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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성읍 / 성의 / 성일 / 성전

성읍 city

보통 성벽으로 둘러싸인 영속적인 거주지이다(민13:19;수10:32). 성벽이 있는 성읍이 있는 반면 성벽이 없는 고을도 있었는데(신3:5), 대개는 구릉 위에 세워졌다(왕상16:24), 부족이나 이민족 사이의 투쟁과 약탈이 행해지던 고대에는 성읍을 건설할 때 요새(塞)를 택했고, 돌담, 문, 탑 등 방위를 위한 설비들을 갖추었다(수2:7). 큰 성읍에는 수도 설비가 갖추어진 곳도 있었다(왕하18:17), 중요한 성읍은 어머니 도시로 불리우고(삼하20:19), 그것에 의존하는 작은 성읍이나 부락은 딸로 묘사되고 있다(민21:25, 히브리 성경 원문에는 '딸들'로 기록되어 있다). <참조> 성

성의 holy garment 

거룩한 옷을 의미한다. 거룩한 제사장이 입는 옷(출29:29), 혹은 예수께서 입으신 세마포를 지칭한다.

 

성일 holy day

거룩하게 구별된 날을 의미한다. 시편 42:4에서의 성일을 지킨다는말은 유대교의 여러 가지 축일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며, 출애굽기 20:11은 하나님께서 창조 후 안식하신 날을 기념하여 안식일을 성일로 생각한다. 기독교에서는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가 무덤에서 부활하신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여겨 이 날을 성일로 부른다.

성전 temple

히브리인들에게 제사의식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에 위치했던 복합적인 건축물에 주어진 이름이다. 이제사의식은 옛 하나님의 백성의 중추적인 영원한 예배였으며, 적어도 구약 시대에 그들 종교를 통일시키는 요소였다. 그리스도 시대에 즈음해서는 성전의 중요성이 다소 약해졌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의 생활에서 각 지방의 회당이 중요한 위치를 담당했기 때문이다. <참조> 회당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3개의 성전이 예루살렘에있는 모리아 산에 계속하여 건축되었는데 오늘날 이장소는 '하람 에쉬 - 쉐리프' (Haram esh - Sherif)라 불리는 모슬렘 성지가 되었다. 첫번째 성전은 솔로몬에의하여, 두번째는 스룹바벨과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돌아온 유대인들에 의하여 건축되었다. 세번째 성전은 예수 시대에 사용되고 있었는데 헤롯 대왕에 의하여 증축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고대 종교들은 성전을 갖고 있다. 사실 므깃도와 하솔에 세워진 가나안 성전들은 건물의 구내 설계에 있어서 히브리인들의 것과 같지 않았다. 예루살렘 성전은 내부의 성소에 우상이 없고 오직 율법의 두 돌판을 넣어두는 법궤라 불리는 한 상자와 그 위에 있는 상징적인 예배하는 그룹들만을 갖고 있다는점에서 독특하다.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에 있어서 성전이 갖는 중심적인 위치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반영되고 있다. 시편에도 그에 대한 언급이 많이 있다(42:4;66:13;84:14;122:1, 9;132:5,7-8,13-17). 성전은 종교적 갈망의 대상이었다(23:6;27:45). 성전으로 향한 순례는 이스라엘 민족을 세상 끝에서부터 이끌어왔다(시122:1-4; 행 2:5-11). 예수께서 12세에 성전을 방문한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눅2:41-51). 후에 그 분은 그의사역 중 얼마를 그곳에서 행하셨다(마26:55;눅19:45;요7:28,37;10:23). 초기의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도 또한이스라엘과 교회가 완전히 분리되기 전까지 그곳에서예배하였다(행3:1;5:12,42;21:26-34).
1. 솔로몬 성전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기간 중의 히브리인의 거대한경제적, 문화적 발전은 다윗으로 하여금 성전을 짓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하였다. 이전의 제사의 중심이었던 성막(출35-40장)은 히브리인들이 사막을 여행할 때팔레스타인까지 가져왔던 단순하고 비영구적인 구조물이었다. 따라서 다윗이 자신의 집만큼 하나님의 집이 장엄하기를 소원했던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삼하7:2). 그러나 다윗에게는 이 '집'을 건축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삼하7:5-7;대상22:8). 그러나 그는 그 성전을 위하여 계획, 재료(대상22:1-19;28:129:9), 그리고 특별히 성전 예배의식의 순서를 준비하는 일을 하였다(대상23:1-26:19).

솔로몬 성전의 유적은 하나도 알려진 것이 없다. 분명한 것은 그 성전은 성막을 따라 형태가 지어졌는데, 다만 성막보다 더 복잡하고 화려했다는 것이다. 히브리인들보다 문화적으로 더욱 앞서 있던 두로(페니키아) 사람들이 성전의 모양새와 건축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최근에 고고학자들은 페니키아와 시리아에서 유적들을 발견했는데, 그것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세부적인 것들과 주요 무늬들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다. 시리아의 '텔 타이나트’(Tell Tainat)에서 발견된 성전은 특히 도움이 되었는데, 이는 솔로몬 성전과 같은 때에 건축된 것이다. 그 건축의 세부들은 오늘날 솔로몬 성전의 세부를 재건하는데 있어서 현존하는 최상의 안내자로 믿어지고 있다. 이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가버(Paul L. Garber)의 논문 “Reconstructing Solomon's Temple”(솔로몬 성전의 재건, BA, 14:1,1951.5)과 가버의 연구에 기초하여 하울란드(E. G. Howland)가 만든 성전 모형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모형은 아마도 그 이전에 쉬크(Schick)에 의하여 만들어진 유명한 모형보다도 더 신뢰할 만한 재건축일 것이다. 성전은 그 웅장한 크기보다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세부(部)로 유명하였다. 성전에는 오직 제사장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고 이스라엘 평민들은 성소 안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었다. 성전을 건축하는데 7년이 소요되었다. 솔로몬 통치 제 11년, 곧 B. C. 950년에 봉헌되었고(왕상6:38),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불태워진 B. C. 587년에 파괴되었다.
성전은 조립식 건축물이었다. 그것은 예루살렘 근처 또는 안에 있던 채석장(왕상6:7)에서 완성된 석회암으로 만들어졌다. 돌들이 건축지로 이송되면 사람들은 계획에 따라 벽을 세웠다. 이로부터 '건축자들의 버린 모퉁이 돌'이라는 구전이 생겼다(시 118:22;벧전 2:6-8), 그 돌로 된 벽은 아마도 페니키아의 기능공에 의하여 완성된 레바논 백향목 널판으로 덧씌워졌을 것이다(왕상5:6;6:15,18). 솔로몬 성전의 주요 설명은 열왕기상 5:1-9:25과 역대하 2:1-7:22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성전의 많은 세세한 부분이 불확실하다. 그러나 분명하게 아는 건축부분은 여기에 소개되었다.
성전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1) 낭실, 이곳을 통하여 성전 안으로 들어간다. (2) 성소, 지붕 위의 높은 채광창(clerestory)으로 조명되었다(왕상6:4). 그 넓이는 9m, 길이는 18m, 그리고 높이는 13.5m다. 내부는 백향목 널판으로 되었는데, 나무의 단조로움에 변화를 주고 웅장함을 더하기 위하여 금을 덧씌웠다. (3) 지성소(대하3:8-13), 내부 성소로서 9m의 정육면체이며 창문이 없고 금으로 덧입혀졌다. 이 작은방은 성소로부터 계단을 통하여 도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특별히 영광의 구름으로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셨다.
성전은 3m 높이의 연단 위에 건축되었으며, 10층 계단을 통하여 접근하도록 하여 예배의식의 진행이 극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 연단 위에 있는 낭실에 들어가기 전 그 이름이 각각 야긴과 보아스인 두 기둥을 세웠다(왕상7:15-22). 아마도 이 이름들이 기둥 위에 조각된 첫번째 단어일 것이다. 이들 바로 뒤에 일종의 성소에 이르는 대기실인 낭실로 들어가는 문들이 있었다. 감람목으로 된 그 두 문짝에 그룹과 종려와 핀 꽃을 새기고 금으로 입혔다 (6:18,32,35). 이 무늬들은 고대 근동 성전 건축물에서 자주 발견된다.
성소에는 열 개의 금촛대가 있었다(왕상7:49). 헤롯 성전에 있던 금촛대 하나가 로마에 있는 타이터스의 아치 위에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A. D.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로마 군사들에 의하여 운반된 촛대였다. 떡상 위에는 진설병 12덩이가 놓여 있었다. 분향단(7:48)은 뿔들이 달려 있어 지성소의 입구 가까이에 놓여 있었다.
지성소에는 감람나무로 만들고 금으로 장식한 두 그룹이 있었다. 수많은 고고학적 유물을 통하여 이들은 사자의 몸통과 인간의 얼굴을 한 큰 날개 달린 스핑크스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위엄한 임재를 상징하였다. 그것들 밑에 있는 마루 위에는 언약궤가 있었는데 이것은 금으로 덮인 상자이며, 그 뚜껑은 시은좌로 불리웠고, 대속죄일에는 그 위에 속죄의 피가 뿌려졌었다(레 16:14-15).
성전 양 옆과 뒷면에는 3층으로 된 방들이 건축되었다. 그것들은 중심의 건물들보다 높지 않았으므로 지붕 높은 창을 통하여 빛이 성소에 조명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이 지붕 높은 창의 모습은 아마도 중세 성전과 같은 창문 배치(행랑 부분 또는 측면의 날개 부분보다 높게 세우되 벽으로 우묵하게 들어간 창벽)의 원형이었을 것이다. 성소 둘레에 있는 행랑들 안에는 성전의 엄청난 보물이 보관되었다(왕상7:51).
성전 앞의 안뜰에는 성전 예배와 밀접히 연결되어있는 번제단과 물두멍 또는 주조하여 만든 바다가 놓여 있었다. 번제단은 희생 제사에 있어서 중심이었으며 그것은 청동으로 만들어졌다(대하4:1). 이것은 아마 오늘날의 '하람 에쉬 - 쉐리프' (Haram esh - Sherif)의 The Dome of the Rock(바위 위의 둥근 지붕) 건물이놓여 있는 큰 바위 위에 세워졌을 것이다.
번제단의 남쪽에 구리합금으로 된 물두멍 또는 주조된 바다가 있었다(왕상7:22-26;왕하16:17;대하4:2-6).이 거대한 주조물인 '바다'는 금속을 조형하기에 적합한 점토가 있는 요르단 계곡에서 만들어졌다. 그것은 두께가 9cm, 직경이 4.5m, 높이가 2. 2m로서 네 방향으로 세 마리씩, 열두 마리의 황소의 등 위에 놓여졌다. 유사한 동물의 형상으로 왕좌를 떠받들게은 이스라엘의 주변국가에 존재하였음이 알려졌다.가나안의 황소는 풍요의 상징이었으며 비의 신인 바알(Hadad)과 관련되었다.
솔로몬 성전에 이러한 형태가 존재하는 것은 성경에서 읽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여러 종교 통합주의가히브리 종교에 있었을 것임을 시사해 준다. 몇몇 학자들에 의해 38,000리터(10,000갤런)로 추정되는 양을 담을 수 있는 이 거대한 용기는 의식에서 손을 씻도록 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으며, 특히 10개의 작은 대야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대하4:6) 실용적으로 사용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의 주된 목적은 바다 또는 물이 생명의 근원이 됨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바벨론 사람들은 고대의 금속 주조물의 놀라운 예가 되는 이것을 깨트려 가져갔다(왕하25:13).
성전 하나만 건축된 것은 아니었다. 솔로몬은 다윗이 지은 옛 도시의 바로 북쪽에 위치한, 예루살렘의새 영역에 수많은 왕궁 건물들도 함께 건설하였는데,솔로몬 자신의 궁, 레바논 나무로 된 궁, 바로의 딸을위한 궁, 기둥을 세워 만든 낭실, 보좌의 낭실(왕상7:18) 등이 정부의 청사 구역에 있는 건물들이다. 이 문맥에서 볼 때 성전은 왕실의 교회와도 같았다. 성전은 솔로몬 그 자신에 의하여 봉헌되었다. 이 예식을위한 그의 기도는 (8:22-61) 여호와의 신앙 안으로 이방국가들조차도 끌어들이려는 위대한 종교적 정신을 보여준다.
히브리 왕조의 기간 동안 이 성전에는 이방 신상들이 자주 들어왔다(왕하16:10-18;21:49;겔8:3-18). 신실한왕들은 개혁하고, 성전을 정화하여 다시 봉헌하였다(대하29:3-31:21;34:8-33). B. C. 587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함락되었을 때 성전도 그 도시의 다른 건물들과 함께 파괴되었고, 그 안의 가치있는것들은 바벨론으로 이송되었다(왕하25:8-9,13-17).
2. 에스겔 성전
선지자 에스겔은 제사장이기도 했다. 그는 책 전반부에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떠나시고 그곳이 이방인들에 의해 황폐해지도록 버려두심으로 우상을 섬기는 그분의 백성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후반부는 반대로 예언한다. 연합된 유다와 이스라엘은 다시 모이게 될 것이다. 이 예언의 절정은 회복된 하나님의 성전과 그로부터 흘러 나오는 생명수와 그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선지자의묘사이다(겔40-48장).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계시다)는 이 예언의 핵심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중에 다시 거하실 것이다. 여기에 묘사된 성전은 이상적인 건축물로서, 솔로몬 성전과 같은 점도있고 다른 점도 있으며 존재했던 어느 성전도 그와 같은 것이 없었으며 그와 닮은 성전이 어떻게 건축될 수있는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성전에 대한 이 예언의 의미에 대하여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왔다. 이 예언의 문자적인 성취를 바라는 해석자들은 이 성전이 예루살렘에 위치하여 온 세계의하나님의 신앙 중심지로서 천년 왕국의 일부가 될 것으로 믿는다. 언급된 속죄 제물은(겔43:18-27) 구약의희생제물들이 그랬듯이 그리스도께서 본질적으로 이루신 완전한 속죄 제물을 내다보기 보다는 회고하는기념물로서 나타나고 있다.
다른 학자들은 이 묘사가 문자적으로 거의 이해될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히브리서에서 희생제도가 그리스도를 예표하였으며 현재는 거의 온전한 희생이 이루어졌으므로 불완전한 모형은 폐지되었다고말한다고 주장한다(히7:11-10:39).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에스겔의 성전 환상을 배경으로 하여 거룩한 성새 예루살렘을 묘사한 듯하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천년왕국 때의 성전이 아니라 장차 영광을 받게 될 교회를 시사하기 위하여 기록하였다. 따라서 이 해석자들은 에스겔의 성전을 그리스도의 몸인 주의 새롭고 거룩한 성전을 예표하는 매우 상징적인 성전으로 이해한다(엡2:11-3:6).
3. 스룹바벨의 성전 재건
고레스의 명령으로 가능케 된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귀환(B. C. 538)은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귀환자들은 적은 숫자였으며, 그들이 갖고 있는 자원들은 빈천하여 바벨론에 사는 유대인으로부터 자주 지원을 받아야 했다. 그들이 지은 성전이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된다. 기초가 놓였을 때 '첫 성전' (솔로몬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슬픔을 인하여 통곡하였으며(학2:3), 포로 때에 태어났던 청년들은 기쁨을 인하여 크게 소리쳤다(스3:12). 제 2의 자치령 (Second Commonwealth) 시기의 첫 1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대부분의 재건축물들처럼 성전도 실제로 소규모였을 것이다.
귀환한 후 곧 그 시민들은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인 스룹바벨은 귀환민들을 이끈 지도자였다. 건축자들이 B.C. 515년 그 성전을 완성하기까지 많은 어려움들이 따랐다. 그 당시 이 일에 있어서 선지자 학개 스가랴는 그들을 권면하여 건축을 완성하도록 하였다. 성경에는 이 성전에 대한 묘사가 없다. 그러나 그 형태는 아마도 솔로몬의 성전과 똑같았을 것이며 다만 그 장식이나 건축비용은 덜하였을 것이다.
이 새 성전의 지성소 앞에는 휘장이 있었던 것 같다. 그곳에는 촛대 하나, 금향단, 그리고 진설병상이 놓여 있었다. 또 다른 휘장이 지성소로부터 성소를 구분하였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지성소는 비어 있었다. 분명히 법궤는 B. C. 587년에 파괴되었고 따라서 다시 놓여질 수 없었다. 단 한 개의 돌 조각이 그 위치를 표시하고 있었다. 바벨론 탈무드에 따르면 새 성전에는 다섯가지가 부족하였다 : 법궤, 거룩한 불, 하나님의 영광, 성령, 그리고 우림과 둠밈.
성전은 수 세기를 지내면서 보수되었고 아름다와 졌음에는 틀림없겠지만 이에 관하여 알려지는 바는 없다. 다음으로 이 성전에 대한 자료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때로부터 얻어진다. B. C. 168년 이 시리아의 왕은 히브리 종교를 짓밟고 성전에서 그 기구들을 탈취하고 대제사장으로 하여금 제단 위에 돼지를 번제로 드리게 하여 그 성전을 더럽혔다. 이 성전은 마
카비의 반란이 일어난 B. C. 165년 마카비의 지도를 받은 유대인들에 의하여 정결케 되어 다시 봉헌되었다. 마카비1서 4:44-46은 그들이 더럽혀지지 않은 돌로 번제단의 돌들을 교체했으며, 옛 돌들은 "선지자가 나타나 그것들에 관하여 답을 해주기까지”보관하였다고 기록한다. 이 성전의 재 봉헌식과 촛대를 위한 기름의 기적같은 공급은 유대인의 축제인 하누카(Hanukkah)를 통하여 계속되고 있다.
유다 마카비(Judas Maccabeus)는 성벽과 망대를 쌓아 예루살렘 성을 만들어 그 성전을 튼튼하게 하였다. 그 다음 세기 중 어느 때에 힌놈의 골짜기와 동일시되는 티로포이온 골짜기(Tyropoeon Valley)를 가로질러 성전과 하스모니안 왕궁을 연결하는 다리가 건설되었다. 하스모니안가는(마카비가의 나중 이름) 대제사장이자 왕이었으며, 그들은 이 다리를 통하여 성전을 더욱 쉽게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제 2의 자치령 시기에는 군사적인 중심지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헤롯 성전이 무너지자 유대인들은 그들이 항상 익숙해 있었던 종교생활과 선조들의 땅을 동시에 잃게 되었다.
B. C. 63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힘든 투쟁 끝에 성전을 취하였을 때 하스모니안 왕가의 다리를 무너뜨렸다. 비록 폼페이는 성전은 파괴하지 않았으나 로마의 집정관 크라수스(Crassus)는 9년 후 성전에서 모든 금을 약탈하였다.
4. 헤롯 성전
헤롯 성전에 관한 정보의 출처는 유대인 역사가이자 A. D. 70년에 활약한 제사장이었던 요세푸스와 성전이 최종적으로 무너지기 1세기 전에 쓰여진 미쉬나의 소책자인 미돗트(Middoth)이다. 둘 다 비평없이 사용될 수 없으므로 헤롯 건축물과 예배에 관한 많은 세부 사항들이 불확실하게 남아 있다.
헤롯 대왕(B. C. 37-4)은 지치지 않는 건축가였다. 많은 도시들과 이방 신전들이 그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따라서 자연히 그는 보다 더 복잡하고 보다 더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 근대적인 성전 회복을 이룸으로 그의 위엄을 보이고자 하였다. 다른 동기들 특히 그가 이두매 출신인 것과 로마와 친분을 맺는 것을 혐오하는 종교적인 유대인들을 더욱 그에게 이끌려는 욕망둥이 아마도 그를 움직였을 것이다.
헤롯은 그의 통치 제 18년에 그의 일을 시작하였다 (B. C. 20-19). 유대인들은 그 일이 성전 예배를 방해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으나 헤롯은 이를 예방하고자 기간을 무척이나 연장하여 새 성전이 다 완성되기까지 결코 의식을 준행하는 일이 중단됨이 없도록 옛 구조물을 조금씩 재건하였다. 성전과 안뜰에는 제사장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으므로 제사장들 가운데 천명가량이 내부 공사를 위한 장인과 목수들로 훈련되었다. 그 '집'은 1년 반만에 완성되었으며 8년이 그것을 둘러싼 건물과 뜰을 위하여 소요되었으나 A. D. 64년까지도 완성되지 못하였다. 유대인들은 예수께 말하기를 이 성전이 46년 동안 건축되고 있다고 하였다(요 2:20).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완성되기까지 30년 이상이 더 지나야 했으며 이것은 오직 파괴되기 위해 지어질 뿐이었다. 모두들 그 건축물의 장엄함 곧 흰 대리석과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금판으로 덮인 동쪽 전면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성전 구역은 아마도 안토니아 요새가 위치한 히람의 북쪽 끝지역만 제외하고는 현대의 '하람 에쉬 - 쉐리프' (Haram esh - Sherif)와 동일하였을 것이다. 이 구역은 스룹바벨 성전의 구역보다 2배 더 넓었으며 옹벽들(통곡의 벽은 헤롯 성전의 서쪽 옹벽의 일부분이다)로 둘러싸여 있었다. 약 26에이커(105. 2㎢) 넓이의 이 구역은 높은 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각 면의 성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주된 성문은 도시로부터 성전 안으로 열린 남쪽과 서쪽 벽에 있었다.
동쪽 문이 아마도 미문(행3:2,10)으로 오늘날 황금문이 서 있는 곳일 것이다. 벽들의 안쪽을 둘러 현관이 있었다. 가장 훌륭한 것은 왕의 현관(The Royal Porch)으로서 남쪽 면에 있으며 고린도 양식으로 현란한 흰색 대리석 기둥들이 4열로 총 162개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의 현관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웠다(요 10:23;행3:11;5:12), 축제 동안 로마의 보초들은 이 현관의 지붕들 위를 걸어다니곤 하였는데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지를 살피고자 함이었다.
성전의 북서쪽 모서리 지역으로부터 안토니아 요새로 연결된 층계에서 바울은 보초에 의해 군중들로부터 떨어져서 설교를 하였다(행21:31-22:21). 성전 구역으로 들어가면 성전을 둘러 벽으로 싸인 연결된 4개의 안뜰에 도착하게 되는데 안쪽에 있는 한 뜰을 제외하고는 모두 배타적이었다. 첫번째는 이방인의 뜰이었다. 이곳은 거룩한 곳이 아니었으므로 비유대인들도 들어올 수 있었다. 이곳에서 매매가 이루어졌으며 예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곳도 이곳이었다(요2:1417). 이방인의 뜰 안에는 바깥 뜰보다 7m 정도 높인 연단 위에 성전과 안뜰이 위치하고 있다. 층계가 이 연단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이 연단 둘레에는 돌로 된 벽이 있었고 그 돌들에는 비유대인의 출입을 금지하며 이를 어길 경우 죽음을 당할 것을 경고하는 글이 헬라어와 라틴어로 새겨져 있었는데, 이 돌들 중 몇 개가 발견되었다(참고, 행21:26-28), 그 연단 위에 안뜰이 있었다. 그곳이 성전구역이었으며 거룩한 땅이었다. 오직 언약의 백성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높은 벽이 이곳을 둘러쌌고 이 벽의 안쪽에는 저장소와 행각들이 지어졌다. 의식용 소도구들이 이 저장소에 보되었으며 산헤드린 회원들이 이 행각들 중 어느 한 곳에서 모임을 가졌던 것으로 믿어진다. 안뜰은 남북을 가로지르는 벽을 인하여 똑같지 않은 크기의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동쪽의 작은 구역은 여인의 뜰이었다. 이곳에는 남자들뿐 아니라 여인들의 출입이 허용되었으며 트럼펫을 뒤집은 모양과 비슷한 13개의 방이 있었으며, 그 안에는 성전 봉사에 사용되는 헌금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 장소에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드렸다고 예수께서 칭찬하셨다(막12:41-44. 서쪽 지역은 의식적인 정결을 인하여 오직 남자들에게만 출입이 허락되었다. 이곳의 그 중앙에 성전이 있었다. 성전 주위에 제사장의 뜰이 있었는데 이 곳에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었다. 제사장의 뜰 주위에 이스라엘의 뜰이 있었으며 모든 유대인 남자들이 접근할 수 있었다. 제사가 드려질 때는 이곳에서 남자들이 모여 기도하거나 희생의 번제를 바라보았다(눅1:10).
이 많은 뜰로 이루어진 중앙에 제사장의 뜰보다 12계단 높게 올려서 성전이 있었다.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백성과 사귐을 갖도록 하셨다고 말했을 때 그의 마음 속에는 접근이 금지된 성소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성전의 현관(길이와 폭이 47m 높이가 9m인)은 동쪽을 향해 있었다. 그것은 성전의 좌우로 7m 정도 더 돌출되었는데 이것은 성전의 폭이 단지 33m였기 때문이다. 현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위에는 헤롯이 유다인에게는 가장 가증스러운 로마인들의 상징이자 또한 부정한 새인 황금 독수리를 두었다. 그러나 그가 죽기 바로 전에 그것은 파괴되었다. 성소로 들어가는 복도 앞에는 아름답게 채색된 바벨론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성소의 내부는 길이가 19m, 폭이 9m, 높이가 28m였으며 그 가운데 분향단, 북쪽에 진설병상, 남쪽에 촛대가 있었다. 오직 직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들만이 이 방에 들어갔으며 아침 저녁으로 향을 가져가기 위하여, 매일 촛대를 정리하기 위하여, 그리고 매안식일마다 진설병을 교체하기 위하여 들어갔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46cm의 공간을 사이에 두고 두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그의 향로를 가지고 남쪽으로 가서 그 두 휘장 사이를 지나서 북쪽으로 가면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복음서는 이 둘을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 실 때 두 쪽으로 찢어진 한 휘장으로 언급한다(마27:51;막15:38;눅23:45). 지성소는 비워 있었으며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들어갔다. 한 개의 다락방이 19m 높이로 성전의 두 방 위에 걸쳐져 있었다. 이 방으로부터 일꾼들이 상자로 내려져 필요한 곳을 수선하도록 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필요없이 거룩한 집을 걷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솔로몬의 성전과 마찬가지로 헤롯 성전도 동쪽면 곧 현관이 있는 전면을 제외한 나머지 3면을 둘러 저장고가 있었다. 이 방들은 저장과 직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지붕이나 창문을 통하여 어떤 자연의 빛이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빛은 오직 촛대로부터 왔다.
성전의 앞에 있는 제사장의 뜰에는 번제단이 있었다. 그 번제단은 오늘날 '하람 에쉬 - 쉐리프' (Haramesh - Sherif)의 바위 위의 둥근 지붕(The Dome of Rock) 건물이 위치한 큰 바위 위에 세워졌다. 이 번제단 위에는 언제나 사르는 불이 있었다. 남서부 모서리에는 피가 기드론 골짜기로 빠질 수 있도록 배수로가 놓여 있었다. 제단의 북쪽에 지면에 박힌 고리 24개가 있었다. 이 고리에 희생 제물들을 묶었고 그곳에서 그들의 목을 베어 죽였다. 그보다 좀더 북쪽에 쇠고리가 달린 기둥들이 서 있어 이 곳에 시체를 걸어가죽을 벗겼다. 단지 제사장들만이 희생제물의 많은 부분을 먹음으로 살아갔을 뿐 아니라 어느 장소든 음식으로 사용하고자 한 짐승을 죽이는 일은 종교적 행위(희생 제사)의 일종으로 생각되어졌고 일정한 의식이 지시되었다. 번제단의 남쪽에 황동으로 된 물동이 또는 대야가 있었고, 이 곳에서 제사장들은 그들의 손과 발을 씻었다. 물은 성전 우물로부터 관을 통하여 공급되었다.
이 성전은 A. D. 70년 8월 로마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불태워졌다. 로마에 있는 디도의 개선문(Triumphal Arch Titus)에 부조된 그림은 전리품으로써 성전 기구들을 이송하는 군사들을 보여준다. 이때의 파괴가 교회와 성전 사이의 관계를 완전하고도 결정적으로 갈라놓았으며, 따라서 이스라엘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하나의 종교로서의 교회가 세워지는데 도움을 주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구약성경의 의식에 관한 율법에서 암시된 구속자가 되신다는 주장이 정당한 것이었다는 증거를 유대교 의식이 강제로 중지된 것에서 찾았다.
신약에서 이 성전이라는 용어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상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몸인 성전에 관하여 말씀하셨으며(요2:19,21), 또한 성도 개개인이 성전이기도 하다(고전6:19). 따라서 교회도 성전이지만 이 성전은 지상에 있던 성전과는 달리 모든 신자들이 접근할 수 있고(히6:19;10:20), 현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옛 언약의 의식적인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엡2:14). 히브리서는(특히 7-10장) 아주 자세하게 성전과 그 의식의 표상의 성취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설명한다. '더 나은 언약'에 대한 개념의 절정은 요한이 그의 계시 가운데서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21:22)고 한 그 새 예루살렘에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