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 5:1-1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성경 안에는 설교자로서 제가 설교하기가 퍽 두려운 말씀들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그 말씀을 피하기도 하고 또 어쩔 수가 없어서 설교할 때도 있죠.
뭐 예를 들면은 오늘 우리가 읽은이 본문 말씀은 소위 산상 보훈이라고 하기도 하고 산상 수훈이라고도 하는 별명을 가진 말씀입니다.
주님이 산에서 특별히 가르치신 말씀이라고 그래서 이런 이름이 붙습니다.
이 산상 수훈에 관한 내용은 제가 설교하기가 퍽 좀 부담스럽고 두려워지는 내용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미 여러분이 내용을 좀 읽으셔서 알겠지만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 내가 과연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을 사람이 될까? 한 번도 안 받아 봤으니까 자신이 없는 거죠.
정말 나는 온유하냐? 하고 물을 때 금방 대답이 안 나오는 것이죠.
그리고 산상 수훈 좀 더 넘어가 보면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는 속옷까지 내어주라, 그런데 내가 과연 그럴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종종 우리가 이제 산상 보훈의 말씀을 읽습니다마는 그때마다 이 말씀은 저를 땅바닥에 내동이 치듯이 참 충격을 주고 자신감을 꺾어 놓기도 합니다.
너무나 수준이 높은 말씀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게 부담스러우니까 목사가 부담스러운 말씀을 교인들에게 어떻게 마음놓고 전할 수 있냐 하는 이런 생각이 자주 들지요.
그러다가 보니까 20년이 넘도록 산상 수훈 가운데서 여기저기 단편적으로 몇번 설교 했습니다만 전체를 놓고 강해를 한 일은 한번도 없습니다.
1년 전쯤 되었을까요? 어느 형제가 저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주일예배에 참석해서 은혜를 받은 이야기를 저에게 나누고 싶어서 보낸 편지였는데 편지를 다 쓰고 말미에 이런 말을했어요.
"목사님, 언젠가 산상수훈을 강해해 주실 날을 해주를 기다리겠습니다"
이상하게 그 편지를 읽고 난 다음 저의 마음에는 늘 따라다니는 음성이 하나 있었습니다.
"네가 아무리 부담스러워도 산상수훈을 설교해야 돼" 이런 음성이었습니다.
사실 목사라는 위치는 주님께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모든 말씀을 가르쳐야 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좀 부담이 없는 말씀만 설교하라고 주님은 절대 말씀하지 않았어요.
비록 설교자가 지키지 못하는 어려운 말씀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말씀하셨으니까 꼭 전해야 될 엄숙한 명령이 저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이제는 산상수훈을 좀 본격적으로 묵상하면서 설교할 수 있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저 자신이 비록 자신이 없고 저 자신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성도들과 함께 산상수훈의 성찬을 먹고 마시는 은혜를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매주마다 산상수훈을 놓고 주님이 말씀하시던 그 동산으로 함께 올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 구름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바로 앞에 있는 4장 25절에 보면 갈릴리에서도 오고 데가볼리에서도 오고 예루살렘과 지방에서도 오고 심지어 요단강을 건너서 이방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까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몰려온 그들의 신분이 대충 어떤 사람들이었느냐? 물론 지체 놓고 잘사는 사람들도 좀 끼어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4장 24절을 보면 병든 자들이요 귀신 들린 사람들이요 어떤에는 면에는 세상으로부터 버림 당한 외로운 사람들이요 가난한 사람들, 죄인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실패자들입니다.
그리고 소망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무리들을 이끌고 갈릴리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산등성이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으셔서 입을 열어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며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이렇게 말씀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5장 1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 앞에는 마치 제자들만 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표현이 하나 나옵니다.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그래서 그런지 어떤 성경학자들은 산상 보훈이 제자들을 향해서 주님이 주신 말씀이다, 무리들하고는 관계가 없다, 이런 해석을 합니다만 제가 볼 때는 그것은 좀 편협된 해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면 그 자리에 무리들이 있었으니까요.
물론 산상수훈의 내용을 보면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받을 수 없고 소화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기를 작정한 자들에게나 통하는 너무나 차원 높은 진리요, 신비스러운 진리이기 때문에 일반 무리들이 들어서도 무슨 소리인지 알기 어려운 내용일 것이다, 하는 것은 우리가 인정할 수 있습니다.
또 액면 그대로 이해를 했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의 깊이를 절대 들여다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무리들은 따돌려 놓고 제자들만 상대하여 하신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 무리들도 언젠간 예수 믿게 될 것이고, 예수 믿으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다 될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만이 아니고 하늘의 별들처럼 무수하게 나타날 미래의 제자들, 미래의 제자들을 눈앞에 그리면서 산상 수훈의 말씀을 하셨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5장 1절에 보면 또 재밌는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
"산에 올라가서 앉으셨다"고 그랬죠.
산에 올라갔으니까 앉았지,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하죠.
성경은 말 한 마디 한마디를 굉장히 신중하게 선택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말씀은 너무 평범한 것 같이 보이지만 굉장한 무게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산에 올라가서 앉으셨다, 그래 앉으셨다는게 어땠다는 거야?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은 가르치는 선생으로서의 예수님의 권위를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유대나라 랍비들은 가르칠 때 앉아서 했습니다.
가르치는 선생의 권위를 앉는 그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이죠.
지금도 유수한 대학에 가면 명 강의를 하는 학자로서 소문난 교수들은 앉아서 강의합니다.
권위를 이야기하는 것이죠.
로마 카톨릭 가서 보면 교황이 무슨 교서를 내리고 뭘 읽고 할 때는 꼭 의자에 앉아서 합니다.
교황의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죠.
그러므로 예수님이 산에 가서 앉으셨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기 시작했다 하는 이야기를 이 말씀 속에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가르치심이 얼마나 권세가 있었는지, 얼마나 박력이 있었는지, 얼마나 무게가 있었는지, 들은 사람들이 놀랬어요.
무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나서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를 우리가 좀 봅시다.
7장 28절 넘어가서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7장 28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산상수훈을 다 이제 마치시고 이제 끝냈어요,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랬다" 그랬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 가르치시는 것이 뭐와 같았다고요? 권세 있는 자와 같다.
참 이거 도무지 감히 얼굴을 들고 볼 수가 없을만큼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했다, 서기관들은 직업적으로 가르쳤잖아요.
직업적으로 가르치면 아무래도 감동이 적고 또 직업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의 말은 권위가 좀 약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직업적으로 형식적으로 가르치는 분이 아니었어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들의 신금을 울렸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나님 자신의 음성으로 사람들의 귀에 들렸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놀랬어요.
앉아서 가르치신 주님의 그 태도는 이와 같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예수님의 이 권위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천하 만물을 창조하신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할렐루야!
이 예수님이 비록 초라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앉으셨지만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십니다.
우리 마음에 와서 계십니다.
그리고 2천년 전에 갈릴리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가르치시던 그 말씀을 우리에게 지금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위 앞에 우리는 압도되어야 하고 그 권위 앞에 무릎을 꿇고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교만한 생각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고개를 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산상수훈? 그거는 이상론이야, 그대로 순종하면서 살 사람이 이 세상에 몇 사람이나 돼?
이런 생각이 여러분 마음속에 들고 일어난다면 이것은 앉아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잘못하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액면대로 받으면 곤란해, 현실에 맞게 적당하게 각색을 해서 받아야 돼, 하는 생각을 여러분이 하면서 이상하게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는 목사를 비판하고 싶고 여러분들이 뭔가 좀 한마디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기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교만한 태도를 마음에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고 그 마음을 빨리 꺾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귀담아 들으면요 마음이 아무리 캄캄한 사람이라도 하늘에서 빛이 비침을 비치는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의 마음이 굳어서 그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없다할지라도 그 권위 있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 마음의 빗장을 열고 그 말씀이 깊이 들어와서 우리의 마음에 자리를 잡는 것을 여러분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다음에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얻어먹었사오니! 막연히 귀로 듣는 거 아니에요.
그 말씀을 먹듯이 마음속 깊이 담았다는 말입니다.
얻어먹었사오니! 그러고 나서 보니까 그 말씀이 내 기쁨이 되었나이다,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나이다, 예레미야 15장 16절에 예레미야가 고백한 그 은혜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팔복의 내용을 한데 묶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성경을 잘 모르시는 분들은 팔복이 뭐냐? 여덟가지 복이냐? 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데, 예 여덟 가지 복이죠.
이 성경 본문에 보면 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 하는 말이 여덟 번 반복되어서 나옵니다.
그래서 팔복이라고 하고 마지막에 한 번 더 그 말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주로 일반적으로 구복이라고 하지 않고 팔복이라고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꼭 명심해야 될 진리가 있습니다.
이 팔복의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성품이요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성품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 말씀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가지고 나온 본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본성하고 관계가 없어요.
물론 사람들 중에는 천성적으로 겸손한 사람도 있고 눈물이 많은 사람도 있고 성격이 부드러운 사람도 있고 의분이 강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생물학적인 특징을 지금 여기서 논하는 것 아닙니다.
뭐냐 그러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러이러한 성품을 갖게 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입장에서 보면 '나를 따르는 자는 내가 갖고 있는 성품이 이러한 즉 너희의 성품도 이러해야 하느니라'하는 것을 지금 팔복을 가지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거듭난 사람, 하나님의 새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사람만이 닮아갈 수 있는 주님의 성품이요 또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주님의 성품을 여기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여덟 가지를 개별적으로 떼놓고 생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어떤 사람은 특별히 마음이 온유하다, 또 다른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다, 이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 한 가지씩 소유하는 성격으로 보시면 안된다 그 말입니다.
이 품성은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는 한 사람의 온전한 성품을 가르킵니다.
왜냐하면 이 여덟 가지는 예수님 자신의 성품이에요.
그러므로 그 예수님 자신의 성품이 내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내 안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성품이요 거룩한 성품을 이야기합니다.
팔복이 예수님 자신의 성품을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흔히 예수님의 초상화라고 이름을 붙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 마치 그런 거 같아요.
팔복을 가만히 읽으면서 그 내용을 음미하면 예수님을 보는 것 같아요.
예수님의 초상화를 우리가 보는 것 같습니다.
여덟 가지의 칼라를 가진 수천개의 작은 돌로 만들어진 예수님의 모자이크 초상화 같습니다.
여러분 모자이크 그림이라던지 모자이크 작품을 감상하신 일이 있죠?
작은 돌들은 여러 가지 색깔을 띠고 있지 않습니까?
파란색 초록색 노란색 흰색 등요.
우리가 얼굴을 모자이크에 가까이 대고 가만히 들여다 보면 돌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을 음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자이크로부터 몇걸음 뒷걸음질 해서 전체를 보면 이 작은 돌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하나의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팔복이 꼭 같아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는 말씀 하나하나 뜯어보아도 그 나름대로 은혜가 풍성하지만 조금만 뒤로 물러서서 팔복 전체를 우리가 이렇게 깨닫고 또 마음에 담고 생각하면 예수님의 거룩하신 모습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모습에는 심령의 가난함이 있습니다, 애통함이 있습니다, 온유함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얼굴에는 화평이 있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초상화가 보여요.
그러므로 주님이 이 말씀을 권위 있게 하시는 저의가 뭐냐? 내가 이러하니 너희도 이러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모두 나처럼 되라, 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진정한 구원은 작은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막연히 천당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요, 예수님을 닮는 자요 결국에는 예수님과 똑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 우리 모두가 예수의 제자입니다.
팔복의 내용은 예수님 자신의 성품이기 때문에 그를 배우고 따르고 닮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말씀을 마음에 담고 늘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주님을 닮아가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리에 와서 말씀을 듣고 계시지만 예배를 마치면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도 모르고 다 잃어버리고 또 일주일을 살아야 될 사람도 많아요.
이번만은 그러지 맙시다.
돌아가서 팔복의 말씀을 앞에 놓고 여러분이 매일매일 한마디 한마디를 음미하며 묵상하세요.
이것이 주님의 성품이라는데, 주님을 닮아가는 내가 이 말씀을 어느 정도 소화하고 이 말씀대로 내 자신이 주님처럼 빚어지고 있는가를 여러분이 검토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존경한다고 합시다.
존경하는 그 사람하고 참 가까워지고 그 사람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면 유지할수록 우리는 그분을 닮게 됩니다.
그럴 기회가 별로 없는 사람은 그분의 사진을 벽에다 걸어놓고 하루에 한두 번씩 쳐다보면서 그분의 정신을 이어받으려고 하고 그분이 남긴 족적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을 닮는다고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한 번 듣고 다 손 씻듯이 씻어 버리고 세상을 살면 주님을 닮을 수가 없죠.
이번 한 주간 동안 이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여러분이 매일 묵상하세요.
그러면 그 말씀이 나의 성품을 심는 씨앗이 되어서 나로 하여금 주님을 닮아가도록 계속 작업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주님을 닮은 사람이다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 팔복은 예수님 자신의 행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한데 너희도 행복해야 된다' 하는 주님의 그 따뜻한 마음이 이 말씀 안에 들어 있어요.
주님이 그러잖아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복이 있나니 하는 이 말투는 감탄사입니다.
우리나라 번역으로는 '복이 있나니' 약간 감탄의 뉘앙스도 들어 있습니다만은 완전히 감탄문이에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행복이여' 하는 말과 같습니다, '온유한 자의 행복이여',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행복이여' 하는 말씀이에요.
심령이 가난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아니? 화평케하는 생활을 하면 얼마나 행복해지는지 아니? 그 행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는 감탄, 감격이 이 말씀 속에 들어있어요.
우리가 이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이 있나니' 하는 말은 '마카리오스' 라고 하는 헬라 말입니다.
근데 재밌는 것은 이 '마카리오스'라고 하는 이 말이 사람들의 행복을 가르켜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복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복이 있나니' 할 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행복인데 이 행복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자신의 행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저의는 내가 누리는 행복을 너희도 항상 체험하면서 살기를 바란다 하는 주님의 그 심정이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너희도 나처럼 심령이 가난하면 행복한 자가 될 수 있느니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주님의 속삭임이 이 가운데 있습니다.
너희도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나처럼 행복할 수 있느니라 하는 말씀을 이 마음 속에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너무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생을 살았습니다.
그만큼 가난한 분이 없었고 그만큼 사람들에게 핍박받은 사람이 없었고 그만큼 고통을 체험한 사람이 없었습니다만 그와 같은 고난 속에서도 주님은 잃어버리지 아니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심령의 행복이었어요.
우리가 이 행복을 소유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자가 될 것입니다.
사실 보세요, 그렇지 않아요?
가난함에도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의 행복을 누가 앗아 가겠어요?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면서 애통함도 불구하고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행복 누가 빼앗아 가겠어요?
이 세상에서는 큰소리를 쳐야 이깁니다.
온유하면은 손해 봅니다.
온유해서 손해를 보면서도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행복을 누가 빼앗아 가겠어요?
못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는 이 행복은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줄 수가 없고 이 세상에 그 무엇도 빼앗아갈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누리는 행복이에요.
이 행복을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미국 독립선언문에 명시된 것처럼 누구나 자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우리는 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고상하시네요, 대답 안 하시는 거 보니까.
자 우리는 다 불행하기를 원합니다. 아멘.
한 사람도 대답 안 할 거예요.
우리 모두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어요.
하나님도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세요.
그는 좋으신 아버지 되시니까.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위해서 뜁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면 앞뒤 가리지 아니하고 매달립니다.
마치 인생의 목표가 행복을 얻는데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에요. 행복해야죠.
그러나 문제가 어디 있느냐?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이 잘못됐다는 거예요.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틀렸어요.
행복을 찾아가는 길을 잘못 선택했어요.
'아그네스 레플리오'라고 하는 분이 의미있는 말 한마디를 했습니다.
'우리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한번요, '우리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 되는데 우리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도 사실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내 밖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밖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자기 밖에 있는 무엇을 통해서 행복이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행복을 실제로 손에 놓은 자가 이 세상에서 몇이나 됩니까?
맹자는 인생을 사는데 정말 재밌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맛있는 것을 먹는 것과 성을 즐기는 것'이라는 솔직한 말을 했어요.
점잖은 사람이 그 정도로 솔직하면 괜찮은 거 같아요.
먹고 마시는 거, 사람들이 정말로 이것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으로 삼고 있잖아요.
섹스, 하여튼 엄청난가 봐요, 사람들이 그렇게 미치고 환장을 하는 거 보면.
그렇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손에 넣으면, 그런 것들을 내가 원하는 것만큼 소유하고 즐기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벌써 길을 잘못든 거예요.
돈이 행복을 갖다줄 줄을 알고 있습니다.
잘못 들었죠? 명예와 권세가 나에게 행복을 줄줄 알고 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에 불을 쓰고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명예와 권세가 나에게 행복을 줍니까?
행복을 주었다고 대답할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심지어 솔로몬까지도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은 그것들이 행복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런것들이 행복을 주는 것이라면 선진국에서 사는 팔자 좋은 사람들은 벌써 무릉도원에서 정말로 인생을 구가하고 살 거예요.
그러나 보세요, 선진국일수록 왜 자살이 많습니까? 왜 아스피린이다 진통제를 복용하는 사람이 그리 많습니까? 왜 저녁이면 진정제나 수면제를 먹어야 자는 사람이 세 사람 중에 한 명 꼴 정도로 많습니까? 이유가 뭐예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손에 넣어도 그것이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웅변적인 증거지요.
여러분 잘 기억하세요, 죄는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그리고 우리를 속입니다.
죄는요 행복을 줍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일시적인 거예요.
행복을 줍니다, 죄에 끌려 가면요 일시적으로는 굉장히 만족스럽고 행복해집니다.
섹스를 추구하든지 아니면은 뭐 돈을 추구하든지 아니면은 어떤 무엇을 추구하든간에 죄는 우리를 잠깐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그 속임수에 빠지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거짓이에요.
쾌락도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재물도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명예나 권력도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그 모든 것은 결국은 전도서가 선언한 것처럼 헛되다로 귀착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오중주의 헛됨으로 다 귀착되고 끝납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주는 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진정한 행복의 길이 어디 있는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내 마음에 모시고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기를 애쓰는 사람은 하나님이 누리시는 그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닮으면 닮을수록 행복의 순도는 더 높아지고 진해진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행복의 원천이 된다고 하십니다.
그 행복의 원천 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그 예수님이 이 자리에 계십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권세 있게 말씀합니다.
'행복은 밖에 있는 것 아니야, 행복은 나에게 있는 거야, 그러므로 내가 다스리는 너희 마음에서 행복을 찾아라' 그거에요.
행복을 찾는 길은 어떤 것이냐? 예수님을 닮으려고 하라 그 말입니다.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하셨으면 나도 심령이 가난해지면 예수님의 행복이 내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팔복을 가지고 우리는 이렇게 선언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소유로 만족하는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심령이 가난한데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웃고 즐기는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애통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강한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온유한데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무정하고 차가운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긍휼히 여기는데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더러운 마음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다투고 갈등하는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화평케 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행복은 불의와 타협하는데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오늘 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심령의 왕으로 모시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우리 모두의 행복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마우리스 마이탈 링크'라고 하는 사람이 쓴 '루버드'라고 하는, 소위 '파랑새'라고 하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말씀을 드린 것도 같은데.
그 드라마의 주인공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우리가 막달라 마리아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아요.
쓰레기와 같은, 걸레 조각과 같은 인간입니다.
여러 귀신이 들어 가지고 인격이 완전히 깨져 버리고 파산된 사람이요, 또 신분상 죄인이라고 하는 거 보니까 아마 창녀 출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무슨 행복을 이야기합니까?
이런 사람에게 무슨 소망이 있어요?
그런데 그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잖아요.
그 드라마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이렇게 행복에 겨워 고백하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내가 전에 알지 못한 행복을 가져다 주었어요, 예수님은 내가 전에 알지 못하던 행복을 가져다 주셨서요, 그리고 예수님을 가까이하는 모든 자들은 잠에서 막 깨어난 어린아이처럼 행복해질 수 있답니다"
참 표현이 아름다워요.
'잠에서 막 깨어난 어린아이처럼 행복해질 수 있답니다'
여러분, 행복이라는 주제를 놓고 그림을 그린다면 어떤 그림들을 그리고 싶습니까?
이 드라마를 쓴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의 입을 통해서 행복은 이런 것이다 하고 표현을 합니다.
어린아이가 잠을 푹 자고 눈을 살짝 뜨니까 자기를 쳐다보고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엄마를 보게 됩니다. 그렇죠?
그러면 이 아이가 너무 행복해 가지고 씨익 웃습니다.
최고의 행복을 표현하는 그림 같은 장면이에요.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운 행복은 어떤 것일까?
잠에서 막 깨어난 어린아이가 엄마를 쳐다보면서 행복해 하는 모습, 이것이다 그 말입니다.
이런 행복을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행복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갑자기 부자가 된 거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갑자기 신분이 높아진 거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분을 마음에 모시니까 잠에서 막 깨어난 어린아이가 느끼는 그 행복을 자기가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심으로, 예수님의 그 아름다운 성품이 나의 성품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울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고, 가난하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고, 실패자가 되어서도 행복해질 수 있고, 또 성공하고 부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은총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이런 은혜를 받기를 바랍니다.
헛된 것을 놓고 시간 낭비하고 정력 소비하지 마세요.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그분을 주목하세요.
그분처럼 되려고 노력을 하세요.
그분을 닮으면서 하나하나 그분의 성격을 나의 성격으로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저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산상 보훈을 설교하지 못했지만 제가 이 설교를 하면서 동시에 저도 예수님처럼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누리던 그 행복을 제가 소유하고 싶습니다.
우리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세상적인 조건을 보면 행복해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세상이 모르는 행복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어요.
세상이 앗아가지 못하는 행복이 있을 수 있어요.
그 행복은 행복의 원천 되신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심을 알고 그분을 배울 때 찾아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집에 가셔서요, 팔복의 말씀을 날마다 한 번씩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이러셨다면 나도 이래야지, 예수님의 성품이 이랬다면 나도 이래 봐야지 하는 간절함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이 여덟 가지를 통해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품성이 나 자신의 품성으로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행복해집니다.
악을 쓰는 세상에서 내가 온유함으로서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아요?
악착같이 모아 보겠다고 하는 사람들 틈에서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전혀 부러울 것이 없는 만족이 내 안에 있다면 세상에 이 사람만큼 행복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나보다 앞서서 막 달려가는 사람들이 때를 이루는데 비록 나는 뒤쳐졌다 하는 느낌이 있어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그 심정 때문에 내 마음에 신비스러운 행복이 자리를 잡는다면 세상에 이것만큼 좋은 거 어디 있어요?
우리 모두에게 이 행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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