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냐1 Hananiah
1.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했던 당시에 함께 활동한 기브온 출신의 거짓 선지자로 앗술의 아들이다(렘28:1). 그는 예레미야의 예언, 즉 유다가 바벨론을 섬기는 기간인 70년이 마친 후 바벨론과 열방들이 받을 심판 예언에 반대하여(렘25:12), 2년이 차기 전에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취해진 노획물이 회복되고, 포로들이 돌아오며 바벨론의 힘이 꺾여질 것이라고 성전에서 공공연히 선언했기 때문에 예레미야에게 비난을 받았다(렘28장). 또한 그는 그의 예언을 상징적인 행동으로 증명했는데, 그것은 유다가 바벨론을 섬겨야 살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상징하기 위해 그의 목에 메었던 멍에를 취하여 그것을 부러뜨리는 행동이었다(27:2-3,12;28:10). 그러나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다' (28:15), '금년에 죽으리라' 는 예레미야의 예언은 두 달 후에 하나냐의 죽음으로 사실임이 증명되었다(17절).
2. 스룹바벨의 아들이며 블라다와 여사야의 아버지(대상3:19,21).
3. 베냐민 지파사삭의 아들(대상8:24-25).
4. 다윗 시대에 조직된 찬양대의 열여섯번째 지도자 중 한 사람(대상25:4,23).
5. 웃시야 왕의 군대장관 중 한 사람(대하26:11).
6. 이방여인과 결혼하였다가 처자를 내보낸 베배자손 중 한사람(스10:28).
7. 향료 제조업자로서 옛문(공동번역 '신시가문')부근에서 넓은 벽에 이르기까지 보수한 자(느3:8,30).
8.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경비하도록 맡긴 영문의 관원, 그는 진실한 사람으로서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느7:2).
9. 느헤미야 때에 법대로 살기로 언약서에 서명한 백성의 두목들 중 한 사람(느10:23).
10. 요야김 제사장 때에 스룹바벨, 예수아와 함께 바벨론에서 돌아온 예레미야 족속의 족장으로 예루살렘 성곽 낙성식에 참석한 자이다(느12:12,41).
11. 유다 왕 여호야김 치하의 고관인 시드기야의 아버지(렘36:12).
12. 예레미야를 반역자로 체포한 문지기 두목인 이리야의 조부(렘37:13).
13. 포로 중에 있던 다니엘의 동료 중 하나로 환관장에 의해 사드락으로 개명되었다(단1:6-7).
하나냐2 Hananiah
바벨론 포로 당시 다니엘의 세 친구 중 한 사람인 사드락의 히브리 이름(단 1:6-7,11,19,2:17).
하나넬 망대 tower of Hananeel
느헤미야 때에 수리된 망대(느 3:1:12:39)로 예루살렘 북쪽 성벽에 위치해 있다(렙31:38;슥14:10). 이곳은 적군이 성전 측면으로 다가오는 것을 지키는 곳이었다.
하나니 Hanani
1. 선지자 예후의 아버지(왕상16:17;대하19:2:20:34)이며, 그 또한 선견자로 아람 왕 벤하닷과 동맹을 맺으려는 유다 왕 아사를 비난하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대하 16:7-10).
2. 다윗 왕 때 24반열로 구성된 찬양대에서 열여덟번째 반열을 맡은 헤만의 아들(대상25:4,25).
3. 에스라 시대에 살았던 임멜 자손으로 이방 여인과 결혼했던 제사장 중 한 사람(스10:20). 포로에서 귀환한 후에 아내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4. 느헤미야의 동생으로 느헤미야에게 멸망당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알려 주었으며, 하나냐와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렸다(느1:2;7:2).
5. 레위 사람으로 느헤미야에 의해 낙성된 예루살렘 성벽 낙성식에서 악기를 잡았다(느12:36).
하나님 God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는 그분을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명제는 모든 종교의 토대와 영감을 이룬다. 처음 것은 믿음의 명제이고, 두번째 것은 경험의 명제이다. 하나님께서는 과학적 증명의 테두리 안에 제한되시는 분이 아니므로 우리의 믿음이 요구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의 피조물을 초월하여 계시기 때문에 그는 오직 자신의 계시에 의해 알려질 수 있다. 기독교는 우리가 하나님을 성경 안에서 자신의 계시에 의해서 인격적 하나님으로 알 수 있다고 하는 점에서 다른 종교와 구별된다. 성경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 아니라 그의 활동들 속에서 그 자신을 계시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성경의 계시는 그 본질에 있어서 점진적이고, 또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의 충만함에 도달한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스스로를 개시하셨다는 견지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에 관하여 몇 가지 단언을 내릴 수 있다.
1. 하나님의 존재 (His being). 그의 존재방식에 있어서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한다. 그의 피조물들은 그를 의존하지만 그는 완전히 피조물과는 독립적이다. 그는 생명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우주에 생명을 주고 그 자신 안에 생명의 근원을 갖고 있다. 초기 성경속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존재의 비밀이 모세에게 게시되었다. 그때에 모세는 호렙 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을 만났다(출3:2). 이 사건에서 주목할 것은 '떨기나무가 타고 있었으나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세에게 있어서 이것은 불이 그의 주변 환경에 독립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불은 스스로 타고 있었다. 하나님의 본질적 존재가 바로 이와같은 것이다. 그는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는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다. 하나님 존재의 이와 같은 특성은 아마도 그의 고유한 이름인 여호와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 즉 '나는 내 안에 존재를 가진 자이다'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인식은 이사야가 본 하나님에 관한 환상 속에서 암시된다.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40:28-29). 하나님은 주는 자이고, 그의 모든 피조물들은 받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는 이 신비에 대하여 명확한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5:26. 이것은 생명의 독립성이 신성의 두드러진 특징이라는 것이다. 성경 전체에 걸쳐서 하나님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 즉 생명있는 것과 생명없는 것들의 근원으로서 창조자와 생명의 시여자이다. 그만이 홀로 자신 안에 생명이 있다.
2 하나님의 본성(His nature). 그의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시다. 우주의 창조자로서 자신을 계시할 때에 하나님은 암흑에서 빛을, 그리고 흔돈에서 질서를 가져오는 영으로 표현된다(창1:2-3). 그리스도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우리의 예배의 대상임을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르쳤다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4). 또한 하나님의 본성을 순수한 영과 하나님의 영으로 자주 언급한다. 그는 모든 영들의 아버지로 불리고(히 129),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 이라는복합어로도 자주 사용된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과 영적인 그의 피조물들을 구분해야 한다.우리가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시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과 같이 부분적으로 영이고, 부분적으로 육체적인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형태나 부분이 없으신 단지 영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육체적 부분을 갖고 있지 않다. 성경이 하나님을 눈, 귀, 손, 발을 갖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이러한 육체적 용어가 전달할 수 있는 의미를 우리에게전달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물질적 용어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 관하여전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불완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은 제한되거나 국한적인 존재가 아니고 완전한 존재이다.
우리가 하나님은 무한한 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경험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음을 말하는것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즉 지식과 능력에 제한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제한이 없고 그의본성의 모든 부분도 제한이 없다. 시간에 대하여 하나님의 무한성을 '영원' 이라고 부르고, 공간에 대한 그의 무한성을 '무소부재', 지식에 대한 그의 무한성을'전지' 라고 하며, 능력에 대한 그의 무한성을 '전능'이라고 부른다. 그의 무한성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피조물을 초월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영으로서의 그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떨어져 있음을 말한다. 그는 소위 우리가 말하는 자연에의해 갇혀 있지 않고 무한히 그것 위에 있는 것이다.하나님의 지역적, 일시적 나타냄을 강조하는 성경 구절들조차도 세상과 구별되는 존재로서, 즉 세상의 창조자와 재판관으로서의 그의 고귀와 전능을 강조한다(참고. 사40:12-17). 동시에 하나님의 무한성은 그의내재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가 그의 창조 세계 어디에나 계시고, 그의 능력이 어디에나 미친다는 것이다.그는 세상과 무관하게,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을 구경하는 것과 같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유기적이고무기적인 모든 것 속에 퍼져 있고, 안에서 밖으로, 원자의 중심으로부터 그리고 사상과 생명과 감정의 가장 내부로부터 행하시며, 원인과 결과를 지속시킨다.
이사야 57장과 사도행전 17장과 같은 구절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양면을 발견할수 있다. 이사야 57:15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은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기하며 기록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라는표현으로 나타나며, 동시에 그의 내재성은 '통회하고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라는 표현으로 드러난다. 바울도 그가 아덴에서 전도할 때에 하나님의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초월성에 관하여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4)라는 말 속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의 내재성에 관하여는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27-28)라는 말 속에서 드러난다.
3. 하나님의 속성 (His character). 하나님은 인격적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합리적이고, 자의식이 있고, 자기 결정적 즉, 지적이며 도덕적인 분이라는 것이다. 최고의 지성으로서 그는 우주의 모든 합리성의 근원이다. 하나님의 이성적 피조물들은 독립적 특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초월성과 내재성에 있어서 신적인 특성을 소유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그의 백성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인격적 하나님을계시한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인격적 관계에서만 가능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을 보여주고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속성에 관하여 하듯이 하나님의 어떤 지적이고 도덕적인 특성들을 서술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들을 지적인 것과도덕적인 것, 또는 공유적인 것과 비공유적인 것, 또는관계적인 것과 비관계적인 것 등의 항목 아래 분류하는 시도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분류 방식에 어떤 지지도 하고 있지 않다. 아무튼 하나님은이러한 모든 속성들보다도 무한히 위대하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들은 우리에게 그의 속성들에 관한 암시를 준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들이 그의 백성들의 필요의 상황 속에서 주어졌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속성을 인간 상황에 합당하게하나님이 자기를 드러내신 것으로 보는 것이 성서적계시에 더욱 충실해 보인다. 즉 비참한 현실에 임한하나님의 연민, 형벌의 상황속에 임한 오래참음, 죄악의 상황에 임한 은혜, 통회의 때에 임한 자비 등은 하나님의 속성들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 맺은관계를 나타낸다. 이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본성의 풍부 속에서 각각의 속성을 드러내는 불변의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정의 없이는 사랑도 없다. 의 없이는 자비도 없다. 만약 하나님의 속성들 중에서 모든 것에포함되고 모든 것에 해당하는 하나의 속성이 있다면,그것은 그의 거룩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거룩한 사랑, 거룩한 연민, 거룩한 지혜 등으로 열거될 수 있다.
4. 하나님의 의지 (His will). 하나님은 주권적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그의 계획을 세우시고 그것을그의 정한 시간에 그의 방식으로 행하신다는 것이다.하나님의 주권은 그의 최고의 지식, 능력 그리고 지혜에 대한 표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가 독단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는 그의 모든 속성들과 조화를이루며 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주권은 그의 능력과 선함을 나타내며 모든 존재의 최종적 목표이다.그러나 인간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하는 하나님의의지와 하나님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정하는 그의 의지는 구분이 있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하나님 자신이 앞으로 일어나게 할 것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법령적 의지’ (Decretive Will)와 그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마땅히 행할 의무들을 명하는 하나님의 '명령적 의지'(Preceptive Will)를 구분한다.
하나님의 법령적 의지는 항상 완성되지만 그의명령적 의지는 자주 불순종 되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일어나는 모든 것, 즉 그가 적극적으로 일어나게 하는 것이나 또는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용하는 것의 최종적 근거로 생각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적극적 의지와 허용적 의지 사이의 구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죄가 세상에 들어온것은 하나님의 허용적 의지에 해당한다. 왜냐하면죄는 그의 거룩함과 선함과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적극적인 영역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자유가 행사되도록허용되는 영역이 있는 것이다. 성경은 두 영역이 같이 활동하고 있음을 말한다. 느부갓네살에 의해 말하여진 구약에 흐르는 분위기는 이렇다 :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단4:35).
신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가 인간의 불신앙에 의해서 거부되는 예를 만나게 된다. 그때에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발하였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및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23:3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것이 그의 영원한 목적을 향하여 가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간구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성을 적절하게 조화시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우리는 인간의 행위를 지배하는 모든 법칙들에 대한하나님의 지식과 지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지탱하시는 의지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가르쳐준다.'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기동하며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새가 공중에서 자유롭고, 물고기가 물속에서 자유하듯이 사람은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5. 하나님의 실재 (His reality). 그의 본질적 삶에있어서 하나님은 교제이다. 이것은 아마도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에 관한 최고의 계시일 것이다. 즉, 하나님의 삶(Life)은 영원토록 그분 안에서 이루어지는 동등하고, 구별된 세 위격의 교제이며 하나님께서는 도덕적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본질적으로 자신의 소유였던 교제를 그것들에게까지 넓히고 계셨다. 이것은 아마도인간을 창조할 때에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잘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1:26. 이것은 자신을교제로 계시할 뿐만 아니라 교제의 삶을 그의 형상을따라 만들어진 도덕적 피조물에 개방하여 그것을 즐거워하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다. 그러나인간은 범죄함으로 이 거룩한 교제를 상실하였고, 하나님은 그것을 인간에게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셨다.세 위격 안의 하나님은 우리의 회복을 위하여, 우리를부르시는 선택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구속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그의 교제로 우리를 재창조하시는 거듭남의 사랑 안에서 일하신다. 이것이 아마도 하나님의 계시, 즉 구원의 대단원일 것이다.
6. 하나님의 아버지됨 (His Fatherhood). 하나님은 하나의 위격(位格)이기 때문에 그는 인격적 관계를맺을 수 있고, 그 중에서 가장 가깝고 친근한 관계는아버지의 관계이다. 아버지됨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하여 지칭한 가장 보편적인 관계이다. 신학에서이것은 특별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첫번째 위격에 관련된다. '아버지' 라는 말이 성경에서 하나님께 적용되는 관계로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번째는 창조적 아버지됨(Creational Fatherhood)이다. 하나님과 그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의 근본적인 관계는 생명의 선물과 관련된 자연적 관계속에서 가장 충만하고 적절한 예를 발견한다. 말라기 선지자는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신실할 것과 서로를생각하라고 요청하면서 질문한다 :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말2:10). 또한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께 그의백성들을 버리지 말라고 간청하면서 울부짖는다 :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사64:8). 그러나 특별히 이 관계가 요구되는 것은 인간의 영적인 본성을 위해서이다. 히브리서 12:9에서 하나님은 모든 '영들의 아버지' 라고 불리고, 민수기 16:22에서는 '모든 육체의 생명(영)의 하나님'이라고 불린다. 바울은 아덴에서 전도할 때에 인간은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우리는 신의 소생' (행17:29)이라는 시인 아라투스의 말을 인용하여나무나 돌로 만든 우상을 섬기는 이성적 사람들의 비행위를 지적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피조물됨은 하나님의 아버지됨의 상응적 표현이다. 즉 창조자 아버지 없이는 한 사람도 존재할 수 없다.
두번째는 신정적 아버지됨(Theocratic Fatherhood)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말한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전체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약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였고, 이스라엘은 자녀로서의 마땅한 의무를 요구 받았다. '내가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말1:6, 그러나 언약 관계는 그것의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구속적이기 때문에 이것은 신적인 아버지됨에 관한 신약의계시의 전조로 간주될 수 있다.
세번째는 발생적 아버지됨(Generative Fatherhood)이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두번째 위격, 즉 하나님의아들, 그의 독생자에게 해당되는 관계이다. 그러므로이것은 독특한 것이고 어떤 피조물에도 적용되어서는안 된다. 그리스도는 지상에 있을 동안 특별히 자신과관련된 이 관계에 관하여 자주 언급했다. 하나님은 영원히 그의 아버지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본질적이고 무시간적인 관계의 표현이다. 예수께서열두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 그 자신과 그들을 포함하여 '우리 아버지' 라는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마리아를 통한 부활의 메시지에서 그는 두 가지 구분되는 관계들을 나타내었다 :'나의 아버지(하나님) 곧 너희 아버지(하나님)' (요20:17).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전자가 후자의 기초가 된다. 그의 아들됨은 독특한 경우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아들됨의 기초가 된다.
네번째는 양자적 아버지됨(Adoptive Fatherhood)이다. 이것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관련된 구속의 관계이다. 구속의 맥락에서 이것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즉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과 성령이 신자들 안에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대한 이 관계는 모든 신자들에게 있어서 기초가 된다.바울은 이것을 갈라디아의 신자들에게 회상시키고 있다 :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6. 이와같은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연합 안에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는 것이고, 그들은 그들에게 자녀됨을 부여하시는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활동의 주체가 된다. 하나는 객관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관적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자들의새로운 지위(칭의와 관계(양자됨) 때문에 그들은 신적 본성의 참여자가 되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난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복음서의 서두에서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3). 그러므로 신자들은 자녀 관계에 속한 모든 특권들을 선물받는다 : '자녀이면 또한…후사니'(롬8:17).
하나님의 아버지됨에 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이 관계를 믿는 자들에게 국한시켰음이 분명하다. 어디에서도 그는 이 관계가 하나님과 불신자들 사이에서 존재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는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적 아버지됨을 암시한 적도 없을 뿐아니라 자기를 흠잡는 유대인들을 지칭하여 "너희는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8:44) 라고 말하였다.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가장 자비로운측면, 즉 그의 사랑, 그의 신실성, 그의 돌보심을 이와같은 아버지됨의 관계에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자녀가 아버지에게 마땅히 해야 하듯이 우리가 자녀로서 하나님께 공경, 신뢰 그리고 사랑의 순종을 돌려야 하는 책임을 말하여 준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우리 아버지'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공경과 겸손을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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