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인생에서 도망갈 데가 없다는 걸 인정하셔야 해요.
괴로워하세요.
비명을 질러야죠.
그것밖에 할 게 없거든요.
비명을 지르는 이유는 죽지 않고 견디겠다는 표시입니다.
울변 죽지 않습니다.
죽게 되면 웃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죠.
운다든가 비명을 지른다든가 괴로워 한다는건 견디는 겁니다.
근데 그걸 전부 망한 것으로 소용없는 것으로 생각해서 스스로가 자신을 더 죽입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거의 수동적으로 끌려가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더 많습니다.
이런 부분에 성경의 유명한 이야기는 요셉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기가 막힌 꿈을 꾸죠.
형들이 자기 앞에 무릎 꿇는 꿈을 꾸고 잘난 척 했다가 팔려서 애굽에 가서 거기서도 무고를 당해서 옥에 갇히죠.
그리고 나중에 총리가 되어 온 세상을 구원합니다.
그 일로 이제 기독교에서는 쉽게 그가 가진 비전이 좋았다! 그리고 그가 모든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시편 105편에 짤막하게 소개되는 요셉의 이야기는 전부 수동태입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함이여 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며 그의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다 수동태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억울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감옥에서도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에서 보다시피 그 말씀을 의지하여 승리한 것이 아니고, 말씀이라는건 여기서 하나님이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개입을 뜻합니다.
실제로 요셉은 쇠사슬이 그의 몸을 맸다하는 그 표현을 성경 밑의 난외주를 보시면 '히, 혼'이라고 돼 있습니다.
히브리 원어로 '혼'이라는 뜻이다, 몸이 쇠사슬로 묶인 것이 아니라 혼이 묶였다! 직역하면 '그 혼을 쇠사슬이 뚫었다'입니다.
우리말에 적합한 표현이 있는데 '혼비백산'이 있죠.
그는 정신이 없습니다.
이게 뭔지를 모릅니다.
나중에 그가 풀려나서도 자기 꿈과 자신의 결과를 연결하진 못합니다.
그는 거기서 애굽 여인과 결혼해서 살고 자식들에게도 신앙적인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이제 안정을 되찾았다' 정도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뭄이 들어서 형들이 양식 사러 와서 자기 앞에 엎드려 비는 걸 보자 옛 생각이 난 겁니다.
'아, 내 인생이 우연의 소산이 아니구나, 우연히 이 결과가 이루어진 게 아니구나, 하나님이 그때부터 준비하셨구나'
형들이 무서워서 떨죠.
그들을 안심시키는 말이 이거였습니다.
"나를 여기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누구는 좀 더 쉽게 살고 누구는 보다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는데 그건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게 예수님이 예수 믿는 사람들만 아는 그 모든 것보다 심한 경우를 보는 거죠.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외면당하고 조롱당하고 고난당하고 죽습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우리는 고난이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성경의 말씀을 좀 더 깊이 음미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예수님이 찾아갔을 때 그 둘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너희들은 무슨 일로 이렇게 이야기를 길게 나누느냐?'
제자들이 그러죠.
'아니,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모른단 말이냐? 우리는 그가 메시아인줄 알았는데 그가 죽고 말았다'
예수님이 이렇게 반박하시죠.
'믿음이 없고 무지한 자들아 메시아가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성경이 가르치지 않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받습니다.
여러분은 고난을 단순히 고통으로만 이해하시는데 고난은 공부 더 하는 것입니다.
상급 학교에 진학하는 것이며 더 어려운 자리까지 대접받고 훈련받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쉽게 우리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 대신해주는 분으로 등장하시지 않고 우리를 훈련하여 우리가 대등한 자리에 이르도록 우리를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고난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런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저런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하는 것은 어떤 지혜가 필요하지만 큰 흐름, 큰 의도, 큰 약속은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각각의 경우에 그때 필요한 위로와 분별 같은 것은 상담과 격려 차원의 이야기가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인 이 이해는 어떻게 타협할 수가 없습니다.
숙제하시고요 예습하시고요 복습하시고요 그리고 개근하세요.
자기 인생에서 도망갈 데가 없다는 걸 인정하셔야 해요.
괴로워하세요.
괴로워 하시라고요.
어떤 것들은 나이가 좀 더 들면 그 문제가 아무것도 아닌 문제가 되는 게 많아요.
우리가 크면 앞에 있었던 벽 때문에 안 보였던 것이 벽을 허물어야 보이는게 아니라 키가 크면 보이는 게 있어요.
산행을 하면 산을 올라가잖아요.
자기가 올라가는 산은 안 보인대요.
처음 백 미터 올라갔을 때 고생한 것이 그다음 백 미터 올라간 것과 똑같아서 반복을 하는 것처럼 보여요.
처음 백 미터나 그다음 백 미터나.
그러나 어디에서 차이를 보게 되냐면 백 미터쯤 올라가서 고갯마루에 숲 밖으로 나오는 기회에 이렇게 보면 시야가 트이죠.
그다음 백 미터 올라가서 다시 고갯마루를 만나고 다시 내려다보면 아까하고 달라요.
없던 게 보이는 게 아니라 시야가 넓어진 거죠.
그렇게 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크는 눈금들을 성경에서 많은 역사로 구약의 가치죠, 가르치고 있습니다.
거의 수동적으로 끌려가셔야 합니다.
아까 요셉의 이야기를 한 이유는 우리가 하는 일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더 많습니다.
선생님이 학생들한테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죠.
'다 안해도 좋아 그런데 가르치는 동안만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어 졸지 말고.'
그것만 해도 중상은 갑니다.
비명을 질러야죠.
그것밖에 할 게 없거든요.
비명을 지르는 이유는 죽지 않고 견디겠다는 표시입니다.
자기는 모르지만.
울면 죽지 않습니다.
죽게 되면 웃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죠.
운다든가 비명을 지른다든가 괴로워 한다는 건 견디는 겁니다.
근데 그걸 전부 망한 것으로 소용없는 것으로 생각해서 스스로가 자신을 더 죽입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행복의 개념이 다릅니다.
아무 걱정 없는 게 행복이 아닙니다.
그럼 그냥 무생물입니다.
사람은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은 의미와 가치에 관한 의욕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그만이죠.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히 5:8-9)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답을 듣지 못하고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는 걸, 하나님을 신뢰해도 된다는 걸 보여주신 분을 이 시간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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