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왜 Bavvai
느헤미야와 함께 성벽 재건에 동참한 사람 중 하나로 당시 그일라의 반쪽 구역을 다스렸으며 헤나닷의 아들이다(느3:18).
바요나 시몬 Simon Bar-Jona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의 또 다른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즉 바요나는 요나의 아들인 베드로를 가리킨다(마16:17).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요한의 아들로 불리기도 하는데(요 1:42;21:15-17) 여기에는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크게 베드로의 아버지의 이름이 두 가지로 불리웠든지 아니면 히브리 이름이 헬라어로 음차될 때 두 가지로 되었든지 하는 두 가지 설로 압축되지만 여기에 대하여 분명히 밝혀져 있지는 않다.
바우 Pau
에돔 왕 바알하난이 죽고 대신하여 하달이 왕이 되었을 때의 에돔의 도성이다(창 36:39). '바이' 라고 불리기도 하는데(대상1:50),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바울 Paul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 바울의 생애에 관한 성경의 주요한 정보 자료는 사도행전이며, 바울 서신들이 이를 보충해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바울 서신들은 그의 파란만장한 감동적 생애의 많은 사건들이 미처 기록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참고, 고후11:24-28).
1. 이름. 바울의 히브리 이름은 사울(헬, 사울로스)이었으며, 그가 바보에서 바예수와 충돌할 때까지 사도행전에서 항상 사울로 불리운다. 사도행전 13:9의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 이란 표현 이후부터 그의 이름은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어 나타난다. 그의 서신들에서는 항상 바울로 지칭된다. 로마 시민이었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두 이름을 지녔던 것이 틀림없다. 그의 두 가지의 이름은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 이란 누가의 표현에 함축되어 있다. 두 가지 이름을 쓰는 것은 흩어진 유대인들의 관례였다. 그가 이방인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지도적 위치에 서기 시작했을 때 헬라어 이름을 사용한 것은 시기 적절한 처사였다.
2. 배경. 당시 세계 생활의 3가지 요소인 헬라 문화, 로마 시민권, 히브리 종교가 이방인 사도에게서 만나진 것은 섭리였다. 바울은 1세기 초 지중해 북동쪽 구석에 위치한 활발한 헬라 - 로마 도시 다소에서 태어났다. 유명한 교역 중심지였던 다소는 염소 털옷 제조로 이름을 떨쳤으며 젊은 사울도 장막 만드는 기술을배웠다(행18:3), 다소에는 유명한 대학이 있었다. 바울이 이 대학에 다녔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 영향으로로마제국에 유행하던 생활과 견해들을 잘 이해할 수있게 되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는 로마 시민으로 태어나는 특권을 누렸다(22:28). 그러나 그의 부친이 어떻게 이 부러운 신분을 지니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않다. 바울은 이 유리한 신분을 이용하여 지방관원들의 횡포를 막아냈으며 기독교 신앙의 지위를 고양시켰다. 그의 이방인과의 관련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알력을 중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중심적 의의를 갖는 것은 그의 막강한 유대적 유산이었다. 그의 근본을 형성한 것은 바로 이 유대적 유산이었다. 그는 부끄럼 없이 유대인으로 자처하였으며(21:39;22:3), 그의 유대적 배경을 자랑했고(고후11:22), 그의 골육의 형제(동포)들에 대한 깊고 끝없는 애정을 품었다(롬9:1-2;10:1).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구약에 나타난 그의 백성의 종교적 소망을 버리는 것은 아니었다(행24:1416;26:6-7). 바울은 유대인이었던탓에 어느 도시에서나 회당에서 전도를 시작할 수 있는 큰 이점을 갖고 있었으며 회당에서 잘 준비된 청중을 만날 수 있었다.
가장 순수한 유대인 혈통을 타고나(빌3:5) 바리새인의 아들(행23:6) 그는 정통 유대교에서 자랐다. 13세쯤 되어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 유명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마쳤다(22:3;26:45), 우수하고 열성적인학도였던(갈1:14) 그는 구약의 가르침은 물론 학자들의 랍비 학문까지 흡수하였다. 사도행전에 '청년'(7:58)으로 처음 등장하던 때, 적어도 30세는 되었을 바울은 이미 유대교의 인정받는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기독교를 극렬하게 반대했던 그는 스데반의 순교 후에 발생한 박해의 주동자가 되었다(7:58-8:3;9:1-2), 사도행전 26:10-11 에 서술된 박해들은 그가 유대교를 열광적으로 믿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기독교인들은 이단이며 주의 영예를 위해서는 이런 이단을 박멸해야한다고 굳게 믿었다(26:9).
3. 회심. 박해(핍박)는 그의 보다 아름다운 심정에는 맞지 않았으나 사울은 그의 행동이 옳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이 외국 도시로 확산되자 이들에 대한 그의 분노는 가열되어 그의 활동 범위는그만큼 확대되었다.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 대제사장의 권위로 무장했던 그에게 일생일대의 전환기적 위기가 발생하였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이를설명할 길이 없다. 바울은 그의 서신들 속에서 이 사건을 그를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사자로 만드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역사로 되풀이하여 지적한다고전9:16-17;15:10;갈1:15-16;엡3:7-9;딤전1:12-16).
그의 회심에 관한 사도행전의 세 기사들은 이야기하는 사람의 직접적인 목적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상호 보충적이다. 누가의 설명(행9장)은 역사적인 것으로 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는 반면, 바울의 두설명(행22, 26장)은 그의 직접적 노력과 부합하는 측면들을 강조한다. 그를 사로잡은 초자연적 존재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 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사울은 곧 그의 길이 오류임을 깨닫고 즉각적으로 완전히 굴복하였다. 시력을 잃고 금식한 사흘은 고뇌어린 반성과 주님과의 교섭의 날들이었다. 다메섹의 아나니아의 사역은 회심 체험을 완성시키며, 사울에게하나님의 분부를 보여주었고, 다메섹의 기독교인들과의 교제의 문을 열어 주었다. 후에 지나온 생애를 돌아보면서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미래의 사업을 위해 어떻게 그를 준비시켜 오셨던가를 극명하게 인식하였다(갈1:15-16).
4. 초기 활동. 회심한 바울은 곧 다메섹의 유대인 회당에서 예수의 신성과 메시야성, 그리고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진리들을 선포하였다(행9:20-22). 바울이 다메섹에 온 목적은 비밀이 아니었던 탓에 그의 이런 행동은 유대인들을 경악케 하였다. 갈라디아서 1:17에 언급된 바울의 아라비아 방문은 사도행전 9:22와 23절 사이에 설정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그의 아라비아 방문의 목적이 전도에 있었다는 암시는 없다. 그보다는 그가 받은 새로운 계시에 비추어 조용한 곳에서 그의 믿음을 재고해 볼 필요성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체류 기간은 확실치 않으나 바울은 그의 신학의 기본 원리들을 정립하고 아라비아를 떠났다.
다메섹으로 돌아온 후 적극적인 전도활동을 벌인 탓에 그는 유대인들의 살인적인 분노를 피하여야 했다(행9:23-25;고후11:32-33;갈1:17), 회심한 지 3년 후 사울은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다(갈1:18). 예루살렘 신자들은 그를 두려움과 의혹의 눈으로 보았으나 바나바의 도움으로 용납을 받았다(행 9:26-28).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담대한 증언을 했던 탓에 심한 적대감을 불러일으켜 방문일정이 15일로 단축되었다(갈1:18). 환상 속에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주님의 분부(행22:17-21)를 받은 그는 다소로 돌아가(9:30) 몇년간 조용히 지냈다. 갈라디아서 1:21-23은 그가 이곳에서 전도활동을 했다는 것을 암시해주나 더 자세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 고후 11:24-26이 말하는 많은 사건들이 이 때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일부 학자들도 있다.
수리아의 안디옥에는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에게 전도의 문호가 열린 직후 이방인 교회가 설립되었다. 교회의 부흥상을 시찰하러 갔던 바나바는 도움의 필요성을 깨닫고 사울이 이방인에게 부름받았음을 기억하여 그를 안디옥으로 데려왔다. 사울의 일년 간의 적극적 활동은 이 도시에 큰 영향을 미쳐 제자들은 '그리스도인' 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행11:20-26). 방문 선지자들에게서 흉년이 임박한 것을 알게 된 안디옥 교회는 기금을 모아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예루살렘 장로들에게 전달하였으며(11:27-30), 이로 인해 사울은 회심 후 두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방문을 갈라디아서 2:1-10에 언급된 방문으로 보고 있으나 사도행전 11-12장은 교회내에 할례에 대한 심각한 갈등의 흔적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5. 전도 여행, 이방 전도사업은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성령의 지시 아래 안디옥 교회에 의해 시작되었다(행13:1-3).
제 1차 전도여행은 A. D. 48년 봄, 구브로의 유대인들을 상대로 시작되었다. 바보에서 총독 서기오 바울의 관심을 끌려는 노력들은 박수 엘루마의 결사적인 저항에 부딪쳤다. 사울은 엘루마의 악마적 성격을 공개적으로 폭로하였으며, 엘루마에게 임한 즉각적 심판을 보고 놀란 총독은 믿음을 갖게 되었다(13:412). 이것은 복음의 승리의 신호였다.
바보에서의 사건들 이후 사도행전에서 바울로 불리게 된 사울은 전도단의 공인된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소아시아 남부 해안 지방에 자리잡은 밤빌리아의 버가로 향하면서 복음을 새로운 지역에 전하는 조처들이 취해졌다. 이곳에서 전도단에 합류해왔던 바나바의 생질(골4:10) 요한 마가는 이들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으며 바울은 이를 못마땅히 여겼다. 갈라디아 지방에 속한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한 전도단은 유대 회당을 이용하였다. 유대인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뒤섞인 청중에게 행한 바울의 연설(사도행전에 기록된 그의 첫번째 연설)은 그의 대표적인 회당 목회로 누가에 의해 길게 기록되어 있다(행13:16-41). 그의 메시지는 깊은 인상을 남겨 다음 안식일에 재차 초빙을 받았다. 다음 안식일에 회당으로 모여든 이방인들이 주축이 된 대군중을 보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질투심에 격렬한 반발을 보였다. 이에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향할 것을 선언하였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세워진 교회의 중추는 이방인들이었다(13:42-52),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인한 박해로 전도단은 안디옥 남동쪽의 이고니온으로 떠났으나 같은 상황이 재연되었고 융성하는 교회는 시작되었다. 이고니온에서 돌에 맞을 위험을 피한 전도단은 여전히 갈라디아 지방에 속한 루가오니아로 가서 회당이 없는 루스드라에서 활동을 개시하였다.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낫는 것을 본 무리들은 전도단을 사람의 형상으로 하강한 신들로 여겨 제사를 지내려 하였다. 이를 극구 만류한 바울의 처사(14:15-17)는 구약의 계시를 알지 못하는 이교도들에 대한 그의 처신을 잘 보여준다. 디모데의 개종은 이 때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광신적인 선동가들은 바울의 처사에 실망한 이교도들을 유인하여 반발하게 했으며, 이 소동속에 바울은 이들의 돌에 맞았다. 인사불성이 된 바울은 죽은 줄로 여겨져 성 밖으로 내쳐졌으나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 바울은 의식을 회복하여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음날 인근에 있는더베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방해를 받지 않은 유익한사역을 한 후 전도단은 개종자들을 교육시키고 책임있는 지도자들을 세워 교회를 조직하게 하였다(14:123). 전도단은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와 하나님이“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14:27) 것을 보고하였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해서 온다는것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바울의 메시지의 핵심이다.
예루살렘 회의(행15장;갈2:1-10)는 이방인들이 대거 교회에 들어옴으로 생긴 긴장 때문에 열리게 되었다. 이방인들의 물결은 교회안의 바리새인 출신자들의 불안과 반대를 유발시켰다. 유대에서 온 몇몇 사람들이안디옥으로 가 형제들에게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믿음에 의한 의를 강조한 바울의 가르침과 다른 이 요구는 심각한 논쟁을 야기시켰고, 급기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 그외 몇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일부 학자들의 반대가 있긴 하지만 갈라디아서 2:110과 사도행전 15장을 같은 사건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을 듯 싶다. 양자의 차이점은 두 저자의 입지점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누가의 설명은역사적인 데 비해, 바울의 설명은 개인적이었다. 사도행전에는 두 번의 회의(15:4;15:5-6)가 보이는데, 바울은예루살렘 지도자들과의 사적 만남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당면 문제를 광범하게 토론한 후 회의는 유대주의자들의 견해를 부정하고 이방인 신자들에게 율법을강요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다만 몇가지 나쁜 관행을삼가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 결정은 서신으로 명문화하여 공식 대표인 유다와 실라를 통해 안디옥에 알리기로 하였다.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사역을 계속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갈라디아서 2:11-21 에 언급된 사건이 발생하였던 것 같다. 예루살렘 회의는 유대인 신자와 율법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 야고보로 대표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활의 한 방식으로 계속 모세 율법을 지켰다. 이들은 유대인 신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례자들을 의식하여 이방인과의 식사를 중단한 베드로의 처신은 잘못된 것으로바울은 베드로의 이런 행동을 이방인 신자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제 2차 전도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는 요한 마가를대동하는 문제로 '심히 다투어' 서로 갈라섰다. 바나바는 마가를 대동하여 구브로로 떠났고 바울은 실라를 선택하여 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을 재차 방문하였다(행15:36-41).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젊은 디모데를전도단에 합류시켰다. 그는 유대인들 속에서 활동하는데 편리하도록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였다. 성령의 저지로 아시아와 비두니아 전도의 길은 열리지 않았으나 드로아에서는 마게도냐로의 적극적 소명을 받았다(16:1-9). '우리' (16:10)라는 표현은 마게도냐로 떠날 전도단 속에 누가가 함께 하였음을 보여준다. 루디아의 개종, 귀신들린 여종의 구원, 바울과 실라에 대한송사와 감금, 이에 뒤따른 놀라운 사건들에 대한 기사(16:11-40)는 너무나 생생하여 목격자의 글이 틀림없어보인다. 다음날 아침 관원들에게 행한 바울의 요구들은 전도단의 위엄을 세웠고 신생 교회의 지위를 지켜주었다.
누가를 빌립보에 남겨 두고 전도단은 다음으로 데살로니가의 유대인 회당에서 강론을 베풀었다. 회당이 곧 그에게 문을 닫자 바울은 이방인으로 향해 전도에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들이 선동한 소요로 전도단은 베뢰아로 피해 가야 했으며, 이곳에서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들에게 유익한 사역의열매를 맺었다. 이곳에서의 활동도 데살로니가에서 쫓아온 유대인들의 방해를 받자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둔 채, 지도자인 바울은 일부 형제들에 의해 아덴으로 인도를 받았다(17:1-15). 데살로니가전서 3:1-2로 미루어 디모데와 실라는 요청에 의해 아덴으로 왔던 것으로 보인다. 디모데는 데살로니가로 되돌아 갔고, 실라는 빌립보로 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고후11:9;빌4:15).
아덴의 우상숭배에 당혹한 바울은 회당에서, 그리고 매일 시장에서 전도하였다. 아덴의 철학자들의 관심을 끈 그는 가르침을 정식으로 해설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의 아레오바고의 출현은 공식 재판은 아니었다. 이방 철학자들 앞에서 행한 그의 기념할 만한 연설(행17:22-31)은 기법과 식견, 압축적 표현의 걸작이다. 그러나 부활을 언급한 대목에서 멸시에 찬 방해를 받아 복음의 진수를 설명할 기회는 얻지 못하였다. 몇 사람의 개종자가 생기기는 했으나 바울은 문화적이며 철학적이며 닳고 닳은 아덴 사람들에 대한 전도 결과에 크게 실망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고린도-상업과 부와 부정(不淨)과 매우 부도덕한 도시에서의 활동은 일정한 성공을 거두어 1년 반이나 계속되었다(행18:1-17). 최근 로마에서 추방당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장막(천막)만드는 일을 하면서 바울은 고린도 회당에서 전도하였다. 바울은 아덴의 경험으로 실망해 있었던 것 같으나 실라와 디모데를 만난 후에는 사기가 올라 활력에 넘친 증언을 개시하였다(18:5).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관한 디모데의 보고를 들은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를 쓰게 되었다. 몇달 후 이들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게 된 그는 다시 데살로니가후서를 썼다. 데살로니가로 돌아갈 수 없었던 그는 이 두 서신을 통해 그가 얻은 개종자들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려 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갈라디아서도 고린도에서 썼을 것으로 보지만 사도행전의 틀에서는 그 연대가 맞지 않는다. 고린도의 이방인들에 대한 전도의 성공으로 대교회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대다수는 사회 하층계급이었다(고전1:26). A.D. 52년 5월경 새 총독 갈리오가 부임하자 유대인들은 불법적 종교를 가르친다는 혐의로 바울을 고소하였으나, 총독은 종교분쟁은 자신의 권한 밖에 있음을 선언함으로써 이 문제를 다루기를 거부하였다. 이 총독의 조치는 결과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정부의 묵시적 인정이나 다름없었다.
고린도를 떠나면서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에베소까지 대동하였다. 이것은 그가 돌아올 때 이곳에서 이들과 함께 유익한 동역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였다. 에베소 회당에 오래 머물러 달라는 요청을 거부한 채 바울은 서둘러 유대로 갔다. 그는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후 안디옥에서 얼마 동안을 보냈다(행18:18-22).
바울이 다시 안디옥을 떠난 시점을 전통적으로 제3차 전도여행의 기점으로 여긴다. 전통적인 명칭을 유지하는 것이 편리하긴 하나 제 2차 전도여행으로 바울 활동의 센터로서의 안디옥의 역할은 끝났다는 점은 명심하여야 한다.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 에 있던 제자들을 강화시켜 준 후 바울은 에베소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약 3년간에 걸쳐 큰 성과를 거두었다(행19:141;20:31). 동부의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 중의 하나인 에베소에서의 활동으로 바울은 헬라-로마 문명의 심장부에 서게 되었다. 3개월간 회당에서 사역한 후 바울은 독자적인 이방인 전도를 시작, 2년간 두란노 서원에서 매일 강론하였다. 에베소 사역은 체계적인 가르침(20:18-21), 비상한 이적 (19:11-12), 마술에 대한 승리(19:13-19), 여신 아데미 숭배에 가한 치명적 타격 (19:23-27)을 보여주었다. 상업, 종교, 혹은 쾌락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에베소로 몰려들었다. 이들 중 다수가 복음을 접하고 개종하여 메시지를 이 지역 전체로 확산시켰다(19:10). 그러나 격렬한 반대도 끊이지 않았다(20:19;고전15:32). 경제적 이유로 데메드리오가 이끈 소요 때문에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활동은 끝을 맺어야 했다(19:23-20:1).
에베소에서 바울은 유대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이방인 교회의 모금을 시작했었다(고전16:1-4). 이 모금전달로 동부에서의 활동을 마감했어야 했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 방문을 계획하고(행19:21) 서바나(스페인)까지 가려는 뜻을 품었다(롬15:22-29). 에베소에 있던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로 불안해 했다. 소실된(고전5:9) 한 서신 속에서 바울은 이교사회와의 관계에 대해 조언해 주었다. 아마도 그는 고린도를 잠깐 방문하기도 했던 것 같다(고후12:14). 서신을 지참한 고린도교회의 대표들이 도착한 것을 계기로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쓰면서(고전 16:17-18;7:1) 교회를 어지럽히는 문제들을 다루었다. 디도를 드로아에서 만날 계획으로 그를 고린도로 보냈다. 바울은 드로아에 좋은 기회를 얻었으나 디도가 오지 않은 것이 불안하여 마게도냐로 떠났다. 마게도냐에서 만난 디도의 보고를 듣고 안심한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써서(고후2:12-13;7:5-16) 디도편으로 고린도 교회에 보냈다(8:6,16-18), 마게도냐에서 많은 격려의 말을 한 후 바울은 고린도에서 겨울을 보냈으며, 이곳에서 로마 교인들이 그의 방문을 준비하고 스페인 전도를 뒷받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로마서를 썼다(롬15:22-29;16:1,23).
고린도에서 직접 예루살렘으로 가 모금을 전달하려 했던 바울의 계획은 생명의 위협때문에 취소했다. 그 대신 그는 마게도냐를 경유하였으며, 무교절 후 누가와 함께 빌립보를 떠났다(행20:3-6). 교회가 선발한여행 동반자들을 드로아에서 만났으며 이곳에서 바쁘고 파란 많은 밤을 보냈다(20:7-12).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를 바랐던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렀다. 이들과 작별하는 자리에서 바울은 지난날을 회고하며 진지한 가르침을 베풀고 미래에 닥칠 어려운 일들에 관해 경고하였다(20:17-35). 예루살렘 여행에 관해 바울은 여러 차례 성령에 의해 환난이기다리고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21:1-16. 일부 주석자들은 이런 명백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예루살렘 여행을 강행하여 전도활동을 단축시킨 것은 실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경고를 주님과 교회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그의 의지에 대한 시험으로 해석했던 것이 분명하다.
6. 죄수가 된 바울. 예루살렘에서 야고보와 장로들의 환대를 받았으나 바울의 등장은 그가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버리라고 가르쳤다는 보고가 있었던 탓에 교회에 긴장을 조성하였다. 그 대책으로 장로들은 바울에게 율법을 지키는 것을 싫어하지 않음을 입증할 한 방안을 제시하였다(행21:17-25). 언제나 남의감정을 해치는 일을 피하려 했던 바울은 이들의 제안에 동의하였다. 이러한 위무의 행동이 유대 신자들을 만족시키는데는 성공했으나 바울이 체포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아시아에서 온 어떤 유대인들이 성전에 있는 그를 보고 성전을 더럽혔다는 거짓 혐의를 씌워 소동을 일으켰다. 로마 지휘관과 일부 병사들 덕분에 유대인 폭도들로부터 목숨을 구한 바울은 영문(병영) 층대에서 유대인들에게 연설할 기회를 얻었다.조용히 듣고 있던 이들은 바울이 이방인 전도의 부름을 받았다는 말을 듣자 또다시 폭동을 일으켰다(21:3722:29). 영문으로 끌려 간 바울은 로마 시민의 신분을 밝혀 채찍질 없는 신문에 응하게 되었다. 다음 날 공회(산헤드린) 앞에서 바울에 대한 진상을 알려고 했던천부장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날밤 주께서 낙담한 바울에게 나타나 그의 증거의 노력을 칭찬하고 로마행을 확신케 해주셨다. 바울 살해 음모를 알게 된 지휘관은 많은 경호원을 시켜 바울을 가이사랴로 호송케 하였다(23:17-35).
가이사랴에서 벨릭스 앞에서 행한 재판으로 바울에 대한 혐의가 조작된 것이 밝혀졌으나 유대인의 반감을 두려워한 벨릭스는 결정을 연기하였다.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 앞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설명을 요청받은 바울은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여 이들의 양심을 파고들었다. 두려움에 싸인 벨릭스는 바울을 내쫓았으나 혹시 석방을 위해 뇌물을 바치지 않을까 하여 그를 찾았다. 2년 후 벨릭스는 로마로 소환당했으며, 바울은 미결수로 남겨두었다(행24:1-27).
새 총독 베스도가 부임하자 유대 지도자들은 바울을 단죄하려는 시도를 재개하였다. 새 총독에게서 바른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울은로마 시민의 권리를 행사하여 하급 법정이 아닌 가이사의 재판을 요구하였다(행25:1-12). 헤롯 아그립바 2세와 그의 누이 버니게가 문안하러 들렀을 때 베스도는 유대 문제에 정통한 아그립바 왕과 바울의 소송사건을 의논하였다.
다음 날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그의 입장을 훌륭하게 설명하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 하였다. 바울의 노력에 불편해진 아그립바는 면담을 끝냈으나 총독에게 바울의 무죄를 솔직히 밝혔다(25:13-26:32).
60년 가을경 바울은 율리오라는 백부장의 경호 아래 로마로 호송되었으며 누가와 아리스다고가 그와 동행했다. 이 여정에 대한 누가의 상세한 설명은 기민한 목격자의 자세함과 생생함, 정확성을 보여준다. 악천후가 항해를 지연시켰다. 무라성에서 이들은 이탈리아로 가려 하는 알렉산드리아 곡물선에 옮겨탔다.뵈닉스에서 편안한 겨울을 보내려다 오히려 14일 동안이나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파선하고 천신만고끝에 멜리데 섬에 피신하였다. 멜리데 섬에서 3개월을 보낸 후 일행은 다시 다른 알렉산드리아 곡물선을타고 로마에 도착하였다. 로마에서 바울에 대한 대우는 관대하였다. 그는 한 병사의 경호를 받으며 그가빌린 셋집에서 살았다. 방문객을 맞을 수 있도록 허락받은 바울은 로마에서 중요한 사역을 할 수 있었다(행27-28장). 이 시기는 그에게 묵상하고 글을 쓸 기회를주었으며, 그 귀중한 결실이 골로새서, 빌레몬서, 에베소서, 빌립보서와 같은 옥중 서신이다.
7. 말년의 생애. 사도행전은 바울의 석방 문제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으나 2년째 말에 그가 석방되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로마정부의 우호적인 태도나 옥중서신, 목회서신의 내용이나 전승이 모두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후의 바울의 활동은 목회서신의 몇몇 언급들로부터 추론해 볼 수밖에 없다. 이들 내용에 비추어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는 네로 박해 이전에 쓰여졌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마도 63년 봄에 석방된 후 바울은 동부로 가서 에베소를 방문하고 디모데를 이곳에 머물게 한 후 마게도냐로 떠난 것으로 보인다(딤전1:3). 그는 그레데의 전도사업을 마무리하도록 디도를 남겨두었으며, 디도에게 쓴 서신에서 니고리에서 겨울을 보낼 계획을 언급하고 있다(딛1:5:3:12). 그는 니고볼리에서 스페인을 방문하고 64년 가을 네로 박해가 시작될 때 스페인에서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다시 로마에서 죄수의 몸으로 갇혀 있음을 말해 준다(딤후1:16-17;2:9), 1차 재판에서 그는 단죄를 면했으며 (4:16-18), 디모데에게 쓴 서신에서 석방의 희망이 있음을 비추고 있다(4:6-8). 그는 66년 말, 또는 67년 초 로마에서 처형되었다.
8. 업적과 성품. 바울은 누구보다 뛰어난 전도자였다. 그는 눈부신 활동으로 갈라디아, 아시아, 마게도냐, 아가야 등의 전략적 중심지에서 교회를 확고히 심어 놓았으며, 로마와 스페인의 활동 계획은 그의 당당한 전도전략을 보여준다. 그는 탁월한 예견으로 젊고 힘찬 일꾼들을 선발, 훈련시켜 그의 뒤를 잇게 하였다. 바울은 그의 활동과 서신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탁월하게 해석하여 이방세계에 전하였다. 주로 그의 활동을 통하여 기독교의 세계적 문명이 확립되고 율법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기독교의 진수를 정리, 해석, 적용하여 여러 교회에 보냈던 그의 서신들은 기독교 신학과 실천에 긴요하다.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겪은 그 자신의 혁명적 경험에 뿌리를 두었다. 바울은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는 의에 도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오직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의 길을 마련해 놓으셨으며, 이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인식하였다. 그는 또한 복음은 믿는 자의 생활과 행동에 윤리적 요구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진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겼으며, 그의 임박한 재림을 열망하였다.
고린도후서 10:10에 근거할 때 바울의 외모는 별 볼품이 없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작은 키에 또렷한 유대인의 인상을 지녔다. 그가 온갖 역경과 고난(고후11:23-27)을 견뎌내고 영적 고심속에서도 육체노동으로 생활비를 버는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는 강골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일을 감당했지만 그는 몸의 허약함을 예민하게 느꼈다. 그는 특히 '육체의 가시' (12:7)에 시달렸다. 이 고통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할 뿐 정확히 알길이 없다. 그는 허약함을 느꼈기에 언제나 하나님이 주시는 힘에 의지하였다(고후12:10;빌4:12-13).
바울의 다양한 인성을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 내기는 어렵다. 그는 양 극단을 구현한 듯이 보인다. 그는 육체가 허약하면서도 엄청난 힘을 발휘했고, 예리한 지성과 함께 깊은 신비주의에 젖었으며, 사람을 끄는 힘도 강했지만 강한 반발도 불러일으켰다. 그는 지적으로는 뛰어난 능력을 지녀 세계의 위대한 사상가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진리를 파지(把持)하여 그 함축된 의미들을 논리적으로 풀이했다. 그러나 그의 예리한 지성은 훌륭한 실천적 감각과 결합되었다. 그는 매우 정직한 사람으로 선한 양심을 유지하려고 항상 고심하였다. 그의 생애는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특징지워져, 편의적인 어떤 타협도 거부하였다. 그는 그의 사명을 깨닫고 자신에게 어떤 해가 오더라도 철저히 사명에 충실하였다. 타고난 열심과 열정으로 그의 사역에 혼신을 다하였다. 그는 따뜻하고 애정어린 마음씨로 우정을 찾고 강한 우애관계를 맺었다. 그는 겸손하고 성실하고 동정심이 많았다. 그는 천성적으로 종교적인 사람이었으며 유대교인으로서 더욱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신앙이 그의 삶과 활동을 지배하였다. 그의 탁월한 경력의 비결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사로잡히고 힘을 얻은 그의 열화같은 성품에 있었다.
9. 바울의 신학. 그의 서신들을 근거로 하여 바울의 신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하나님과 소원해져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자신은 그에 의존하는 피조물로 인식할 기회를 가졌으나 오히려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을 절대 권위로 내세웠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허용하셨다. 이 선택의 결과 인간은 부도덕해지고, 우상 숭배에 빠지고 서로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다. 요컨대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는 죄의 기회를 만들었다. 이방인은 자신의 능력을 절대화했고, 유대인은 율법을 절대화했다. 이들은 각기 하나님으로부터 자신들을 소원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죄의 속박이다. 불행히도 인간은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우리는 절망적으로 하나님과 소원해져 있다. 이런 사상들이 특히 로마서 1:18-3:8에 펼쳐져 있다.
(2) 인간의 소원에 대해 바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다" (갈4:4)고 대답한다. 그는 골로새서 1:15-20에서 이 아들에 관해 좀더 자세히 설명하였다. 첫째, 바울은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위한 모형(model)이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1:15)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을 대표한다. 둘째, 그리스도는 우주를 창조하신 분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우주 창조의 설계와 목적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다. 셋째, 하나님과의 관계, 우주 안에서의 그의 위치로 볼 때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할 적임자이다(1:20).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깨어진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에게 올바르게 의존하는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는 방도를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후5:19).
(3) 인간과 화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그리스도는 예수의 죽음과 장사됨, 부활에 형상화되어 있다. 이 사건이 바울이 전도하고 글을 쓰는 모든 것의 초점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예수의 죽음, 장사됨, 부활은 통일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고전15:14).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유월절 양(고전5:7), 대리적 희생(고후 5:14), 혹은 속전(딤전2:5-6)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바울은 부활사건을 강조하면서 유대적 내세관에서 사고하였다. 첫째, 인간의 역사에는 종말이 있으며, 이 종말은 새로운 세계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둘째, 이 종말은 메시야의 오심으로 시작될 것이다. 셋째, 선악의 치열한 대결이 벌어질 것이다. 넷째, 죽은 자의 부활이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이 이미 메시야의 시대를 출범시키셨다는 증거이며 완전한 부활과 새로운 세계가 확실히 도래하리라는 희망의 보증이다(고전15:20-24).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이 인간과 하나님의 화목을 가능케 할 분은 예수임을 입증하신 방법이다.
(4)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을 가능케 하신 일을 받아들인 믿음의 사람을 생각하시면서 아브라함을 그 값진 본보기로 사용한다(롬4:3).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제의에 믿음으로 응답했던 까닭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다. 나아가 바울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한" (롬4:21) 인물로 묘사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된다.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롬4:24). 믿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구원의 약속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 믿음의 응답은 역동성과 생명력에 넘쳐 변화의 능력을 지니며 새 인격을 창조하게 된다(고후5:1719;갈2:20). 믿음의 사람은 새로운 동기와 활력을 주시는 성령과 함께 하는 새로운 피조물이다(롬8:9-11). 믿음의 사람은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
(5) 신앙인은 홀로 화목에 들지 않는다. 화목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다. 바울은 믿음의 회중으로부터 전도 활동을 시작하였다. 믿는 사람들이 생기는 곳마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존재하였다. 바울은 결코 믿음의 사람에게 홀로 살기를 권한 적이 없으며 언제나 교회와 교제하도록 권하였다. 이 믿음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교회에 대해 위엄과 권위를 지니며 교회의 머리이다(엡1:22-23).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를 위해 자신을 바쳤다. 교회는 모든 일에 그리스도에 복종하여야 한다(엡5:21-33). 이 새 공동체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 교회는 믿음의 사람을 양육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4:13) 성숙하게 한다. 둘째, 교회는 교회의 울타리안에서, 그리고 전도를 통해 교회를 넘어서 기독교인의 교제의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인간을 자기와 화목케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한다(엡3:10).
(6) 화목하게 된 사람은 새로운 삶의 양식을 지닌다. 바울은 윤리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그는 여러 곳에서 악행이 무엇인가를 밝혔고(고전5장;6:9-10;고후12:20-21;갈5:19-21;엡4:17-19;골3:5-11), 선한 성품이 무엇인가도 밝혔다(갈5:22-23; 골3:12-14;빌4:8), 그는 그리스도인 가정에 대해 충고했으며(엡5:21-6:9;골 3:18-4:1) 고전 7장에서 결혼문제에 대한 지침을 제시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가치있는 행동을 기대했으면서도 율법주의에 빠지지는 않았다. 율법주의는 법을 위해 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을 육성하는데 법은 필수적이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을 길게 논의하면서(고전8:1-11:1), 바울은 형제 그리스도인에게 끼칠 영향을 신중히 고려할 것을 강조했다(고전8:9-12).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궁극적 기준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형제 그리스도인들의 일을 돌아보도록 권면한 후, 예수가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본보기를 너무나 아름답게 제시했다(빌2:1-11). 그리스도는 자신을 하나님의 화목 제물로 드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생활을 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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