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1(Rome)
이탈리아에 들어온 인도 유럽어 부족들 가운데 라틴족은 테베레 강 하구와 라티움 평야 주위의 고립된 지역을 차지하면서 분리된 한 사회를 형성하였다. 라틴 족은 북쪽으로 에트루리아 제국, 남쪽으로 그리스 해양 식민지들, 그리고 반도의 나머지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동족이지만 적대적인 이탈리아 부족들에 둘러싸여 압박을 받았다. 이러한 지정학적 요인으로 라틴어를 쓰는 공동체들 속에서 일체감이 생겼으며, 흩어져 있던 이 집단들은 연맹과 동맹을 형성하게 되었다. 저지대에 살았던 이들은 평야 사람들이 후퇴할 수 있는 방책으로 방비된 대피처를 건설하였으며 언덕과 고지에 성채를 쌓았다. 로마는 이렇게 하여 존재하게 되었다. 가장 오래된 아크로폴리스(acropolis)라 할 수 있는 팔라티노 언덕에는 양을 치는 한 공동체의 방책이 건설되었다.
로마에는 팔라티노 언덕 외에도 카피톨리노, 아벤티노, 첼리오, 에스퀼리노, 비미날레, 퀴리날레 등 높이 50m 내외의 6개 언덕이 있었다. 테베레 강은 이 지역을 S자 모양의 곡선을 이루며 관류한다. 테베레 강은 좁고 깊게 흐르는 경향이 있다. 이런 지리가 역사에 지배적 역할을 하였다. 언덕과 돌출부들은 마침내 각 개의 공동체들에 의해 점유되었다. 에스퀼리노와 퀴리날레 언덕에서 발견된 B.C.9세기의 유적들이 그 모습을 보여준다. 라틴 동맹의 오랜 습관이 이들에게 일체감을 부여했으며, 마침내는 공동의 제도와 방어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얕은 테베레 강을 가로지르는 교통은 필연적으로 이 지점에 집중되었다. 북부의 에트루리아인과 남부의 그리스인과 이탈리아인들 간의 모든 교역은 테베레 강의 이 지점을 통과하여야 했다. 테베레 강 계곡은 바다와 언덕(구릉) 지역의 교역의 간선 도로이기도 하였다. 언덕 지역 정착민(이주민)들은 이탈리아의 주요 교통로에 자리 잡았으며, 이같은 유리한 입지를 확보했던 사람들은 언제나 부와 권력을 쌓게 되었다.
이 정착민들은 B.C. 6세기에 처음의 로마시를 형성했으며 B.C.4세기 무렵 로마는 거대한 인구 도시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에는 항상 사람들이 살아 왔던 탓에 건물들이 누적되어 있어 고고학적 조사가 한계에 부딪쳐 그 상을 명확히 그려내기 어렵다. 수로, 다리, 방파제, 신전, 시와 가문의 자랑인 기념비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이룩되었다. 건축 활동의 융성기를 추적하는 것은 가능하다. B.C.2세기 말 속주의 착취가 시작되면서 이루어진 자본 유입은 팽창을 촉진하였다. 술라(Sulla)는 중심적인 도시의 틀을 짜려고 노력했으며, 폼페이는 도시를 장식하는 많은 일을 하였고, 아구스도는 벽돌로 지어진 도시를 대리석으로 지은 도시로 바꾸어 놓은 것을 자랑하였다. 아구스도는 제국의 두 세기를 위한 유행을 만들어 놓았으며,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적들은 B.C.1세기와 2세기의 것이다. 예를 들면, 카라칼라, 디오클레티안, 콘스탄틴의 거대한 목욕탕, 그리고 가장 유명한 것 중의 하나로 아직도 중세 이름 그대로 콜로세움이라 불리는 플라비우스의 원형극장이 모두 이시대의 것이다.
B.C.1세기가 바뀔 무렵, 이 위대한 도시에서의 생활의 위험과 불편들에 관해서는 [유베날의 세번째 풍자](Third satire of Juvenal)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로마시의 인구는 기독교 시대의 시작 무렵 100만을 넘어섰으며, A.D.1세기 중에는 이 숫자를 넘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로마시에는 세계에서 몰려든 잡다한 인구들이 살고 있었다. 2세기 초 유베날은 외국인 군중들을 도시 행활의 가장 큰 두통거리의 하나로 여기며 교통 위험, 화재, 무너지는 집과 같이 위험시하고 있다. 3세기와 4세기 제국 전반에 걸쳐 도시의 쇠퇴 현상이 나타나 로마시도 내리막길을 걸어 서로마 제국 말기에 로마의 인구는 50만 가까이로 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제국의 세기들에 걸쳐 기독교 인구를 개략적으로 추산하는 것이 가능하다. 카타콤에는 10세대의 기독교인들이 묻혀 있다. 석회암 바위 속의 지하통로들의 범위나 여기에 포함된 무덤 수를 정확하게 산출하기는 어렵다. 그 길이는 가장 낮게 잡으면 583km, 가장 높게 잡으면 1000km가 된다. 매장 수는 가장 낮게 잡아 175만, 가장 높게 잡으면 400만이 된다. 가장 낮은 수치에 근거하면 매 세대당 기독교 인구의 평균치를 175000, 가장 높은 수치에 근거하면 40만이 된다. 기독교 인구는 초기에는 적고 후기에 많았을 것이므로 175000으로 낮게 잡은 평균치는 이 10세대의 중간시기, 곧 3세기 중엽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로마시의 인구가 3-4세기에는 100만에 훨씬 미달했을 것으로 볼 때 기독교 인구는 적어도 로마시 전체 인구의 5분의 1이 되며, 실제로는 그보다 더 높은 비율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기본(Gibbon)이 이 시기의 기독교 인구를 로마시 인구의 20분의 1로 추산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제임스 오어는 85년전 쯤의 그의 몰간 강연에서 카타콤은 또한 제국의 수도에서 기독교가 수직적으로 퍼져갔던 증거를 제공한다고 지적하였다(James Orr, Neglected Factors in the History of the Early Church). 이와 함께 그는 교회는 "거의 전적으로 하층민으로 구성되었다"는 기본의 말을 반박하였다. 예를 들면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전해준 폼포니아 그레시나(Pomponia Graecina)의 경우는 카타콤에 추적해 볼 수 있다.
드 로시(De Rossi)는 루시나의 토굴(지하실)이 폼포니아의 가족과 관련된 사실을 밝히고 루시나(Lucina)는 폼포니아라는 여성의 세례명이었을 가능성을 설득력있게 제시하였다. 타키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폼포니아는 기독교 신앙 때문에 가족의 비판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미티안 치세 때까지 살았던 폼포니아가 기독교인이었다면, 그녀는 두 귀족 - 집정관 플라비우스 클레멘스(Flavius Clemens)가 그의 아내 도미틸라(Domitilla) - 의 개종에 관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는 도미티안의 조카였고, 도미틸라는 도미티안의 질녀였다.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는 이 두 사람은 기독교인들에게 공통되게 퍼부어진 '무신론'의 혐의와 "유대인들의 관습을 좇아 방황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알려 준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는 사형을 당하고 그의 아내 도미틸라는 추방을 당하였다. 드 로시는 이 빛나는 한 쌍이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사실을 확고히 해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도미틸라의 토굴은 물론 우아하게 건축된 '플라비안스의 토굴'(crypt of the Flavians)도 발견하였다. "플라비우스 가문 전체가 기독교를 포용하였다"는 하르낙(Harnack)의 주장은 이로써 확고해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플라비우스 클레멘스와 도미틸라는 로마 제국에서 도미티안 다음 가는 높은 지위에 있었다. 이들 두 아들은 도미티안에 의해 상속자로 지명을 받기까지 했다. 제임스 오어는 "마지막 사도가 그가 수고한 무대를 떠나기 전에 기독교는 거의 제국의 자리에 오르려 했던 것 같이" 여겨진다고 지적했다(위의 책, pp.117이하).
로마는 성경에서 바벨론과 같이 기독교에 대항하는 조직화된 이교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계시록의 으시시한 이미지의 숲에서 요한은 제국과 도시를 그의 죄의 상징들 속에서 뒤섞어 놓고 있다. 계시록 17장과 18장은 로마의 멸망을 그리고 있다. 계시록 17장은 충격적인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로마를 일곱 산(언덕)에 걸터 앉아 세계를 악으로 오염시키는 음녀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계시록 18장은 히브리인의 '조롱하는 노래'와 같이 들린다. 이 계시록 18장은 두로에 관한 에스겔의 표현을 상기시켜주는 이미지들 속에서 동방의 어느 항구에서 로마로 짐을 싣고 떠나는 배들을 그리고 있다.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었다(계18:12-13). 그러나 부요와 사치로 얼룩진 로마의 끝은 비참하다.
로마시는 역사적 맥락에서 성경에 서너번 등장한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경우는 바울의 강요된 로마 체류이다. 바울은 보디올에 이틀 동안 머물다가 로마로 떠났다. 바울의 소식을 들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바울을 맞으러 나왔다(행28:14-15). 나사렛 포고문으로 볼 때 1세기 40년대 후반 글라우디오 치세 때 이후 기독교인의 집단이 로마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2년 동안 지냈던 '셋집'(28:30)은 어느 외딴 공동주택이었을 것이다.
로마2(Roman Empire)
1. 영토. 영토적 현상으로 볼 때 로마제국은 B.C. 7-6세기에 시작된 일련의 팽창 과정의 결과였다. 이 팽창 과정은 타이버(Tiber) 강 유역 낮은 구릉 지대의 전략적 요지를 차지했던 라틴 사회에 에트루리아인들(Etruscans)의 압박이 가해지면서 시작되었다. 연합된 라틴계 이주민 집단의 연맹체이자 주요 요새가 에트루리아식 이름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로마로 불리웠다. 이 집단은 에트루리아인들의 압박에 직면하여 역동적 통일체를 형성한 데서 비롯되었다. B.C.509년 에트루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 로마는 안정된 변경의 확보에 나서기 시작하였으며, 이것이 로마 제국 역사의 주요 동기를 이루게 되었다. 로마는 단계적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하고 그 주민들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문화와 제국이 아시아적 기원을 가졌던 에트루리아인들, 반도의 고지대 요지와 연접한 평야를 차지했던 이탈리아 부족들, B.C.8세기 이래 해안지대에 식민지를 두었던 그리스인들, 그리고 마침내는 북부 이탈리아와 포 평야(Poplain)의 켈트계 갈리아인들이 로마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이탈리아는 B.C.3세기 중엽 알프스 산맥까지 로마가 되었다. 이 대도시 제국이 이룩되자 곧 로마는 북부 아프리카 해안의 거대한 베니게 상업 제국인 카르타고와 충돌하게 되었다. 그리스인과 카르타고인이 반반이었던 시실리 섬은 두 대륙의 중간에 끼었으며 서부 지중해는 강대국들의 공동 소유지가 되기에는 너무 협소한 것이 드러나 두 강대국의 첫 각축지가 되었다.
로마는 60년 간의 간헐적인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시실리, 사르디나, 스페인을 그 첫 속주(province)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해외 제국이 가시화되기 시작했으나 국방과 안전이 확보되지 않아 로마는 계속 스페인과 그리스 반도로 진출해 갔다. 시저(가이사)와 폼페이와 같은 후대의 지도자들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그리고 전반적으로 로마 제국주의는 개인적 영광과 신비주의의 동기로 정복을 추구했던 알렉산더나 체계적으로 제국을 건설하고 세계의 부를 막강한 수도에 집중시켰던 산헤립이나 느부갓네살, 또는 노골적으로 전리품을 찾아나선 코르테스나 피자로의 경우와 달랐다. 제국의 물질적 번영으로 공화국의 지배 계급의 타락을 가져왔던 B.C.2세기와 1세기에 들어서도 로마제국의 팽창과 정복은 여전히 안정된 변경과 군사적 안전의 확보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리스, 소아시아, 중동을 통한 동부로의 진출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마게도니아가 카르타고를 지원했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이 동방 진출은 수리아 제국과의 충돌로 이어졌으며, 폼페이가 동부 지중해 지역을 평정한 B.C.63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팽창의 역사적 과정은 연속적으로 나타난 위협과 로마가 이 위협에 맞선 데서 비롯되었다. 라인 강과 북부 브리튼의 요새화로 끝을 맺은 갈리아를 통한 북부로의 팽창도 이와 같은 동기로 이루어진 과정이었다. 폼페이가 동부 제국의 건축가였다면 쥴리어스 시저는 서부 제국의 건설자였다. 군사령관들의 개인적인 야심은 역사가가 무시할 수 없는 한 요소이다. 그러나 평정되지 않은 북부 후배지들(hinterlands)로부터의 야만족의 진입로에 대한 불안이 갈리아와 영국 해협을 넘는 연접한 섬들을 정복하게 자극한 요인이었던 점도 사실이다.
그리스도 기원이 시작되면서 로마 제국은 그 팽창의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아구스도는 공고화 정책을 폈으며, 이 정책은 로마 팽창의 물리적 한계가 보인다는 현실적 인식에 기초해 있었다. 장기적으로 추구되었던 안정된 변경 확보는 여전히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A.D.9년에 있었던 주요한 한 군사적 재난으로 인해 아구스도는 라인강을 북구 변경 선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도나우(다뉴브)는 자연히 동부의 변경 선으로 되었다. 라인-도나우 선은 전반적으로 로마 제국의 한계선으로 남았다. 그 이상의 지역은 완전한 통합이 힘들었으며 보다 안전하고 보다 방어하기 쉬운 선택 대안은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역사는 라인-도아우 선을 방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었다. 스페인, 갈리아, 브리튼은 서부의 안정된 지지벽이었으며 남부로의 진출은 전략적으로 가장 안정된 사막의 변경인 사하라에서 머물렀다. 동부는 안전이 완전히 확보된 적이 없었으며, 계시록에 보이는 일부 이미지들은 유브라데에서 넘어오는 활을 가진 기병대에 대해 중동에서 느꼈던 공포감을 반영한 것이다.
지중해역과 서부 유럽 주위의 영토를 평정하고 조직하였던 로마 제국에 신약이 탄생하고 초기 교회가 수립되었다. 이 지역의 안전은 로마 제국 덕분이었다. 이 안전은 여러 큰 위험들과 중대한 불리점들을 딛고 이루어졌던 것으로 3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또한 로마 제국으로 인해 이 지역은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된 정부를 가졌으며 그리스, 로마, 팔레스타인을 융합시키는 생활공동체도 가능해졌으며, 이것이 신약과 그 이후의 기독교 세계의 배경과 기후를 이루었다.
2. 정치. 로마 제국은 로마 공화정과 구분되어야 한다. 제국은 원수정(principate)으로 알려진 통치체제를 가리킨다. 악티움 해전의 날인 B.C.31년을 공화정이 제국으로 바뀐 분기범으로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자의적이다. 악티움 해전에서 쥴리어스 시저의 조카 손자이자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격파하였다. 승리자가 된 옥타비아누스가 공화정의 기존 권력을 한 손에 장악하고 '프린셉'(princeps), '임페라토르'(imperator), '아구스도'(Augustus)라는 칭호에 수반된 위광까지 얻었을 당시 이 사건의 표면만을 지켜본 사람은 50년 동안 헌정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왔던 정책이 한층 더 강화된 것 이상의 어떤 변화나 전환도 의식하지 못하였다. 비상 대권의 허용으로 오래 전부터 독재 정치의 길이 준비되어 왔으며 아구스도에 이르러 이것이 전면화되었을 뿐이다.
원수정을 불러 온 헌정의 와해의 기원은 한 세기 이전으로까지 소급되어질 수 있다. 원로원은 로마가 카르타고와 투쟁할 비상시에 명확히 규정된 법적 권한보다 위광에 의해 로마를 통치하였다. 엄격한 과두제, 로마에 장군과 집정관을 공급하였던 대가문들은 힘과 시대가 요구하는 결단력으로 다스렸으며, 이들의 지도력에 불만이 생길 이유가 없었다. 로마는 B.C. 2세기 시작 무렵 오랫동안 시달렸던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위기를 벗어났다. 2세기 말엽 공화정을 와해시키고 원수정으로 바꾸어 놓은 병폐들이 전면화되었다. 원로원의 지도력은 아담한 도시 국가와 이탈리아에는 적합하였으나 제국을 다스리기에는 역부족임이 드러났다. 따라서 원로원이 해결하기 어려운 새로이 등장한 선동가들의 도구가 된 도시 군중, 정복 지역의 통치에서 오는 부패, 장군들의 권력, 이 세 가지 문제는 모두 제국 건설에서 기인된 문제였다. 정복 지역으로 대대적인 자본 유입이 시작되면서 이탈리아 토지 이용에 변화가 생겼으며 이로 인해 몰락하게 된 농민 계급은 도시 노동 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다. 장군들은 원격 지역 방어의 필요성과 새로운 변경이 요구하는 군사력으로 인해 권력을 갖게 되었다. 살여관이나 사병 모두 이 새로운 변경에 기득권을 갖고 있었다. 로마는 다음 4세기 동안 이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유일한 해결책은 강력한 자유 중산 계급의 창출이었으며 기독교를 조기에 수용했다면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쥴리우스 시저는 군사적 지배자 가운데서 가장 명망이 높았으나 원로원의 부패와 공화정의 와해를 무모하게 독단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탓에 불만을 품은 한 원로원 의원의 단검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보다 적절한 인물이었다. 행운을 얻은 데다 기미한 외교술과 동료를 가려내는 뛰어난 솜씨를 겸비했던 탓에 그는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그의 권력은 항상 합법성의 냄새를 풍겼다. 후에 아구스도라는 영예로운 칭호로 불리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최고 사령관으로 혼자서 '임페라토르'라는 직함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의미에서만 황제였다(이때까지는 전쟁에 승리한 장군들은 모두 휘하 장병들에게 '임페라토르'로 환영을 받아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는 '제1시민'을 뜻하는 '프린셉'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의 여러 가지 권력, 기능, 특권들은 독재 정치나 마찬가지였다. 이 체제는 평화를 가져다 주었으며, 세계는 특히 속주들은 자유의 허울을 평화와 바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치적 의미로 볼 때 로마 제국은 중요한 여러 세기 동안 지중해 세계에 비교적 평화를 유지하여 로마의 평화를 이룩한 통치의 틀이었다. 옛부터 통치자를 신격화하는 데 익숙했던 동방의 속주들이 일찍이 황제 숭배의 관습을 확립했던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관념은 호라티우스나 베르길리우스와 같은 로마 시인들의 저술들을 통해 유행하게 되었다. 이 시인들은 아구스도의 신의 소명을 진심으로 믿었으며 신에 대한 보다 높은 관점이 결여되었던 탓에 운명을 지배하는 단순한 인간에게 신의 속성을 부여하는 데 아무런 모순도 느끼지 못하였다. 이것은 로마가 제국의 통합의 수단으로 선택한 황제 숭배의 불길한 시작이었으며, 이로 인해 로마 제국은 교회와 충돌을 빚게 되었다. 로마 제국이 교회를 조기 수용하였더라면 보다 고결하고 효과적인 통합을 이룩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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