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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주의 기도 / 주의 날

주의 기도 Lord's prayer 

우리 주님이 제자들에게 항상 사용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모본으로 가르치신 기도. 마태복음 6:9-13에 기록된 이 기도는 산상설교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누가복음11:24에는 다른 상황하에서 우리 주님에 의해 주어졌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모형으로 그 기도를 제시하셨으므로, 다른 상황에서도 그 기도를 반복하여 사용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은가능한 추측이다. 마태복음 6:9-13에서 주님은 진정한기도에 필수적인 모든 요구 사항들을 종합한 기도의 일례로 그것을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9절)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계속하여 가르치셨다. 그들에게외식하는 자들처럼 기도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신 후에(5절), 이방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의미없는 말들을 많이하는 기도를 하지 말 것과(7절), 어떤 기도가 하나님 앞에 열납되는 기도인지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누가복음 11:14에서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그 기도를 말하셨는데, 여기에서는 그의 가르침을 담은 기도의 표본으로서가 아보당신을 따르는 자들에 의해 드러져야 하는 실제적인기도로서 주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라"(2절)
누가복음 11:24에서 주의 기도는 마태복음 69-13에서 보다 젊은 형태로 되어 있다. 우리 주님께서 그 기도를 하실 때에는 아랍어로 말씀하셨을 것이 분명하다.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마태와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할당시에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헬라어로 자연스럽게사용되었을 것이다. 이 사실은 마태복음 6장과 누가복음 11장이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일치하며,양쪽 모두 독특한 단어인 '에피우시오스' (날마다)를 사용한 이유를 설명하여 준다.
기도의 시작말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가져야 하는 올바른 태도와 정신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라고부를 때, 우리는 믿음과 사랑 안에서, 그분을 온전한사랑과 은혜를 가지고 우리 곁에 계시는 분으로 바라보게 된다. '하늘에 계신' 이라는 말을 통하여 모든 세계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통치자로서 그분에 대한거룩한 경외심을 표하는 것이다. 기도의 도입부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 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 안에서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첫번째 간구는 하늘 아버지의 영광과 거룩하신 목적에 관한 것들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는 우리는 물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인식하고경외할 수 있게 되도록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 안에 드러난 '하나님 자신' 이기도한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게 여김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분은 거룩하고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우리를온전히 사랑하시는 분만이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모든존경과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두번째, (당신의) 나라이 임하옵시며' 라는 탄원은하나님의 거룩하신 통치가 온 세계는 물론, 각자 개인들의 심령 안에서(바로 이 시대에), 여기서, 그리고 지금 확장되기를 원하는 기원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본래 이 기원은 종말론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인자의영광스러운 재림의 때에, 하나님의 왕권 통치가 굳건히 서게 되기를 바라는 탄원인 것이다.
세번째 간구,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누가복음 11:2에서는 제외되었으며, 이건 간구에 대한 실제적 부연 설명이기도하였다. 하나님의 통치가 기쁘게, 그리고 아무 조건없이 모두에게 받아들여지는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뜻은 계속적으로, 자발적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모든 이에 의하여 순종되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하나님의 뜻이 그와 같은 식으로 지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특별히 그들 자신의 삶속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 기원은 현 시대에 대해 어느 정도 언급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무릎이 만왕의 왕 앞에절하고 어둠의 권세가 마침내 멸할 그 때를 내다본다.그 때 하나님께서는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것이며, 그의 뜻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실 것이다(고전15:25-28). 세 명령어인 '하기아스테토(거룩히 여김을받아)', '엘테토(임하다)', 그리고 '게네테토(이루어지다)'는 모두 부정 과거의 형태이며, 또한 마지막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 첫번째 세 간구는 하나님께서 영화를 받으시는 것에 중점을 두는 반면에, 나중 세 간구는신자들의 육적 영적 안녕에 그 관심을 집중한다.
네번째,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한 탄원은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육체적 필요를 채워주시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로 인정하여 그분께 구하는 것이다. '양식' 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총칭한다. 이전에 드려진 탄원의 견지에서 볼 때, 이 간구는 삶의 필요들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공급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였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 효과적으로 영화롭게 할 수 있으며, 그의 나라의 도래를위하여 일하고, 이 땅에서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게된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우리의 기도는 이기적인 기도나 물질적 사치를 위한 기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을 고백하는 기도이며,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기를 믿음과 사랑 안에서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이다.
'날마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우시오스' 는 성경에서 오직 마태복음 6:11과 누가복음 11:3에만 쓰였고,알려지기로는 파피루스 문서 중의 하나에(불행히도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중성 복수 형태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의미는 '매일의 할당된 양식'을 말한다. 비록어형의 변형에 관한 충분한 연구가 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이 단어는 어떤 이에 의해 다가올 날을 위하여' 혹은 '필요되거나 충분한 것'으로 번역되기도 하였지만 '일용할로 한 번역은 꽤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초본질적 빵(양식) (비록 우리의 삶의 진정한 빵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긴 하지만)으로 말한 사람은 J. 제롬이었다. 제롬은 이 간구를 그 이전 학자들 중에서도 몇몇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것(눅14:15)'을 언급하였다는 종말론적 관점과 연관시킨다. 그러나 문맥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의미는 우리의 모든 육적, 물질적인 영역에 있어 날마다 진정으로 필요되고 적절한 것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는 것을 말한다.
다섯번째 간구인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빚진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빚)를 사하여 주옵시고'는 기도이기도 하면서 또한 일종의 고백이다. 용서를 구하는 것은 기도를 드리는 자가 동시에, 자신이 죄를 지었고, 그러므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14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여기에서 '죄'라고 번역된 헬라어 '하마르티아'는 본래 '과녁에서 빗나감'을 의미하였으며, 유추되어 '잘못 행함'과 '하나님의 법을 어김'을 의미하였다. 마태복음 6:12의 '오페이페마타(빚)' 는 아람어 관용어구와 유사성이 있는데, 그 안에서 '빚(호바)'이라는 단어는 죄를 의미하였다. 죄를 범함으로 우리는 도덕적 그리고 영적인 빚을,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관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자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빚을 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탄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우리의 빚을 탕감해 달라고 겸손히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마6:12)'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오니 (눅11:4)' 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주는 것을 전제로 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는 것은 오직 은혜로 받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마음으로 위선이 없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증오와 원한의 정신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실 때만, 우리는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마태복음 6:1415에서 반복하여 사용하심으로 주님께서 매우 중요시 하셨음을 보여준다.
누가복음 11:4에 기록된 마지막 간구는 다음과 같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소서'. 한편 마태복음 6:13에는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가 더 첨가되어 있다. 이 부분은 탄원의 일반적인 적용이다. 죄의 용서를 위하여 진지하게 기도하는 자라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기를 구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간구가 앞의 기도에 이어지는 것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도록 하여 시험하지 않으신다(약1:13).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을 주관하신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은 죄를 지으려는 경향이 있으며, 그러므로 죄를 지을만한 무거운 시험에 빠질 상황과 여건에 처해지지 않도록 간구해야 함을 하나님 앞에 겸손히 고백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부연으로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즉, '사탄'의 올무에 대하여 우리를 막아주고, 보호하며, 인도하여 주실 것을 구하는 간구이다. 이 마지막 간구는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도 적용되지만 매우 분명하게 우리 주님이 모든 악을 끝내시고 의와 거룩함의 영원한 왕국을 세우실 미래의 사건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수의 봉사에 있어서 이 기도가 종말론적인 언급을 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 시험은 제자들의 믿음에 관한 시험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그들이 그것을 이겨내기란 매우 힘든 것이었다. 그 시험의 형태는 예수께 있어서 마지막 시험이었던 겟세마네의 상황에서 보여 준다.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막14:38)고 하신 예수의 권고는 '항상 깨어 있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주의 기도에서도 나타난 이 간구는 '우리가 시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반복하여 시험으로부터 건져냄을 받기 위하여 간구를 많이 하지만, 그들의 믿음이 가장 힘든 시험에 의하여 도전을 받을 때, 그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은혜와 능력을 구하는 기도로서 이 탄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고대와 그리고 많은 현대 성경사본에는, 마태복음 6:13에 주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 송영 영광송이 기록되어 있다. 영역본 KJV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아멘”이라고 기록되었다.

비록 가장 권위 있는 사본에는 이 송영이 기록되지 않았으나 이것은 기독교 초기부터 사용되었으며(The Didache and westem Text), 이것은 분명히 주의 기도에있어서 가장 적합한 종결어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태가 기록한 처음 본문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백한데, 14-15 질은 12-13절 다음에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주의 기도는 기도의 형태로 요약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리스도의 메시지라고 말하는데,이것은 옳은 생각이다. 이 기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통치권이 온전히 세워지는 날까지 하나님의자녀로서 더욱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기도이다.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치실 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너희는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주목하라. 주의 기도는 가르쳐진 기도이지 그가 사용하신 기도는아니다. 주님은 한번도, 자신과 제자들을 포함하여,'우리 아버지' 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셨으며(요20:17; 내 아버지 곧 - 그리고 - 너희 아버지), 한번도 자신이 용서를 구하여야 할 필요를 느끼셨다는 암시조차도 찾을 수 없다. 주의 기도는 독특한 기도이며, 참된 기도의 모든 요소들을 단 몇 마디로 함축한, 오늘날의 어떤 기도로도 능가할 수 없는 유일한 기도이다.

주의 날 Lord's day

한 주간의 첫번째 날인 일요일을 가리키는 명칭. 주의 날이란 명칭은 신약에서 단 한번 사용되었다(계1:10). 그러나 '주의'를 뜻하는 헬라어는 '주의 만찬'을 가리키는 말과 꼭같은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고전11:20). 초기 기독교의 예배와 교육의 지침서인 「디다케」(Didache)는 이 두 용어를 연결시키고 있어 주의만찬은 주의 날에 거행되었음을 말해 준다(14:1). 바로여기에서 이 용어의 기원을 엿볼 수 있다. 매주의 첫번째 날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주의 만찬을 거행하는날이었기 때문에 이 날은 기독교인의 특별한 예배의날인 주의 날로 알려지게 되었다.
매주 첫날 예배 경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행 20:712에 나타난다. 여기서 바울은 떡을 떼기(주의 만찬을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위해 그 주간의 첫날 저녁에 모였던 드로아의 기독교인들의 모임에 동참하였다. 이날이 실제로 어느 날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첫날 저닉은 토요일 저녁을 가리킬 수도 있고(유대인의 계산법) 일요일 저녁을 가리킬 수도 있었다(로마인의 계산법), 그러나 앞서의 사건은 이방 땅에서 이방인과 관련된 사건이기 때문에 일요일 밤을 가리킨 것으로 볼수 있다.
1세기 기독교인들에게 일요일이 갖는 중요성은 고린도전서 16:1-2에서도 암시되고 있다. 바울은 예루살렘 기독교인들에게 가져다 주려고 했던 특별 구제금에 대해 훈시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매주 첫날의주일 헌금을 따로 저축할 것을 당부하였다. 바울이 이날을 언급했던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관례적으로 이날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며 이들이 헌금을 따로 저축하기에는 이 날이 안성맞춤임을 알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2세기의 다른 문서들도 주의 날이 초기 교회에 갖는 의의에 관해 조명해 주었다. 이그나티우스(110-117년경)는 이 날에 드리는 예배를 과거 안식일에 드리던예배와 대조시킴으로써 주의 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Epistle to the Magnesians, 9:1). 초기 기독교 예배에관한 현존하는 첫 기록을 남긴 사람은 순교자 저스틴(150년경)이었다. 그는 일요일 이른 아침 예배는 세례로부터 시작하여 성경봉독, 설교, 기도 순서를 거쳐주의 만찬을 거행하는 것으로 끝났다고 기록하였다(Apology 65-67).
1세기와 2세기의 기독교 문서들은 일요일이 신속하게 기독교의 표준적인 예배일로 변했음을 지적할 뿐,안식일로부터 주의 날로의 이 변화가 왜,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물론 그 가장 분명한이유는 첫번째 주의 날에 예수의 부활이 이루어졌기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의 최초의 집단적만남의 경험들은 부활 주일 저녁에 이루어졌기 때문에(눅24:36-49;요20:19-23), 제자들이 그 다음 주일부터같은 시간에 모여 만찬을 거행하면서 그를 기념했을것으로 예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패턴이 사도행전 20장의 드로아 모임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배 시간을 저녁에서 아침으로 변경한 것은 아마도 현실적 필요성에 기인했던 것으로 보인다.2세기 초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글 가운데서 비두니아의 총독 젊은 플리니는 선동적인 집회를 금지한 트라얀의 칙령에 따라 기독교인들을 위시한 어떤 집단도 야간 집회를 가지지 못하도록 조치했다고 보고하였다. 그런 후 플리니는 기독교인들이 이른 아침에 갖는 예배를 기술하였다. 야간 집회를 금지당한 기독교인들은 매주 첫날 이용가능한 다른 시간에 모여 주의 만찬을 거행하였다. 그 시간은 바로 일을 하러 나가기 전의 이른 아침 시간이었다. 그 후 이 관행은 저녁 예배에 대한 규제들이 실시된 로마 제국의 전역으로 확산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일부 유대 기독교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도 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을 단순한 안식일의 대체가 아니라 기쁨과 축하의 날(축일)로 이해하였다. 일요일을 안식일로 부르는 것은 영국 청교도들이 1500년 이후에 그렇게 부르기 시작할 때까지는 일반화 되지 않았다. 처음 세기들에서 나온 증거는 기독교인들이 일요일을 부활로 인해 생긴 새 생명을 기뻐하는 날로 간주했음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다른 날에는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할 때 금식하고 무릎을 꿇고 했으나 주의 날은 기쁜 날이기 때문에 일요일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여겼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된 직후 일요일은 휴일로 공식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