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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옥한흠목사님

산상수훈 강해 3강 | 눈물먹고 자라는 행복(팔복 세번째) | 마태복음 5:4, 누가복음 6:21,25 | 옥한흠목사님 | 사랑의교회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설교문 녹취록

본문: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눅 6: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눅 6: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며칠 전에 시내에 있는 대형 서점으로 좀 나가 보았습니다.

유머 책들이 생각보다 많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아마 사람들이 그런 책을 퍽 많이 찾나 봐요.

그 제목들도 또 그 속에 들어 있는 그 문장들도 아주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있는 매력적인 글들이었습니다.

'유머는 성공의 시작이요 웃음은 행복의 시작이니라' 뭐 이런 이야기 또 '웃으면 복이 와요' 하는 이런 말들 이런 표지들이 붙은 책들을 사람들이 자주 손에 들고 그 서점 안에서도 읽어 보며 웃으면서 이렇게 보내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사회가 워낙 살기가 어려우니까 짓눌리고 쫓기고 답답하고 잘 안 풀리는 그런 분위기에서 잠깐이나마 숨을 돌리기 위해서 사람들은 웃음이라는 것을 찾아헤매는 것 같아요.

그리고 한번 크게 웃음으로써 그 마음에 있던 답답한 감정들을 다 쓸어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현대인들은 무거운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눈물이다, 애통이다 하는 말은 별로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일단 그 말 자체가 주는 어감이 마음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은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경에 많은 역설이 있습니다마는 아마 이 구절이라 말로 기독교의 역설을 대변하는 가장 대표적인 성경 말씀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성경에 보면 눈물이라 슬픔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용어가 한 아홉 가지 됩니다.

그 가운데서 지금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 '애통하는 자' 할 때 '애통하다' 이 용어는 가장 그 강도가 높고 그 감정이 짙은 단어 중에 속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어감이 강하다는 것이죠.

어느정도 강하냐?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에 놓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의 애통, 그것을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창세기 37장에 보면 늙은 야곱이 통곡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열두 아들 가운데서 그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 요셉이 있었습니다마는 하루 아침에 행망 불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도무지 소식을 알 수가 없습니다.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 늙은 아버지 야곱은 옷을 갈기갈기 찢고 허리에 굵은 배를 두르고 땅을 치면서 식음을 전패하고 날마다 날마다 통곡하는 모습을 우리가 보는데요.

이 통곡하는 모습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할 때 '애통' 이 단어입니다.

 

저는 '애통'이라는 이 말의 의미가 이처럼 강하고 또 진하다고 해서 예수님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실 때 우리 모두가 야곱처럼 그렇게 통곡하고 눈물을 흘려야 된다고 하는 의미로 사용하셨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꼭 그런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말씀하고 우리하고 별 관계가 없어요.

우리가 한평생 살면서 그처럼 가슴을 쥐어짜며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통곡하는 일은 그저 한두번 있을까 말까 하는 사건일 수 있으니까 이 말씀이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냐? 하고 우리는 제껴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제가 볼 때 심령이 가난한 자가 토하는 영혼의 거룩한 탄식을 애통이라고 표현하시는 것 같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토하는 영혼의 거룩한 탄식!

 

우린 난 시간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듣고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 앞에 비울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애통이 따라옵니다.

심령이 비지 못했습니까? 그 사람은이 애통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지금부터 한 반세기 전에 한국 교회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애통하는 공동체였습니다.

그 당시 8.15 이후 너무너무 가난했던 때였고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눈으로 보면서 살아야 했고 어쩌면 그 당시에 그렇게 가뭄이 또 자주자주 연속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 6.25가 터져 가지고 이건 뭐 사람 사는 것이 아니죠.

사람 사는 꼴이 아니에요.

여러분 우리가 지금 요즘 코소보니 뭐 동티모르니 하면서 참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가끔 테레비로 봅니다만 그 당시에 우리의 모습은 지금 당하는 그들보다 더 처참했습니다.

게다가 전부 다 하얀 옷을 입어 놓으니까 오죽이 더 표가 납니까.

그런 형국의 길을 걸으면서 교회에 모이는 우리 선조들은 눈만 감았다면 울었어요.

자기 죄를 놓고 통곡하고, 예수 안 믿는 식구들을 위해서 통곡하고, 나라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뿌리며 기도했습니다.

눈이 붓도록 울었어요.

마루바닥에 눈물 자욱이 여기저기에 아예 너무 진하게 박혀서 걸래를 닦아도 닦이지 아니할 정도로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살았어요.

이렇게 눈물을 흘리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위로가 또 굉장했습니다.

울어보지 아니한 사람은 도무지 맛을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위로가 그들에게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재미로 또 더 울었는지도 몰라요.

그 당시의 모습이었어요.

저는 어린아이였습니다만 옆에서 보고 보고 또 보았습니다.

 

물론 여러분, 우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의 전부가 아닙니다.

애통하는 것이 기독교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분명히 하나 말할 수 있는 것 있습니다.

마른 눈을 가진 신자들이 모이는 교회보다 젖은 눈을 가진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가 훨씬 더 은혜의 세계를 깊이 안다는 사실입니다.

이거는 부인할 수가 없어요.

그때 교회 비해서 오늘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애통하는 눈물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눈물이 메말라 버린 거 같아요.

웃음이 복음으로 들리고 눈물은 비복음으로 들리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어느 신문 광고에 보니까 유머 설교 세미나라고 하는 세미나를 선전하는 것을 봤습니다.

사람들을 웃기면 분위기가 좋아진다는 것이죠.

설교를 듣는 사람도 기분좋게 실컷 웃겨 놓고 설교하면 잘 먹힌다는 것이죠.

듣고 보니 그럴듯 해요.

저도 웃는 걸 좋아하니까요.

우는 것보다 웃는 것을 훨씬 좋아합니다. 그렇죠?

우리 중에 웃는 것보다 우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하는 형제가 있다면 심리학상으로 그것은 조금 문제가 있어요.

우리 모두 웃는 걸 좋아해요.

그러니까 교회도 사람들이 좀 기쁘게 예배할 수 있도록 해야 되고 좀 많이 웃기고 그다음에 기분 좋게 해 줘야 그다음에 말씀을들을 때 아멘 아멘 아멘 하고 듣는데요.

그래서 아마 유머 설교 세미나라는 말이 나왔는지 몰라요.

 

한편 이런 이야기들이 통하는 오늘 현대 교회의 분명한 사실은 눈물이 말랐다는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심각한 이야기는 잘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꼭 하고 싶으면 짧게 해, 아니면 그만 넘어가시지, 그리고 기분 좋게 웃어야 은혜 받았다고 착각하고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는 주님의 말씀하고 거리가 좀 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게 현대 교회 이미지예요.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눈물이 그렇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나요?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짧은 인생을 살다가 갑니다만 너나 할 것 없이 다 경험합니다, 눈물이 소중하다는 것을.

눈물은 그 자체의 고유한 가치와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웃음이 우리에게 매력 있고 또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웃음이 눈물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눈물의 고유한 영역이 있습니다.

만일 우는 것은 무조건 저주요, 슬픔은 무조건 부정해야 될 것이라는 것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중요한 하나가 빠져 버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랍 속담에 이런 말 말이 있습니다.

"햇빛만 쏟아지는 곳은 사막이 된다"

거기는 뭐 눈을 들고 사방을 보면 다 사막 아니요, 비가 없는 곳이니까.

그러니까 아마 이런 속담이 생겼나 봐요.

"모든 햇살은 사막을 만든다" 인생에 있어서도 진리입니다.

비가 와야 돼요, 비가 쏟아져야 돼요.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비가 쏟아질 때 거기에 생명의 환희가 일어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요.

눈물이 없는 곳은 눈물이 없는 인생은 사막이에요.

 

눈물이 없으면 그 웃음 자체도 하나의 광대 노릇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깊이 깨닫는 사람들은 인생을 아는 사람이죠.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서도 이 눈물, 애통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눈물을 통과하지 아니한 신앙은 하나의 값싼 장식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나서 웃기만 했나요? 아직은 값 싼 신앙이에요.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울어 보았나요? 그 사람은 차원을 아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애통이 우리의 신앙을 본질로 향하게 만듭니다.

눈물이 우리의 신앙을 본질로 인도합니다.

눈물이 고인 눈에 십자가의 주님이 보입니다.

젖은 눈에 부활의 주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애통하는 심령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걸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눈물을 먹고 자랍니다.

우리의 인격은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성숙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눈물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애통을 무조건 싫은 것으로, 두려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성경에 보면 신앙생활을 한마디로 정의할 때 탄식이라는 말을 쓸 때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3절 여러분 잘 아시죠?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가진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쉽게 풀면 이런 말씀이죠.

우리 예수믿고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은 날마다 탄식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기다리느냐?

이 썩을 몸 빨리 벗어버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입으신 그 영광스러운 몸을 함께 입을 그날, 양자 될 그날, 우리 몸이 구속을 받을 그날을 사모하면서 탄식한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 한마디로 요약하면 탄식이에요.

같은 의미가 고린도후서 5장 2절에도 나옵니다.

과연 우리가 여기서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신앙생활에서 눈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러분이 꼭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밑바닥에는 눈물의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꼭 기억하십시오.

그거 모르고 신앙생활 하면요 그 신앙은 아주 아주 천박한 신앙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는 말씀을 왜 하셨는가를 우리가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애통하는 자입니까?

첫째로, 자기 죄를 놓고 눈물을 흘리는 자가 애통하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믿고 죄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선언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보고 죄 없다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죄가 없는게 아니에요.

바로 이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보시고 무조건 우리를 죄 없다고 선언하시는 것이지, 실제로 나에게 죄가 없어졌느냐? 물론 거룩해지고 있지요.

그렇지만은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함을 받은 무균실에 들어간 사람들처럼 죄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존재가 아니에요.

우리는 여전히 죄의 작업장이라고 하는 이 부패한 몸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루 10번, 100번 더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어요.

또한 우리 모두는 죄의 유혹이 쉴틈이 없는 장망성,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신앙생활하면서 나는 성령 충만 받아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야, 그러므로 난 죄 없어, 회개할 것도 없어, 왜 자꾸 질질 짜냐? 사제의 확신이 없으니까 그렇게 질질 짜지, 주님이 너 죄를 다 용서하셨어, 웃어!

만약에 이렇게 한다면 그 사람은 사도 요한이 말한 것처럼 거짓말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이 분명히 이런 말했어요.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그래서 거짓말쟁이라 그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모두는 울어야 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애통해야 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하루에 100번이라도 하나님 앞에 애통해야 될 이유를 갖고 있어요.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애통하는 사람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종종 저 자신이 답답하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뭐냐하면 옥 목사를 위시해서 오늘 사랑의 교회가 좀 뻔뻔스럽게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죄짓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리고 교회에 나와서는 몇마디 말로 때우고는 자기 죄가 다 용서받은 것으로 다 알고 있어요.

가슴에 진정 회개하는 자의 자세가 자리를 잡고 있지를 않아요.

하나님이 그 입술의 기도를 들으시고 정말 그 사람을 깨끗게 해주실까?

우리 모두가 깊이 반성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마틴루터가 95개조 항의문을 성당 앞에 붙일 때 그 항의문 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앙인의 삶이란 무엇인가? 끊임없는 회개와 참회를 하는 것이다'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에, 우리 안에 성령을 모시고 사는 구별된 사람이기에 우리에게는 매일 눈물이 필요합니다.

죄를 씻는 눈물이요.

우리의 표준은 이웃사람이 아닙니다.

저 사람보다 내가 얼마나 선하냐? 그것이 아니고 우리의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나는 얼마나 거룩한가 입니다.

이것이 우리 표준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추악함을 더 보게 됩니다.

더 애통하는 심정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은 애통할 일이 별로 없죠.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우리가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몰라서 우리가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가까이에서 느끼기 때문에 애통하는 것이고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영광의 빛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노출되는 나 자신을 순간순간 볼 때마다 나의 악함을 가지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가지고 애통하는 것을 다윗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시편 51편입닙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애통이 뭐냐? 상한 마음이에요.

애통이 뭐냐? 통곡하는 거예요, 통회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런 심령을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통회하고 자기 죄를 하나님 앞에 고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복되다고 하시고 그 눈물을 씻어 주시고 그에게 사유의 은총, 평안의 은총, 기쁨의 은총, 만족의 은총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위로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만큼 주님 앞에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을 가지고 신앙생활 합니까?

우리 눈에 탄식의 눈물이 있을 때, 통회하는 눈물이 있을 때, 우리의 심령에 위로의 무지개가 서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뻔뻔스러운 사람 되지 마세요.

 

둘째로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사람이 바로 애통하는 자입니다.

누가복음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상당히 직설적으로 말씀을 하시는 거 같아요.

25절에 나오는 '배부른 자, 웃는 자'는 세상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잘 살고 날마다 웃고 희희낙락하는 것을 저주로 보시고, 화로 보시고 21절에 '주린 자'와 '우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들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리고 우는 그 삶 자체를 주님께서는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는 젖은 눈이 마를 날이 없이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강남의 화려한 아파트 촌만을 쳐다보고 살지 마세요.

그 아파트를 좀 넘어서 우리가 좀 눈높이를 낮추고 조용히 살펴보세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극진히 사랑하는 자녀들 세계에도 얼마나 눈물이 많은지 모릅니다.

서록 서초구 강남 지역도 우리가 조금만 겸손하게 허리를 낮추고 보면 남의 눈에 잘 뜨이지 아니하는 반지하 같은 데서 방 한칸 얻어 놓고 너무너무 어려운 삶을 사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을 만나 견디다 못해서 시간만 나면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통곡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이 통곡을 복이 있다고 말씀하세요.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주님을 잘 믿는데 가난은 왜 떠나지 않는지?

왜 하는 일들이 잘 풀리지 않는지?

왜 자녀가 탈선하는지?

왜 경쟁에서 뒤지고 마는지?

왜 나쁜 사람들의 속임수에 빠져 메꿀 수 없는 손해를 입어야 하는지?

왜 하루 아침에 병이 들어 육체가 망가지는지?

왜 억울하게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우리는 다 설명할 수가 없어요.

설명할 수 없지만은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날마다 눈물로 살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가슴에 찾아드는 이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견디지 못해서 많은 세상 사람들이 웃고 즐기는 시간에 조용히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가슴에 가득한 서러움을 눈물로 씻어내는 거룩한 성도들이 많아요.

살기가 힘들 때마다, 자주자주 좌절감이 올 때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눈물로 하나님의 옷자락을 적시는 거룩한 백성들이 이 지구상에 많아요.

어떤 면에서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져야 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는이 세상의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고통과 슬픔을 안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많은 불행스러운 일들을 안고 눈물 흘리는 사람은 꼭 저주받은 사람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며"

나의 슬픔, 나의 고통, 주님 앞에 들고 나가서 눈물로 주의 옷자락을 적시며 주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 주님이 말씀합니다.

'너 애통하는 거 복이 있느니라' 아멘.

 

그래서 하나님이 히스기야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이사야 38장 5절 "내가 네 기도를 들었노라 내가 네 눈물을 보았노라"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내 눈앞에 앓던 사람이 벌떡벌떡 일어나지 아니하며, 지금 당장 내 눈앞에 가난이 물러가지 아니하며, 지금 당장 내 눈앞에 내가 원하던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의 애통이 복이 있느니라, 내가 네 눈물을 보았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다"

우리의 눈물을 아시는 주 하나님이 오늘도 살아계시면 그 자체가 우리에게 위로요 그 자체가 우리에게 소망이요 그 자체가 우리에게 행복이라는 것을 우리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우리 하나님 그의 자녀들의 눈에 눈물을 씻겨 주시는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이유로 하나님 앞에 와서 엎드려 울지라도 그 울음을 저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울음을 복이 없는 사람으로 해석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요.

 

세 번째로 누가 애통하는 자냐?

세상 죄를 짊어지고 애통하는 사람,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며칠 전, 예루살렘 성이 환히 내려다 보이는 감람산에 앉으셨습니다.

한참 성을 내려다 보시던 주님의 눈에 굵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몇 번 우셨다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시는 주님의 눈물은 정말 통한이 가득한 눈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는데도 영접하지 아니한 어두움의 권세가 뒤덮고 있는 악한 성이었습니다.

한 40년 지나면 그 성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 예수님이 다 알고 계셨어요.

내다보고 계셨어요.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날이 이를지라 반드시 때가 온다" 그 말입니다.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포위하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워 치며 돌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라"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주후 70년에 있었던 로마 티토 황제 예루살렘 포위와 함락은 정말로 비참했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파 어머니들이 어린 애들을 남몰래 잡아먹었습니다.

로마군인들이 성에 입성한 다음에는 어린아이들을 휭휭 돌려가지고 동댕이 쳐 죽였습니다.

임신한 여자들을 끌어다가 발가벗기고 칼로 배를 쪼갰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불 타고 그다음에 모든 성곽은 돌 위에 돌 하나가 남아 있지 아니할 정도로 무너져서 쑥밭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그 당시 그때에 그 처참한 상황을 미리 내다보시고 우신 것입니다.

어떻게 울지 않겠어요.

 

바울도 애통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빌립보 3장 18절 "내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사방을 둘러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적하는 원수들이 너무 수두룩해요.

교회 안에도 그런 원수들이 있어요.

바울이 생각할 때마다 도무지 가슴이 매워져서 견딜 수가 없어.

그 점잖은 어른이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도 이 세상을 앞에 놓고 애통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변을 한번 둘러보십시오.

웃을 일이 많습니까 울 일이 많습니까, 여러분.

이 나라의 죄악상을 우리가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고 들여다본다면 과거에 어느 때 어느 시대에 사람들이 지금처럼 죄를 범하는 일이 있었습니까.

과거에 어느 사회가 지금처럼 이렇게 악하고 더럽고 음란할 수 있었습니까.

 

텔레비를 통해서 보셨죠?

우리나라 중고등부 학생들 중에서 90%가 포르노를 접촉한다고요.

인터넷을 통해서, 뭐 하여튼 어떤 방법으로 음란물을 접촉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실에서 선생님이 잠깐 자리를 비우면 애들이 그거 열어놓고 서로 쳐다보면서 킬킬거리고, 재미가 있어 가지고 애들이 정신을 잃는대요.

그리고 그 90% 안에도 4%는 벌써 원조 교재를 통해서 성적으로 아주 절망적인 범죄 행위를 하고 있다고 보도가 나왔습니다.

여러분 저는 그저 중고등부 아이들 3-40%가 아마 인터넷을 통해서 그런 것을 보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했는데 90%라고 그래요.

그러면 어느 중고등학교나 가보면은 한 30%는 예수 믿는 아이들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귀한 아들 딸들이 다함께 지금 동조하고 있다는 수치적인 결과가 나옵니다.

여러분 어떻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이 그런 음란물을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하면 계속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처럼 빨려 들어갑니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인격이 파괴가 돼요.

그 영혼이 완전히 사탄의 노예가 됩니다.

이제는요 그 사고가 정상으로 돌아오기가 어려울 정도의 상황까지 빠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10대들의 세계입니다.

이 아이들이 앞으로 자라서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20년 후, 오늘 이 사회가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아찔해요.

어떻게 여러분 탄식하지 않겠어요.

어떻게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성을 내려다보고 울지 않겠어요.

서울 바닥을 내려다보고 우리가 어떻게 눈물을 흘리지 않겠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쩌면 그렇게 겉으로 보기에 상냥하고 잘생기고 컴퓨터 잘 만지고 똑똑한 20대 청년이 8개월 사이에 두 명을 강간하고 세 명의 여성을 죽이고 동생을 이불 밑에 처박아 놓고 언니를 강간해서 죽이고, 어떻게 그런 악마 같은 짓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도 더 놀라운 것은 그 사람의 어머니가 지금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여전도사라니까.

그리고 그 아이는 중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학생 회장까지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현실이 이렇습니다.

어떻게 통곡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보다도 20배, 30배 잘 사는 선진국에서도 특별한 사람들 아니면 잘 마시지 않는 가장 최고급 양주를 세계에서 제일 많이 수입하는 나라라고 하니 기가 차지도 않죠.

모두가요 눈을 보면 광기가 서렸어요.

미쳤어요, 정신이 돌았어요 다들.

이런 나라를 앞에 놓고 우리가 어떻게 통곡하지 않겠습니까.

웃을 일이 많습니까 울 일이 많습니까.

 

우리 모두는 이 백성의 죄를 어깨 짊어지고 주님 앞에 나가서 애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통하는 교회만이 이 땅에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썩어빠진 정치인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이제는 어쩔 수가 없다고 두 손 번쩍 들고 손을 털어버린 교육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어요?

양심이고 뭐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아니하고 돈벌기에 급급한 기업인들을 우리가 기대할 수 있습니까?

오직 이 땅에 소망이 있다면 이 나라의 죄를 나의 죄처럼 생각하고 십자가 밑에 가서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눈물 흘리며 통곡하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교회만이 이 땅에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이 말씀합니다, "애통하는 는 복이 있다"

너 나라를 위해서 애통해라, 민족을 위해서 애통해라, 예수 안 믿는 네 이웃을 위해서 애통해라, 그리하면 그 애통은 복이 있느니라, 내가 너를 위로하리라, 반드시 너의 애통이 헛되지 않도록 해주마, 주님이 약속하셨어요.

 

오늘 이 땅의 문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눈물이 말랐다는 것입니다.

너무 뻔뻔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주시려고 하는 많은 위로의 축복들을 우리가 놓치고 있어요.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며 하는 말씀을 우리 마음속 깊이 새기고 내 죄를 놓고도 애통할 줄 아는 사람,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주님 앞에 가서 눈물 뿌리며 기도할 줄 아는 사람, 나의 민족의 죄를 짊어지고 예수 안믿는 이웃을 위해서 눈물 흘리며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 될 때에 우리가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을뿐만 아니라 우리 가정이 살고 이 나라가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이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다같이 일어나십시오.

여러분 저하고 오늘 기도 좀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이 시간 우리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합니다 주여.

마음을 비우고 거룩한 탄식을 주님께 올려드리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죄를 다시 한번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여 이 젊은이들이 주님 남모르게 범하는 죄들이 있으면 사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 하나님 사랑의 교회 젊은이들, 사랑의교회 청소년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이들에게 눈물을 회복시켜 주셔서 우리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할 때에 주님이 그 심령을 깨끗이 씻어 주시는 위로와 축복을 누리도록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 교회, 하나님 아버지여 인생의 무거운 짐을지고 날마다 날마다 주님 앞에 나가 눈물로 부르짖는 거룩한 성도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주님만이 위로할 수 있습니다.

주님만이 그들을 축복하실 수 있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주여 이 사회의 죄악을 주님 앞에 아룁니다.

이 땅의, 이 국가의 허물과 죄를 우리가 짊어지고 우리 하나님 앞에 통회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우신 것처럼 우리도 울기를 원하며 바울이 눈물을 흘린 것처럼 우리도 눈물을 흘리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이 자리에 서서 주님 앞에 두손들고 있는 귀한 아들 딸들 눈물을 주시옵소서.

이 눈물이 이 나라를 살릴 수 있습니다.

이 눈물이 이 나라에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이 눈물이이 땅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주여.

거룩한 눈물을 이들게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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