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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이 능력임을 보여주자 | 로마서 12장 1절 | 이찬수 목사님 | 분당우리교회 | 2024.1.28 설교문 녹취록

본문 :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교 정신의학 또 중독 의학과 교수입니다.

애나 램키 교수라는 분이 쓴 책 중에서 '도파민네이션' 이런 제목의 책이 있는데요.

이 중독과 관련한 전문가 중에 전문가라는 평가를 받는 분이 썼는데 굉장히 근거를 잘 드러내면서 주장해 나가는데 이 책에서 주장하는 몇가지 포인트 중에서 거의 제일 중요하다고 보는 포인트가 뭐냐하면 이겁니다.

쾌락에 몰두하면 고통이 따르지만 절제를 익힌다면 참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쾌락에 몰두하면 고통이 따르지만 절제를 익힌다면 참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굉장히 중요한 원리를 담은 전제인데요.

이 책 제목에 나는 도파민이라는거는 인간의 뇌에서 쾌락과 고통을 지휘하는 신경 전달 물질이 있는데 그게 도파민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에 기쁨이 있고 또 행복이 나오고 이런 것들을 잘하려면 이 도파민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 관리를 잘해야 되는데 이 도파민을 잘 활용하려면 고통과 쾌락 사이의 균형을 잘 유지해야 된다 이런 내용입니다.

 

이게 무슨 내용인가 하니까요 이 인간의 뇌는 저울처럼 평형을 유지하려고 하는 그런 속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평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저울의 이쪽 끝에는 쾌락이라는게 있고요 또 다른 반대편 쪽에는 고통이라는게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뇌는 어느 쪽이든 너무 한쪽으로 오래 기울어져 있게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죠.

어떤 사람이 계속 쾌락을 추구하면 그러면 뇌에서 평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고통도 함께 쌓여간다는 겁니다.

또 반대로 이런 거죠.

운동이라는 거는 우리 우리 육체를 굉장히 괴롭히는 거잖아요.

마라톤 같은 거.

이거는 뭐 육체를 거의 막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고통으로 몰고 가는건데 아니 왜 사람들은 이 마라톤을 못 끊는가.

마라톤 중독자도 있는 거 같아요.

왜 그런가 하니까요, 아까 이 균형 말씀을 드렸잖아요.

이제 운동을 하면서 우리가 마라톤을 하면은 막 몸이 못 견디게 고통스럽고 힘들고 그런데 그러면 이제 이 고통으로 막 이게 이렇게 기울어지면 어떻게 한다고요?

이 고통으로 기울어지는 걸 방치하지 아니하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우리 몸에서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이런 것들이 같이 일어나도록 만들어 주는 겁니다.

그래서 마라톤을 못 끊는 거죠.

저는 뭐 마라톤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는데요.

만보 걷기, 아 이게 이런 거구나.

 

월요일 날씨는 춥고 또 주일 지나고 머리도 아프고 그런데 오후에 막 안 되겠다 해가지고 이제 몸을 막 꽁꽁 싸 가지고 그렇게 이제 만보를 걷거든요.

춥고 그런데 희한한게 그렇게 이제 한 만보 뭐 빠르게 걷기 때문에 한 한시간, 한시간 10분, 그렇게 걷고 집에 들어오면 몸이 확 회복되는 건 뭐 몸으로 움직였으니 그렇다 치고요 마음에 기분이 확 좋아져요.

우울한 이런 감정이 있을 때는 걷고 나면 마음이 회복이 되는 걸 여러번 느낍니다.

이 원리가 이게 뭘까 했더니 아까 말씀드렸던 도파미네이션이 책에서 이 중독 전문가 교수님이 한 분석을 보니까 아 이 원리구나.

이 추운데 막 빠르게 막 이렇게 걷고 하는 그게 내 육체를 괴롭히는 일이었던거죠.

그래서 이 고통이 증가되는 몸 안에서 기분 좋아지는 호르몬을 막 이제 분비하도록 그런 작용이 일어난다 이게 이 책이 말하는 그 주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자꾸 쾌락에 몰두하면 자꾸 우울해지는 거예요.

그 책에 그런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막 이제 어떤 포르노 같은데 몰두해 가지고 막 쾌락을 자극을 하면은요 그런 걸 다 보고 나면은 혹은 또 중독이 일어나면 점점 우울해진데요.

아니 내가 지금 쾌락을 위해서 그런 것들을 자극적인 걸 봤는데 왜 이렇게 우울하지?

이 원리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자꾸 쾌락에 몰두하면 자꾸 다운이 되고 가라앉고 우울해지는 거고.

또 스스로가 절제를 애쓰고 절제를 익히면 그러면 참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게 뇌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증명을 해놓은 거라서 저에게는 굉장히 유익한 책이었습니다.

 

게다가 또 한가지 이 쾌락 추구와 관련해서 어떤 문제가 있는가 하면은 조금 전에도 제가 포르노 예를 들었지만 이 포르노 같은 음란 영화를 예를 들어서 본다고 하면은 처음에는요 이걸 처음 접할 때는 조금만 이런 야한 장면만 나와도 온 몸이 다 자극을 받는 거잖아요.

근데 이걸 계속 지속적으로 들여다보고 중독이 되면은 처음에 그 정도 자극으로는 몸이 반응을 하지 않아요.

마약도 마찬가지거든요.

마약 중독이 왜 위험합니까.

맨 처음에 강도 굉장히 약한 그런 그 마약류를 어떻게 한번 내가 그거를 맛을 봤다 하면은 온 몸이다 반응을 해요. 

너무 강렬하니까 이제 또 하고 싶은 거잖아요.

근데 마약 중독이 왜 위험한가 하면은 자꾸 지속적으로 여기에 노출이 되면 맨 처음에 했을 때에 그 정도 강도로는 내 몸이 반응을 안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더 강한 거 더 강한 거 더 강한 거.

그래서 그냥 폐인이 돼 버리는 거라는 거죠.

그래서 그 책에서 교수님이 주장하는게 뭐냐면은 이렇게 자꾸자꾸 빠져들어가는 것이 이 쾌락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 쾌락에 대한 유혹이 올 때 그걸 방치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유혹을 억누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뭔가에 뭐 그게 뭐 포르노 중독이든 뭐 마약 중독이든 혹은 뭐 어떤 것에 대한 중독이지간에 처음에는 잘 안 된대요.

그런데 지속적으로 억누르려고 노력을 기울이면 우리 뇌는 이 중독 대상이 없던 그 이전 단계의 수준으로까지 회복시켜 준다는 거예요.

이 안에서 이 저울 기능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쾌락에 몰두하면 고통이 따르지만 절제를 익힌다면 참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성경 공부할 때 성령의 열매 중에 맨 마지막, 이 모든 성령의 열매를 담는 그릇 같은 게 이게 절제다, 그 우리 절제를 우리가 늘 이제 사모하고 바라야 된다 이런 것들이 이론으로만 저희들이 했는데요.

성경의 이 내용들이 요즘에 이 뇌 과학자들이 하나씩 하나씩 증명하는게 전 너무 신기하고 감사한 거거든요.

 

이렇게 우리는 삶에서 이 쾌락에 대한 절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게 우리를 이제 행복하게 만든다고 하는 이런 책을 읽고 해도요 오늘 우리 시대가 이게 참 굉장히 위험한 시대예요.

내버려두질 않아요.

끊임없이 우리를 이런 자극적인 것 짜릿한 어떤 쾌락 이런 쪽에 계속 우리를 몰고 가기 때문에요.

제가 최근에 어느 기사를 읽다가 막 눈을 비비면서 봤습니다.

이게 진짜 이게 사실인가.

여러분 지금 강원도에서 청소년 올림픽이 진행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청소년은 애들이에요.

그런데요 IOC 이게 뭐 국제공인기구 아닙니까.

지금 그 청소년 올림픽 조직 위원회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느냐.

그 애들 올림픽에 그 선수단 숙소 같은데 콘돔을 비치해 놓고 언제든지 무상으로 이것을 가져가라고 그러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게 뭔 일이야 해가지고 나이를 다시 검색을 해봤습니다.

그래서 청소년 올림픽 이렇게 검색해서 보니까요, 그 대상 선수들이 14살부터 18살까지에요.

지금 14살부터 18살 아이들이 모여 가지고 지금 스포츠 대결을 하고 있는데 그 기간이 뭐 이게 뭐 몇 년이나 하는 겁니까.

그럼 그걸 오히려 가르치고 절제를 가르치고 이런 일이 일어나야 되는데 이걸 뭐 그 애들 올림픽 하는데다가 그렇게 막 콘돔을 권장을 하고 그 권장까지 아니더라도 눈에 띄는데 갖다 놓는게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이 시대가 점점 무디어지는구나라고 느끼는게요, 아무도 이거에 대하여 항의가 없잖아요.

이게 뭐 한 몇 년 전만 해도요 뭐 발칵 뒤집어졌을 거예요.

이 뭐 하는 짓이냐고.

이제 우리 스스로도 포기하고 사는 거예요.

세상이 뭐 다 그런 걸 뭐.

 

저는 IOC시에서 그런 짓을 했다고 하는 그 기사를 보면서 예전에 제가 본 영상 하나가 떠올랐는데요.

미국의 필라델피아에 좀비 거리가 있대요.

거기 영상을 제가 우연히 보고 진짜 무서웠습니다.

왜냐하니까요 거기에 이제 마약에 중독이 된 사람들이 허리가 완전히 90도가 꺾이고요 이러면서 막 이 차도로 막 뛰어들고 막 이 뛰어드는 것도 아니에요.

영화 본 그대로예요. 좀비 영화.

이게 굉장히 강도 높은 마약에 중독이 돼 가지고 막 이렇게 이제 좀비가 돼 가지고 막 길거리에 그렇게 배회하는 장면인데 그게 잊혀지지가 않아요.

제가 많이 놀랐던게 뭐냐 하면은 지금 그 필라델피아에 있는 그 마약 거리에 하루 평균 8천명에서 만 명이 마약을 위해 가지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일만 성도 파송 운동 이후로요 우리 교회에 예배 출석 인원이 다 합쳐 가지고 5천명 좀 더 됩니다.

어마어마한 숫자 아닙니까 이게.

만 명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냐고요.

 

더 충격적인 건요 필라델피아 시정부에서 이 마약 중독자들에게 마약할때 쓰는 주사기를 무료로 나눠 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 주정부에서 왜 이런 짓을 합니까.

이제 마약 중독자가 넘쳐 나가지고 이제 마약 단속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감염이라도 예방하자 그 에이즈 같은 이런 것들을 예방하기 위해 가지고 이제 깨끗한 소독된 마약 쓸 때 쓰는 주사기를 나눠 주고 있다.

이게 필라델피아에서 있는 일이라고 그 영상을 제가 봤기 때문에, 최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시는 교포 분이 여기 방문을 있길래 그 얘기를 제가 했습니다.

필라델피아에 이런 마약 거리가 있다 그랬더니 그분 하는 반응이 '아이고 목사님 그게 뭐 필라델피아만 있는 줄 아십니까, 제가 사는 샌프란시스코도 지금 뭐 그런 현상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게 지금 미국의 현실이거든요.

그런데 지금 한번 보세요.

이 넷플리스 같은 이런 그 미국발 이런 그 막 음란한 것들이 여과 없이 나오는 가치관을 흔들어대고 있는 이런 영화 드라마 이런게 지금 대한민국 안방에서 그거 몇 만 원 내면 24시간 그런 것들을 볼 수 있는, 그게 노출이 돼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우리 너무너무 소중한 우리 아들 우리 딸들이 지금 거기에 자꾸 이제 가치관이 노출이 되는 거거든요.

 

제가 한 2년 전에요, 어느 국회의원을 만났는데 이분이 우려하면서 그런 말 하더라고요.

목사님, 대한민국 이제 이 사회 다음에 심각한 건 마약 문제입니다 그러더라고요.

그때는 제가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그 얘기를 안 들었는데요 지금 불과 한 2년도 채 안되는 이런 상황에서 이제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이게 지금 가격이 너무 싸고 너무 쉽게 구할 수 있고 그래서 이제는 뭐 중고등학교까지 지금 범람해 오고 있다는 뉴스는 여러분 다 들어서 아실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이런 점에서 지금 보면은요 오늘 우리 시대는 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과 똑같은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그 전도 유망한 그런 귀한 청소년들을 바벨론에서 포로로 끌고 가가지고 그들에게 제일 먼저 한게 뭔지 아십니까.

창씨개명이에요.

이름을 바꾸는 겁니다.

그게 다니엘서 1장 7절에 나옵니다. 한번 보십시오.

'환관장이 그들의 이름을 고쳐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 하였더라'

원래 갖고 있던 다니엘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 이런 뜻이에요.

그랬는데 바벨론에서 이 귀한 청년을 잡아가지고 이름을 바꿔버렸습니다.

'벨드사살', 이 벨드사살은요 벨이라는 신이 나의 삶을 지킨다 이런 뜻입니다.

제가 자료를 보니까 벨 신은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던 바알의 또 다른 이름이래요.

 

자 질문, 지금 바벨론이 왜 이런 짓을 합니까.

왜 남의 귀한 이름을 바꿔 버립니까.

다니엘뿐만 아니고 세 친구 전부가 다 하나같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런 의미를 가진 이름이었는데 그 세 친구도 이름을 다 바꿔 버려요.

무엇으로? 그 귀한 이름을 우상의 이름으로 다 바꿔 버려요.

왜 이렇게 할까요? 세뇌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왜 부모가 아이 이름을 귀한 이름으로 짓습니까.

그 다니엘이라는 이름을 지을 때 어릴 때부터 다니엘아 다니엘아 그럴 때 거기에 담겨져 있는 교육이 뭡니까?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고, 보이지 않지만 난 내 멋대로 살 수 없는 존재라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된다고 그런 메시지를 계속 받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넌 오늘부터 다니엘이 아니고 벨드사살이야, 벨 신이 너의 삶을 지킨다 말이야, 벨드사살 벨드사살 계속 다니엘을 이렇게 이름을 부르는게 이 세뇌를 위한 거거든요.

이런 점에서는 오늘 우리 청소년들 우리 젊은이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뭐 넷플릭스 뿐입니까.

지금 공공티비에서 하는 공영 방송에서 하는 드라마까지 한번 보시라고요.

그 드라마 기저는요 우리 한국의 고유한 이런 전통과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드라마는 이제 한 편도 없습니다.

전부 다 이제 이 미국발 굉장히 이게 국적도 없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런 가치관을 지금 잠식시키는 거거든요.

동성애 문제, 이게 한국발입니까.

 

다시 부탁드리는데요,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은 동성애자들을 그렇게 편견을 갖고 함부로 대하고 막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 성경적이지 않아요.

동성애자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들을 혐오해서는 안 되고요.

그들을 우리가 긍휼한 마음으로 어떻게해서든 도와줘야 될 대상이라 생각하지만 그러나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은 정확하게 갖고 가자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여러분 저도요 중고등학교 때 남자 친구들을 너무 사랑하는 남자 친구도 많았습니다.

얘 데리고 우리 집에 가서 자고 나도 그 집에 가서 자고 껴안고 막 레슬링 하고 이러면서도 이걸 내가 동성애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우정이에요.

남자끼리도 손 잡고 자고 우리 집에도 데리고 오고 밥도 같이 먹고 등산도 같이 하고 이게 어떻게 동성애냐구요.

지금 우리 아이들이 이런 잘못된 문화 속에서 계속 지금 오해를 하게 만드는 거거든요.

어 나도 동성애적인 성향이 있나 보다, 뭘 노리는 거냐고요.

 

그 무슨 뭐 영화 같은 거 보세요 드라마 한번 보세요.

아니 여기에 지금 동성애자들을 등장시킬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그 인기 있는 영화 보면은 그거를 그냥 뭐 양념처럼 그렇게 슬쩍슬쩍 끼워넣는게 이게 지금 그 바벨론의 포로로 끌고 간 그 악한 것들이 이름 바꾸는 거랑 똑같은 그런 행위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요 저는 너무 두려워요.

이제 몇 년 뒤가 될지 몇십년 뒤가 될지 이제 서울에서 이제 부산에서 이제 광주에서 좀비 거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시대가 돼 버렸습니다.

이 마약 청국이 대한민국에서 말이죠.

그리고 이제 가정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제 하나님이 허락하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많은 분들이 축복을 받으면서 이루어가는 이 형태는 미국은 붕괴된지가 오래됐고 유럽 붕괴된지 오래됐고 왜 대한민국이 거기를 지금 그 문화를 따라갈 수밖에 없느냐고요.

강력한 이 문화가 천천히 아이들을 세뇌시키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고 가정 살려야 돼요.

진짜 건강한 가정 안에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진짜 행복하다.

나도 이 결혼하고 싶다 이걸 우리가 만들어내야 되는 거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요 우리도 이제 다니엘처럼 선포해야 됩니다.

 

아까 다니엘 1장 7절에서 그 이름을 가지고 그렇게 그 창씨개명을 하는 짓을 저질렀다는게 7절인데요.

그거에 대항하는 8절에 다니엘을 보십시오 8절.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오늘 우리 시대는요 젊은이들 뭐 기성세대 할 거 없이 예수믿는 우리는 매일 이 결단을 해야 돼요.

매일 선언을 해야 돼요.

나는 이 세상에 물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다.

그리고 영화 한 편을 봐도 이거는 잘못된거다 이거는 잘된거다 분별할 수 있는 눈을 키워줘야 되는 시대예요.

그래서 여러분 멀쩡한 그 다니엘이라는 그 귀한 이름을 못 쓰게 하고 벨드사살이라고 하는 국적 불명의 세뇌를 시키는 이 세상에 우리 아이들이 노출이 됐다면 가정에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러분 가정에서 복음의 언어를 많이 나누셔야 돼요.

복음의 언어.

교회에 일주일에 딱 한 시간 나와 가지고 다니엘 다니엘 복음의 언어 듣고 주 7일이 지금 아이들이 지금 이 벨드사살이라는 이름에 노출되어 있는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사명을 가지고 가정 안에서 다니엘아 다니엘아 넌 벨드사살 아니냐 넌 다니엘이야 넌 하나님의 사람이야 이 복음의 언어.

복음의 언어가 뭡니까.

십자가로 회복이 되는 언어, 격려의 언어, 사람을 살리는 언어, 어지간하면 가정에서 자꾸 지적하지 마시고요 주님 이름으로 자꾸 축복하고.

교회도 부탁해요.

허구한날 아무것도 아닌 거 가지고 악플이나 달고 이 교회는 저 교회가 문제고 저 교회는 이 교회가 문제고 이 사람은 저 사람이 문제고 저 사람은 이 사람이 문제고, 이 복음의 언어가 아니에요.

용서의 언어, 용납의 언어, 사랑의 언어.

그 드라마 같은데 그냥 자극적인 것에 노출돼 있는 우리 젊은이들이 교회 오면은 그런 자극적인 사랑이 아니라 저 얼굴 표정에서.

뭐 설교할 때 저도 자꾸 인상 쓰면서 해 가지고 할 말이 없는데요.

웃으면서 하는게 전 잘 안 돼요.

막 인상은 써도.

 

조금 전에 제가 가르쳤던 그 중고등부때에 가르쳤던 제자가 쓴 글을 보고 마음이 너무 고무가 됐어요.

자기에게 영향을 준 사람 그러면서 이제 이찬수 목사 편이었나 봐요.

우리 목사님은 한번도 우리를 지적하고 그러지 않았다고.

계속 복음으로, 아 읽어 드릴 걸 그랬네 내가 옮겨와 가지고.

제가 굉장히 위로를 받았습니다.

교회는 이런 곳이어야 돼요.

자꾸 지적하고 너 이래가지고 안돼.

그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요 너 이거만 고치면 되는데.

교회에서 복음의 언어가 가정에서 복음의 언어가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 많이 드러나는 올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요 이 혼란한 시대에 우리가 그 세 가지 대안이라 그럴까요 지침이라 그럴까요 한 세 가지를 우리가 마음에 담고 기도하기 원하는데요.

혼란한 이 시대에 대한 지침 첫째 거룩을 삶의 목표로 삼으라는 거예요.

선포하는 겁니다. 다니엘처럼.

본문 로마서 12장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제가 자료를 보니까 김도현 교수님이라는 분이 쓴 책에서요 여기 나오는 '몸을 드리라'인데 이 몸은 이런 육체를 얘기하는게 아니라 육체를 포함한 여기 나오는 몸은 헬라어로 '소마'인데요 이 단어는 몸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가 소중에 어떤 소유물, 그러니까 우리가 가진 어떤 계획, 우리가 가진 어떤 꿈 심지어는 우리의 자녀들까지도 포함되는 전인격적인 차원에서의 표현이라는 겁니다.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내 전인격이 담겨져 있는 그것을 주님께 드리는 거.

이게 거룩이에요.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이 거룩하다 이거 구별되다는 뜻이거든요. 직역을 하면.

그리고 이 거룩이라는 거 왜 구별을 해야 되느냐.

이 거룩이라는 거는 하나님께 드리려고 구별해 놓은 것 이게 거룩이에요.

 

제가 옥한흠 목사님 너무 흠모하고 사랑하던 때인데요.

부교역자로 있을 때 어떤 성도님이 감을 갖고 오셨어요.

이 감이 이게 보통 감이 아니에요.

난 그렇게 큰 홍시는 처음 봤습니다.

감이 막 엄청 크고 맛있게 생긴 감을 아 목사님 이게 너무 크고 맛있어 보여서 제가 목사님 드리려고 갖고 왔다 그랬는데요.

제가 그 감을 받고 못 먹겠더라고요.

이걸 내가 어떻게 먹어.

그래서 제가 흠모하는 옥 목사님을 갖다 드렸어요.

목사님 어떤 성도님이 감을 갖고 오셨는데 이 내 도저히 먹을 수 없고 목사님 드리고 싶다고.

보통 목사님은 뭐 선물 주는게 별로 안 좋아하시거든요.

감은 엄청 받으시더라고요.

'오~' 그러면서 그 감을 받으시던 그 장면이 거의 20년 가까이 지났는데요 저는 잊혀지지가 않아요.

왜? 전 그분을 사랑했거든요 흠모했거든요.

그리고 은혜를 많이 입었거든요.

그래서 이게 그냥 보통 감 같으면 홀랑 먹었지만 어 이건 내가 먹기엔 좀 그렇다 그래서 제가 내가 너무너무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 스승님에게 갖다 드렸거든요.

왜 구분한다구요? 이게 거룩이에요.

 

여러분 하나님께 이런 마음이 있으세요?

여러분 막 쾌락이 끊임없이 내게 밀려올 때 아 이 세상은 뭐 내가 즐길 수 있는 거라고 말하는 이 시대에 그걸 내가 참아내고 억누르고 또 절제하고 또 절제하고 왜 그렇게 사는 겁니까?

왜 그래 되는 겁니까?

우린 거룩한 존재니까요.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니까요.

보셨잖아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저는 감정대로 휘둘리지 않으려고 지금도 애를 써요.

제가 이래서 한 두 달 설교도 못 하고 막 설교 시간에 막 울고 맨날 우울하고 제가 그러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 지금도 노력을 해요.

왜 노력을 하는 겁니까.

이 강단은 그런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내 감정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해요.

거기에 제가 요동하지 않기를 원해요.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

그게 거룩이에요.

그 책 제목 중에 '일상의 거룩함을 회복하라' 이런 제목의 책이 있는데요, 그 목차에 보니까 우리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될 다섯 가지 종류의 거룩이 나와 있더라고요.

첫번째 거룩이 이겁니다.

화면으로도 제가 좀 띄워 달라 그랬는데 시간의 거룩함을 회복하라에요. 시간의 거룩함.

제가 시간 아까워서 부부 싸움도 안 한다고 말씀 여러 번 드렸던 거 같은데요.

요즘에 40대 50대 직장 남성들이 그 무슨 게임에 굉장히 많이 이제 그 게임 산업이 엄청 커졌대요.

그래서 저도 한 번씩 아 나도 옛날 중고등학교 다닐 때 테트리스 같은 거 하고 했는데 아 나도 게임을 좀 해볼까 그런 생각하는데 단 한 번도 시도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여기 사랑하는 직장인 남성 여러분 여러분의 스트레스를 저는 너무 잘 알고 마음이 아파요.

그런데 여러분 중독되지 마세요.

제가 왜 그 게임을 시작 안 하는지 아십니까.

시간의 거룩을 드리고 싶었어요.

낭비하고 싶지 않은 거거든요.

그런가 하면 두 번째로 돈의 거룩함이에요.

그리고 세 번째가 관계의 거룩함입니다.

네 번째가 성의 거룩함입니다.

다섯 번째가 가치의 거룩함입니다.

 

분당 우리 교회가 왜 헌금 강조 안 합니까.

왜 예배드리는데 헌금 주머니 안 돌립니까.

개척 첫날부터 단 한 번도 돌린 적이 없거든요.

왜 안 돌립니까.

헌금이 의미가 없다는게 아니라 이것만 너무 강조하면 돈만 자꾸 하나님께 드리는 뭐로 생각할까 봐 그런 거예요.

경제적으로 어려우세요? 자유하십시오.

돈 드리는 것만이 드리는게 아니에요.

우리 드릴게 너무 많아요.

하나님 앞에 내 시간을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관계의 거룩함.

절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관계는 갖지 않고.

여러분의 관계가 거룩합니까?

뭘 보면 압니까?

서로 대화 가운데 복음의 언어가 나오고 있나?

우리 대화 가운데 서로를 주님 이름으로 격려하는게 나오고 있나?

드리는 거예요.

다니엘처럼을 뜻을 정하는 거.

그 드리는 거거든요.

돈 뭐 그냥 툭 던져 주머니 돌면 그거 드리고 내 할 일 다 했다 이럴까봐 헌금을 강조하지 않는 겁니다.

물질적인 걸 포함해서 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전인격적인 걸 드리는 거예요.

주중에 계속.

그래서 여러분 오늘 본문 1절을 그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풀이해 놨는데 자 들어보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여러분이 이렇게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그다음 보세요 '여러분의 매일의 삶 일상의 삶 예를 들면 자고 먹고 일하고 노는 모든 삶을 하나님께 헌물로 드리십시오'

왜 거룩해 해야 된다고요?

우리는 하나님께 좋은 걸 드려야 되는 존재예요.

내 마음 내 정성 내가 아끼는 그 무엇.

 

그런가 하면 두 번째로 이 혼란한 이 시대에 대안이 또 하나 있는데요.

두 종류의 거룩을 통합하라예요.

자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은 오늘 본문 로마서 12장 1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라는 접속사로 시작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여기 나오는 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로마서 전체에서 제일 중요한 표현 중에 하나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제가 오늘 설교 제목을 그러므로 이렇게 잡을 뻔했습니다.

너무 생뚱 맞아 가지고 내가 눈물을 머금고 딴 제목으로 바꿨는데요.

그러므로의 의미가 뭐냐.

로마서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집니다.

1장부터 11장까지가 전반부고요 12장부터 16장까지가 후반부에요.

1장부터 11장 전반부에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 주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로 바꾸어 주시는 일, 그것들이 쭉 열거돼 있는게 전반부고요.

후반부는 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보답해야 되는 우리들의 삶, 그게 어떤 건가 이거를 열거해 놓은게 후반부인데요.

그래서 이제 전반부인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의 말씀을 통해서는 잘 들어보세요 두 종류의 거룩함 중에서 첫째 존재로 드러나는 거룩함의 문제예요.

그건 내가 애쓴거 하나도 없습니다.

자격도 없는데 십자가를 통하여 내 존재를 거룩한 존재로 바꾸어 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확실히 선포합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어둠의 자식이 아니에요.

저는 빛의 자녀예요.

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저는 십자가를 통하여 내 존재가 거룩한 존재라고 저는 늘 마음의 기쁨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12장부터 16장까지의 거룩은 어떤 거룩이냐.

삶으로 드러내야 하는 거룩함이에요.

예를들면 베드로전서 1장 15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그다음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십니다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이게 삶으로 드러내야 되는 거룩함이에요.

자꾸 뭐 나 예수 믿고 변화되었다 난 거룩한 존재다 이것만 외치고 다니면 치우치는 거예요.

내 존재가 거룩할뿐만 아니라 내가 삶으로 거룩을 드러내야 돼요.

내가 삶으로 거룩을 드러내야 돼요.

그런데 로마서 12장 1절 오늘 본문에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이 두 종류의 거룩을 통합시켜 주는 거거든요.

치우치지 않는 두 거룩의 통합.

저와 여러분이 이제 존재로서의 거룩도 감히 그래서 우리 성도님 그러잖아요.

사실 집사님 보다 훨씬 더 의미가 있는게 성도님이에요.

우린 거룩한 존재예요.

그런가 하면은 삶으로 그 거룩을 드러내야 되는 거죠.

 

마지막 세 번째로 이 혼란한 이 시대에 한 가지 대안이 더 있는데요.

그게 우리 삶에서 거룩이 능력인 것을 보여 줘야 돼요.

거룩이 능력인 것을 입증해야 돼요.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힘을 이렇게 표현한 거 작년 가을에 제가 말씀드렸던 기억이 있거든요.

자 요한복음 1장 4절 5절입니다.

주님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걸 제가 단어 풀이를 해 드렸던 기억하십니까.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표현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이기지 못하더라' 그렇게 제가 의역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잖아요.

도파미네이션이라는 책에서 그 뇌 전문가 중독 전문가 교수님이 입증을 했지 않습니까 쾌락에 몰두하면 고통이 따르지만 하나님 원하시는 절제를 익힌다면 거기서 참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거 우리가 증명해야 돼요.

예수 믿는게 뭐 전부 참아야 되고 억제해야 되고 막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어릴 때 그렇게 오해했습니다.

아니에요.

예수믿는 특권이 뭔지 아십니까.

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 이 복음이 갖고 있는 능력,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이거를 우리가 맛보고 누려야 될 책임도 의무도 고난도 다 있는 거예요.

쾌락에 몰두하면 고통이 따르지만 절제를 익힌다면 참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진짜 구현해야 될 명제 아닙니까. 이게.

우리 교회 성도님 다 아시죠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우리는 거룩을 추구하는 사람이에요.

아 예수 믿고 행복해졌어 그래서 어쩌라고요.

예수믿고 행복해진게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입니까 아니에요.

나 예수 믿고 거룩해졌어.

내가 원래 내가 아내 말고도 막 여기저기 딴 여자들 기웃거렸는데 예수 믿고 그게 없어졌네.

이게 예수믿는 사람 특징이에요.

예수 믿는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는게 아니라 거룩을 추구하는 사람인데요 아까 그 뇌과학자가 너무나 명쾌하게 설명했잖아요.

그렇게 행복을 추구하고 쾌락에 몰두하면 고통이 따라요.

행복을 추구해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거룩을 추구할 때 거기에 참 기쁨이 있다는 거 이 만들어 내야 되는 거죠.

바로 어제 제가 우리 교역자들에게 간증을 한게 점심 먹고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 번씩 이제 커피 마시면서 그 뭐 잡담도 하고 농담도 하고 그런 시간인데 어제 오후에 그런 시간을 몇명과 가졌거든요.

이런 이야기 했습니다.

당신들이 나 봐서 알지만 이찬수 목사 사는 거 진짜 재미없다.

내가 봐도 난 내 사는게 재미 하나도 없다.

저는요 한 달을 요새 그 구글 맵에서 그런 걸 만들어 주더라고요.

한 달 동안에 동선을 그래프로 그려 줘요.

제 한 달 동선을 보면 요새는 보지도 않아요 이거예요.

그냥 집 교회 교회 집 집 교회 교회 집 집 집 교회 교회 심방 교회 집 심방 심방 교회 집 교회 집집 그림이 이것밖에 안 나와요.

그거 말고 제가 뭐 어디로 가겠냐고요.

근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근데 그 뇌과학자 교수님의 그 연구가 난 너무 동의가 된다.

너무너무 이상한데 난 내 삶이 너무 기쁘다고.

그리고 막 쾌락을 추구하지 않으니까요 그 작은 기쁨이 막 얼마나 큰지 몰라요.

내일도 제가 하겠지만 이제 월요일 날 내가 또 걸으러 나가잖아요.

그래서 뭐 추운데 꽁꽁 싸고 또 미세먼지 있는 날은 또 이제 안 가지만 뭐 공기 좋은 날 옷 입고 제가 만보 걷는 거 그 자체가 이게 뭐 엄청난 놀이나고요. 이게.

아 그런데 그러면 막 기쁨이 올라와요.

그래 갖고 막 이렇게 노래가 나와요.

막 찬양이 나오면 요새는 또 마스크 타고 막 눈이 뿌예져가지고 막 찬양하다가 안경 벗고 가요.

막 노래를 부르며.

여러분 그 어떤 그 이제 그 중년을 갓 벗어난 것같은 어떤 남자가 안경을 벗고 막 노래하면서 가면 그게 저예요.

멀리서도 금방 알아볼 거예요.

이게 그렇게 기쁜 일이냐고요.

기쁜 걸 어떡하냐고요.

기뻐요.

목사로서 제가 여러분에게 모범이 되려고 말하는데요 저는 단언컨데 제 아내 말고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아요.

마음도 안 가요.

저는 제 아내 말고는 전부 성도님일 뿐이에요.

와 저래 갖고 참 세상 재미없게 살겠다고 생각하시는 바람 피는 여러분.

이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아세요.

시간이 갈수록 더 사랑스러워지는.

시간이 갈수록 더 소중해지는.

시간이 갈수록 그 상대방의 그 연약한 부분은 더 긍휼해지고.

제 아내가 유방암이 걸렸잖아요.

그 암은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선물이라 생각해요.

천년 만년 이럴 줄 알았거든요.

웬걸요.

아내가 유방암에 걸리고 나서부터 어 이게 영원한게 아니구나.

이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소소한 기쁨, 행복, 여전히 이번 주간도 집 교회 집 교회 집 교회 심방 집 교회 이거밖에 없을 거예요. 스케줄이.

그런데 그 소소한 기쁨.

이게 제가 여러분에게 해드릴 수 있는 가장 의무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도 인생이 재미가 없고 맨날 우울하고 괜히 목사가 돼 가지고 내 팔자야 이러고 있으면 저는 목사 자격이 없다 생각해요.

설교 시간에 인상 쓰는 건 옥 목사님 때문에 내가 계속 그게 익숙해서 그런 거고.

이 인상 쓰는게 제가 뭐 되게 우울하고 이런 거 아닙니다.

 

결론을 제가 오늘 이렇게 맺기 원합니다.

올해 우리 교회 목표 아시죠 이 한번 보세요.

우리 한번 같이 선포할까요.

'거룩과 성숙'

우리 교회 목표고 여러분 개인의 목표고 여러분의 가정의 목표가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베드로전서 1장 16절의 말씀이에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 복음의 능력이에요.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

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고 승리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이 쾌락으로 공격하는 것들 앞에 십자가의 능력으로 그것들을 억제하고 방어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참 기쁨이 우리 안에서 용솟음 치게 되는 것 이걸 반드시 올한해 만들어 내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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