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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로마서 / 로마사람(로마인)

로마서(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Romans)

신약성경의 여섯번째 책으로 바울 서신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이며, 가장 길다. 또한 이 책은 기독교 교리가 가장 조직적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1. 저작 연대와 장소. 바울은 로마서를 쓸 당시의 상황을 본 서신 안에서 논의하면서(15:25-29) 예루살렘으로 떠날 예정임을 지적하였다. 예루살렘 여행의 목적은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회에서 거둔 헌금을 전달하는 데 있음을 밝혔다(15:26). 로마서의 이 정보는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간 후 다시 로마를 방문할 결심에 관해 보도한(행19:21)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바울은 아가야(고린도 교회는 아가야 지방에 속해 있었다)에서 3개월을 보냈다(행20:2-3). 학자들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와의 친밀한 관계는 이 때 형성된 것으로 보며, 이 점은 바울이 그가 고린도에서 개종시킨(고전1:14) 가이오와 함께 있음(롬16:23)을 언급한 데서 확인된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그리스(헬라)에 있는 동안 로마서를 썼다는 사실을 근거로 로마서의 저작 연대를 추정해 볼 수 있다. 바울의 고린도 체류 연대는 그가(이보다 앞서 고린도를 방문하여) 아가야 총독 갈리오 앞에 섰던(행18:12-17) 사실을 근거로 추정해야 한다. 갈리오는 50년에서 54년 어간에, 이중 51년에 총독으로 재직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바울이 갈리오 앞에 섰던 때로부터 나중에 다시 고린도로 되돌아갈 때까지의 기간을 산정하는 일은 누가가 '바울은 다 여러 날 유하다가'(행18:18)하는 식으로 막연하게 서술한 탓에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로마서의 저작 연대를 A.D.54년에서 59년 사이로 보며, 이중에서 55-56년을 더 유력하게 본다. 

2. 기록 목적. 이 서신이 쓰여진 이유를 알기는 어렵지 않다. 첫째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롬11:13;15:16. 참고. 행9:15;222:15-21;26:17-20,23;갈2:7-9;엡3:2-8)임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며, 로마는 당시 이방 세계의 수도로 여겨져왔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으며, 로마 방문은 그의 일반적 활동 원리에 부합하였다. 그는 전략적 중심지에 교회들을 설립하였으며, 주요 도시들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로마에는 아마도 여행 중에 복음을 들었던 이방인들이 세운 듯한 교회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특이한 정책이었다(롬15:17-24. 참고. 고후10:14-16). 따라서 그의 로마 방문 제안은 그것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첫째, 그는 이들의 영적 축복을 위해 특별히 기여할 것이었고(롬1:1-13), 둘째, 그는 서바나로 복음을 전하러(15:23-24) 가는 길에 로마를 방문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로마 교회가 그의 이 계획을 도와 줄 것을 보탁하고 있었다. 로마서의 구조는 바울의 여행 계획들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한편, 바울이 서신을 써야 할 신학적인 큰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울의 선교 초기에 갈라디아서를 써야 했던 것과 같은 문제 때문이었다. 이 문제는 구약과 당시의 바리새적 유대교 및 그리스도의 지상 활동으로 충족된 복음의 관계에 관한 문제였다. 베드로가 새 시대에 적응하기는 어려웠던 반면에(갈2:6-14 이하) 바울은 변화를 감당해내었다(행15:7-12. 참고. 벧후3:15-16). 갈라디아서가 복음의 '대헌장'이라면, 로마서는 그 '헌법'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의 신학적 내용은 로마 교회뿐 아니라 신약시대 교회에 제시되어야 했지만, 로마의 환경은 바울이 보다 차분한 자세로 좀더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갖고 갈라디아에서와 같이 지역적인 문제에 대인적으로 개입되지 않으면서 갈라디아서의 중심 교리를 확대시키기에 알맞았다. 그리하여 그는 로마 방문의 목적과 그의 평생 선교와 메시지의 주요 목적을 설명하였따. 로마 교회 안에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알력과 오해가 있었다. 로마서 말미의 개인적 문안 인사들은 이 교회가 혼성 교회임을 말해준다. 이 문제는 이 서신의 거의 모든 부분에 반영되어 있지만 3,4,9,10,11장의 경우에는 특별히 그러하다. 이 양쪽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팽팽히 맞섰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후에도 바울과 협력하려고 했던 로마 교회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마가와 유스도라 하는 예수(골4:10-11)뿐이었으며,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이렇듯 복음과 복음에 함축된 의미들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3. 핵심 사상. 로마서의 주제가 '하나님의 의'(1:16-17)라는 데는 일반적으로 이견이 없으나 그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일부 주석자들은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업적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수여하는 의로 해석한다. 다른 주석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구원) 행위로 해석한다. 이중 후자의 해석이 보다 나은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오랜 세기 동안 학자들은 칭의(인간ㅇ르 의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행위. 개역은 '의롭다 함을 얻음')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인간의 새로운 지위를 가리키는 것인가 - 이 경우 칭의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지위를 부여받음을 의미하게 된다 -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되는 인간의 새로운 도덕적 성품을 가리키는 것인가 - 이 경우 칭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높은 도덕적 기준을 성취할 수 있게 인간의 삶에 작용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의미하게 된다 - 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여 왔다. 개신교, 특히 루터교 학자들은 칭의는 하나님이 죄인을 사면하시는 행위, 혹은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행위로, 도덕적 변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로마 가톨릭 학자들은 칭의는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게 만드시는 행위 혹은 도덕적 중생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를 둘러싼 열띤 논쟁에서 어느 한쪽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기독교에 대한 왜곡된 관점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칭의를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행위로만 강조하고 그에 뒤따르는 죄인의 도덕적 성품의 변화를 무시하는 것은 도덕적 성취로서의 칭의를 강조하여 행동하는 삶이 믿음의 삶을 압도하게 하는 것 만큼이나 잘못이다. 칭의는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새로운 지위와 이 지위과 요구하는 새로운 삶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해석이다. 

'하나님의 의'가 올바른 관계를 갖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이해되는 때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점이 분명해진다. 이 선언을 경험하고, 동시에 죄를 삶의 방식으로서 거부하는 인간은 죄와 치열한 투쟁을 벌이며 악에 대한 그리스도의 완전 승리를 기대하게 된다. 바울에 의하면 구원은 이렇듯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앞에 의로운 지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가 가능케 하시는 새로운 삶을 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이다. 학자들은 이 현실을 바울 사상 안에 있는 직설법(indicative)과 명령법(inperative)으로 본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일을 지적하고(직설법) 독자들에게 그것을 성취하라고 권면하였다(명령법). 예를 들면, 바울은 하나님의 선물을 확인하면서 -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6:22) - 동시에 같은 문맥에서 그 요구에 맞게 살도록 독자들에게 권면하였다 -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6:!9). 이같이 잦은 직설법과 명령법의 진술들은 일견 모순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진술들은 바울이 기독교를 이해한 방식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직설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명령법)을 하도록 요청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구원(1:16)은 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의 생활의 중심을 죄의 세력과의 치열한 투쟁으로 이해하였다. 하나님 앞에서의 새로운 지위(칭의)는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인간의 눈을 열어 준다. 믿음의 경험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안하고 그것을 성취하도록 하심으로써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죄의 세력에서 해방시킨 일이 계시된다(1:17). 

바울의 관점에서 기독교인은 죄의 세력과 죄의 세력을 이기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불신자는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 바울은 이 새로운 이해와 그것이 기독교인에게 가져다 주는 갈등의 영역을 그의 유대적 유산과 관련지어 서술하였다. 그는 아담과 그리스도를 인간 실존의 두 가지 가능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사용하였다. 죄는 아담을 통하여 세상에 들어왔다. 그러나 죄는 혼자 들어온 것이 아니다. 바울의 사고 속에서 사망은 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5:12-14). 죄와 사망의 이 두 현실은 너무나 큰 위력을 지녔기에 바울은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5:14,21)고 까지 말했다. 바울이 말하는 거룩하지 못한 3대 세력 중 세번째 현실은 그 자체로는 거룩하다고 느꼈던 율법(7:12)이다. 죄의 세력은 율법을 자체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데서 위력을 과시하였다(7:8-11). 하나님과 그의 창조 목적에 대적하는 이 복합적 세력은 그리스도의 통치권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세력과 철저히 대적한다. 죄는 의와, 율법은 은혜와, 사망은 생명과 대적한다(5:18-21). 이 양 진영은 현재의 세계에 존재하여, 불신자들은 악의 세력에 철저히 통제되고 있으며 신자들은 죄의 지배력과 자신들을 장악하려는 죄의 시도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투쟁을 계속적으로 벌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다. 

바울은 또한 죄와의 투쟁을 초점으로한 그의 기독교인의 삶에 관한 관점을 밝히기 위해 다른 표현 수단들로 사용하였다. 1세기의 많은 사람들은 물질과 영(사고 또는 의식) 사이에 불변의 적대 관계가 존재하며, 물질은 악의 근원이며, 영은 선의 원천으로 느꼈다. 바울은 이 언어를 이용하였으나 육(물질)을 영과 대립시키는 헬라 사상의 이원론에 따랐던 것은 아니다. 물질로서의 육 그 자체는 중성적인 것으로 악하거나 선한 본성을 지닌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죄의 통제 아래 있는 인간은 '육 안에' 잇는 자로 '영 안에' 있는 삶과 대조가 된다(8:9-11). 이 육의 현세에서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의 요구에 부응하여 '영을 좇아' 살도록 하여야 한다(8:4-8).

신약에서 유일하게 바울은 아담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영역에로의 전환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6:5-11).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우리는 죽으신 '그와 연합한 자'가 된다(6:5). 그리스도와의 이 연합으로 죄의 모든 추한 모습이 폭로된다. 믿는 자는 예수와 같이 하나님을 따르며 죄의 지배를 거부하고 죄의 종말은 사망임을 깨닫는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부활로 우리는 그와 함께 죽음에서 일어나 영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이 죽음과 부활로 우리는 죄의 세력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죄에서 해방된다. 기독교인은 죄와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 하나님의 자원을 갖는다. 그러나 죄와의 치열한 투쟁은 필연적이다(6:11).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가 된다. 바울 서신들 안에서 100번 이상 사용되고 바울의 글 외에서도 가끔 사용된 이 표현은 바울이 구원을 서술할 때 즐겨 쓰는 방식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은혜와 생명과 의의 세력장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힘으로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성경)를 토대로 죄의 세력과 투쟁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기독교인으로 승리하게 하는 힘을 말할 때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며', '그리스도 안에'로 표현한다(8:1-11). 

4. 로마서의 구조. 로마서는 '하나님의 의'의 주제가 로마의 기독교인들에게 타당하게 전개되는 것과 함께 엄밀한 논리성을 띠며 진행된다. 바울은 로마 기독교인들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이 논의를 모든 시대, 모든 장소의 기독교인들의 요구에 응답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로마서 서론(1:1-15)은 바울의 사도적 자격을 제시하며(1-7절) 로마서를 쓴 이유를 설명한다(8-15절). 서론에 이어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구원을 가져 왔다(1:16-17)는 그의 서신의 주제를 산뜻하게 밝혔따. 그런 후 그는 로마서의 주요한 첫째 부분에서 모든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 그의 주제를 뒷받침하는데(1:18-3:20) 먼저 죄의 세력이 이방인들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1:18-32) 이어서 죄의 세력이 유대인들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2:1-3:8). 바울은 모든 인간은 죄의 지배 아래 있다(3:19-20)는 요약된 말로 이 부분의 결론을 맺었다. 

두번째 주요 부분은 하나님이 믿음을 기초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수여하시는 의(3:21-4:25)를 다룬다. 바울은 하나님이 율법과 무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에서 그의 의를 나타내셨으며, 믿음을 기초로 하나님은 인간을 의롭게 여기셨다고 선언하였다(3:21-26). 믿음에 의한 칭의는 율법에 따른 공로로 성취된 인간의 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음으로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율법의 공로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보다 선행한다고 외친다. 이것은 하나님이 칭의를 위해 공로를 요구하신다는 유대인의 반론에 대한 대응이다(3:27-4:25).

미등ㅁ에 의한 칭의를 확실히 한 후 바울은 로마서의 세번째 부분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역사의 영향과 그 함축된 의미를 논하면서 구원이 어떻게 승리의 새로운 삶을 가져 오는가에 초점을 맞춘다(5:1-8:39). 칭의의 직접적 결과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에 기초한 하나님과의 화평의 실현이며,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불순종의 결과를 역전시키셨으므로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게 된다(5:1-21). 구원의 핵심은 기독교인의 지속적인, 그러나 승리를 거두는 죄와의 투쟁에서 나타난다(6:1-7:25). 이 승리의 투쟁은 성령으로 체험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의를 실천하도록 우리를 돕기 때문에 가능하다(8:1-39).

그리스도가 가져 오신 구원은 유대 기독교인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거부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느꼈던 유대인들의 운명에 대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바울은 네번째 부분(9-11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그가 하신 모든 약속들 -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들까지도 - 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데서 나타났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거부한데 대해 개인적 유감을 표시했으며(9:1-15), 하나님은 항상 그러하셨듯이 이스라엘을 주관적으로 다루셨다고 주장했다(9:6-29). 이스라엘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 들이기를 거부한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다(9:30-10:21).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는 그의 자비하심에 나타나며,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은 모두 이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11:1-36). 

마지막 부분은 실천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권고한 내용이다(12:1-15:13). 기독교인들은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며(12:1-2), 이 변화된 삶은 받은 바 영적 은사들을 충실히 실천하는 데서(12:3-21), 국가에 대한 의무를 완수하는 데서(13:1-7), 사랑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실행하는 데서(13:8-14), 그리고 교회의 교제에서 형제들을 양육하고 특히 약한 형제들을 견인하는 일에 힘쓰는 데서(14:1-15:13) 입증되어야 한다. 

서신의 결론(15:14-16:27)에서 바울은 그의 사역을 요약하고 미래의 계획을 밝히면서 기도를 당부하였다(15:14-33). 그런 후 그는 뵈뵈를 천거하고(16:1-2), 개별적으로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그의 서신을 마무리하였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6:27). 

 

로마사람/로마인

1. 로마 제국의 시민(행22:25이하;23:27). <참조> 시민권

2. 로마의 거주민(행2:10).

3. 로마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들(요11:48;행2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