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하다 give out
가려내거나 골라서 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호수아는 요단 서편에서 땅을 기업으로 받을 일곱 지파 중 각 지파의 3인을 선정하여 땅에 구획을 그리게 한 후 제비 뽑아 각기업을 분배하였다(수18:4).
선조 fathers
조상과 동의어로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 이전의 대대의 어른을 지칭한다(창46:34).
선종하다 die
가톨릭에서 임종때에 성사를 받아, 대죄 없는 상태에서 죽는 일을 말하지만, 욥은 지난날 스스로 '나는 내 보금자리에서 선종하리라' (29:18, '나는 죽을 때까지 이렇게 건장하게 살 것이다') 하고 생각했던 것을 회상한 말이다.
선주 owner of ship
배의 주인을 의미한다. 바울이 로마로 가는 항해를 할 때 백부장인 율리오는 바울의 충고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신뢰하여 항해를 강행하다 풍랑을만나게 되었다(행27:11).
선지자 prophet
1. 선지자의 의무
(1) 규범적 선지자. 성경에서 선지자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은 아브라함(창20:7, 참고. 시 105:1)이었으나,구약의 예언은 모세의 삶과 인격으로부터 그것의 규범적인 형태를 갖게 되었다. 모세는 장차 나타날 모든선지자들과 비교될 기준으로 세워졌다(신18:1519:34:10). 구약 예언의 정통적 전승에서 여호와의 참선지자라고 할 수 있는 모든 면모들이 모세에게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고개인적인 소명을 받았다. 한 선지자를 세우는 데 있어서 그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었다(출3:14:17. 참고. 사6장;렘1:419;겔1-3장;호1:2;암7:1415;욘1:1). 감히 스스로선지자의 직무를 취하는 자들은 단지 거짓 선지자들일뿐이다(렘14:14;23:21). 부르심의 주된 목적과 결과는 위의 성경 구절들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현존하심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 이요, '의도' 였다(왕상22:19;렘23:32;암3:7),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던 한 사람으로서 사람들 앞에 섰던 것이다(왕상17:1;18:15).
또한 선지자의 역사 인식도 모세로부터 유래하였다. 이사야가 그의 가장 강력한 경쟁대상들 중의 하나였던 우상숭배에 대하여 강하게 반박하면서, 여호와한분만이 예언의 장본인이시며 우상들은 그 예언대로따라야 하는 기껏해야 영리한 체 하는 것(예, 사45:20-22)일 뿐이라고 한 것은 모세와 출애굽 사건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한다. 여호와는 앞으로 일어날 위대한 사건들을 설명할 필요한 실마리들을 지닌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셨다. 역사는 계시가 되었다. 왜냐하면 역사적 상황 속으로 그 역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미리 아는 사람이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모세는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거나 또는 이미 일어난 후에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찾으라고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사건들과그것들의 의미에 관하여 미리 경고받았다. 이것은 다른 모든 선지자들에게도 공통되는 것이었다. 고대 열방민족들 가운데 오직 이스라엘 만이 역사에 대하여참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것들은 역사의 하나님에게서 보냄받은 선지자들의 덕택이며 선지자들은 모세로부터 그 영향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윤리적 사회적 관심은 모세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소명을 받기 전에도 모세는 그의백성들의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졌다(출2:11이하. 참고, 17절). 그후 예언자적 율법 전달자로서, 그는 고대세계의 힘없는 자들, 약한 자들을 위한 가장 인간적이고 박애적인 법전의 기초를 세웠다(신 24:19-22;레19:9이하 등).
많은 예언자들이 그들의 왕과 맞서는 모습과, 국가적 사업에 있어서 정치가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모습이 발견된다. 이것은 선지자의 한 기능으로서, 국가에 법을 제정하고 심지어 '왕' (신33:5)이라고 불렸던 모세에게서 그 전형(典型)을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처음 두 왕들도 예언자라고 불린 것은 흥미로운일이지만 두 직무의 일치가 계속 이어진 것은 아니다.모세 식의 신정정치는 기름부음받은 왕과 선지자들의연합을 통하여 지속되었다.
우리는 또한 모세에게서 모든 선지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선포와 예언(prediction)의 결합을 본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예언의 일면으로서 오늘날 더 많은 세부적 상황에 대하여 우리에게 관심을 갖게 할 것이다.참 선지자를 단순한 점장이(prognosticator)와 구별되게 하는 것은 바로 이와같이 선포와 예언이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모세가 장차 올 선지자(신18:15이하)에관하여 위대한 예언을 할 때에, 그는 이방 제의들의 풍습들과 그 유혹과 관련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절박한현실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었다. 모세에게서는 그를 뒤이었던 선지자들의 두가지 다른 면의 특징들이발견된다. 많은 예언자들이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상징들을 사용했다(렘19:1이하;겔4:1이하).모세는 그가 그의 민족에게 중재한 고도의 상징적 제의는 물론 높이든 손(출17:8이하)과 높이든 뱀(민21:8)을 사용했다. 그리고 예언자 직무의 중재적인 면이 또한 그에게서 발견된다. 그는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출18:19;민27:5) 있었고 적어도 한번 이상 난국의상황에서 기도의 사람이었다(출32:30이하,신9:18이하.참고, 왕상13:6;왕하19:4;렘7:16;11:14).
(2) 선지자들의 명칭들. 두 개의 일반적인 묘사들이선지자들에게 사용된 것 같다. 첫째로, '하나님의 사람' 이라는 명칭이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그들의 동족들에게 어떻게 보였는지를 나타내준다. 이 명칭은 모세에게 대하여 처음으로 사용되었고(신33:1), 왕정이끝날 때까지 사용되었다(삼상2:27;9:6;왕상13:1). 이 명칭이 선지자들과 보통 사람들이 구분되는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는 것이 수넴여인의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왕하4:9)라는 말 속에서 명확해진다(왕하4:9). 둘째로, '나의(그의, 당신의 종' 이라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종' 이라고 말하는 것은 등장하지않지만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나의 종들'로 묘사하는 것은 자주 등장한다. 그러므로 또 다른 소유 대명사 '그의, 당신의' 가 사용된다(왕하17:13,23;21:10;24:2;렘7:25;겔9:11). 이 말 속에는 선지자들의 하나님과의관계가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 역시 모세에게서 처음사용되었다(수1:1-2).
선지자를 지칭하는 히브리 단어는 '나비', '로에',그리고 '호제'가 있다. 첫번째 단어는 항상 선지자로번역되었다(동사형 '닙바'), 두번째는 ‘보다’동사(‘라아', 일상적인 의미)의 능동 분사형으로서 '선견자'로 번역된다.셋째도 또 다른 '보다'동사'하자',예를 들어 ‘환상을 보다' )의 능동 분사형으로서 '선지자' (사30:10) 또는 '선견자' (대상29:29)로 번역된다. 나비의 파생은 오랜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 단어는아카드어 어근까지 소급되어지는데, 그 의미는 부름받은 자, 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외치는자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두가지 모두 놀라울 정도로 구약에서 발견되는 선지자의 성격과 일치한다. 선지자가 기도로 하나님을 부르는 자라는 가능성이 정밀 검토되지는 않았지만, 이것 역시 분명히 처음부터 (창20:7) 선지자의 특징이었다.
마찬가지로 세 단어 '나비', '로에', '호제'의 관계에 대하여 폭넓은 논의가 되어 왔다. 세 단어를 잘 구분하여 사용하는 역대상 29:29(여기서 갓은 '호제' 로 묘사된다)과 같은 구절들은 우리가 마땅히 세 단어의 뜻을 정확히 구분해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 용법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아도 잘 규명되지 않는다. 세 단어들의 사용은 사무엘상 9:9에 의해서 두 가지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는 초기로 이 때에는 '나비'와 '로에' 가 서로 다른 뜻을 의미했다. 둘째는 후기로, 이 때는 사무엘상 9:9의 저자가 살았던 시기다. 그 때에 '나비'는 초기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으면서 '로에'의 유사어로서의 역할을 했다. 초기에 관련된 자료는 사무엘상 9-10장이다. 이 두 장에 관한 한 우리는 두 단어의 의미를 구분할 수 있는데, ‘나비’는 집단적으로 황홀경의 예언(삼상10:5-6,10-13;19:2024)을 하는 선지자 그룹의 일원인 반면에), ‘로에’(seer)는 독자적이었고 더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이 명칭은 열 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 여섯번이 사무엘에게 사용되었다(삼상9:11,18-19;대상 9:22;26:28;29:29). 그러므로 그는 가장 뛰어난 '조에' 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사무엘상 9:9에 나타난 후기에 오면, 정확한 구분이 불가능해진다. 역대기 전체를 통해서 ‘호제’가 항상 왕과의 관련속에서 언급되고 있지만(대하 29:30만 제외하고), 그가 상주하는 통찰자로 고용되었다는 그럴듯한 주장은 증거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역대기 안에서 그는 자주 '나비'가 했음직한 일들을 하고 있고(대하19:2;33:18), 그에게 자주 부여된 임무는 궁정 역사가의 임무였다. 이 임무는 '나비'와 '로에' 에게서도 동등하게 발견되어진다(대하 9:29;12:15. 참조, 대상29:29).
일반적인 구약의 용례에서 동사 '하자'의 의미는 '라이'의 의미와 유사하다. 둘 다 복술과 관련되어 사용되고(겔21:21;슥10:2), '나비'와 관련이 있으며(미 3:11), 둘 다 사건의 의미(시46:8;사5:12)와 인생의 의미(삼상16:1시11:47)를 파악하는데 사용된다. 둘 다 하나님의 환상(시27:4;사6:5)과 예언적 행위(사1:1;겔13:3)에 관하여 사용되며 둘 다 실행된 보복을 목격하는 것(시54:7;58:10)으로 사용된다. 사29:10에서는 '나비'와 '호제' 가 유사하게 사용되고, 사30:10에서는 '로에'와 '호제'가 유사하게 사용된다. 암7:12 이하에서는 아마샤가 아모스에게 유다에 가서 예언하라(바)고 명하면서 그를 '호제' 라고 칭하고, 아모스는 그가 '나비'가 아니라고 대답한다. 겔 13:9에서는 그 반대로 말하여진다. 즉 명사 '나비'가 동사 '하자' 의 주어가 된다. 이러한 언급들은 더욱 길게 나열할 수 있으므로, 여기서 결론을 맺으면 세 단어는 유사어라고 할 수 있다.
(3) 예언과 예측(foretelling and forthtelling), 선지자는 첫째로 하나님 말씀의 사람이었다. 에스겔의 정성어린 '무언(無言)의 행동' (겔4:1-5:4)과 같이 비록 선지자가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을 경우에라도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일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에 대하여 깨닫기를 원하셨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예언 말씀 속에 들어있는 생각은 이른바 단순히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전 상황을 철저하게 변화시키리라는 것이 선지자들의 확신이었다. 예를 들어, 이사야 28-29장은 정치적 이익에 관한 시급한 문제에 대해서 백성들이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구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30장에서는 일의 상황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유다, 앗시리아, 애굽간의 정치적 균형의 문제가 아니라, 한편에는 유다, 앗시리아, 애굽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영적인 관계의 문제인 것이다. 말씀은 상황 속에 던져진 활력있는 요소로서, 선포된 때로부터 그 상황은 말씀에 의하여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사40:8;55:11).
그러나 분명하게 선지자들은 주로 미래에 대한 경고와 격려의 방법을 통해 그들의 상황을 말했다. 거의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우선적으로 아모스 1:2에서와 같이 미래의 상황을 예언하는 자(foreteller)로 나타난다. 이러한 예언(foretelling)이 있게 된 데는 세 가지의 배경이 있다.
첫째로, 만약 사람들이 현재의 마땅히 해야 할 도덕적 책임을 다하고자 한다면, 그 미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이 단순한 예견(prognostication)과 세속적 호기심의 차원을 넘는 것임을 말한다. 회개로의 부름(사30:6-9)과 실제적으로 거룩함으로의 부름(사2:5)은 미래에 관한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다가올 진노에 대한 환상은 하나님의 자비를 지금 구하는 기초가 되었다. 도래할 축복에 대한 환상은 빛 가운데 걷는 현재의 삶을 촉구한다.
둘째로, 예언은 예언자들이 거룩한 역사의 통치자의 이름으로 말한다는 사실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예언자들의 외침은 주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로의 촉구였다. 이 지식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본성의 불변적 원리들에 합당하게 역사를 주관하였듯이, 그가 앞으로 무엇을 행할는지에 대한 인식이 나온다. 이것은 예언자들로서 그들이 모든 기본적인 지식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세와 출애굽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영원히 선포하셨기 때문이다(출3:15). 그들은 먼저 알고 있었다(암3:7).
셋째로, 예고는 선지자의 본래적인 직무에 속하는 것 같다. 이러한 것을 신18:9이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유아희생 제사와 같은 가증스러운 일들과 복술자들과 같은 가나안의 종교적 술객들에 관하여 경고 받았다. 분명히 이러한 자들은 소위 '점 치는 것' (fortune-telling)과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이런 저런 방법으로 미래를 살폈다. 이스라엘에게는 이러한 것들 대신에 주께서 백성들 가운데서 일으킬 선지자가 있다. 주의 이름으로 말하는 선지자는 그의 예언의 정확성에 의해서 평가 받아야 한다(신18:22). 이것은 이스라엘이 선지자의 예언을 기대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성경에서 놀라울 정도로 자세한 선지자들의 정신감응적이고도 천리안적인 은사를 발견할 수 있다. 엘리사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비밀리에 말한 것을 아는 능력으로 유명했고(왕하6:12), 그것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서 그 능력이 틀림없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에스겔은 그가 바벨론에 있으면서 예루살렘에 관하여 자세하게 알고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겔8-11장). 예언자들은 놀라운 정신적 능력의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왕상13:2;사44:28(참고, 행9:12)에 예증된 개인의 이름들에 대한 예지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에서 본문의 불확실성은 없으므로 문제는 단지 우리가 이러한 증거를 구약 예언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에 있다. 이와같은 세세한 예언(prediction)의 사건은 성경이 드러내는 바 일반적인 예언의 모습과 완전히 유사하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언(prediction)과 성취 사이의 시간 차이를 우리가 알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예언자는 그의 시대로부터 수백년 후에 태어날 어떤 사람의 이름을 알았을까? 언급된 구절들에서 '수백년' 이라는 말은 없다. 이것은 시간의 경과를 아는 우리들이 덧붙인 것이다. 더욱 간단하게 다음과 같은 실제적인 질문을 보자. 선지자들에 관한 우리의 지식으로 미루어 볼 때, 선지자가 개인의 이름을 미리 아는 것에 어떤 잘못된 점이 있는가? 구약의 관점에서 볼 때 '없다' 라는 대답이 옳을 것이다.
2. 예언의 영감과 방법
(1) 영감의 양식들. 선지자는 그의 동료들에게 전하라고 위탁받은 메시지를 어떻게 받았는가? 대답은 명확하면서도 모호하다. '주의 말씀이 임하였다' 에서 문자적으로 동사는 '~이다' 동사다. 이것은 주의 말씀이 능동적으로 현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인식의 말이며 이것이 선지자의 기본적 경험이다. 이와 같은 것이 출7:1-2(참고, 4:15-16)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먼저 선지자들에게 전달되고 이어서 선지자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말씀의 저자는 하나님이다. 주의 손이 예레미야의 입에 대실 때에(렘1:9), 그는 똑같은 경험을 한 것이다. 이 구절은 우리가 알도록 허용된 만큼의 것, 즉 하나님께서 가져오신 인격적인 교제 속에서 선지자가 말씀들을 위탁받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예레미야는 후에 이 경험을 '주의 회의에 참예하였다' (렘23:22)고 표현했다. 이 경험에 의해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밖에는 다른 방법으로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다.
예언의 영감에 있어서 꿈과 환상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때때로 렘 23:28은 우리에게 주의 말씀을 받는 수단으로써 꿈이 부적절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꿈의 타당성을 가르치는 민12:6-7과 삼상286,15에 비추어 볼 때에 렘23:28은 '단순한 꿈' 이나 '자신의 생각의 꿈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예레미야는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맛보았다(렘31:26. 환상을 통한 경험은 예언자 스가랴에게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러나 꿈과 마찬가지로, 환상도 영감의 방법에 관한 우리의 지식(또는 무지)에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또한 상징(symbol)을 통하여 말씀을 깨닫는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렘 18장암7:7이하;8:1-3),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인간이 그의 말씀을 깨닫게 하셨는지를 알지 못한다. 영감은 일종의 기적이다.
이것은 예언의 영감에 있어서 하나님의 신의 활동에 관한 질문을 야기시킨다. 예언의 영감이 여호와의 신과 관련된 구절은 18군데가 있다 : 민24:2에서 발람이 언급된다 : 민11:29;삼상10:6,10;19:20,23은 예언의 황홀경을 다룬다 ; 예언은 여호와의 신으로부터 일어난다는 분명한 가정이 왕상22:24:느9:30;호9:7;욜2:28-29;슥7:12에서 발견된다 ; 여호와의 신의 영감에 대한 직접적인 주장이 미3:8에서 생겨난다 ; 예언의 말에 관한 여호와의 신의 영감이 대상12:18;대하15:1;20:14;24:20;느9:20;겔11:5 등에 의하여 주장된다. 이러한 증거들이 구약전체에 고르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포로 이전의 선지자들에게서는 드물게 나타난다. 실제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영에 관하여 어느 곳에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말씀의 사람'과 '영의 사람' 사이의 구분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것은 소위 신들린 사람들의 집단 영감(group inspiration)으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고심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결론은 필연적인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개연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초기의 집단 황홀경을 후기의 거짓예언자들과 직접적으로 동일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두번째 이유는 제이콥(E. Jacob)이 지적했듯이 ‘말씀은 생명의 창조적 숨결인 영(spirit)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 그리고 선지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분명하게 말씀을 전달하는 데에는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2) 전달양식들, 예언자들은 그들의 동시대인들 앞에 전할 말씀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서 섰다. 선포된 신언(神)은 하나님의 말씀이 표현되는 형식이다. 각각의 선지자는 이 말씀에 그 자신의 개성과 경험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아모스와 예레미야의 신언들은 두 선지자의 개성이 다르듯이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예언서를 볼 때 이중적 인식이 필요하다. 한편으로 보면, 이 말씀들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준 말씀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그의 대변자로 삼았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반면에 이 말씀들은 어떤 특정한 상황 아래에서 특정한 시간에 선포된 어떤 한 사람의 말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불완전하고 오류 가능한 인간의 말이기 때문에 그런 측면에서만큼은 불완전하고 오류 가능한 것이 되었다는 점은 오늘날의 학자들 가운데서는 일반적인 결론인 것이다. 이같은 결론은 우리가 예언서들 안에서 도출하는 한 선지자들 자신의 증거와는 다른 근거에 기초한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여기서 영감받은 사람들의 말과 그들을 영감시킨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를 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선지자들의 책들 속에서 그들 자신들을 통하여 선포된 말씀들을 하나님의 말씀들에 비해 조금이라도 부족하다고 생각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해야 한다.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그들 자신의 것과 다르거나 모순되는 목소리들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은 듯 보이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이 미치광이들이나, 또는 하나님의 회의에 참석해서 거기서 그들이 땅에서 말할 것을 받은 자들 모두에게 적합한 것이라고 하는 철저한 확실성을 갖고 있었다.
때때로 선지자들은 그들의 메시지를 비유나 알레고리의 형태로 전달했다(삼하12:1-7;사5:1-7; 겔 16,23장), 그러나 가장 극적인 전달 방법은 '행위 신탁' (행동으로 전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행위 신탁을 '시각적 도구'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의 특성과 기능에 관해 잘못된 개념을 갖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시각적 도구였으나, 히브리어의 단어의 효과와 관련해서 볼 때에 그것은 동시대의 상황속에 더욱 강렬하게 말씀을 심어주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것은 요아스 왕과 죽어가는 엘리사의 대화속에서 가장 잘 보여진다(왕하13:14이하). 17절에서 주의 승리의 화살은 수리아를 대항하여 쏘아진다. 예언자는 왕을 상징적 행위속으로 유도한 후 왕이 약속의 말씀을 수용할 믿음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를 묻는다. 왕은 땅을 세 번 치는데 그것은 효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게 될 성취의 정도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상징과 말의 관계를 보고 또한 이 둘이 실제 사건과 갖는 관계를 본다. 상징으로 구체화된 말씀은 놀라운 효력을 갖기 때문에 반드시 실행되며 상징이 선언한 것을 정확히 이룬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벌거벗고 맨발로 걸었고(사20장),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에서 토기를 깨부수고(렘 19장), 아비야는 그의 새 옷을 열두 조각으로 나누어 여로보암에게 열 조각을 주었고(왕상11:29이하), 에스겔은 모형 도시를 포위 공격했고(겔4:1-3), 집의 벽을 뚫었고(12:1 이하), 그의 죽은 아내를 위해 통곡하지 않았다(24:15 이하), 우리는 이스라엘 선지자의 행위 신탁과 가나안 제의의 동정을 얻으려는 마술을 분명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본질적으로 후자는 인간으로부터 출발하여 신에게로 나아가는 행동이다. 인간에 의하여 행해지는 의식은 바알이나 또한 그에 상당하는 기능을 해줄만한 마음 속의 어떤 신에게 자신이 바라는 바를 강요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행위신탁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에게로 향하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이미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활동인 하나님의 말씀은 땅 위에서 선포되고 고취된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도권이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다.
(3) 예언서. 우리는 여기서 각각의 선지자의 글들이 어떻게 편찬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각각의 예언서는 선지자의 말 가운데서 발췌된 일부만이 수록되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누가 그것을 수집하고 편집하고 편찬했을까? 예를 들어, 호세아서에 있는 유대적 언급들은 아마도 사마리아 함락 후에 편집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 편집자는 누구였을까? 또는 말라기서에 있는 질문과 대답의 연속은 전체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배열된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 배열자는 누구일까? 이사야서는 잘 편집된 큰 규모의 책이다. 이사야서는 여섯개의 연속적인 '화있을진저' 사 28-37장)가 세 개 단위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지는데, 첫번째 그룹의 세 개는 각각 두번째의 세 개와 일치한다는 것, 또는 이사야 38-39 장이 연대기적 순서로 되어 있음으로 그것들이 이어지는 이사야 40-55장의 역사적 서론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와 같이 주의깊게 편집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예언서들을 살펴보면 기록된 것에 관한 세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첫째, 예언자 자신들이 적어도 그들의 신탁의 일부분을 썼다는 것이다(사30:8:29:1 이하. 참고, 대하 21:12; 렘 29:25:호3:1-5의 일인칭 사용). 둘째, 예레미야의 경우 그의 긴 예언의 말들은 서기관 바룩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상규에 벗어난 행위는 아니었다(렘36장), 셋째, 추측컨데, 선지자들은 교사(master) 선지자의 가르침을 받은 어떤 그룹과 때로는 관련이 있고, 이들은 그 교사 선지자의 신탁의 말씀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한 그룹이 사8:16에서 '나의 제자들' 로 언급되고 있다. 이와 같은 증거들은 선지자 자신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 즉 직접적 기록이나 구술 또는 가르침의 방식으로 - 그의 신탁을 기록하는 데의 배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사야의 신탁들은 그의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한 책자로 만들기 위해 현재의 형태를 취했다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다.
'선지자의 아들' 이란 말은 이러한 제자들의 그룹에 관하여 사용된 것이다. 비록 아모스 7:14은 이 용어가 전문용어로서 오랜 훗날에도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실제로 이것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에 발견된다. 왕하 2:3,5로부터 우리는 '권위가 인정된' 선지자의 전반적인 감독하에 있던 땅에는 이미 그렇게 알려진 사람들의 무리들이 이곳 저곳에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엘리야는 엘리사의 이별의 아픔을 덜기 위해 일상적인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엘리사는 그의 시대에 예언적 무리들을 거느렸고(왕하 4:38;6:1이하), 그들의 섬김을 받았다(왕하9:1). 분명히 이들 무리들은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었다(왕하2:3,5). 그러나 그들이 예언적 그룹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가담을 했는지, 아니면 그들의 스승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스스로 가담했는지, 아니면 그들의 스승 선지자가 불러서 가담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암7:14에서 마치 아모스가 그 자신을 선지자 무리들과 구분하면서 그들을 비방하려 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아모스는 그 자신의 예언자적 위치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주께서 그를 명하여 '예언하라' (여기서 히브리어 힌나베' 는 '나비의 역할을 수행하라'는 의미이다 7:15)고 하신 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그의 말을 분개한 수사적 질문, 즉 내가 선지자와 선지자의 아들이 아닌가? 나는 목동이었고 주께서 나를 데려다가 ...' 라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아모스는 선지자의 아들들이 직업적인 봉사자라고 비난을 했다기 보다는 공식적인 지위와 권위가 부족하다는 비난에 대하여 영적인 소명의 권위를 말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선지자들의 신탁들이 보존되어 전달된 것은 대선지자들 주위에 있었던 일군의 선지자적 무리들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3. 참 예언자와 거짓 선지자
이플라의 아들 미가야와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아합 왕 앞에서 서로 대립할 때에, 하나는 패배를 경고하고, 다른 하나는 승리를 약속하면서 둘 다 주의권위에 호소했을 때(왕상22장), 어떻게 그들 중에서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분할 수 있겠는가? 예레미야가 하나냐와 마주쳤을 때에, 예레미야는 멍에를 메고 노예가 될 것을 상징했고 하나냐는 그 멍에를 부수면서 자유를 얻게될 것을 상징했을 때, 어떻게 그들 중에서 참과 거짓이 구별될 수 있겠는가(렘28장) 좀더극단적인 경우로,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유다로부터온 하나님의 사람을 거짓말로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하나님의 진실한 말로 그를 꾸짖었을 때에(왕상13:18-22), 그가 언제 진실을 말하고 언제 거짓을 말하는지를 구별하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선지자를 구별하는 문제는 결코 학문적인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실제적이면서 영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어떤 일반적인 외적 특징들이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으로 언급되어 왔다. 예를들면 예언적 황홀경이거짓 선지자의 표시로 주장되어졌다. 그러나 이미 무리들의 황홀경이 사무엘 시대에 '나비'의 일반적인표시라는 것을 살펴 보았다(삼상9-10장). 이러한 황홀경은 자연 발생적이거나, 또는 음악(삼상10:5; 왕하3:15)이나 제의적 춤에 의해서(왕상18:28) 유도되어질 수도있었다. 황홀경에 빠진 사람은 기억을 상실하고 고통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졌다(삼상19:24;왕상18:28). 이러한 현상은 바알 신앙의 한 특징이면서 가나안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황홀경과 거짓선지자를 단순히 동일시하는 것은 충분한 타당성을갖지 못한다. 우선 황홀경이 백성이나 최고 종교 지도자에 의해서 배척된 증거는 없다. 사무엘은 사울이 황홀경적 선지자들과 합류할 것과 이것이 그가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상징한다고 분명하게 허용하는 태도로예측했다(삼상10:6). 또한 엘리사가 예후에게 보낸 선지자의 생도 중 한 사람은 예후의 동료 군대 장관에 의해서 '그 미친 자'라고 불렸는데(왕하9:11), 이것은 아마도 황홀경이 여전히 예언적 무리의 특징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더욱이 이사야의 성전 체험은 황홀경적인 것이었고, 에스겔도 분명히 황홀경적 선지자였다.
거짓 선지자의 표시로 주장된 또 다른 것은 직업주의다. 직업적 선지자들은 어떤 왕이나 그와 같은 사람을 섬기면서 돈을 받고 왕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그들의 관심사였다. 그러나 이것도 참과 거짓을 가르는 표준으로 사용되기 어렵다. 사무엘은 직업적인 선지자였으며 나단도 다윗 왕의 궁정 선지자였으나, 거짓 선지자는 아니었다. 직업주의가 아침과 동일한 의미를갖는 것은 아니었다. 아모스도 직업적이었을 것이다.그러나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유다에서 예언하는 것이그와 같은 선지자에게는 살기가 더 좋다고 말했다(암7:10이하). 황홀경과 마찬가지로 궁중 선지자들은 무리를 이루고 있었음이 발견된다(왕상22장). 그들의 직업적인 신분은 부패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데에는 별 의심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증명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다. 예레미야는 바스훌에 대하여 그러한 비난을 하지는 않았다(렘20장).비록 그가 대적의 실수를 증명할 것들을 이미 가지고있어서 자신에게 크게 유리한 상황이었음에 틀림없었지만 말이다.
구약에서의 거짓 예언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는 세 개의 중요한 논의들이 있다. 첫째는 신13장과18장에 있다. 18장을 먼저 말하면, 이것은 부정적인 판별법을 말한다. 본문에 의하면 만약 성취되지 않는 예언은 주께서 말한 것이 아닌 것으로 판별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말의 표현을 주의깊게 관찰해야만 한다. 이것은 성취가 참 예언의 표시라는 단순한 진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13:1이하에서 보여주듯이, 어떤 표적이주어지고 실현되어도 거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도 성취는 참되고 신적인말의 증거로 간주되었다. 모세는 주의 이름으로 말하여진 것이 바라던 대로의 효과를 얻지 못할 때에 불평했다(출5:23), 예레미야는 하나멜의 방문을 통해서 말씀이 주께로부터 온 증거를 발견했다(렘32:8). 그러나신명기는 단지 부정적인 판별법을 말한다. 왜냐하면그렇게 말하는 것만이 안전하고 옳기 때문이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항상 성취되지만, 때때로 거짓 선지자의 말도 하나님의 백성을 시험하기 위해서 성취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 예언자의 판별법을 알기 위해서는 신명기 13장을 보아야 한다. 판별법은 신학적인 것, 즉 출애굽 사건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이다. 거짓 선지자의 핵심은 그가 백성들이 본래 알지 못하는신들을 좇아 섬기자고 하는 것이다(신13:2). 그러므로그는 애굽에서 백성들을 인도하여 낸 그들의 하나님여호와를 배반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신13:5,10). 여기서 우리는 표준적인 선지자로서 모세의 최종적인 특징을 본다. 그는 후대의 가르침이 평가받아야 할 신학적인 규범을 세워주었다. 어떤 예언자가 나와서 그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모세의 권위를 인정치 않고 출애굽의 교리를따르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인 것이다.
예레미야의 구체적인 대답은 또한 이것이다. 그는어떤 예언적 기술에 근거한 판별법을 말하지 않는다.그는 오히려 다음의 사실을 주장한다. 거짓 선지자는부도덕한 자이고(렘23:10-14), 타인의 부도덕에 대해서도 어떠한 금지도 하지 않는다(렘 23:17). 반면에 참선지자는 백성들에게 죄의 길에서 떠나 거룩함에 이르게 한다(렘23:22). 또한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는 평화의 기초인 도덕적이고 영적인 상태와 관계없이 평화의 메시지만 선포하지만(렘23:17), 반면에 참 선지자는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한다(렘23:29).
그러나 여기서 예레미야가 참선지자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생각은 선지자에 관한 연구에 치명적인손상을 입힐 뿐이다. 평화가 하나님의 메시지인 때가있다. 그러나 그것은 출애굽의 용어에서만 나타난다.즉 죄에 대하여 거룩함이 만족되었을 때에만 평화가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주장하는 것이다.참 선지자의 목소리는 일단 모세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율법의 목소리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담대히 말하기를, 거짓 선지자들은 다른 데서 가져온 계명과 거짓 권위 그리고 스스로 결정한 임무를 가진 사람들이고(렘23:30-32), 반면에 참 선지자는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해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라고 한다(렘23:21-22,28,32). 예레미야는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그의 주장이 옳았음을 알게된다. 왜냐하면 그의 경험은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서는 경험이고(민12:6-8;신34:10), 그의 메시지는 거짓 선지자들과는 달리 거룩(순종), 평화, 죄, 심판의 '출애굽의 네 가지 모습' (Exodus Quadrilateral)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에스겔의 대답은 구체적으로 예레미야와 같다는것이 에스겔 12:21-14:11에서 발견된다. 에스겔은 자기자신의 지혜에 이끌리고 여호와에게 보냄받지 않은선지자들이 있다고 말한다(겔13:2-3). 그러므로 그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거짓을 신뢰하고 시련의 때에 아무 의지할 것이 없게 한다(13:47). 이 선지자들의 표시는 그들의 메시지다. 그것은 평화와 얄팍한 낙관주의의 메시지이고(13:10-16), 도덕적인 내용이 없이 의인들을 근심하게 하고 악인들을 격려한다(22절). 대조적으로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선지자가 있다. 그는 백성들에게 겉치레적인 질문이 아닌 그들의 죄악된 마음을따라 대답한다(14:45).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은 항상죄에 대항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14:7-8). 우리는 다시 참 예언자가 모세적 선지자인 것을 본다.그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경험이 있고, 출애굽의 하나님에의해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도덕적 요구를 다시 반복하여 전하도록 보냄받은 자이다.
4. 이스라엘 종교 안의 선지자들
(1) 제의적 선지자들(cultic prophets). 제의적 배경안에서의 예언은 역대하 20:14에서 발견된다. 국가적위기의 때에 여호사밧 왕은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집뜰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하도록 이끌었다(대하20장), 기도가 끝나자마자 하나님의 영의 영감을 받은한 레위인이 승리를 약속하는 여호와의 말씀을 가져온다. 여기서 한 레위인은 예언의 능력을 가진 제의적인물인 것이다. 같은 경우에 관한 더 자세한 언급은몇몇 시편들에서 나온다(예. 60,75,82편 등). 이 모든시편에는 일인칭 단수가 사용된 부분이 있다. 이것은제의와 관련된 선지자의 신탁적인 대답으로서 동시에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포로 후 시대의 찬양하는 레위인의 그룹은 포로 전시대의 성소에 딸린 다양한 제의적 선지자 그룹들의남겨진 형태로 생각할 수 있다. 각각의 성소에는 예배의 희생적 부분을 담당한 제사장들과 함께, 국가를 위해 공적으로 또는 개인을 지도하기 위해 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선지자들이 있었다.
가나안 지역에서 알려진 이와 같은 관습에 대한 증거는 대부분 추론한 것이다. 우리는 먼저 기브아의 고지대에 있었던 어떤 선지자의 무리(삼상10:5)를 만난다. 선지자 사무엘은 실로의 관리였고(삼상3:19), 라마에서는 제의의 음식 먹는 것을 주관했다(삼상9:12이하). 선지자 갓은 다윗에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제단을 세우게 했고(삼하24:11,18), 성전의 노래하는 자들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냈다(대하29:25). 선지자 나단은 성전 건축에 관하여 문의를 받았다(삼하7:1이하), 제의적 상황들에서 선지자를 방문하는 것은 관례였다(왕하4:23). 선지자와 제사장이 어떤 면에 있어서 직업적인 연합을 나타내는 구절들도 많다(왕하 23:2:28:7;렘 2:26;8:10;13:13), 성전 안에는 예언적 장소들도 있었다(렘35:4).
이와 같이 빈약한 기반에 근거한다면 어떤 이론도 확고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 35:4에서 방들을 할당한 것으로 미루어서 겉으로 보기에는 선지자와 성전 사이 관계가 화된 것 같지만 같은 구절에서 방백들에게 방들이 할당된 사실로 보아 이것은 전적으로 그 반대이다. 또한 선지자들과 무리들이 제의적 자리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그들이 종교적 사람들이라는 사실 그 이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모스는 벧엘의 성소에서 발견된다(암7:13). 그러나 이것이 그가 거기에 고용되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지는 않는다. 다윗이 그의 선지자들과 상담한 것은 그가 선지자들의 제의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기 보다는 다윗의 사려깊은 판단력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다.그러므로 제의적 선지자에 관한 이론은 하나의 이론일 뿐이다.
(2) 선지자들과 제의(Cult). 제의적 선지자에 관한 이론이 증명된다 할지라도 정경적 또는 기록을 남긴 선지자들과 제의의 관계는 미해결의 문제로 남게 된다. 제의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어느 정도 해석상 난제(難題)이며 다음 여섯개의 짧은 구절들에 집중되어 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들이 모든 제의적 예배에 대한 분명한 정죄와 함께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었던 바 일종의 거부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암5:2125;26:6;11:11-15;43:22-24;16:6-8;7:21-23).
우리는 즉시로 이와 관련된 구절들을 살펴 볼 수 있다. 만약 몇몇 주석가들이 주장하듯이 선지자들이 제의에 대해 그렇게도 반대적이었다면 왜 그들의 반대적 목소리가 드물게 발견되고 또한 제의에 대해 정죄하는지 또는 그 당시 남용된 제의를 정죄하는지를 미해결의 문제로 남겨두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게다가 그들의 몇몇 글에서 이들 선지자들 중 어떤 이들은 예식과 희생제사에 대해서 강한 반대를 하고 있지 않는듯 하다. 이사야는 그의 소명 환상에서 하나님과 만나고 제의적 배경에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이사야는 제의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믿을 수 있는가?
예레미야는 렘7장에서 여호와께서 금지시켰기 때문에 백성들의 제사 행위를 정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제사가 도덕적인 부정과 부패와 연관되었기에 정죄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7:11에서 성전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이고, 12절에서는 실로가 '내 이름을 둔 치소' 이다. 이 처소는 파괴될 것인데, 이것은 제의에 대한 하나님의 거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예배자들의 부정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볼 때에 선지자들의 분노는 남용된 제의를 향한 것임을 나타낸다.
아모스 5:21-25에서의 주석적 문제의 중심은 마지막절에 있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년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아모스가 철저하게 희생 제사를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이론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25절의 질문에 대해 '아니오' 로 확실하게 대답하는 아모스를 발견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것을 할 수 없었다. 모세 오경의 기원에 관한 아모스 당시의 전통은 모세 시대의 희생 제사들과 모세 이전의 족장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21-23절은 하나님께서 그 당시 제의의 관습을 거절하는 것을 말한다. 24절은 잃어버린 도덕적 관심, 즉 거룩한 삶을 말한다. 25절은 이와 같은 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른 종교의 필수적인 것이라는 진리를 강조한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25절의 질문은 부정의 답을 요구하거나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25절을 선지자가 강조하듯이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나에게 가져온 것이 희생과 제사였느냐?" 만약 이스라엘 종교의 근원으로 거슬러 들어가면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삶의 순종의 맥락에서의 희생 제사 요구외에 무엇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삶은 순종의 요구를 따르지 못했으므로(26절이하)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이다. 단순한 의식적 행위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아니다.
잠언 8:10에 따르면, 우리는 '은보다는 훈계를, 정금보다는 지식' 을 얻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우선 순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 구절의 중요성은 히브리어 구조가 호세아 6:6의 것과 정확하게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호세아의 다른 예언들 속에서 제의를 배격하는 태도를 유지하지 않고 있음에 비추어 볼 때에 호세아 6:6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삼상15:22)는 사무엘의 고전적 표현과 마찬가지로 우선순위를 말하고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사야 1장에 있는 구절이 갖는 어려움은 그것을 제의에 대한 분명한 정죄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지나친 해석이라는 것이다. 분명히 11-12절은 제사에 대한 강한 반대로 보인다. 그러나 13절에서는 안식일에 대하여, 15절에서는 기도에 대하여 제사에 못지않은 공격을 가하고 있다. 이것은 선지자가 기도와 안식일을 완전히 거절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15절의 뒷부분은 앞부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면서 또한 모든 앞의 정죄들을 언급하고 있다. 선지자는 어떠한 종교적 행위들도 그와 같은 죄악된 삶의 맥락에서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옳은 것임은 16절의 첫 동사들에 의해서 증명된다. ‘씻는다'는 동사는 의식적 정결을 위해 레위기 법에서 계속 사용하고 있다. '깨끗이 하다' 는 도덕적 정결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메시지는 도덕적, 의식적 법을 동시에 요구하는 성경의 메시지와 일치한다.
미가 6:6-8을 살펴보자. 한 부자 청년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 속에서 유사한 상황을 발견할 수 있다(막 10:17이하). 그가 대답으로 말씀하신 도덕적 명령에 의해서 그는 의식법에 관한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는 그의 죽음에 관하여 구약의 제사의 용어들을 보증할 뿐만 아니라(막14:24 이하), 모세법을 계속 인정(마8:4)하고 있는 관점에서 볼 때에 의식법을 부정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 레위기 18:5은 생명의 길로써 도덕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도 의식법을 폐기하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미가도 제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미 예레미야 7:21-23의 연구와 관련된 배경적 사실들을 살펴 보았다. 예레미야가 그 맥락에서 적어도 제사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정죄하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면 우리가 7:22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가? 문제는 그 구절의 표면적인 것을 보면 마치 우리로 하여금 희생제사를 정죄하도록 요구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 문맥을 자세히 검토하면 그렇지 않음이 드러난다. 22절의 '대하여' 라는 전치사는 히브리어로 '알'이다. 이것은 그것의 실제적 의미인 문에' '위하여' 화시키면서 단지 '대하여' 만을 의미한다(참고, 창20:11;43:18;시7편의 표제;렘14:1). 이것에 의하면 그 구절은 여호와께서 '희생 제사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말씀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즉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압력을 가하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희생 제사를 위하여’이스라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살아 계신 하나님은 인간이 제공하는 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희생제사를 드리는 데에만 집중하여 하나님이 명하신 우선적인 것을 놓친 것이다. 왜냐하면 제의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고 하나님의 도덕법에 순종하기로 헌신한 백성들의 영적인 필요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사야 43:22 이하를 살펴 보자. 이 구절은 여러 모로 보아 가장 어려운 구절이다. 22절의 강조는 '너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에 있다. 이것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희생 제사에 관한 하나님의 인정을 완전히 배격한 것이다. 즉 '제의를 통해서 너희가 부른 것은 내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너희에게 예물로 짐을 지우지 않았기 때문이다.'다른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의 의도를 남용했다는 정죄이다. '너의 모든 제의적 노력에서 너는 실제로 나를 부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의가 너희를 의식의 노예로 변모시키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맥 속에서 이러한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성경의 일반적인 견해는 두번째를 지지한다. 다른 중요한 구절들도 제의에 대한 분명한 부정이라고 해석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도 제의의 부정으로 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사야는 44:28에서 성전의 재건을 인정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사야가 희생 제사를 부정하면서 성전의 재건을 기뻐한다는 것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사야 53장은 분명한 희생 제사적 언어로 되어 있다.
(3) 이스라엘 종교의 통일성, 이스라엘의 종교는 그 표준적 형태가 선지자이자 제사장인 모세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선지자와 제사장의 연합적 종교로써 계속되었다. 여호와는 약속대로 그의 백성을 구원했고, 그들은 여호와께서 구속한 자들에게 부여하신 율법을 따르기로 했다. 출애굽기 24:48의 언약식에서 모세는 그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단 주위에 열두 기둥을 세웠다 기 6:7에는 언약의 약속의 실현에 관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라고 말하고 있다. 특별히 하나님은 제단으로 표현되었다. 왜냐하면 거룩한 하나님 - 이것은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주된 계시이다(출3:5) - 은 오직 속죄의 피에 의해 죄인들 사이에 거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피를 제단에 뿌리는 것이었다. 유월절에서와 같이 피의 첫 사용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게 하는 것이었다(출12:13).
의식은 백성들의 하나님의 율법 순종에로의 헌신으로 계속 이어지고 피가 그들에게 뿌려진다. 백성들은 보속의 피에 의해서 하나님께 나아오게 되는 동안 그들 자신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지키려는 의무의 맥락에서 피가 필요하다. 이것은 선지자와 제사장의 통일된 내용이다. 선지자는 계속적으로 율법에의 순종을 촉구했고, 제사장은 피의 효력을 항상 상기시켰다. 그러나 우리가 이 둘을 분리시킨다면 선지자는 도덕주의자가 되고 제사장은 의식주의자가 된다. 이스라엘의 종교가 그러하고 성경이 그러하듯이 이 둘을 함께 두면, 우리는 선지자와 제사장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전 경륜을 보게 된다. 거룩하신 하나님 그리고 구세주는 그의 백성이 빛에 거하고 그가 거룩하듯이 그들도 거룩하라고 하시면서 또한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는 피를 요구한다.
5. 신약에서의 예언
(1) 구약과의 연속성. 예언과 선지자들에 대해서는 구약과 신약이 분명한 연속성을 갖는다. 이것은 예수와 사도들의 구약 예언에 대한 태도에서, 예수의 사역에 이르기까지 또 그 이후에도 계속된 예언 현상에서, 예수 자신의 사역속에 있는 예언적 특성에서, 신약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영감을 구약 선지자들의 영감과 나란히 놓는 것에서, 그리고 성령 - 예언의 영-을 교회들에 부어줌으로써 신약의 교회들이 선지자들과 예언을 계속해서 받아들이게 하는 것에서 분명해진다.
구약 예언의 활동은 말라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대로 세례 요한에서 끝이 났다(마11:13).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 그리고 누가복음의 초두에 나오는 안나, 시므온, 마리아의 예언적 말들은 모두 예언적 영감의 계속을 증거한다(눅1:46-55,67-79;2:26-38).신약과 구약으로 나누는 우리의 관습은 불행히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시의 놀라운 통일성을 희미하게 하지만 그러한 활동은 모세에서 요한까지 이르고 실제로는 그 이상까지 연결된다.
더욱이 신약은 구약 선지자들이 말한 메시지의 완성의 관계에 있다. 즉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말씀하신 것이 이제 신약시대에 와서 실현되었다(마 1:22;13:17; 26:56; 눅1:70;18:31;행3:21;10:43). 이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 사역을 증거한다(눅24:25,27,44; 요1:45;5:39;11:51). 예수께서는 율법이나 선지자들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고(마5:17), 실제로 그는 원칙적으로 선지자들의 예언에 근거하여 자신의 사명과 운명을 이해했다.
구약의 권위를 인정하는 신약의 이러한 특징은 강조되어야 한다. 소수였지만 박해받는(마5:12;23:29-37;눅6:23) 구약의 선지자들은 단순히 게으른 꿈꾸는 자들이 아니고 우리에게 과거로부터 오는 소식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목소리들이다. 그들은 모든 시대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 안에서 그들의 가장 위대한 말들이 완성됨으로써 진리를 선포하는 자들이다. 예수는 우리를 선지자들과 그들의 메시지로 돌아가게 한다. 그들과 그들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시이고, 이것은 회개로 이끌기에 충분하며 그들을 경청하지 않는 자들은 죄 있는 자들이 되게한다(눅16:29-31). 그들은 기독교회의 권위가 인정한 교사들이고, 그들의 말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의되어야 했다(참고. 벧후1:19-21).
(2) 가장 위대한 선지자, 그리고 그 이상인 자. 나사렛 예수의 위격에 대한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당시 사람들의 가장 평범한 평가들 중에 하나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 또는 둘 다라는 것이었다(마14:5;21:11,46;눅7:16;요 3:2;4:19;6:14;7:40; 9:17). 선지자에 대한 그들의 기본적인 생각은 분명히 구약 선지자들의 사역에 기초하고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선포, 비상한 지식의 소유,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 등을 포함했다(참고, 마26:28;눅7:39;요3:2;4:19).
예수께서는 다른 여러 명칭들 중에서 선생이라는 명칭뿐만 아니라(요13:13) 선지자라는 명칭도 받아들였고, 또한 그것을 자신에 대하여 사용했다(마13:57;눅13:33). 그리고 심지어 암시적으로 서기관의 명칭도 받아들였다(마13:51-52), 사도들은 하나님이 일으키실모세와 같은 선지자(신18:15이하)에 관한 모세의 예언이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완성됨을 깨닫게 된다(행3:22-26;7:37). 오직 예수의 경우에 있어서만 우리는 선지자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이 충만히 부어진 아들임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의 사역에서는 선지자와 선생의 사역이 완벽하게 결합되어 있고 그에게서 예언적 계시의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마21:33-43;눅4:14-15;요3:34), 그러나 예수에게서 우리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 이상의 것, 즉 선지자들을 보낸 분임을 발견한다(마23:34,37).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셨을뿐 아니라 그 자신이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이셨다(21:1-14; 19:13).
(3) 예언의 영과 교회.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그의 승천 후에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성령은 그들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고 그들과 함께 증거할 것이다(눅24:48;요14:26:15:26-27;행1:8). 이것은 예언적 영감을 포함한다.(마10:19-20;요16:12-15), 사도들과 최초로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은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에 영감을 준 '하늘로부터 온 성령'의 같은 능력 안에서 그와 같은 일을행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다가올 고난과 영광을 내다보았다(벧전1:10-12). 그러므로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했을 때에 그 즉각적인 결과로 방언을 말하고(행2:112), 베드로가 요엘서 2:28-32을 인용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모든 육체에 성령이 부어진 결과 '예언하게 되고', 예언적 말뿐만 아니라 환상과 꿈도 보게 된다(행2:18). 모든 그리스도인은 잠재적으로는 선지자이다(민11:29에서 표현된 모세의 소망이 실현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증거하게 하려고 교회에 주어진 성령은 예언의 영이기 때문이다(고전14:31;계19:10).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신령한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말하고있다(고전14:1).
그리스도인들이 최초로 성령의 능력을 받았을 때,그 때에 생기는 가장 평범한 증거는 '찬양과 기도' 에대하여 다른 언어로 말하고 예언하는 것 같다(행2:4,17-18;10:4446;19:6;고전1:5-7). 그러나 성령의 영감으로 인해 방언을 한 사람이 다른 경우들에서도 이 능력을 유지할수 있는지, 또는 민수기 11:25에서 하나님의 영이 칠십 명의 장로들에게 임했을 때에 그들은 예언했으나 '다시는 아니 하였더라' 와 같이 성령을 받은 초기에 나타나는 확증의 증거인지는 확실치 않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할 것' 이라고 예고했다(마7:22). 여기서는 개인의영적인 지위를 위해서 이 모양 저 모양의 행위에 의존하려는 것에 대한 경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예언은 반복적으로 성령의 은사중 하나로 언급된다. 그리스도는 그의 지체들을 각각의 위치에서 제 기능을 다하게 하기 위하여 성령으로 무장시킨다(롬12:4-7;고전12:10-13;살전5:19-20;벧전4:10-11). 이 은사는 방언과 통역, 그리고 가르침의 은사와는 구별된다.방언과 통역은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되어지는 것임에 반해서 예언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로의 성령의 영감된 말이라는 것이다(행2:11;10:46;고전14:23). 또한 가르침은 이미 계시된 진리에 대한 꾸준한 연구와 해석을 통해서 매개되는 것에 반해서 예언은 성령으로부터 직접 계시에 의해서 영감된 말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영감하에서의 예언은 또한 구약에서와같이 성경에 이미 계시된 진리들을 반복하는 형태를취하기도 한다.
교회 안에서 이 은사를 어떻게 사용을 해야 하는지는 방언의 사용법과 더불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잘 가르쳐 준다. 이 은사의 사용은 원칙적으로그리스도의 영의 주권적 인도하에 때때로 여성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열려있다(5,31절;11:5;12:11.참고. 행21:9). 그러나 여성의 사역이 그 당시에 환영받았는지는 의심스럽다(고전14:33-36. 예언의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의 마음에 전달된 계시를 이해할수 있는 말이다. 이것은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기 위한 것' 이었다(3-5,26,30-31절). 예언 사역에 대한 믿지 않는 자들의 반응(2425절)은 예언이 은혜와구원뿐 아니라 죄와 심판에 관한 전체적인 메시지를선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2절), 그러므로 예언은 황홀경에 굴복하는사람들에 의해 남용되거나 또는 몸의 다른 지체들, 즉대표적으로 성령으로부터 온 예언의 정확성과 신뢰성을 시험하거나 판별하는 장로들의 통제없이 되어서는안된다(29-33절). 사도로 하여금 '성령을 소멸치 말며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살전5:19-21)라고 또 다른 교회에 편지를 쓰게 만든 것은 은사의 남용 때문임이 분명하다. 고전 14:3940에서는 방언에 대해서 유사한 언급을 한다.
신약에서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예언들을 이용해서 사탄이 깨어있지 않은 자들을 실족케 하려는 것에 대항하여 경고하고 있기 때문에 예언의 말을 헤아리는 것은 매우 필요한 것이다(마7:15;24:11,24;벧후2:1;요일4:1이하). 이와 같은 예는 바보의 바예수에게서 발견된다(행13:5이하). 이 경우에는 마술적 요소들이 명시되었다. 그러나 다른 경우들에서는 인간의 욕망이 책망받는다. 둘 중 어느 경우이든지 간에 악마의적그리스도적 목적이 활용되고 있다. 악마는 계13:11과 19:20에서 용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의 상징이다. 거짓 예언자들은 때때로 기적을 행하지만(막13:22), 구약(신13:1-5)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로 인해 무분별하게 신뢰해서는 안된다. 어떤 예언의 말이든지 헤아리는 것은 주님의 경고, 즉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20)라는 말씀과 일치할 것이고 다음의 기준들을 포함할 것이다. 첫째,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는가, 즉 그 내용과 특징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가르침에 일치하는가를 본다(고전14:37-38;요일4:6). 둘째, 그들의 모든 경향과 결과와 열매들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요16:14;고전14:3이하). 셋째, 인정된 선지자들과 장로들과 교사들이 말하여진 것을 분별하는데 일치해야 한다(고전14:29,32). 넷째,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지금말한 것과 다른 예언의 말이 일치성을 가져야 한다고 전14:30-31). 다섯째, 예수를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한 성령에 의해서 육신을 입은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고전12:2-3;요일4:1-3). 바울은 이 예언의 은사도 다른 영적 은사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마음으로부터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 사용되지 않는다면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라고 강조한다(고전12:31-13:3).
때때로 믿는 자들이 행하는 예언 은사 사용의 가능성 외에도 신약에는 특별하게 인정되고 구분된 좀더 정규적 사역을 하는 '선지자들' 에 관하여 언급된다. 그들은 고전12:28-29와 엡4:11에서 사도 다음에 언급된다. 그들은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교사와 나란히 등장한다(행13:1). 사도행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선지자는 아가보일 것이지만(행11:28;21:10-11), 다른 이들도 언급되어진다(행 15:32), 그리고 계시록은 전체가 요한에게 계시된 일종의 예언이다(계1:3;10:11;22:7,10,1819). 디모데가 복음 전도자로 그의 사역이 구분되었을 때 선지자의 사역은 장로의 사역과 나란히 행해진 것으로 보여진다(딤전1:18;4:14).
(4) 신약 예언의 특징과 형태. 신약의 예언 사역은 그 실례들을 볼 때에 그 특징과 형태에 있어서 구약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례 요한, 아가보, 계시록을 쓴 요한 등의 사역은 예언과 선포, 예측과 예상의 고전적 일치성을 보여준다. 사가랴, 시므온, 안나와 다른 이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그들은 다가올 진노 또는 축적된 고난 그리고 다가올 은혜들언했다(눅3:7,16이하; 요1:29이하;행11:28;계19-21장). 또한 우리는 환상과 때때로 꿈에 의한 예언과 계시를 발견했다(마1:20;행10:9-16;계1:10,12;눅3:2). 비유와 상징의 사용도 보여지고 행위를 통한 신탁도 포함한다(행 21:11). 아가보의 말이 바울에 의해서 개인적으로 직접적으로는 아니라도 묘사적으로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주목해야 한다(행21:12-14). 그러나 여기에서와 딤전4:14과 행13:9에서 우리는 예언적 말의 능력이 여전히 그 말한 것을 실행시킬 힘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참고. 계11:6).
(5) 사도 시대와 그 이후 시대에서의 예언. 자주 신약적 의미의 예언이나 선지자들은 오늘 또는 사도 이후 시대의 교회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된다. 그리고 현대적 목회를 묘사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예언'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예언의 의미를 설교와 동일한 것으로 약화시켜 받아들이게 한다 다. 그러나 복음 전도적 선포나 가르침의 사역이 때때로 예언과 매우 흡사할지라도 그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오늘날 예언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성서적 주장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로, 엡 4:11 과 고전 12:28에서 사도 다음에 선지자가 언급된 것 외에도 엡 2:20과 3.5에서는 신약교회의 토대를 이루는 직분으로 사도와 선지자가 하나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신약 정경이 완성됨으로써 더 이상의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 가능성이 배제되기 때문이다(히1:1-2). 어떤 사람들은 신약정경이 완성된 때를 고전 13:8 이하의 예언이 그치게 된 때와 동일시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것이 올 때' 은사들은 그친다는 문맥을 지나치게 해석한 것이다. 에베소서의 구절들도 지나치게 해석된 듯하다. 왜냐하면 교회의 설립과 선지자의 연합이 자동적으로 예언을 배제시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언급된 선지자들이 구약의 선지자들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도 불확실하다. 문제는 예언과 '새로운 계시',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완전한 자기 계시에 덧붙여진 그 어떤 것과 동일시인 것이다. 그러나 구약이나 신약 어디에도 그와 같은 동일시의 근거는 없는 것 같다. 그리스도안의 하나님, 구원의 길, 그리스도인의 삶 등에 관한 새로운 계시는 없을 것이라는 것에 모두 동의한다. 그러나 말씀하시고행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기록된 성경의 말씀과 일치하면서 지난 일을 회상시키거나 앞일을 예상하는 방식으로 경고하거나 격려하기 위해서 교회, 국가 또는 개인에 관한 특별한 예언의 은사를 사용하지못할 것이라는 근거는 없다. 예언은 성경에 의해서 검증받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신약에서 선지자의 일이교리를 세우는 역할이라기 보다는 성령이 그에게 주신 말씀을 전함으로써 신자들의 믿음을 촉구하고 격려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신약에서는 항상 성경의 선지자들을 믿음의 선구자들로 간주했다. 그들은 각 시대마다 최전방에서 마귀에 의해서 생기는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세상속의박해의 거센 바람을 견디어 왔다. 박해의 바람은 때로는 유대인들로부터, 때로는 이방인들로부터 불어닥쳤다(마23:37;눅11:47-50;행7:52;살전2:15;계11:38;16:6;18:20,24)․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 받은 대우는 다른 모든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타락한 세상속에서 복음증거를 위해 당하게 될 일의 전형적인 경우였다. 그들은 고난과 박해를 당하나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와 부활과 유업의 약속을 가진 자들이었다(마5:10-12;히11:39-12:2).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예언의 영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같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신실하게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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