삼거나(5:13), 또 어떤 이들은 이로 인해 걸림돌이 되었고(고전 8:9), 어떤 이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고 하는 것은 신앙은 먼저 자신과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결단할 것을 중요하게 여겨 무엇보다도 그 관계가 우선되어야지 다른 사람과의 결단이 그보다 우선되거나 중요하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호 프로논 텐 헤메란 퀴리오 프로네이 카이 호 에스디온 퀴리오 에스디에이 유카리스테이 가르 토 데오 카이 호 메 에스디온 퀴리오 우크 에스디에이 카이 유카리스테이 토 데오

 

개역개정,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새번역,6 어떤 날을 더 존중히 여기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요,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먹으며, 먹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먹지 않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먹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말성경,6 어떤 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주를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먹는 사람도 주를 위해 먹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께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먹지 않는 사람도 주를 위해 먹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가톨릭성경,6 특정한 날을 중시하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중시하는 것이고,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도 하느님을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가려 먹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가려 먹으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영어NIV,6 He who regards one day as special, does so to the Lord. He who eats meat, eats to the Lord, for he gives thanks to God; and he who abstains, does so to the Lord and gives thanks to God.
영어NASB,6 He who observes the day, observes it for the Lord, and he who eats, does so for the Lord, for he gives thanks to God; and he who eats not, for the Lord he does not eat, and gives thanks to God.
영어MSG,6  What's important in all this is that if you keep a holy day, keep it for God's sake; if you eat meat, eat it to the glory of God and thank God for prime rib; if you're a vegetarian, eat vegetables to the glory of God and thank God for broccoli.
영어NRSV,6 Those who observe the day, observe it in honor of the Lord. Also those who eat, eat in honor of the Lord, since they give thanks to God; while those who abstain, abstain in honor of the Lord and give thanks to God.
헬라어신약Stephanos,6 ο φρονων την ημεραν κυριω φρονει και ο μη φρονων την ημεραν κυριω ου φρονει ο εσθιων κυριω εσθιει ευχαριστει γαρ τω θεω και ο μη εσθιων κυριω ουκ εσθιει και ευχαριστει τω θεω
라틴어Vulgate,6 qui sapit diem Domino sapit et qui manducat Domino manducat gratias enim agit Deo et qui non manducat Domino non manducat et gratias agit Deo
히브리어Modern,6 השמר את היום לאדון שמר אתו ואשר איננו שמר את היום לאדון איננו שמר האכל לאדון הוא אכל כי מודה הוא לאלהים ואשר איננו אכל לאדון איננו אכל ומודה הוא לאלהים׃


 

성 경: [14:6]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 흠정역(KJV)에는 '날을 중히 여기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해 중히 여기지 않으며'(and he that regardeth not the day, to the Lord he doth not regard it)라는 문구가 첨가되어 문맥에 어울리도록 했지만, 헬라어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다. 이처럼 바울이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를 추정해 보면, (1) 문맥상 생략해도 뜻이 통하는 것으로 여기고 구차하게 언급하지 않았거나, (2) 날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는 논지는 앞에서 언급하였기 때문에 생략했거나, (3) 독자들이 날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상태를 지적하여 날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주를 위해서라면 가능하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 여기서 '주를 위하여'(*, 퀴리오;'주에게')'하나님께 감사한다'(*, 유카리스 테이 토 데오)라는 문구가 반복되는데, 이는 사람들의 눈에 '약한 자'가 됐든지, '강한 자'가 됐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의식하면서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리킨다(Harrison). 사도 바울은 먹는 것에 대해 자유로울 것을 가르치면서(딤전 4:3ff.), 이러한 문제로 교회가 나누어지거나, 헛된 논쟁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지금까지 언급하였던 음식과 날에 대한 로마 성도들의 태도를 일단 정리한다.

 

 

 

우데이스 가르 헤몬 헤아우토 제 카이 우데이스 헤아우토 아포드네스케이

 

개역개정,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새번역,7 우리 가운데는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또 자기만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말성경,7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없고 자기만을 위해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가톨릭성경,7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영어NIV,7 For none of us lives to himself alone and none of us dies to himself alone.
영어NASB,7 For not one of us lives for himself, and not one dies for himself;
영어MSG,7  None of us are permitted to insist on our own way in these matters.
영어NRSV,7 We do not live to ourselves, and we do not die to ourselves.
헬라어신약Stephanos,7 ουδεις γαρ ημων εαυτω ζη και ουδεις εαυτω αποθνησκει
라틴어Vulgate,7 nemo enim nostrum sibi vivit et nemo sibi moritur
히브리어Modern,7 כי אין איש מאתנו אשר יחיה לנפשו ואין איש אשר ימות לנפשו׃


 

성 경: [14:7]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 바울은 앞에서 음식 문제와 종교적으로 날짜를 지키는 문제 등 구체적으로 로마 교회 성도들의 두 가지 생활 영역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언급하였다(1-6). 바울은 교회 생활 영역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성도들이 취해야 할 생활 원리들을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으로 구분해서 종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먼저 성도들이 취해야 할 소극적인 생활 원리 중 첫번째는 성도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우데이스 헤몬 헤아우토 제'(*)로 여기서 '헤아우토'(*, '자기를 위하여')란 말은 하나님의 법과 반대되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와 대조되는 것으로서 현세의 연락(宴樂)과 육체적인 즐거움을 취하는 '자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바울의 신앙 고백이며(2:20)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사건 이후 바울의 일관된 삶의 원리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불신자의 삶과는 정반대의 삶이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역사는 자신의 욕심으로 점철(點綴)된 역사였다. 이러한 불신자의 삶의 세계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값으로 사신 바(고전 6:19, 20)되었고 자신의 유익을 위한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기 때문이다(Calvin). 성도의 소극적인 생활 원리 중 두번째는 성도는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우데이스 헤아우토 아포드네스케이'(*)로 성도의 삶은 죽음도 자신에 의하여 주관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예속된 것임을 나타낸다(Olshausen). 바울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9)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그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주를 위해서 죽는 것도 유익하다'(1:20, 21)고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삶의 원리들을 권면하기에 앞서 자신이 먼저 주를 위한 일관된 일사 각오(一死覺悟)의 삶을 살고 있었으며 따라서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므로 얻는 확신에 근거하여 다른 성도들을 향한 권면에서도 성도의 삶의 원리를 근본적인 모든 문제의 해결점으로 선언한 것이다.

 

 

 

에안 테 가르 조멘 토 퀴리오 조멘 에안 테 아포드네스코멘 토 퀴리오 아포드네스코멘 에안 테 운 조멘 에안 테 아포드네스코멘 투 퀴리우 에스멘

 

개역개정,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새번역,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말성경,8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습니다. 그러므로 죽든지 살든지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가톨릭성경,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영어NIV,8 If we live, we live to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to the Lord. So, whether we live or die, we belong to the Lord.
영어NASB,8 for if we live, we live for the Lord, or if we die, we die for the Lord; therefore whether we live or die, we are the Lord's.
영어MSG,8  It's God we are answerable to--all the way from life to death and everything in between--not each other.
영어NRSV,8 If we live, we live to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to the Lord; so then, whether we live or whether we die, we are the Lord's.
헬라어신약Stephanos,8 εαν τε γαρ ζωμεν τω κυριω ζωμεν εαν τε αποθνησκωμεν τω κυριω αποθνησκομεν εαν τε ουν ζωμεν εαν τε αποθνησκωμεν του κυριου εσμεν
라틴어Vulgate,8 sive enim vivimus Domino vivimus sive morimur Domino morimur sive ergo vivimus sive morimur Domini sumus
히브리어Modern,8 כי כאשר נחיה נחיה לאדון וכאשר נמות נמות לאדון לכן אם נחיה ואם נמות לאדון הננו׃


 

성 경: [14:8]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 바울은 본절에서 좀더 본질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에서 성도의 내적인 삶의 원리들을 제시하고 있다. 성도의 삶의 중심은 그리스도이다(Tholuck).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생()과 사()에 있어서 궁극적인 표준이 되신다(Hendriksen). 이 말씀은 앞절 '자기를 위하여 사는'(*, 헤아우토 제)과 대조되어 '투 퀴리우'(*, '주의 것')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린 값으로 산 것이 되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성도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거나 자신을 스스로 주장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전 6:19, 20)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왜, 음식과 절기의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생사(生死)의 문제까지 끌어올려 말하려고 하는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Lenski).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일상의 사소한 문제일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주께 대한 믿음과 청지기적 사명으로 부터 출발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서 하여야 한다(고전 10:31).

 

 

 

에이스 투토 가르 크리스토스 아페다넨 카이 에제센 히나 카이 네크론 카이 존톤 퀴리유세

 

개역개정,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새번역,9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죽은 사람에게도 산 사람에게도, 다 주님이 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말성경,9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이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주가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9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영어NIV,9 For this very reason, Christ died and returned to life so that he might be the Lord of both the dead and the living.
영어NASB,9 For to this end Christ died and lived again, that He might be Lord both of the dead and of the living.
영어MSG,9  That's why Jesus lived and died and then lived again: so that he could be our Master across the entire range of life and death, and free us from the petty tyrannies of each other.
영어NRSV,9 For to this end Christ died and lived again, so that he might be Lord of both the dead and the living.
헬라어신약Stephanos,9 εις τουτο γαρ χριστος και απεθανεν και ανεστη και ανεζησεν ινα και νεκρων και ζωντων κυριευση
라틴어Vulgate,9 in hoc enim Christus et mortuus est et revixit ut et mortuorum et vivorum dominetur
히브리어Modern,9 כי לזאת מת המשיח ויקם ויחי למען יהיה אדון גם על המתים גם על החיים׃


 

성 경: [14:9]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 이 말씀은 앞절에 대한 확증적 표현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죽은 자의 주가 되시고 다시 살으심은 산 자의 주가 되기 위해서임을 말하는 것이다(Bruce). 서두에 '이를 위하여'(*, 에이스 투토)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해 준다. 예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시기 위하여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심은(고전 15:3, 4;고후 5:15), 우주적인 만물에 대한 통치권과(Kasemann) 신자에게 있어서 모든 인생의 주권자가 되심을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Calvin). 한편 '다시 살으셨으니'로 번역된 헬라어 '카이 에제센'(*)'그가 소생하셨다'란 뜻으로 죽음에서 일어나신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신성(神性)과 구세주(救世主)로서의 예수님과 만물에 대한 그의 주권을 입증하는 것이다(Harrison). 또한 그것은 새로운 삶이 주를 위해서 예비되었으며 그의 성도에 대한 주권과 능력이 영원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쉬 데 티 크리네이스 톤 아델폰 수 에 카이 쉬 티 엨수데네이스 톤 아델폰 수 판테스 가르 파라스테소메다 토 베마티 투 데우

 

개역개정,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새번역,10 그런데 어찌하여 ㉣그대는 ㉤형제나 자매를 비판합니까?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 ㉣다른 고대 사본에는 '우리는' ㉤그, '형제'
우리말성경,10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판단합니까?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텐데 말입니다. 
가톨릭성경,10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영어NIV,10 You, then, why do you judge your brother? Or why do you look down on your brother? For we will all stand before God's judgment seat.
영어NASB,10 But you, why do you judge your brother? Or you again, why do you regard your brother with contempt? For we shall all stand before the judgment seat of God.
영어MSG,10  So where does that leave you when you criticize a brother? And where does that leave you when you condescend to a sister? I'd say it leaves you looking pretty silly--or worse. Eventually, we're all going to end up kneeling side by side in the place of judgment, facing God. Your critical and condescending ways aren't going to improve your position there one bit.
영어NRSV,10 Why do you pass judgment on your brother or sister? Or you, why do you despise your brother or sister? For we will all stand before the judgment seat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10 συ δε τι κρινεις τον αδελφον σου η και συ τι εξουθενεις τον αδελφον σου παντες γαρ παραστησομεθα τω βηματι του χριστου
라틴어Vulgate,10 tu autem quid iudicas fratrem tuum aut tu quare spernis fratrem tuum omnes enim stabimus ante tribunal Dei
히브리어Modern,10 ואתה למה זה תדין את אחיך או אתה למה תבוז לאחיך הלא כלנו עתידים לעמד לפני כסא דין אלהים׃


 

성 경: [14:10]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업신여기느뇨 - 바울은 앞서 3절에서의 책망을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다. 첫번째는 연약한 형제에 대한 언급이다. , 채소만 먹는 자들이 고기를 먹는 자를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판단하느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크리네이스'(*)로 의문문으로 말하고 있다. 이는 책망에 대한 좀더 강한 어조이다. 연약한 형제들은 자신들의 무지와 성숙하지 못한 신앙으로 믿음이 강한 자를 판단한다. 바울은 이들에 대하여 '너희가 무슨 권리와 근거로 그들을 일방적으로 판단하는가 ?'하며 연약한 자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보도록 질문 형식으로 그들의 행위를 깨우치고 있다. 두번째는 믿음이 강한 자들에 대한 언급이다. 믿음이 강한 자들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업신여겼다. ,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 고기도 먹고 채소도 먹는 자들이 채소만 먹는 자들을 업신여겼다. '업신여기느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여수데네이스'(*)로 강자가 약자를 멸시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업신여기는 교만한 태도를 책망하고 있다. 양자간에 이러한 태도는 결코 어느 쪽도 정당화 될 수 없는 모습이다. 왜냐하면 모두 온당치 못한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 바울은 자신을 포함하여 믿음이 강한 자나 연약한 자 모두가 서로간에 판단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장래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심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여기서 '심판대'에 해당하는 헬라어 '베마티'(*)는 운동 경기에서 심판이 서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장소에 있는 심판은 경기 도중에 규칙을 어기는 사람을 보면 즉시로 그들의 자격을 박탈하여 정정당당하게 경기하도록 하며 승리한 자에게는 상을 주었다(고전 9:24-27). 따라서 각자는 그 날에 자기가 행한 대로 직고하며 선악간에 심판을 받을 것이니 남을 판단하거나 업신여기는 행위를 삼가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11, 12).

 

 

 

게그랖타이 가르 조 에고 레게이 퀴리오스 호티 에모이 캄프세이 판 고뉘 카이 파사 글로싸 엨소몰로게세타이 토 데오

 

개역개정,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새번역,11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살아 있으니, 모든 무릎이 내 앞에 꿇을 것이요, 모든 입이 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 ㉥사 49:18; 45:23(칠십인역)
우리말성경,11 기록되기를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살아 있으니 모든 무릎이 내 앞에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찬양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45:23 
가톨릭성경,11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내가 살아 있는 한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모든 혀가 하느님을 찬송하리라.’ ”
영어NIV,11 It is written: "'As surely as I live,' says the Lord, 'every knee will bow before me; every tongue will confess to God.'"
영어NASB,11 For it is written, "AS I LIVE, SAYS THE LORD, EVERY KNEE SHALL BOW TO ME, AND EVERY TONGUE SHALL GIVE PRAISE TO GOD."
영어MSG,11  Read it for yourself in Scripture: "As I live and breathe," God says, "every knee will bow before me; Every tongue will tell the honest truth that I and only I am God."
영어NRSV,11 For it is written, "As I live, says the Lord, every knee shall bow to me, and every tongue shall give praise to God."
헬라어신약Stephanos,11 γεγραπται γαρ ζω εγω λεγει κυριος οτι εμοι καμψει παν γονυ και πασα γλωσσα εξομολογησεται τω θεω
라틴어Vulgate,11 scriptum est enim vivo ego dicit Dominus quoniam mihi flectet omne genu et omnis lingua confitebitur Deo
히브리어Modern,11 כי כתוב חי אני נאם יהוה כי לי תכרע כל ברך וכל לשון תודה לאלהים׃


 

성 경: [14:11]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 기록되었으되(*, 게그랖타이 가르) - 이 다음에 나오는 인용문은 혼합형으로서 사 45:2349:18을 결합시킨 것이다. 바울은 기억에 의존하여 두 구절을 무의식적으로 혼합 인용했든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인용했을 것이다(Dunn). 아무튼 어느 방법이든 간에 구약성경의 권위있는 가르침을 인용하여 자기의 교훈을 뒷받침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 인용문 역시 앞절(10)에서 형제를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이를 엄하게 책망하면서 결국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상기시킨 교훈에 대해 구약성경으로 인증(認證)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Hendriksen).

󰃨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 조 에고, 레게이 퀴리오스) - 이 말은 선지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관용구로서(14:28;49:18;22:24, 46;5:11;14:16;16:48;17:16;18:3;20:13), 반드시 성취될 중차대한 진리를 선언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이는 신약성경에서 주께서 중대한 말씀을 하시기 전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3:3, 5, 11;5:19, 24,25)라는 규칙적인 관용구를 사용했던 것과 흡사하다.

󰃨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 이 구절은 70인역(LXX) 45:23의 문자적 인용이다. 다만 '여소몰로게세타이'(*, '자백하리라')'파사 글롯사'(*, '모든 혀')이 두 단어 순서가 뒤바뀌어 있을 뿐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준 이 예언의 말씀은(45:23) 여기서 구약성경의 원래의 의미 그대로 사용되었다. , 한 분이신 지고(至高)한 하나님의 최종적 권위에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최후 심판시에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무릎꿇고 인정할 것이다(45:21). 예컨대 남을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행위는(10)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심판의 영역을 침해한 것이다. 따라서 형제를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우상 숭배의 올무에 빠지는 행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1:21-25). 그리고 '자백하다'(*, 여소몰로게오)라는 말은 통상적으로 70인역(LXX)에서 '인정하다', '자백하다', '찬양하다'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15:9;11:25;10:21;Dunn). 이는 모든 사람이 최후에는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숨김없이 자백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내용에 대해 모든 인류가 주께 찬양하며 경배하고 복종하게 됨을 나타낸다. , 이 구절은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판단하는 이방인들의 회심(悔心)을 암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통치 행위인 구원과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최종 목적이 자기들이 업신여기고 판단하는 이방인들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의 회심이 이스라엘과 성경에 의해서 선포된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순종임을 상기시켜 주면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크신 구원 안에서 서로 받을 것을 촉구한 것이다. 아울러 사 45:23의 인용문이 빌 2:10, 11에서는 부활하시고 승귀(昇歸)하신 그리스도의 신분과 역할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자백'을 말할 때 사용된 반면 본절에서는 '하나님께 자백하리로다', 즉 하나님의 심판에 적용되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바울이 그리스도의 주권과 하나님의 궁극적 권위 사이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는 자신의 통상적인 습관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라 운 헤카스토스 헤몬 페리 헤아우투 로곤 도세이 토 데오

 

개역개정,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새번역,12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2 이와 같이 우리가 각각 자기의 일을 하나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릴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2 그러므로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한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
영어NIV,12 So then, each of us will give an account of himself to God.
영어NASB,12 So then each one of us shall give account of himself to God.
영어MSG,12  So tend to your knitting. You've got your hands full just taking care of your own life before God.
영어NRSV,12 So then, each of us will be accountable to God.
헬라어신약Stephanos,12 αρα ουν εκαστος ημων περι εαυτου λογον δωσει τω θεω
라틴어Vulgate,12 itaque unusquisque nostrum pro se rationem reddet Deo
히브리어Modern,12 הנה נא כל אחד ממנו על נפשו יתן חשבון לאלהים׃


 

성 경: [14:12]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 앞에 나온 구약성경 인용문에서 끌어낸 권고적인 결론으로서 이것은 10절의 사상을 되풀이 한 것이다. 여기서는 각 단어가 매우 강조적인 것으로서 그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Denney, Cranfield). '각인'(*, 헤카스토스)은 어느 쪽도 배제(排除)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강한 자나 연약한 자, 즉 판단하는 자나 판단받는 자 양쪽 모두를 가리킨다. '자기 일을'(*, 페리 헤아우투)은 자기가 판단하는 형제의 일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일에 관해서 직고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께'(*, 토 데오)는 자기 파당이나 혹은 자기와 친밀한 동료에게가 아님을 강조한다. , 인간이 아는 모든 것을 다 아시되 사람 마음의 은밀한 생각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께 직고해야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4:12, 13). '직고하리라'(*, 로곤 도세이)는 장부에 적힌 대로 세밀히 '보고하다', '회계하다', '계산하다'는 뜻으로 심판의 철저성을 나타낸다(3:17). 신약성경의 용례를 보면 마 12:36;16:12;19:40;13:17;벧전 4:5 등에서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믿음이 있다고 하여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심판의 최후 계산()을 면제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2:6-16;고전 3:12-15;고후 5:10)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예외없이 각각 자기가 행한 일을 하나님 앞에서 자백할 뿐만 아니라 계산해야 한다는 진리를 각 단어마다('각인',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강조하여 선언한 것이다.

 

 

 

메케티 운 알렐루스 크리노멘 알라 투토 크리나테 말론 토 메 티데나이 프로스콤마 토 아델포 에 스칸달론

 

개역개정,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새번역,13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마십시다. ㉦형제자매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 ㉦그, '형제'
우리말성경,13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판단하지 맙시다. 형제 앞에 걸림돌이나 장애물을 두지 않기로 결심하십시오. 
가톨릭성경,13 그러니 더 이상 서로 심판하지 맙시다. 오히려 형제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영어NIV,13 Therefore let us stop passing judgment on one another. Instead, make up your mind not to put any stumbling block or obstacle in your brother's way.
영어NASB,13 Therefore let us not judge one another anymore, but rather determine this-- not to put an obstacle or a stumbling block in a brother's way.
영어MSG,13  Forget about deciding what's right for each other. Here's what you need to be concerned about: that you don't get in the way of someone else, making life more difficult than it already is.
영어NRSV,13 Let us therefore no longer pass judgment on one another, but resolve instead never to put a stumbling block or hindrance in the way of another.
헬라어신약Stephanos,13 μηκετι ουν αλληλους κρινωμεν αλλα τουτο κρινατε μαλλον το μη τιθεναι προσκομμα τω αδελφω η σκανδαλον
라틴어Vulgate,13 non ergo amplius invicem iudicemus sed hoc iudicate magis ne ponatis offendiculum fratri vel scandalum
히브리어Modern,13 לכן אל נדין עוד איש את רעהו כי אם זה יהי דינכם שלא יתן איש לפני אחיו מכשול או מוקש׃


 

성 경: [14:13]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신념의 생활]

󰃨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 이것은 앞 단락의 권면을 간결히 요약한 것이다. 또한 이 부분은 10절 하반절부터 12절까지의 내용에서 끌어낸 결론으로서 이제 더 이상 서로 판단(비판)하는 습관에 빠지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 권면은 강한 자와 약한 자, 양 집단 모두에게 주어진 교훈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Godet, Dunn, Althaus, Gaugler, Cranfield). 7:1과 그 병행구에 나타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에 이 본문이 의존되어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Dunn).

󰃨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 이것은 특별히 강한 자들에게 주어진 경고이다(Murray, Cranfield, Godet). 사람의 행동이 형제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 특히 자유를 누리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 대해서 특별한 주의를 상기시키고 있다(Cranfield, Godet, Murray). 예컨대 바울은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행동 방식을 택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즉 바울은 다른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되거나 그를 넘어뜨리는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하게 피할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비록 바울이 믿음이 강한 형제라고 직접 지적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형제 앞에 거치는 것을 놓치 말라는 이 훈계에서 믿음이 강한 형제를 염두에 두었음이 틀림없다. 바울은 앞에서도 믿음이 강한 형제들에게 연약한 형제들을 업신여기거나 경멸하지 말라고 경계한 바 있다(3, 10). 이제 본절에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연약한 형제 앞에 두지 말라고 주의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부딪힐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콤마'(*)는 글자 그대로 사람의 발에 걸려 넘어지게까지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stumbling block;KJV, RSV). 그리고 '거칠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론'(*)은 어떤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마련된 장애물 또는 덫(obstacle;NIV)을 뜻한다(Meyer, Murray). 즉 이 용어는 죄로 끌어 들이기 위해 유혹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묘사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의 십자가 지는 것을 만류하려 했을 때 '스칸달론'을 베드로에게 사용했었다(16:23). 그리고 이 두 용어는(프로스콤마, 스칸달론) 의도적으로 형제를 꾀어 그에게 죄가 되는 것을 행하도록 유혹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경고로서 사용된 것이라 하겠다. 비록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동기가 한 형제를 '연약한 자'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순수한 열망에 있다 할지라도 그로 인해 형제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그를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본절에서 믿음이 강한 성도들에게 촉구하는 것은 (1) 그들이 다른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행동 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것과 (2) 다른 형제들의 신앙 성장에 방해가 되거나 그를 넘어뜨리는 원인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호하게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의 훈계는 강한 자들의 어떤 행동이 다른 성도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수도 있고 근심되게 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강한 자들이 어떤 일을 할 때 먼저 '그 일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일을 한다면 믿음이 약한 형제들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가 ?'를 늘 생각하여 공동체의 건덕을 위해 사려깊은 행동을 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Harrison).

 

 

 

오이다 카이 페페이스마이 엔 퀴리오 예수 호티 우덴 코이논 디 헤아우투 에이 메 토 로기조메노 티 코이논 에이나이 에케이노 코이논

 

개역개정,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새번역,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또 확신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고,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부정한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고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만 부정한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4 나는 주 예수님 안에서 알고 있고 또 확신합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럽습니다.
영어NIV,14 As one who is in the Lord Jesus, I am fully convinced that no food is unclean in itself. But if anyone regards something as unclean, then for him it is unclean.
영어NASB,14 I know and am convinced in the Lord Jesus that nothing is unclean in itself; but to him who thinks anything to be unclean, to him it is unclean.
영어MSG,14  I'm convinced--Jesus convinced me!--that everything as it is in itself is holy. We, of course, by the way we treat it or talk about it, can contaminate it.
영어NRSV,14 I know and am persuaded in the Lord Jesus that nothing is unclean in itself; but it is unclean for anyone who thinks it unclean.
헬라어신약Stephanos,14 οιδα και πεπεισμαι εν κυριω ιησου οτι ουδεν κοινον δι εαυτου ει μη τω λογιζομενω τι κοινον ειναι εκεινω κοινον
라틴어Vulgate,14 scio et confido in Domino Iesu quia nihil commune per ipsum nisi ei qui existimat quid commune esse illi commune est
히브리어Modern,14 ידעתי ומבטח אני באדון ישוע כי אין דבר טמא בפני עצמו ורק טמא הוא למי שיחשבנו לו לטמא׃


 

성 경: [14:14]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신념의 생활]

󰃨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 이는 강조적 문구로서 절대적인 자기 확신을 말한 것이다. '확신하다'(*, 페이도)라는 말이 신약성경에서 대표적으로 사용된 용례를 보면 갈 5;10;2:24;살후 3:4에서 강조 완료 능동태 1인칭으로 '주 안에서'(*, 엔 퀴리오)라는 어구와 그 뒤에 '호티'(*, that)절과 함께 쓰여 자기 자신의 의지에 의하여 능동적으로 확신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페이도'(*)의 완료 수동 1인칭 단수인 '페페이스마이'(*)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오이다 카이'(*, '내가 알다')가 앞에 놓임으로써 '페페이스마이'의 의미가 강조되었다. 또 본절에서는 * ('엔 퀴리오', '주 안에서') 다음에 '예수'(*)라는 호칭이 덧붙여졌다. 이는 '호티'(*, that)절의 내용에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준다. 그렇다면 '주 예수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이고 거기에다 '확신한다'는 말을 수동형으로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 ? 그것은 다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1) 바울이 가진 확신이 스스로 자기 안에서 생긴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얻은 객관적인 진리임을 의미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즉 복음 안에서 갖는 확신임을 뜻한다. (2) 바울이 여기서 예수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사용한 것은 역사상의 예수의 어떤 특정 가르침, 즉 마 15:10, 11, 15-20;7:15-23 등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3) 아울러 자기의 확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존하고 있다는 의미도 포함된 것이다. 바울은 위의 세가지 요소를 다 포함하여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합니다'고 강력하게 자기 확신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그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Godet, Meyer, J. Murray, Cranfield).

󰃨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 이 말은 바울이 확신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진리로서 면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스스로'라는 말의 헬라어 '디 헤아우투'(*)'그 자체가' 혹은 '본질적으로'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주신 음식물 그 자체'를 말한다(Godet, Cranfield, Sanday). 바울은 여기서 인간들의 행위, 태도, 욕구, 사고 등에 대해서 논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피조(被造) 세계의 자원, 그 중에서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먹는 음식으로 주신 모든 것 그것 자체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든지 ...없으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의 헬라어 '우덴'(*)은 본절에서 제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코이논'(*, '속된 것')이란 단어 역시 그 자체는 불견하고 순결치 못한 것 특히 율법의 의식에서 깨끗치 못한 것을 의미하나(7:2, 5;10:14;10:29;21:27) 여기서는 어떤 음식물도 그 자체는 속()된 것, 즉 불결한 것이 없다는 것을 천명한다. 결국 바울은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으니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먹을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본절에서 뿐만 아니라 딤전 4:4에서도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확언함으로써 같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는 음식물에 대한 강한 자들의 기본 입장과 사도의 견해가 일치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취해야 할 정당한 원리가 된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1) 바울의 주장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고 확신하는) 본질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들에게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7:15-23)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 가운데는 모든 음식물이 그 자체는 깨끗하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Harrison). (2) 창조에 관한 말씀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바울의 견해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1:31)는 창조 기사의 말씀과 그 원리를 같이하고 있다. (3)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이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바울의 확신은 아주 타당한 것이다(9:12). 이는 '속되다', '속되지 않다'의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지는 구약 율법의 의식적 부분에 관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새 시대가 도래하여 옛 시대의 그 의식법(儀式法)에 문자적으로 순종할 필요가 없다. 신약의 빛 아래 사는 우리는 이제 구약의 그 의식이 증언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즉 그리스도 그분을 믿을 때 그 의식에 순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Calvin, Kasemann, Cranfield).

󰃨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 구약의 의식이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위해 주어진 이상, 그리고 구약의 율법이 가리키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친히 영원하신 속죄의 제물이 되어 거룩한 사역을 완성하신 이상, 이제는 더이상 구약의 율법 의식에서 불결한 것과 정결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문자적으로 매일 필요가 없다. 따라서 이런 진리를 파악하여 믿는 신자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가하여' 율법이 부정하다고 선언한 음식이 더 이상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복음 안에서 누리는 이런 진리를 아직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한 신자들, 즉 진리 안에서 내적 자유를 얻지 못한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이 의식법에 대한 문자적 순종을 소홀히 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시 말해 과거에 종교적으로 불결한 것으로 금지되었던 고기들은(음식물은) 그 자체가 객관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더 이상 부정하지 않다 하더라도 스스로 속되게 여기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주관적으로 여전히 불결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스스로 속된 것이 없다'는 바울의 확신을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어떤 음식물을 깨끗하지 않다고 그의 마음에 확신한다면(11장 참조) 그에게 있어서 그 음식물은 깨끗하지 않은 것이 된다. 이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分量)과 함께 신앙 양심의 자유에 근거한 개인의 확신에서 행해지는 것이므로 누구도 판단할 성격이 아님을 양쪽 모두에게 절묘하게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Murray, Meyer). 이런 뜻에서 바울은 전반절에서 약한 자에게 강한 자의 믿음의 수준을 이해시키면서 음식물의 본질에 대한 진리를 설명한 반면 후반절에서는 강한 자에게 약한 자의 믿음 분량을 깨우쳐 준 것이다.

 

 

 

에이 가르 디아 브로마 호 아델포스 수 뤼페이타이 우케티 카타 아가펜 페리파테이스 메 토 브로마티 수 에케이논 아폴뤼에 휘페르 후 크리스토스 아페다넨

 

개역개정,15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새번역,15 그대가 음식 문제로 ㉧형제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음식 문제로 그 사람을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 ㉧그, '형제들'
우리말성경,15 만일 음식 문제로 여러분의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그대는 더 이상 사랑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해 죽으신 그 형제를 음식 문제로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가톨릭성경,15 그대의 형제가 음식 문제로 슬퍼한다면, 그대는 더 이상 사랑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의 음식으로 형제를 파멸시키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영어NIV,15 If your brother is distressed because of what you eat, you are no longer acting in love. Do not by your eating destroy your brother for whom Christ died.
영어NASB,15 For if because of food your brother is hurt, you are no longer walking according to love. Do not destroy with your food him for whom Christ died.
영어MSG,15  If you confuse others by making a big issue over what they eat or don't eat, you're no longer a companion with them in love, are you? These, remember, are persons for whom Christ died. Would you risk sending them to hell over an item in their diet?
영어NRSV,15 If your brother or sister is being injured by what you eat, you are no longer walking in love. Do not let what you eat cause the ruin of one for whom Christ died.
헬라어신약Stephanos,15 ει δε δια βρωμα ο αδελφος σου λυπειται ουκετι κατα αγαπην περιπατεις μη τω βρωματι σου εκεινον απολλυε υπερ ου χριστος απεθανεν
라틴어Vulgate,15 si enim propter cibum frater tuus contristatur iam non secundum caritatem ambulas noli cibo tuo illum perdere pro quo Christus mortuus est
히브리어Modern,15 ואם יעצב אחיך על דבר האכל אינך מתהלך עוד בדרך האהבה אל נא תאבד באכלך את אשר בעדו מת המשיח׃


 

성 경: [14:15]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신념의 생활]

󰃨 만일 식물을 인하여...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가르'(*, '왜냐하면')는 바로 앞절(14)과 연결된 접속사가 아니라 13절 하반절과의 연결 접속사이다. 14절은 삽입절이다(Meyer, Liddon, Hendriksen). '연약한 형제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두지 말 것을 결심하라(13) 왜냐하면(*, 가르)는 만일 그것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15).' 이렇게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본절은 바울이 강한 자들의 기본적인 태도를 수락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동시에 그러한 태도에는 잊지 말아야 할 중용한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여기서 '근심하게 되면'의 헬라어 '뤼페이타이'(*)'뤼페오'(*)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수동형으로서 '어떤 일의 영향을 받아서 양심의 괴로움을 겪는 것'을 말한다. 또는 '어떤 일로 인하여 신앙의 압박을 받고 마음의 상처를 받아 고민에 쌓인 것'을 뜻한다. 요컨대 상처받은 양심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14:9;17:23;10:22;16:20;Meyer, Godet, Hendriksen). 즉 믿음이 약한 자가, 자유를 가지고 있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 때문에 아직 내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 어떤 일을 행하게 된다면 믿음이 약한 그 사람은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이고 그의 신앙의 순결성과 성장에 손상을 입을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믿음이 강한 자의 자유가 제한을 받아야 함을 바울은 역설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즉 바울은 자유의 구가(謳歌)가 보다 중요한 형제 사랑에 의해 절제되어야 할 것을 호소하면서 성도의 생활과 행동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벧전 4:8;요일 3:16;4:8).

󰃨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 의식적인 율법과 관련한 자신의 내적 자유를 외적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믿음이 연약한 형제에게 강요함으로써 아직 깨달음과 행위가 거기에 이르지 못한 형제를 근심케하고 영적으로 파멸(破滅)시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짓밟는 행위임을 말한다. 루터(Luther)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어떤 것이 정당한 믿음의 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이 당신의 형제를 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당신은 잔인한 살인자와 같다. 뿐만 아니라 내 형제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죽음을 경멸하는 것이 되기에 그것은 온갖 종류의 잔인성을 능가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연약한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도 죽었기 때문이다"(고전 8:11).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라고 표현한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을 염두에 둔 것이다. (1) 한 형제의 소중함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여 구원한 형제임을 생각할 때 그가 아무리 연약한 자라 하더라도 사랑으로 대할 충분한 이유가 있고도 남는 것을 교훈한다. (2) 형제를 근심케 하는 일에 대한 준엄한 경고가 포함된 것이다. 바울은 강한 자들에게 자유의 구가보다도 사랑의 원리를 따라 형제를 생각하며 행동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어느 정도의 희생(犧牲)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내와 희생이 거절되어 자기의 판단대로만 행하므로 누군가가 상처를 받고 근심케 되어 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실로 무서운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죄악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짓밟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모울(Moule)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주께서는 너의 상처받는 형제를 그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너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의 행동은 너의 강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너의 상처받은 형제에게 파멸을 가져오게 한 것으로 간주되어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너의 우둔하고 편협하며 이기적인 자유로 인하여 네가 경시한 이 상처받은 영혼을 주님은 오랫동안 계속해서 너무 사랑하셨으므로 그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것이다." '망케 하다'(*, 메 아폴뤼에)는 말은 대체적으로 네 가지로 해석된다. (1) 한 영혼을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Tholuck). (2) 죄를 짓게 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실족한 자리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Murray). (3) 철저한 파멸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영원한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Meyer). (4) 인간성의 파괴를 의미한다(Kasemann). 여기서 우리는 (1), (2)의 견해를 취함이 무난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바울이 연약한 자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말 것을 촉구한 것(13)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물론 연약한 자가 계속 죄를 지어 하나님과 단절된 자리에 있다면 결국 멸망에 빠지게 됨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3)의 견해도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점은 형제를 넘어뜨리는 일의 위험성과 이로 인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에 대한 준엄한 경고를 강한 자들에게 하는 데 있다. 즉 자유에 대한 자기 본위의 주장은 연약한 자들을 무너뜨리는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냉엄하게 책망한 것이다.

 

 

 

 

메 블라스페메이스도 운 휘몬 토 아가돈

 

개역개정,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새번역,16 그러므로 여러분이 좋다고 여기는 일이 도리어 비방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말성경,16 그러므로 여러분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가톨릭성경,16 그러므로 여러분의 그 좋은 것이 모욕을 받지 않게 하십시오.
영어NIV,16 Do not allow what you consider good to be spoken of as evil.
영어NASB,16 Therefore do not let what is for you a good thing be spoken of as evil;
영어MSG,16  Don't you dare let a piece of God-blessed food become an occasion of soul-poisoning!
영어NRSV,16 So do not let your good be spoken of as evil.
헬라어신약Stephanos,16 μη βλασφημεισθω ουν υμων το αγαθον
라틴어Vulgate,16 non ergo blasphemetur bonum nostrum
히브리어Modern,16 לכן הזהרו פן יהיה טובכם לגדופים׃


 

성 경: [14:16]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신념의 생활]

󰃨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 이 구절은 적어도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1) 이 구절은 강한 자에게만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에게 주어진 것인가 ? (2) '휘몬 토 아가돈'(*, '너희의 선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 (3) 사도가 언급한 비방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 (1)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너희의'(*, 휘몬)()강한 자들만을 가리킨다(Murray). ()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를 가리킨다(Dunn, Sanday and Headlam). ()의 견해가 더욱 자연스러운 해석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사도는 바로 앞절에서 강한 자들에게 연약한 자들을 근심시키거나 망케 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계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 역시 앞절의 강한 자들에게 계속되는 교훈이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2)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여기서 '너희의 선한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 ()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언약적인 모든 축복을 총괄하는 선이다. 즉 의와 구원까지 포함한다(Dunn, Michel, Nababan, Cranfield, Schlier). () 강한 자들이 누리는 자유, 특별히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복음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말한다(Murray, Calvin, Harrison, Kasemann, Godet, Sanday and Headlam). () 하나님의 왕국(Meyer). () 믿음(Do Wette). () 복음(Philip).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 전부와 복음(Lenski). 위의 견해 중 ()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첫번째 문제에서 이 구절이 강한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입장을 지지했다면 여기서 말하는 '선한 것' 역시 강한 자들이 행사하는 '신앙의 자유'를 말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이나 ()을 지지하는 자들은 이 구절이 훨씬 더 심각한 한 가지 위험에 대해 강한 자들이 자유 행사를 이기적으로 고집함으로써 이 자유보다 훨씬 더 존귀한 '아가돈'(*, '')에 대해 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가돈'(*)은 강한 자들의 '아가돈'임과 동시에 약한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아가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아가돈'은 복음 그 자체, 곧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과거에 행하셨고 지금도 행사하시며 앞으로도 행하실 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강한 자들을 향해서 경고되고 있는 현재의 문맥을 뛰어넘는 해석이다. 한편 (3)의 문제에 대해서도 두 가지의 견해가 있다. () 바울이 비방자들로서 염두에 둔 사람들은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이다(Sanday and Headlam, Liddon). () 교회 내의 약한 신자들, 즉 채소만 먹는 약한 자들을 의미한다(Godet, Meyer, Hendriksen). 여기서 ()의 입장을 취함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 구절이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그리고 '선한 것'이 복음, 혹은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당연히 ()번의 견해를 취하겠지만 이 구절이 강한 자에게 주어진 것이고 또한 '아가돈''강한 자들의 자유'를 의미한다면 ()번의 견해를 취함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본절은 강한 자들의 무분별한 행동이 약한 자들에게 여러 손상(13, 15)을 끼칠 수도 있고 또한 교회내에 불협 화음을 일으킬 수 있기에 특별히 그러한 비방을 받지 않게 주의하라는 경고이다. 물론 교회 안에서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일이 생길 때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판을 듣는다는 것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우 가르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 브로시스 카이 포시스 알라 디카이오쉬네 카이 에이레네 카이 카라 엔 프뉴마티 하기오

 

개역개정,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새번역,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우리말성경,17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입니다. 
가톨릭성경,17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
영어NIV,17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eating and drinking, but of righteousness,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영어NASB,17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eating and drinking, but righteousness and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영어MSG,17  God's kingdom isn't a matter of what you put in your stomach, for goodness' sake. It's what God does with your life as he sets it right, puts it together, and completes it with joy.
영어NRSV,17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food and drink but righteousness and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
헬라어신약Stephanos,17 ου γαρ εστιν 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βρωσις και ποσις αλλα δικαιοσυνη και ειρηνη και χαρα εν πνευματι αγιω
라틴어Vulgate,17 non est regnum Dei esca et potus sed iustitia et pax et gaudium in Spiritu Sancto
히브리어Modern,17 כי מלכות האלהים איננה אכילה ושתיה כי צדקה היא ושלום ושמחה ברוח הקדש׃

 

성 경: [14:17]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신념의 생활]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 한글 개역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가르'(*, '왜냐하면')가 사용되어 본절이 15절 하반절과 16절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논거(論據)를 변화시켜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본질을 언급하고 있다(Sanday and Headlam). 강한 자들이 특정 음식을 먹음으로써 그것을 먹지 못한 약한 형제의 영적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 그리고 그로 인해 서로 판단하고 나아가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가 좋지 않은 평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비쳐볼 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바실레이아 투 데우,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는 먹는 것과 마시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 이 땅위에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臨在)를 입증하는 것은 어떤 특정 음식을 먹느냐 못 먹느냐의 시시비비를 가리며 또한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외고집적으로 주장하는데 있지 않음을 책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는데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 바울은 여기서 전체의 논의를 단순히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의 특징적인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성격으로 나타나는지를 진술한다. ''(*, 디카이오쉬네)는 속죄받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부름받은 올바른 행동, '도덕적 의'를 말한다(Godet, Murray, Meyer, 6:13, 16, 18).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생활 헌장으로 선포하신 산상 수훈(山上垂訓)의 결론에서도 나타난 ''이다. 그리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6:33)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나란히 취급한 데서 더욱 확인된다. 한편 '평강'(*, 에이레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믿을 때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Calvin, 5:1;4:7). 그리고 '희락' 또는 '기쁨'(*, 카라)''를 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의 관계를 누리는 성도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영혼의 기쁨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Calvin, Hodge) 성령 안에서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오는 사귐의 기쁨도 포함한다(Godet, Meyer, Murray). 따라서 성도의 삶에서 누리는 총체적인 기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기쁨은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반드시 다른 성도와의 참다운 사귐에서 오는 기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즉 구원의 기쁨과 다른 사람과의 정상적인 교제에서 오는 기쁨과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것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보이는 형제인 다른 사람과의 진실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이처럼 '''평강''기쁨'의 공동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성령 안에서'(*, 알라 엔 프뉴마티 하기오)만 가능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오직'(*, 알라)이란 접속사가 '...', 또는 '...외에는'이란 뜻으로서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2), 평강, 기쁨 세 명사가 모두 '엔 프뉴마티 하기오'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Kasemann). (3) 5:22, 23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에 '평강과 기쁨(희락)'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Harrison).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는 누구든지 성령을 의지하여 적극적으로 의와 평강과 기쁨의 열매를 나타내야 한다. 본절을 통해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로 형제끼리 서로 판단하고 비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얼마나 거리가 먼 어리석은 모습인가를 알 수 있다(본장 주제 강해 '아디아포라' 참조).

 

 

 

호 가르 엔 투토 둘류온 토 크리스토 유아레스토스 토 데오 카이 도키모스 토이스 안드로포이스

 

개역개정,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새번역,18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우리말성경,18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가톨릭성경,18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고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영어NIV,18 because anyone who serves Christ in this way is pleasing to God and approved by men.
영어NASB,18 For he who in this way serves Christ is acceptable to God and approved by men.
영어MSG,18  Your task is to single-mindedly serve Christ. Do that and you'll kill two birds with one stone: pleasing the God above you and proving your worth to the people around you.
영어NRSV,18 The one who thus serves Christ is acceptable to God and has human approval.
헬라어신약Stephanos,18 ο γαρ εν τουτοις δουλευων τω χριστω ευαρεστος τω θεω και δοκιμος τοις ανθρωποις
라틴어Vulgate,18 qui enim in hoc servit Christo placet Deo et probatus est hominibus
히브리어Modern,18 והעבד באלה את המשיח רצוי הוא לאלהים ובחון לאנשים׃


 

성 경: [14:18]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신념의 생활]

본절은 19절과 함께 17절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삽입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Michel) 그보다는 17절의 내용을 다시 설명하고 확인하여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Kasemann).

󰃨 이로써(*, 엔 투토) - 본문에서 가장 이해하기 곤란한 구절로서 여러 견해가 있으니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성령 안에서를 의미한다(Hodge, Origen). (2)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가리킨다(Meyer, Murray, Sanday and Headlam, Cranfield). (3) '이로써'를 가리키는 헬라어 본문 '엔 투토''따라서', '이렇게 하여'를 의미하는 말이므로 17절에서 표현한 진리 전체를 인식하는 것이다(Barrett, Robertson). (4) '이 방법들로써'를 의미한다(Michel). (5) 바울은 오직 교회 안에 평화를 진작(振作)시키고저 하는 뜻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엔 투토'라는 단수를 사용했다(Gaugler). 여기서 (4)은 매우 약하고 (5)은 무리이며 (1)(3)은 문맥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2)보다 덜 자연스럽고 덜 만족스럽다. 따라서 우리는 (2)가 가장 개연성있고 설득력있는 설명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다. 왜냐하면 문맥에 의해서 볼 때도 그러하고 또 다른 사본(the variant reading)'이로써'가 단수가 아닌 복수(*, 엔 투토이스, '이것들로써')로 쓰여졌다는 데서 더욱 확인된다. 이 복수는 분명히 필사자가 17절 하반절에서 말한 3가자 열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 디카이오쉬네 카이 에이레네 카이 카라 엔 프뉴마티 하기오)을 염두에 두고 특별히 복수로 쓴 듯하다(Cranfield).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의 경우 복수가 아닌 단수로 사용된 것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 세 열매를 하나의 단일체로 보았기 때문이다(Sanday and Headlam, Murray). 이는 갈 5:22, 23에서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말하면서도 '열매'를 나타내는 헬라어는 단수인 '카르포스'(*)가 사용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 별 문제없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봉사가 성령안에서 맺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열매인 의와 평강과 기쁜에 의해서 이루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은 기쁘시게 할 수 있음을 피력한다(Hendriksen). 따라서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에 의해서 맺어지는 어떠한 섬김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형제를 판단하고 서로 비방하는 자들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한편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도키모스 토이스 안드로포이스)는 말은 16절의 '비방을 받다'(*, 블라스페메이스도)와 대조적인 의미로 보아야 옳다(Cranfield). ,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그 열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사람에게도 비방을 받지 않고 그들의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칭찬을 받는다'는 헬라어 '도키모스'는 사람에게 인정, 혹은 시인(是認)을 받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모든 경우에서 사람의 칭찬을 받는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역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유없이 미움을 받았고, 선지자와 사도들 역시 그러했으며, 바울 역시 그의 서신 딤후 3:12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다고 했기 때문이다(Calvin).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런 특별한 경우를 말한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현상과 그 결과를 말한 것이다.

 

 

 

아라 운 타 테스 에이레네스 디오코멘 카이 타 테스 오이코도메스 테스 에이스 알렐루스

 

개역개정,19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새번역,19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씁시다.
우리말성경,19 그러므로 화평을 이루고 서로 세워 주는 일에 힘씁시다. 
가톨릭성경,19 그러니 평화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을 쏟읍시다.
영어NIV,19 Let us therefore make every effort to do what leads to peace and to mutual edification.
영어NASB,19 So then let us pursue the things which make for peace and the building up of one another.
영어MSG,19  So let's agree to use all our energy in getting along with each other. Help others with encouraging words;
영어NRSV,19 Let us then pursue what makes for peace and for mutual upbuilding.
헬라어신약Stephanos,19 αρα ουν τα της ειρηνης διωκωμεν και τα της οικοδομης της εις αλληλους
라틴어Vulgate,19 itaque quae pacis sunt sectemur et quae aedificationis sunt in invicem
히브리어Modern,19 ועתה נרדפה דרך השלום ודרך הבנות יחד איש מרעהו׃


 

성 경: [14:19]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신념의 생활]

󰃨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 '이러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라 운'(*, '그러면', '그런즉')으로서 앞의 17, 18절을 받고 있는 접속사이다. 앞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 그 본질을 명쾌히 제시하여 그 열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신다는 것을 원리적 측면에서 선포한 바울은 이제 그 원리가 실제적인 교회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발휘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촉구한다. 여기서 '힘쓰나니'의 헬라어 '디오코멘'(*)'급히 가다', '빨리 달려가다', '추구하다', '갈망하다''디오코'(*)1인칭 복수 현재 능동태로서 현재 문제가 있는 교회 생활에서 강한 자와 약한 자 모두가 적극적으로 애쓸 것을 강력하게 권면한 것이다. 바울이 힘쓸 것을 촉구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화평의 일은 힘쓰라. '화평의 일'(*, 타 테스 에이레네스)이란 교회의 화합(和合)을 도모하는 모든 일을 포괄적으로 지칭한 말로서 초대 교회 설교의 관용구이다(딤후 2:22;12:14;벧전 3:11). 이는 시 34:14의 내용에 의존하고 있는 듯하다(Dunn). 사도는 연약한 자와 강한 자 간의 조화를 위한 직접적인 적용으로 화평을 추구하도록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촉구하는 '에이레네'(*, '화평')는 단지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차원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Godet). (2)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 '()을 세우다'의 헬라어 '오이코도메스'(*)'집을 짓다', '건설하다', '굳게하다'라는 뜻인 '오이코도메오'(*)에서 나온 말로서 주로 '건축'에 관련해서 사용된 단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세우다'라는 은유법은 아주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구약성경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예레미야가 이를 자주 사용하였다(12:16;31:4;33:7;42:10;45:4). 그런데 이 비유법은 바울에게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니 (1) 그 자신의 사역에 대해 설명할 때 이를 사용하였다(고전 3:9, 10;고후 10:8;12:19;13:10). (2)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벽돌처럼 연결되어 함께 성전을 지어 올라가는, 즉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권할 때 사용하였다(2:19, 20;벧전 2:5). (3) 이 비유법의 가장 빈번한 용례는 바울이 편지를 보낸 교회들에게 준 충고에서 나타난다. , 구체적인 문제 속에서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덕을 세우라는 권고로 나타난다(Dunn). 예컨데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남으로 야기된 여러 문제들을 다루는 데 바울이 사용한 핵심적인 단어 역시 '덕을 세우라'는 것이었다(고전 14:5, 12, 26, Harrison). 이를 종합하여 본절의 의미를 살펴보면 서로 덕을 세우라는 이 권고는 상호 대인 관계와 상호 의존성을 결정지어 주는 중대한 기준이 된다(15:2;고전 8:1;10:23). 그리고 서로간에 상이(相異)한 은사들의 상대적 가치를 분별하고 인정하는데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전 14:3-5). 따라서 본 구절의 개념은 어떤 경건한 의식이나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모든 문제 속에서 실제로 서로에게 유익을 주고 세움을 입어가도록 하라는 것이다. 즉 구체적으로 모든 문제 속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 24)는 원리에 준하여 교회 안에서 화평, 즉 덕을 도모하라는 촉구이다(고전 9:19-22, Calvin). 왜냐하면 로마 교회에서의 긴장은 신앙의 견해 차이로 인한 유대인과 이방 그리스도인간의 분열에 있었기 때문이다.

 

 

 

메 헤네켄 브로마토스 카탈뤼에 토 에르곤 투 데우 판타 멘 카다라 알라 카콘 토 안드로포 토 디아 프로스콤마토스 에스디온티

 

개역개정,20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새번역,20 ㉨하나님이 이룩해 놓으신 것을 음식 때문에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모든 것이 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먹음으로써 남을 넘어지게 하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해롭습니다. / ㉨그, '하나님의 작품'. 곧 교회 공동체를 가리킴
우리말성경,20 음식 문제로 인해 하나님의 일을 망치지 않도록 하십시오. 모든 것이 다 깨끗하나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면서 먹는 그 사람에게는 불결합니다. 
가톨릭성경,20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음식 때문에 그르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먹어 남에게 장애물이 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해롭습니다.
영어NIV,20 Do not destroy the work of God for the sake of food. All food is clean, but it is wrong for a man to eat anything that causes someone else to stumble.
영어NASB,20 Do not tear down the work of God for the sake of food. All things indeed are clean, but they are evil for the man who eats and gives offense.
영어MSG,20  don't drag them down by finding fault. You're certainly not going to permit an argument over what is served or not served at supper to wreck God's work among you, are you? I said it before and I'll say it again: All food is good, but it can turn bad if you use it badly, if you use it to trip others up and send them sprawling.
영어NRSV,20 Do not, for the sake of food, destroy the work of God. Everything is indeed clean, but it is wrong for you to make others fall by what you eat;
헬라어신약Stephanos,20 μη ενεκεν βρωματος καταλυε το εργον του θεου παντα μεν καθαρα αλλα κακον τω ανθρωπω τω δια προσκομματος εσθιοντι
라틴어Vulgate,20 noli propter escam destruere opus Dei omnia quidem munda sunt sed malum est homini qui per offendiculum manducat
히브리어Modern,20 אל תהרוס את מעשה אלהים על דבר מאכל הן הכל טהור הוא אבל רע לאדם אשר יאכלנו במכשל לבו׃


 

성 경: [14:20]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신념의 생활]

성도들이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쓸 것을 말한 바울은 이제 덕을 세우는 일을 방해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함으로써 그의 논점을 강화한다(Harrison).

󰃨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 '무너뜨리다'(*, 카탈뤼에)는 말은 바울이 앞절에서 사용한 '오이코도메오'(*, '집을 짓다', '덕을 세우다', '건설하다')의 반대말이다(5:17;24:2;26:61;27:40;고후 5:1;2:18). 즉 바울은 비본질적인 음식물에 대한 이견(異見) 때문에 본질적인 하나님의 사업()을 파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세우라고 촉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업'(*, 토 에르곤 투 데우)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해 (1) 혹자는 하나님이 세우고 계신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Sanday, Barrett, Kasemann). (2) 구원사건 자체를 가리킨다고 보았다(Michel). (3)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연약한 형제, 즉 하나님이 갓 창조하기 시작한 사람 속에서 일으키는 구원 사역을 의미한다(Robertson, Murray). 여기서 (1)의 견해도 무난한 해석이라고 생각되나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3)의 견해인 듯하다. 왜냐하면 문맥에 비추어 볼 때 13절 이하에서 계속해서 강한 자에게 교훈을 주면서 연약한 자가 근심케 되지 않기를, 그리고 그로 인해 망케 하지 말라고 권고하기 때문이며(15) 나아가 하나님이 불러 구원하신 한 영혼이 장성(長成)하여 굳세게 서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주된 목표이기 때문이다(Carnfield, Barmby).

󰃨 만물이 다 정하되(*, 판타 멘 카다라) - 14절을 반복한 교훈으로 강한 사람들의 슬로건처럼 보이는 이 말을(7:19;10:15;고전 8:4-8) 바울은 머저 인정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음식물 그 자체는 근본적으로 깨끗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진술은 14절의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라는 말처럼 한정적 의미의 뜻이다. , 인간의 생각, 욕구, 행위같은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피조 세계의 자원을 가리킨다.

󰃨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 바울은 만물이 다 깨끗함을 인정하였지만 거기에는 필수적인 조건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음식물 자체는 그릇된 것이 없지만 만일 음식물을 먹는 습관이나 마음의 자세가 어떤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어떤 것을 먹을지라도 나쁘다는 것이다(Bruce). 그러면 여기서 '거리낌으로 먹는'(*, 프로스콤마토스 에스디온티) 행위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 (1) 약한 자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도 강한 그리스도인들의 압력을 받아 반신 반의(半信半疑)하는 마음으로 고기를 먹는 행위를 말한다(Kasemann). (2) 형제의 연약함을 보면서도 그것을 무시하고 고기를 먹음으로써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강한 자들의 무절제한 신앙 행위를 가리킨다(Calvin, Hodge). 우리는 여기서 원어의 의미상으로나 전후 문맥으로 보나 (1)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본다(Chrysostom).

 

 

 

칼론 토 메 파게인 크레아 메데 피에인 오이논 메데 엔 호 호 아델포스 수 프로스콮테이

 

개역개정,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새번역,21 고기를 먹는다든가, 술을 마신다든가, 그 밖에 무엇이든지, ㉩형제나 자매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 ㉩그, '형제'
우리말성경,21 고기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고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가톨릭성경,21 고기를 먹든 술을 마시든, 그 밖에 무엇을 하든, 그대의 형제에게 장애물이 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영어NIV,21 It is better not to eat meat or drink wine or to do anything else that will cause your brother to fall.
영어NASB,21 It is good not to eat meat or to drink wine, or to do anything by which your brother stumbles.
영어MSG,21  When you sit down to a meal, your primary concern should not be to feed your own face but to share the life of Jesus. So be sensitive and courteous to the others who are eating. Don't eat or say or do things that might interfere with the free exchange of love.
영어NRSV,21 it is good not to eat meat or drink wine or do anything that makes your brother or sister stumble.
헬라어신약Stephanos,21 καλον το μη φαγειν κρεα μηδε πιειν οινον μηδε εν ω ο αδελφος σου προσκοπτει η σκανδαλιζεται η ασθενει
라틴어Vulgate,21 bonum est non manducare carnem et non bibere vinum neque in quo frater tuus offendit aut scandalizatur aut infirmatur
히브리어Modern,21 טוב שלא תאכל בשר ולא תשתה יין ולא תעשה דבר אשר יתנגף בו אחיך או יכשל או יחלש׃


 

성 경: [14:21]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신념의 생활]

󰃨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 이 구절은 권위있는 선언으로서 역시 강한 자들에게 계속되는 교훈이다(Murray). 바울은 여기서 강한 자들이 할 수 있는 이타적(利他的)인 행위를 극히 선하고 훌륭한 것으로 칭찬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여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악한 행위와 극히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아름다우니라'는 구절이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맨 뒤에 있으므로 강조가 약화되었지만 헬라어 본문에서는 문장의 맨 초두에서 '칼론 토'(* ..., '...하는 것이 아름다우니라')라는 구문을 취하여 강한 자들이 연약한 형제를 생각하는 행위를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전 7:1, 8, 26;13:9). '아름다우니라'의 헬라어 '칼론'(*)'선한', '보다 나은', '아주 고상한', '훌륭한', '뛰어난' 등의 뜻인 '칼로스'(*)의 목적격이다. 그러면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강한 자들의 지극히 훌륭한 일 즉, '칼론 토'(*)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 (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메 파게인 크레아). 이것은 본장 2, 3, 6, 17절에서 말한 '먹는 것'(*, 브로시스)15, 20절에서 말한 '식물'(*, 브로마토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를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음식을 먹을 만한 신앙의 내적 확신을 갖고 있는 강한 그리스도인은 채소만을 먹는 약한 그리스도인보다 훨씬 행동 반경을 넓게 할 수 있다. 즉 강한 그리스도인은 고기를 먹을 내적 자유도 있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먹지 않을 자유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약한 믿음으로 인해 상처를 받을 형제를 위해 연약한 자가 거리끼는 고기를 먹는 일을 삼간다는 것을 확실히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강한 자들이 고기를 먹지 아니함이 영구하고 강력한 금욕(禁慾)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은 '먹다'를 가리키는 '에스디오'(*)의 동사가 20절에서 현재형인 '에스디온티'(*, '먹는')로 사용된 후 바로 이어 본절에서 부정과거 '파게인'(*, '먹었다')으로 사용된데서 확인된다(Dunn). 그러므로 이것은 아직도 구약의 규례에 매여있는 연약한 형제들을 위하여 잠시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 연약한 자들이 고기를 먹지 않음은 구약성경에 음식물과 관련된 각종 규제 사항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고기를 못 먹었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적절한 방법으로 피를 빼지 않은 고기(9:4;12:15, 16). 다시 말해 고기를 그 피와 함께 먹는 것은 모세의 율법(19:26;12:23-25;15:23)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노아에게 행한 하나님의 명령(9:4)에 의해서도 금지되었다. () 부정한 동물의 고기(11:8;14:8). () 우상 제물의 고기(고전 8:13). 물론 고기를 먹는 그 자체를 율법에서 금하는 것은 아니었고(12:8;11:18) 다만 위의 금기 사항과 관련된 고기를 피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바울은 이런 규례를 아직도 준수하는 연약한 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강한 자들이 신앙의 자유의 행사를 절제(節制)하는 것이야말로 칭찬받을 만한 아름다운 행동임을 밝히고 있다(Harrison). 즉 먹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위해서 그것을 먹지 않는 이타적인 행동을 요구한 것이다. (2)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메데 피에인 오이논). 이는 '칼론 토' 구문의 두번째 용어로서 17절의 관용구 '브로시스 카이 포시스'(*,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중에 '포시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를 밝혀준다. 그러나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 자체는 금지되지 않았기 때문에(7:13;11:14;14:23-25;2:1-11;딤전 5:23) 바울이 여기서 언급한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는 하나의 가상적인 실례로서 언급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보다 개연성이 높은 해석은 모든 고기를 피하는(삼가는) 조심스러운 행위는 포도주까지도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Dunn). 왜냐하면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 이러한 행위들은 약한 자들이 자기를 지키는 실제적 관습이었기 때문이다(10:9, 10;44:21;1:3-16;10:3). 그러므로 이것 역시 약한 자들 편에서의 금주(禁酒)가 아닌 강한 자들이 연약한 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의 금주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서 이런 행위야말로 참으로 선하다는 것이다. (3)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메데 엔 호 호 아델포스 수 프로스콰테이). 이는 '칼론 토'(*)는 구문의 세번째 용어로서 연약한 자를 위하여 고기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다는 원리에서 더 나아가 남에게 거리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니하는 것이 좋음을 시사한다(Godet). '거리끼게 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콰테이'(*)'다리를 걸어서 넘어뜨리다' 혹은 9:32, 33에서처럼 '장애물에 걸려 넘어진다'는 용례로 사용되었다(Dunn).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약한 형제가 강한 형제의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목격하고서 마음에 상처를 받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강한 자들로부터 받는 압력에 굴복하여 스스로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행함으로써 실제적으로 결국 걸려 넘어지는 결과를 초래함을 말한 것이다. 즉 강한 자들의 이러한 행동은 결국 약한 자들을 마침내 정상적인 신앙 생활에서 이탈되게 하여 그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임을 말한다(Calvin). 이것은 13절과 15절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요컨대 바울은 본절에서 말하는 그러한 종류의 일이 있을 때 자기가 가진 신앙의 확신과 내적 자유에 근거해서 어떤 것을 외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지만 그것을 다른 그리스도인에게도 강요함으로써 동료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의 방해나 또는 파멸을 일으킬 우려가 있으면 그것이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확고한 내적 확인과 자유를 가지지 못한 자가 강한 자의 행동을 본받음으로써 신앙 인격의 순수성 및 고결성이 상처를 받고 그 영혼의 상태가 상심케 되며 혼돈케 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런 내적 확신과 내적 자유의 외적인 표현은 기꺼이 절제(節制)하고 단념해야 한다. 이러한 일이야말로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는 교훈이다. 그런데 위의 세 가지를 안하는 것이 소극적인 자세라면 이에서 더 나아가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열매를 맺어 화평의 일과 덕을 세우는 일에(17, 19) 힘쓰는 것은 적극적 자세이다(Cranfield).

 

 

 

쉬 피스틴 헨 에케이스 카타 세아우톤 에케 에노피온 투 데우 마카리오스 호 메 크리논 헤아우톤 엔 호 도키마제이

 

개역개정,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새번역,22 그대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우리말성경,22 그대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견고히 지키십시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정죄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가톨릭성경,22 그대가 자기의 것으로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느님 앞에서도 그대로 지니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면서 자신을 단죄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영어NIV,22 So whatever you believe about these things keep between yourself and God. Blessed is the man who does not condemn himself by what he approves.
영어NASB,22 The faith which you have, have as your own conviction before God. Happy is he who does not condemn himself in what he approves.
영어MSG,22  Cultivate your own relationship with God, but don't impose it on others. You're fortunate if your behavior and your belief are coherent.
영어NRSV,22 The faith that you have, have as your own conviction before God. Blessed are those who have no reason to condemn themselves because of what they approve.
헬라어신약Stephanos,22 συ πιστιν εχεις κατα σαυτον εχε ενωπιον του θεου μακαριος ο μη κρινων εαυτον εν ω δοκιμαζει
라틴어Vulgate,22 tu fidem habes penes temet ipsum habe coram Deo beatus qui non iudicat semet ipsum in eo quo probat
히브리어Modern,22 יש לך אמונה תהי לך לבדך לפני האלהים אשרי מי שלא ידין את נפשו בדבר אשר כשר בעיניו׃


 

성 경: [14:22]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신념의 생활]

󰃨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 이 구절은 일반적인 것으로 강한 자와 연약한 자 모두에게 적용할 수도 있지만(Robertson, Cranfield) 십중팔구 주로 강한 자들에게 주는 권고이다(Murray, Harrison, Calvin). 왜냐하면 자기의 확신에 따라 은밀히 행동할 것을 경고받은 자는 다름아닌 강한 자이기 때문이다(15, 20, 21). 여기서 '네게 있는 믿음을'(*, 쉬 피스틴 헨 에케이스)이란 구절은 단순한 질술 이상의 뜻이 내포되어 있는 말로서 '네가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 '는 질문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Godet, Meyer, Calvin) 또는 '피스틴'(*, '믿음') 뒤에 있는 관계대명사 ''(*, which)을 살려서 '너는 네가 가진 믿음을' 지키고 있으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믿음'(*, 피스티스)이란, 강조 용법으로 표현된 ''(*, '', '당신', 여기서는 강한 자를 말함)가 가진 믿음으로서 구체적으로 강한 자들이 고기를 먹는 믿음을 말한 것이다(Calvin, Murray, Cranfield).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카타 세아우톤 에케 에노피온)는 말은 네가 가진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네 자신에게 간직하고 있으라'는 말로서 '에코'(*, '가지다', '붙잡다', '소유하다')의 현재 명령법이 사용되었다. 이는 자신의 신앙의 확신과 자유를 즐기기 위해서 그것을 외적으로 함부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며 오히려 자신과 하나님만이 아는 은밀(隱密)한 일로서 자신의 내적 삶에서만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강한 자의 자유권이 공공연하게 행사된다면 이는 연약한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하므로 이러한 자유권의 행사는 가능한 한 삼가야 하기 때문이다(Harrison). 즉 믿음의 자유를 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약한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지 말아야 하며 따라서 그 믿음의 자유를 내적으로 경험하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이 구절은 자신이 행하는 일의 정당성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복되다는 일반적인 진술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양심이 무딘 그리스도인들도 복되다는 진술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Cranfield). 이 선언은 앞 내용과 계속되는 것으로서 강한 그리스도인의 행동에 대한 선언이다(Murray). , 강한 그리스도인이 앞에서 계속 언급한 진리에 주의를 기울여(15, 20, 21) 약한 형제에게 상처를 주는 내적 자유의 외적 표현을 삼감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며(17) 하나님의 사업을 세워가는 행위가(19) 참으로 아름답고 복되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복이 있도다'(*, 마카리오스)는 미래의 어떤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혼의, 특히 평화로운 양심의 현재적 상태를 말한다(Calvin, Murray, Godet). 왜냐하면 그는 전혀 의심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과 분열이 없으며, 더욱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행함으로써 자신을 책()하게 되는 위험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이 있도다'의 조건은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한 자'여야 한다. 여기서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도키마제이'(*)로 자신을 '시험하다', '검토하다', '분석하다'(*, 도키마조)의 현재 능동형이다. 그리고 '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 '크리논'(*) 역 시 '정죄하다', '심판하다'(*, 크리노)의 현재 능동형이다. 따라서 자신의 신앙 행위를 스스로 면밀히 검토하여 자신의 신앙 양심에 가책(呵責)이 없다면, 즉 자기가 확신하여 행동한 바에 대하여 전혀 갈등이 없는 상태를 소유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선언이다(Calvin, Godet).

 

 

 

 

호 데 디아크리노메노스 에안 파게 카타케크리타이 호티 우크 에크 피스테오스 판 데 호 우크 에크 피스테오스 하마르티아 에스틴

 

개역개정,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새번역,23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에 근거해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다 죄입니다. ㉫ / ㉪또는 '확신' ㉫어떤 사본들은 여기에 (16:25-27)이 이어짐
우리말성경,23 그러나 의심하며 먹는 사람은 이미 정죄를 받았습니다. 이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죄입니다. 
가톨릭성경,23 그러나 의심을 하면서 먹는 사람은 이미 단죄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믿음에서 우러나온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다 죄입니다.
영어NIV,23 But the man who has doubts is condemned if he eats, because his eating is not from faith; and everything that does not come from faith is sin.
영어NASB,23 But he who doubts is condemned if he eats, because his eating is not from faith; and whatever is not from faith is sin.
영어MSG,23  But if you're not sure, if you notice that you are acting in ways inconsistent with what you believe--some days trying to impose your opinions on others, other days just trying to please them--then you know that you're out of line. If the way you live isn't consistent with what you believe, then it's wrong.
영어NRSV,23 But those who have doubts are condemned if they eat, because they do not act from faith; for whatever does not proceed from faith is sin.
헬라어신약Stephanos,23 ο δε διακρινομενος εαν φαγη κατακεκριται οτι ουκ εκ πιστεως παν δε ο ουκ εκ πιστεως αμαρτια εστιν
라틴어Vulgate,23 qui autem discernit si manducaverit damnatus est quia non ex fide omne autem quod non ex fide peccatum est
히브리어Modern,23 ואשר לו ספק באכלו נאשם כי לא עשה מאמונה וכל אשר נעשה מבלי אמונה חטא הוא,׃

 

성 경: [14:23]

주제1: [성도의 자유의 한계]

주제2: [신념의 생활]

󰃨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 이 구절은 약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준 교훈으로서 앞절(22)에 묘사된 강한 그리스도인과 대조를 이룬다(Murray). 강한 형제가 가진 그 특별한 내적 자유를 누리지 못한, 따라서 자기 행동의 정당성에 대하여 의심하는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심정으로 고기를 먹는다면 정죄(定罪)를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심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크리노메노스'(*)'주저하다'라는 뜻을 가진 '디아크리노'(*)의 복수 현재 중간태 분사로서 진리의 말씀에 의한 확신이 없어 갈팡 질팡하면서 갈등하는 상태를 말한다(Calvin). 그리고 '정죄 되었나니'(*, 카타케크리타이)라는 말은 '심판하다', '정죄하다'의 뜻을 가진 '카타크리노'(*)의 완료 수동형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죄되었다'는 말은 인간을 구원에서 배제하는 하나님의 미래 활동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그릇된 자로서 이미 정죄된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Harrison).

󰃨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 이 구절은 앞의 내용이 왜 그런가를 명확히 제시한다. 즉 의심하고 먹는 자가 정죄된 이유는 고기를 먹을 내적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다시 말해 그의 믿음이 그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허락한다는 완벽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먹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확신이 없으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위선적인 행동을 한 안디옥에서의 베드로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2:11-14). 그는 확실히 믿음으로 행하지 않았고 따라서 바울의 책망을 들었을 때 항변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양심이나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행동한 것이 필연적으로 정죄받은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 피스티스)의 의미는 본절 후반절에 나오는 믿음의 의미와 같다.

󰃨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 이는 본장의 결론적인 선언이다. 여기서 '믿음'(피스티스)이 어떤 의미에서 사용되었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에서의 구원의 믿음을 뜻한다(Godet). (2) 선한 양심같은 그 무엇을 뜻한다(Sanday and Headlam). (3) 자기의 기독교적 신앙이 어떤 특별한 일을 행하도록 그와 관련된 내적 자유를 허용한다는 확신, 즉 말씀의 원리에서 깨달은 마음의 확신을 말한다(Cavlin, Murray). 위의 견해 중 세번째가 가장 무난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장에서 지금까지 언급한 믿음(1, 2, 22, 23)과 어울리는 유일한 해석이 (3)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3)의 견해는 실제적으로 부분적인 면에서 (1)(2)의 요소를 다 포함하고 있다(Robertson). 그리고 '죄니라'(*, 하마르티아 에스틴)는 말에서 ''를 가리키는 '하마르티아'(*)는 통상적인 용법과 다른 방향에서 사용되고 있다. '하마르티아'(*)가 본래적 의미로서 일반적, 보편적으로 죄의 개념을 뜻했다기보다는 개개의 죄악된 행위들을 염두에 둔 말로서 믿음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모든 일, 즉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내적 확신을 따라 행한 일이 아니라면 그것이 어떤 일일지라도 죄가됨을 의미한다(Cranfield). 이렇게 하여 바울은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아디아포라'(adiaphora) 문제의 차원을 넘어 성도의 모든 생활의 근본 원리를 선언함으로써 강한 자와 연약한 자를 향한 본장의 권면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