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누구나 다 기도를 하며 살 수 밖에 없는데 그 까닭이 어디에 있냐면 불안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의 유한함을 느끼기 때문에 그렇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나잖아요.
그래서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하여 살았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에덴의 동쪽 땅의 이름을 '놋' 영어로는 'Nod'라고 얘기하는데 그 '놋'의 의미는 '유리하다, 방황하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 땅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의 기본적 조건, 바로 그것이 '놋'이에요.
그러니까 불안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고 마음에 헛헛함을 느낄 수밖에 없고 그런 것이죠.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다 불안과 공허함을 내면 속에 간직하고 삽니다.
불안하다고 하는 것은 내 마음속에 안식이 없다고 하는 얘기이고 안식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결핍이기 때문에 뭔가에 의해 결핍이 채워지기를 바라죠.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느끼고 있는 결핍이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채워지기를 바라는 게 기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기도라고 하는 게 형식을 갖춰서 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고요, 사람들은 누구나 다 기도를 합니다.
예를 들면 갓난 아기가 막 울어요.
이것도 기도예요.
언어를 갖추지 않았지만, 왜냐하면 "내가 배가 고픕니다" 이런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거든요.
자기를 도와줄 누군가에게.
또 자연재해를 만나서 내가 살고 있던 집이 다 물에 휩쓸려가고 비바람이 쳐서 과수농가인데 과일들이 다 바닥에 떨어진 걸 볼 때 그 농부들은 망연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잖아요.
하늘을 바라보는 그 텅빈 시선도 기도예요.
그런가하면 기가막힌 어려움 속에 처해있기 때문에 예배당에 꿇어 엎드려가지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드리는 그 기도도 기도인거죠.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기도를 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럼 기독교적 기도라고 하는 게 없냐? 아니죠. 분명히 기독교인들의 기도도 있습니다.
흔히 기도를 얘기할 때 우리가 기독교인들의 호흡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들숨과 날숨이라는 거죠.
다시 얘기하면 숨을 쉬지 않으면 우리가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것처럼 기도하지 않고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기도가 호흡이라고 하는 말속에 담겨 있는 뜻일겁니다.
그런데 기도의 핵심은 현실이라고 하는 어떻게 보면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 속에 살면서 내 영혼의 중심이신 분을 찾아가기 위해 하는게 기도예요.
아까 얘기한 대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허하고 불안하고 내 삶을 기약할 수 없는, 그래서 안식 없음의 상태인데 그 때 현실의 가장자리로 떠밀리고 있는 내 마음을 영원한 평화가 있는 곳에 붙들어 매기 위한 일체의 행위가 기도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 아니 이렇게 얘기하면 실례일것 같구요,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는 언제냐 하면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때, 사업이 어려워졌어요, 그러면 새벽기도회를 시작합니다.
병 걸렸어요, 그러면 철야 기도를 시작합니다.
이 얘기는 뭐냐면 기도라고 하는 게 문제 해결을 위한 방편처럼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거죠.
그가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은 내가 호출하기만 하면 언제나 달려와 가지고 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존재처럼 여기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저는 농담처럼 이야기해요.
하나님은 비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해결사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 언제나 하나님이 내가 바라는 것에 응답해서 내 문제를 해결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의 응답해 주셨다고 기뻐하죠.
그러나 내가 바라는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하나님이 왜 나의 절박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는가 원망하기도 하죠.
믿음에서 멀어지기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늘 떠오르는 게 하나 있는데요.
일제시대에 <서서조선>이라고 하는 잡지를 쓰셨던 김교신 선생님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정확한 햇수는 기억이 안 나지만 1943년이 아닌가 싶은데, 섣달그믐날 그는 자기의 1년을 돌아봐요, 살아온 날을.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하나님 지난 1년 동안 나를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부족한 것이 당신 앞에 바친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뒤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더욱 더 감사하옵기는 제 기도를 기각해주신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합니다.
내가 절박함 가운데 바쳤던 기도를 하나님이 거절해주신 것이 더 고맙대요.
이거 무슨 얘기지? 모두가 다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지면 세상에 아름다워질까요?
우리들 각자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바쳤을 때 그 기도가 다 응답되는 세상은 좋은 세상일까요?
안 그럴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김교신 선생님은 때때로 하나님이 내 기도를 기각해 주신 것이 감사하다고, 그 때문에 겸허함을 배웠고 그 때문에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삶을 배울 수 있다고 한다면 기각된 기도가 오히려 복일 수도 있다는 얘기를 아마 그 말 속에 담아서 설명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기도한다고 하는게 뭘까?
흐트러지기 쉬운 나의 마음, 그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하는 중심에 연결하기 위해서 드리는 게 기도다.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을 연결하는 거죠.
사실 연결한다고 얘기했지만 저는 조율한다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기타 같은거를 칠 때 보면 줄이 너무 느슨해도 제소리를 내지 못하고 줄이 너무 팽팽해도 제소리를 못 내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준 음을 잘 잡고 거기에 맞춰 조율을 해야 하잖아요.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뭐냐?
일상을 살면서 나라고 하는 악기가 너무 긴장해서 팽팽해졌든지 느슨해졌든지 제소리를 내지 못해요.
달리 얘기하면 하나님의 선율을 연주할 수 없는 악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여쭙고 그 마음에 따라 나의 마음과 지향을 조율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제가 좋아하는 음악하는 분들이 있는데, 기타 치며 노래하는 분들인데요, 밝은 조명 아래에서 기타를 치며 한 곡을 노래하고 나면 그러면 거의 틀림없이 기타를 새롭게 조율하는 걸 봤습니다.
기도도 그런 것이여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 음으로 삼고 내 마음을 조율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결국 그렇게 조율되었을 때 우리에게 오는 행복감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
내 마음으로 살았을 때에는 이 좁은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을 연결하게 되자 나의 현실을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나의 이웃들을 비로서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거죠.
그러면 달라져요.
우리가 시편을 통해서도 여지없이 보고 있는 게 뭐냐면, 탄식 시를 보면 "내 삶은 왜 이렇게 힘들어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나를 괴롭힙니다, 내가 더 이상 견딜 힘이 없어요"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러다가 시인은 문득 지난날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컸던지에 대한 기억을 상기합니다.
그렇게 되자 문득 오늘 내가 겪고 있는 이 고난이라고 하는게 나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런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현실이 나를 억압하고 있던 그 힘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해요.
결국은 탄식 시라는게 찬양으로 귀결되는 까닭은 나의 객관적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현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입장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런 거예요.
이게 이제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럼 질문이 생기죠.
살다 보면 얼마나 많은 하나님께 청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맨날 그것만 우리가 해야 합니까? 아뇨.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조율되고 나면 우리는 확신할 수 있어요.
내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라는 확신이 내게 들어와도 된다는 얘기입니다 .
제가 좋아하는 성경 말씀이 있는데요, 요한복음 15장 7절입니다.
이런 구절이 인데요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읽을 때 끝부분에 밑줄을 긋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죠?
우리가 청하는 모든 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고 하는 이게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그것만 소비해 버리면 안되요.
앞에 있는 구절이 더 중요합니다.
앞에 뭐라고 얘기했죠?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라고 말합니다.
이게 전제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기도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뭐예요?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이게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늘 하셨던 말씀이 있죠.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이렇게 말했던 것처럼 그 존재론적 일치를 이루는 게 우선이어야 합니다.
사는 모습은 제멋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힘을 빌어 가지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좋은 믿음 이라고 얘기할 수 없지요.
우선 핵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라고 하는 말이고, 그 다음에 나온 말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쵸?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은 그 존재죠.
말은 존재를 얘기해요.
그러니까 "내 말이 너희 속에 머물러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속에 머물러 있을 때 세상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마다 안타까워하고 귀신들린 사람을 보면 귀신을 내쫓아 온전케 만들고 싶어하는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면 어찌하든지 그의 생을 긍정해주고 싶은 그리스도의 그 마음이 내 속에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면 그 다음에 우리가 청하는 것은 하나님이 들어주실 거라고 얘기합니다.
오늘 내가 청하는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속상한 분들, 속상한 그 마음 제가 압니다.
그러나 왜 내 기도 들어주지 않으세요라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내가 소망하고 있는지, 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속에 머물러 있는지 이걸 먼저 묻고 정말 거기에 충실하게 다시 한번 기도를 회복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제가 좋아하는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들려 드리고 싶어요.
"우리가 부끄럽게 낭비한 시간, 이기지 못한 유혹들, 연약함과 낙담 속에서 일하는 것, 다른 사람과의 교제나 우리의 생각에서 나타나는 무질서와 방종은 종종 아침 기도의 소홀함에서 비롯됩니다" 라고 말합니다.
내 삶이 흐트러져있거나 타자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거나 연약함 속에 있거나 낙담 속에 있는 까닭은 어쩌면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을 연결하고 조율하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덧입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거든요.
오늘 기각된 기도 때문에 속상한 분들은 속상해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 안에 머물려고 하는 노력부터 시작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분이 얘기했죠.
기도할 때 가만히 있는 거에요, 어떤분이 예배당에서.
"기도하신다면서 아무것도 안하세요?" 그러자 그분이 대답합니다.
"아니요,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다니요,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데요?"
"하나님도 나를 바라보십니다."
이게 이제 정말 중요한 얘기죠.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도 나를 바라보는 거죠.
그리고는 그 마음에 일치가 일어났을 때 우리들이 비로서 내가 원하는 게 "제 마음이 이렇습니다, 제가 이것 때문에 속상합니다, 누군가 정말 밉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이 문제 때문에 내 마음이 지금 찢어질 듯 합니다"하고 얘기해야죠.
그리고 "하나님, 이 문제가 이렇게 해결되기를 바랍니다"라고 기도할 수 있죠.
그리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이루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하고 빨리 가는게 아니라 내 마음을 다 아뢰었으면 그 다음에는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애를 써야죠.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뭐라고 말씀하실까?
하나님의 말씀이 음성으로 들려오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성경 말씀을 언제나 읽고 묵상한다고 한다면 그 성경말씀을 떠오르게 하시기도 하고요 그리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 건네 오시기도 합니다.
"아, 네가 정말 힘들었겠다, 네 마음 네 심정 내가 알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네가 그 미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어, 네가 그럴 수 있다고 나는 신뢰하거든" 이런 소리를 하나님이 하실거에요.
그 소리까지 들어야해요.
그래서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뭐냐면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도 필요하고 하나님께 청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해 마음을 여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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