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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모음/옥한흠목사님

산상수훈 강해 2강 | 빈 마음(팔복 두번째) | 마태복음 5:3, 누가복음 6:20 | 옥한흠목사님 | 사랑의교회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설교문 녹취록

본문: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눅 6: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현대인들이 아마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가운데 '가난'이라는 것이 들어 있지 않나 저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 유명한 사상가가 이렇게 외치는 글을 보았습니다.

"가난해지지 않도록 결심하십시오, 가난은 행복의 적입니다."

아마 이 한마디가 현대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가난은 악인 것 같아요.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갖가지 사회악을 키우는 온상을 우리가 가난한 자리에서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가난이라는 용어를 서슴치 않고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또 누가복음에서는 심령이라 말을 빼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아마 이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돈이나 부나 향락을 우상처럼 생각하고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정말 매력 없는 말씀일 수가 있습니다.

더욱이 이 가난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갖는 원래 의미를 한번 우리가 들여다 보면 더 '아니 아니야 이 말은 복이 될 수가 없어'하는 생각이 금방 듭니다.

'프토코스' 헬라어 말인데요, 이것은 뭐 적당히 가지고 살면서 약간 아쉽게 느끼는 그런 가난이 아니에요.

아니고, 사람들에게 가서 굽실거리면서 동냥을 하는 거지의 형편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집 대문 밖에서 평생을 죽을 때까지 그저 구걸하면서 살다가 간 나사로 같은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프토코스'라고 말합니다.

이 '프토코스'라는 단어가 바로 예수님이 지금 산상수훈에서 사용하시는 가난이라는 용어입니다.

 

그러니 이게 무슨 복입니까? 저주스러운 것이죠.

어떻게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까?

아무리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셔도 그것은 마치 정가표를 바꾸어 달아 놓은 상품을 보는 것 같아요.

5천원짜리 밍크오바에 붙어 있던 정가표를 10만 원짜리 티셔츠에 갖다 붙였다고 해서 티셔츠가 밍크오바가 되는 거 아니잖아요.

가난은 가난이고 부한 것은 부한 거고.

그러니까 주님이 아예 우리에게 참 어필할 수 있는 말씀을 하려면 심령이 부한 자는 복이 이렇게 하셔야 되고, 아니면 부한 자는 복 있나니 이렇게 말씀을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본 이 말씀을 접할 때 느낄 수 있는 느낌이고 반응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가난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나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를 가지고 선언하시는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들에게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무지함과 어리석음과 어두움에 쌓여 있는 인간들에게 빛이시요 진리요 거룩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선언하는 진리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느니라",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느니라"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시는 주의 말씀을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 말씀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이 말씀 안에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 어떤 선입견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세요.

 

우선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심령의 가난'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가져야 될 마음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사람 앞에서 무슨 심령이 가난하고 뭐 부하고가 상관이 없어요, 그거는 관계가 없어요.

사람 앞에서는 그저 우리 있는 대로 대하면 돼요.

그러나 만유의 주가 되시고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 우리가 나아갈 때 우리 마음이 어떠해야 하느냐?

바로 그것이 심령이 가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좀 쉽게 표현하면, 마음을 비워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 심령의 가난입니다.

좀 더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낮아지는 마음의 태도를 이야기합니다.

마음을 비우면 낮아지게 돼 있어요.

낮아진 사람은 마음이 비어 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빈 자와 마음이 비지 못한 자를 예수님은 아주 짤막한 에피소드를 가지고 잘 설명을 하고 계시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8장 9절 이하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어느 날 바리새인하고 세리하고 어떻게 시간이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성전에 기도하기 위해서 같이 들어가게 되었어요.

바리새인들은 남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잘 지킨다고 하는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요, 사람들 보기에는 흠잡힐 것이 없을만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거룩한 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한편 세리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완전히 손가락질 당하는 매국노요 모리배 같은 인간이요 양심 떼놓고 사는,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인간 대우받지 못하는 쓰레기 같은 인간입니다.

그리고 돈이 많은 사람이에요.

이 두 사람이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 만만하게 성전 저 깊숙한 앞자리까지 들어가서는 두 손을 번쩍 들고 머리를 하늘을 향해 눈을 뜨면서 기도했어요.

"하나님 아버지 나는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하고는 구별이 되는 사람입니다. 토색하는 사람 간음하는 사람 또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하고 저하고 다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과 구별된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시다시피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시다시피 저는 십일조를 꼬박꼬박냅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도했어요.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마음이 부한 자라고 그럽니다.

심령이 부한 자, 심령에 무엇을 가득히 담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가서 뭔가 자꾸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뭔가 나는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하고 내놓고 싶은 거예요.

C.S. 루이스라고 하는 유명한 기독교 변증 학자는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하고 비교해 가지고 좀 더 선하다, 좀 더 낫다, 좀 더 거룩하다 하는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니고 악마의 지배를 받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그걸 꼭 기억하라. 왜냐하면 그런 마음 태도는 영적으로 교만이라고 하나님이 선언하고 그런 교만한 자를 하나님이 대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교만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대적하는 인간의 악한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대적하는 마음의 상태가 교만이요 마음에 뭔가 가득히 담아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자의 자세라 그말입니다.

바로 바리새인이 이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세리는 어떠했습니까?

뭐 성전 앞자리까지 가지도 못했죠.

저 뒷 구석에 서 가지고는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해요.

고개를 푹 숙이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 앞에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래서 그 말밖에 할 것이 없었어요.

하나님 앞에 나오니 내놓을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고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가 철저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하게 자기를 비하시켰고 철저하게 자기를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긍휼이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비우고 나왔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이 '심령이 가난하자는 복이 있나니'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런 자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가끔 보면 안타깝게도 심령이 가난하지 못한 분들이 있어요.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앉아 있어요.

 

여러분 잘 생각하세요.

왜 믿음이 안 자랍니까?

왜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깊이 터치가 안 됩니까?

왜 우리의 심령에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어요?

왜 우리 자신 한 번밖에 없는 이 한생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 드리고 싶은 마음이 안 생겨요?

그 이유 간단합니다.

마음이 가득해서 그래요.

아쉬운게 별로 없는 것입니다.

기대고 싶은 것이 많아요.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싶은 것이 많아요.

그러니까 마음이 차 있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깊숙이 들어오지를 못해요.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불행하게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출신 성분을 들고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내가 어떤 좋은 가문에 속해 있다 하는, 그런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는 이야기 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의 지위가 아무리 대단하고 우리가 세상 사람 보기에 능력이 있고 성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런 것 들고 나와서 하나님 앞에 뭔가 내 놓으려고 하는 심리 가지면 안 돼요.

사람에게는 대단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좀 선하게 살고 양심적으로 살았다, 지금까지 내가 무슨 특별한 죄를 범한 일이 있냐, 이만하면 하나님도 인정해 주실 것이다, 그 케케묵은 생각이에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는 아무 짝 소용도 없는 것, 그런 것을 마음에 담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그 사람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 있는 자, 행복한 자가 되기가 어려워요.

 

내가 갖고 있는 돈, 재산, 그것 때문에 우리 마음이 든든할지 모릅니다.

든든해요? 든든한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 앞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장애물입니다.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하나님 앞에.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자기가 굉장한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하기도 교만하고 또 긍지를 상당히 가진 삶을 살았습니다만 예수님 만나자마자 그 모든 것들이 다 저 화장실에서 내버리는 물 속에다 흘려보낸 배설물 같이 생각했어요.

다 쓸어 버렸어요, 다 쓸어버리고 마음을 완전히 비웠어요.

하나님 다 소용 없는 거요, 다 소용 없는 거예요.

예수님 앞에 나오니까 내가 지금까지 너무너무 귀하다고 여기고 꼭 쥐고 놓지 않았던 것 다 소용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신기루 같은 것.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싹 쓸어 버렸어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마음이 이러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해야 됩니다.

우리가 마음을 비우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천국을 채워 주신다고 했습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천국이 저희 것이다 하는 이 말씀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을 받았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영생을 값없이 얻은 사람이 되었다'이 말을 한마디로 '천국이 너희 것이 되었다' 하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 구원을 주신 하나님 앞에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참 얼마나 아름다운 시간입니까?

이 시간에 주님이 이 자리에 계셔서 가르치십니다.

이 시간에 주님께서 이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여 어두운데 있는 심령을 영생의 나라로 인도합니다.

그 생명의 출생이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이 시간 주님이 이 자리에서 우리의 영과 육이 병든 것을 치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이 가운데 계세요.

왜 우리가 이와 같이 예배할 수 있느냐?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얻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참 이거 감사해요.

 

그런데 두 번째 뜻이 또 있습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무슨 뜻이냐?

우리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을 전부 다스리시는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 17장 21절 보면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 주님이 말씀하셨죠.

그럼 이 말씀을 바꾸면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느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 마음이 천국을 이루는데, 천국을 이루면 얼마나 우리 마음의 기쁨과 행복이 충만해지는 모릅니다.

로마서 14장 17절 이렇게 말씀하시죠.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먹고 잘 마시고 또 뭐 편안하게 살고 뭐 뭐 그저 즐기고 싶은 거 다 즐겨도 거기에는 천국이 없습니다.

믿습니까? 거기는 천국이 없습니다.

진수성찬 차려놓은 그 상에 천국이 없어요.

이 세상에 좋다는 것은 다 갖다가 쌓아놓은 집안에도 천국은 없어요.

천국은 그런데 임하는 거 아니에요.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신 심령에 임합니다.

그 천국이 임하면 의를 사랑합니다.

의를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기쁨이 있어요.

악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사탄의 불행이 있어요.

그러나 의를 사랑하는 자의 마음에는 하나님 자신의 기쁨이 있어요.

주님이 내 안에서 다스리시는 천국이 되면 내 안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이 있어요.

남편에게 기대도 느끼지 못했던 평강, 쌓아논 돈에 기대도 느끼지 못했던 평강,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참한 자식들에게 기대도 느끼지 못했던 평강, 내 건강을 의지해도 느끼지 못했던 평강을 주님이 내 안에 계심으로 느끼게 만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이게 천국이에요.

 

그리고 희락이라고 그랬죠.

사람들이 보기에는 기뻐할 일이 없지만은 마음에는 예수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는 기쁨을 갖고 있어요.

행복이 있어요.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마음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천국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심령에 천국이 있습니까?

어느 예배 시간이라고 말하지 않겠는데 어느 예배 시간에는 반드시 그 자리에 어떤 분이 계세요.

그런데 그분은 찬송 부를 때, 기도할 때 말씀을 들을 때 그 얼굴이 완전히 어린 아이에요.

그리고 막 기쁨이 충만해요.

'아 지금 무슨 연애 중에 있는지 모른다' 그런 소리를 할지 모르지만 연애할 시간은 벌써 지났어요.

벌써 뭐 나이가 50대인데 무슨 연애에요, 연애는.

그런데 그 얼굴이 너무 확짝 행복의 꽃이 피어 있어요.

제가 예배 시간마다 그분을 가끔가끔 봅니다.

'옥 목사보다 더 행복하네, 저 사람 목사 됐으면 좋았겠다' 이런 생각을 해요.

근데 이유가 뭐냐? 그 사람은 그렇게 잘사는 사람도 아니에요.

내가 알거든요.

그런데도 그렇게 행복한 이유가 뭐냐?

마음에 뭐가 있습니까? 천국이 있어요.

의와 희락과 평강이 넘치는 예수님의 나라가 그 마음에 있어요.

누가 그것을 빼앗아 가겠어요?

누가 그 나라를 파괴하겠어요?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하는 평강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좀 비우시고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이 천국의 행복을 안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이 시간 나올 때는 여러 가지 마음에 복잡한 생각도 있고 또 침체된 기분을 가지고 나왔을지 모르지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복이냐? 천국이 그 마음을 소유하는 복입니다.

이 복을 여러분이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우리 두 번째로 누가복음에 기록된 내용을 잠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심령이라는 말이 빠져 있어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임이여'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틀림없이 이 본문은 뭐 영적으로 가난한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돈이 실제로 없는 빈 자들을 가르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치 가난이 복이라고 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거꾸로 뒤집으면 부는 복이 아니고 저주요 부자는 천국과 거리가 멀다고 하는 말씀을 이면에 깔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누가복음에 있는 이 본문 말씀을 해석하는 많은 학자들은 이것은 실제로 돈이 없어 가난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자꾸 해석을 하려고 하는 인상을 제가 많이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뭐 자기가 가난한 생활을 안 해봤으니까, 가난을 그렇게 뭐 좋아할 리가 없죠.

그러니까 성경을 해석할 때도 자꾸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려고 해요.

물론 그들의 생각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은 예수님은 가난을 선이라고 말씀하신 일이 없습니다.

가난을 미화하거나 가난을 무슨 구원받는 공로로 말씀하신 일도 없어요.

가난한 자를 의롭다고 아부 하신 일도 없고요, 그렇다고 부자를 의롭지 못하다고 면전 박대를 하신 일도 없어요.

가난을 선이라고 하고 부를 악이라고 말씀하신 일도 없어요.

예수님 자신은 금욕주의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잘 마시고 잘 먹는 사람이라는 피난을 받을 정도로 어떤 때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실까?

 

해석하기에 따라서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지만 저는 어떤 입장이냐 하면, 누가는 실제로 돈이 없고 어렵게 사는 가난한 자를 지금 주님이 가리키면서 말씀하신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안에 실제적으로 돈이 없어 가난한 자까지 다 포함하고 있는 말씀을 누가는 특별히 지적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부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성경구절은 하나도 없습니다.

산상수훈을 듣기 위해서 지금 구름 떼와 같이 예수님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입장에 그랬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제자들을 여러분이 보세요.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있는 것 다 버렸잖아요.

집도 내버리고 재산도 내버리고 가정도 내버리고 직업도 내버리고 다 내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어서 주님을 따라가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무리들 안에는 구약 성경이 이야기하는 '아니' 구약이 말하는 가난한 자예요.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냐?

지금이나 옛날이나 똑같아요.

사회에서 좀 돈을 벌고 부유한 생활을 하고 싶어하면 반드시 어떤 불의와 타협을 해야 되는 사회적인, 구조적인 악이 있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 경건한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불의와 짝하면서 부하게 살 거냐? 아니면 불의와 결별하고 대신 가난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경건한 생활을 할 것이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했습니다.

'아니'라고 하는 이 경건한 사람들은 후자를 택했습니다.

차라리 가난하게 살자 그리고 하나님과 더 깊은 연결를 맺는 의인이 되자.

 

요셉이 그랬고 나사로가 그랬고 사가랴가 그랬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 영접했던 소수의 사람들은 다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다 가난한 자들이요, 그리고 예수님 앞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천한 집안에 태어나서 평생 뼈가 부러지도록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팔자를 타고 난 사람들이 수두룩 했어요.

자 그런데 그런 가난한 사람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영적으로 가난한 것만 주님이 말씀하셨다, 이것은 성경을 완전히 뒤집는 해석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은 실제로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난한 자는 부자보다 예수님을 쉽게 믿을 수 있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래요.

 

일본에 가면은 일본 목사들이 저보고 한국 교회가 어떻게 그렇게 부흥하고 성장하느냐는 질문을 자꾸 합니다.

일본 교회는 왜 그렇게 부흥이 안 되느냐고 탄식을 합니다.

제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지난 여름에도 그런 질문을 받고 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죠.

당신들 교회가 이러이러 하니까 부흥이 안 된다, 이 말은 할 수가 없잖아요, 국제적인 관계니까.

그러니까 이제 한국 교회를 빗대어서 말할 수밖에 없죠.

한국 교회가 부흥하는 이유요? 그 배후에 가난이 있었습니다, 그 배후에 고통이 있었습니다, 정확한 대답이에요.

가난한 자는 예수님을 믿기가 좀 쉽습니다.

 

지금도 교회 들어가 보면 가난한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서초동에 자리잡은 이런 교회는 우리가 누가 가난한지 누가 부자인지 금방 식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 비슷비슷합니다만 조금만 변두리 가 보세요.

다 가난한 사람들이요.

가난하기 때문에 예수를 믿은 거예요.

옥 목사도 마찬가지요.

내가 과거에 귀족 집에 태어나고 어려서부터 돈 걱정하지 아니하고 원하는 공부 다 할 수 있었더라면 나 예수 안 믿었을 거예요.

아마 목사가 안 됐을 거예요.

나는 가난 때문에 예수 믿은 사람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가난 때문에 예수 믿었다면 이 가난만큼 나를 팔자 좋은 사람으로 만든 조건이 어디 있습니까.

마태복음 19장 23절 24절 예수님이 노골적으로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이 부자가 뭐 영적인 부자니까? 아닙니다.

실제로 돈 많이 가지고 있는 부자를 말해요.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 말을 바꾸면 "가난한 사람은 약대가 다리 밑을 지나가는 것처럼 천국 들어가기가 쉬우니라" 하는 말과 같아요.

가난한 자가 구원 받기가 훨씬 쉽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가운데 옥 목사처럼 태어날 때부터 지지리 가난해 가지고 예수 안 믿으면 살맛이 없어서 예수 믿게 된 분들 계시면 하나님 앞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가난해서 예수 믿은 사람, 감사해야 돼요.

 

동시에 가난한 자는 부자보다 마음을 쉽게 비울 수가 있습니다.

심령의 가난을, 가난한 사람은 쉽게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뭐 들고 나올게 없잖아요.

잘났다고 할 거리도 없고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가난 때문에 실제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생명 걸고 믿습니다.

예수 믿는 생활이 사치품이 아니에요.

교양이 아니에요.

생존에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예수 없으면 나는 못 살아! 세상에서도 고생하고 이렇게 서글프게 사는데 예수까지 내가 믿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다면 내가 어떻게 억울해서 사냐?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거 이거는 뭐 죽고 사는 문제로 생각하고 달려들어요.

그렇다면 그 가난이 복이 아닙니까? 복이죠.

마음을 비우니까 주님이 그 마음 임재하셔서 그 마음을 다스리십니다.

자비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넉넉하지 못해 늘 얼굴에 주름살이지고 어떤 때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는 그 심령을 포근히 안아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이 모르는 가슴에 행복이 있어요.

 

6년 전 우리 교회에서 발간하는 '우리지'에 나온 기사를 지금도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느 부인이 쓴 것인데 남편과 딸하고 셋이서 15평짜리 아파트에 사는 것입니다. 15평 아파트.

10여년 정도 쓰던 냉장고가 이제는 도무지 더 쓸 수가 없어 가지고 조금 큰 것을 갈았는데 그 냉장고를 들여놓으니 그저 집안이 가득합니다.

게다가 부인이 피아노 레슨을 조금씩 하니까 자그만한 그랜드 피아노 하나 또 있고.

그러니 집 안에 들어가면 숨이 막히죠.

책상 하나 놓을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호마이카 밥상 들고 필요할 때는 쓰다가 또 그다음에 접어서 또 두었다가, 이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인이 이런 간증을 했어요 .

"감사하신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쁘게 노래했던 하박국 선지자처럼 이 좁은 공간에서도 끊이지 않는 웃음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비록 지위와 명예와 부가 없을지라도 잠잘 때 코끝이 시려워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잘 지라도 제게 믿음 주시고 하나님을 믿는 남편과 건강하고 기도 잘하는 딸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평생 지금의 마음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이곳은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하시기에 바로 천국입니다"

가난하다고 다 불행한 줄 아세요?

돈 좀 없어 가지고 애들 학비도 제대로 못 주고 해가지고 밤에 그저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처량한 줄 아세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요 겉으로는 울지 모르지만 속은 달라요.

그걸 아셔야 돼요.

우리가 그 정도의 깊이 있는 차원 높은 행복을 모르면서 예수 믿는다고 남에게 어떻게 말을 합니까?

 

며칠 전에 아내와 함께 저는 30년 전에 살던 아파트를 정말 30년 만에 가봤어요.

왜냐하면 그때 제가 서울시에 있는 어느 교회 부교역자로 있는데 그렇게 아파트 교회 사택이라고 주는 것이 그렇게 집이 좁은 아파트였어요.

8평이니까 여러분이 이해를 하시면 충분히 할 수 있죠.

그 8평짜리 아파트에 살았는데 그 8평 안에는 화장실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화장실은 공동 화장실이죠.

30년 만에 찾아가면서 집사람하고 그랬어요.

"그 아파트 아마 재건축을 텐데 있을까?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러면서 올라갔어요.

올라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진짜 있는 거예요.

있는데 30년 전에 그 밀고 열고 닫고 들어다니던 현관문이 그대로 있어요.

막 막 엉망이 돼가 있어요.

엉망이 돼 있고 그래서 우리가 참 감개무량했습니다.

4층에 있는 505호실을 찾아갔어요.

거기에 우리가 살았으니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연탄을 떼던 집이 도시가스로 바뀌었다는 거.

그거 하나 달라졌더군요.

창문이 열려 있는데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집사람에게 '이런데도 행복은 있는 거야, 우리 그 당시에 행복했잖아'

그리고 아침이면 줄을 서서 기다리던 공동 화장실도 가 봤어요.

'아 그때는 여기서도, 이런 불편을 가진 불편함에도 그래도 우리는 살았어'

제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 아파트를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저는 몇번을 뒤를 보았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데 있는 거 아니에요.

진정한 행복은 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걸 알아야 돼요.

주님이 이 행복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음만 비우면, 천국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이 다스리도록 내 마음을 내놓기만 하면, 거기에 행복이 있어요.

돈하고 관계 없어요.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에 속지 마세요.

천하의 영광을 다 보여주면서 여기에 행복이 있다고 하던 사탄의 말에 속지 마세요.

돈은 악이 아닙니다.

돈이 많은 것이 잘못된 것 아닙니다.

그러나 부가, 돈이 주님 앞에 가는데 장애물이 된다면, 부가, 돈이 내 마음을 비우는데 장애가 된다면, 부와 돈이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을 내 마음에 소유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걸 알아야 돼요.

돈은 적당히 가지면 됩니다.

적당히 가지면 돼요, 그 이상 가질 필요가 없어요.

성경에는 일용할 양식이면 족하다고 했는데 그건 조금 너무한 거 같아요.

사람이 뭐 입에 풀칠만 하고 어떻게 삽니까.

자식 공부도 시켜야 되고 그래도 주변 사람들이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하면 나도 거기에 어느 정도 따라가야지, 그거 전혀 무시해 버리고 일용할 양식, 그건 조금 지나친 거 같고.

그래도 어느 정도만 가지면 돼요.

그 이상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아마 우리들 대부분은 중산층인지 중산층보다 조금 못 한지는 모르지만 그런대로 그저 살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우리 중에 50억짜리 다이아 팔찌를 끼고 다니는 얼빠진 졸부는 하나도 없어요.

돈을 더 모으는데 신경쓰지 마세요.

이 정도면 족하다는 생각을 좀 하세요.

행복은 재산이 늘어나면서 함께 커지는 거 아닙니다.

 

'로버트 우스터' 교수 여러분 자료를 제가 한번 소개한 것 같습니다.

그 사람 아주 중요한 데이터를 하나 우리에게 준 거 있어요.

전 세계 54개국을 상대했지 않습니까?

대상으로 해가지고 어느 나라 사람들이 가장 행복을 느끼느냐를 조사를 했어요.

행복 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세계에서 가장 빈한한 나라, 제일 못사는 나라, 제일 천재지변이 많은 나라,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1등이었어요.

제일 행복하다고 고백했어요.

기가 막히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54개국 중에서 미국은 몇 번째냐? 46번째에요.

한국은요 23번째에요.

그러니까 잘사는 거하고 행복하다고 느끼는거 하고 다르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이 우스터 교수가 결론을 내린 것이 중요합니다.

"선진국의 경우, 잘 사는 나라의 경우는 물질적 포만도가 일정 수준을 지나면 소득 상승이 더 이상 행복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무슨 소리야? 여러분 아마 그렇게 느낄지 모르는데 쉽게 이야기할게요.

잘사는 나라 사람들은 적당한 수준의 부를 이제 갖고 있잖아요.

그러면은 그 수준 이상으로 돈을 쌓아도, 재물을 쌓아도 행복하고는 관계가 별로 없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50평짜리 살던 사람이 120평짜리 사가지고 가면 며칠은 기분이 좋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행복하고 전혀 관계가 없어요.

이미 어떤 수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은 행복하고 아무 영향이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우스터 교수의 말 또 하나, 중요한 말이 있어요.

후진국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의 경우는 소폭의 소득 증가에도, 조금만 생활이 나아져도 그것이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 무슨 말이냐? 행복감을 절실하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20만 원밖에 월급을 못타던 아빠가 회사가 잘돼 가지고 30만 원을 받고왔다, 10만원 더 많아진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이 느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방글라데시 사람이 더 행복을 많이 느끼는 거예요.

 

여러분 속지 마세요.

예수님의 말씀이고 예수님의 진리입니다.

속지 마세요.

부자가 행복한 거 아니에요.

차라리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행복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거,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장애가 되는 부를 여러분이 쌓고 계시면 여러분 그거 내 놓으세요.

하나님 앞에 내 놓으시라고.

그거 지고 갈 거요 안고 갈 거요 씹어 먹고 갈 거요? 여러분 뭐 어떻게 할 거에요?

내놓으세요.

아무 소용 없는 거예요.

그 뭐하려고 자꾸 쌓아 놔요? 골치 아프게.

내놓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쓰세요.

그 대신 여러분의 마음에 천국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행복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시는 모든 분들 물질적으로 행복하든 가난하든 큰 문제가 안 됩니다.

물질이 많아도 심령이 가난한 사람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많이 있어요.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여러분이 돈 때문에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는 그런 불행을 갖고 신앙생활 한다면 그거는 아니올시다입니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주님이 원하는 일을 위해서 돈 쓰고 마음에 천국을 소유하는 쪽이 훨씬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주님 모시고 그분을 섬기며 그분을 위해 아름답게 한생을 드린다면 그 행복은 영원한 저 나라까지 계승이 될 줄, 또 이어질 줄 믿습니다.

여러분 이런 찬송 있죠.

"두 손 들고 찬양합니다 다시 오실 왕 여호와께 오직 주만이 나를 다스리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다스려야 됩니다.

"나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영혼 충만하게 하소서 주님 앞에 내 생명 드리리라"

바로 이런 간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빈 마음을 가진 사람이에요.

"나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영혼 충만하게 하소서 주님 앞에 내 생명 드리리라 주님 앞에 내 생명 드리리라"

다같이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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