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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족속 / 족장 / 족장 시대

족속 family

같은 종족에 속하는 사람들. 일반적으로 한정된 인종적, 정치적, 지역적 집단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서(창10:16;대상16:20;마28:19), 이스라엘 백성, 또는 그 민족을 가리키기도 한다(왕하17:20;에 6:13;겔2:5;45:6). 이 말은 신학적인 용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즉 계약이나(출24:8;신4:6) 할례(수5:8) 등을 통하여 하나님과 맺어진 백성을 가리키는 선민이나(즉 12:8;13:1) 언약 백성을 가리킬 때(출33:13) 사용되었다(레18:24:20:23;겔20:32;행13:19). 또한 이스라엘의 각지파나(삼하2:4;대상23:11) 친족을 가리킬 때도(창24:438)사용되었다. 신약에서는 물론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기도 하지만(행7:19)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나뉘어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을 가리킬 때와(벧전2:9) 구속받지 못한 이방인, 즉 불신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마24:30).

족장 chief

한 족속이나 단체의 우두머리를 지칭한다. 일반적으로 족장이라 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가리키지만, 성경에서는 이들에게 족장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성경에서 족장이라 부르는 사람은 일종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며 (창36:15;6:14:대상1:51), 때로는 천부장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민10:4). 이 말은 초기에는 순수한 혈통적 개념에서 한 가문의 최고 어른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왕정시대에는 어떤 부족이나 집단의 지도자급 인물로 왕이 임명하기도 했다(대하 1:2). 이들의 역할은 장로들과는 달리 조약체결이나(수9:15) 전리품의 분배(민31:26-27), 그리고 정복한 가나안 땅의 분배를 위해 제비를 뽑는 것(수19:51)과 같은 행정적인 일이었으며, 또한 이들은 유목 생활에 필요한 우물도 팠었다(민21:18).

족장 시대 Patriarchal age

1. 성경에 그려진 모습. 창12-50장은 이브라함, 이삭 야곱의 일생을 포괄하는 족장 시대를 묘사하고 있다(창3950장은 요셉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이 족장 시대의 연대를 정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로, 학자들은 BC 1900년 경에서 1500년까지 폭넓은 다양한 견해를 보인다. 성경 자료만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불충분하여 우리는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들 속에 있는 자료를 BC 2000년 전반기의 성경 외적 자료와 비교하여 잠정적인 연대를 제시할 수밖에 없다. 창세기는 몇몇 개인들만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족장 시대의 전체적 모습을 그려내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 성경 저자들은 중요한 종교적 신학적 요점들을 강조하기 위해 이용 가능한 폭넓은 전승들로부터 자료를 선택적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성경의 이야기들에만 한정될 경우 역사가에게는 큰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창세기에는 족장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애굽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이동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성경 이야기에서 언급된 성읍들 가운데 현대 고고학이 2000년 초에 점유된 것으로 밝혀낸 성읍들은 우 르 (창 11:28,31;15:7), 하 란 (11:31-32;12:45;27:43;28:10;29:4), 세겜(12:6;33:18), 살렘(예루살렘, 14:18), 그랄(20:1;26:16 등), 도단(37:17), 헤브론(13:18;23:2,19;35:27), 베델(12:8)이다. 에블라문서들(Ebla documents, BC 2300년 경)은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벨라(14:2)가 이른 시기에 존재하였음을 입증해 준다. 므깃도, 하솔, 라기스, 게셀, 여리고와 같은 성읍들은 족장 시대에 번창하였는데도 창세기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 시기의 메소포타미아의 성읍 우르는 종교와 문학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긴 했으나 BC 3000년 말기 때와 같은 큰 정치적 중요성을 갖지 않았다. 성경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이 시기에 번창했던 유프라테스 강변의 마리(Mari) 성읍은 2만 개 가량의 서판을 남겨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창세기 몇 군데에 성읍(성)들의 이름이 나온다. 동방에서 침입한 왕들이 통과한 길에는 아스드가르나임, 함, 사웨 기랴다임 (14:5)이 나오고, 평지의 성'(들의 성, 13:12:19:25,29), 야곱이 베델로 돌아가는 길에 통과하였던 고을들(35:5), 애굽의 각 (41:35,48;47:21)이 언급된다. 메소포타미에서 애굽에 이르기까지 열린 고을이나 성벽으로 방비된 성읍들이 크고 작은 거주지를 형성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의 성읍들은 저지대나 도로변에서 발견되었다.
반유목민들은 거주 지역 바깥으로 양떼를 몰고 이동하였다. 이들은 성읍 거주자들과 함께 사는 동종이형(同種異形) 사회의 한부분을 이루기도 하였다. 반유목민들은 흔히 성읍들 근처에서 장막을 쳤(12:6-9;13:12-18;33:18-20;35:16-21;37:12-17), 로는 농사를 짓기도 하였으며 (26:12이하) 성민들과 사회, 경제적 거래도 할 수 있었으며(21:25-34;23:1-20;26:1733;33:18-20) 여러 경우에 '이방 나그네' 도 성읍에 거주하기도했다(12:10;15:13;17:8;20:1;21:23,34;26:3;28:4;32:4;35:27;36:7;37:1;47:4-5). 이와 같이 아브라함과 갈라 섰던 롯은 소돔으로 그 장막을 옮겨 성문에 자리를 잡았다. 야곱과 에서는 상호 대조적이면서도 보완적인 생활방식을 보여준다(25:27-34).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얼마 동안 세겜에 정착하였다가 성읍 주민들의 사회로 들어갔다(창33:18-34:31).
우리는 양떼를 거느리고 때로는 상당히 먼 길을 이동해 가며 목초지와 우물을 찾다가 다른 사람들과 다투기도 하는 장막 생활을 하던 목자들의 반유목적 생활의 모습을 어렴풋하게 알게 된다(13:511;18:1-8;21:25-31;24:62-67;26:1-33;29-31;33:1217:36:6-8). 족장들의 귀중한 재산은 양, 나귀, 소, 때로는 낙타였다(창 12:16;13:5,7;20:14;21:2730;30:29;31:1-10,38;32:13-16;34:28;46:32;47:16-18).
족장 시대에 여행은 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브라함은 그의 인생 여정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에서 애굽으로까지 이동하였다. 야곱은 팔레스타인에서 하란까지 여행했다가 돌아왔으며(28장:35장)후에는 애굽으로 여행하였다. 아마도 이때에는 상인들이 잘 다니던 길이 있었던 것 같다. 요셉을 애굽으로 데리고 갔던 것도 이 상인들이었다(37:28-36).
족장 이야기들은 당시의 통치자들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애굽의 바로(12:15,17,20), 시날 왕 아므라벨, 엘라살 왕 아리옥, 엘람 왕 그돌라오멜, 고임 왕 디달(14:1), 소돔과 고모라의 소왕들(14:2), 살렘왕 멜기세덱(14:18), 그랄 왕 아비멜렉(20:2;26:1등), 에돔의 족장으로 나중에 왕이 된 자들(36:19,31), 호리족의 족장들(36:29)과 에서에게서 나온 족장들(36:40-43) 이 언급되고 있으나 이들 중 어느 한 인물도 역사적 기록에서 연대를 확인할 수는 없다. 이들 중 일부는 매우 초라한 통치자들이었음이 분명하며, 반유목민이었던 족장의 가족들은 단지 목초지나 우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족장의 가족들은 이들과 언약을 맺는 경우도 더러 있었으나(14:13;21:27;26:28이하) 대부분의 경우 당시의 동종이형의 사회에서 자유롭게 이동하였다.
족장들의 일상생활은 오랜 여러 관습들의 지배를 받았다. 족장들과 일가 친척들은 확대 가족이나 씨족으로 이루어지는 상호연관된 사회 단위로 조직되었고(12:1-5;24:1-9;28:1-5), 그 체계는 가부장적이었다. 그래서 '아비 집' (아버지 집)이란 말이 여러 군데 나오고 있다(12:1;24:38-40;31:14;47:12;50:8). 이같은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가장인 아버지가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정상적으로는 장자가 상속자로서 아버지의 지위와 재산을 이어받았으며 상속받을 친자가 없을 경우 종이 상속자가 되거나(15:2-3), 첩이 된 여종의 아들이 상속자가 될 수도 있었다(16:1이하). 여종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이 여종을 남편에게 바친 본처의 아들로 간주되었다. 이런 해결책은 아내의 동의 아래 성립되었으며, 남편이 임의로 첩(후처)을 얻었을 경우에는 성립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하갈(16:1-4)과 그두라(25:1-6)와 한 결혼들은 이 두 가지 유형의 결합의 좋은 예가 된다(참조. 30:3,9). 첩의 아들이 난 후에 본처가 아들을 낳았을 경우 문제가 발생하였다. 가부장적 사회(족장사회)에서는 본처의 아들이 상속자가 되었던것 같다(15:4:17:19), 그러나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21:10),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상속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결혼 문제는 좀 복잡하였다. 당시 사회에서 돈많고 권력을 가진 남자들은 하나 이상의 아내를 가질 수 있었으나 일부일처제가 대다수였다. 그러나실제로는 남편은 자신의 의사에 의해서나 부부가상속할 아들을 낳을 수 없어 아내가 여종을 바치는방식으로 비교적 쉽게 첩이나 후처를 얻을 수 있었다. 족장 사회에서 야곱과 에서는 동등한 지위를가진 하나 이상의 아내를 가졌으며 (26:34-35;29장)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은 후 재혼하였고(25:1-2) 나홀은 첩에게서 여러 자녀를 두었다(22:20이하). 대체로 집안과의 결혼이 선호되었던 것 같다. 아브라함과 사라, 나홀과 밀가(11:27-30), 야곱과 라헬, 야곱과 레아, 이삭과 리브가, 에서와 이스마엘의 딸이결혼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이와 함께 족장 사회의 일부 관습들, 예를 들면두 자매와의 결혼(참조. 레18:18)이나 이복 누이와의 결혼(창20:12. 참조. 레18:9,11;신27:22)은 후대의 모세 율법에서 금지되었던 것도 명백하다.
야곱의 경우에서 우리는 야곱이 아내를 얻기 위해 장래의 장인에게 봉사하여야 했음을 알게 된다(창29:18이하, 27이하). 이런 일이 흔하게 있었는지아닌지를 알 도리는 없다. 이것은 아람인의 관습이었을 수도 있고 북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한정된 관습이었을 수도 있다. 이런 관습은 우리가 증거에의해 아는 것보다 널리 행해졌을 가능성도 있다.한 남자에게 더 이상의 결혼을 금지했던 일도 최소한 한 경우에 나타나고 있다(31:50).
가장의 축복은 중요하였으며 한번 축복한 이상취소될 수 없었다(27장;48-49장), 창27장에서 장자는상속권을 양도하고 동생이 축복을 받았다(22-29절).그러나 자동적인 것은 아니나 장자가 축복을 받는것이 정상이었을 것이다.
종교 문제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나와 있는 내용이 별로 없다. 족장들은 삶을 인도하고 약속으로격려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의 필요성을 알았던 것이 분명하다(12:1-3;15:4이하;17장;28:11-22 등).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에 제한되지 않고 우르, 하란, 가나안, 혹은 애굽에서도 역사하였다(참조, 35:3). 하나님의 뜻이 족장들에게 알려진 다음에는 오직 믿고 순종하는 일만이 남았으며(22장), 기도와 제단을 쌓는 일이 족장들의 정규 예배의 한 부분이었다(창12:8;13:4,18;26:25;35:1,3,7). 할례는 언약 가족(covenantfamily)에 속한 사람들을 표시하는 종교의식이었다. 족장들은 자신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활동을 강하게 의식했던 탓에 하나님이 역사하신증거에 따라 지명과 자녀의 이름을 붙였다(16:11,14;29:31이하의 야곱의 자녀들의 모든 이름.참조, 32:30;35:15 등). 각 족장마다 특별한 인격적 관계를 암시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졌던 것 같다. 즉 이삭의 하나님은 경외하는 이(31:42,53)였고야곱의 하나님은 전능자(49:24)였다. 이러한 인격적 관계의 느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인식,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참 신앙의 본질이라는 의식이 족장 종교의 핵심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족장 사회의 두 가지 특징인 언약과 선택의 개념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직접 간접으로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으신 언약(15:18;27:7,1011,13,19)은 족장 종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언약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얽어매셨고 또 이들을 자신에게 얽어매셨다. 이 언약은 가장 엄숙한 계약으로 아브라함과그의 자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선택을 포함하였다(12:1-3;13:14-17;15:18-21;17:5-8 등)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을 통하여 온 인류에게이르게 될 것이었다(12:3;18:18;22:17-18;26:4;28:14).그리고 특히 이 선택된 가족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역사하실 것이었다(17:18-19;21:12).언약과 선택의 이 쌍둥이 개념들이 창세기가 그리는 족장 종교에서 강력한 주제들이 되고 있다.
2. 최근의 발견과 족장 시대. 족장 시대의 정확한 연대를 결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중기 청동기시대(BC 1850-1570 년 경)로 잡을 만한 유력한 근거들이 있다. 고고학적 지식에 근거한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톰슨(T. L.Thompson)이나 시터스(J. Van Seters)와 같은 일부 저술가들은 족장의 전승들은 후대의 문학적 창안이라는 가정 아래 모두 철기 시대의 것으로 돌린다. 이런 저술가들에게 고고학은 족장 시대의 내용들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재현해 줄 수 없다. 아래에서 이 문제를 다시 다루겠지만, 발견된 고대 문서들은 고대에 씌어졌던 것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대개 우연히 남아 있게 된 것임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1) 족속들. 족장 이야기에는 애굽 족속, 아모리족, 엘람족, 가나안족, 호리족, 에돔족, 헷족 등 다양한 족속들이 언급되어 있다. 창14장은 특수한 4집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언급된 모든 집단들을 확인하기는 불가능하다. 호리족은 후리족(Hurrians)과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호리족은 36:20-21에서 에돔과 남 팔레스타인 땅과 연관지어져 있다. 23장의 헷족은 아나톨리아의 헷족(Hittite of Anatolia)과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헷족은 오히려 가나안족과 관련된 원주민 집단이다(10:15).BC 2000년대 초반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상당한 민족 이동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므로 온갖 족속이 가나안에 나타났을 것으로 예상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족장 이야기들은 이 시기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반영해 준다.
특히 흥미를 끄는 두 집단이 있는데 하피루(Hapiru)와 마리의 비냐민족(Binyaminites)이다. 하피루는 오랜 시기에 걸쳐 여러 지역에서 광범하게 알려졌다. 창14:13에서 아브라함은 히브리 사람으로 불린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널리 퍼져 있던 하피루와 비슷한 존재로 인식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도 볼 수 있다. 비냐민족은 마리 지역의 동종이형 사회의 반유목인들이었다. 이 집단에 대해서는 마리 문서의 연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사회학적 차원에서 족장 사회와 병행되는 점들이 많이 있다.
(2) 성읍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BC 2000년대 전반기에 고대 근동 지역이 고대 문화를 상속하였고 족장들의 기록에 나오는 여러 성읍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이 입증되었다. 이 성읍들에서 이루어진 구체적인 생활 모습들은 가옥, 도기, 공예품, 연장과 무기류의 잔해에서, 몇몇 경우에는 폐허에서 남겨진 문자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에블라 서판들(Ebla tablets)은 가나안의 무역의 무대였던 여러 성읍들을 언급하고 있다. BC 19세기에 속하는 저주 문서(Execration Texts)로 알려진 중요한 애굽의 기록들은 이 당시에 가나안에 존재했던 예루살랩(14:18)을 비롯한 몇몇 성읍들을 언급하고 있다. 족장 이야기에 나오는 여러 성읍들은 BC 2000년대 초반에 실제하였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가나안에서 므깃도, 하솔, 라기스, 게셀, 여리고, 세겜과 같은 중기 청동기 시대의 큰 성읍들은 이미 기틀이 잡혀 있었다. 가나안 지역 외부에는 유프라테스 강변에 마리와 같은 큰 성읍들이 존재하였다. 마리에서 발견된 문자 기록들은 이 지역 사회의 모습을 그려내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자료에도 불구하고 족장들의 연대를 결정하는 일이 결코 보다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 성읍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족장들의 이야기들은 그것이 언급한 도성들이 존재하기 이전 시기를 가리켰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3) 개인 이름들. 족장 기록들에 나오는 여러 개인 이름들은 서판 기록들에서 알게 된 이름 체계들과 비교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여러 가지 비교가 가능하다. 아브람(Abram)이란 이름은 서부 셈족지역의 다양한 텍스트에서 A-ba-am-ra-am, A-ba-amra-ma, A-ba-ra-ma와 같은 여러 변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오랜 시기에 걸쳐 나타나기 때문에 이 이름의 특정한 연대를 정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ya qub-ilu(Jacob-el)과 같은 이름들은 2000년대 초와 말에 모두 나타난다. 시므온, 아셀, 베냐민과 같은 열두 지파의 일부 이름들도 입증이 가능하다. 이스마엘과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신(El)을 가리키는 이름에다 동사를 덧붙인 것이다. 이삭과 같은 이름들은 동사만으로 이루어진 애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이삭, '그는 웃는다', ‘조롱하다', ‘희롱하다’, ‘귀여워하다', 창17:17;18:12;21:6). 서부 셈족의 이름들, 아모리족의 이름들, 마리 이름들 등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가 진행된 결과 족장의 이름 체계는 2000년대 초반은 물론 보다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병행점을 갖는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족장 이름 체계에 대한 귀중한 통찰을 얻을 수는 있지만 족장들의 연대를 정하는 데는 도움을 받지 못한다.
(4) 여행, 무역, 상업. 이 시기에 근동 지역에 걸쳐 무역과 여행이 성행하였다. 갑바도기아에서 나온 진흙 서판들은 BC 2000년에 벌써 소아시아와 앗수르 간의 구리와 양모 무역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다른 기록들은 근동 지역에 걸친 군대의 이동과 전리품 등의 수송을 전해 준다. 큰 도로가요단강 동편을 통과하였다는 것(왕의 대로, 민20:17)은 현대의 도로와 멀지 않은 길에 늘어섰던 고대 성읍들을 보아 명백하다. 애굽의 베니-하산(Benihasan)에서 나온 BC 1900년 경의 그림들은 팔레스타인 전지역에서 들어 오는 유목민들(아마도 금속세공인)을 묘사하고 있다. 이들로부터 우리는 아브라함 시대 사람들의 의상과 소유물들을 상당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의 짐을 운반해 주던 짐승은 주로 나귀나 당나귀였던 것으로 보인다. BC2300년 경의 에블라 서판들(Ebla tablets)은 에블라상인들이 활동했던 광범한 무역 지역을 소개해 주며, 우리가 족장 시대로 추정하여 제안하고 있는 시기 이전에 벌써 여행, 무역, 상업의 광범한 활동들이 이루어졌음을 가리켜 준다.
(5) 이 시대의 관습. 이 시대의 관습들은 법, 상업, 종교, 사적인 일상생활 관계 문서들을 보여주는 수만개의 진흙 서판들에 의해 밝혀지게 되었다. 이외에도 함무라비 법전(BC 1750년 경)과 같은 중요한 법전 자료들이 있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문서로는 누지 문서(Nuji, BC 15-14세기), 마리 문서(BC 18세기), 라스 샤므라 문서(Ras Shamra, Ugarit문서라고도 한다. BC 14세기), 알랄라 문서(alalah, BC17-15세기)가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런 자료들이 결합하여 BC 2000-1500년 시기의 북 메소포타미아의 생활상을 그려주며, 이런 정보들을 토대로 우리는 족장 시대의 관습들을 연구할 수 있게 된다. 15세기와 14세기의 문서들은 우리가 족장 시대로 추정하여 제안하고 있는 시대 이후의 것이므로 이 문서들을 이용하는 데 다소 조심할 필요가 있다. 관습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지만 그 이전 시기의 관습들을 반영하는 경우도 흔하기 때문에 BC 15세기의 문서들을 판독하여 BC 18세기 생활상의 유용한 단서들을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동일 시대의 문서들이 가장 신빙성 있는 자료가 된다.
1925년에서 1931년에 걸쳐 누지 문서들을 발견한 직후 학자들은 누지의 관습들과 족장의 관습들 사이에 많은 병행점들이 있다는 견해를 제출하였다. 다른 유적지들에서 그보다 앞선 세기들의 문서들이 많이 발견되면서 누지 문서들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족장 이야기들과 그렇게 많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양자 입양, 결혼, 상속, 아내 자매와의 결혼, 자매 결연, 족장의 유언, 아내를 얻기 전의 일정 기간의 봉사, 여종을 결혼 선물로 주는 관습, 이외에도 몇 가지 관습들에서 병행되는 점들이 누지에서 발견되었다. 고오돈(C.H. Gordon)과 스파이저(E. A. Speiser)와 같은 저술가들은 누지 문서들은 족장 사회와 병행되는 점들을 보여주는 일종의 보고와 같다는 견해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 견해에 따라 우가릿(Ugarit), 엘 아마르나(El-Amarna), 누지 문서들에 묘사된 관습들과의 연계를 토대로 족장 시대를 BC 14세기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서판 증거의 양이 점차 늘어나면서 병행되는 점들은 보다 이른 시기의 자료에서 더욱 쉽게 발견되고 있다. 양자를 얻는 가장 적절한 예는 라르사(Larsa)에서 나온 옛 바벨론의 한 편지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서는 자식 없는 남자는 종으로 자식을 삼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누지에서 발견되지 않은 입양의 모습이다. 아내의 여종의 아들을 양자로 삼는 일은 누지의 오직 한 문서에서만 발견된다. 남편이 후처를 얻는 일이나 자신의 여종을 첩으로 삼는 일은 보다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후처를 얻는 관습들의 대부분은 고대 근동의 다른 유적지들에서 나온 문서들에서 나타난다. 족장의 유언은 누지에서 병행되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으며 스파이저가 제안한 것과 같은 아내 자매와의 결혼은 누지에서든 창 12-50장에서든 어떤 실질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누지 서판들과 족장 이야기들 간에 어떤 특별한 관계가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병행점들을 찾는 일이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족장 이야기들이 말하는 관습들은 우리가 BC 2000년대 초반의 서판 기록들로부터 알게 된 사회와 다르지 않는 사회에 속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많은 관습들은 여러 세기 동안 존재했기 때문에 사회학적인 목적들을 위해서 유용한 점은 있더라도 연대기적 목적들을 위해서는 만족할 만큼 명확한 것은 아니다. 매우성과 있는 연구 중의 하나는 마리와 같은 고대 근동의 동종이형 사회들의 유목생활과 정착생활에 관한 연구이다. 이 연구가 병행되는 관습들을 찾는계속적인 노력과 결합된다면 우리는 족장 사회와족장 시대의 시기에 관해 좀더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특수한 족장 관습은 족장 집단의 특수성이었기 때문에 성경 밖의 자료에서 특별히 병행되는 점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식하는일 또한 중요하다.
3. 족장 기록들의 역사적 가치. 19세기 말 벨하우젠(J. Welhausen) 당시 이후 학계에 전반적으로 주목할 변화가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벨하우젠은 성경의 기록들은 훨씬 후대에 이야기들을 썼던 사람들의 시대를 반영할 뿐이므로 이런 성경 기록들로부터는 족장들에 관한 어떤 역사적 지식도얻을 수 없다는 견해를 보였다. 이 견해는 완전히불식되지 않은 채 톰슨(1974)과 시터스(1975)에 의해 다시 제출되었다. 시터스는 창세기 이야기들의배후에 어느 정도의 구전 전승이 존재하는가에 의문을 제기하였으며 구전 전승의 영향을 극소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는 족장 이야기들의 인명, 지명,족속, 관습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계 사건들 안에서 족장들의구체적 자리를 발견할 수 없다면서 고고학도 족장들의 배경을 밝히는 데는 별로 기여하지 못한다고본다. 그는 또한 낙타나 블레셋족과 같은 이른바 시대착오적인 것을 중요하게 본다. 따라서 그는 BC2000년대와의 병행점들을 찾는 학문적 노력 일체를의문시하면서 족장 전승들은 포로기를 포함한 후대의 사회적, 종교적 공동체에 의해, 또 이 공동체를위해 주로 조형되었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그러므로 창세기 기록들을 논의하는 경우 이 후대의 문학적 활동을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본다. 아브라함에게 한 신의 약속과 언약의 주제들은 이 저자들에 의해 왕정의 왕조 이데올로기(dynastic ideology)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후대에 창안된 것이다. 톰슨은 구체적 접근법에서 시터스와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다소 비슷한 노선을 따른다. 이들 두 사람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들이 진행되어 왔다. 족장기록들의 역사적 가치를 문제삼은 다른 지자들로는 알트(A. Alt)와 노트(M, Noth)가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경우는 모두 전승에는 초기부터 내려온 역사적 가치가 있는 중요한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시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에 학자들이 족장 이야기들의 몇 가지 측면들에 대해 다소 과도한 주장을 했던 것은 인정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의 역사적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판단이다. 설사 우리가족장 이야기들이 과거로부터 전해내려 온 전승들로짜여진 문학 - 신학적 문서들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족장 이야기들이 고대의 역사 자료를 상당히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충분한 이유는 전혀없다. 약속과 언약의 신학 사상들이 지니는 장점이족장들은 단순한 문학적 창안(literary inventions)이상의 존재였음을 말해준다.
많은 역사적 쟁점들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다.정확한 연대를 결정하기는 불가능하며, 족장 사회와그 관습들을 관련 있는 당시의 사회에다 정확히 규정하는 일은 현재로서는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현재의 대다수 학자들은 일부 초기의 학자들에 비해족장 이야기들의 역사적 가치를 보다 존중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현재로서는 모든 자료에서 나올 보다 많은 증거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다. 학자들은 보다 많은 연구를 쌓아야 성경 자료와 성경 이외의 자료를 보다 정확하게 종합해 낼수 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는 언약, 선택, 믿음,순종, 약속과 같은 위대한 신학적 교리들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남을 것이다. 이런 교리들은오랜 세기 동안 이스라엘 신앙의 초석이 되어 왔으며 기독교인들의 신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창세기 이야기들의 역사성에 대해 어떤 견해를갖더라도 이 점에 동의하지 않을 저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