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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죽 / 죽음 / 준가 / 준공 / 준령

죽 pottage

곡식에 물을 많이 붓고 끓여서 먹는 음식으로 배고픈 에서 야곱에게 한그릇의 팥죽 대신으로 장자권을 넘겨준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창25:29).

죽음 death 

죽음이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히9:27), 죽음은 또한 별 반항없이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요11:16). 하지만 다른 한 면으로 보면 죽음은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의 대가이기 때문이다(롬6:23), 그래서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성경에서는 두 가지 관점이 모두 나타나므로 그 어느 것도 간과되어서 안된다. 죽음이 학적으로 볼 때 필연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죽음은 단순히 동물들이 죽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1. 육체적 죽음.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몸이 죽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육체가 쇠약해지고 결국에는 없어져 버린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죽음이 죄의 결과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2:17).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롬5:12)라고 말하고, 다시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사건을 좀더 주의깊게 살펴보면,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바로 그날에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로마서 5-6장에서 바울은 아담의 죄를 통하여 들어온 죽음과,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가져온 생명을 대비시키고 있다. 지금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육체적인 죽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상태에 대한 것이지 육체적인 사건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이끌어낸 우리의 결론은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이 육체의 죽음 이상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 점과 함께 우리는 죄, 그리고 죽음과 관련된 성경구절들이 육체적인 죽음을 약화시키지 않는다고 하는 생각도 받아들여야 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였다는 것과, 그 형벌은 육체적인 면과 영적인 면 모두를 포함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관하여 무잇을 말할 수 있을 만큼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의 조건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지 않다. 만일 그의 몸이 우리의 것과 같았다면, 그때에도 죽음을 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만일 같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의 몸이 무엇과 같았을지 알아낼 방법이 없으며, 따라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죽지 아니할 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
죽음이란, 전인(全人)을 포괄하는 어떤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은 하나의 몸으로서 죽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의 존재 전체로서, 한 사람으로서 죽는다. 그는 하나의 영적 존재 그리고 육체적 존재로서 죽는다. 성경은 이 두 가지 양면을 뚜렷이 구분하지 않는다. 육체적인 죽음은 필연적으로 죄가 가져오는 더욱 중대한 죽음에 대한 적절한 상징이요, 표현이요, 그것과의 연합이다.
2. 영적인 죽음. 이 죽음은 신의 징벌이다. 우리는 이미 로마서 6:23이 죽음을 '죄의 삯', 즉 죄의 대가로 여기고 있는 것을 살펴보았다. 바울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 (롬 1:32)을 알고 있는 어떤 죄인에 대하여 말할 수 있었다. 요한이 '사망에 이르는 죄' (요일5:16)를 언급한 것의 밑바탕이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법의 사상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이 극도로 두려운 것임을 알게 해준다. 동시에 역설적으로 이것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사람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운명으로 짜여진 옷감 속에 갇혀 있지 않다. 일단 한번 죄를 범하였다면, 이에 대하여 조처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과정을 지배하신다. 그분께서 죽음이 죄의 형벌이라고 정하셨다면, 그분께서 또한 죄인된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로 결정하셨다.
때때로 신약성경은 '둘째 사망' (계2:11. 참고. 유12절)에 대하여 언급함으로써 죄의 심각한 결과를 강조한다. 이것은 랍비적인 표현으로서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마25:41), '영벌' (영생과 대조됨, 마25:46등과 같은 구절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최후는 죽음, 심판, 잃게됨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된다. 그 최후를 위의 것들 중 어느하나와 동일시하는 것은 분명 현명하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동일하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무시무시한 것으로 생각되는 상태라는 것이다.
때로는 이러한 것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관점에서도 모순이라고 반박된다. 여기에는 심오한 신비스러움이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반론은, 죽음이 하나의 사건인 동시에 상태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육신의생각은 사망이요" (롬8:6)라고 기록하였다. 그는 육신의 생각이 죽음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곧 죽음이라고 말한다. 그는 덧붙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7절). 동일한 진리가 다른 방법으로 씌어졌다. 요한이 이르기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3:14).죽음은 일종의 상태이다라고 하는 진리를 이해할 때, 우리는 회개하지 않은 존재가 구원받는 것이불가능함을 안다. 그러한 구원은 용어상 모순이다.구원을 위하여 사람은 반드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야 한다(요5:24).
3. 죽음에 대한 승리. 죽음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하나 흥미로운 것은 강조점이 생명에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성구사전을 찾아본다면 헬라어 '네크로스'가 죽은 상태 또는 그와 비슷한 상태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것에 대하여 가장 많이 사용되었음을 발견한다. 성경은 모든 실재를 직시하는 것과 같이 죽음을 직시한다. 그러나 관심은 생명에 있다. 죽음은 사람들이 그것으로부터 구원되는 바와 같이 다소부수적으로 다루어진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본성을 입으셨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히2:14).
마귀의 능력은 언제나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욥2:6; 눅12:5). 마귀는 죽음의 절대적인 관리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반대인 죽음은 마귀의 고유한 영역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종지부를 찍으셨다. 히브리서 말씀에서처럼, 그분께서 사탄을 무찌르신 것은 바로 사망으로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없애신 것은 사망을 통한 것이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롬6:10), 그리스도 없는 죽음은 최고의 대적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멀어진것에 대한 상징인, 궁극적인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데죽음을 이용하셨다. 그분이 죽으셨으므로 사람들이 산다.
신약성경이 성도들에 대하여 '죽는다' 가 아니라'잠잔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있는 것이다(예. 살전4:14). 예수도 죽음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을 갖고 계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죽음은잠자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대하여 승리하신 정도는 그의 부활로 나타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앎이로라”(롬6:9). 부활은 위대한 승리의 사건이며, 신약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승리의 기록들이 여기에서부터 기원한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주' (행3:15)이시며,'죽은 자와 산 자의 주' (롬14:9)이시요, '생명의 말씀'(요일1:1)이시다. 죽음에 대한 그의 승리는 완전하다.그리고 그의 승리는 그의 백성들에게 유용하다. 사망의 멸망은 확실하다(고전15:26,54이하;계21:4). 둘째 사망은 성도에게 아무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계2:11;20:6). 이러한 입장에서, 신약성경은 영원한 생명을 영혼불멸로서가 아니라 몸의 부활이라는 말로서이해한다. 죽음이 패하는 것의 최후와 완전함을 글로더욱 잘 설명할 수는 없다.
거기에는 영광스러운 미래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현재가 있다. 성도는 이미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갔다(요5:24;요일3:4). 그는 '죄와 사망의 법' 에서 해방되었다(롬8:2). 죽음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뗄수 없다(롬8:38이하). 예수는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8:51). 이와같은 말들은 생물학적 죽음의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예수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 성도는 죽음의 상태에서 모두 옮겨갔다는진리를 가르쳐 준다. 성도는 새로운 상태로 옮겨졌다. 이는 쉽게 생명으로 묘사된다. 성도는 올바른 경로를 따라서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정문을 통과한다. 그러나 고통이 따른다. 예수의 죽음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준가 goodly price

제 값어치에 알맞는 값을 의미한다(창23.9;11:13). 스가랴 선지자는 백성들이 정해서 준 준기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졌다(11:13, 공동번역 '후하게 받은 품삯', 새번역 '알맞는 삯').

준공 finish

어떠한 과정이 온전히 마쳐진 것을 의미하는데, 성경에서는 성막(출39:32), 성전(대하8:16, 망대(눅14:28)와 같은 건축물의 완공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준령 high hill

높고 가파른 고개를 지칭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내리실 복을 언급하면서 '높은 산과 준령에 개울과 시내가 흐를 것' 이라고 표현하였다(사30:25, 공동번역 ‘높은 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