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 sincerity
거짓, 속임, 악의를 떠나 순결, 진실함을 바탕으로 하는 특성이나 행위를 의미한다(수24:14;고전5:8;고후1:12;2:17). 성실은 서로간에 갖는 신뢰의 기본을 이루는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인격적 교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성경에서는 특히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킨다(창24:27;시36:5;사25:1;애3:23).
성심 truly
정성스러운 마음을 의미한다(창47:29). 역대하 31:12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린 예물과 십일조를 성전에 예비한 방에 성심으로 옮겼다는 내용이 있다.
성욕 pleasure
남녀간 혹은 암수간의 성적인 욕망을 의미한다(렘2:24).
성육신 Incarnation
'성육신' 이라는 명사나 '성육한' 이라는 형용사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지만 '육신으로' 혹은 '육체로' (헬. en sarki)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신약의 중요한 진술들 속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딤전 3:16은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라고 하며,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요일 4:2).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셨고(골1:22; 엡2:15) 하나님은 자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고 말한다(롬8:3). 베드로는 우리를 위하여 '육체로 죽임을 당하신 그리스도에 관해 말한다(벧전3:18;4:1), 이 모든 본문들은 한 가지 진리를 여러 각도에서 증언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이다. 신학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성육신이라 하고 그의 죽으심은 속죄론으로 다룬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와서 죽으셨다는 것은 그가 피조물과 같은 육체와 정신 생활의 상태와 조건 아래서 와서 죽으셨음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인간으로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은 또한 죽으신 그는 영원히 하나님으로 계셨고 하나님으로 계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성육신 신앙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임에 변화가 없으시면서도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주장한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바로 이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1:14;요한이 말하는 말씀은 태초에, 곧 창조 전에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곧 하나님이시다. 요1:1-3).
1. 성육신 신앙의 기원. 요한의 앞서와 같은 주장은 구약의 유일신 신앙에 비추어 볼 때 불경스럽거나 허무맹랑한 것으로 보일 수 있으며 실상 정통유대교는 그렇게 보아 왔다. 창조주 신이 그가 창조한 피조물의 하나가 되셨다는 주장으로 비쳐진다면, 이는 신학적으로 볼 때 명백한 모순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요한의 기이한 주장에 영감을 준 확신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이시라는 초기 교회의 신앙은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가? 이 신앙은 예수 자신이 하신 말씀과 행동에 의해 생겨진 것이 아니라는 가정 아래 그 기원을 선재하는 초인적 메시야에 대한 유대적 사변들이나 헬레니즘적 밀의 종교와 영지주의 제의들의 특징이었던 구속신(redeemergods)에 대한 다신교적 신화들에서 추적해 보려는 시도들이 많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시도들이 실패했다는 것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 하나의 이유는 이들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공상들과 신약의 그리스도론 사이에 표면적으로 유사해 보이는 이상으로 보다 실질적이고 근원적인 차이가 존재함이 일관되게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신성에 대한 실질적 주장이 공관복음에 기록된 역사적 예수의 가장 의심할 수 없는 말씀들 속에 간직되어 있으며, 이 주장의 실질적 수용이 사도행전(사도행전의 역사성에 대해 오늘날에는 거의 논란의 여지가 없다)의 처음 여러 장에 나타나는 대로 초대 팔레스타인 교회의 신앙과 예배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들은 예수 자신의 삶과 사역, 죽음과 부활이 제자들에게 그의 승천 이전부터 신성을 확신하도록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요한복음이 바로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특히 요20:28이하를 참조). 사도행전 역시 처음 기독교인들은 오순절 이전부터 (1:21) 주 예수께 기도를 드렸으며(7:59), 오순절에서 시작하여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으며 (2:38;8:16;19:5), 그의 이름을 부르고 믿었고 (3:16;9:14:22:16) 그를 회개와 죄사함을 주시는 분으로 선포하였음(5:31)을 말해 주고 있다. 이 모든 사실은 예수의 신성이 처음에는 명백한 말로 진술되지는 않았으나(사도행전에 이런 암시가 전혀 없다) 처음 기독교인들이 생활하고 기도하는 신앙의 일부였음을 보여준다. 성육신 신앙의 신학적 정식화는 나중에 이루어졌으나 성육신 신앙 자체는 그 표현이 아무리 조리가 없더라도 처음부터 교회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2. 신약 저자들의 입장. 성육신에 대한 신약의 사고, 특히 이 주제를 비교적 풍부하게 다루고 있는 바울, 요한 및 히브리서 저자의 사고를 유발시킨 관심의 본질 및 한계들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약의 저자들은 4세기 이후 그리스도론 논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성육신의 양식에 대한 형이상학적 문제들이나 성육 상태에 대한 심리학적 문제들에 관심을 보이거나 다룬 것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철학적이거나 사변적인 것이 아닌, 종교적이며 복음적인 것이다. 이들은 형이상학적인 문제로서가 아닌, 신적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한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이들의 모든 말은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드러내 보이고 하나님의 구원 목적에서의 그의 중심적 역할을 입증함으로써 그를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에 의해 촉발된다. 이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인격의 신비를 해부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죄인들에게는 성육신을 하나의 사실로, 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일련의 위대하신 일들 중의 하나로 선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신약 저자들이 성육신을 설명하려는 노력은 오직 성육신이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전반적 계획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롬8:3;빌2:611;1:13-22; 1:18;1:1-2:2;01-23;4:14-5:10;7:110:18).
이러한 오직 복음적인 관심은 신약의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그의 인격 속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것을 증거하는 것으로 보고 있지 않은 - 후대의 신학에서 많이 논란된 사고 노선과는 다른 - 당혹스러운 사실을 해명해 준다. 이러한 침묵은 어떤 이들이 가정했던 것처럼 신약 저자들이 처녀 탄생을 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행각할 필요는 없다. 이 침묵은 예수님에 대한 신약의 중심적 관심은 하나님의 구원 목적들과 그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로 충분히 설명된다. 이 점은 처녀 탄생 이야기가 그것을 자세히 설명한 두 복음서 기자인 마태와 마가에 의해 전해진 방식에 의해 입증된다. 이들 복음서 기자들의 강조점은 기적적으로 탄생된 인격의 특이한 체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기적적 탄생으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찾아 구원하시려는 오래 전에 예언된 의도를 성취하기 시작하셨다는 사실에 두고 있다(참조, 마1:21이하;눅1:31 이하, 68-75;2:10이하,29-32). 이 복음서 기자들이나 다른 어떤 신약 저자들이 성육신에서 찾는 유일한 의의는 직접적인 구원론적인 것이다. 성육신은 일차 창조의 완성을 위한 것이 었으며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은 부차적이며 우연한 일이었다는 스코투스주의적 사변은 신약에서 최소한의 지지도 발견하지 못한다.
사도적 저자들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모두가 그의 구원 사역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명확히 이해한다. 이들은 예수님이 아버지의 마음과 심정을 드러내 보여주신 것을 완전하고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하고(참조, 요1:18;14:7-10;히1:1이하), 그의 죽으심을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믿는 자들에게 복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최상의 증거로 간주한(참조, 요3:16;롬5:5-10;8:32;요일4:8-10) 것은 예수님이 아들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이 곧 그의 대제사장직을영원히 지속시키고 흠없이 완전케 하고 무한하게유효하도록 보장해 준다고 인식한다(히7:3,16,2428).이들은 예수님이 그의 신성으로 인하여 죄인들을무력한 속박상태에 가두어 놓은 '강한 자', 곧 마귀(귀신)를 격퇴시킬 수 있음을 깨닫는다(히2:14이하;계20:1이하. 참조. 막3:27;눅10:17이하;요12:31이하;16:11). 또한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해야할 필요성이 있었음을 여러 모로 인식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성육신함으로써만 하나님이 인류를 그를통하여 상대할 '두번째 아담(인간)' 의 역할을 하실수 있었다(고전15:21이하,47이하;롬5:15-19). 하나님의 아들은 성육신함으로써만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실 수 있었으며(딤전2:5), 육신이 아니면 죽을 수없으므로 속죄를 위하여 죽으실 수 있었다(신약에서 육신이나 육체에 대한 생각은 죽음과 밀접하게결부되어 있어 영화롭고 부패하지 않은 상태의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이 말들을 적용하려하지 않는다. 히5:7의 '그가 육체에 계실 때' 라는말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지상에 계셨던 그리스도의 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신이셨고 참으로 인간이셨다는 것을 부정하는 어떠한주장도 복음을 파괴하는 저주받을 이단으로 단호히배격하였다. 신약시대에 이점을 부정한 것은 가현설적 그리스도론 뿐이다. 가현설적 그리스도론은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고(요일4:21하) 따라서 그의 육체적 죽음'피', 요일5:6) 또한부정하였다. 요한은 그의 처음 서신에서 이를적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교사된 치명적 오류로, 아버지와 아들을 거짓되어 부정하는 것으로 규탄한다(요일2:22-25;4:1-6;5:5-12;요이7,9이하). 요한복음이 인간의 허약성을 경험하신 예수님의 현실(그의 피곤,4:6; 목마름, 4:7;19:28; 눈물, 11:33이하)을 강조한 의도는 가현설적 오류를 근절시키려는 데 있었다는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3. 신약의 성육신 교리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는 신약의 주장의 의미는세 가지 표제 아래 도출될 수 있다.
(1) 성육신한 인격. 신약은 한결같이 예수님의 신분을 구약의 유일신 신앙의 한분 하나님과의
관계의 측면에서 규정하고(참조, 고전8:46; 딤전2:5;사43:10이하;44:6), 기본적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신분 규정은 예수님자신의 사고와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 나머지 인간들과 구별되는 특이한 의미에서의 ‘아들’ 이라는그의 의식은 적어도 그의 12세 나이 때로 거슬러올라가며,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들려온 아버지의 음성이 그에게 이를 확인시켜 주었다. “너는 내사랑하는 아들이라”(막1:11. 참조. 마3:17;눅3:22;하늘의 음성에 대한 세 복음에 모두 나타나는 agapétos라는 말은 ‘유일하게 사랑하는 아들' 이라는 뜻을함축한다. 막12:6의 비유에서도 이 말이 다시 사용된다. 예수님의 변모시에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도이와 비슷하다. 마17:5; 막9:7). 재판정에서 '하나님의 아들' (대제사장이 쓴 이 용어는 '다윗적인 메시야' 이상의 뜻을 지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예수님은 시인하는 답변을 하신 것으로 마가와 누가는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격적 신성에 대한 주장과 마찬가지였다(막14:62, “내가 그니라"; 눅22:70,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내가 그니라' (ego eimi)는 강조어는 하나님과의 동일화를 나타내는 말이었기에(출3:14) 유대인은 이말을 입에 담는 것을 절대적으로 꺼려하였다. 마가에의하면, 예수님은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암시적인 어법으로 이 말을 사용하신 적이 있었다(막6:5;13:6. 참조.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일련의 ego eimi 말씀들도또한 참조. 요4:26;6:35;8:12;10:7,11;11:25;14:6;15:1;18:5이하). 예수님은 그가 주장하신 하나님의 아들됨은 곧 인격적 신성임을 명백히 밝히기를 원하셨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이 주장이 '불경하다 '하여 단죄를 받았다.
자신을 '아들'로 말한 예수님의 언급들은 항상하나님과 특별히 가깝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받고 계시는 것을 드러내는 문맥들에서 나타난다.이런 언급들은 공관 복음서에는 비교적 적게 나타나고(마11:27=눅10:22; 마24:36 =막13:32. 참조.막12:1-11), 요한복음에 많이 나타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과 복음서 기자의 주석에 모두 나타난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며(1:14,18;3:16,18), 영원히 존재하신다(8:58. 참조. 1:1이하), 그는 아버지와 완전한 사랑, 연합, 교제의 불변한 관계를 가지시며 (1:18;8:16,29;10:30;16:32), 아들되신 그는 어떤 일도 독자적으로 하지 않으신다(5:19).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여 (4:34;5:30;8:28이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사신다(17:14).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곧 아버지를 대표하는 분으로 세상에 오셨으며(5:43), 그가 말하고 행하신 모든 것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른 것이였기에 (7:16이 하;8:26 이하;12:49이하;14:10), 그의 지상 생활은 아버지를 완전하게 계시한 것이었다(14:7이하). 아버지께서 그보다 크시다고 하신(14:28. 참조. 10:29) 말씀은 자신의 어떤 본질적인 혹은 주변적인 열등성을 가리킨 것이라기 보다 아버지의 뜻과 주도권에 복종하는 것이 그에게 자연스럽고 필요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는 아들로서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항상 그의 본성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보다 크시다. 그러나 인간의 존경과 예배를 받음에 있어 그가 아버지보다 못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 못지 않게 아버지는 아들의 영광을 추구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생명을 주고 심판하는 두 가지 큰 일을 맡기셨는데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시기" (5:21 이하) 위함이었다. 이것은 아버지가 모든 인간에게 도마처럼 행하도록(20:28) 지시하여 아버지 자신을 시인하듯이 아들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으로 시인하도록 하신 말씀에 해당한다.
신약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고를 보완하면서 나사렛 예수의 신성을 밝혀주는 다른 사고 노선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보다 중요한 것들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① 요한은 영원하신 신적 말씀을 하나님의 인격적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 한다(요1:1-18. 참조, 요일 1:1-3;계19:13).② 바울은 아들을 성육신한 상태에서는 물론 성육신하기 이전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하며(고후4:4;골1:15), 빌2:6에서는 성육신하기 이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 (morphè 이 단어는 주석상 논란이 있으나 하나님과 본성 혹은 본질이 같다는 뜻으로 보는 것이 거의 정확하다)이셨다고 말한다. 히1:3은 아들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한다. 두 하나님에 대한 어떤 생각도 배제하는 유일신론적인 사고틀 안에서 이루어진 이런 진술들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나타내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첫째, 아들은 인격적으로 신이며, 존재론적으로 아버지와 동격이시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구현하시고, 아버지가 갖고 계신 신성이나 성품 중 어떤 측면이나 어떤 구성 요소도 결여하신 것이 없다. ③ 바울은 '주'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관한 구약의 예언을 주 예수에게 적용하면서 그것이 그 안에서 진정으로 성취된 것을 보여준다(욜2:32 을 인용한 롬10:13; 사45:23을 반영하고 있는 빌2:10이하 참조). 이와 비슷하게 히브리서 저자는 천사들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한 모세의 권고(신32:43, 70인역)와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라고 한 시편 기자의 선언(시45:6)이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가리켜 하셨던 말씀으로 인용한다(히1:6,8). 이것은 두 저자가 모두 예수님을 신적 존재로 간주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④ 예수님을 ‘주' (헬레니즘 종교의 신들에게 붙여진 칭호[참조. 고전8:5]로서 70인역 성경에서 신의 이름을 표현할 때 예외없이 사용된다)로 지칭하는 신약의 규칙적 습관은 그의 신성을 암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2) 성육신의 본질.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 때에도 그의 신성은 포기되거나 축소 또는 위축되지 않았으며 그 이전에 있었던 신적 기능들의 발휘를 그는 중단하지 않으셨다. 그는 만물을 창조 질서대로 유지하시고 모든 생명을 주시고 지탱하시는 분이며(요1:4;골1:17;히1:3), 이런 기능들은 그의 지상 생애 동안 중단되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세상에 들어 오셨을 때 그는 외적인 영광을 '비우셨고' (빌2:7; 요17:5) 이런 의미에서 그는 '가난하게 되셨으나' (고후8:9) 이것이 이른바 겸비설(kenosis theories)이 암시하듯이 그의 신적 능력들을 축소시킨 것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약은 이와 달리 아들의 신성이 성육신을 통하여 축소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울은 인간 그리스도 예수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 (골2:9, 참조. 1:9)고 말한다.
이렇듯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은 신성의 감소가 아니라 인간성의 획득이었다. 아들 하나님은 인간 존재 안에 내주하려 오신 것이 아니었다. 성령께서 그 이후에 인간 존재 안에 내주하신 것과는 달랐다(성육신을 내주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네스토리우스파 이단설의 요체이다). 이와 달리 아들은 완전한 인간 생활을 영위하셨다. 그는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가 주장했듯이 단순히 인간의 몸을 빌어 그 영혼의 자리를 마련하셨던 것이 아니다. 그는 몸소 인간의 몸뿐만 아니라 인간의 영혼도 취하셨으며, 인간의 육신 생활만이 아닌, 인간의 정신생활의 경험 속으로 들어 오셨다. 그의 인간성은 완전하셨다. 그는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되셨다(딤전2:5. 참조. 갈4:4;히2:14,17). 그리고 그의 인간성은 영구하시다. 그는 지금 높임받아 계시면서도 “계속하여 두 구별되는 본성인 신과 인간으로 존재하시며 영원히 한 인격으로 존재하신다"(웨스터민스터 소교리문답, 21문항․ 참조. 히7:24).
(3) 성육신의 상태.
① 성육신은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육신의 상태는 의존과 복종의 상태였다. 의존과 복종의 상태는 깨어지지 않은 교제 속에서 지속되었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시키신 대로 말하고 행하였으며 어느 한 순간에도 아버지의 알려진 뜻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으셨다(마4:2이하에서 아들이 당하신 첫번째 유혹을 참조). 그가 자신의 재림의 때를 모른다고 하신 고백(막 13:32)은 교화적인 핑계(아퀴나스의 설명)로 설명되거나 성육신의 취지에 맞게 그의 신적 지식을 버린 증거 (겸비설의 설명)로 설명되어서는 안되며, 이 당시에는 이 지식을 마음에 두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아들되신 그는 아버지가 알게 하시고자 하신 이상으로 알려고 하시지 않았다.
② 성육신은 아들의 본성과 성품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성육신의 상태는 죄가 없고 완전무결한 상태였다. 그의 삶 전체에 죄가 없었다는 주장은 여러 번 되풀이 되고 있다(고후5:21; 벧전2:22;히 4:15. 참조. 마3:14-17; 요8:46; 요일2:1이하). 그가 아담 안에 있는 원죄에 수반된 결과로부터 면제되었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죄로 죽을 일은 없었으며(참조. 히7:26)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대리적으로만 죽으실 수 있었다(참조. 고후5:21;롬5:16이하;갈3:13; 벧전3:18)는 사실로부터 명백해진다. 그가 완전무결하여 죄를 지을 수 없으셨다는 것은 그가 아들 하나님으로 계셨다(참조, 요5:19,30)는 사실에서 온다. 성육신 이전 상태에서나 성육신 상태의 그에게 아버지의 뜻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신성은 그가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벧전1:19)으로 죽는 데 필요한 죄없으심을 육체에 실현하도록 보장해 주었다.
③ 성육신은 인간의 도덕 생활의 조건들로 완전하게 들어서는 것이었기 때문에 성육신의 상태는 유혹과 도덕적 갈등의 상태였다. 하나님인 그에게는 유혹에 굴복할 일이 없었지만 인간인 그에게는 유혹을 이기기 위하여 싸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의 신성은 아버지의 뜻에서 벗어날 유혹을 받지 않는다거나 반복되는 방심할 수 없는 유혹들이 영혼 속에서 조성하는 긴장과 고통에서 면제되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혹을 받았을 때 그의 신성은 유혹과 싸워 이기 보장해 주었다. 그는 메시야 사역에 관한 처음의 유혹들에 대해 훌륭하게 대처하였다(마4:1이하). 히브리서 저자는 그가 유혹과 값비싼 순종을 직접 경험한 덕분으로 유혹과 어려운 시련을 겪는 기독교인들을 이해하고 능히 도와주실 수 있다는 점을 장조한다(히 2:18;4:14이하;5:2,7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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