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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K BIBLE

헬라어 로마서 4장 전체 원어 원문 성경 공부 주석 강해 설교 해설 해석

 

티 운 에루멘 휴레케나이 아브라암 톤 프로파토라 헤몬 카타 사르카

 

개역개정,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새번역,1 그러면 육신상으로 우리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아브라함에 관하여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말성경,1 그러면 우리가 육신에 따라 우리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톨릭성경,1 그렇다면 혈육으로 우리 선조인 아브라함이 찾아 얻은 것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영어NIV,1 What then shall we say that Abraham, our forefather, discovered in this matter?
영어NASB,1 What then shall we say that Abraham, our forefather according to the flesh, has found?
영어MSG,1  So how do we fit what we know of Abraham, our first father in the faith, into this new way of looking at things?
영어NRSV,1 What then are we to say was gained by Abraham, our ancestor according to the flesh?
헬라어신약Stephanos,1 τι ουν ερουμεν αβρααμ τον πατερα ημων ευρηκεναι κατα σαρκα
라틴어Vulgate,1 quid ergo dicemus invenisse Abraham patrem nostrum secundum carnem
히브리어Modern,1 ועתה מה נאמר על אברהם אבינו מה זה השיג לפי הבשר׃


 

성 경: [4:1]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아브라함의 의()]

󰃨 그런즉 - 2:1에서 언급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처럼 별 의미 없이 다른 화제로 전환하고자 사용된 접속사이다. 자세한 것은 2:1 주석을 참조하라. 3:19-31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하고 이제 본절부터는 이신 칭의의 구체적 실례로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다.

󰃨 육신으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사르카'(*)는 직역하면 '육신을 따라'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1) 하나는 '우리 조상'과 연결된 수식어로 해석하는 경우이며 (2) 또 하나는 동사 '얻었다'를 수식하는 부사구로 해석하는 경우이다. 이는 사본에 따라 다소 차이를 두고 있는데 만약 '얻었다'를 뜻하는 헬라어 '휴레케나이'(*)'아브라암'(*, '아브라함')앞에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면 '카타 사르카'(1)의 의견에 따라 자연적인 혈연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반면 '휴레케나이''헤몬'(*, '우리') 뒤에 위치시키는 소문자 사본들에 의하여 해석한다면 '카타 사르카'(2)번의 의견에 따라 윤리적인 의미, 다시 말해서 '육신의 원리를 따라' 또는 '율법의 행위를 따라'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될 것이다.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J. Murray) 바울이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육신'의 개념을 증거로 제시한다. 바울은 '육신'이라는 말을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의 본성'과 동의어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8:4, 5, 12;고전 1:26) 때로는 '육신으로'라는 표현을 '썩어질 육체의 소욕과 충동에 의하여'라는 경멸적인 의도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순수한 자연적 출생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증거할 때(1:3) 또는 다른 사람들을 육신적인 형제 관계로 표시할 때 등이다(9:3;고전 10:18). 이와 같은 의미에서 '육신'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면 바울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부르면서 혈연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육신'이라는 말을 추가한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를 따를 때에는 '우리'라는 말이 유대인만을 칭하는 말인가 ? 라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본서에서 '우리'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 보통 모든 이방인들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이다(3:31). 한편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Lenski, Calvin, Meyer, Godet, Hodge)'육신으로'라는 말을 '얻었다'라는 동사에 연결시킴으로써 '육신''행위' 또는 '율법'의 의미로 취급한다. 이 경우 본절의 뜻은 '아브라함이 육신의 행위로 무엇을 얻었는가 ?' 라는 의문문 형태가 된다. 본 구절의 앞 뒤의 문맥으로 보면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는 행위로 말미암아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2;3:27) 사실이므로 본절의 '육신으로'라는 의미는 유대인의 조상된 아브라함의 혈연적 관계를 뜻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윤리적인 의미에서 '자랑할만한 것' 또는 '율법의 행위'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더 논리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얻었다 하리요 - '얻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휴레케나이'(*)는 완료형으로 '발견했다'(have found), '얻었다', '만났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문제는 이 단어가 어떤 사본에서는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혹자는 이 단어의 삽입에 의문을 제기하여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Lightfoot, Murray). 이 견해를 취할 경우 '육신으로'는 자연스럽게 '우리 조상'과 연결된다. 그리고 '우리'란 대명사는 바울과 유대인 특히 로마에 있는 유대인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유대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이미 3:9에서 밝힌 바 있다. 또한 2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이란 구절은 '얻었다'는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절에서 '얻었다'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어야 바울의 의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에이 가르 아브라암 엨스 에르곤 에디카이오데 에케이 카우케마 알 우 프로스 데온

 

개역개정,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새번역,2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그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말성경,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면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없습니다. 
가톨릭성경,2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영어NIV,2 If, in fact, Abraham was justified by works, he had something to boast about--but not before God.
영어NASB,2 For if Abraham was justified by works, he has something to boast about; but not before God.
영어MSG,2  If Abraham, by what he did for God, got God to approve him, he could certainly have taken credit for it. But the story we're given is a God-story, not an Abraham-story.
영어NRSV,2 For if Abraham was justified by works, he has something to boast about, but not before God.
헬라어신약Stephanos,2 ει γαρ αβρααμ εξ εργων εδικαιωθη εχει καυχημα αλλ ου προς τον θεον
라틴어Vulgate,2 si enim Abraham ex operibus iustificatus est habet gloriam sed non apud Deum
히브리어Modern,2 כי אם נצדק אברהם מתוך המעשים לו התהלה אך לא לפני האלהים׃


 

성 경: [4:2]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아브라함의 의()]

󰃨 아브라함이 - 바울이 아브라함을 설명한 것은 유대주의자들도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인정하고 있으며 또한 선민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을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교 랍비들의 문헌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3살부터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하였으며 할례와 율법을 예비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그들 역시 창 15:6의 말씀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의 공로를 증명하려고 했으며 특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공로'에 의하여 후사(後嗣)가 되어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Hendriksen). 그 당시의 유대교적 가르침보다 성경을 중요시한 바울은 '나는 너를 열방의 조상으로 세웠다'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을 칭의를 받는 신앙의 본질적인 모범으로 인정함으로써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따라야할 신앙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원을 돌이켜 보는 믿음 속에 있는 반면 아브라함은 장차 되어질 일들에 대하여 믿음으로 기다렸다는 것에서 서로의 차이를 발견할 수는 있으나 본질적인 ''의 개념에 있어서 양자는 동일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

󰃨 행위로써 -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직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지 않았으나 바울은 율법의 원리 곧 행함의 원리를 아브라함 시대까지 적용시키고 있다. 이로써 바울은 (1) 믿음의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부터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2) 행위의 원리가 단순히 모세에 의해서 주어진 율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암시해 주고 있다.

󰃨 만일...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 바울은 '에이'(*, '만일')에 부정 과거 직설법 수동태 동사 '에디카이오데'(*)를 연결시킴으로 하나의 조건문을 만들었다. 이 조건문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1) 혹자는 논리적이며 형식적인 가정으로서 현실적이며 실재적인 근거에 있어서는 '없느니라'는 부정(不定)을 유도하는 조건문으로 인정하는 반면, (2) 혹자는 바울이 부정 과거 가정법을 사용하여 단회적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조건문으로 해석한다(Lenski).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은 '행위로'(*, 여스 에르곤)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일차적으로는 자랑할 것이 있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려 하였던 구체적인 행위의 결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렌스키(Lenski)는 바울의 주장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3:19-31에서 말한 것과) 증명하기 위해 '여스 에르곤''여스 에르곤 노무'(*, '율법의 행위')를 서로 구별하려 한다. 신앙의 행위로서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만 '율법의 행위'는 칭의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절의 '행위'는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자랑과 구분이 되는 것으로서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아니라 순수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행위'인 바, 바울이 자신을 자랑할 수 있었던 것(고후 11;21;12:12)과 같은 성격의 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이 주장에 따른다면 우리는 자칫 믿음을 공로로 인정하는 유대 랍비적인 교훈에 빠지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1절 주석 참조). 칭의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에는 신앙이라는 인간의 공로조차 아무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편 전자를 주장하는 자는(J. Murray)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자랑할 근거가 있다는 형식적인 논리를 인정하나 그 논리가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적용될 수 있느냐하는 문제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왜냐하면 본절 하반절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브라하미 자랑할 것이 없다라는 구절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바울은 가정적인 추론 속에서 아브라함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보다 확실하게는 가정문을 반증(反證)하기 위해 다음절에서 창 15:6을 인용하고 있다.

󰃨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 본문에는 누구에게 자랑하는 것인지 그 자랑의 대상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혹자는 '자랑할 것'이란 말을 '영광받을만 한 것'으로 대치할 것을 주장한다(Meyer). 그렇지만 그렇게 의도적으로 본문의 의미를 바꾼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대로라면 영광을 주는 대상이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데, 곧바로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는 구절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문 전체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수정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하나님 앞에서도 자랑할 것이 있겠으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

 

 

티 가르 헤 그라페 레게이 에피스튜센 데 아브라암 토 데오 카이 엘로기스데 아우토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개역개정,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새번역,3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하였습니다. / ㉡창 15:6 ㉢원어로는 '그것이 그의 의로 여겨졌다'
우리말성경,3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라고 합니다. 창15:6 
가톨릭성경,3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하였습니다.
영어NIV,3 What does the Scripture say? "Abraham believed God, and it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영어NASB,3 For what does the Scripture say? "AND ABRAHAM BELIEVED GOD, AND IT WAS RECKONED TO HIM AS RIGHTEOUSNESS."
영어MSG,3  What we read in Scripture is, "Abraham entered into what God was doing for him, and that was the turning point. He trusted God to set him right instead of trying to be right on his own."
영어NRSV,3 For what does the scripture say? "Abraham believed God, and it was reckoned to him as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3 τι γαρ η γραφη λεγει επιστευσεν δε αβρααμ τω θεω και ελογισθη αυτω εις δικαιοσυνην
라틴어Vulgate,3 quid enim scriptura dicit credidit Abraham Deo et reputatum est illi ad iustitiam
히브리어Modern,3 כי הכתוב מה הוא אמר והאמן אברהם ביהוה ויחשבה לו צדקה׃


 

성 경: [4:3]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아브라함의 의()]

󰃨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 일반적으로 문어체에서는 '기록된 바'(*, 카도스 게그라프타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한다(3:10). 본절에서 바울이 의문문의 형식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한 것은 구어체적(口語體的)인 것으로 독자들과 보다 밀접한 관계에서 지금 논하고 있는 주제에 대하여 심사숙고해 보기 의함이다.

󰃨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 본 구절은 창 15:6을 인용한 것이다. 혹자는 본절을 약 2;21과 배치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Luther). 그런데 엄격한 의미에서 약 2:21은 창 26:5과 관계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야고보 사도는 믿음 자체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르는 삶(행위)에 강조점을 두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아무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은 창 15:5에서 하나님을 통해 선포된 약속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에 대한 신뢰이다. 아브라함 자신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이룰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약속을 성취시키실 뿐이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신뢰를 두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진 약속의 성취는 그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믿음을 통해서 값없이 주어진 것이다.

󰃨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 믿음과 행위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구약에 기록된 또 하나의 구절을 극복해야 한다. 시편 106:31은 비느하스의 열정적인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이 '저에게 의로 정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으며 비스하스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스하스가 의롭게 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경건치 아니한 자들도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칭의와 구별이 되어야 한다. 비느하스의 행위는 앞에서 살펴본대로 믿음의 한 열매로서 주어진 결과로 보아야 한다(J. Murray). 경건치 아니한 자, 또는 할례받지 아니한 자들의 칭의를 논하는 문제에 있어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믿음의 선한 열매로 인한 결과'를 구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편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로기스데'(*)'로기조마이'(*)의 부정과거 수동태로서 (1) 의롭다 여김을 받은 수동적 행위를 의미하며 (2) '의롭게 만들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그렇게 평가해 주었다'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을 정도로 인격(person)에 변화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과의 신분적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았다는 뜻이다.

 

 

토 데 에르가조메노 호 미스도스 우 로기제타이 카타 카린 알라 카타 오페일레마

 

개역개정,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새번역,4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을 은혜로 주는 것으로 치지 않고 당연한 보수로 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말성경,4 일하는 자에게는 품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않고 정당한 대가로 여겨지나 
가톨릭성경,4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품삯이 선물이 아니라 당연한 보수로 여겨집니다.
영어NIV,4 Now when a man works, his wages are not credited to him as a gift, but as an obligation.
영어NASB,4 Now to the one who works, his wage is not reckoned as a favor, but as what is due.
영어MSG,4  If you're a hard worker and do a good job, you deserve your pay; we don't call your wages a gift.
영어NRSV,4 Now to one who works, wages are not reckoned as a gift but as something due.
헬라어신약Stephanos,4 τω δε εργαζομενω ο μισθος ου λογιζεται κατα χαριν αλλα κατα το οφειλημα
라틴어Vulgate,4 ei autem qui operatur merces non inputatur secundum gratiam sed secundum debitum
히브리어Modern,4 הנה הפעל לא יחשב לו שכרו על פי החסד כי אם על פי החוב׃


 

성 경: [4:4]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일하는 자에게는 - 본 구절에 대해 혹자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열심으로 추구해야 할 선행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행적을 내세워 자기 공로를 자랑하려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Calvin). 본절 전체가 일상적인 고용 관계에 대한 것을 비유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점에서는 1차적으로 삶을 위해 일하는 일꾼을 의미하며, 2차적으로는 다음절에 기록된 '일을 한 것이 없는 자''믿는 자' 등과 대조를 이루는 개념으로서 단지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을 의미한다.

󰃨 그 삯을 - 일꾼이 요구하는 ''(*, 미스도스)은 문자적으로 일해준 것에 대한 품삯을 의미하지만(10:7;딤전 5:18) 은유적으로는 '보상'(reward)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외에도 신약에는 삯을 뜻하는 말로 '와소니온'(*)이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이는 눅 3:14에 병사의 급료라는 뜻으로 쓰였으며 본서에서는 죄의 ''(6:23)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일꾼이 그의 일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며 당연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이 정당한 요구를 ''(*, 오페일레마)이라는 개념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은 매우 특이한 용법이다.

󰃨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 ''(*, 오페일레마)''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였으나 '은혜'(*, 카리스)와는 대조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 ''은 히브리어로 '맛솨아'(*)로서 주로 모세의 율법에 나타나는 바, 채무 관계를 지적하는 데 쓰여졌다(22:25). 무엇을 빌린 자는 반드시 갚아야 했으며 만일 채무자가 정당하게 갚지 못했을 경우 채권자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고 채무자로부터 생계 수단이 되는 어떠한 것들을 전당물로 잡을 수 있었다(24:6). 신약에서 '오페일레마'는 구약에서와 같이 사업적인 용어로 쓰이기도 하였으며(7:41) 특히 비유 속에서는 채무자를 용서하거나 또는 죄인으로 취급할 때 쓰였다. 채무자는 빚을 다 갚기 전에는 옥에 갇혀 있어야 했으며(12:57-59) 또한 송사(訟事)하는 자에 의하여 재판관에게 고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본절에서 일하는 자가 삯을 요구하는 것은 마치 채권자가 송사하는 것과 같이 마땅히 받아야 할 돈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빚을 탕감받은 자들이 탕감받은 것을 은혜로 여기는 것과는 다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은 자랑이며 동시에 정당한 자기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바울은 일하는 자들의 정당한 삯을 언급함으로써 다음절에 나오는 일하지 아니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용서와 칭의(稱義)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에게 있어서 행위의 결과는 일꾼이 일한 것에 상응한 대가를 받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설 만한 자리가 없다. 오로지 행위의 주체인 자신의 자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토 데 메 에르가조메노 피스튜온티 데 에피 톤 디카이운타 톤 아세베 로기제타이 헤 피스티스 아우투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개역개정,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새번역,5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비록 아무 공로가 없어도, 그의 믿음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습니다.
우리말성경,5 일하지 않고도 경건치 않은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집니다. 
가톨릭성경,5 그러나 일을 하지 않더라도 불경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받습니다.
영어NIV,5 However, to the man who does not work but trusts God who justifies the wicked, his faith is credited as righteousness.
영어NASB,5 But to the one who does not work, but believes in Him who justifies the ungodly, his faith is reckoned as righteousness,
영어MSG,5  But if you see that the job is too big for you, that it's something only God can do, and you trust him to do it--you could never do it for yourself no matter how hard and long you worked--well, that trusting-him-to-do-it is what gets you set right with God, by God. Sheer gift.
영어NRSV,5 But to one who without works trusts him who justifies the ungodly, such faith is reckoned as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5 τω δε μη εργαζομενω πιστευοντι δε επι τον δικαιουντα τον ασεβη λογιζεται η πιστις αυτου εις δικαιοσυνην
라틴어Vulgate,5 ei vero qui non operatur credenti autem in eum qui iustificat impium reputatur fides eius ad iustitiam
히브리어Modern,5 אבל לאשר איננו פעל כי אם מאמין במצדיק את הרשע אמונתו תחשב לו לצדקה׃


 

성 경: [4:5]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일을 아니할지라도 - 삯을 위해서 일하지 않은 사람, 즉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가 아니라 의를 얻기 위해 아무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바울이 본절에서 의를 얻기 위해 아무 행위도 하지 않고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하여 계속 진술했듯이 오직 하나님은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신다. 4절과 비교해 볼 때, 이 믿음은 곧 하나님의 은혜로운 활동과 관련된다(2:8).

󰃨 경건치 아니한 자 - 이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 애쓰지 않는 자와 동의어지만 죄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그보다 더욱 강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이 용어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 주고 있다(Murray).

󰃨 의롭다 하시는 - '의로 여기시나니'(*, 톤 디카이운타)라는 현재 분사형 포현은 그 시제에 있어서 '믿는 자'(*, 피스튜온티)와 일치하는 것으로서 의롭다 여기시는 것이 철저하게 믿는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경건치 아니한 자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죄인에게도 임한다는 구원의 진리를 적용한 것으로서 아브라함에게 적용되었던 원리와도 일치한다.

 

 

카다페르 카이 다윋 레게이 톤 마카리스몬 투 안드로푸 호 호 데오스 로기제타이 디카이오쉬넨 코리스 에르곤

 

개역개정,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새번역,6 그래서 행한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사람이 받을 복을 다윗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6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사람의 복에 대해 다윗도 이렇게 말합니다. 
가톨릭성경,6 그래서 다윗도 하느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영어NIV,6 David says the same thing when he speaks of the blessedness of the man to whom God credits righteousness apart from works:
영어NASB,6 just as David also speaks of the blessing upon the man to whom God reckons righteousness apart from works:
영어MSG,6  David confirms this way of looking at it, saying that the one who trusts God to do the putting-everything-right without insisting on having a say in it is one fortunate man:
영어NRSV,6 So also David speaks of the blessedness of those to whom God reckons righteousness apart from works:
헬라어신약Stephanos,6 καθαπερ και δαβιδ λεγει τον μακαρισμον του ανθρωπου ω ο θεος λογιζεται δικαιοσυνην χωρις εργων
라틴어Vulgate,6 sicut et David dicit beatitudinem hominis cui Deus accepto fert iustitiam sine operibus
히브리어Modern,6 כאשר גם דוד מאשר את האדם אשר האלהים יחשב לו צדקה בלא מעשים באמרו׃


 

성 경: [4:6]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일한 것이 없이 - 이 말은 원문상으로 '행위와 상관없이'(*, 코리스 에르곤)라는 의미를 지닌다(without works, KJV). 바울이 거듭 강조하여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인간의 행위 내지 노력과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 '행복'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카리스몬' (*)'축복'이나 '행복'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특별히 이 단어는 단순한 '축복'이나 '행복'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에 강조점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복되다고 선포되는 것'이라고 의역하기도 했다(Black). 이 해석을 따를 때, 본절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이 받은 바 축복에 대한 다윗이 선포하기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사람이 받은 축복'이라는 구절은 그 속에 이미 하나님의 은총을 내포하며 동시에 믿음으로 참여한 모든 자들에게 임할 동일한 축복을 선언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카리오이 혼 아페데산 하이 아노미아이 카이 혼 에페칼뤼프데산 하이 하마르티아이

 

개역개정,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새번역,7 ㉣"하나님께서 잘못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덮어 주신 사람은 복이 있다. / ㉣시 32:1; 2
우리말성경,7 “주께서 불법을 용서하시고 죄를 덮어 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고 
가톨릭성경,7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가 덮어진 사람들!
영어NIV,7 "Blessed are they whose transgressions are forgiven, whose sins are covered.
영어NASB,7 "BLESSED ARE THOSE WHOSE LAWLESS DEEDS HAVE BEEN FORGIVEN, AND WHOSE SINS HAVE BEEN COVERED.
영어MSG,7  Fortunate those whose crimes are carted off, whose sins are wiped clean from the slate.
영어NRSV,7 "Blessed are those whose iniquities are forgiven, and whose sins are covered;
헬라어신약Stephanos,7 μακαριοι ων αφεθησαν αι ανομιαι και ων επεκαλυφθησαν αι αμαρτιαι
라틴어Vulgate,7 beati quorum remissae sunt iniquitates et quorum tecta sunt peccata
히브리어Modern,7 אשרי נשוי פשע כסוי חטאה׃


 

성 경: [4:7]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그 불법...복이 있고 - '불법'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하이 아노미아이'(*)이다. 이 말은 '율법'(*, 노모스)이란 말에 부정 접두어 '' (*)가 첨가되어 이루어진 파생어이다. 포괄적으로는 법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나 보다 정확하게는 '율법을 어긴 행위'를 가리킨다. 그리고 '율법을 어긴 행위'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죄로 규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에서 '불법'''는 동의어의 반복으로 보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하심을 받고'(*, 아페데산)라는 동사와 '가리우심을 받고'(*, 에페칼뤼프데산)라는 동사 역시도 동의어의 반복이다. 일반적으로 히브리 시문학에서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사용하여 앞절과 뒷절이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뜻을 강조하고 그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구체화시키곤 하였다(6:1). 한편 '아페데산''에페갈뤼프데산'은 둘다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축복의 상태를 나타낸다. 자신의 죄를 용서함 받거나 가리움 받는 것은 이미 과거에 성취되었으므로 그에게 남은 것을 성취된 구원 속에서 누려야 할 축복 외에 아무것도 없다.

 

 

마카리오스 아네르 후 우 메 로기세타이 퀴리오스 하마르티안

 

개역개정,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새번역,8 주님께서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실 사람은 복이 있다."
우리말성경,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않으실 사람은 복이 있다.” 시32:1-2 
가톨릭성경,8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죄를 헤아리지 않으시는 사람!”
영어NIV,8 Blessed is the man whose sin the Lord will never count against him."
영어NASB,8 "BLESSED IS THE MAN WHOSE SIN THE LORD WILL NOT TAKE INTO ACCOUNT."
영어MSG,8  Fortunate the person against whom the Lord does not keep score.
영어NRSV,8 blessed is the one against whom the Lord will not reckon sin."
헬라어신약Stephanos,8 μακαριος ανηρ ω ου μη λογισηται κυριος αμαρτιαν
라틴어Vulgate,8 beatus vir cui non inputabit Dominus peccatum
히브리어Modern,8 אשרי אדם לא יחשב יהוה לו עון׃


 

성 경: [4:8]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죄사함의 은총]

󰃨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 - 본절은 7절의 중복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사유(私有)하시는 은혜를 보다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앞절에서는 '불법이 사함을 받는 것', '죄가 가리움을 받는 것' 정도로 언급했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규정되는 ''조차 없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바울이 이신 칭의에 대해 설명할 때에 본 구절은 결정적인 논리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고 할 때 논리상 믿음이 의로 여겨지는 중간 과정이 생략되었다. 그 논리의 틈을 본절이 메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이 의로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 사람이 행한 죄악이 어떻게 여겨지게 되는 가에 대해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7절과 본절의 인용 구절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호 마카리스모스 운 후토스 에피 텐 페리토멘 에 카이 에피 텐 아크로뷔스티안 레고멘 가르 엘로기스데 토 아브라암 헤 피스티스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개역개정,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새번역,9 그러면 이러한 복은 할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내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리는 것입니까? 우리는 앞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9 그러면 이 복은 할례받은 사람에게만 내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할례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리는 것입니까?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라고 했습니다. 
가톨릭성경,9 그렇다면 이 행복이 할례 받은 이들에게만 해당됩니까? 아니면 할례 받지 않은 이들에게도 해당됩니까? 우리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고 말합니다.
영어NIV,9 Is this blessedness only for the circumcised, or also for the uncircumcised? We have been saying that Abraham's faith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영어NASB,9 Is this blessing then upon the circumcised, or upon the uncircumcised also? For we say, "FAITH WAS RECKONED TO ABRAHAM AS RIGHTEOUSNESS."
영어MSG,9  Do you think for a minute that this blessing is only pronounced over those of us who keep our religious ways and are circumcised? Or do you think it possible that the blessing could be given to those who never even heard of our ways, who were never brought up in the disciplines of God? We all agree, don't we, that it was by embracing what God did for him that Abraham was declared fit before God?
영어NRSV,9 Is this blessedness, then, pronounced only on the circumcised, or also on the uncircumcised? We say, "Faith was reckoned to Abraham as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9 ο μακαρισμος ουν ουτος επι την περιτομην η και επι την ακροβυστιαν λεγομεν γαρ οτι ελογισθη τω αβρααμ η πιστις εις δικαιοσυνην
라틴어Vulgate,9 beatitudo ergo haec in circumcisione an etiam in praeputio dicimus enim quia reputata est Abrahae fides ad iustitiam
히브리어Modern,9 ועתה האשור הזה העל המילה הוא אם גם על הערלה הלא אמרנו כי לאברהם נחשבה אמונתו לצדקה׃

 

성 경: [4:9]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할례의 의미]

󰃨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 바울은 죄인을 의인으로 간주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범위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지금 예로 들은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조상이므로 무할례자된 이방인이 이 축복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문제가 유대인에 의해 제기될 수 있다. 그래서 행위에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할례자인 유대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본절의 질문을 제기했다. 할례는 율법과 더불어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선민(選民)임을 보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바울은 본절에서 할례의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바울 논지의 핵심은 비록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중요시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칭의의 축복에 할례가 전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J. Murray). 바울은 이러한 논지를 본절의 질문을 제기함으로 더욱 확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 3절에서 언급했던 구절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3절에서와 같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게 되었던 시점으로 화제를 전환하기 위하여 반복되는 것이다.

 

 

포스 운 엘로기스데 엔 페리토메 온티 에 엔 아크로뷔스티아 우크 엔 페리토메 알 엔 아크로뷔스티아

 

개역개정,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새번역,10 그러면 어떻게 아브라함이 그러한 인정을 받았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기 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할례를 받은 후에 된 일이 아니라, 할례를 받기 전에 된 일입니다.
우리말성경,10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의로 여겨졌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때입니까? 아니면 할례를 받지 않은 때입니까? 할례를 받은 때가 아니라 할례를 받지 않은 때입니다. 
가톨릭성경,10 그러면 어떤 상황에서 그러한 인정을 받았습니까? 할례를 받은 다음입니까? 아니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입니까? 할례 받은 다음이 아니라 할례 받지 않았을 때입니다.
영어NIV,10 Under what circumstances was it credited? Was it after he was circumcised, or before? It was not after, but before!
영어NASB,10 How then was it reckoned? While he was circumcised, or uncircumcised? Not while circumcised, but while uncircumcised;
영어MSG,10  Now think: Was that declaration made before or after he was marked by the covenant rite of circumcision? That's right, before he was marked.
영어NRSV,10 How then was it reckoned to him? Was it before or after he had been circumcised? It was not after, but before he was circumcised.
헬라어신약Stephanos,10 πως ουν ελογισθη εν περιτομη οντι η εν ακροβυστια ουκ εν περιτομη αλλ εν ακροβυστια
라틴어Vulgate,10 quomodo ergo reputata est in circumcisione an in praeputio non in circumcisione sed in praeputio
히브리어Modern,10 ואין נחשבה לו אם בהיותו מהול או בעודנו ערל הן לא בהיותו מהול כי אם בערלתו׃


 

성 경: [4:10]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할례의 의미]

󰃨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 이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포스 엘로기스 데'(*)인데, 이를 직역하면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뇨 ?'가 된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해서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졌느뇨 ?'라는 질문이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답이 의롭다고 여겨지게 된 시점(時點)에 관한 것이므로 '어떻게'보다는 '언제'라고 번역하는 편이 적절하다.

󰃨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롭다고 여겨진 것은 할례 의식을 한 때로부터 20여년 전이었다(15:6;17:23, 24). 이 대답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할례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바울의 논리를 뒷받침해 주는 결정적인 단서이다. 15:1"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이 언급되어 있듯이 초대 교회 시대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들이 받은 바 우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예로 베드로는 이방인들(무할례자들)과 함께 애찬을 나누다가 할례자들이 들어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2:12). 이처럼 초대 교회 당시는 할례자와 무할례자에 대하여 구별하는 관습이 남아 있었고, 그로 인해 복음의 본질이 변질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바울이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의()의 전가(轉嫁)가 보편성을 지닌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팽배되어 있는 그러한 분위기에 대하여 명백한 복음적인 해결책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카이 세메이온 엘라벤 페리토메스 스프라기다 테스 디카이오쉬네스 테스 피스테오스 테스 엔 테 아크로뷔스티아 에이스 토 에이나이 아우톤 파테라 판톤 톤 피스튜온톤 디 아크로뷔스티아스 에이스 토 로기스데나이 카이 아우토이스 텐 디카이오쉬넨

 

개역개정,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새번역,11 아브라함이 할례라는 표를 받았는데, 그것은 그가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얻은 믿음의 의를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었으니, 이것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도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말성경,11 그가 할례의 표식을 받은 것은 할례를 받지 않은 때에 얻은 믿음의 의를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할례받지 않은 사람으로서 믿는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 돼 그들도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11 그는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에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확증하는 것으로서 할례라는 표징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할례를 받지 않고도 믿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움을 인정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영어NIV,11 And he received the sign of circumcision, a seal of the righteousness that he had by faith while he was still uncircumcised. So then, he is the father of all who believe but have not been circumcised, in order that righteousness might be credited to them.
영어NASB,11 and he received the sign of circumcision, a seal of the righteousness of the faith which he had while uncircumcised, that he might be the father of all who believe without being circumcised, that righteousness might be reckoned to them,
영어MSG,11  That means that he underwent circumcision as evidence and confirmation of what God had done long before to bring him into this acceptable standing with himself, an act of God he had embraced with his whole life.
영어NRSV,11 He received the sign of circumcision as a seal of the righteousness that he had by faith while he was still uncircumcised. The purpose was to make him the ancestor of all who believe without being circumcised and who thus have righteousness reckoned to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11 και σημειον ελαβεν περιτομης σφραγιδα της δικαιοσυνης της πιστεως της εν τη ακροβυστια εις το ειναι αυτον πατερα παντων των πιστευοντων δι ακροβυστιας εις το λογισθηναι και αυτοις την δικαιοσυνην
라틴어Vulgate,11 et signum accepit circumcisionis signaculum iustitiae fidei quae est in praeputio ut sit pater omnium credentium per praeputium ut reputetur et illis ad iustitiam
히브리어Modern,11 ואות המילה קבל לחותם צדקת האמונה אשר היתה לו בערלתו להיות לאב לכל המאמינים והם ערלים למען אף להם תחשב הצדקה׃


 

성 경: [4:11]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할례의 의미]

󰃨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 본절에서 바울은 그동안 문제시되었던 '할례'의 의미에 대해서 진술한다. 유대인들은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유일한 증표로 믿고 있었으나, 바울은 그들의 신학이 잘못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17:10, 11에는 할례가 '언약의 표징'(*, 세메이온 디아데케스)으로 언급되어 있다. '언약의 표징'이라는 것은 언약을 맺은 것에 대한 증거로 나타내 보이는 표시(sign)이다. 그리고 구약 시대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언약을 맺는 것은 쌍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것이었다(Robertson). 그러면서도 그 언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하여 취하신 은혜와 사랑의 증표이며 약속이었다. 따라서 할례가 '언약의 표징'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할례 이전에 베푸신 은혜와 사랑에 대한 증거이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 같이 할례에 내포된 은혜의 비밀을 간과하고 겉모양만 취하여 그것이 매우 귀중한 것처럼 자랑하였다.

󰃨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 ''(*, 스프라기스)은 신약에서 책을 봉()하거나(5:1), 도장 찍는 것과 같은 증표(딤후 2:19;7:2)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주로 모든 일을 결론짓는 마무리를 나타낼 때나 또한 어떠한 것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수의 무덤을 봉인하였다는 것도 그의 죽음이 확인되었다는 뜻이다. 예수의 부활이 확실한 것은 세상이 인봉을 통하여 그의 죽음을 확고하게 증명했기 때문이다(27:65). 이와 같이 인()이라는 것은 어떤 사건에 대한 진실성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특히 본절에서는 이미 무할례시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실을 확인하는 외적 보증의 의미로 이 용어가 쓰여졌다. 다시 말해서 할례는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의의 수단도 아니며 단지 이미 의롭게 된 것을 입증하는 표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표적은 성령의 오심(1:13;4:30)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함께 살아났다는 사실을 예표하는 세례라고 할 수 있다.

󰃨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 바르트(K. Barth)는 본절을 주석하면서 원()역사계와 역사계를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즉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원역사적인 사실의 믿음의 의가 역사계에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사건은 원역사적인 것 속에 파묻히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암시적으로 율법 폐기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율법은 원역사적인 하나님의 의가 현 역사 속에서 단순히 나타나진 것에 불과할 뿐 그 이상의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이 의의 전달 내지 계시로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했다(3:31). 성도의 신앙은 히 11:1에 언급된 바와 같이 원역사적인 것과 역사적인 실재가 동시적으로 의미를 지닐 때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된다. 예수의 천국 비유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도 원역사적인 실재임과 동시에 현 역사적인 실재이다(Ridderbos). 할례는 무할례시에 주어진 믿음의 의(원역사적인 것)가 현 역사 속에서 공표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연고로 구약 시대에는 할례가 의미있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므로 그 표는 단지 그리스도를 부각시키고 확증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따라서 할례 자체가 전혀 필요없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같이 그리스도 중심의 예언적 사건으로 그 의미는 항상 남아 있게 된다.

 

 

카이 파테라 페리토메스 토이스 우크 에크 페리토메스 모논 알라 카이 토이스 스토이쿠신 토이스 이크네신 테스 엔 아크로뷔스티아 피스테오스 투 파트로스 헤몬 아브라암

 

개역개정,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새번역,12 또 그는 할례를 받은 사람의 조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걸어간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말성경,12 그는 또한 할례받은 사람의 조상이 됐습니다. 곧 할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은 때에 가졌던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의 조상이 됐습니다. 
가톨릭성경,12 또한 아브라함은 할례 받은 이들의 조상입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에 걸어간 그 믿음의 발자취도 따라 걸었습니다.
영어NIV,12 And he is also the father of the circumcised who not only are circumcised but who also walk in the footsteps of the faith that our father Abraham had before he was circumcised.
영어NASB,12 and the father of circumcision to those who not only are of the circumcision, but who also follow in the steps of the faith of our father Abraham which he had while uncircumcised.
영어MSG,12  And it means further that Abraham is father of all people who embrace what God does for them while they are still on the "outs" with God, as yet unidentified as God's, in an "uncircumcised" condition. It is precisely these people in this condition who are called "set right by God and with God"! Abraham is also, of course, father of those who have undergone the religious rite of circumcision not just because of the ritual but because they were willing to live in the risky faith-embrace of God's action for them, the way Abraham lived long before he was marked by circumcision.
영어NRSV,12 and likewise the ancestor of the circumcised who are not only circumcised but who also follow the example of the faith that our ancestor Abraham had before he was circumcised.
헬라어신약Stephanos,12 και πατερα περιτομης τοις ουκ εκ περιτομης μονον αλλα και τοις στοιχουσιν τοις ιχνεσιν της εν τη ακροβυστια πιστεως του πατρος ημων αβρααμ
라틴어Vulgate,12 et sit pater circumcisionis non his tantum qui sunt ex circumcisione sed et his qui sectantur vestigia quae est in praeputio fidei patris nostri Abrahae
히브리어Modern,12 ולהיות לאב גם למולים אך לא לאשר הם נמולים לבד כי אם גם הלכים בעקבות האמונה שהיתה לו לאברהם בעודנו בערלתו׃



성 경: [4:12]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할례의 의미]

󰃨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것은 (1) 그가 처음으로 할례를 받아 혈통으로 자기에게서 난 자들에게 그 할례 의식을 전했으며, (2) 그 할례를 전할 때 할례만이 아니라 자기가 무할례시에 받았던 '믿음의 의'에 대한 것도 동시에 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1절만 떼어서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단지 무할례자의 조상이 되어 할례받은 유대인의 조상은 되지 않는다는 오해가 발생될 수 있다. 그래서 본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도 되는 이유를 설명하게 된 것이다.

󰃨 무할례 시에 가졌던 - 본절에서는 '할례받을 자들''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을 동일 선상에 놓고 있다. 할례받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없는 자는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듯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르지 않는 이방인 무할례자들도 당연히 아브라함의 후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할례 시'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인'이다. 따라서 무할례든 할례이든 그것이 결코 구원에 있어서 유리하거나 불리한 조건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1)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이며 (2) 또한 그 할례가 믿음으로 받았던 의를 '인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J. Murray). 바울이 할례 자체를 일방적으로 매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사실속에 잘 나타나며(16:3) 또한 할례를 믿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디도에게 할례를 행하지 아니한 사건 속에 잘 나타난다(2:3).

󰃨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 - 이 부류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다 포함된다. '자취'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크네신'(*)은 신약 성경에서 '보조'(步調;고후 12:18) 또는 '본이 될 만한 모범'(벧전 2:21) 등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갈라디아서에서는 예수의 '흔적'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하였다(6:17). 본절에서 '믿음의 자취'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던 삶의 흔적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8:39)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여기서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걸었던 그 신앙의 노선을 따라가라'는 의미이다. 이 가르침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됨을 시사한다. 한편 '좇는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토이케오'(*)'대오(隊伍)를 이루어' 또는 '줄을 맞추어 행진한다'라는 뜻을 가진 군사 용어로서 '일관성 있는 행함'의 의미로 번역되었다(5:25;3:16). 여기서는 아브라함의 발자취를 따르는 대열에서 낙오되지 않고 일관성 있게 전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 가르 디아 노무 헤 에팡겔리아 토 아브라암 에 토 스페르마티 아우투 토 클레로노몬 아우톤 에이나이 코스무 알라 디아 디카이오쉬네스 피스테오스

 

개역개정,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새번역,13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 곧 그들이 세상을 물려받을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3 아브라함이나 그의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약속은 율법으로 인해 된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의로 인해 된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영어NIV,13 It was not through law that Abraham and his offspring received the promise that he would be heir of the world, but through the righteousness that comes by faith.
영어NASB,13 For the promise to Abraham or to his descendants that he would be heir of the world was not through the Law, but through the righteousness of faith.
영어MSG,13  That famous promise God gave Abraham--that he and his children would possess the earth--was not given because of something Abraham did or would do. It was based on God's decision to put everything together for him, which Abraham then entered when he believed.
영어NRSV,13 For the promise that he would inherit the world did not come to Abraham or to his descendants through the law but through the righteousness of faith.
헬라어신약Stephanos,13 ου γαρ δια νομου η επαγγελια τω αβρααμ η τω σπερματι αυτου το κληρονομον αυτον ειναι του κοσμου αλλα δια δικαιοσυνης πιστεως
라틴어Vulgate,13 non enim per legem promissio Abrahae aut semini eius ut heres esset mundi sed per iustitiam fidei
히브리어Modern,13 כי לא על ידי תורה באה ההבטחה לאברהם ולזרעו להיותו ירש העולם כי אם על ידי צדקת האמונה׃


 

성 경: [4:13]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 - 이 약속은 창 17:4-8에 언급되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은 율법보다 430년 앞서 주어졌으며, 후에 생긴 율법이 이미 주어진 언약을 취소할 수 없었다(3:17).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약속은 율법에 선행하며, 약속의 원리를 따르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약속의 원리는 바울이 본절에서 진술하고 있는 바대로 '믿음의 의'뿐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이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세상의 후사'란 일차적으로 창 17:8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이 유업으로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창 17:4에 언급된 대로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이므로, 그의 신앙의 자취를 좇는 모든 민족이 후사가 되며 유업을 이을 자가 된다(3:29). 따라서 본절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하여 모든 땅의 족속들이 복을 받으리라는 보증'(Hendriksen)과 관련된 것임이 분명하다.

 

 

에이 가르 호이 에크 노무 클레로노모이 케케노타이 헤 티스티스 카이 카테르게타이 헤 에팡겔리아

 

개역개정,14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파기되었느니라 
새번역,14 율법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약속은 헛된 것이 됩니다.
우리말성경,14 만일 율법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상속자가 된다면 믿음은 무효가 되고 약속은 파기됐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4 율법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상속자라면, 믿음은 의미가 없어지고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영어NIV,14 For if those who live by law are heirs, faith has no value and the promise is worthless,
영어NASB,14 For if those who are of the Law are heirs, faith is made void and the promise is nullified;
영어MSG,14  If those who get what God gives them only get it by doing everything they are told to do and filling out all the right forms properly signed, that eliminates personal trust completely and turns the promise into an ironclad contract! That's not a holy promise; that's a business deal.
영어NRSV,14 If it is the adherents of the law who are to be the heirs, faith is null and the promise is void.
헬라어신약Stephanos,14 ει γαρ οι εκ νομου κληρονομοι κεκενωται η πιστις και κατηργηται η επαγγελια
라틴어Vulgate,14 si enim qui ex lege heredes sunt exinanita est fides abolita est promissio
히브리어Modern,14 כי אלו לבני התורה הירשה האמונה לריק תהיה וההבטחה בטלה׃


 

성 경: [4:14]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율법에 속한 자들 -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 하는 자들' 또는 '율법의 체계에 종속된 자들'을 의미하며 바울의 또다른 표현에 의하면 '율법의 종노릇하는 자들'로서 종의 멍에를 멘 자들을 뜻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도 오직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만 성취된다고 믿고 있는 자들이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펠라기우스(Pelagius)와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Roman Chatholic Church)는 하나님의 약속이 선행을 통해서 성취된다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만들었다. 이런 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들이며(1:7), 이렇게 전하는 자들에게 바울은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1:8, 9).

󰃨 만일...후사이면 - '후사'를 뜻하는 '클레로노모스'(*)'상속자'라는 의미로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어진 것을 물려받을 자를 뜻한다. 구약의 개념으로 상속자가 얻을 것은 (1) 약속의 땅 가나안(12:7;13:14, 15), (2) 믿음으로 자손된 이방인들을 포함하는 후손을 얻게 될 하나님의 축복, (3) 한 후손 메시야에 의한 세계 통치를 의미한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의 상속자라면 믿음은 의미를 잃게 되고 약속된 언약은 가치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세상의 상속자라는 주장을 한다(8:39). 한편 본절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과 믿음의 대립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약속으로 시작된 구원의 역사가 믿음에 의하여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것인데 유대인들은 이를 두고 바울이 시작과 성취 중간에 들어온 율법의 무용성(無用性)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5:20). 그러나 바울이 의도한 요점은 율법 무용론이 아니다. 다만 바울이 말한 것은 중간에 끼어 들어온 율법이 앞서 있었던 약속을 변경시킬 수 없으며 율법에 의하여 후사가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 '헛것이 되고'(*, 케케노타이)라는 것은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원문상 '그 속의 내용이 없어졌다'라는 뜻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라는 것이 무가치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믿음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의미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 내용 없는 것으로 변해 버린다면 약속도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는 약속은 효력을 발생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카테르게타이, '폐하여졌다') 또한 법적 신실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잃게 될 것이다. 만약 율법의 행위로 약속이 보증된다면 율법 이전에 이미 보증받았던 아브라함이 약속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그 약속에 의하여 성취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좇는 모든 믿음은 오히려 율법의 종이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율법으로만 약속이 보증되고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면 이스라엘의 신앙은 여타의 윤리 종교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호 가르 노모스 오르겐 카테르가제타이 후 데 우크 에스틴 노모스 우데 파라바시스

 

개역개정,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 
새번역,15 율법은 진노를 불러옵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습니다.
우리말성경,15 왜냐하면 율법은 진노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함도 없습니다. 
가톨릭성경,15 율법은 진노를 자아내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습니다.
영어NIV,15 because law brings wrath. And where there is no law there is no transgression.
영어NASB,15 for the Law brings about wrath, but where there is no law, neither is there violation.
영어MSG,15  A contract drawn up by a hard-nosed lawyer and with plenty of fine print only makes sure that you will never be able to collect. But if there is no contract in the first place, simply a promise--and God's promise at that--you can't break it.
영어NRSV,15 For the law brings wrath; but where there is no law, neither is there violation.
헬라어신약Stephanos,15 ο γαρ νομος οργην κατεργαζεται ου γαρ ουκ εστιν νομος ουδε παραβασις
라틴어Vulgate,15 lex enim iram operatur ubi enim non est lex nec praevaricatio
히브리어Modern,15 כי התורה מביאה קצף כי באשר אין תורה גם אין שם עברה׃


 

성 경: [4:15]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 율법은 행위의 완전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 이에 대한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고 저주를 선포한다(28:58ff.). 따라서 인간 편에서 볼 때 율법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죄와 저주의 근거로서의 기능만을 가진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받은 모세의 직분을 '정죄(定罪)의 직분'(고후 3:9)이라고 진술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율법의 저주'를 담당한 것이라고 선포했다(3:13).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인간들을 위해 의를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킬 수 없다.

󰃨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 쉬운 예로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의 법이 없다면 그 나라에 사는 백성은 아무런 범죄자가 되지 않는다. 오직 범죄자가 범죄자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은 그 나라의 법률에 따라서만 가능하다. 이처럼 법률이 있음으로써 범법자는 죄인으로 정죄받고 심판을 받는다.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은 율법에 따른 정죄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믿음의 원리에 따라서만 살았다. 또한 노아는 아브라함처럼 할례에 대한 규례도 받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인'으로 인정되었다(6:9). 그가 의인으로 또한 완전한 자로 칭함을 받은 것은 율법적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께 정죄를 받은 것(6:5)은 율법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율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디아 투토 에크 피스테오스 히나 카타 카린 에이스 토 에이나이 베바이안 텐 에팡겔리안 판티 토 스페르마티 우 토 에크 투 노무 모논 알라 카이 토 에크 피스테오스 아브라암 호스 에스틴 파테르 판톤 헤몬

 

개역개정,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새번역,16 이런 까닭에, 이 약속은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약속을 은혜로 주셔서 이것을 그의 모든 후손에게도, 곧 율법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도 보장하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우리말성경,16 그러므로 약속은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 곧 율법을 따라 사는 사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도 은혜로 이 약속을 보장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가톨릭성경,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영어NIV,16 Therefore, the promise comes by faith, so that it may be by grace and may be guaranteed to all Abraham's offspring--not only to those who are of the law but also to those who are of the faith of Abraham. He is the father of us all.
영어NASB,16 For this reason it is by faith, that it might be in accordance with grace, in order that the promise may be certain to all the descendants, not only to those who are of the Law, but also to those who are of the faith of Abraham, who is the father of us all,
영어MSG,16  This is why the fulfillment of God's promise depends entirely on trusting God and his way, and then simply embracing him and what he does. God's promise arrives as pure gift. That's the only way everyone can be sure to get in on it, those who keep the religious traditions and those who have never heard of them. For Abraham is father of us all. He is not our racial father--that's reading the story backwards. He is our faith father.
영어NRSV,16 For this reason it depends on faith, in order that the promise may rest on grace and be guaranteed to all his descendants, not only to the adherents of the law but also to those who share the faith of Abraham (for he is the father of all of us,
헬라어신약Stephanos,16 δια τουτο εκ πιστεως ινα κατα χαριν εις το ειναι βεβαιαν την επαγγελιαν παντι τω σπερματι ου τω εκ του νομου μονον αλλα και τω εκ πιστεως αβρααμ ος εστιν πατηρ παντων ημων
라틴어Vulgate,16 ideo ex fide ut secundum gratiam ut firma sit promissio omni semini non ei qui ex lege est solum sed et ei qui ex fide est Abrahae qui est pater omnium nostrum
히브리어Modern,16 על כן מתוך אמונה למען לפי חסד למען תחיה ההבטחה קימת לכל זרעו לא לבני התורה לבדם כי גם לבני אמונת אברהם אשר הוא אב לכלנו׃


 

성 경: [4:16]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 '후사가 되리라'는 약속은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믿으으로'(*, 에크 피스테오스)라는 말은 '율법을 통해서'(*, 디아 노무)라는 개념과 반대적인 의미이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라는 말은 약속이라는 개념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서 약속된 그리스도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원문이 '수단과 방법'을 뜻하는 전치사 '디아'(*)를 사용하지 않고 '에크'(*)를 사용한 것도 믿음이라는 것을 수단과 방법적인 것으로 전락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믿음은 약속이 내용이며 동시에 약속 그 자체이다. 따라서 믿음은 약속이 성취된 곳에 나타나는 결과이며 동시에 약속이 하나님에 의하여 성취되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본절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이 은혜로 말미암아 성취되도록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보다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은혜'라는 개념이다. 믿음에 의하여 은혜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하여 믿음이 좌우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1) 믿는 자로 하여금 믿음의 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며 (2) 신앙의 확실성을 갖게 하며 (3)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신실하심을 선포하심으로써 믿는 자들의 의를 성취하도록 하는 방편이며, 또한 궁극적인 의의 보증이다.

󰃨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 율법은 진노를 이루는 것이기에 율법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될 수 없다(15). 하나님의 약속이 보증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유효하며, 이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증하고 보증해 준다.

󰃨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 바울은 '그 모든 후손'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기를 '율법에 속한 자''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라고 했다. 통상적으로 '율법에 속한 자'는 단순히 유대인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14). 이런 사실 때문에 헨드릭슨(Hendriksen)'율법에 속한 자'가 단지 '유대인'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반부에 언급된 '그 모든 후손' 곧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받은 '그 모든 후손'에는 분명히 '믿지 않는 유대인'은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율법에 속한 자'는 율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유대인'을 의미하며,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이방인'을 가리킨다(12절 주석 참조). 이에 대해서는 곧이어 언급되는 하반절에 의해 더욱 지지를 받는다.

󰃨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 바울이 '우리'라고 표현한 것은 믿음 안에 있는 '신앙의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이 신앙의 공동체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없이 오직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모든 족속이 포함된다. 지금 바울이 논하고 있는 것은 혈통적인 조상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한 것이다. 14절에서 바울은 혈통적으로만 '율법에 속한 자들'은 후사가 될 수 없다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실 수 있는 후사는 믿음의 원리를 따르는 자들뿐이다.

 

 

카도스 게그랖타이 호티 파테라 폴론 에드논 테데이카 세 카테난티 후 에피스튜센 데우 투 조오포이운토스 투스 네크루스 카이 칼룬토스 타 메 온타 호스 온타

 

개역개정,17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새번역,17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함과 같습니다. 이 약속은, 그가 믿은 하나님,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들을 불러내어 있는 것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장하신 것입니다. / ㉤창 17:5
우리말성경,17 기록되기를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믿은 하나님, 곧 죽은 사람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조상이 됐습니다. 창17:5 
가톨릭성경,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 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영어NIV,17 As it is written: "I have made you a father of many nations." He is our father in the sight of God, in whom he believed--the God who gives life to the dead and calls things that are not as though they were.
영어NASB,17 (as it is written, "A FATHER OF MANY NATIONS HAVE I MADE YOU") in the sight of Him whom he believed, even God, who gives life to the dead and calls into being that which does not exist.
영어MSG,17  We call Abraham "father" not because he got God's attention by living like a saint, but because God made something out of Abraham when he was a nobody. Isn't that what we've always read in Scripture, God saying to Abraham, "I set you up as father of many peoples"? Abraham was first named "father" and then became a father because he dared to trust God to do what only God could do: raise the dead to life, with a word make something out of nothing.
영어NRSV,17 as it is written, "I have made you the father of many nations")--in the presence of the God in whom he believed, who gives life to the dead and calls into existence the things that do not exist.
헬라어신약Stephanos,17 καθως γεγραπται οτι πατερα πολλων εθνων τεθεικα σε κατεναντι ου επιστευσεν θεου του ζωοποιουντος τους νεκρους και καλουντος τα μη οντα ως οντα
라틴어Vulgate,17 sicut scriptum est quia patrem multarum gentium posui te ante Deum cui credidit qui vivificat mortuos et vocat quae non sunt tamquam ea quae sunt
히브리어Modern,17 ככתוב כי אב המון גוים נתתיך והוא האמין בהביט אל אל המחיה את המתים והקורא את אשר לא היה כמו הוה׃



성 경: [4:17]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 바울이 여기서 창 17:5의 말씀을 인용한 것은 아브라함이 혈통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되는 이유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를 위한 것이다. '많은 민족'은 문자적으로 '혈연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영적으로 '믿음의 원리를 좇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모든 믿는 자들의 새로운 공동체'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이유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후사에게 주어진 특권과 유익을 함께 소유하는 공동체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됨으로 말미암아 인종적 보편성이 성취되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우심을 받았다는 표현은 '무할례자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라는 표현과 '할례자의 조상'이란 표현을 포괄하는 보다 광범위한 표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차별없는 동등한 부르심을 받았음을 시사하며 또한 세계 도처의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취를 따름으로 후사가 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강조한다(J. Murray).

󰃨 그의 믿은 바 하나님 -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을 정의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관(神觀)을 정의하며 동시에 모든 믿는 자들의 신관을 정의한다. 이는 두 가지의 사실을 전제로 하는데, (1)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이며 (2)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는(16) 사실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정의한 후에 그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확고히 하신 '아브라함의 조상됨'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모든 사람의 조상으로 삼으신 하나님 곧 예수를 죽인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 죽은 자를 살리시며 - 이 구절은 살아 역동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해주며 또한 생명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1:20). 본절에서 그 의미는 크게 두 가지를 포함한다. (1) 이삭의 출생이며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다. 바울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손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끝가지 기다렸던 역사적 사건을 상기하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유추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출생을 기다리며 장차 있을 메시야의 세계와 그의 승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Lenski, J. Murray, E.F. Harrison). 사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흔히 부르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었으나 바울은 유대인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적용함으로써(24)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과 또한 그것을 믿는 자들을 의로 여기신다는 두 가지의 핵심적 진리를 동시에 증거하였다.

󰃨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 - 이 구절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특성을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분이시며(3:9;3:8) 그 어떠한 인간의 공로나 반항에도 구애받지 아니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절대 주권의 능력을 행사하는 분이시다. 그분 앞에서는 아브라함의 늙은 육체도 문제가 되지 않으며 죄인의 추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엇인가 될 수 있는 것 같은 가능성 속에서 역사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미리 정하신 작정과 통치 속에서 결정해 놓으신 것들을 성취해 나아가신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후손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언약이 성취될 것을 확신하였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성취된 것으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확신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으며 본절과 같이 하나님을 정의할 수 있는 신앙이다.

 

 

호스 파르 엘피다 엪 엘피디 에피스튜센 에이스 토 게네스다이 아우톤 파테라 폴론 에드논 카타 토 에이레메논 후토스 에스타이 토 스페르마 수

 

개역개정,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새번역,18 아브라함은 희망이 사라진 때에도 바라면서 믿었으므로 ㉥"너의 자손이 이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 ㉥창 15:5
우리말성경,18 아브라함은 소망이 없는 가운데서도 소망을 갖고 믿었습니다. 이는 “네 후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창15:5 
가톨릭성경,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 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영어NIV,18 Against all hope, Abraham in hope believed and so became the father of many nations, just as it had been said to him, "So shall your offspring be."
영어NASB,18 In hope against hope he believed, in order that he might become a father of many nations, according to that which had been spoken, "SO SHALL YOUR DESCENDANTS BE."
영어MSG,18  When everything was hopeless, Abraham believed anyway, deciding to live not on the basis of what he saw he couldn't do but on what God said he would do. And so he was made father of a multitude of peoples. God himself said to him, "You're going to have a big family, Abraham!"
영어NRSV,18 Hoping against hope, he believed that he would become "the father of many nations," according to what was said, "So numerous shall your descendants be."
헬라어신약Stephanos,18 ος παρ ελπιδα επ ελπιδι επιστευσεν εις το γενεσθαι αυτον πατερα πολλων εθνων κατα το ειρημενον ουτως εσται το σπερμα σου
라틴어Vulgate,18 qui contra spem in spem credidit ut fieret pater multarum gentium secundum quod dictum est sic erit semen tuum
히브리어Modern,18 באשר אין תקוה קוה ויאמן למען אשר יהיה לאב המון גוים כמו שנאמר כה יהיה זרעך׃


 

성 경: [4:18]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자기 아내 사라가 잉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상속자는 자기의 종인 엘리에셀이 될 것이라고 고했다(15:2).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번성케 하실 것을(15:5) 믿었다. 키에르케골(Kierkegaard)은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떤 사람은 영원한 것을 기대함으로써 위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위대했던 사람은 불가능한 것을 기대했던 사람이다"라고 함과 동시에 '불가능한 것을 기대했던 사람''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자'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공포와 전율] 중에서). 그러나 아브라함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아브라함이 바라고 믿었다는 것은 자신의 소망에 대하여 믿음을 가졌다는 뜻은 아니다. 더 나아가 개인의 소망이 성취되는 것을 하나님과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와 모순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랐기 때문에 소망이 성취된 뒤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다(20). 그는 믿고 바라는 모든 것의 근원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고 있다. 과학에 있어서 사실에 대한 '확신'은 과학자가 세워 놓은 가설을 추론(推論)하여 밝혀진 사실(비록 이 사실이 진리는 될 수 없을지라도) 또는 추론에 의해 세워진 가설에 대한 '확신'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은 전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믿고 바라는 것이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능성과 목적의 결정성(determinateness), 곧 약속의 신실성을 믿고 바라는 것이기에(J. Murray) 전제된 가설을 추론하여 믿는 과학적 확신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 이 내용은 창 15:5 b'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말씀의 인용구이다. 여기서 '후손'이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만, 창세기 본문에서나 본절에서는 '율법에 속한 자''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 모두를 지칭한다(16절 주석 참조).

 

 

카이 메 아스데네사스 테 피스테이 카테노에센 토 헤아우투 소마 에데 네네크로메논 에카톤타에테스 푸 휘파르콘 카이 텐 네크로신 테스 메트라스 사르라스

 

개역개정,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새번역,19 그는 나이가 백 세가 되어서,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또한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면서도,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말성경,19 아브라함은 100세나 돼 이미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성경,19 백 살가량이 되어,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사라의 모태도 죽은 것이라 여기면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영어NIV,19 Without weakening in his faith, he faced the fact that his body was as good as dead--since he was about a hundred years old--and that Sarah's womb was also dead.
영어NASB,19 And without becoming weak in faith he contemplated his own body, now as good as dead since he was about a hundred years old, and the deadness of Sarah's womb;
영어MSG,19  Abraham didn't focus on his own impotence and say, "It's hopeless. This hundred-year-old body could never father a child." Nor did he survey Sarah's decades of infertility and give up.
영어NRSV,19 He did not weaken in faith when he considered his own body, which was already as good as dead (for he was about a hundred years old), or when he considered the barrenness of Sarah's womb.
헬라어신약Stephanos,19 και μη ασθενησας τη πιστει ου κατενοησεν το εαυτου σωμα ηδη νενεκρωμενον εκατονταετης που υπαρχων και την νεκρωσιν της μητρας σαρρας
라틴어Vulgate,19 et non infirmatus fide consideravit corpus suum emortuum cum fere centum annorum esset et emortuam vulvam Sarrae
히브리어Modern,19 ולא רפתה אמונתו ולא התבונן אל גופו שכבר נפוג בהיותו כבן מאת שנה ואל בלות רחם שרה׃


 

성 경: [4:19]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 바울은 생식(生殖) 능력이 없는 것을 '죽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헬라 본문에서 '죽은 것 같음'이란 말이 아브라함에게는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 네네크로메논) 언급되어 있으며, 사라에게는 명사형(*, 네크로신)으로 언급되어 있다. 사라에게 명사형으로 사용된 것은 앞에서 사용된 분사형의 반복이며, 아브라함에게 완료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이미 생식 능력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개역 성경의 번역에서 사용된 '같음'이란 말은 헬라 본문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 특히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있지 않으나 헬라 본문에는 '이미'를 의미하는 헬라어 '에데'(*)가 사용되어 두 사람 모두 생식 능력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17절에서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라는 말씀이 '이미 생식 능력을 상실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식 능력을 회복시키시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24절의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라는 구절과도 연결되어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은 사라의 태()가 생산 능력이 없는데서 생산의 능력을 갖추게 된 사실과 영적으로 일맥 상통한다. 영적인 의미에서 생산 능력이 없는 사라가 그의 후손을 생산하게 된 것이나 죽었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을 주는 영'(고전 15:45, life-giving-spirit)으로서 잠자는 자의 첫열매가 되신 것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에이스 데 텐 에팡겔리안 투 데우 우 디에크리데 테 아피스티아 알 에네뒤나모데 테 피스테이 두스 돜산 토 데오

 

개역개정,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새번역,20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믿음이 굳세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말성경,20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고 도리어 믿음이 굳건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가톨릭성경,20 그는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영어NIV,20 Yet he did not waver through unbelief regarding the promise of God, but was strengthened in his faith and gave glory to God,
영어NASB,20 yet, with respect to the promise of God, he did not waver in unbelief, but grew strong in faith, giving glory to God,
영어MSG,20  He didn't tiptoe around God's promise asking cautiously skeptical questions. He plunged into the promise and came up strong, ready for God,
영어NRSV,20 No distrust made him waver concerning the promise of God, but he grew strong in his faith as he gave glory to God,
헬라어신약Stephanos,20 εις δε την επαγγελιαν του θεου ου διεκριθη τη απιστια αλλ ενεδυναμωθη τη πιστει δους δοξαν τω θεω
라틴어Vulgate,20 in repromissione etiam Dei non haesitavit diffidentia sed confortatus est fide dans gloriam Deo
히브리어Modern,20 ולא חלק לבו בהבטחת האלהים כחסר האמונה כי אם התחזק באמונתו ויתן כבוד לאלהים׃


 

성 경: [4:20]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의심치 않고 - '의심하다'의 헬라어 '디에크리데'(*)'디아크리노'(*)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아브라함의 의심하지 아니한 행위가 개인의 능동적인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디아크리노''가려내다'(16:3), '구별하다'(2:4) 또는 '스스로 마음에 갈등을 일으키다'(14:23;11:23)라는 의미인데 본절에서는 아브라함의 '확신'(*, 플레로포레오)과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의심치 않았다'는 것은 소망에 근거해서(*, 에프 엘피디) 믿음으로 살았기에 갈등할 수가 없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뒤나모데 테 피스테이'(*)에서 '믿음'(피스테이)은 앞에 전치사가 없이 여격으로 사용되었다. 메첸(Machen)은 전치사가 없는 단순한 여격은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 예로 '에게이론 타이 토 로고 투 퀴리우'(*)'그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일으킴을 받는다'를 의미하는데 주님의 '말씀''일으킴을 받게 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절은 문자적으로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믿음''강하여지게 되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강하게 붙들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한 가지 난제가 발생한다. 15장에 언급된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이 끝까지 변함없이 믿었다는 사실이 창 17:17"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라는 말씀에 의해 도전받게 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이와 같이 분명하게 의심을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강하여져서'라고 진술하고 있는가 ?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은 다음과 같이 해결될 수 있다. 비록 혹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연약하여져서 의심을 하였으나 다시 하나님께서 그것을 강하게 해주셨다는 것으로 이해하지만(Hendriksen) 이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 다만 아브라함이 의심을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즉 그의 자손이 수없이 많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 약속은 문자적으로 사라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라를 통해서만 성취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비록 하갈은 사라의 몸종이었지만 하갈의 자식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고하기를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17:18)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 15장에서 말씀하셨던 그 약속을 재차 창 17:19-21에서 말씀하심은 아브라함의 약해진 믿음을 다시 확고히 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사라의 태에서 난 자만이 그 약속을 성취시킬 것이라는 점을 아브라함에게 못박으신 것이다.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 본 구절에 대해서 구약성경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17:19-21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재보증받은 아브라함은 곧바로 하나님께서 이전에 명하신 할례 의식을 행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방법에 대해 확고히 믿게 되었음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카이 플레로포레데이스 호티 토 에펭겔타이 뒤나토스 에스틴 카이 포이에사이

 

개역개정,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새번역,21 그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가톨릭성경,2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영어NIV,21 being fully persuaded that God had power to do what he had promised.
영어NASB,21 and being fully assured that what He had promised, He was able also to perform.
영어MSG,21  sure that God would make good on what he had said.
영어NRSV,21 being fully convinced that God was able to do what he had promised.
헬라어신약Stephanos,21 και πληροφορηθεις οτι ο επηγγελται δυνατος εστιν και ποιησαι
라틴어Vulgate,21 plenissime sciens quia quaecumque promisit potens est et facere
히브리어Modern,21 וידע בלבב שלם כי את אשר הבטיח גם יכל לעשותו׃


 

성 경: [4:21]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약속하신 그것 - 본문에 언급된 약속의 구체적인 내용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17)는 것과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18)고한 것이다. 이약속은 아브라함의 소망과 확신에 의하여 얻어낸 보증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보여 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근거한다. 아브라함의 확신보다 더 확실한 것은 그분의 약속이다. 왜냐하면 약속은 하나님 자신의 전능성과 신실성을 나타내신 목적있는 작정이기 때문이다.

󰃨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 이 말은 '능치 못할 것이 없는 여호와 하나님'(18:14)에 대한 확신이며 또한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라'(18:19)는 말씀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다. 본 구절에 대하여 혹자는 본절이 "아브라함의 신앙의 힘과 활기를 완벽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고 진술하기도 한다.

 

 

디오 카이 엘로기스데 아우토 에이스 디카이오쉬넨

 

개역개정,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새번역,2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 ㉦또는 '그의 믿음을' ㉧창 15:6
우리말성경,22 그러므로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습니다. 창15:6 
가톨릭성경,22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영어NIV,22 This is why "it was credited to him as righteousness."
영어NASB,22 Therefore also IT WAS RECKONED TO HIM AS RIGHTEOUSNESS.
영어MSG,22  That's why it is said, "Abraham was declared fit before God by trusting God to set him right."
영어NRSV,22 Therefore his faith "was reckoned to him as righteousness."
헬라어신약Stephanos,22 διο και ελογισθη αυτω εις δικαιοσυνην
라틴어Vulgate,22 ideo et reputatum est illi ad iustitiam
히브리어Modern,22 על כן גם נחשבה לו לצדקה׃


 

성 경: [4:22]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그러므로 -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그러므로'(*, 디오) 다음에 '카이'(*)가 언급되어 있다. '카이'는 일반적으로 접속사로 사용되어 '그리고'를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또한 역시'라는 의미를 지닌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9절 하반절에서 언급했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라는 말씀을 다시 반복하면서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우크 에그라페 데 디 아우톤 모논 호티 엘로기스데 아우토

 

개역개정,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새번역,23 "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 하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 아니라,
우리말성경,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라는 말은 아브라함만을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가톨릭성경,23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기록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영어NIV,23 The words "it was credited to him" were written not for him alone,
영어NASB,23 Now not for his sake only was it written, that it was reckoned to him,
영어MSG,23  But it's not just Abraham;
영어NRSV,23 Now the words, "it was reckoned to him," were written not for his sake alone,
헬라어신약Stephanos,23 ουκ εγραφη δε δι αυτον μονον οτι ελογισθη αυτω
라틴어Vulgate,23 non est autem scriptum tantum propter ipsum quia reputatum est illi
히브리어Modern,23 ולא לבד למענו כתובה זאת שנחשבה לו׃


 

성 경: [4:23]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실은 동시성(Synchronism)과 통시성(Diachronism)을 동시에 지닌다. 즉 그 원리는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 모두에게도 적용된다. 이에 대해서 성경 자체의 증거로는 15:4;102:18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당신이 주장하는 것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만 적용되며 모세 이후부터는 율법만이 적용될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것이다.

 

 

알라 카이 디 헤마스 호이스 멜레이 로기제스다이 토이스 피스튜우신 에피 톤 에게이란타 예순 톤 퀴리온 헤몬 에크 네크론

 

개역개정,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새번역,24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실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까지도 위한 것입니다.
우리말성경,24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우리,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분을 믿는 우리도 위한 것입니다. 
가톨릭성경,24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을 믿는 우리도 그렇게 인정받을 것입니다.
영어NIV,24 but also for us, to whom God will credit righteousness--for us who believe in him who raised Jesus our Lord from the dead.
영어NASB,24 but for our sake also, to whom it will be reckoned, as those who believe in Him who raised Jesus our Lord from the dead,
영어MSG,24  it's also us! The same thing gets said about us when we embrace and believe the One who brought Jesus to life when the conditions were equally hopeless.
영어NRSV,24 but for ours also. It will be reckoned to us who believe in him who raised Jesus our Lord from the dead,
헬라어신약Stephanos,24 αλλα και δι ημας οις μελλει λογιζεσθαι τοις πιστευουσιν επι τον εγειραντα ιησουν τον κυριον ημων εκ νεκρων
라틴어Vulgate,24 sed et propter nos quibus reputabitur credentibus in eum qui suscitavit Iesum Dominum nostrum a mortuis
히브리어Modern,24 כי אם גם למעננו אשר עתידה להחשב לנו המאמינים במי שהעיר את ישוע אדנינו מן המתים׃


 

성 경: [4:24]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 '우리'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본절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열려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는 유대인의 특권을 부인하고 있는 23절의 '아브라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라는 내용과 호응을 이룬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논리를 '믿음의 내용'으로 옮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화제를 끌어내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기가 언급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 하나님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은 동일한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결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믿는 것과 신약 시대에 성도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용상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실현될 '약속'에 대한 것인 반면, 신약 시대 성도의 믿음은 성취된 '약속'에 대한 것이다.

 

 

 

호스 파레도데 디아 타 파랖토마타 헤몬 카이 에게르데 디아 텐 디카이오신 헤몬

 

개역개정,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새번역,25 예수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말성경,25 예수께서는 우리의 범죄를 인해 죽음에 넘겨지셨고 우리의 의를 위해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가톨릭성경,25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영어NIV,25 He was delivered over to death for our sins and was raised to life for our justification.
영어NASB,25 He who was delivered up because of our transgressions, and was raised because of our justification.
영어MSG,25  The sacrificed Jesus made us fit for God, set us right with God.
영어NRSV,25 who was handed over to death for our trespasses and was raised for our justification.
헬라어신약Stephanos,25 ος παρεδοθη δια τα παραπτωματα ημων και ηγερθη δια την δικαιωσιν ημων
라틴어Vulgate,25 qui traditus est propter delicta nostra et resurrexit propter iustificationem nostram
히브리어Modern,25 אשר נמסר בעבור פשעינו ונעור לבעבור צדקנו׃

 

성 경: [4:25]

주제1: [칭의에 대한 구약의 예증]

주제2: [믿음의 후사(後嗣)]

󰃨 예수는...살아나셨느니라 - 본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성도에게 적용시키면서 반대되는 의미를 지닌 두 구절을 대조시키고 있다. '우리 범죄함''우리를 의롭다하심'이 대조되어 있고,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위하여 살아나셨으니라'가 대조되어 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내어 줌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 죄를 위한 대속적(代贖的)인 죽음을 의미하며,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심은 대속의 결과인 ''를 보증하고 선포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바울은 24절에서 믿음의 내용으로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것에 대하여 언급했던 것을 성도들에게 다시 적용시키는 논리의 순서를 밝고 있다. 한편 바울이 예수의 대속적 죽으심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은 사 53:1-9과 같이 구약 시대에서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논리적으로 설명되고 증명되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해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까지 굳이 증명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내용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을 위해 더 유익한 것으로 판단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5장에서 8장까지 줄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성도들에게 어떤 의의를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 진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