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gospel
헬라어 유앙겔리온에서 유래한 말로 좋은 소식을 가리킨다. 고전주의 문학(classical literature)에서 이 단어는 좋은 소식들(tidings)을 전해준 것에 대한 보상을 가리켰다. 또한 전쟁승리의 소식을 전해준 것에서 기원하여 전하는 내용 그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훗날에는 기쁨을 가져오는 소식들에 사용되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 헬라어 상으로 명사형만 79회 이상 발견되는 것은 기독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여 라엘을 향한 당신의 약속을 성취하셨고, 구원의 길이 만민에게 열려졌다고 하는 기쁜 소식(good news)이다. 복음은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법을 바꾸신 것인 양, 구약성경과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약속의 성취인 것이다(마 11:2-5). 예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 가운데 자신의 사역에 대한 묘사를 스스로 찾아내셨다(눅4:16-21).
마가는 마가복음 1:14에서 '하나님의 복음' (참조, KJV, 비잔틴 사본에 따르면 '나라'를 첨가)을 정의하기를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라고 하였다. 믿는 것은 구원을 의미한다. 즉 정죄받는 것을 피하는 것이다(막16:15-16). 이러한 복음은 기독교의 초기 전도자들에 의해 선포되었지만, 현재의 주요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보다 명확히 진술된다. 복음이 예수와 함께 왔으나(그리스도의 사건이 곧 복음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복의 약속 가운데 예견되었고(갈3:8), 예언서에 약속되었던 바이다(롬1:2). 복음은 능력으로 올 뿐만 아니라(살전1:5) 하나님의 능력 자체이다(롬1:16.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으며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끈다(롬1:16-17). 바울은 복음이 자기에게 맡겨진 것으로 여겼다(딤전1:11),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강권하심 아래 있는 것이며(고전9:16, 담대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기도를 요청하였다(엡6:19). 이 일에는 심지어 싸움(새번역 '반대', 살전2:2)과 고난이 따른다(딤후1:8). 복음은 '진리의 말씀' 이다(엡1:13).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가리워져 있다(고후4:3-4). 그들은 초자연적인 입증이나 합리적인 증명을 요구하였다(고전 1:22-23). 비록 바울에게 최고조의 신학적 충격으로 다가온 복음이 계시에 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갈1:1112), 역시 복음이 구원의 능력으로 다가오는 것은 믿음이라는 응답에 의해서이다(히4:2).
신약성경의 처음 네권의 명칭을 '복음서'(福音書Gospels)라고 부른 것은 성경 시대 이후에 와서부터이다(A, D. 2세기경),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세부적 내용에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예수의 경력의 전반적 개요, 그의 삶의 초자연적 성격, 그의 도덕, 교훈의 높은 품격에 관해서는 일치성을 보인다.
1. 복음서의 성격. 글로 된 복음 메시지는 새로운 문학 유형을 구성한다. 복음서는 역사의 틀을 가지지만 순수 역사는 아니다. 복음서는 전기적 자료를 포함하고 있으나 현대적 의미의 전기라 부를 수 없다.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를 완벽하게 요약하여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주요 목적은 읽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는 데 있다. 복음서와 꼭같은 형태는 구약에서도, 복음서와 같은 시대의 헬라나 로마의 문학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예수의 사역과 교훈을 영구히 전하기 위해 작성된 문서들이 많이 있지만 신약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사복음서만이 존재한다. 베드로 복음」이나 「도마복음과 같은 복음서들은 2세기와 3세기의 작품들로서 일부 군소종파의 특수한 신학적 입장을 대변하고 있어 성경적 복음서에 들지 못하였다.
2. 복음서의 기원. 복음서에 앞서 구전 복음(Oralgospel)이 있었음을 초기 교부중의 한 사람이었던 브루기아 히에라폴리스의 감독 파피아스(A, D. 80-140년)의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지역의 장로들을 따랐던 사람을 만나는 경우 나는 반드시 그 장로들이 선포한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것은 나는 책으로부터는 아직도 살아 남아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로 듣는 것만큼 많은 유익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세비우스, 「교회사」 3:39). 파피아스는 사도들에게 직접 들었던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얻고자 하였다. 그는 글로 쓴 기록보다 구두 증언을 선호하였다. 파피아스의 판단의 가치성과는 별도로, 그의 증언은 십자가 사건이 있은 이후에도 글로 된 기록들이 사용되는 것과 동시에 사도적 설교의 내용들이 구두로 전달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구두 설교에서 글로 된 기록으로서의 전환을 이해하는 단서는 누가와 요한 복음서의 설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소개하면서 데오가 구전 말씀으로 이미 배웠던 내용을 확인시키기 위해 글로 쓰고 있다고 주장한다(눅1:1-4. 누가는 믿는 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들에 관해 말하면서, 이 사실들을 차례대로(in orderly narratives) 정리하려는 시도들이 이미 많이 있었음을 지적한다. 그가 사용한 “narrative” (헬, 디에게시스)란 단어는 확대된 이야기를 함축하므로 여러 '복음서들' 이 이미 유포되고 있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는 이 복음서들을 쉽게 접하기 어렵거나 불만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이 복음서들은 내용이 불완전하고 이차적 자료에 근거하였으며, 아마도 일관된 사상으로 조직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이 복음서들과는 달리 누가는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한다"(1:2)고 하였다. 그래서 정보를 준 사람들은 사건에 직접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감화를 받아 새로운 믿음을 전파한 사람들이었다. 누가는 이 목격자들과 동시대인이었으며 개인적으로 이들이 주장하는 진리를 몸소 탐구하여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대해 차례대로 정확하게 기록하려고 하였다.
요한도 또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기 위하여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였다(요20:30-31), 그는 예수의 활동의 상당 부분이 그의 복음서를 읽을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것으로 알고 모든 것을 기록한 것은 아님을 밝혔다. 그의 기록의 선택 과정은 그의 복음적 목적과 신학적 관점에 의해 결정되었다.
마태와 마가의 경우는 그 기원에 관해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동일한 일반적 원리가 적용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의 기록"(마1:1 개역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이라는 마태의 서두는 창세기(창5:1)의 어투를 모방한 것으로 창세기와 같이 인류를 상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뜻깊은 한 장을 기록하고 있다는 인상을 전달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1:1)는 간명하고 힘찬마가의 서두는 이어지는 본문이 당시의 설교의 요약임을 말해 주는 제목이다. 이 두 복음서는 기록의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지만 모든 복음서는 그 당시까지 처음 목격자들의 마음 속에, 또 이들의 공중 연설 속에 존재해 오던 것을 후손들을 위해 보존하려는 노력으로 시작되었다고 추론하여도 잘못이 없다.
복음서가 처음에 아람어(교회의 요람인 팔레스타인의 언어)로 기록되었는가, 헬라어로 기록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쟁점이 되어 왔다. 유세비우스는 마태는 그의 역사를 히브리어로 썼으며 모든 사람은 능력껏그것을 번역하였다는 초기 교부 파피아스의 말을 인용하였다(Eusebius, Historia Ecclisiae, 3:39). 본래의 문맥을 떠난 이 말들은 모호하다. 파피아스는 그가 말하는 히브리어가 구약의 언어를 뜻하는지, 아니면 아람어를 뜻하는지 분명히 하지 않고 있다. 그는 마태는 단순히 자료들을 수집해 놓아 다른 사람들이 이를 토대로 복음서를 쓸 수 있게 했는지, 아니면 마태가 이미 조직화된 설화를 만들어 놓았고 이것이 번역되었는지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그는 이방인들이 늘어나 교회의 문헌이 헬라어로 쓰여지기 전에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 씌어진 자료집이 존재하였음을 암시한다.
파피아스의 말은 큰 논쟁을 촉발시켰다. 복음서에는 에바다(막7:34), 달리다굼(5:41), 엘로이 엘로이 레마사바크타니(15:34; 한글개역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와 같은 아람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말들은 예수가 당시 유대인의 통용어인 아람어를 사용했으며, 그가 사용한 아람어는 그를 따랐던 사람들의 기억에서 보존되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이 말들이 복음서가 처음에 아람어로 씌어졌던 것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토레이는 네 복음서는 모두 번역이라고 주장하였으나(C. C. Torrey, Our Translated Gospels, 1936) 그 증거에 관해 일치된 의견은 없다.
네 복음서가 번역이라면 교회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했던 1세기 중엽 이전에 씌어져야 하는데, 이것은 현실성이 없다. 이보다는 복음서가 이방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생겨났으며, 아람어 배경을 포함하긴 했으나 헬라어로 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3. 복음서의 저술. 사도집단의 개인적 회상들, 이들의 설교의 확정된 내용들이 복음서가 구성되는 자료가 되었다. 그리고 복음서를 쓰는 저자들의 목적에 따라 조직방법이 정해졌다. 누가(1:1-4)와 요한(20:3031)은 해석과 함께 작업을 진행하기 전에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의 경우도 동일했을 것으로 가정해도 좋을 것이다.모든 복음서는 성장하는 교회 운동에서 사용되기 위해 저술되었다. 마태는 예수가 예언의 성취이며 하나님 나라의 현시와 밀접하게 관련된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예수를 구약의 메시야로 밝히고자 하였다. 마가는 인간들 속에서 행동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간명하게 묘사했다. 누가는 교양있고 아마도 인간주의적이었을 청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보다 부드러운 문체와 많은 비유를 사용했다. 요한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았던 일화와 강론들을 선택하였다.
4. 공관복음의 문체. 마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서는 공관복음서라 불리운다(공관복음서란 공통된 관점에서 본 복음서란 뜻으로 '함께 봄'을 뜻하는 헬라어 ‘쉬노프티코스' 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세 복음서는 그리스도의 경력과 가르침에 대해 유사한 견해를 보여주며, 내용과 어투면에서까지 매우 흡사함을 보인다.
이 세 복음서간의 관계가 공통된 문서자료에 기인하지 않은가 하는 문제의식을 갖게 하였다. 마가복음의 거의 모든 내용이 마태와 누가에서 나타나며, 이 두 복음에는 마가에 나타나지 않는 많은 자료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각 복음은 강조점과 조직방식에 차이점도 보여준다.
이런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한 많은 이론들이 제시되었다. 최근에 가장 유행하는 이론은 문서설이다. 이 문서설은 복음서들은 마가와 Q('자료'를 뜻하는 독일어 Quelle의 약자. 예수의 말씀을 주로 담고 있다)라 불리우는 가정적 문서에서 유래한 것으로 가정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마태와 누가는 마가와 Q를 결합하여 독자적으로 저술되었다. 스트리터(B. H. Streeter, The Four Gospels, 1936)는 여기에다 M과 누가의 특수자료를 추가적으로 제안하였다. 마태의 특수자료인 M과 누가의 특수 자료인 L은 이 두 저자들이 개인적으로 알고 있거나 조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았다. 이런 가설이 언어 표현의 유사성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듯이 보이지만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Q' 의 존재 자체가 개연성 밖에 없는 것이다. 아직 Q의 복사본이 나타난 적이 없다. 이 문서설 이외에도 문서화 되기 이전의 구전 전승의 '양식' 을 연구해 본문의 '삶의 정황' 을 밝혀내는 양식비평(form criticism)이 있고, 복음서 저자들은 단순한 자료의 편찬자가 아니라 독자적인 해석과 목적을 지닌 저자였다는 점을 밝혀내는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도 있다.
그러나 공관복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세 복음서가 모두 동일한 인물의 삶을 다루고 있고, 이 인물의 행적과 발언들은 공중 메시지로 계속 설교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계속적인 반복과 설교자들 간의 빈번한 접촉은 메시지의 내용을 고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오순절로부터 '사도의 가르침'은 명확한 형태를 띠어가면서 질문자들을 가르치는데 사용되었다(행2:42). 교회가 확장됨에 따라 가르침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문서화가 이루어졌으며, 구전 가르침의 어투와 내용을 재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각 복음은 독자적인 목적과 청중에 맞게 형성되었으며, 표현법의 상이성은 관심과 환경의 차이를 반영한 것이었다. 마태는 배경을 지닌 기독교인들을 위해, 마가는 이방인들을 위해, 누가는 교양있고 문화적인 헬라인들을 위해 저술되었다. 그러나 이 세 복음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성격과 구원의 목적에 대한 통일된 증언을 담고 있다.
5. 요한복음의 문제. 제 4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 성격과 내용이 크게 다르다. 5천명의 급식과 수난 설화를 제외하면 다른 복음서들과 일치하는 점은 별로 없다. 이 차이점이 너무 크기 때문에 요한복음서의 진실성이 도전을 받기도 하였다. 이 도전에는 요한복음서가 역사적인 것이라면 공관복음서와 보다 일치하여야 한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 4복음서는 헬라의 로고스 교리의 관점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 성찰하게 된 2세기의 작품이란 일부 주장도 제기되었다.
라이랜드 단편(Rylands Fragment, 요한복음의 및 구절을 담고 있는 조그만 파피루스)은 2세기 시작 무렵 요한 복음이 남부 이집트(애굽)에 까지 유포되고 있음을 입증해 주었다. 이 단편의 필적은 A, D. 130년경으로 잡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복음서 기록은 그보다 앞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아야 하며 후대 교회의 산물로 보기 어렵다.
이 복음서의 언어가 반드시 그 헬레니즘의 기원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빛과 어두움, 진리와 거짓, 생수와 같은 개념들은 사해 두루마리에도 나타나고 있어 요한이 그의 어휘를 헬레니즘에서 빌어썼을 필연성은 없으며 그의 많은 용어들은 당시 유대교의 일부였음을 보여준다(William Lasor, The Dead Sea Scrolls and the New Testament, 1972, pp. 191-205). 요한복음은 요한의 후년에 쓰여진 목격자의 기록이며, 그의 기독교 경험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해석한 작품이다.
6. 정경 복음서. 복음서들은 거룩하고 권위있는 것으로 인용된 처음 저술들 가운데 속하였다. 2세기 초반에 씌어진 「바나바 서신」이나 「헤르마스의 목사에 복음서의 구절들이 인용되거나 암시되고 있다. 순교자 저스틴은 복음서들을 명백히 언급하면서 '사도들의 회고록' (Memories of the Apostles)이라 불렀다(First Apology, 66. 저스틴의 영향으로 기독교로 개종했던 타티안(Tatian)은 170년경 네 복음서를 대조한 「디아테사론(Diatessaron)을 만들어 내었다. 이것은 2세기 초반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이미 예수의 생애와 사업에 관한 정보의 주요 자료가 되었음을 입증해 준다.
교회 간의 소통이 빈번해지고 이단과 이교 비평가들의 공격에 대한 방어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정경 복음서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촉진되었다. 170년경에 이르러 네 복음서는 유일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이레니우스는 복음서는 오직 네복음서 밖에 있을 수 없으며 교회는 불멸의 가치를 지난 네 기둥을 가진다고 하였다.
복장 clothes
옷, 옷차림. 이 말은 성경에서 주로 상징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야곱이 죽기 전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겼을 때 유다는 복장을 포도즙에 빨게 될 것' 이라고 하였다. 이는 후일 유다지파가 받을 풍성한 복을 상징하며(창49:11), 피묻은 복장이 불의 섶같이 살라지는 것은 메시야가 강림할 때 나타나게 될 평화의 상징이다(사9:5).
복종
<보라>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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