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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찬양 악보 및 해설

새찬송가 398장 어둠의 권세에서 - 악보 및 해설

감리교단의 마경일(馬慶一, 1912- ) 목사가 작사한 이 찬송이 처음 나타난 것은《개편 찬송가, 1967》172장인데, 연세대학교 음대학장을 역임한 박태준 작곡이었다.
1983년 찬송가를 통일하면서 한양대 총장 김연준 장로에게 작곡을 부탁하여 92장에 실어 20여년 동안 불러왔는데, 이번에 이를 채택하면서 멜로디를 대폭 수정하였다.
그런데 이번 개편에서 멜로디를 함부로 뜯어 고쳤다.
작사자 마경일(馬慶一, 1912~1987 ) 목사는, 지금은 이북이 된 옛 경기도 개풍군(開豊郡)에서 태어났다. 흔히 말하는 [개성사람]이다.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장로가 구한말에 세운 송도고보를 거쳐 감리교신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미국 듀크대학 대학원에 유학하였다. 동대문감리교회에서 목회하다가 감리교총리원 전도국 총무, 이화여고 교목실장,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장을 지냈다. 감리교는 감독제인데 웬「총회장」인가. 해설이 필요하다.
일제의 한국인 황민화(皇民化)정책으로 교회 탄압이 점점 가혹하여 1940년 감리교는,「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이라는 일본국 어용조직으로 변하게 되었다. 1945년 7월, 일제는 각 교단 대표들을 불러 강제로 단일단체로 합동시켜 놓았으나, 곧 광복이 되자 각 교단마다 교단의 정통성 문제를 놓고 싸우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다. 
감리교단도 이른바 재건파와 부흥파로 갈려 한동안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다. 1949년 4월 두 파의 대표들이 모여 합동을 결의하고 총회를 열어 교단 명칭을 기독교대한감리회로 개칭하고, 김유순 목사를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6 · 25전쟁으로 김유순, 양주삼 감독을 비롯하여 많은 교역자와 신자들이 순교 또는 납치 당하였다. 다음 해 부산에서 3부 연합연회와 총회가 모여 유형기 목사를 감독으로 선임하였으나, 그 결의사항에 불만을 품은 일부 회원들이 탈퇴하여「호헌(護憲) 감리회」를 조직하였다. 
1955년 이후 감리교는 분열의 악순환을 계속, 1974년 10월 김창희 목사가 감독이 되자 반대파 회원들이 마경일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임하고, 이른바「갱신파」라고 하였다.  1980년 9월 감리교는 하나가 되어 연회별 감독제를 채택함으로써 오늘에 이른 것이다. 
마경일 목사는 많은 저서와 역서를 남겼다.
작곡자 김연준(金連俊, 1914- ) 장로는 감리교 장로다.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호는 백남(白南)이다. 어려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1939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들어가 김영환과 현제명이 이끄는 음악부에에서 연희전문 4중창단과 합창단에서 활동하고, 연전 오케스트라에서는 바이올린과 비올라 파트를 맡아 연주하였다.
1939년 동아공과학원을 설립했으며, 1948년 동아공과학원의 후신인 한양공과대학의 초대총장이 되었다. 1952-1973년 기독교세계봉사회(CWS) 이사 겸「교회연합신문」발행인, 1959-1973년 한양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이어 1961-1973년 대한일보사 사장, 1964년 한국정책연구소 소장, 1968년 대한체육연맹 회장, 1975-1980년 한양대학교 총장, 1976년 국제PTP 한국본부 총재 등을 지내고 1980년 이후는 한양대학교 재단이사장으로 있다가 27년 만에 은퇴하였다.
한양대학교․ 한양여자대학․ 한양고등학교․ 한양중학교․ 한양초등학교 등을 세워 교육에 힘썼으며, 또한 작곡가로도 활약하여「김연준 가곡 1,600곡집」과「성가곡집」등 총 16집을 출간하였다. 2001년에는 자신이 곡을 붙여 이미 가곡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시 80여 편을 실은 시집「청산에 살리라」를 펴냈다.
1970년 대한민국 모란장, 1979년 독일 튀빙겐대학교 음악대상, 1984년 미국 하원 공로패, 199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년 금관 문화훈장 등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