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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산산나 / 산산이 / 산상수훈

산산나 Sansannah 

유다의 남부에 있는 성읍으로(수15:31), 하살수사와 같은 곳이며,오늘날의 브엘세바 북동쪽에 있는 '키르벳 에쉬 샴사니야트' 로 추정되는 곳이다.

산산이 pieces

여지없이 흩어지거나 깨어진 모양을 묘사하는 말로서, 사무엘상2:10에서 한나는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산상수훈 Sermon on the mount

마5-7장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 누가복음에 나오는이와 병행되는 본문(눅6:20-49)에도 이와 같은 이름을 붙일 수 있는가는 이 양자의 문학적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누가복음의 경우는말씀이 ‘산 위' (마5:1)에서가 아닌 '평지' (눅6:17)에서 전달된 것으로 되어 있어 흔히 평지 설교로불리운다. '산 위'와 '평지'의 서로 다른 표현은아마도 같은 장소를 각기 다른 방향에서 본 데 기인하는 것 같다.
산상수훈은 선포가 아니라 교훈이다. 별다른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더라도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요구들을 성취해야 하는 사람에게 ‘복음’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 밖에 있어성령의 능력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서기관과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알 수 있다. 산상수훈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의 성품을 묘사한 것이며 이런 사람들에게 지금 기대되는 높은 윤리생활을 서술한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산상수훈은 기독교의 요체를 보여준 것이다.
1. 구성. 과거 산상수훈은 예수께서 한번의 기회에 행하신 한 차례의 강론으로 굳게 믿었다. 마태의 기록으로 보면 틀림없이 그런 것 같다. 제자들이 나아오자 예수께서 입을 열어 가르치셨고(5:12) 가르침이 끝나자 무리들이 그 가르침에 놀라와했다(7:28).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산상수훈은 주님의말씀을 편집한 것으로 여긴다(바클레이는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설교의 일종의 요약으로 본다. W.Barclay, The Gospel of Matthew, 1, p. 79),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산상수훈은 단일한 설교로보기에는 그 자료가 지나치게 농축되어 있다. 영적감지력이 뛰어나지 못했던 제자들로서는 이같은 풍부한 윤리적 가르침을 소화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2) 논제의 넓은 폭(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관한서술, 이혼에 관한 충고, 염려에 관한 경고)은 단일한 강론의 통일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3) 산상수훈 가운데 갑작스러운 내용들이 불쑥 나타난다(예. 마6:1-11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 (4) 산상수훈 중의 34개 절이 누가복음 여기 저기에 마태복음과는 다른 보다 적절하게 여겨지는 맥락 속에 나타난다(눅11:1에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따라 주기도가 소개되며 눅13:23 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좁은 문에 대한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 누가가 산상수훈에 있는 예수의 말씀을 그의 복음 여기저기에 흩어놓았다기 보다 마태가 예수의 말씀을 산상수훈에 옮겨 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5) 마태는 교훈 자료를 일정한 주제 아래 종합하여 예수님의 생애 설화에 삽입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산상수훈은 이런 교훈 모음의 첫번째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런 점들을 감안하더라도 산상수훈 전체를 임의적 구성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마4:23-5:1의 역사적 배경은 특정한 어떤 기회에 중요한 강론이 베풀어질 것을 예상하게 해준다. 산상수훈 자체내에 독립된 말씀들을 주제에 따라 수집해 놓은 것이 아닌, 예수님의 ‘짧은 설교들’로 보이는 내용들이 다양하게 계기적으로 나타난다. 산상수훈은 누가복음의 설교와 비교할 때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누가복음의 설교도 축복선언으로 시작하여 집짓는 자의 비유로 마치는 등 마태의 순서를 따르고있어 이 양자의 기사 배후에 공동의 출처가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일정한 기회에 베풀어진 실제의강론에 부응했던 시초의 틀이 존재했었을 가능성이농후하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이 누가복음의 설교보다 원본에 더 가까운 것인지, 또는 마태는초기의 출처에서 주어진 틀을 따랐는지 하는 문제는 아직도 학문적 논의가 끝나지 않고 있다. 마태는 처음의 설교 자료를 받아 관련된 자료들을 삽입함으로써 그의 특수한 목적을 위해 그것을 확대시켰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 산상수훈의 언어. 지난 세대에 아람어 학문은 '우리 주님의 시' (1952년에 간행된 C. H Burney의 책 제목)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밝혀 주었다. 번역과정에서도 우리는 셈족 시의 두드러진 특징인다양한 유형의 대구법을 인식할 수 있다. 마7:6은'동의어적' 대구법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주기도의 경우도 시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밝혀졌다(Burney, pp. 112이하). 이런 시적 성격을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본문을 산문을 해석하는 경우와 같은 융통성 없는 문자적 해석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정욕을 없애기 위해 정말 '눈을 뽑는다'든가 '손을 자른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그런데 실제로 이런 행동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다. 헌터는 "잠언이란 극단적으로 표현된 원칙"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역설을 거칠은 문자주의로 해석하는 것을 항상 피하고 잠언의 밑바탕에 놓인 원리를 추구하여야 한다(A. M. Hunter, Design for Life, pp. 19-20).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도덕적 명령에 나타나는 절대적 성격을 잘 이해해야 한다. 마5: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과 같은 구절들은 오랫동안 사람들을 괴롭혀 왔다. 이에 대한 해답은 이런 구절들은 '새 율법' 이 아니고 행동의 측면으로 표현된 폭넓은 원리들이란 사실에 있다. 이 구절들은 예언적 명령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항상 율법의 단순한 문자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니면서 그 이상의 것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새 시대의 윤리로서,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된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었다(참조, A. N. Wilder, The Sermon on the Mount, IB, 7, 1951, p. 163)․
3. 배경. 마태와 누가 모두 이 설교를 예수님의 공생애의 첫 해에 배치하고 있다. 마태는 열 두 제자의 선택 직후에 배치하여 산상수훈이 일종의 '안수 설교' 임을 암시한다. 마태나 누가 어느 경우에나 이 설교는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이 적대감을 보이기 전에, 그러나 예수님의 명성이 전국에 널리 퍼질 만한 시점에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처음 몇 달은 회당에서 이루어졌으나 곧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성화로 옥외 전도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에 따른 변화는 예수님의 메시지의 성격에도 나타난다. 예수님은 처음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마4:17)고 선포하셨으나 진지하게 배우기를 열망하는 무리들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바꾸셨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 설교의 무대는 북쪽 평야를 에워쌌던 산기슭의 어느 한 작은 언덕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설교 직후 예수님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기에 (마8:5) 무대는 이 지역 일대에 속하였던 것 같다. 13세기의 한 라틴 전승은 보다 남쪽을 위치한 두 봉오리를 거느린 언덕 카른 하틴(Karn Hattin)을 거명하지만 관광 안내원이나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정도이다.
이 설교는 일차적으로 제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다. 마5:1-2과 눅6:20 이 이 점을 밝히고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마5:13)와 같은 말씀에서 2인칭이 사용된 것과 이 설교 전체의 높은 윤리는 이 설교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위해 이교생활을 버린 사람들을 겨냥한 것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 끝머리(마7:28-29;눅7:1)에는 무리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무리들도 현장에 있으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으나 강론 자체는 일차적으로 제자들의 집단을 상대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눅6:24-26의 '화의 선언' 과 같은 특별한 언급들은 이같은 경고가 필요했던 현장의 일부 사람들을 향한 '여담' 이었던 것 같다.
4. 분석. 산상수훈을 실제 강론의 요약으로 보든, 마태가 정리한 윤리적 말씀의 모음으로 보든, 마5-7장이 훌륭한 통일성을 지니면서 기본적인 주제를 논리적으로 발전시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 주제는 축복선언들 속에서 제시되고 있는데 '하나님 나라에 사는 생활과 품행' 이라 표현할 수 있다. 산상수훈의 내용을 서술적으로 분석하면 아래와 같다.
(1)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축복 5:3-16

  ① 축복선언(5:3-10)
  ②마지막 축복의 확대 및 불신 세계에서의 제자의 역할 제시(5:11-16)
(2) 예수님의 메시지와 옛 율법과의 관계, 5:1718
  ① 명제의 제시(5:17). 예수님의 메시지는 율법의 문자의 배후로 뚫고 들어가 그 근저에 놓인 원리를 명확히 하고 이상적으로 완성시킴으로써 율법을 '성취시킨다'
  ② 명제의 확대(5:18-20)
  ③명제의 예증(5:21-48)
     첫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서 문제의 핵심은 노하는 데 있다(5:21-26).
     둘째, 간음은 음욕의 결과이다(5:27-32)
     셋째, 하나님 나라의 의는 투명한 정직을 요구하므로 맹세는 불필요하다(5:33-37)
     넷째. 복수법(출21:24: 레24:20; 신 19:21)은 보복하지 않는 정신으로 바뀌어야 한다(5:38-42).
     다섯째. 사랑의 적용은 보편적이다(5:43-48)

(3) 하나님 나라의 품행을 위한 실천적 지침(6:17:12)
  ① 위선적 경건의 경계(6:1-18)
     첫째. 구제할 때(6:1-4)
     둘째. 기도할 때(6:5-15)
     셋째, 금식할 때(6:16-18)
  ② 오직 신뢰함으로 염려를 추방하라(6:19-34)

  ③ 사랑의 삶 (7:1-12)
(4) 헌신적 삶에 대한 도전(7:13-29)
  ① 길은 좁다(7:13-14)
  ②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7:1520)
  ③ 하나님의 나라는 듣고 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있다(7:21-27)
5. 산상수훈의 해석. 산상수훈은 오랫동안 다양하게 해석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히포의 감독 시절(AD393-396) 산상수훈에 관한 논문을 썼던 어거스틴에게 산상수훈은 '기독교 생활의 완전한 규범 혹은 본보기'로 옛 율법과 대조되는 새 율법이었다. 수도원들은 산상수훈이 일반 민중이 아닌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완전에 대한 충고'로 해석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와 반대로 산상수훈을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신적 의(義)의 비타협적 표현'으로 보았다. 러시아의 문호이며 사회개혁자이기도 했던 톨스 산상수훈을 다섯 명(분노의 억제, 순결, 맹세의 금지, 무저항, 철저한 원수 사랑)으로 분해하면서 이를 철저히 지키면 현실의 모든 악을 일소하고 유토피아적 왕국으로 안내할 것이라고 하였다. 바이스(Weiss)와 슈바이처는 산상수훈의 요구들은 모든 시대가 따르기에는 너무 철저한 것으로 보아, 종말이 가까웠다고 믿었던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중간 윤리'(interim ethics)였다고 밝혔다. 비유적 언어임을 크게 감안하는 다른 사람들은 산상수훈을 고상한 사고방식의 표현으로서 인간이 행하여야 할 바를 다룬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여야 함을 다룬 가르침으로 이해하였다.
이렇듯 오늘날 산상수훈을 해석해야 하는 우리 앞에는 산상수훈의 본질적 의미를 풀어낼 '열쇠'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많이 제시되어 있다. 키텔(Kittel)과 같이 우리는 인간으로 하여금 실패감에 젖게 하여 회개하고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 산상수훈은 의도적으로 과장된 요구들을 하고 있는 것으로 취급할 수 있다. 뷘디쉬(Windish)처럼 우리는 역사적 주석과 신학적 주석을 구분하여 산상수훈의 요구들의 실천 가능성을 지켜낼 수도 있다. 또한 디벨리우스(Dibelius)와 함께 우리는 위대한 도덕적 명령들을 침입해 오는 하나님 나라의 절대적 윤리로 해석하거나 세대주의자들과 함께 산상수훈 전체를 미래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으로 이월시킬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산상수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적어도 몇 가지 우리에게 지침이 될 만한 것을 제시할 수 있다. (1) 산상수훈이 시와 상징으로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매우 감동적인 윤리적 행위의 수준을 요구하고 있다. (2) 예수님은 율법 규정들로 된 새로운 법전을 내세우고 있지는 않지만 위대한 윤리적 원칙들을 천명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주려 하고 계신다. (3) 산상수훈은 세계를 직접적으로 개혁하려고 하는 강령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세계를 버린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다. (4) 산상수훈은 전혀 실천 불가능한 이상도 아니지만 완전하게 실현 가능한 것도 아니다. 길모어 (S. M.Gilmour)의 말을 빌리면, 산상수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안으로 침입해 들어와 교회 안에서 역사 속에 둥지를 틀었으나 그 완전한 실현은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될(고전 15:28) 역사 저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 질서에 속하는 윤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