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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주의 만찬 / 주장1(하다) / 주장2(하다) / 주재(하다)

주의 만찬 Lords' Supper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성례인 성찬 예식은 주의 만찬(고전 11:20)에서 유래하였다. 이 주의 만찬에 대한 신약의 증거를 편의상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1. 마지막 만찬. (1) 마지막 만찬은 유월절 식사였는가? 주님이 배신당하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던 식사의 정확한 성격 문제는 신약 역사와 해석의 가장 뜨거운 쟁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 마지막 만찬은 관례적인 유월절 식사(잔치)였다는 것이 전통적인 설명이며, 공관복음(예를 들면 막14:1-2,12-16)과 요한복음(예를 들면 13:21-30)이 모두 이런 설명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한다. 유대교학자인 빌러벡(P. Billerbech)과 달만(G. H. Dalman)이 유월절 잔치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지적했던 점들이 마지막 만찬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식탁에 비스듬히 눕는다든가, 가난한 자에게 자선을 베푼다든가(요13:29참조), 애굽 종살이의 쓰라렸던 생활을 기억하기 위해 적신(haröset라는 소오스에) 떡 조각을 사용한 것 등이 마지막 만찬에서 나타난다. 이런 전통적 견해가 오늘날에는 더욱 중시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이 정도의 증거로는 다른 모든 해석을 배제시킬 만큼 압도적이지 못하다. 전통적 견해에 대해 의심을 품게 만든 자료들은 주로 만찬과 수난 사건들의 날짜를 공관복음서보다 하루 일찍 잡고 있는 요한복음에서 온다. 요 13:1;18:28;19:14,31,42에 의하면 십자가 처형은 공관복음이 잡고 있는 니산월 15일보다 하루 전에 일어났으며 물론 마지막 만찬도 그 전 날 밤에 먹었다. 따라서 마지막 만찬은 정기적인 유월절 식사였을 수가 없다. 주님은 성전에서 유월절 식사를 위한 양들이 잡히던 것과 같은 시기에 죽으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날짜를 지지하고 마지막 식사는 유월절 식사였을 수가 없다고 믿는 버나드(J. H.Bernard)와 같은 학자들은 예수와 제자들이 안식일과 유월절 전날 밤에 종교 모임일 가져 포도주 한잔을 놓고 기도(Qiddush)를 드리는 간단한 의식을 거행했다고 본다. 한스 리츠만(Hans Lietzmann)은 아예 마지막 식사는 보통 식사였으며 이 식사를 함께 나누었던 주님과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종교 모임(habūrāh)을 구성했다는 착상을 내놓았다. 이런 모든 착상들은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여 논의가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쿰란 두루마리들의 새로운 증거에 대한 탐구를 통해 논의가 재개 중에 있기는 하다.
절기 날짜를 계산하는 데 사용되었던 각기 독립된 달력들의 영향에 대한 최근의 연구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복음서 증거의 두 층은 각기 서로 다른 전통을 반영한 것으로 서로 조화시킬 수 있다고 했던 빌러벡과 피클(J. Pickl)의 오래된 제안들을 다시 고려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빌러벡과 피클은 예수님이 사용했던 바리새파의 유월절 날짜와 요한복음이 따랐던 이보다 하루 일찍 잡은 사두개파의 날짜를 구분하였다. 이 구분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비평이 있긴 하였으나 사해 사본은 이단적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다른 달력들이 존재하였음을 증명해주고 있으며, 사실상 분리된 전통들이 수난의 시기에 유행했을 가능성도 있다.
마지막 만찬의 날짜가 앞으로 확정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식사의 정확한 성격이 어떠했든 간에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셨던 주님의 마음 속에 유월절 관념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 12장을 근거로 한 유대 유원질은 초기 교회에서의 주의 만찬과 그 의미를 이해하는 필수적 열쇠가 된다. 이 결론은 구약의 사건들이 신약 저자들에게 갖는 '예표론적'의미의 중요성을 보여 주었던 최근의 예표론(typolg) 연구들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애굽으로부터의 탈출과 구속보다 초기 기독교의 사고의 전면에 결정적으로 부각된 구원사건들은 없다. 출애굽의 총체적 사건들은 유대 전통이나 기독교 전통에서 유월절을 그 중심으로 삼고 있다.
(2) 제정의 말씀. 다락방에서 이루어졌던 마지막 만찬을 보다 면밀하게 검토할 때 곧 두 가지 물음이 생긴다. 떡과 포도주에 대하여 말해진 제정의 말씀의 형태는 무엇이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제정의 말씀의 원래 형태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주로 마가와 바울의 전승에 여러 변형된 형태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눅22:15-20은 본문상으로나 해석상으로 특수성을 지닌다. 서방의 여러 사본이나 시리아 사본에 19b 와 20절이 생략되어 있으나 보다 긴 본문(19b와 20절을 포함하는)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다. 누가는 바울이 사용한 것과 같은 전승을 사용하여 '잔-떡’의 순서로 기술하고(눅22:17-19;고전10:16,21) 주의 만찬을 반복하여 시행하라는 명령을 보존하고 있다(눅22:19b;고전11:25).
제정의 말씀이 마가의 형태와 바울의 형태 중 어느 것이 원래의 형태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으나 그 어느 쪽의 논지도 결정적이지 못하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상징적인 의미로라도 그의 피를 마셔야 한다고 제의하셨을 수가 없다고 느끼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 (고전11:25)고 전한 바울의 전승이 원래의 예수님의 말씀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특히 잔에 대한 마가의 전승은 떡에 대한 전승과 의식문 상으로 짝지어진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하여 히긴스(A.J. B. Higgins)는 마가의 일부 구절을 삭제하려고 하면서 마가가 전한 전승이 투박한 셈 말투가 그 헬라어에 베어 있고 이사야의 종의 구절들에 명백히 의존하고 있는 점에 미루어 보다 원시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여하튼 우리는 다음의 말씀이 원래의 형태에 가까웠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밖에 띄을 가시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 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바울) 혹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가)". 이 말씀 다음에 종말론적 선언(비교, 막14:25; 고전11:26)이 뒤따랐다.
종말론적 말씀은 주님과의 교제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취된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았던 믿는 자들의 소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은 바울의 성찬예식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주님이 그의 백성을 하나로 모으시기 위해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기념을 위한 식탁 교제는 중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의 만찬의 요소들(떡과 포도주)에 대한 해석의 말씀들은 지금까지 다양하게 평가되어 왔다. 화체설에서와 같이 문자적으로 등치(等値)시킬 근거는 하나도 없다. '이다' 라는 연결사는 창41:26;단7:17;눅8:11;갈4:24;계1:20에서와 같이 주석적으로 의미하는 것(significat)이며, 아람어 구어에서는 창 40:12;단2:36;4:22에서와 같이 연결사가 없다.
'몸'과 '피'와 같은 말들은 예수님이 몸이 부서지고(요19:31-37은 이 점에서 다르다) 피를 흘리면서 처절하게 당하시게 될 그의 임박한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켜 하신 말씀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상징적 견해에 대한 주요한 반론은 떡에 대한 말씀은 떡을 뗄 때가 아니라 나누어 줄 때 하신 것이며 포도주는 유월절 식사의 앞선 부분에 부었다는 것이다. 또한 떡을 떼었다는 사실에도 아무런 특이한 점이 없으며 '떡을 떼다' 는 것은 식사를 나눈다는 유대인의 일반적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견해는 헬라어 soma(소마, 몸)는 '몸' 만이 아니라 '인격' 을 뜻하는 아람어 gip를 표시한 것으로 예수님은 '이것은 내 인격, 내 진정한 자아라' 하신 것과 같으며, 그의 백성이 식탁의 교제를 반복하는 때 부활하신 주님으로 이들과 교제를 계속하시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러나 예레미아스(Jeremias)는 달만(Dalman)의 이 제안에 반대하면서 피와 짝을 이루는 것은 소마(몸)가 아니라 사르크스(sarx, 살)이며 아람어로는 bisri('나의 살'혹은 '나의 육체')라고 하였다.
주님의 제정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 가장 귀중한 단서는 음식과 음료가 유월절 의식에서 행한역할에서 찾아야 한다. 히긴스의 해석에 따라 우리는 제정의 말씀을 주님 자신이 주요한 식사 전후의두 결정적인 지점에서 유월절 의식 순서에 추가하신말씀으로 볼 수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과 예언자적 상징으로 유월절 의식의 원래의 의미가 이제는 초월되었음을 말해주신다. 주님은 구약의 예표를 성취시킨 유월절 양이시다(고전5:7), 떡과 잔을가지시면서 하신 그의 말씀과 행동은 새로운 의미를알려주는 비유들이다. 떡은 그의 주권적 말씀 아래서 하나님의 구속 목적을 위해 드려지는 그의 몸의비유가 된다(참조, 히10:5-10). 그리고 죽음에서 쏟은그의 피는 구약의 희생제사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식탁의 축복의 잔에서 표상되고 있다. 이로부터 이 잔은 예루살렘에서 성취된(눅9:31) 새 출애굽의 기념으로서 새로운 의의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주의 만찬의 요소들의 기능은 유월절 음식의 기능과 비교된다. 매년 절기 때마다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건져주셨던 조상들과 현실감 있게 역동적으로 결합하게 된다. 식탁 위의떡은 옛적 유대인들이 먹었던 '고난의 떡' (신16:3,유월절 학가다에서 해석된 대로)으로 여겨야 한다.떡을 먹는 자는 자신이 그 옛날 민족의 첫 세대 때애굽의 횡포에서 해방된 것처럼 생각하여야 한다(Mishnah, Pesahim 10. 5) 다락방에서 출발한 주의식탁에서 새 이스라엘인 교회는 새 언약의 백성(렘31:31 이하)으로 모여 단번에 드려진 제사의 증거물들(tokens)과 새롭게 마주하게 되며, 죄에서 출애굽하고 하나님의 유월절 희생양의 귀중한 죽음으로구속받았던 그 경험을 되살리게 된다.
2. 떡을 떼며. 사도행전의 초기 교회에는 식탁교제에 대한 언급들이 여기저기 나타나며, 예컨대행2:42,46에는 '떡을 떼며' 라고 나와 있다. 행20:7에도 교제의 식사를 가리키는 동일한 구절이 사용되고 있다(27:35의 경우는 제의적 식사가 아닌 보통 식사를 묘사한 것이다). 사도행전에 잔에 대한언급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중시한 리츠만(H.Lietzmann)은 대담한 가설을 제안하였다. 그는 이런 예루살렘 교제 식사가 성례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부족하지만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본래적인 성례형태라고 주장하였다. 이 교제 식사는 떡을 떼는이와 비슷한 유대인 관습에서 시작된 교제 식사였으며, 사실상 주님이 군중을 먹이셨던 갈릴리 선교때의 공동 식사와 주님과 제자들이 종교 모임(habūrāh)을 가졌던 공동 식사의 연장이었다는 것이 그의 가설이다. 예루살렘 의식의 주제(동기)는 예수님의죽음이 아닌, 높임받으신 주님이 그들 가운데 불가시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속죄적 의의를 강조하는 고전 11장의 주의 만찬은 영광받으신 주님으로부터 특별 계시를 받았던바울의 새로운 기여였다고 리츠만은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교한 가설은 불필요한 것이다.바울이 주의 만찬을 새롭게 혁신했다는 암시는 찾아내기 힘들다. 잔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중요한것이 아니며, '떡을 뗀다'는 이름이 교제의 식사 전체를 가리키는 반(半)전문적인 표현일 수가 있다.주의 만찬의 초기 형태에 의미가 있는 것은 기쁨의분위기이며, 이 기쁨의 분위기는 갈릴리 식사에서오는 것이라기보다 부활 이후의 주님의 현현에서오는 것이다. 부활 이후의 주님의 현현은 많은 경우 승리하신 주님과의 식사와 결부되어 있다(눅24:3035,36-48; 21:90];10:41;3:20).
3. 바울의 주의 만찬. 갈릴리 선교 때의 공동식사는 고린도 교회의 애찬(agapè or love feast,고전11:20-34)으로 발전적으로 계승되었던 것으로 보는 편이 낫다. 고린도 교회의 의식은 두 부분으로구성되며 먼저 건강을 위해 공동으로 식사를 한 후에 주의 만찬을 엄숙한 의식으로 거행하였다. 고린도 교인들의 모임에서는 탐욕, 이기심, 술취함, 포식과 같은 무절제한 행동이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하여 엄중하게 경고했던 바울은 후대교회에서 시행되었던 것과 같이 공동식사(애찬)와주의 만찬을 분리시키려 했던 인상이 짙다. 배고픈사람은 집에서 먹고 주의 식탁에는 경건하고 자성하는 마음으로 임하라는 것이 바울의 경고이다(고11:22,30-34).
바울은 그의 독특한 주의 만찬의 가르침에서 주의 만찬을 하나님의 구속 목적에 확고히 정착시켜놓음으로써 그 의의를 고양시킨다. 유월절 의식이 옛 언약 아래서 하나님의 구속의 자비를 선포하듯이 주의 만찬은 주의 죽으심을 선포하는 것이다(고전 11:20). 바울은 또한 잔과 떡을 나누는 식탁의 내적 의미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으로 설명한다(고전10:16), 구성원들이 떡 한 덩어리를 함께 나누는 매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앉아있는 것이기에 바울은 여기에서 교회의 하나됨을 발견한다. 복음 전승에서와 같이 영광 중에 오실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의미도 여기에 부가되어 있다. 고전 16:22의 마라나타(Maränathā)는주의 만찬의 배경과 잘 어울리며, 이 서신은 '주여어서 오소서' (개역성경은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하는 기원으로 끝나고 있는데, 이것은 이 서신을 회중에게 낭독한 후에 주의 만찬을 거행할 무대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4. 다른 신약 자료. 우리가 이미 지적한 곳 외에는 신약에서 주의 만찬을 직접 증언하고 있는 곳이 별로 없다. 히6:4;13:10과 같은 곳에서 주의 만찬에 대한 암시를 찾아볼 수 있다. 요한복음은 가버나움 회당에서 생명의 떡에 관해 하신 예수의 말씀을 길게 소개하고 있는데(요6:22-59) 많은 학자들은 이를 후대 교회의 주의 만찬 전승과 관련시키고 있다. 벧후2:13과 유12은 애찬을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매우 적은 자료와 미약한 내용을 제외하고는 신약은 초창기 교회들의 주의 만찬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 주요한 이유는 주의 만찬이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시행되어 길게 설명할 대상이 아니었던 데 있다.
주의 만찬 의식의 복잡다단한 발전 과정에 대해서는 2세기 이후의 자료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주장1/-하다 say

자기의 주의나 의견 따위를 굳게 내세우는 것이나 또는 그 의견을 의미한다(스10:4). 사두개파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다(눅20:27).

주장2/-하다 charge

일반적으로는 어떤 일을 책임지고 맡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대상15:22;대하34:12), 성경에서는 때때로 '다스림'을 의미하는 9) 사용되기도 하였다. 특별히 평강이나(골3:15) 죄악(시19:13;119:133), 또는 사망(롬6:9)과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마음의 주인이 되어서 사람을 사로잡거나 지배합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주재/-하다 Lord

책임지고 맡아서 처리함, 또는 그 사람. 통치자와 통치를 포괄하는 말로서, 성경에서는 거의가 다 하나님을 가리키며(단5:23), 모든 왕의 통치자(시22:28;단2:47), 군대의 주재(단8:11),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세계를 다스리는 분으로(창14:19;마11:25;눅2:29;행17:24) 묘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때로는 사람에 대하여 쓰이기도 하는데, 이때는 지도자나 통치자를 의미하며(출2:14), 나라에 대하여 쓰일 때는 '나라가 일어나 통치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스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