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 Herod
예수의 지상 사의 기간 동안과 그의 출생 바로 직전의 기간, 그리고 그의 부활 후의 기간에 팔레스타인을 다스렸던 로마의 이리 통치자들을 일컫는 이름이다.
헤롯 왕조는 혈통상 이두매인이었던 안티파터가 팔레스타인에 세운 것이었는데, 이 이두매인은 에서의 후손인 에돔의 혈통에 속한다. 안티파터는 B. C. 47년에 로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줄리어스 시저가 세운 유대 총독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 중에서 둘을 지배자의 위치에 임명하였다. 이렇게 임명된 아들 중 하나가 유대의 통치자로 세움 받은 헤롯이었으며, 그는 '헤롯 대제' 로 알려졌다.
1. 헤롯 대제(B.C. 37-4). 헤롯 대제라는 칭호는 사실 헤롯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일부 학자들에 의해 안티파터의 장자로 인식된 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어떤 비상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무자비한 전사였으며, 교활한 고집쟁이였고, 능란한 외교가였다. 그리하여 로마의 통치자들은 그가 자신의 반대자들을 물리치고 유대 백성들 사이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자질들은 황제에게 깊이 충성하는 면까지 갖추어서, 그로 하여금 로마에서 사는 사람들과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인상을 남기게 만들었다. 헤롯은 갈릴리의 통치자가 된 후에 재빨리그 전 지역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확고히 하였다. 이에 33년 동안 그는 황족의 측근이자 로마의 동맹자로서 지낼 수 있었다. 후에 헤롯은 유대의 왕으로 입명되었는데, 그는 이 지역에서 유대의 백성들을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직접적인 통치는 매우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는 외교 정책을 견지해야만 했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그를 이방인(두메인으로 취급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자치적인 민족적 권리에 그의 통치가 큰 위협이 된다고 느끼게 되었다.
처음에 헤롯은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감정과 종교적인 감정을 잘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징세나 헬레니즘, 종교 같은 그러한 문제들을 서서히 풀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노력들을 통해서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더욱 개선해 보려고 하였는데, 그러한 노력 가운데 하나가 예루살렘 성전에 로마군들이 들어와서 더럽히는 일을 못하게 막아 준 것이었다. 헤롯 대제는 중앙집권화된 관료정치와 잘 지어진 성곽, 요새 및 외국의 용병들을 통해서 자신의 권위와 영향력을 견고히 확립해 나갔다. 그는 자신의 통치권을 계속 지켜나가기 위하여서 왕좌의 합법적인 상속자로 여겨질 가능성이 있는 모든 남자 유아들을 살해하였다. 그의 처마리암네 또한 그의 의심많은 성격과 야수성 때문에 희생된 사람이었다.
헤롯이 다스리는 동안 그의 영토는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의 사업과 조직적인 행정 능력으로 인하여 그곳에는 중요한 건물들이 여럿 세워지게 되었다. 또한 헬라화된(헬라) 사상이 문학, 예술 및 체육 경기들을 통하여 팔레스타인에 흘러 들어왔다. 그가 이루어 놓은 주요한 건축 계획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운 것이었는데, 요한 복음 2:20에 따르면 이 건물은 46년 동안에 지은 것이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이야말로 헤롯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때로 헤롯은 그의 정책을 강제적이고도 잔인하게 이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의 반란이 점점 더 두려워져서 어떠한 저항이라도 철저하게 짓눌러 버렸다. 또한 그의 인격적인 문제점들까지 점점 더 커져서 B. C. 14년에 이르러서는 그 왕국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쇠퇴는 거의 그의 인격적이며 가정적인 문제점들 때문에 초래된 것이었다. 헤롯이 자기 아내 마리암네 1세를 살해한 사건은 현저하게 그를 따라다니며 늘상 괴롭히는 유령 같은 것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마리암네와의 결혼에서 얻은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라는 두 아들이 자신들의 아버지 헤롯이 이미니를 죽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더욱 복잡하게 심화되었다. 결국 B. C. 7년에 헤롯은 결국 두 아들 모두를 죽이고 만다. 이 일의 배후에는 헤롯의 장자 안티파터의 모함도 끼어 있었다. 당시에 헤롯에 관하여 "헤롯의 아들이 되느니 차라리 그의 돼지가 되는게 낫다” 라는 말까지 돌았었다.
헤롯의 병적인 증세가 점점 더 악화되자, 그의 가족 내에서 왕위의 계승을 놓고 격렬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가 했던 열번의 결혼과 그 결혼의 결과 생겨난 15명의 자녀들이 실제적으로 그러한 투쟁을 발생하게끔 만들었다. 그 와중에서 한 아들 안티파터는 왕위계승의 적임자였던 다른 두 아들 아켈라오와 빌립에 대해 헤롯에게 모함하여 그로 하여금 두 아들에 대하여 편견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장자였던 안티파터(Antipater)는 B. C. 4년경 헤롯이 죽기 바로 직전에 헤롯으로부터 왕위 찬탈에 대한 의심을 받아 처형되기에 이른다. 결국, 이러한 사건의 결과 헤롯의 작은 아들 안디바가 유일한 계승자로 우선권을 쥐게 된다. 그러나 헤롯은 후에 자신의 뜻을 바꾸어서 아켈라오를 왕으로 세웠다. 안디바와 빌립은 상대적으로 아래의 위치인 (사)분봉왕 또는 지배자로서 작은 영토를 얻게 되었다.
헤롯이 죽은 후에 그의 유지에 대해서 로마에서는 논란이 일었다. 그 논란의 결과 아켈라오는 일단 이두매와 유대, 사마리아의 지방 통치자로 남게 되고 대신 그 자신이 지도자로서의 자질만 입증해 보인다면 왕으로 세워 주겠다는 로마의 약속을 얻게 된다.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이 되었고 빌립은 북쪽 지역에 있는 가울라닛, 드라고닛, 바타네아, 파네아 등의 분봉왕이 되었다. 예수는 헤롯 대제의 통치 기간 중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당시 동방의 박사들은 헤롯에게 와서 “유대인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라고 물었으며 이러한 일은 헤롯의 질투심 많은 성격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마태의 설명에 따르면 헤롯은 예루살렘 지역의 모든 남자 유아들을 죽임으로써 예수를 제거하려고 하였다(마2:13-16). 그러나 이러한 헤롯의 비열한 행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는데 그것은 요셉과 마리아가 꿈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아이를 데리고 이집트로 도망하라는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들은헤롯이 죽을 때까지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마2:13-15).
2. 헤롯 아켈라오(B.C.4-A.D. 6). 아켈라오는 그의 아버지 헤롯의 능력은 하나도 이어받지 못하고, 대신그의 악덕만을 이어받았다. 그는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다. 일부 열심당원들에 의해일어나기도 했던 유대인들의 폭동은 아주 잔인하게분쇄되었다. 안디바와 빌립은 그러한 아켈라오의 방법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들은 로마에 불만을 표하였다. 이 사건 뒤에 유대의 사절단이 로마를방문하여 같은 불만을 진정하였고, 그 결과 아켈라오를 그 권좌에서 밀어내어 로마(혹은 비엔나?)로 추방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성경에서 아켈라오에 대한 언급은 마태복음 2:22에 단 한번 나타난다. 마태는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부터 갈릴리로 가려 할 때 아켈라오가 유대의 지배자였으므로 그 지역을 통과하기를두려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3. 분봉왕 헤롯 빌립. 빌립은 그의 아버지 헤롯 대제로부터 북부 지역을 물려 받았는데(눅3:1), 헤롯의살아있는 아들 중에 가장 나았었음이 틀림없다. 그의길고도 평화로운 통치 기간 동안 가이사랴 빌립보 도시를 포함하여 수많은 건축 사업을 벌였다. 또한 그는벳새다를 헬라 도시로 재건축하여 아우구스투스 시저의 딸 줄리아의 이름을 기념하여 줄리아스라고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
4. 헤롯 안디바(B.C. 4-A. D.39). 안디바는 헤롯 대제의 또 하나의 아들로서 갈릴리와 베레아의 분봉왕이었다. 그는 예수의 생애와 사역 기간 동안 그 지역을 다스린 '헤롯' 이었다. 헤롯 안디바는 처음에 페트라의 아라비아 왕 아레타스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복 동생 빌립 1세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얼이 빠져 버렸다. 그 둘은 당시에 결혼하긴 하였지만 눈이 맞아서 함께 달아나 버렸다. 이러한 추악한 사건을 세례 요한이 호되게 비난하였다(마14:4;막6:17-18;눅3:19). 비록 안디바가 분명히 세례 요한에 대하여 어느 정도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는공개적인 비난의 책임을 물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에 왕의 생일 파티에서 안디바는 헤롯빌립의 딸 살로메에게 소원을 말하라 하여 그 소원을들어주게 된다. 헤로디아의 사주를 받은(막6:19) 살로매는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였다(마14:6-12;막6:2129). 그는 이미 맹세를 한 바였고, 그의 초대자들 앞에서 체면을 깎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헤롯은 요한의 처형을 명하였다.
안디바와 예수가 관계를 가진 것은 세례 요한의 사역과 동시대였다. 예수의 인기와 기적적인 능력 때문에 안디바는 예수가 혹시 다시 살아난 세례 요한이 아닌가 싶어 그 환각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신약 성경의 기록은 예수와 안디바와의 관계가 긴장 속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예수의 인기와 가르침은 안디바에게 위협적인 요소가 되었는데,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일러준 바에 따르면 안디바는 그것 때문에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눅13:31). 예수는 헤롯을 '여우'라고 부름으로써(눅13:32), 그의 교활함과 속임이 가득한 술수들을 인정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안디바와 예수의 다음 번 만남은 예수의 수난 때에 일어났다(눅23:6-12). 누가는 헤롯이 예수에게서 사형에 처할만한 어떠한 죄목도 발견할 수 없었으며, 그래서 그는예수를 빌라도에게 돌려보내어 최종 결정을 받도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통치 기간 동안에 안디바는 그 자신의 정치적인 문제들을 겪게 된다.안디바가 헤로디아에게 빠져 버리기 전에 자신의 딸을 그의 아내로 주었던 나바티아 왕 아레타스는 이러한 모욕을 되갚기 위하여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왔다.안디바의 군대는 패배하였다. 그 결과 다른 문제들까지 겹쳐서 안디바는 정치적인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안디바는 결국 로마 황제에 의해 프랑스의 이름없는 지역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5. 헤롯 아그립바 1세(A. D. 37-44). 아그립바는 안디바가 로마의 호의로부터 버림을 당한 후에 그의 영토를 취하였다. 아그립바의 권세와 책무는 그의 능력을 훨씬 넘어서서 확장되었다. 황궁에서 자라난 젊은이로서 그는 제멋대로이며 사치하는 생활 양식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로마의 좋은 곳에 거할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매혹적이고 지적이었다. 로마황제 칼리굴라가 살해되자 아그립바는 글라우디오가황위를 얻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충성은 곧 보답 받았다. 글라우디오는 아그립바의 현재의 위치를 확고히 해 주었으며, 거기에 유대와 사마리아의 영토까지 더해 주었다. 그러한 결과 아그립바는 그의 조부 헤롯대제가 다스렸던 지역만큼이나 큰 왕국의 통치자가되었다.
아그립바 1세에 대해서는 성경에 그 기록이 매우적다. 사도행전 12:1-23에 있는 언급을 통해서 볼 때아그립바가 초대 기독교회와 그 지도자들을 대적함으로써 유대 지도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12:20-23에 기록된 대로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그가 처참하게 죽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후에 팔레스타인은 로마가 평정하여 질서를 세울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여러 해 동안 혼돈 속에서수많은 투쟁으로 얼룩졌다.
6. 헤롯 아그립바 2세(A.D. 50-100). 아그립바 2세는 너무 젊어서 그의 아버지 아그립바 1세의 모든 영토를 통치할 만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리라고 로마로부터 판단되었다. 그리하여 글라우디오 황제는 쿠스피우스 파두스를 팔레스타인의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A. D. 53년에 아그립바 2세는 이들 영토의 일부분에 대해서는 합법적인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신약 성경에서 아그립바 2세에 대한 유일한 언급은사도행전 25:13-26:32에 나오는데, 여기서 그는 가이사랴에서의 바울의 구류 사건을 다루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그립바는 바울의 변명을 들었으나 바울은 로마에 호소하였다. 그 때문에 아그립바는 바울을 석방할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다. 아그립바는 A. D. 70년에 로마 황제 티투스의 지휘하에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직전에 일어난 유대의 폭동에 휘말렸다. 그는 A, D, 100년에 죽을 때까지 베스파시안 황제로부터 재임명을 받아 계속 팔레스타인을 다스렸다. 그의 죽음은 팔레스타인의 유대 백성들의 사정으로 볼 때 곧 헤롯 왕조의종말을 고하는 것이었다.
헤롯당 Herodians
예수 시대에 헤롯왕조를 지지하던 집단으로 반로마적 성향을 가진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로마에 대하여 우호적이었다. 이들은 신약에서 바리새인과 함께예수를 대적하던 세력으로 등장한다(마22:16, 반로마적인 바리새인들이 로마에 대하여 우호적인 이들과협력한 것은 아마도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정치적 질문을 던져 가이사에게 불충한 대답을 얻어낸 후 메시야 운동에 반대적이며(막3:6) 친로마 성향을 가진 이들을 이용해서 로마에 예수를 고소하기 위함인 듯하다(마22:16;막12:13).
헤르몬산 mount Hermon
이 산은 안티 레바논 산맥의 남쪽 지역에 위치해 있는 팔레스타인에서는 가장 높은 산으로 세 개의봉우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최고봉의 높이는 2,813m에이르고 그 길이가 32km나 뻗어있다. 시돈 사람들은이 산을 '시론'으로, 아모리인들은 '스닐’ 로 불렀으며(신3:9),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온산으로 불렀다(신4:48) 가나안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에 의해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던 이곳은(참고, 바알헬몬 - 삿3:3;바알 -삿3:5) 여호수아가 아모리인들로부터 정복했으며, 이스라엘 영토의 북쪽 경계를 이루었다(신3:8;수11:17).이 산은 일년 내내 눈이 덮여 있으며, 여기에서 녹은얼음과 눈이 요단 강의 근원이 되었다. 오늘날 이곳은다메섹에서 남서쪽으로 48km 떨어진 '예벨 메스 쉐이도' 또는 '쉐이크 산'으로 추정된다. 한편 헤르몬 산이 가이사랴 빌립보와 가깝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이곳을 예수께서 변화하신 '높은 산' (막9:2)으로 여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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