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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느헤미야 / 느헤미야서

느헤미야(Nehemiah)

1. B.C.538년 에스라 때에 스룹바벨과 함께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열두 두령 중의 한 사람이다(스2:2;느7:7).

2. 아스북의 아들로 벧술 지방 절반을 다스렸으며 성벽 일부를 중수하였다(느3:16).

3. 하가랴의 아들로 B.C.444년 이후 페르시아(바사)의 유다 지방을 통치하였다. 느헤미야서에 의하면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관원' 이었다(느1:11;2:1). 느헤미야와 동시대 문서로 알려진 '엘레판틴 파피루스'에는 그때가 B.C.465-423년에 통치했던 아닥사스다1세의 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술관원'이라는 느헤미야의 직책은 노예 신분이 아니라 상당히 영향력 있는 관직에 해당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1세와 매우 친근한 관계였으며, 그의 예루살렘 귀환도 기한부로 허용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2:6). 왕은 그에게 신임장을 주고 총리의 직책을 맡기기도 하였다. 포로의 신분인 유대인이 관직에 등용되었던 예는 다니엘서나 에스더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고대에는 포로들 중 귀족 가문의 청년들을 교육시켜 궁중에서 일하도록 하는 것이 흔했다(단1:4-5). 느헤미야는 수산궁에 있을 때 그의 형제 중 하나인 하나니로부터 무너진 예루살렘 소식을 듣고 눈물로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느헤미야보다 약 12년 먼저 에스라가 포로되었던 자 1,750명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다(B.C. 457). 그러나 에스라의 반대자들이 왕에게 참소함으로써 에스라의 예루살렘 재건 계획은 중단되었고, 왕의 새로운 조서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스4:6-23). 뒤에 느헤미야가 왕의 조서를 가지고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나서 예루살렘의 재건이 시작되었다. 느헤미야는 매우 용기있고 능력이 많은 사람이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는 먼저 무너진 성을 은밀히 돌아보고 하나님의 기도 응답과 왕의 조서를 예루살렘 방백들에게 전하며 재건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았다(느2:11-20). 그는 지지자들 뿐 아니라 산발랏, 도비야, 게셈과 같은 대적자들까지도 당당하게 대면하여, 결국 52일 만에 성벽 재건을 완성하였다(6:15). 

느헤미야는 에스라와 함께 많은 것을 개혁하였고, 특히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다. B.C. 431년에 관직을 수행하기 위해 페르시아로 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그 정확한 시기와 그의 말년에 대해서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다. 

 

느헤미야서(The Book of Nehemiah)

느헤미야서는 성경시대의 역사를 종결하는 책이다. 히브리 성경에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가 마치 한 책인 것처럼 되어 있다. 내용상으로 에스라에 관한 기록이 스7-10장에서 시작하여 느8-10장에서 완성된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 책이 나누이게 된 것은 최초 3세기 오리겐에 의해서이며, 15세기 이후 기독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느헤미야서가 에스라서와 문체와 양식이 다르다는 점과 적어도 중요한 부분, 즉 귀환하는 사람들의 명단(스2장=느7장)이 겹친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처음부터 각각 다른 자료였을 것이라는 사실이 주장될 수 있다. 이 책은 B.C.444년부터 약 420년까지 당시의 총독 느헤미야의 역사와 개혁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개요

1.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옴(1:1-2:20)

2. 반대세력에도 불구하고 건축함(3:1-7:4)

3. 제1차 포로귀환자 명단(7:5-73=스2:2-70)

4. 회개와 언약을 세움(8:1-10:39)

5. 예루살렘에 자리잡은 백성들과 족보들(11:1-12:26)

6. 마지막 개혁(13:1-31)

예루살렘의 성벽을 복구하는 느헤미야의 대 사업은 근본적으로 왕으로부터 허락을 얻어내는 데 있었다. 에스라가 상당수의 백성들과 함께 많은 금과 은을 가지고 꼭 12년 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나, 그의 사업은 그의 대적들이 얻어낸 왕의 반대 조서에 의하여 중단되어 왔다. 하나님의 섭리로 느헤미야는 성벽을 복구하라는 왕의 조서를 얻어 냈다. 실제의 성벽건축은 여러 지도자들 사이에 분할되었다. 유대 지경의 여러 도시들은 일할 사람들을 파견하였는데, 여기서 느헤미야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건축이 빠르게 진척될 수 있었던 것은 에스라가 이루어 놓았을 사전 작업 덕택이었을 것이다. 3장에 언급되어 있는 대부분의 성문과 성벽 부분들은 확실하게 확인될 수 없다. 아마도 그 성벽은 예루살렘 동편 언덕만을 둘렀을 것이다. 산발랏과 여러 사람들은 느헤미야에 반대하여 조소와 위협을 하였고, 간교한 음모를 꾸몄다. 산발랏은 엘레판틴(Elephantine) 파피루스들에서는 사마리아의 통치자로 불리고 있다. 그는 세력이 강성해지는 한 경쟁지역을 염려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거기에는 느헤미야 통치 지역의 개혁 프로그램에 대한 종교적인 적대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내부적으로 문제점들이 생겼다. 모세의 율법이 가난한 자들에게 완전한 자선을 요구한 반면에, 부자들이 이자를 취하고 있었다(1달에 1%, 느5:10). 그러나 모든 반대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사업에서 한 손으로 일을 하며 다른 한 손으로 병기를 잡은 사람들에 의하여 성벽은 건축되었다. 

에스라서 2장의 목록이 반복되고 있는 느헤미야서 7장의 족보는 흥미롭다. 두 목록들 사이에는 이러한 구체적인 자료들을 기록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정도의 중요하지 않은 차이들이 있다. 이것은 느헤미야가 사용했던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자들의 명단이 많은 사람들이 제안하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의 역사들을 전할 때 사용된 방법이었던 구전에 의하여 보전된 것이 아니라 기록된 자료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느헤미야의 개혁은 에스라의 모세율법을 가르치는 것과, 신31:10에서 명령되었던 것처럼 초막절을 지키는 것 등을 포함한다. 이어서 느9장에는 죄를 자백하는 위대한 기도가 나오는데, 이것은 오경에서 인용한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모세에게 주어진 것처럼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기로 한 언약이 엄숙히 이루어졌다(느10:29). 느헤미야의 마지막 개혁은 성전 경내로부터 도비야를 제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도비야는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돌아간 사이에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가까이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13:4-5). 또한 엘리아십의 손자가 산발랏의 딸과 결혼을 하였다(느13:28). 엘리아십은 분명히 다리우스 2세 통치기간(B.C.423-404) 중에 그의 아들 요하난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요하난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으로서 엘레판틴 파피루스에 언급되어 있다. 그에 대한 언급은 느헤미야의 역사가 적어도 B.C.423년까지는 계속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