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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K BIBLE

헬라어 로마서 9장 전체 원어 원문 성경 공부 주석 강해 설교 해설 해석

 

알레데이안 레고 엔 크리스토 우 프슈도마이 쉼마르튀루세스 모이 테스 쉬네이데세오스 무 엔 프뉴마티 하기오

 

개역개정,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새번역,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을 힘입어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우리말성경,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내게 이것을 증거합니다. 
가톨릭성경,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영어NIV,1 I speak the truth in Christ--I am not lying, my conscience confirms it in the Holy Spirit--
영어NASB,1 I am telling the truth in Christ, I am not lying, my conscience bearing me witness in the Holy Spirit,
영어MSG,1  At the same time, you need to know that I carry with me at all times a huge sorrow.
영어NRSV,1 I am speaking the truth in Christ--I am not lying; my conscience confirms it by the Holy Spirit--
헬라어신약Stephanos,1 αληθειαν λεγω εν χριστω ου ψευδομαι συμμαρτυρουσης μοι της συνειδησεως μου εν πνευματι αγιω
라틴어Vulgate,1 veritatem dico in Christo non mentior testimonium mihi perhibente conscientia mea in Spiritu Sancto
히브리어Modern,1 אמת אני מדבר במשיח ולא אשקף ודעתי מעידה לי ברוח הקדש׃


 

성 경: [9:1-2]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선택받은 이스라엘]

󰃨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 이 표현은 지금부터 진술될 내용의 권위를 보다 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은 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바울의 독특한 어법으로서(1) 이것이 맹세의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구약 시대에 '여호와의 사심으로'라는 표현으로 맹세했던 것과 일맥 상통(一脈相通)한다. 바울은 자기의 말과 계시의 최종적인 권위를 나타낼 필요가 있을 때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다(1:1, 12).

󰃨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 - 바울에게 있는 큰 근심과 고통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것이다. 비록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사역을 하고 있으나(2:8) 자기 동족에 대한 깊은 애정은 여전함을 보여 주고 있다.

󰃨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 본 구절에서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자기의 애정이 거짓이 아님을 더욱 확증하고 있다. 초두에서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으로 자신의 진술의 권위를 세운 반면 본 구절에서는 자기와 함께 계시며 자신의 생각을 다 아시는 '성령'의 이름으로 자기 마음의 진실성을 입증시키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성령 안에서'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기 동족에 대한 큰 근심과 고통의 비중(比重)과 지속성 그리고 그 깊이를 보여 주고 있다(Liddon, Murray).

 

 

호티 뤼페 모이 에스틴 메갈레 카이 아디알레잎토스 오뒤네 테 카르디아 무

 

개역개정,2 (1절에 포함됨)
새번역,2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우리말성경,2 곧 내게 큰 근심이 있다는 것과 내 마음에 끊임없는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2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어NIV,2 I have great sorrow and unceasing anguish in my heart.
영어NASB,2 that I have great sorrow and unceasing grief in my heart.
영어MSG,2  It's an enormous pain deep within me, and I'm never free of it. I'm not exaggerating--Christ and the Holy Spirit are my witnesses. It's the Israelites . . .
영어NRSV,2 I have great sorrow and unceasing anguish in my heart.
헬라어신약Stephanos,2 οτι λυπη μοι εστιν μεγαλη και αδιαλειπτος οδυνη τη καρδια μου
라틴어Vulgate,2 quoniam tristitia est mihi magna et continuus dolor cordi meo
히브리어Modern,2 כי גדול עצבוני ואין קץ לדאבון לבי׃


 


 

에위코멘 가르 아나데마 에이나이 아우토스 에고 아포 투 크리스투 휘페르 톤 아델폰 무 톤 슁게논 무 카타 사르카

 

개역개정,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새번역,3 나는, 육신으로 ㉠내 동족인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이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 ㉠그, '내 형제들'
우리말성경,3 나는 내 형제, 곧 육신을 따라 된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 할지라도 좋겠습니다. 
가톨릭성경,3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영어NIV,3 For I could wish that I myself were cursed and cut off from Christ for the sake of my brothers, those of my own race,
영어NASB,3 For I could wish that I myself were accursed, separated from Christ for the sake of my brethren, my kinsmen according to the flesh,
영어MSG,3  If there were any way I could be cursed by the Messiah so they could be blessed by him, I'd do it in a minute. They're my family.
영어NRSV,3 For I could wish that I myself were accursed and cut off from Christ for the sake of my own people, my kindred according to the flesh.
헬라어신약Stephanos,3 ηυχομην γαρ αυτος εγω αναθεμα ειναι απο του χριστου υπερ των αδελφων μου των συγγενων μου κατα σαρκα
라틴어Vulgate,3 optabam enim ipse ego anathema esse a Christo pro fratribus meis qui sunt cognati mei secundum carnem
히브리어Modern,3 כי מי יתן היתי אני מחרם מן המשיח בעד אחי שארי ובשרי׃


 

성 경: [9:3]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선택받은 이스라엘]

󰃨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따라 났으며 언약과 약속에 참여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4-13). 내 자신이 저주를...끊어질지라도 -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에 있어서 공통된 저주의 의미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멸망당한다는 것이다(Murray).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주가 되신 사건도 이러한 의미의 저주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러면 바울은 실제로 자기 동족을 위해 저주를 받기를 원했는가 ?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했던 모세의 경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세는 자기 백성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죄를 속()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32:32)라고 탄원했다. 이때 모세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져내고자 하는 열심에서 그런 기도를 했다. 이것은 자기를 정말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 버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과 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본절에서 바울은 자기 동족에 대한 연민과 열심을 나타내기 위해 그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즉 바울은 모세와 같이 자기 구원을 포기할 만큼 자기 동족을 사랑하고 있음을 로마 교회의 유대인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Calvin, Murray, Barmby).

 

 

호이티네스 에이신 이스라엘리타이 혼 헤 휘오데시아 카이 헤 돜사 카이 하이 디아데카이 카이 헤 노모데시아 카이 헤 라트레이아 카이 하이 에팡겔리아이

 

개역개정,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새번역,4 ㉡내 동족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이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영광이 있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들이 있고, 율법이 있고,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약속들이 있습니다. / ㉡그, '내 형제들' ㉢그, '아들의 신분' 또는 '아들 됨'
우리말성경,4 내 동족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심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가톨릭성경,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영어NIV,4 the people of Israel. Theirs is the adoption as sons; theirs the divine glory, the covenants, the receiving of the law, the temple worship and the promises.
영어NASB,4 who are Israelites, to whom belongs the adoption as sons and the glory and the covenants and the giving of the Law and the temple service and the promises,
영어MSG,4  I grew up with them. They had everything going for them--family, glory, covenants, revelation, worship, promises,
영어NRSV,4 They are Israelites, and to them belong the adoption, the glory, the covenants, the giving of the law, the worship, and the promises;
헬라어신약Stephanos,4 οιτινες εισιν ισραηλιται ων η υιοθεσια και η δοξα και αι διαθηκαι και η νομοθεσια και η λατρεια και αι επαγγελιαι
라틴어Vulgate,4 qui sunt Israhelitae quorum adoptio est filiorum et gloria et testamenta et legislatio et obsequium et promissa
히브리어Modern,4 אשר הם בני ישראל ויש להם משפט הבנים והכבוד והבריתות ומתן התורה והעבודה וההבטחות׃


 

성 경: [9:4]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선택받은 이스라엘]

󰃨 양자됨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구약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4:22;14:1;32:6;63:16;64:8;11:1;1:6;2:10). 그러나 이 부자 관계는 고대 근동 지방의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그 당시 왕은 신하와 백성의 어버이와 같은 존재이자 신과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어버이와 같이 경배되었던 것이지 신약 시대와 같이 친밀한 가족 관계에 있어서의 부자(父子)관계로는 파악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증거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기도문이나 기타 다른 문헌에 하나님의 성호가 가족적인 의미의 친밀한 용어인 '아바'(*, 압바)로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댈 수 있다(8:15 주석참조).

󰃨 영광 - 여기서의 영광은 조직 신학적인 포괄적 의미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영광'은 머레이(Murray)가 지적한 대로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나타나셔서 임하던 그 영광이며(24:16, 17), 성막을 덮었던 영광이며(40:34-38), 지성소의 시은좌에 나타난 영광이며(16:2), 성전을 가득 채웠던 영광이다(왕상 8:10, 11;대하 7:1, 2;1:28). 그리고 좀더 비약하자면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도(고후 3:7)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 언약들 - 구약의 언약(Covenant)은 로버트슨(Robertson)에 따르면 아담(시초의 언약, 3:14-19), 노아(보존의 언약, 6:17-22;8:20-22;9:1-7, 8-17), 아브라함(약속의 언약, 12:1;15:1-18;17:1, 2), 모세(율법의 언약, 34:28;4:13;9:9, 11), 그리고 다윗(왕국의 언약, 삼하 7:1-29)등과 맺은 다섯 가지 언약이 있다. 물론 혹자는 아브라함에게 맺어진 동일한 의미의 두 언약(15:18-21;17:1-21)만을 본절의 '언약들'이라고 주장하지만(Murray), 그렇다고 그가 다른 언약들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언약이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전체 인류 구속을 목표로 하는 언약들이기 때문이다.

󰃨 율법을 세우신 것 - 모세를 통해서 시내 산에서 율법이 공포된 것은(4;13, 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 백성으로 보증하시는 선언이었다.

󰃨 예배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제사 제도는 우상 숭배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포함하는 구속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 제도에 계시된 구속사적 의의를 망각하고 형식적인 예배의 본질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데 있음을 가르치셨다(4:23).

󰃨 약속들 - 특별히 '언약'이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바,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성립된 것에 강조점을 두는 반면,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속들에게 주신 말씀(12:2, 3;18:18;22:18;26:4;28:14) 자체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성을 강하게 반영하며 '약속'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개별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시사한다. 따라서 '언약''약속'에 비해 포괄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내용상 이를 명백히 구분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안 된다. '언약''약속'은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Dunn).

 

 

혼 호이 파테레스 카이 엨스 혼 호 크리스토스 토 카타 사르카 호 온 에피 판톤 데오스 율로게토스 에이스 투스 아이오나스 아멘

 

개역개정,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새번역,5 족장들은 그들의 조상이요,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만물 위에 계시며 영원토록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 ㉣또는 '메시아'
우리말성경,5 조상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적으로는 그리스도도 그들에게서 나셨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영원토록 찬양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가톨릭성경,5 그들은 저 조상들의 후손이며, 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는 바로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영어NIV,5 Theirs are the patriarchs, and from them is traced the human ancestry of Christ, who is God over all, forever praised! Amen.
영어NASB,5 whose are the fathers, and from whom is the Christ according to the flesh, who is over all, God blessed forever. Amen.
영어MSG,5  to say nothing of being the race that produced the Messiah, the Christ, who is God over everything, always. Oh, yes!
영어NRSV,5 to them belong the patriarchs, and from them, according to the flesh, comes the Messiah, who is over all, God blessed forever. Amen.
헬라어신약Stephanos,5 ων οι πατερες και εξ ων ο χριστος το κατα σαρκα ο ων επι παντων θεος ευλογητος εις τους αιωνας αμην
라틴어Vulgate,5 quorum patres et ex quibus Christus secundum carnem qui est super omnia Deus benedictus in saecula amen
히브리어Modern,5 ולהם האבות ואשר מהם יצא המשיח לפי בשרו אשר הוא אל על הכל מברך לעולמים אמן׃


 

성 경: [9:5]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선택받은 이스라엘]

󰃨 조상들 - 족장들 곧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을 일컫는다(7-13). 그런데 혹자는 '조상들'을 세 사람의 족장으로 국한시키는 것을 반대하며 다윗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1:3에서 예수께서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라고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본장에서 그리스도의 나심을 세 족장들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으므로 굳이 다윗을 '조상들'의 범주에 넣을 필요가 없다.

󰃨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 본 구절은 골 1:15-17과 더불어 바울이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묘사한 독특한 표현이다. 그런데 혹자는 본 구절을 의도적으로 변형시켜 '저는 만물 위에 계시면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그 하나님께 속한 자이시다'(Who belongs to God over all, blessed for ever)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이단으로 낙인찍힌 소시니안파(Socinianist)의 견해에 가까운 해석에 불과하다(Black).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사도 요한의 그것과 내용상 차이가 없다(1:1-5, 10). 한편 본 구절은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께 세세에 찬양이 있으리로다 아멘'과 같은 송영(doxology)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나 형식상으로 다른 송영과 비교할 때 송영이 아니라 분명히 주장을 내세우는 진술이다(Barmby). 아무튼 바울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언급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가 신적 권위를 지니고 있는 구세주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우크 호이온 데 호티 에크펲토켄 호 로고스 투 데우 우 가르 판테스 호이 엨스 이스라엘 후토이 이스라엘

 

개역개정,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새번역,6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폐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우리말성경,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파기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고 
가톨릭성경,6 그렇다고 하느님의 말씀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영어NIV,6 It is not as though God's word had failed. For not all who are descended from Israel are Israel.
영어NASB,6 But it is not as though the word of God has failed. For they are not all Israel who are descended from Israel;
영어MSG,6  Don't suppose for a moment, though, that God's Word has malfunctioned in some way or other. The problem goes back a long way. From the outset, not all Israelites of the flesh were Israelites of the spirit.
영어NRSV,6 It is not as though the word of God had failed. For not all Israelites truly belong to Israel,
헬라어신약Stephanos,6 ουχ οιον δε οτι εκπεπτωκεν ο λογος του θεου ου γαρ παντες οι εξ ισραηλ ουτοι ισραηλ
라틴어Vulgate,6 non autem quod exciderit verbum Dei non enim omnes qui ex Israhel hii sunt Israhel
히브리어Modern,6 אבל לא כאלו נפל דבר אלהים ארצה כי לא כל אשר הם מישראל גם ישראל המה׃


 

성 경: [9:6]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약속의 자녀]

󰃨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 바르트(K. Barth)는 본절과 관련된 주석에서 현재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킬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선포하는 즉시 하나님의 말씀은 그 참됨을 상실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주장은 일견 일리가 있는 듯이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인간의 언어에 의해 제한되거나 왜곡될 수도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뜻을 완전하게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바르트의 생각은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너무 과소 평가한 데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이 구원받는 데 필요 충분하며 인간은 미약하지만 성령께서 일깨워 주시는 깨달음을 통해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 계시를 이해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가 기록된 말씀으로 불충분하고 그 진리성이 의심된다면 인간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살필 수 있는가 ?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제한된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으나 완전하다. 본절에서도 사도 바울은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지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에 주어진 율법과 약속이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에 성취되지 않았다고 하나님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미 3:3-6에서 바울이 취급했던 것이지만, 본장에서는 다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관련하여 보다 자세하게 언급될 필요가 있었다. 즉 이스라엘이 실패했다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구원 섭리 속에는 온 인류에 대한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스라엘은 구속사의 전개 과정에서 모형적 선민으로 선택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혈통적 특권 의식에만 젖어든 채 그 구원 섭리를 잘못 이해하여 자기들의 역사에 그릇되게 적용시켰다.

󰃨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 머레이(John Murray) 본 구절을 압축하여 그들이 모두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표현하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 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에게서 난'이란 표현이 족장들의 혈통적 후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Murray, Harrison, Kasemann). 즉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가 혈통적인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울의 진술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납득되기 어려운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한편 본 구절의 첫번째 '이스라엘'을 반드시 야곱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바울은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 모두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욷 호티 에이신 스페르마 아브라암 판테스 테크나 알 엔 이사앜 클레데세타이 소이 스페르마

 

개역개정,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새번역,7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 다만 ㉤"이삭에게서 태어난 사람만을 너의 자손이라고 부르겠다" 하셨습니다. / ㉤창 21:12
우리말성경,7 아브라함의 씨라고 해서 다 그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삭에게서 난 자라야 네 씨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창21:12 
가톨릭성경,7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영어NIV,7 Nor because they are his descendants are they all Abraham's children. On the contrary, "It is through Isaac that your offspring will be reckoned."
영어NASB,7 neither are they all children because they are Abraham's descendants, but: "THROUGH ISAAC YOUR DESCENDANTS WILL BE NAMED."
영어MSG,7  It wasn't Abraham's sperm that gave identity here, but God's promise. Remember how it was put: "Your family will be defined by Isaac"?
영어NRSV,7 and not all of Abraham's children are his true descendants; but "It is through Isaac that descendants shall be named for you."
헬라어신약Stephanos,7 ουδ οτι εισιν σπερμα αβρααμ παντες τεκνα αλλ εν ισαακ κληθησεται σοι σπερμα
라틴어Vulgate,7 neque quia semen sunt Abrahae omnes filii sed in Isaac vocabitur tibi semen
히브리어Modern,7 ולא על היותם זרע אברהם כלם בנים הם כי ביצחק יקרא לך זרע׃


 

성 경: [9:7]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약속의 자녀]

󰃨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 본절은 6절 후반 구절 내용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반증하기 위한 설명이다. 이는 본절의 초두에 있는 '또한...아니다'를 가리키는 부정사 '우드 호티'(*)가 앞절(6)'...아니요'라고 번역된 부정사 '우크 호티'(*)와 논리적인 연속성을 갖고 있는데서 더욱 확인된다(Dunn). 본 구절에서 ''(*, 스페르마)'자녀'(*, 테크나)는 본절 전체에 대한 해석을 좌우한다. 먼저 이 문장에 대한 대부분의 역본들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씨이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번역한다(RSV, NEB, NIV, NJB). 여기서 '아브라함의 씨''그의 자녀'에 대한 주석가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1) '아브라함의 씨''자연적, 혹은 육체적 후손'을 가리키며 '그의 자녀'란 약속을 좇아서 난 참된 이스라엘, '믿는 자'를 말한다(Hendriksen, Murray). (2) 이스마엘과 이삭은 다 아브라함의 씨였지만 여기서 말한 '자녀'는 이스마엘을 제외한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이 육신적인 혈연에 의존하지 않음을 보여준다(C.K. Barrett, Calvin).

󰃨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 이것은 창 21:1270인역(LXX)에서 문자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알 엔 이사악), 문자적으로 '오직 이삭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오직 이삭 안에서'란 무슨 의미인가 ? 여기서 ''(*)은 제한적 의미를 가진 전치사로서 '...으로부터만'이라는 뜻이다(Dunn). 따라서 이 말은 이삭을 통해서만 아브라함의 참 자녀라는 이름과 지위를 가지고 약속의 후사로 인정될 후손이 나오리라는 의미이다(Meyer). 그런데 바울 사도가 여기서 왜 유달리도 '오직 이삭으로부터'란 말을 강조했을까 ? (1) 언약의 후손에 참여할 수 있는 범주를 이삭으로부터 시작한 그 후손으로만 제한하는 의미이다. (2) 이스마엘이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이삭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자식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자녀로(17:16;11:17, 18) 이 씨의 최종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앞 구절에서 사용된 ''가 제한된 범주로 해석된 반면에 본 구절에서 사용되 ''는 앞 구절 '자녀'(*, 테크나)와 같은 것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한 이스라엘 민족을 뛰어 넘어 믿는 자 누구든지를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칭하리라'고 번역된 헬라어 '클레데세타이'(*)는 창 21:12에 나오는 '칭할 것임이니라'는 말씀과 동일한 관용구로서 3인칭 단수 미래 수동형이다. 이 뜻은 '이름이 주어지다', '선택되다'이다(Dunn).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아브라함의 참된 씨라 일컬음 받은 계열에 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한 일방적인 은혜로 되는 것임을 '수동형'이란 점이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따라서 이스마엘이 서출(庶出)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씨가 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은 매우 인간적이고 단순한 발상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하신 뜻대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12족장과 유다의 계열을 택하셔서 아브라함의 씨라 칭해질 계통을 정하신 것이다. 또한 이 동사가 미래형으로 쓰인 것은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시작으로 하여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영적 후손이 역사의 과정을 통해 일어날 것을 암시하고 있다.

 

 

퉅 에스틴 우 타 테크나 테스 사르코스 타우타 테크나 투 데우 알라 타 테크나 테스 에팡겔리아스 로기제타이 에이스 스페르마

 

 

개역개정,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새번역,8 이것은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참 자손으로 여겨지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말성경,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8 이는 육의 자녀가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자녀라야 그분의 후손으로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영어NIV,8 In other words, it is not the natural children who are God's children, but it is the children of the promise who are regarded as Abraham's offspring.
영어NASB,8 That is, it is not the children of the flesh who are children of God, but the children of the promise are regarded as descendants.
영어MSG,8  That means that Israelite identity was never racially determined by sexual transmission, but it was God-determined by promise.
영어NRSV,8 This means that it is not the children of the flesh who are the children of God, but the children of the promise are counted as descendants.
헬라어신약Stephanos,8 τουτεστιν ου τα τεκνα της σαρκος ταυτα τεκνα του θεου αλλα τα τεκνα της επαγγελιας λογιζεται εις σπερμα
라틴어Vulgate,8 id est non qui filii carnis hii filii Dei sed qui filii sunt promissionis aestimantur in semine
히브리어Modern,8 כלומר לא בני הבשר המה בני האלהים כי אם בני ההבטחה הם הנחשבים לזרע׃
 

성 경: [9:8]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약속의 자녀]

󰃨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 본절은 앞 구절들(6ff.)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생물학적 혈통에서 태어난 자녀라고 해서 모두가 정당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문장 구조에서 더욱 잘 나타나는데, 앞 구절(3)과 마찬가지로 본절에서도 '오직'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라'(*)로 연결되어 앞뒤 문장을 대치시키면서 뒷문장을 강조해주는 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앞절에서 언급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는 것과 연결된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약속의 자녀라는 것이다. 본 구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약속'에 의한 것임을 보여 주는데, '약속'(*, 에팡켈리아)의 개념은 4장의 진술을 강력하게 반복하는 것으로 보인다(4:13, 14, 16, 20). 바울은 이러한 진술을 통해 그 약속이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인정된 자들에게만 적용됨을 보여준다(Calvin). 약속의 자녀라고 할 때에 그 '약속'이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예정'과 연관되는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하여 혹자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라는 것으로 어떤 사람은 그 약속의 범주에 넣고 어떤 사람은 제외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즉 모든 약속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으며 누구나 믿음으로써 그 약속이 제시하는 것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근거로 갈 3:26과 바울이 이방인 신자들도 그 약속 안에 포함시켰다는 것을 제시한다. 즉 약속이 모든 자연인에게 주어지지 않고 일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한 택자(澤子)들에게만 주어졌다면 어떻게 이방인들이 그 약속의 범주안에 들어 올 수 있었겠는가하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만이 그 약속을 약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예정을 가지고 계시며 그 택자들에게 약속의 능력으로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약속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다만 인간들은 그 예정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적용되어지는 것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지 못할 뿐이다.

 

 

에팡겔리아스 가르 호 로고스 후토스 카타 톤 카이론 투톤 엘류소마이 카이 에스타이 테 사라 휘오스

 

개역개정,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새번역,9 그 약속의 말씀은 ㉥"내년에 내가 다시 올 때쯤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한 것입니다. / ㉥창 18:10; 14
우리말성경,9 약속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내년 이때에 내가 올 것이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창18:10,14 
가톨릭성경,9 약속이라는 것은, “이맘때에 내가 다시 올 터인데 그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하신 말씀입니다.
영어NIV,9 For this was how the promise was stated: "At the appointed time I will return, and Sarah will have a son."
영어NASB,9 For this is a word of promise: "AT THIS TIME I WILL COME, AND SARAH SHALL HAVE A SON."
영어MSG,9  Remember that promise, "When I come back next year at this time, Sarah will have a son"?
영어NRSV,9 For this is what the promise said, "About this time I will return and Sarah shall have a son."
헬라어신약Stephanos,9 επαγγελιας γαρ ο λογος ουτος κατα τον καιρον τουτον ελευσομαι και εσται τη σαρρα υιος
라틴어Vulgate,9 promissionis enim verbum hoc est secundum hoc tempus veniam et erit Sarrae filius
히브리어Modern,9 כי דבר הבטחה הוא מה שנאמר למועד אשוב ולשרה בן׃


 

성 경: [9:9]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약속의 자녀]

󰃨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 '약속'(*, 에팡겔리아스)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앞으로 두어서 강조하고 있다. 즉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아들이고 이스마엘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또 다른 성경의증거를 들어 제시한다. 이는 6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지지 않았다는 진술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혹자는 이것이 약속의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언급하려는 것이지 약속의 자녀로서의 '이삭'과 육신의 자녀로서의 '이스마엘'을 대조 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Lenski). 그의 주장대로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에 인간들이 믿음이라는 것으로 반응함으로써 그 약속의 대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삭의 선택은 육신적인 혈통에 의한 것도 어떤 공로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E.M. Braiklock).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특별한 배려로 이삭이 태어났다. 아브라함은 무능력했으며 사라는 이미 아기를 가질 수 없었음을 볼 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았음이 더욱 분명해진다(Harrison).

󰃨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 본 구절은 구약의 인용인데, 바울은 구약을 인용함에 있어서 문자 그대로 인용할 때도 있지만(3:4) 자유롭게 인용하기도 하며(3:10-19) 단순한 암시만 하기도 한다(20, 21). 본절은 70인역의 창 18:10, 14을 자유롭게 취사 선택(取捨選擇)하여 인용하였다(Godet, Robertson, Braiklock, Matthew Henry).

 

 

우 모논 데 알라 카이 레벸카 엨스 헤노스 코이텐 에쿠사 이샄 투 파트로스 헤몬

 

개역개정,10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새번역,10 그뿐만 아니라, 리브가도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에게서 쌍둥이 아들을 수태하였는데,
우리말성경,10 그뿐이 아닙니다. 리브가가 또한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인해 임신했는데 
가톨릭성경,10 그뿐만 아니라, 레베카가 한 남자 곧 우리 조상 이사악에게서 잉태하였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어NIV,10 Not only that, but Rebekah's children had one and the same father, our father Isaac.
영어NASB,10 And not only this, but there was Rebekah also, when she had conceived twins by one man, our father Isaac;
영어MSG,10  And that's not the only time. To Rebecca, also, a promise was made that took priority over genetics. When she became pregnant by our one-of-a-kind ancestor, Isaac,
영어NRSV,10 Nor is that all; something similar happened to Rebecca when she had conceived children by one husband, our ancestor Isaac.
헬라어신약Stephanos,10 ου μονον δε αλλα και ρεβεκκα εξ ενος κοιτην εχουσα ισαακ του πατρος ημων
라틴어Vulgate,10 non solum autem sed et Rebecca ex uno concubitum habens Isaac patre nostro
히브리어Modern,10 ולא זאת בלבד כי כן היה גם ברבקה בהיותה הרה לאחד ליצחק אבינו׃


 

성 경: [9:10]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약속의 자녀]

󰃨 이뿐 아니라 -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말씀이 단산(斷産)된 사라에게서 성취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이삭에게서도 성취 되었음을 증명하려 한다. 이러한 사실은 나이 많아 폐경된 사라에게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약속 안에서 성취된 것과 같이 또 다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외부의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선택되었음을 나타낸다.

󰃨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 혹자는 이삭과 이스마엘 중에 선택되고 하나는 유기(遺棄)된 것이 그 외부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한다. 즉 하나는 종의 자녀이며 하나는 주인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선택과 유기가 순수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외부적인 신분에 의하여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똑같은 환경과 신분 속에서도 하나는 선택되고 하나는 유기된 실례를 제시함으로써 다시 한번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한다. 그것은 한 아버지와 한 아내의 태 속에서 잉태된 쌍둥이의 선택과 유기이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그의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 그 뿐만 아니라 같은 날 잉태되어 같은 날 태어나게 된 동일한 환경과 신분을 소유한 자들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서로 다른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의 약속이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리브가에게도 주어졌으며(J. Calvin) 그의 약속은 육신적 후손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후손에 의하여 완전한 하나님의 선택으로 성취됨을 보여준다.

 

 

메포 가르 겐네덴톤 메데 프랔산톤 티 아가돈 에 파울론 히나 헤 캍 에클로겐 프로데시스 투 데우 메네

 

개역개정,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새번역,11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이라는 원리를 따라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이 살아 있게 하시려고,
우리말성경,11 그 자식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고 또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가톨릭성경,11 두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이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택의 뜻을 지속시키시려고,
영어NIV,11 Yet, before the twins were born or had done anything good or bad--in order that God's purpose in election might stand:
영어NASB,11 for though the twins were not yet born, and had not done anything good or bad, in order that God's purpose according to His choice might stand, not because of works, but because of Him who calls,
영어MSG,11  and her babies were still innocent in the womb--incapable of good or bad--she received a special assurance from God. What God did in this case made it perfectly plain that his purpose is not a hit-or-miss thing dependent on what we do or don't do, but a sure thing determined by his decision, flowing steadily from his initiative.
영어NRSV,11 Even before they had been born or had done anything good or bad (so that God's purpose of election might continue,
헬라어신약Stephanos,11 μηπω γαρ γεννηθεντων μηδε πραξαντων τι αγαθον η κακον ινα η κατ εκλογην του θεου προθεσις μενη ουκ εξ εργων αλλ εκ του καλουντος
라틴어Vulgate,11 cum enim nondum nati fuissent aut aliquid egissent bonum aut malum ut secundum electionem propositum Dei maneret
히브리어Modern,11 כי בטרם ילדו בניה ועוד לא עשו טוב או רע למען תקום עצת האלהים כפי בחירתו לא מתוך מעשים כי אם כרצון הקרא׃


 

성 경: [9:11]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약속의 자녀]

󰃨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 - 이들은 육체적으로 쌍둥이라는 합법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선악을 구별할 수도 없는 무능력한 조건 속에 있다. 바울은 태어나기 전 상태의 동일함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선택한 하나님의 주권을 더욱 선명하게 강조한다. 한편 나지도 아니한 때에 선택했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이 태어날 자의 행위에 근거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들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그들의 행위가 선택받기에 합당할 것인지 불합당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다(J. Calvin). 결국 그들의 주장은 선택이 행위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결론이다. 그러나 본절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보다 분명하게 뒤에 나오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라는 표현이 이를 반증한다. 바울은 지금 한 사람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역사적 사실을 제기함으로써 혈육의 관계를 떠나 많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동시에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도 없이 선택하신다 라는 말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은혜를 필연적으로 베풀어야 할 의무가 있다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약속과 긍휼에 근거할 뿐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어떤 자들은 간과하며 또 어떤 자들은 선택하는 것이다(8:28). 야곱과 에서, 이들 두 사람이 모두 기도의 응답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25:21) 이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절대적 권위를 더욱 선명하게 강조한다(1:11).

 

 

우크 엨스 에르곤 알 에크 투 칼룬토스 에레데 아우테 호티 호 메이존 둘루세이 토 엘라쏘니

 

개역개정,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새번역,12 또 이러한 일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시려고,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말씀하시기를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하셨습니다. / ㉦창 25:23
우리말성경,12 행위로 인하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인해 서게 하시려고 리브가에게 말씀하시기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창25:23 
가톨릭성경,12 또 그것이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부르시는 당신께 달려 있음을 드러내시려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 하고 레베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어NIV,12 not by works but by him who calls--she was told, "The older will serve the younger."
영어NASB,12 it was said to her, "THE OLDER WILL SERVE THE YOUNGER."
영어MSG,12  God told Rebecca, "The firstborn of your twins will take second place."
영어NRSV,12 not by works but by his call) she was told, "The elder shall serve the younger."
헬라어신약Stephanos,12 ερρηθη αυτη οτι ο μειζων δουλευσει τω ελασσονι
라틴어Vulgate,12 non ex operibus sed ex vocante dictum est ei quia maior serviet minori
히브리어Modern,12 נאמר לה כי רב יעבד צעיר׃


 

성 경: [9:12]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약속의 자녀]

󰃨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 바울은 창 25:23 중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다. 창세기 본문에서 두 아들에 대한 계시는 바로 민족과 국가에 대한 주제로 전개되고 있다. 이로 인하여 본절에 사용된 '큰 자'(*, 호 메이존)'어린 자'(*, 토 엘랏소니)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분분하다. 혹자는 창세기의 본문이 민족과 국가에 대한 예언으로 전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출발은 분명히 개인에 대한 섬김이라고 주장한다(Hendriksen). 이를 주장하는 이는 창세기에 사용된 '국민'이라는 단어가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보다 근본적인 출발에서 개인에 대한 예언임을 주장한다. 또한 혹자는 이 예언은 에서와 야곱 개인들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그들의 후손인 에돔 족속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예언이라고 주장한다(F.F. Bruce). 그는 증거로서, 에서는 그의 생애 중에 야곱을 섬기지 않았다는 점과 실제로 에돔 족속이 이스라엘이나 유다에 의하여 오랜 기간 동안 속박 되어 있었음을 제시한다(삼하 8:14;왕상 22:47). 실제로 야곱은 형으로부터 장자권을 빼앗은 이후에 형으로부터 섬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망다녀야 하는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으며 또한 형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궁지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절에 대한 해설은 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해 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개인이나 민족 또는 후손에 대한 예언이라는 편협된 시각에서 벗어나 그들의 개인에서 출발한 예언이 궁극적으로 메시야 왕국 속에서 성취되었다는 통시적(洞視的)인 시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개인적인 생애 속에서 동생이 장자권을 이어 받는 것이나 에돔 족속이 속박되는 것으로 제한하기보다는 보다 큰 약속 속에서 예언의 의미를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J. Calvin). 다시 말해서 이 예언은 장자권 양도와 에돔 족속의 속박 등과 같은 역사적 성취뿐만 아니라 메시야 왕국이 궁극적으로 불의로부터 승리할 것을 계시하고 있다.

 

 

카도스 게그랖타이 톤 야코브 에가페사 톤 데 에사우 에미세사

 

개역개정,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새번역,13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 한 것과 같습니다. / ㉧말 1:2; 3
우리말성경,13 기록되기를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말1:2-3 
가톨릭성경,13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우를 미워하였다.”
영어NIV,13 Just as it is written: "Jacob I loved, but Esau I hated."
영어NASB,13 Just as it is written, "JACOB I LOVED, BUT ESAU I HATED."
영어MSG,13  Later that was turned into a stark epigram: "I loved Jacob; I hated Esau."
영어NRSV,13 As it is written, "I have loved Jacob, but I have hated Esau."
헬라어신약Stephanos,13 καθως γεγραπται τον ιακωβ ηγαπησα τον δε ησαυ εμισησα
라틴어Vulgate,13 sicut scriptum est Iacob dilexi Esau autem odio habui
히브리어Modern,13 ככתוב ואהב את יעקב ואת עשו שנאתי׃


 

성 경: [9:13]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약속의 자녀]

󰃨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 바울은 말 1:2, 3을 인용하여 개인들에게 예언된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성취되어졌는가를 증명한다. 한편 여기서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에서에 대한 하나님의 미움을 감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혹자는 셈어적인 개념을 가진 '미워하였다'(*, 에미세사)라는 말이 상대적인 개념으로 '덜 사랑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S. Jeremias). 따라서 여기서 사용된 '미움'이란 말은 단지 에서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대상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Harrison). 하나님은 에서와 그의 후손들을 자신의 특별 은총으로부터 제외시킴으로써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하도록 작정하신 것이다(1:4). 바울은 역사적인 사실에 비추어 하나님의 사랑과 미워하심을 대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가 또 다른 많은 백성들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명분과 기득권을 가진 유대 민족일지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주권적인 섭리로 버려질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티 운 에루멘 메 아디키아 파라 토 데오 메 게노이토

 

개역개정,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새번역,14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말성경,14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불의하십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가톨릭성경,14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 쪽이 불의하시다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영어NIV,14 What then shall we say? Is God unjust? Not at all!
영어NASB,14 What shall we say then? There is no injustice with God, is there? May it never be!
영어MSG,14  Is that grounds for complaining that God is unfair? Not so fast, please.
영어NRSV,14 What then are we to say? Is there injustice on God's part? By no means!
헬라어신약Stephanos,14 τι ουν ερουμεν μη αδικια παρα τω θεω μη γενοιτο
라틴어Vulgate,14 quid ergo dicemus numquid iniquitas apud Deum absit
히브리어Modern,14 אם כן מה נאמר הכי יש עול באלהים חלילה׃


 

성 경: [9:14]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주권]

󰃨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하나님은 에서를 유기하시고 야곱을 선택하실 때에 그들이 다 자랄 것을 기다리지 아니하셨다. 만약 하나님이 그들의 다 자람을 지켜보시고 또한 그들의 업적과 공로를 다 살피신 후에 선택과 유기를 하셨다면 진정한 선택과 유기의 의미는 상실되고 말 것이다(Harrison). 실로 하나님의 선택은 야곱의 행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의 선택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목적에 기인하는 것이기에 어느 누구도 에서에 대한 불공평한 대우와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항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이 선택하신다면 야곱 조차도 결코 선택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야곱에게 있어서 축복은, 행위와 업적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약속의 씨로 선택되었다는 것에 더 큰 사랑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선택의 축복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 본절에서 '불의'(*, 아디키아)는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것인지 또는 그의 행위를 지시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그의 속성이나 행위에 있어서 '불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헬라어 '아디키아'는 어떤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서 법적인 불의를 뜻한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보다 근본적인 근거에서 창조주의 의의 개념을 제시한다(20). 다시 말해서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거나 유기하는 것은 양자 모두에게 불평등한 것이나 잘못된 것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토 모위세이 가르 레게이 엘레에소 혼 안 엘레오 카이 오잌티레소 혼 안 오잌티로

 

개역개정,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새번역,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하셨습니다. / ㉨출 33:19
우리말성경,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내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출33:19 
가톨릭성경,15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
영어NIV,15 For he says to Moses, "I will have mercy on whom I have mercy, and I will have compassion on whom I have compassion."
영어NASB,15 For He says to Moses, "I WILL HAVE MERCY ON WHOM I HAVE MERCY, AND I WILL HAVE COMPASSION ON WHOM I HAVE COMPASSION."
영어MSG,15  God told Moses, "I'm in charge of mercy. I'm in charge of compassion."
영어NRSV,15 For he says to Moses, "I will have mercy on whom I have mercy, and I will have compassion on whom I have compassion."
헬라어신약Stephanos,15 τω γαρ μωση λεγει ελεησω ον αν ελεω και οικτειρησω ον αν οικτειρω
라틴어Vulgate,15 Mosi enim dicit miserebor cuius misereor et misericordiam praestabo cuius miserebor
히브리어Modern,15 כי למשה אמר וחנתי את אשר אחן ורחמתי את אשר ארחם׃


 

성 경: [9:15]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주권]

󰃨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 바울은 또 다른 역사적 사건 곧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를 선택하시고 애굽을 유기하신 사건을 통하여 다시 한번 선택의 절대 주권적 의미를 강조한다. 이에 대한 이해는, 바울이 인용한 출 33:19 당시 상황을 이해한 후에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은혜를 체험하였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숭배하는 큰 죄악을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신 점이다. 이에 대하여 모세는 하나님께 애굽을 용서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백성을 용서하셨는가에 대하여 그 근거를 제시해 줄 것을 요구한다(33:16, 18).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나의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33:19)였다. ,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있는 자'로서 그 어떠한 외부적인 환경과 조건에도 구애됨이 없이 스스로 결정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뜻이라는 '작정' 외에 또 다른 이유는 없는 것이다(J. Calvin). 그러므로 출 33:19의 내용을 인용하여 인간에게 내려지는 구원의 은총이 인간의 노력이나 공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자비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를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의 축복(구원)을 누릴 수가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는 결코 값주고 살 수 없는 절대적인 은혜인 것이다.

 

 

아라 운 우 투 델론토스 우데 투 트레콘토스 알라 투 엘레온토스 데우

 

개역개정,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새번역,16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말성경,16 그러므로 이것은 원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달음질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가톨릭성경,16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영어NIV,16 It does not, therefore, depend on man's desire or effort, but on God's mercy.
영어NASB,16 So then it does not depend on the man who wills or the man who runs, but on God who has mercy.
영어MSG,16  Compassion doesn't originate in our bleeding hearts or moral sweat, but in God's mercy.
영어NRSV,16 So it depends not on human will or exertion, but on God who shows mercy.
헬라어신약Stephanos,16 αρα ουν ου του θελοντος ουδε του τρεχοντος αλλα του ελεουντος θεου
라틴어Vulgate,16 igitur non volentis neque currentis sed miserentis Dei
히브리어Modern,16 ועל כן אין הדבר לא ביד הרצה ולא ביד הרץ כי אם ביד האלהים המרחם׃


 

성 경: [9:16]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주권]

󰃨 원하는 자로...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 '원하는 자'(*, 델론토스)'달음박질하는 자'(*, 트레콘토스)는 앞에서 언급된 에서와 야곱뿐만 아니라 모세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을 의미한다. 바울은 일반적으로 '트레코'(*, '달리다', '경주하다')라는 단어를 긍적적인 의미로서 고대 운동 경기의 승리자를 묘사할 때나(고전 9:24)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는 자신의 삶을 묘사할 때에 사용하였다(2:2;2:16). 그러나 본절에서는 보다 사실적인 의미로서 모세의 소원과 민족을 위한 노력들마저도 아무런 칭찬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였다(Meyer). 아브라함과 모세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경주로 구원을 이룰 자는 아무도 없다. 뿐만 아니라 달음박질조차도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레게이 가르 헤 그라페 토 파라오 호티 에이스 아우토 투토 엨세게이라 세 호포스 엔데잌소마이 엔 소이 텐 뒤나민 무 카이 호포스 디앙겔레 토 오노마 무 엔 파세 테 게

 

개역개정,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새번역,17 그래서 성경에 바로를 두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일을 하려고 너를 세웠다.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나타내고, 내 이름을 온 땅에 전파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 ㉩출 9:16(칠십인역)
우리말성경,17 성경에서 바로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이를 위해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인해 내 능력을 나타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출9:16 
가톨릭성경,17 사실 성경도 파라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이렇게 하려고 내가 너를 일으켜 세웠다. 곧 너에게서 내 힘을 보이고, 온 세상에 내 이름을 떨치게 하려는 것이다.”
영어NIV,17 For the Scripture says to Pharaoh: "I raised you up for this very purpose, that I might display my power in you and that my name might be proclaimed in all the earth."
영어NASB,17 For the Scripture says to Pharaoh, "FOR THIS VERY PURPOSE I RAISED YOU UP, TO DEMONSTRATE MY POWER IN YOU, AND THAT MY NAME MIGHT BE PROCLAIMED THROUGHOUT THE WHOLE EARTH."
영어MSG,17  The same point was made when God said to Pharaoh, "I picked you as a bit player in this drama of my salvation power."
영어NRSV,17 For the scripture says to Pharaoh, "I have raised you up for the very purpose of showing my power in you, so that my name may be proclaimed in all the earth."
헬라어신약Stephanos,17 λεγει γαρ η γραφη τω φαραω οτι εις αυτο τουτο εξηγειρα σε οπως ενδειξωμαι εν σοι την δυναμιν μου και οπως διαγγελη το ονομα μου εν παση τη γη
라틴어Vulgate,17 dicit enim scriptura Pharaoni quia in hoc ipsum excitavi te ut ostendam in te virtutem meam et ut adnuntietur nomen meum in universa terra
히브리어Modern,17 כי כן הכתוב אמר לפרעה בעבור זאת העמדתיך בעבור הראתך את כחי ולמען ספר שמי בכל הארץ׃


 

성 경: [9:17]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주권]

󰃨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 여기서 다시 논리의 전개는 유기(遺棄)의 표본으로 세워진 바로에게로 넘어간다. 바울은 '성경'(*, 헤 그라페)을 의인화시킴으로 당시 바로에게 직접 행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주권적 의지를 보다 생생하게 상기시키고 있다(Bruce, Harrison).

󰃨 내가...너를 세웠으니 - '세웠으니'에 해당하는 '여세게이라'(*)70인경에서는 '디아테레오'(*, '지키다', '보존하다')의 부정과거 수동태인 '디에테레데스'(*)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이것을 능동태 1인칭으로 바꿈으로써 하나님의 예정 의지를 보다 선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특히 70인경과는 달리 '여세게이로'(*, '내가 일으키다')를 사용하여 그 의미를 변형시킨 것은 단순히 70인경을 번역하지 않고 보다 원문에 가까운 뜻을 찾기 위함인 것 같다(Bruce).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의 바로를 단순히 존재케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뜻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 속에 남겨두셨다(Hendriksen. Harrison. Ridderbos). 역사상에 나타난 바로는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점점 더 궁지로 몰아가는 악행을 범하였으나 오히려 하나님 구원을 더 영광된 것으로 만드는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J. Calvin). 하나님은 그를 믿고 섬기는 자들뿐 아니라 그를 대적하는 자들을 통하여서도 영광을 받으실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영광을 위하여 죄를 조성하였다고 판단 할수는 없다(6:1, 2 주석 참조). 본절의 핵심은 죄를 조성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인간들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 내 능력을 보이고...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다 - 하나님이 바로를 세우신 것은 하반절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나님이 바로를 왕으로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명을 보존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창조주의 권위를 만방에 알리시기 위함이다. '능력'(*, 뒤나민)'이름'(*, 오노마)은 서로 다른 단어로 사용되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하다. 왜냐하면 눈에 드러나는 이적적(異蹟的)인 기사들은 하나님의 속성 곧 그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Kasemann). 실제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바로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킨 사건은 그 이후에 다른 모든 민족들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2:10, 11;9:9;삼상 4:8).

 

 

아라 운 혼 델레이 엘레에이 혼 데 데레이 스클레뤼네이

 

 

개역개정,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새번역,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
우리말성경,18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원하시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 
가톨릭성경,18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 만드십니다.
영어NIV,18 Therefore God has mercy on whom he wants to have mercy, and he hardens whom he wants to harden.
영어NASB,18 So then He has mercy on whom He desires, and He hardens whom He desires.
영어MSG,18  All we're saying is that God has the first word, initiating the action in which we play our part for good or ill.
영어NRSV,18 So then he has mercy on whomever he chooses, and he hardens the heart of whomever he chooses.
헬라어신약Stephanos,18 αρα ουν ον θελει ελεει ον δε θελει σκληρυνει
라틴어Vulgate,18 ergo cuius vult miseretur et quem vult indurat
히브리어Modern,18 ויוצא מזה כי את אשר יחפץ יחננו ואת אשר יחפץ יקשהו׃
 

성 경: [9:18]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주권]

󰃨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 -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강퍅하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긍휼을 입었다는 단편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행위는 자유롭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은 '원하는 자'(*, 델론토스)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16) '그의 원하는'(*, 델레이) 바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긍휼은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베푸시는 하나님 자신의 주권에 속하는 문제로서(20:15) 그의 판단은 인간의 거짓된 생각들과는 달리 항상 참되시며 공의로우시다(3:4). 따라서 바울은 본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택적 섭리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면서 바로와 관련된 삽화를 종결시키고 있다.

󰃨 강퍅케 하시느니라 - '그가 강퍅케 하셨다'(*, 스클레뤼네이)라는 표현은 '내가 너를 남겨 두었다'(*, 디아테레오)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이 강퍅케 하도록 결정하셨다는 문자적 의미보다 그의 죄악과 본성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이것은 본서의 1장에 서술된 원리와 긴밀히 관계되어 있다(1:24, 26, 28, 32). 그는 스스로 마음이 완악해지고 또한 스스로 더 큰 죄악을 범함으로 인하여(7:14;8:19) 돌이킬 수 없는 심판에 이르게 되었으며 또한 그는 완고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17). 하나님은 그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지도 아니하셨으며 또한 고의적으로 그의 죄악을 조성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더 큰 죄와 완악함을 만들어 낸 것이다(A. Barnes).

 

 

에레이스 모이 운 티 운 에티 멤페타이 토 가르 불레마티 아우투 티스 안데스테켄

 

개역개정,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새번역,19 그러면 ㉪그대는 내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책망하시는가? 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다는 말인가?" / ㉪실제의 특정한 인물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자를 지칭하는 대명사임
우리말성경,19 그러면 그대는 내게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여전히 책망하시는 것입니까?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하겠습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9 이제 그대는,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사람을 여전히 책망하십니까? 사실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을 것입니다.
영어NIV,19 One of you will say to me: "Then why does God still blame us? For who resists his will?"
영어NASB,19 You will say to me then, "Why does He still find fault? For who resists His will?"
영어MSG,19  Are you going to object, "So how can God blame us for anything since he's in charge of everything? If the big decisions are already made, what say do we have in it?"
영어NRSV,19 You will say to me then, "Why then does he still find fault? For who can resist his will?"
헬라어신약Stephanos,19 ερεις ουν μοι τι ετι μεμφεται τω γαρ βουληματι αυτου τις ανθεστηκεν
라틴어Vulgate,19 dicis itaque mihi quid adhuc queritur voluntati enim eius quis resistit
히브리어Modern,19 וכי תאמר אלי מדוע יוכיח עוד נגד רצונו מי יתיצב׃


 

성 경: [9:19]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 15-18절 사이에 기록된 내용은 본절과 같은 의문을 제기 시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과 유기를 작정하시고 바로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죄인을 강퍅케 하시고 또한 그로 인하여 더 큰 죄에 빠지도록 버려두셨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책망하며 흠잡을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다. , 유기된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느냐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원이나 멸망을 예정하셨다고 해서 이것을 숙명론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가시적(可視的) 규범은 언제나 동일한 결론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한다(11:7, 11).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불가시적(不可視的)인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판단 속에서 하나님을 판단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Hendriksen).

 

 

오 안드로페 메눈게 쉬 티스 에이 호 안타포크리노메노스 토 데오 메 에레이 토 플라스마 토 플라산티 티 메 에포이에사스 후토스

 

 

개역개정,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새번역,20 오, 사람아, ㉫그대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감히 말대답을 합니까? 만들어진 것이 만드신 분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 ㉫실제의 특정한 인물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자를 지칭하는 대명사임 ㉬사 29:16; 45:9
우리말성경,20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말대답을 한단 말입니까? 지음을 받은 것이 지은 자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라고 대들 수 있겠습니까? 사29:16;사45:9 
가톨릭성경,20 아, 인간이여! 하느님께 말대답을 하는 그대는 정녕 누구인가? 작품이 제작자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영어NIV,20 But who are you, O man, to talk back to God? "Shall what is formed say to him who formed it, 'Why did you make me like this?'"
영어NASB,20 On the contrary, who are you, O man, who answers back to God? The thing molded will not say to the molder, "Why did you make me like this," will it?
영어MSG,20  Who in the world do you think you are to second-guess God? Do you for one moment suppose any of us knows enough to call God into question? Clay doesn't talk back to the fingers that mold it, saying, "Why did you shape me like this?"
영어NRSV,20 But who indeed are you, a human being, to argue with God? Will what is molded say to the one who molds it, "Why have you made me like this?"
헬라어신약Stephanos,20 μενουνγε ω ανθρωπε συ τις ει ο ανταποκρινομενος τω θεω μη ερει το πλασμα τω πλασαντι τι με εποιησας ουτως
라틴어Vulgate,20 o homo tu quis es qui respondeas Deo numquid dicit figmentum ei qui se finxit quid me fecisti sic
히브리어Modern,20 אמנם בן אדם מי אתה אשר תריב את האלהים היאמר יצר ליצרו למה ככה עשיתני׃
 

성 경: [9:20]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 '힐문하다'(*, 안타포크리노마이)라는 단어는 '시비하다' 또는 '계속하여 말대꾸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반대자가 누가 '대적하겠느냐'(*, 안데스테케)라고 야유섞인 질문을 던지는 것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인간 존재는 하나님과 더불어 논쟁하거나 그의 뜻에 대하여 정당성을 요구할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이는 '감히'(*, 메눈게)라는 말 속에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를 망각하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논쟁하며 법적인 항변(*, 안데스테케)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다(Lenski).

󰃨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 바울은 사 29:16;45:9;18:1-10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과 동등자가 될 수 없는 피조물의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창조자를 판단할 만한 지혜를 가지지 못한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항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18:4).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공의로우신 뜻을 따라 선택과 유기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기 때문에 그의 선하신 뜻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29:29). 따라서 사도가 하나님의 선택적 섭리를 다룬 후 하나의 가상적 질문을 제시한 19절에 대한 답변은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 마치 전능자를 판단할 충분한 지혜를 갖추기나 한 것처럼 하나님께 항의를 하는 것은 부적당하다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사도는 다음절에서 토기장이와 진흙을 예로 들고 있다. 바울은 단지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자신의 절대적인 권리와 능력에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결정에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할 뿐이다.

 

 

에 우크 에케이 엨수시안 호 케라뮤스 투 펠루 에크 투 아우투 퓌라마토스 포이에사이 호 멘 에이스 티멘 스큐오스 호 데 에이스 아티미안

 

개역개정,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새번역,21 토기장이에게, 흙 한 덩이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귀한 데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한 데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습니까?
우리말성경,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를 가지고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다른 하나는 막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습니까? 
가톨릭성경,21 또는, 옹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한 덩이는 귀한 데 쓰는 그릇으로, 한 덩이는 천한 데 쓰는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없습니까?
영어NIV,21 Does not the potter have the right to make out of the same lump of clay some pottery for noble purposes and some for common use?
영어NASB,21 Or does not the potter have a right over the clay, to make from the same lump one vessel for honorable use, and another for common use?
영어MSG,21  Isn't it obvious that a potter has a perfect right to shape one lump of clay into a vase for holding flowers and another into a pot for cooking beans?
영어NRSV,21 Has the potter no right over the clay, to make out of the same lump one object for special use and another for ordinary use?
헬라어신약Stephanos,21 η ουκ εχει εξουσιαν ο κεραμευς του πηλου εκ του αυτου φυραματος ποιησαι ο μεν εις τιμην σκευος ο δε εις ατιμιαν
라틴어Vulgate,21 an non habet potestatem figulus luti ex eadem massa facere aliud quidem vas in honorem aliud vero in contumeliam
히브리어Modern,21 אם אין רשות ליצר על החמר לעשות מגלם אחד כלי אחד לכבוד ואחד לקלון׃


 

성 경: [9:21]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 진흙 한 덩이로...권이 없느냐 - 이것은 구약의 대표적인 두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미야에 의해서 사용된 예화로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사상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대변해 주고 있다(29:16;18:6). 아울러 토기장이와 질그릇의 관계처럼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에 달려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자칫하면 '인간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면 인간의 노력은 전혀 무익한 것이냐'하는 존재론적 운명론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에 빠질 위험에 봉착한다. 그러나 바울은 19, 20절에서 이에 대한 논리적 답변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바른 태도는 순종과 헌신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렌스키(Lenski)는 본절의 의미가 단지 천하게 만들어진 그릇이 토기장에서 항변할 수 없듯이 강퍅하도록 내버려진 자들도 항의할 수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은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귀하게 만들었느냐 천하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일을 행하실 때에 자유하다는 사상, 즉 하나님의 주권은 무한한 자율성을 전제로 하고 있음에 강조점이 있다.

 

 

에이 데 델론 호 데오스 엔데잌사스다이 텐 오르겐 카이 그노리사이 토 뒤나톤 아우투 에넹켄 엔 폴레 마크로뒤미아 스큐에 오르게스 카테르티스메나 에이스 아폴레이안

 

개역개정,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새번역,22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을 보이시고 권능을 알리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멸망받게 되어 있는 진노의 대상들에 대하여 꾸준히 참으시면서 너그럽게 대해 주시고,
우리말성경,22 만일 하나님께서 진노를 보이시고 능력을 알리시고자 멸망받도록 예비된 진노의 그릇에 대해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가톨릭성경,22 하느님께서 당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당신의 힘을 알리기를 원하시면서도, 멸망하게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들을 큰 은혜로 참아 주셨다면,
영어NIV,22 What if God, choosing to show his wrath and make his power known, bore with great patience the objects of his wrath--prepared for destruction?
영어NASB,22 What if God, although willing to demonstrate His wrath and to make His power known, endured with much patience vessels of wrath prepared for destruction?
영어MSG,22  If God needs one style of pottery especially designed to show his angry displeasure
영어NRSV,22 What if God, desiring to show his wrath and to make known his power, has endured with much patience the objects of wrath that are made for destruction;
헬라어신약Stephanos,22 ει δε θελων ο θεος ενδειξασθαι την οργην και γνωρισαι το δυνατον αυτου ηνεγκεν εν πολλη μακροθυμια σκευη οργης κατηρτισμενα εις απωλειαν
라틴어Vulgate,22 quod si volens Deus ostendere iram et notam facere potentiam suam sustinuit in multa patientia vasa irae aptata in interitum
히브리어Modern,22 ומה אפוא אם האלהים החפץ להראות זעמו ולהודיע גבורתו נשא בכל ארך רוחו את כלי הזעם הנכונים לאבדון׃


 

성 경: [9:22]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 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로부터 한 단계 발전된 진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를 논증한다. 죄인의 형벌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바울은 자주 다른 표현으로 기록한다(2:4). 하나님은 죄인의 멸망을 고의적으로 조성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단지 오래 참으심과 긍휼을 베푸시는 일에 관여하신다. 특히 그의 인내심은 진노의 그릇이라 할지라도 회개할 기회를 제공하시며 또한 회개한 자를 기꺼이 용납하고자 하시는 증거이다(벧후 3:9). 따라서 본절에서 '멸하기로 준비된'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을 끝내 무시하고 심판에 직면하는 죄인의 최종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Harrison), '준비된'(*, 카테르티스메나)이라는 말이 '완료 수동태'로서 누군가에 의하여 멸망이 '완료 수동태'로서 누군가에 의하여 멸망이 준비되었으며 그의 멸망의 때는 무르익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멸망을 준비한 자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설령 그가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이는 죄인이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강퍅케한 행동에 대한 형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Hendriksen).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멸망의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범죄한 죄로 인하여 멸망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Bruce). 그러므로 왜 누구는 택하시고 안 택하시느냐 ? , 택함을 받지 못한 것은 누구의 책임이냐?를 하나님께 묻는 것이 잘못된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즉 하나님은 모두가 죄인인 상태에서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을 오로지 당신의 사랑으로 마음에 합당한 자를 일부 구원하신 것이지 근본적으로 누구는 조금 낫고 누구는 조금 못한데도 불구하고 불평등한 처사를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는 자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오고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는 것이고(2:7) 반면에 멸망당하는 자가 있는 것은 하나님이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본래 죄값으로 멸망함을 나타낸다. 따라서 문제의 근원은 죄인인 인간편에 있음을 보여준다.

 

 

카이 히나 그노리세 톤 플루톤 테스 돜세스 아우투 에피 스큐에 엘레우스 하 프로에토이마센 에이스 돜산

 

개역개정,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새번역,23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 자비의 대상들에 대하여 자기의 풍성하신 영광을 알리시고자 하셨더라도, 어떻다는 말입니까?
우리말성경,23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에 대해 그분의 영광이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면 어찌하겠습니까? 
가톨릭성경,23 그리고 영광을 받도록 미리 마련하신 자비의 그릇들에게 당신의 풍성한 영광을 알리려고 그리하셨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렵니까?
영어NIV,23 What if he did this to make the riches of his glory known to the objects of his mercy, whom he prepared in advance for glory--
영어NASB,23 And He did so in order that He might make known the riches of His glory upon vessels of mercy, which He prepared beforehand for glory,
영어MSG,23  and another style carefully crafted to show his glorious goodness, isn't that all right?
영어NRSV,23 and what if he has done so in order to make known the riches of his glory for the objects of mercy, which he has prepared beforehand for glory--
헬라어신약Stephanos,23 και ινα γνωριση τον πλουτον της δοξης αυτου επι σκευη ελεους α προητοιμασεν εις δοξαν
라틴어Vulgate,23 ut ostenderet divitias gloriae suae in vasa misericordiae quae praeparavit in gloriam
히브리어Modern,23 להודיע גם את עשר כבודו על כלי החנינה אשר יעדם לכבוד׃



성 경: [9:23]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 본절은 22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양쪽에 사용된 상징적인 표현들의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동일한 원리로 작용하였다. 다시 말해서 진노의 그릇들을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지만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富饒)함을 알게 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양자 모두를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동일한 하나님의 섭리였으나 그들이 초래한 결과는 전혀 다른 신분을 만들고야 말았다. '긍휼의 그릇'들은 '진노의 그릇'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풍요함을 인하여 구원의 기쁨을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를 경험하게 되었다(8:30). 따라서 본절의 '영광'은 개인의 구원에 관계된 하나님의 은혜일 뿐만 아니라 민족과 개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죄의 타락으로부터(3:23)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Hendriksen, Barmby).

 

 

후스 카이 에칼레센 헤마스 우 모논 엨스 유다이온 알라 카이 엨스 에드논

 

개역개정,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새번역,24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되, 유대 사람 가운데서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서도 부르셨습니다.
우리말성경,24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로 이 그릇으로 부르셨으니, 곧 유대 사람 가운데서뿐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서도 부르셨습니다. 
가톨릭성경,24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유다인 가운데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도 불러 주셨습니다.
영어NIV,24 even us, whom he also called, not only from the Jews but also from the Gentiles?
영어NASB,24 even us, whom He also called, not from among Jews only, but also from among Gentiles.
영어MSG,24  Either or both happens to Jews, but it also happens to the other people.
영어NRSV,24 including us whom he has called, not from the Jews only but also from the Gentiles?
헬라어신약Stephanos,24 ους και εκαλεσεν ημας ου μονον εξ ιουδαιων αλλα και εξ εθνων
라틴어Vulgate,24 quos et vocavit nos non solum ex Iudaeis sed etiam ex gentibus
히브리어Modern,24 והם אנחנו אשר קראם לא מן היהודים בלבד כי אף מן הגוים׃


 

성 경: [9:24]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 이 그릇은 우리니...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 바울은 은혜의 충만함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임하였음을 선언하다. '긍휼의 그릇'23절에서 '진노의 그릇'이 완고한 유대인들을 칭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문이 모든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음을 시사한다. 23절의 '예비하셨다'(*, 프로에토이마센)에서 암시된 약속은 '부르셨다'(*, 에칼레센)라는 선언 속에서 성취되었다. 특히 바울이 유대인들을 전체로 묘사하지 않고 '중에서'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유효적(有效的) 소명으로서 참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임을 시사한다(6;2:28, 29;11:5, 7). 또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참 이스라엘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부르심을 받은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보편적 교회의 일원으로 세우심을 받는다(Hendriksen). 결국 바울은 '긍휼의 그릇'이라는 개념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초월하여 오직 성령의 내적 소명에 의해서만 형성되어지는 참 이스라엘, 즉 우주적 교회를 제시하려 했던 것이다(1:13-16;2:10, 11;3:22-24, 30;4:11, 12;8:32;16:26;3:9, 29;2:14-18).

 

 

호스 카이 엔 토 호세에 레게이 칼레소 톤 우 라온 무 라온 무 카이 텐 우크 에가페메넨 에가페메넨

 

개역개정,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새번역,25 그것은 하나님이 호세아의 글 속에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사람을 '내 백성'이라고 하겠다. 내가 사랑하지 않던 백성을 '사랑하는 백성'이라고 하겠다." / ㉭호 2:23
우리말성경,25 호세아서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백성이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받지 못한 자를 사랑받는 자라 부를 것이다” 호2:23 
가톨릭성경,25 이는 바로 호세아서에서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자들을 ‘ 내 백성’ 이라 부르고 사랑받지 못한 여인을 ‘ 사랑받는 여인’ 이라 부르리라.
영어NIV,25 As he says in Hosea: "I will call them 'my people' who are not my people; and I will call her 'my loved one' who is not my loved one,"
영어NASB,25 As He says also in Hosea, "I WILL CALL THOSE WHO WERE NOT MY PEOPLE, 'MY PEOPLE,' AND HER WHO WAS NOT BELOVED, 'BELOVED.'"
영어MSG,25  Hosea put it well: I'll call nobodies and make them somebodies; I'll call the unloved and make them beloved.
영어NRSV,25 As indeed he says in Hosea, "Those who were not my people I will call 'my people,' and her who was not beloved I will call 'beloved.'"
헬라어신약Stephanos,25 ως και εν τω ωσηε λεγει καλεσω τον ου λαον μου λαον μου και την ουκ ηγαπημενην ηγαπημενην
라틴어Vulgate,25 sicut in Osee dicit vocabo non plebem meam plebem meam et non misericordiam consecutam misericordiam consecutam
히브리어Modern,25 כדברו בהושע אקרא ללא עמי עמי וללא רחמה רחמה׃


 

성 경: [9:25]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 바울은 이방이 유효적 부르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되는 것을 호 2:23을 인용하며 논증한다.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호 2:23은 이방인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고멜의 방탕과 같은 죄와 형벌 속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기를 상징하는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 호세아는 고멜의 방탕중에 잉태한 네 자녀의 이름 중 두 자녀의 이름을 '로루하마'(이스라엘 백성을 긍휼히 여겨 사하지 않을 것)'로암미'(내 백성이 아님)라는 상징적 의미로 지음으로써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함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셨다(F.F. Bruce).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바울이 초대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당시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베드로도 벧전 2:10에서 호 2:23을 이방 신자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는데 이와같은 적용은 하나님의 회복과 구원의 원리가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었음을 시사한다(Hendriksen).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불러 그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3:22).

 

 

카이 에스타이 엔 토 토포 후 에르레데 아우토이스 우 라오스 무 휘메이스 에케이 클레데손타이 휘오이 데우 존토스

 

개역개정,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새번역,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그 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 ㉠호 1:10 ㉡그, '아들들'
우리말성경,26 “그리고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그들에게 말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호1:10 
가톨릭성경,26 그들에게 ‘ 너희는 나의 백성이 아니다.’ 하던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
영어NIV,26 and, "It will happen that in the very place where it was said to them, 'You are not my people,' they will be called 'sons of the living God.'"
영어NASB,26 "AND IT SHALL BE THAT IN THE PLACE WHERE IT WAS SAID TO THEM, ' YOU ARE NOT MY PEOPLE, 'THERE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THE LIVING GOD. "
영어MSG,26  In the place where they yelled out, "You're nobody!" they're calling you "God's living children."
영어NRSV,26 "And in the very place where it was said to them, 'You are not my people,' there they shall be called children of the living God."
헬라어신약Stephanos,26 και εσται εν τω τοπω ου ερρηθη αυτοις ου λαος μου υμεις εκει κληθησονται υιοι θεου ζωντος
라틴어Vulgate,26 et erit in loco ubi dictum est eis non plebs mea vos ibi vocabuntur filii Dei vivi
히브리어Modern,26 והיה במקום אשר יאמר להם לא עמי אתם יאמר להם בני אל חי׃


 

성 경: [9:26]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 본절은 호 1:10의 인용으로 혹자는 앞절과는 달리 본절이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적용되는 예언이라고 주장한다(Barmby). 즉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때 이 호세아서의 예언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등에 흩어져 있었던 유대인들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원리가 이방인에게나 유대인들에게 동일하다는 것을 생각할때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이방인이나 유대인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시는 것은 동일한 예언속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이지만 본절은 특별히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Hendriksen. Harrison). 이방인들뿐 아니라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도 보편적인 교회의 일원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에사이아스 데 크라제이 휘페르 투 이스라엘 에안 에 호 아리드모스 톤 휘온 이스라엘 호스 헤 암모스 테스 달라쎄스 토 휘폴레임마 소데세타이

 

개역개정,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새번역,27 그리고 또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두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을지라도, 남은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 ㉢사 10:22; 23
우리말성경,27 이사야도 이스라엘에 대해 부르짖기를 “비록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알 같을지라도 오직 남은 자만 구원받을 것이다. 
가톨릭성경,27 그리고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두고 이렇게 외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다 하여도 남은 자들만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영어NIV,27 Isaiah cries out concerning Israel: "Though the number of the Israelites be like the sand by the sea, only the remnant will be saved.
영어NASB,27 And Isaiah cries out concerning Israel, "THOUGH THE NUMBER OF THE SONS OF ISRAEL BE AS THE SAND OF THE SEA, IT IS THE REMNANT THAT WILL BE SAVED;
영어MSG,27  Isaiah maintained this same emphasis: If each grain of sand on the seashore were numbered and the sum labeled "chosen of God," They'd be numbers still, not names; salvation comes by personal selection.
영어NRSV,27 And Isaiah cries out concerning Israel, "Though the number of the children of Israel were like the sand of the sea, only a remnant of them will be saved;
헬라어신약Stephanos,27 ησαιας δε κραζει υπερ του ισραηλ εαν η ο αριθμος των υιων ισραηλ ως η αμμος της θαλασσης το καταλειμμα σωθησεται
라틴어Vulgate,27 Esaias autem clamat pro Israhel si fuerit numerus filiorum Israhel tamquam harena maris reliquiae salvae fient
히브리어Modern,27 וישעיהו צוח על ישראל כי אם יהיה מספר בני ישראל כחול הים שאר ישוב בו כליון חרוץ שוטף צדקה׃


 

성 경: [9:27]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무효화되지 않았으며 유대인들도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을 얻게 될것이라고 논증한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창조자의 영광 속에서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묘사된 반면(22) 유대인들은 남은 자만 구원을 얻는다고 묘사돼 있다. 유대인의 구원은 더 이상 민족 단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야곱의 자손 중에서도 그의 선하신 뜻에 의하여 남겨진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Kasemann). 사실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의 글은(10:22, 23) 당시 이스라엘의 위치 속에서 백성의 보존을 예언한 글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앗수르에 멸망한 이스라엘 중에 남은 자들만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지만 그 궁극적 의미는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를 떠난 이스라엘 유대 민족 중에 여호와의 능력을 의지한 자들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을 시사한다(Hendriksen). 따라서 '남은 자'에 대한 이사야서의 예언은 구별된 유대 민족들 중에서도 연단(鍊鍛)의 심판을 통해 그 수효가 감소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Harrison) 또한 하나님의 긍휼과 신실성을 더 크게 나타내는 구약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예서 더 큰 구원의 약속을 발견한 것이다.

 

 

로곤 가르 쉰텔론 카이 쉰템논 포이에세이 퀴리오스 에피 테스 게스

 

개역개정,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새번역,28 주님께서는 그 말씀하신 것을 온전히, 그리고 조속히 온 땅에서 이루실 것이다."
우리말성경,28 주께서 그 말씀하신 것을 땅 위에서 온전하고 신속히 이루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10:22-23 
가톨릭성경,28 주님께서는 말씀을 온전히 또 조속히 세상에 실현시키실 것이다.”
영어NIV,28 For the Lord will carry out his sentence on earth with speed and finality."
영어NASB,28 FOR THE LORD WILL EXECUTE HIS WORD UPON THE EARTH, THOROUGHLY AND QUICKLY. "
영어MSG,28  God doesn't count us; he calls us by name. Arithmetic is not his focus.
영어NRSV,28 for the Lord will execute his sentence on the earth quickly and decisively."
헬라어신약Stephanos,28 λογον γαρ συντελων και συντεμνων εν δικαιοσυνη οτι λογον συντετμημενον ποιησει κυριος επι της γης
라틴어Vulgate,28 verbum enim consummans et brevians in aequitate quia verbum breviatum faciet Dominus super terram
히브리어Modern,28 כי כלה ונחרצה אדני עשה בקרב הארץ׃


 

성 경: [9:28]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 10:23에 대한 인용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의지가 반드시 실현될 것을 표명한다. 이는 '남은 자'의 구원이라는 사상 속에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이 성취될 것도 포함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앗수르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그 중에 남은 자를 회복하신 것과 같이 완악한 유대인들에 대한 구원과 심판도 절대적으로 성취될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카이 카도스 프로에이레켄 에사이아스 에이 메 퀴리오스 사바오드 엥카텔리펜 헤민 스페르마 호스 소도마 안 에게네데멘 카이 호스 고모라 안 호모이오데멘

 

개역개정,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새번역,29 그것은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주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 ㉣사 1:9(칠십인역)
우리말성경,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하기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소돔같이 되고 고모라같이 됐을 것이다” 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사1:9 
가톨릭성경,29 이는 또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후손을 남겨 주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소돔처럼 되고 고모라같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영어NIV,29 It is just as Isaiah said previously: "Unless the Lord Almighty had left us descendants, we would have become like Sodom, we would have been like Gomorrah."
영어NASB,29 And just as Isaiah foretold, "EXCEPT THE LORD OF SABAOTH HAD LEFT TO US A POSTERITY, WE WOULD HAVE BECOME AS SODOM, AND WOULD HAVE RESEMBLED GOMORRAH."
영어MSG,29  Isaiah had looked ahead and spoken the truth: If our powerful God had not provided us a legacy of living children, We would have ended up like ghost towns, like Sodom and Gomorrah.
영어NRSV,29 And as Isaiah predicted, "If the Lord of hosts had not left survivors to us, we would have fared like Sodom and been made like Gomorrah."
헬라어신약Stephanos,29 και καθως προειρηκεν ησαιας ει μη κυριος σαβαωθ εγκατελιπεν ημιν σπερμα ως σοδομα αν εγενηθημεν και ως γομορρα αν ωμοιωθημεν
라틴어Vulgate,29 et sicut praedixit Esaias nisi Dominus Sabaoth reliquisset nobis semen sicut Sodoma facti essemus et sicut Gomorra similes fuissemus
히브리어Modern,29 וכאשר אמר ישעיהו לפנים לולי יהוה צבאות הותיר לנו שריד כמעט כסדם היינו לעמרה דמינו׃


 

성 경: [9:29]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하나님의 구원 섭리]

󰃨 씨를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 소돔과 고모라는 구약성경에서 그 성민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철저히 멸망당한 대표적인 성읍들이다(18:20;19:23-28;29:23;50:40;4:11). 본절에서 유대인의 멸망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비유한 것은 유대인들이 완악함으로 인하여 심판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완악한 유대 민족을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완전히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를 남겨두신 것은 그분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주장한다. 이것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하여 완전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당시 상황을 묘사한 것이나 보다 강조점을 두고 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러한 상황 속에 적은 자를 남겨 두셨다는 사상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씨, '남은 자'(the remnant)들을 남겨두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선민(選民)임을 고사하고 제 2의 소돔과 고모라가 되어 저주받은 민족의 대명사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선민이라고 자처하며 구원의 독점성을 주장하던 이스라엘의 적나라한 실상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죄악의 심층부에 자리한 소돔 고모라 사이의 윤리성을 사실상 백지 한 장 차이도 안 되었다. 그러기에 더욱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이 돋보이는 것이다.

 

 

티 운 에루멘 호티 에드네 타 메 디오콘타 디카이오쉬넨 카텔라벤 디카이오쉬넨 디카이오쉬넨 데 텐 에크 피스테오스

 

개역개정,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새번역,30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의를 추구하지 않은 이방 사람들이 의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서 난 의입니다.
우리말성경,30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의를 따르지 않은 이방 사람이 의, 곧 믿음으로 인한 의를 얻었으나 
가톨릭성경,30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의로움을 추구하지 않던 다른 민족들이 의로움을, 믿음을 바탕으로 의로움을 얻은 것입니다.
영어NIV,30 What then shall we say? That the Gentiles, who did not pursue righteousness, have obtained it, a righteousness that is by faith;
영어NASB,30 What shall we say then? That Gentiles, who did not pursue righteousness, attained righteousness, even the righteousness which is by faith;
영어MSG,30  How can we sum this up? All those people who didn't seem interested in what God was doing actually embraced what God was doing as he straightened out their lives.
영어NRSV,30 What then are we to say? Gentiles, who did not strive for righteousness, have attained it, that is, righteousness through faith;
헬라어신약Stephanos,30 τι ουν ερουμεν οτι εθνη τα μη διωκοντα δικαιοσυνην κατελαβεν δικαιοσυνην δικαιοσυνην δε την εκ πιστεως
라틴어Vulgate,30 quid ergo dicemus quod gentes quae non sectabantur iustitiam adprehenderunt iustitiam iustitiam autem quae ex fide est
히브리어Modern,30 ועתה מה נאמר הגוים אשר לא רדפו אחרי הצדקה השיגו את הצדקה היא הצדקה אשר מתוך האמונה׃

 

 
성 경: [9:30]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행위로 의를 추구]

󰃨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 이 표현은 14절에서도 사용되었으나 그 의미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14절에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반대자들의 논리를 반박하는 의미로 쓰였으나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나니 -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철저한 율법 속에서 의의 성취를 기다렸던 유대인들이 버림받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인간의 죄악을 무시하고는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된 인간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변화를 받을 때에 구원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 변화는 오직 믿음에서 난 ''로만 가능하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흑암에 거하던 이방인들 속에서 복음으로 나타났으며 이는 그들의 믿음으로 성취되었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믿음에서 난 의요 - 이방인들이 의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이방인 속에는 어떠한 윤리와 도덕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 보다 못한 윤리 의식을 소유하고 있었다거나 또는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으나 그 ''의 개념은 윤리와 도덕이 아닌 구원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Kasemann). 유대인들이 ''의 성취를 위하여 그토록 노력하였으나 ''의 성취는 불행하게도 이방인 가운데서 성취되었다. 사도는 이것은 믿음에서 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복음에 순종하는 자가 약속의 자녀요 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었다. 믿음으로 인해 그들은 의로 여기신 바 되었던 것이다(3:28, 30).

 

 

이스라엘 데 디오콘 노몬 디카이오쉬네스 에이스 노몬 우크 에프다센

 

개역개정,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새번역,31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31 의의 율법을 따르던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성경,31 그런데 이스라엘은 의로움의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그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영어NIV,31 but Israel, who pursued a law of righteousness, has not attained it.
영어NASB,31 but Israel, pursuing a law of righteousness, did not arrive at that law.
영어MSG,31  And Israel, who seemed so interested in reading and talking about what God was doing, missed it.
영어NRSV,31 but Israel, who did strive for the righteousness that is based on the law, did not succeed in fulfilling that law.
헬라어신약Stephanos,31 ισραηλ δε διωκων νομον δικαιοσυνης εις νομον δικαιοσυνης ουκ εφθασεν
라틴어Vulgate,31 Israhel vero sectans legem iustitiae in legem iustitiae non pervenit
히브리어Modern,31 וישראל בבקשו אחרי תורת צדקה לתורת הצדקה לא הגיע׃


 

성 경: [9:31]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행위로 의를 추구]

󰃨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 이스라엘의 실패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곡해하여 잘못된 의를 추구한 데 있다(10:2). 유대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의를 추구하였으나 율법을 그릇된 방법으로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의와는 동떨어진 개인의 공로와 업적을 자랑하는 육신의 법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러나 개인의 의를 자랑하는 육신의 법으로써는 의를 성취할 수가 없다. 오히려 율법의 의는 육체의 법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자들 속에서 성취되었다(8:4). 한편 바울은 '좇다'(*, 디오콘)라는 단어를 경주(競走)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여 유대인의 열심있는 경주는 결국 이방인들에게 승리를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역설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Harrison). 이방인의 승리는 그들이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믿음으로써 의가 주어졌다는 칭의를 증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의를 추구한 이스라엘의 행위가 얼마나 쓸모없는 것임을 폭로한다.

 

 

디아 티 호티 우크 에크 피스테오스 알 호스 엨스 에르곤 프로세콮산 토 리도 투 프로스콤마토스

 

개역개정,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새번역,32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음에 근거하여 의에 이르려고 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근거하여 의에 이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우리말성경,32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로 의를 얻는 것처럼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가톨릭성경,32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을 믿음으로 찾지 않고 행위로 찾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영어NIV,32 Why not? Because they pursued it not by faith but as if it were by works. They stumbled over the "stumbling stone."
영어NASB,32 Why? Because they did not pursue it by faith, but as though it were by works. They stumbled over the stumbling stone,
영어MSG,32  How could they miss it? Because instead of trusting God, they took over. They were absorbed in what they themselves were doing. They were so absorbed in their "God projects" that they didn't notice God right in front of them, like a huge rock in the middle of the road. And so they stumbled into him and went sprawling.
영어NRSV,32 Why not? Because they did not strive for it on the basis of faith, but as if it were based on works. They have stumbled over the stumbling stone,
헬라어신약Stephanos,32 διατι οτι ουκ εκ πιστεως αλλ ως εξ εργων νομου προσεκοψαν γαρ τω λιθω του προσκομματος
라틴어Vulgate,32 quare quia non ex fide sed quasi ex operibus offenderunt in lapidem offensionis
히브리어Modern,32 ועל מה יען אשר לא מאמונה דרשוה כי אם ממעשים כי התנגפו באבן נגף׃


 

성 경: [9:32]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행위로 의를 추구]

󰃨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 이 인용문은 사 28:16, 8:14의 내용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말씀이다.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28:16).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8:14). 바울은 이 두 구절의 핵심을 매우 능숙한 솜씨로 배합하여 한 문장으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사실은 사 8:14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인 '거치는 돌'이 바울의 인용문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민으로 모든 특권을 누리던 이스라엘에게 제시된 복음은 거치는 돌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사야는 앗수르의 침략 속에서 그들에게 구원으로 제시된 하나님의 손길을 반석으로 묘사하고 있다(8:13-15).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반석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될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도움을 구하는 자는 오히려 그 반석으로 인하여 넘어지고 부러질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제시된 복음은 완고한 유대인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고, 넘어지는 돌이 되었다(Bruce).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행위의 율법을 자랑함으로써 스스로 함정과 올무에 빠지게 된 것이다. 행위를 자랑하고 말씀과 복음에 순종치 아니한 유대 민족들은 그들에게 제시된 구원과 십자가를 오히려 그들을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벧전 2:8).

 

 

 

카도스 게그랖타이 이두 티데미 엔 시몬 리돈 프로스콤마토스 카이 페트란 스칸달루 카이 호 피스튜온 엪 아우토 우 카타이스퀸데세타이

 

개역개정,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새번역,33 그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보아라, 내가 시온에,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둔다. 그러나 ㉥그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 ㉤사 8:14; 28:16(칠십인역) ㉥또는 '그것을 의지하는 사람은'
우리말성경,33 기록되기를 “보라, 내가 시온에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두리니 그를 믿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사8:14;사28:16 
가톨릭성경,33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보라, 내가 시온에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을, 부딪쳐 쓰러지게 하는 바위를 놓는다. 그를 믿는 이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영어NIV,33 As it is written: "See, I lay in Zion a stone that causes men to stumble and a rock that makes them fall, and the one who trusts in him will never be put to shame."
영어NASB,33 just as it is written, "BEHOLD, I LAY IN ZION A STONE OF STUMBLING AND A ROCK OF OFFENSE, AND HE WHO BELIEVES IN HIM WILL NOT BE DISAPPOINTED."
영어MSG,33  Isaiah (again!) gives us the metaphor for pulling this together: Careful! I've put a huge stone on the road to Mount Zion, a stone you can't get around. But the stone is me! If you're looking for me, you'll find me on the way, not in the way.
영어NRSV,33 as it is written, "See, I am laying in Zion a stone that will make people stumble, a rock that will make them fall, and whoever believes in him will not be put to shame."
헬라어신약Stephanos,33 καθως γεγραπται ιδου τιθημι εν σιων λιθον προσκομματος και πετραν σκανδαλου και πας ο πιστευων επ αυτω ου καταισχυνθησεται
라틴어Vulgate,33 sicut scriptum est ecce pono in Sion lapidem offensionis et petram scandali et omnis qui credit in eum non confundetur
히브리어Modern,33 ככתוב הנני יסד בציון אבן נגף וצור מכשול וכל המאמין בו לא יבוש׃

 

성 경: [9:33]

주제1: [유대인의 구원문제]

주제2: [행위로 의를 추구]

󰃨 내가 부딪히는 돌과...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 ''(*, 페트란)은 시편 118:22에 기록된 '버린 돌'과 사 28:16에 기록된 '시온의 기초 돌'로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킨다(20:17). 이것은 또한 단 2:34절에 기록된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로 이는 세상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시온에 두신 돌은 멸망과 저주를 선포하는 돌이 아니라 구원과 영광을 선포하는 피난처이었으나 유대인들은 이 돌을 거침돌로 만듦으로서 스스로 저주와 멸망 가운데 처하게 되었다(고전 1:18, 23). 그들은 행위와 그리스도라는 양자 택일의 선택에서 행위를 선택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되었으나 십자가는 오히려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되었다(Harrison). 여기서 바울의 결론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십자가를 의지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찾으려 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다(Hendriksen). 믿음 안에서 복음에 순종하는 자는 피난처이신 시온의 반석 안에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