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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

왜 고난이 있을까 고난이 복이 되는 이유 #1 / 남포교회 박영선 원로목사

출애굽 사건은 우리가 너무나 다 잘 알죠.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스라엘이 종 되었던 애굽에서 해방을 받아서 약속의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게 되었죠.

그런데 이 출애굽 사건이 쉽게 애굽의 종 되었던 자리에서 풀려났고 여러 기적 속에 행복한 나라로 간다라고 하기에는 잠시 들여다 봐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백성들을 구원할 때 그 백성들은 물론 오랫동안 기대했고 소원했던 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예 노릇을 해야 됐으니까 자유를 얻어야 했었죠.

그런데 바로가 놓아 주질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10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재앙에서는 바로가 항복하고 그들을 풀어주지만 다시 마음이 변해서 쫓아왔고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앞에 서죠.

앞은 건널 수 없는 바다고 뒤는 쫓아오는 애굽 병사들 때문에 진퇴양난의 자리에서 백성들이 울부짖습니다.

"무엇 때문에 너는 와서 우리 잘 살고 있는데 해방을 시켜 준다고 해놓고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느냐"라고 원망을 하자 모세는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선포하죠.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을 보라!"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치시고 그들은 건너와 해방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아시는 대로 광야 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번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원망하고 실패한 역사를 가지게 됩니다.

"물이 없다! 먹을 게 없다! 길이 고단하다!"하는 여러 가지 상황이 그들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바위에서 물이 나게도 하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주시기도 하시고 또 메추라기로 고기를 먹게도 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셔서 드디어 약속의 땅 앞에 섭니다.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에서 가나안에 열두 정탐꾼을 보내고 그 보고를 받는 장면이 민수기 13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들어갔던 그 정탐꾼들 12명 중에 10명이 다 "못 들어가겠다! 그들이 겁난다! 그들은 너무 강대하고 우리가 빼앗을 실력이 없다!" 그래서 그 핑계가 이제 원망으로 나오죠.

"우리를 잘 살고 있는 애굽에서 왜 끌어내서 이렇게 고생을 시키고 죽음의 자리로 인도하는가!" 그 불평에 잘 아시는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믿음을 가진 보고를 합니다. 

그러나 백성 대다수가 원망을 하고 모세를 죽이려고까지 들자 하나님이 등장하시죠.

그리고 "믿음이 없는 너희들은 다 이 광야에서 죽어라!"

그래서 40년을 광야에서 방랑하고 그 세대는 다 죽고 그 후손이 비로소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잘 아는 사건이지만 하나 짚고 넘어가야 되는 대목이 하나님은 바로의 손에서 그의 백성을 꺼낼 때도 백성들에게 시킨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홀로 10가지 재앙으로 간섭하시고 바로를 항복시키고 광야에서도 백성들의 모든 원망에 대해서 하나님이 답을 다 주십니다.

그런데 유독 가나안에 들어가는 문제에서는 저들이 반항하고 원망하자 "그래 너희 결정대로 너희 못 들어간다! 광야에서 죽어라!"라고 엄한 심판을 명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전에는 모든 불평에 대해서 눈 감으시고 원망에 대해서 답을 주셨는데 왜 가나안에 들어가는 문제만은 이토록 엄격하게 판단을 내리셨는가?하는 문제죠.

출애굽은 따지고 보면 애굽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먼저 애굽에서 나와야 되죠.

우리가 이 방에서 나가려면 어디 갈 데가 있어서 나가는 것이고 갈 곳에 가려면 여기서 나가야 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에 들어가는 문제는 애굽에서 꺼낼 때는 하나님이 꺼내셨지만 들어갈 때는 우리 힘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출애굽 사건이 갖는 중요한 메시지인 것이죠.

우리 힘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함을 얻는 죄악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문제는 하나님이 해주시지만 그렇게 해방된 사람을 하나님이 목적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문제는 너희 스스로가 대답하고 커나가야 된다라는 문제가 출애굽 사건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대표하는 특징을 나타내는 두 단어가 사랑과 믿음입니다.

사랑과 믿음이 우리 세상에서도 가치 있는 단어들이기 때문에 성경이 왜 기독교 신앙의 대표되는 특징을 믿음과 사랑이라고 했을까?를 더이상 따지지 않고 맞는 말이고 좋은 말이고 기대하는 개념으로 수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과 사랑은 동등한 두 인격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거지 그 사랑이나 믿음은 어느 한 쪽이 열등하거나 종속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을 하고 믿음을 가지려면 둘이 대등한 지위를 가져야만 사랑을 나누고 믿음을 나눌 수 있죠.

거기서 대등한 지위라는 것은 인격적 관계에 있어서 관계성에서의 대등함입니다. 

그러니까 믿음과 사랑은 상대가 서로 다 자발성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혹은 사랑이 혹은 신앙의 순종이 하나님 앞에 나를 포기하고 맡기면 그 다음엔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해 주십시오로 사용이 되는데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고 순종 마저도 자발성을 가져야 되는 것으로 요구합니다.

자발성을 가지고 자발적 선택을 하려면 자유가 있어야 되는건 분명한 필연적인 조건입니다.

그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그 자유를 가진 자가 올바른 선택을 할지 잘못된 선택을 할지는 언제나 열려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죠.

우리 보고 선택을 하라고 하면 우리가 정당한 선택을 할지 잘못된 선택을 할지는 이제 실력의 문제가 되죠. 그렇죠?

그런데 이 선택을 하는 이 자유가 주어지고 자유를 쓰는 데 있어서 자유에는 두 가지 큰 내용이 있는데 하나는 권리가 있고 하나는 책임이 있지요.

자유를 권리로 쓸 것이냐, 책임으로 쓸 것이냐는 자유가 가지는 특권입니다.

그건 자유를 가진 존재가 선택할 문제입니다. 

이 선택을 올바르게 했느냐 잘못되게 했느냐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광야 생활인 것입니다. 

 

광야 생활의 특징은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시고 입을 것을 주십니다.

그래서 신명기 8장에서도 "이 사십 년 동안에 너희가 광야 생활을 한 것을 기억해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하게 한 적이 없다 그러나 너희는 실패했다 그것이 너희에게 약이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옵니다.

뭘 시험했을까요?

자유를 가지고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반응한 것은 어려울 때마다 '돌아가자' 였습니다.

뜻밖의 반응이었죠.

'돌아가자' 물이 없어서 목이 마를 때도 애굽으로 돌아가자. 

먹을 것이 없을 때도 원망이 '돌아가자'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애굽에 있을 때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한 적이 없었다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광야에 나오니까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고달프기 짝이 없다 돌아가자 거기가 성경이 말하고 싶은 내용이 들어 있는 부분입니다.

 

'돌아가자'는 뭐냐면 자유에 대한 아무런 개념도 실력도 없는 반응입니다.

애굽의 가치는 노예로 있을지언정 먹고 마시는 데 걱정은 없는 곳이죠.

광야에서의 불평은 무엇을 가졌기 때문에 생긴 현실이냐면 자유라는 권리를 갖게 되자 가지게 된 형편입니다.

무슨 형편이요? 이 시험, 하나님의 시험, 도전입니다.

무슨 도전? 먹을 것과 입을 것이 해결된 상태에서 "너는 뭐야?" "네 정체성은 뭐야?" "너는 무엇이 될래?" 이렇게 묻는 것이 광야에 나와서만 가능해집니다.

애굽에서는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유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유라는 문제를 다룬 아주 유명하고 재밌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 강의를 듣는 분들에게 꼭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쇼생크 탈출'은 쇼생크라는 감옥에서 주인공이 탈출하는 아주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의 원제는 "The Shawshank redemption"입니다.

쇼생크 구원이죠.

쇼생크 감옥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쇼생크라는 이름은 애굽의 한 왕조의 이름입니다. 

쇼생크는 바로 시대 몇 대 후의 왕조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시삭'이라고 나와서 여러보암이 솔로몬에게 쫓겨서 정치적 망명을 했을 때 '시삭'에게 갑니다. 

그러니까 "The Shawshank redemption"이라는 것은 구약적 배경을 가지는 거죠.

애굽이 구원을 얻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앤디'라는 주인공이 종신형을 받고 들어오고 그 안에 먼저 들어와 있던 '레드'라는 죄수가 있는데 이 앤디라는 주인공이 들어와서 죄수들로서는 누리지 못하는 태도와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자유인으로 살죠.

죄수들에게는 특별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멋지게 탈옥을 해서 클라이맥스가 마치 그 주인공의 탈옥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아직 결론으로 안 가죠. 

조금 더 연장되는데 모두가 다 감옥을 나가는 것이 소원이지만 나갈 방법이 없는 이 감옥에서 체념과 원망 속에 넋두리들을 나눕니다. 

그러는 과정에 한 나이 많은 종신형 죄수가 가석방으로 먼저 출옥을 하게 되는데 뜻밖에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는 왜 나갔는데 자살을 했어?"

레드라는 배우가 "너희가 볼 때 저 담이 장애물로 보이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저걸 의지하게 돼" 그런 알쏭달쏭한 말을 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이 레드도 가석방을 받게 되어서 앞서 나갔던 사람이 묵었던 여관에 똑같이 머물고 그가 일했던 자리에 정부가 마련해 준 직장을 가지게 됩니다. 

수퍼마켓에서 물건을 봉투에 담아주는 일을 하는데 영화에서도 잠깐 나옵니다. 

이렇게 손을 들어서 매니저를 쳐다보니까 매니저가 부릅니다. "뭐야?" "화장실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러자 그 매니저가 이렇게 말을 하죠. 

"화장실에 가는 걸 허락받을 필요는 없어."

그리고 장면이 탁 바뀌면서 공원 벤치에 앉아서 고민하는 주인공이 나옵니다. 

머리를 감싸고 "나는 두렵단 말이야. 나는 평생 허락을 받고 살았어. 허락을 받지 않으면 소변이 한 방울도 안 나와. 나는 여기가 무서워."

그러면서 권총 파는 가게 앞을 왔다 갔다 하는 장면이 이어 나옵니다.

"나는 돌아가고 싶어. 저 권총을 꺼내서 누구 하나 쏘고 돌아갈까?"

이 영화가 하고 싶었던 클라이맥스는 여기인 것입니다.

 

여기가 더 두려운 겁니다.

뭐가 무섭죠?

자유가 무서운 것입니다.

자유가 왜 무섭죠?

책임을 져야 하지 않습니까.

자기의 존재를 책임져야 하고 자기의 정체성을 책임져야 하거든요.

 

감옥은  어떤 데였는데? 저긴 들어가면 정체성이니 책임이니 다 필요없고 하라는 대로만 하면 아무 걱정이 없는 곳이죠.

거기는 애를 키울 걱정도 없고 도둑질을 당할 걱정도 없는 곳입니다.

그것이 그 영화가 우리를 찌르는 'The Shawshank Redemption'입니다. 

애굽이 구원받는 이야기는 우리는 애굽으로부터 구원받은 이스라엘만 생각하고 있지만 애굽은 나중에 선지자들 예언 속에는 애굽도 구원의 대상에 들어옵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이 탈출함으로써 그 세계가 죽음으로 묶인 세계에 구멍이 뚫리는, 열리는, 그래서 애굽의 구원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생각해보십시오.

 

고난은 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 겁니다.

무슨 책임?

책임을 질 정체성, 책임을 져야하는 의미, 가치들에 대하여 도전하는 것이 현실이죠.

예수를 믿으면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어진다, 모든 근심 걱정을 예수께 맡기면 된다, 잘 아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런 것들이 피상적으로만 이해되어서 기독교인으로 살면 더 크게 세상은 줄 수 없는 진정한 정체성과 운명과 우리의 인생과 현실이 가지는 모든 도전 앞에 실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져가는 과정을 즐기게 된다는 데까지 못 오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고난이 왜 있냐?

학교 가서 고난이 온 겁니다.

학교 갔다는 의미를 아시죠?

<톰 소여의 모험>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톰은 학교에 다니고 그가 가깝게 지내는 친구인 허클베리 핀은 거지입니다.

그는 학교에 안 가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돌아다니고 싶을 때 돌아다닙니다.

톰이 볼 때는 허클베리가 더 자유스럽고 자기가 묶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가 최고로 바라는 것은 허클베리같이 되는 겁니다. 

'학교에 안 가는 것이 복이고 자유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학교에 가는 것이 인간이 훌륭해지는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그 훌륭해진다는 것은 학교에서는 아직 막연하죠.

공부를 잘하는 것이 훌륭해진다는 것은 성적 만의 문제가 아니죠.

동기생들을 가진다는 것, 같은 반의 급우를 친구로 가진다는 거죠.

굉장히 크죠.

학교는 다니면 점점 어려워집니다. 

점점 복잡해지고.

자녀들이 꼭 물어보지 않나요?

나 학교 안 가도 돼?

이거 꼭 물어보는 겁니다.

그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끝이 아니라 중학교를 가야 하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끝이 아니라 고등학교에 가야 하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길로 인도됩니다. 

공부를 잘하기는 어렵고 공부를 잘하는 것이 지금 직접적으로 나한테 행복을 가져다주지도 않고 복잡한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요즘은 사춘기를 중학교 2학년 때 겪는다죠.

학교에 가면 사춘기는 하나도 안 다뤄주고 공부만 다루죠.

"어느 대학까지 갈 수 있나? 넌 갈 데가 없다." 

이런 꾸중 속에서 사춘기를 겪으면 집에 가면 부모가 알아주기를 합니까 학교 가면 선생님이 알아주기를 합니까. 

그저 급우들끼리 어쩔 줄 모르는 철없는 애들끼리 깊은 문제를 나눠야 합니다. 

자살을 논하고 가출을 논하고 원망하고 "나는 왜 태어났나?"를 원망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이 기독교 신앙에 들어오면 '애굽에서 건져냄을 받았지만 광야에서 방랑 생활을 해야 하는 것처럼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도대체 하나님은 어쩌려고 그러시는가?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정탐꾼을 보내서 봤더니 거기는 들어갈 엄두가 나지도 않더라' 그래서 끝없는 방황 속에 세상 사람들이 방황하는 것이나 신자나 동일한 방황, 정체성, 현실을 살아야 하는 이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실력, 이런 것들은 없이 끊임없는 도전과 시련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원망이고 비명인 셈입니다. 

 

여기에 고난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엇을 만들고 싶어 하시는가? 

하나님이 우리와 사랑을 나누고 믿음을 나누잡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대등한 관계를 맺자고 하십니다. 

우리는 고난이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성경의 말을 좀 더 깊이 음미해야 합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체성을 묻는, 그리고 우리의 선택을 묻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해야 하며 우리의 운명이 무엇인가를 배워나가는 과정을 갖게 되는 것인데 그 혼란, 그 긴장,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하나님을 믿으면 원래 평안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만사형통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우리의 일반적 종교심이 열심히 이런 기도를 드리게 합니다. 

"하나님 다시 찾아오지 않게 모든 복을 주세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다시 하나님한테 찾아오지 않아도 됩니까?" 이렇게 기도를 하죠.

 

표현은 그렇게 안 하지만 결국 그 얘기입니다. 

또 하나는 회개를 함으로써 "과거의 잘못을 다 인정할 테니까 다시는 죄짓지 말게 하시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세요" 이게 모든 신자가 당연하게 걷고 있는 신앙이 가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성경적 과정, 고난의 과정, 도전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묻고 '어떻게'를 묻는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는가를 깨우치는 과정을 외면하게 되고 오해해서 원망과 비명으로 이 과정이 그저 표현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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