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GOODWILL CHURCH/Christianity

교회 재정과 헌금의 역사

교회 재정과 헌금의 역사

서원모(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출처 : 2008년 한국 개신교인의 헌금 실태 조사 및 연구 논문 자료집(바른교회아카데미)

 

 

들어가는 말

 

오늘날 한국 교회, 특히 한국 개신교회가 사회로부터 큰 도전을 받고 있다. 괄목할 만한 성장률을 보였던 개신교회는 성장률이 둔화되고 심지어 감소세까지 보여주고 있다. 교회의 사회적인 공신력이 실추되었을 뿐만 아니라, 안티 그리스도교 사이트에서 나타나듯 한국 교회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세습제나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비리 등 명백한 잘못에 대해서 비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사회 진보를 저해하는 세력이나 사회 갈등의 주요 원인이라는 공격도 받고 있다. 한국 교회에 대한 질책이 때로 심각하게 왜곡되고 편향적인 시각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사회적인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이를 교회 개혁과 갱신을 위한 토대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가 비난 받는 중요한 영역 중 하나는 헌금과 교회 재정과 관련된 영역이다. 헌금을 너무 강요하며, 특히 십일조를 강조한다든지, 교회 재정이 투명하게 관리되지 못한다든지, 재정 지출에서 구제비나 사회복지비의 비율이 너무 적다든지, 한국 교회의 헌금과 교회 재정에 대한 비판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교회 재정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합리적이고 건전하게 재정을 운용하며, 엄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제도를 수립하는 것은 한국 교회 개혁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논의가 100인 이하의 교인을 가진 교회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 개신교회의 현실도 충분히 고려하여, 목회자의 생계비를 보장하고 도농 간의 격차를 해소하며 미자립교회에게도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포괄적인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최근 교회 재정에 관련된 안내서들이 출판되고 있으며, 한국 교회의 헌금과 교회 재정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성서신학이나 실천신학 분야에서는 연구가 많이 이루어진 편이지만, 역사신학 분야에서는 연구가 미진한 상태다. 이렇게 볼 때 초대 교회와 관련된 학술적인 논문이 두 편이나 존재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이 교회 개혁의 표어가 되며, 유럽의 몇 나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의 교회들이 오늘날 초대 교회의 헌금제도와 교회재정과 유사한 자발적인 기부 형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초대 교회에 대한 연구가 심도 있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이 연구는 이 두 논문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초대 교회뿐만 아니라 중세 교회, 근대 교회 등 교회사의 모든 시기에 나타난 헌금제도와 교회재정의 유형과 문제들을 개관하고자 한다. 

이 논문은 바른교회아카데미가 후원하는 헌금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성서신학, 종교사회학, 실천신학 등 다른 분야와의 공동연구를 염두에 두고 작성되었다. 교회 창립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헌금과 교회재정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이 논문의 일차적인 목적이며, 이 글에서는 특히 십일조의 역사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 연구가 교회 재정과 운용에 관련된 역사적 준거틀을 제공하고, 한국 교회의 교회 재정 개혁과 관련된 논의들을 보다 심화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다. 

 

 

I. 초대교회의 자발적 기부 모델(2-5세기)

신약성경과 마찬가지로 교부 문헌들은 교회의 헌금과 재정원리에 대해 극히 단편적인 사실만을 알려준다. 따라서 우리는 교부들의 글 이곳저곳에서 관련된 정보를 뽑아내어 종합할 수밖에 없다. 서방 기독교세계의 경우, 6세기부터는 헌금, 특히 십일조가 교회법 혹은 국가법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5세기까지를 한 시기로 다루되, 기독교 공인(313년) 이전의 시기와 공인 이후의 시기를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1. 기독교 공인 이전의 시기

교회가 창립된 지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의 처음 3세기 동안의 자료에서는 헌금과 교회재정의 문제가 극히 드물게 언급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자료들로부터 교회 헌금과 재정제도의 원형적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초대교회의 헌금은 기본적으로 교인들의 자발적인 기부에 의존했으며, 거두어들인 헌금과 헌물은 교회지도자의 생활비, 가난한 자의 구제, 예배와 집회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여러 종류의 헌금에서 초대교회 문헌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잘 알려진 것은 맏물을 바치는 관행이었다.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 시리아 지역에서 저술되어 신약성경 문헌을 제외하고 가장 오래된 기독교 문헌인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디다케)>는 구약성경의 맏물을 드리는 관행이 교회에서도 시행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자료는 떠돌이 예언자들과 교사들(11장), 한 교회에 정착한 붙박이 예언자들과 교사들(13장)과 지역 교회에서 선출한 감독들과 봉사자(집사)들(15장)을 언급하여, 다양하고 유동적인 교직제도를 보여준다. 특별히 붙박이 예언자들과 교사들에 대한 가르침에서 저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먹을 자격이 있으며, 포도열매, 소들과 양들, 밀가루,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 더 나아가서 돈과 의목과 모든 재산 중의 맏물을 예언자들에게 주라고 권한다(13장). 예언자들은 대제사장이기 때문이다. 

반면 3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도 전승>은 거두어들인 소출의 맏물을 감독에게 바치라고 권하며, 맏물을 받으며 드리는 감독의 감사기도를 소개한다(31-32장). 이렇게 받은 맏물이 어떠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또한 병자들에게 주는 예물과 관련된 규정(24장)에는 과부와 병자뿐만 아니라 교회 일을 하는 자에게 빵을 전해 주는 관행이 소개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사도 전승>에서는 "맏물"이란 형식으로 헌물이 거두어졌고, 이러한 헌물들은 과부와 병자에 대한 구제와 교역자들의 생활을 위해 사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리게네스의 <민수기 강론>에서도 초대교회의 맏물을 드리는 관행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민수기의 맏물에 대한 규례를 해석하면서, 맏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시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제사장에게 드리는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율법은 맏물을 드리지 않고는 땅의 과실과 가축과 소출을 정당하게 누릴 수 없다고 규정하는데, 기독교인도 이러한 규례를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가 있다. 그는 보다 구체적으로 구약의 맏물 규정은 복음의 제사장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맏물을 복음의 제사장들에게 드리는 것이 마땅하고 유용하다. 왜냐하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기 때문이다. 이것이 합당하고 타당하듯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회에 들어오며 사제와 집사들이 제단에서 섬기며 하나님 말씀과 교회의 사역에 자신을 바치는 것을 아는 자가 하나님이 태양을 비추고 비가 오게 함으로써 자신에게 주신 소출의 맏물을 사제들에게 드리지 않으려 한다면 이는 부당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한 자의 영혼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그가 거두어들인 열매를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거나 믿지 않고 그것들이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것처럼 숨으려고 한다고 느껴진다."

 

오리게네스는 기독교인도 구약의 규례를 따라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교역자들에게 맏물을 드려 그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다른 곳에서 오리게네스는 "모든 소출 중에서 십일조를 교회와 가난한 자들에게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초대교회의 헌금이 교역자와 교회의 필요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오리게네스는 "십일조"를 언급하지만, 오리게네스는 거의 모든 곳에서 십일조보다는 맏물 용어를 사용했다. 양자가 상호교환적으로 이해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오리게네스가 수입의 일정 비율을 의무적으로 드려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리게네스는 맏물을 드리는 것 이외에도 십일조를 드리는 관행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실제로 3세기 중엽의 문서로 알려진 <사도들의 가르침(디다스칼리아)>에서는 맏물, 십일조, 서원물, 예물 등 다양한 종류의 헌금과 헌물이 언급된다. 여기서는 모든 헌금은 감독에게 바쳐야 하며, 감독은 자신의 필요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헌금과 헌물을 사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모든 헌금을 직접 혹은 집사를 거쳐 감독에게 주라고 권하는데, 이는 감독이 가난한 자들과 궁핍한 자들을 잘 알기 때문에 정당하게 분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들의 가르침>에서는 헌금이 감독에게 집중되었으며, 교역자의 생활과 가난한 자들의 구제를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4세기 문헌인 <사도 규정> 제 8장은 맏물로는 감독과 사제와 집사의 생활을 보장하고, 십일조는 나머지 성직자와 동정녀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규정하여 <사도들의 가르침>보다 자세한 지침을 주었다. 

<사도들의 가르침(디다스칼리아)>와 오리게네스는 초대교회에서 십일조가 시행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초대교회가 십일조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십일조가 어떤 식으로 드려졌는지는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오히려 처음 3세기 동안의 문헌들은 구약성경의 십일조 계명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폐기되고 완성되었다고 가르쳤고, 초대교회 교부들은 십일조 계명이 너무 느슨하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리옹의 주교 이레네우스는 주님은 십일조를 내라고 가르치지 않고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고 명령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 다른 곳에서 이레네우스는 모세의 계명처럼 기독교인도 맏물을 드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십일조를 드렸지만, 기독교인은 자유를 얻은 자들로 모든 소유를 주님의 목적을 위해 구별하여 재산의 적지 않은 부분을 즐겁고 자유롭게 드린다고 주장한다. 북아프리카의 테르툴리아누스가 "영혼과 영혼으로 결합된 우리는 재산을 공유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이는 기독교인은 소유의 10분의 1만 드리는 것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의 <카톨릭 교회 일치>에서도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발견된다. 그는 처음 기독교인들은 집과 토지를 팔아 그 값을 사도들에게 바쳐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하여 한르에 보화를 쌓았지만, 당대의 기독교인들은 재산의 10분의 1도 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또한 푸르니의 성직자와 민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십일조의 용도를 알 수 있다. 그는 사제 게르미니우스 파우스티누스가 게르미니우스 빅토르의 유언 집행인이 된 것을 성직자가 세속적인 일에 관여하는 일이라고 공격하고, "연보를 내는 형제들을 존중하여, 말하자면 십일조를 받는 자로서 제단과 제물에서 물러나지 않고, 밤낮 하늘에 속하며 영적인 일들에 봉사하는 것"이 성직자와 관련된 규레라고 밝힌다. 여기서 키프리아누스는 십일조가 성직자가 하나님의 일을 전념할 수 있도록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키프리아누스가 자발적인 기부로 드려졌던 십일조를 의무적인 규정으로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렇게 볼 때, 초대 교회에는 맏물과 십일조의 형태로 헌금이 드려졌으며 이렇게 모아진 헌물과 헌금은 교역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사용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유스티누스와 테르툴리아누스는 초대 교회의 헌금 제도에 대한 또 다른 정보를 준다. 2세기 중엽에 저술된 유스티누스의 <변증서>는 이 시기의 로마 교회의 예배의 형식과 내용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당시 로마 교회의 예배에는 "사도들의 회고록과 예언서"가 봉독되었으며 설교와 권면이 주어졌다. 그 다음에는 모두 일어나 기도를 드리고 입맞춤으로 인사했다. 이어서 빵과 포도주와 물을 드리며, 인도자가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바치면 모두가 "아멘"으로 응답한다. 봉사자[집사]들은 각 사람에게 감사기도를 받은 빵과 포도주와 물을 나누며, 부재자들에게도 가져다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구제를 위한 헌물을 언급한다. 

 

"부유한 자들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드리며, 이것은 인도자에게로 놓여진다. 그는 우리 가운데서 고아와 과부 및 질병이나 다른 이유로 인해 궁핍한 자들, 감옥에 있는 자들, 여행자들을 돕는다. 말하자면 그는 모든 궁핍한 자들을 돕는다."

 

이 구제를 위한 헌물이 성찬을 위해 빵과 포도주와 물과 함께 드려졌는지, 예배 후에 따로 드려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유수티누스는 초대교회는 주일 예배와 연관되어 구제를 위한 헌물이 드려졌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북아프리카의 테르툴리아누스의 <변증서>는 또 다른 형식의 헌금에 대해 알려준다. 기독교인의 모임에 일종의 자센궤가 있어 각자가 매월 하루 혹은 원하는 때에 적은 돈을 기부했다. 이 돈은 입회비가 아니며, 누구도 강요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본인이 원하는 만큼 능력껏 드려졌다. 또한 이 헌금은 잔치나 주연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위해 사용되었으므로 "경건의 기탁금"(deposita pietatis)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유스티누스와 테르툴리아누스는 모두 초대교회의 헌금이 자발적인 기부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양자는 모두 헌금과 헌물이 주로 가난한 자를 위해 거두어지고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유스티누스는 예배와 연관되어(예배 중간에 혹은 예배 후에) 헌물이 드려졌으며, 테르툴리아누스는 교인 각자가 매월 1회 정도 자선궤를 통한 정기적인 헌금이 기대되었다고 밝혀준다. 이렇게 두 가지 형태로 거두어들여진 헌금이 가난한 자들의 구제뿐만 아니라 교역자의 생활을 위해서도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앞에서 살핀 바대로 <사도 전승>에 따르면 맏물은 감독에게 가져가서 감사 기도를 받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는 헌금이 수시로 거둬질 수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 이전 시대의 교회 재산과 부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공인 이전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의해 박해를 받았으며 법적인 제약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시기의 교회가 재산을 전혀 소유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과 다르다. 처음 2세기 동안의 교회 재산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다. 이 시기에 기독교인들은 다른 집단과 구별해서 자신들의 존재를 유형적으로 드러낼 물질적 기반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기원후 200년이 지나면 기독교인들이 고대후기 세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기독교 예술은 기원후 2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로마의 칼리스투스 카타콤바에 그려진 벽화들은 당시 로마교회가 교인들을 위한 무덤을 소유했으며,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과 관련된 벽화를 그리도록 예술가를 고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독교 예술은 무덤뿐만 아니라 가정교회당에서도 발견되었다. 신약성경시대부터 교회의 집회는 가정집에서 이루어졌는데 듀라 유로포스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 예배 처소가 발견되었다. 가정집을 변용하여 사용한 이 예배 장소에서는 집회를 위한 방과 세례를 위한 방이 구분되어 있었으며, 후자에는 세례조와 벽화가 발견되었다. 교회의 벽화는 같은 지역에서 발견된 유대교 회당의 벽화와 비교할 때 색채나 예술적 기예에서 수준이 낮다. 그럼에도 이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종교적 목적을 위해 가정집을 변용시켰으며 세례조를 만들고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 예술가를 고용할 정도로 재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러한 일은 교회 헌금보다는 독지가의 지원과 기부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요약하면, 공인 이전의 시기에도 교회는 무덤, 예배를 위한 건물, 토지 등을 소유했으며, 이는 아우렐리우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같은 로마 황제의 칙령과 법령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2. 기독교 공인 이후의 시기

 

313년 로마황제의 기독교 공인, 324년 기독교 신앙을 가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제국의 단독 황제가 됨으로써 로마제국 내의 교회는 번영의 시기를 맞이했다. 기독교는 로마제국 전체에서 예배와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비록 국교는 아니라 하더라도 황제의 특별한 후원을 받는 종교로 성장했다. 민중들은 물론 지방 총독, 원로원, 황실 가족 등 지배계층도 기독교로 개정하였고, 종교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적인 이유로 사람들이 대거 교회로 몰려옴에 따라 기독교인의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리하여 300년경에 로마제국 전체 인구의 10%를 차지하던 기독교인의 수는 350년에는 50%에 이르렀다.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로 발전하게 되었지만 농촌 지역에는 이교의 세력이 아직도 강력했다. 그로부터 150년이 지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에 이교도의 세력은 자취를 감추고 로마제국에서 기독교의 국교화가 완성되었다.

이렇게 제국이 기독교적으로 변화하면서 종교적 목적을 위한 기부가 크게 늘어났으며 교회의 부와 재산이 증가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황실 자금으로 수많은 교회당을 건축하고 개교회들에게 자선에 쓰도록 기부를 하고, 321년에는 교회가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허락했다. 놀라의 감독이 된 파울리누스(353/4-431)는 부유한 귀족 출신으로 390년경 세례를 받은 다음에는 은둔의 삶을 살면서 거대한 재산을 교회와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었다. 또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녀 멜리니아(383-438)는 비아 아피아에 있는 자신의 집을 순례자들의 숙소로 만들고 상속받은 막대한 재산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재산의 기증은 극히 간헐적으로 이루어졌고, 가난한 자와 성직자를 위해 중간계층의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매주 드리는 헌금이 교회재정의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4세기와 5세기에도 교회가 증여나 유산을 통해 토지를 획득하는 일은 매우 점진적으로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교회당의 건축, 제단을 위한 은그릇과 비단너울의 공급, 교회당 바닥의 모자이크 장식은 신자 각자의 소액 기부가 모여 이루어졌다. 교회의 헌금은 부자의 책임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의무였으며, 감독들은 이렇게 크진 않지만 예측 가능한 수입을 기초로 모든 수준의 빈민과 궁핍한 자들을 도울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의 공인과 국교화 과정을 통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교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헌금제도의 기본적인 형태와 성격은 공인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교부들의 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는 대표적인 교부들의 잘 알려진 언명들을 언급하여 초대교회 교부들이 헌금에 대해 어떠한 가르침을 주었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요한 크리소스톰은 명설교가일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대한 애정과 부자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이름이 높다. 그는 마태복음에서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넘어서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해석하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소유의 10분의 3을 바치고 속죄제물, 정결례, 절기, 희년, 빚의 탕감, 노예 해방, 무의자 대출 등으로 첫 열매와 맏물을 드려 소유의 3분의 1 혹은 소유의 절반까지 드렸는데, 큰 일을 행하지 못했다고 평가를 받았다면, 십일조도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반문한다. 여기서 크리소스톰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십일조는 너무 느슨한 계명이며, 최소한의 기준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히에로니무스는 <말라기 주석>에서 십일조 계명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사제와 레위인들에게 드린 십일조와 맏물은 교회 공동체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십일조와 맏물을 드릴 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서서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만약 이렇게 할 수 없다면 유대인의 제도를 따라 소유의 일부를 가난한 자에게 주고 사제와 레위인에게 합당한 공경을 표해야 한다. 히에로니무스의 가르침도 그리스도의 급진적인 명령을 강조하고 구약성경의 십일조와 맏물을 최소한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밀라노의 감독 암브로시우스도 요한 크리소스톰처럼 부자의 탐욕에 대한 비판과 빈민 구호 활동으로 이름이 높다. 그는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를 정의의 관점에서 보았다. 사람의 소유는 실제로는 모든 사람의 소유이며, 땅은 모든 사람에게 속한 것이지, 사용권을 누리고 있는 부자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다. 암브로시우스에 따르면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그에게 속한 것을 돌려주는 일이며, 따라서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빚을 갚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십계명에 대한 설교에서 십일조를 내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던 바리새인과 재산의 반을 드린 삭개오를 비교하며 자선을 강조했다. 그는 주님의 피가 흘려지기 전에 바리새인은 십일조를 내고 금식했는데, 기독교인들은 고귀한 희생을 가지고도 바리새인보다 적게 내며, 얼마나 많은 가난한 자들이 아래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위에 있는 부자들처럼 되고자 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들이 선행을 할 때, 재산의 반을 낸 삭개오는 생각하지 않고, 십일조를 드린 바리새인의 예를 따랐다고 자축해야 할 지경이라고 말하면서 자선을 촉구했다. <시편 주해>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입에서 십일조를 떼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어떤 것을 포기하며 매년 소출이든지 너희의 히루 임금에서 조금씩 빼라. 수입의 일정 부분, 원한다면 십일조를 떼라. 아무리 양이 작더라도 십일조를 떼라." 이렇게 말한 다음 그는 바리새인의 예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커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너희가 능가해야 하는 자는 십일조를 드렸는데, 너희는 이와 대조적으로 1000분의 1도 드리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설교에서 그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십일조를 냈다는 것을 상기시킨 다음 "너희가 무엇을 행하고, 얼마나 많이 행하는지, 얼마나 주고 얼마나 자신에게 남겨두는지, 얼마나 구제에 쓰는지, 얼마나 유흥에 남기는지"를 생각해보라고 요구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에서도 그리스도의 말씀과 십일조의 규례가 역동적으로 관련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헌금의 용도에서 가난한 자의 구제를 특히 강조했다. 하지만 이러한 가르침은 헌금이 교역자의 생활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는 것이었다. 교황 겔라시우스는 십일조와 헌금의 용도를 균형 있게 제시하였고 그의 가르침은 고전적인 헌금분배원리가 되었다. 겔라시우스에 따르면 교회 수입은 넷으로 나누어, 4분의 1은 감독을 위해, 4분의 1은 지역 성직자를 위해, 4분의 1은 교회 건물과 예배 기물을 위해, 4분의 1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분배되어야 했다. 하지만 4분법 이외에도 다양한 형식의 3분법이 통용되었다. 예를 들면 스페인에서는 감독, 지역 성직자, 교회건물로 분배되었고, 잉글랜드에서는 지역 성직자, 교회 건물,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헌금이 사용되었다. 

기독교 공인과 국교화 이후에도 초대교회의 헌금제도는 기본적으로 자발적 기부 모델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맏물과 십일조 등 공인 이전에 발전되었던 다양한 형태의 헌금이 계속 존속되었다. 다만 황실과 원로원을 비롯한 사회 지배층의 개종과 교인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교회재산이 크게 늘어났고, 대규모 교회당의 건축이나 토지와 자산의 증여와 기부도 일어났다. 하지만 교회재정의 주요한 수입원은 중간계층의 신자들의 작지만 꾸준한 기부였고, 교회는 교황 겔라시우스의 원칙에 따라 감독, 지역 성직자, 교회건물, 가난한 자로 넷으로 나누어 헌금을 사용했는데, 특히 교부들의 설교와 가르침에서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가 강조되었다. 공인 후에도 교부들은 헌금의 표준은 십일조가 아니라 삭개오처럼 소유의 절반을 드리든지, 주님이 말슴하신 대로 소유 전체를 드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교부들이 십일조를 최소한의 기준으로 생각했다고 보이며, 십일조도 내지 않는 교인들을 맹렬히 비판했다. 

 

 

 

II. 중세 서방교회의 법제적, 봉건적 모델(6세기-15세기)

 

초대교회의 헌금제도는 기본적으로 자발적 헌금모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6세기부터는 서방교회에서 헌금제도의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는데, 이는 특히 십일조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이 시기부터 십일조는 교회법, 더 나아가서는 국가법의 규정으로 발전된다. 이는 자발적 기부를 기초로 하는 모델에서 모든 신자에게 의무적으로 적용되고 위반자에게는 출교, 심지어 세속정부의 물리적인 권세로 위협하는 강제적 세금모델로 교회 헌금의 형태가 변용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서방교회의 고유한 현상이다. 비잔티움 제국교회에서는 모든 신자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십일조 명령과 의무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교회와 국가 영역에서 광범하게 십일조에 대한 요구가 있었을 뿐이다.

또한 중세 서방세계에서는 봉건제도의 발전으로 헌금제도가 봉건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십일조는 교회를 위한 연보라는 본래적인 의미를 상실했고, 봉건적인 봉토에 기초한 현물부담으로 이해되었으며, 그 권리도 계속해서 이전될 수 있었다. 게다가 십일조에 대한 권리가 교회나 수도원에 대해 관할권을 지닌 평신도, 특히 귀족에게 넘어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사유교회의 발전은 평신도의 십일조 전유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교회는 이를 맹렬히 비판했지만, 완전히 종식시킬 수는 없었다. 

중세 시대에는 교권이 강력해지면서 교회의 재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달하는 일이 가능해졌고, 이는 민중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여러 가지 폐해를 낳았다. 특히 교황을 중심으로 교권이 집중됨으로써 교황청은 다양한 목회적, 교회적 활동에 대해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교황청과 고위 성직자들이 다양한 세금을 부과하면서 민중의 부담과 헌금의 폐해가 늘어나면서 교회 재정에 대한 비판이 다양한 계층에게서 나타났으며, 이는 종교개혁 시기에도 중요한 논점이 되었다. 

여기서는 중세 서방교회를 중심으로 이러한 교회재정과 헌금과 관련된 문제들을 주제별로 간략히 정리하고자 한다.

 

 

1. 강제적 세금 모델의 발전

 

500년 직후의 갈리아 지역의 교회 상황을 알려주는 에우기피우스의 <성 세베리누스의 생애>는 십일조 개념의 변화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보여준다. 세베리누스는 포로들과 가난한 자들을 보살폈으며, 궁핍한 자들이 육체적인 필요를 채울 때에야 만족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의 구제와 돌봄을 위해 십일조 납부를 강조했다고 보인다. 길리아의 주민들은 세베리누스가 가난한 자들에게 아낌없이 금품을 주는 것을 보고 비록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곤경에 처했지만 가난한 자들을 위해 소출의 십일조를 드렸다. 에우기피우스는 "이 계명이 율법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친숙"하지만, "이 사람들은 마치 천사의 입에서 직접 들은 것처럼 경건한 감사로 이 계명을 지켰다."고 서술했다. 

세베리누스는 주민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십일조를 독겨하고, 에우기피우스에 따르면, 가난한 자들에게 십일조를 드리면 영원한 상을 받을 뿐만 아니라 현세적 안락도 넘칠 것이라고 가르쳤다. 노리쿰의 주요 도시인 티부르니아 시민들은 십일조를 내지 않고 미루다가 고트족의 침입을 받아, 그동안 모아놓기만 하고 세베리누스에게 주기를 미뤄왔던 부조금을 포함한 많은 재화를 고트족에게 화친의 댓가로 주어야 했다. 또한 라우리아쿰 시민도 세베리누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십일조 납부를 미루다가 수확을 앞두고 녹병이 드는 재앙을 맞았다. 주민들이 세베리누스에게 용서를 빌자, 그는 그들을 위로하여 하나님의 선처를 약속했다. 그러자 주민들은 십일조를 기꺼이 내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세베리누스의 권고로 금식을 마치자 비가 내려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십일조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인 의무로 제시하며, 현세와 내세의 축복과 연결시키는 사상은 6세기와 7세기에 서유럽에서 광범하게 나타난 구약성경의 도덕과 관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사조와 관련된다. 십일조 계명은 기독교 공동체의 삶을 이스라엘 백성의 모형에 따라 조직하는 중요한 내용이 되었다. 다른 많은 제도와 마찬가지로 십일조 제도도 아일랜드-스코틀랜드 수도사들의 매개를 통해 서방에 정착했다고 보인다. 

567년 투르 교회회의는 십일조를 회의의 안건으로 삼아 논의하고 이에 대해 결정을 내린 최초의 사례이다. 회의 규정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들을 먹여야 한다고 정한다(5항). 교회회의 후에 투린의 4명의 감독이 작성한 목회서신은 보다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십일조를 권고한다. 그리스도인은 아브라함처럼 십일조를 납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죄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구제는 죄를 소멸하는 정화의 행위이며, 더 많은 것을 간직하기 위해 작은 것도 주지 않는 자에게는 가난이 덮친다. 이렇게 가르친 후 감독들은 "합당한 행위를 통해 아홉을 잃지 않기 위해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죄악의 행위로 나머지 모든 것을 잃고 주지 않으려고 했던 그것까지 잃는 것보다 더 지혜롭다."고 쓴다. 이 서한은 심지어 노예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내야하며, 노예가 없고 자식만 있는 경우에도 자녀 1명 당 금전 한 닢(tremissis)을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십일조가 자발적인 행위에 기초한 것이라는 개념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585년 마콘 교회회의는 20년 전의 투르 교회회의보다 법률적 형태에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회의 규정은 십일조는 하나님이 제정한 법으로 오랜 기간 동안 신자들이 지켜온 규례였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점차로 이 법을 지키지 않게 되었다고 개탄하며, 이 고대의 관행을 회복하여 교역자들에게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정한다. 사제들은 가난한 자의 필요와 노예들의 속전을 위해 십일조를 사용하여 민중 가운데 평화와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한다. 그 다음에는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새로운 진술이 추가되었다 : 십일조의 의무를 거부하는 자는 출교되어야 한다. 

650년 루엔 교회회의에서는 더욱 세밀한 십일조 규정이 만들어졌다. 우선 십일조는 어떻게 내야 할지가 규정된다. 모든 소출의 십일조를 낼 것이며, 가축과 양과 염소의 경우에는 열 번째로 지팡이 밑을 지나가는 것을 십일조로 바쳐야 한다. 여기서는 어떠한 교환도 인정될 수 없으며, 만약 바꿔친 경우에는 둘 다 하나님에게 바쳐야 하며 어떠한 보상도 이루어질 수 없다. 또한 십일조를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세부 조항도 나타난다. 십일조 의무를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세번까지 경고를 주고 그래도 거부하는 경우에는 출교해야 한다. 

마콘 교회회의와 루엔 교회회의는 십일조의 법제화 과정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마콘 교회회의 이후 2세기 동안 이러한 요구가 효력을 미치고 감독들의 결정이 시행되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앵글로-색슨 선교사달, 특히 보니파티우스의 영향으로 십일조 제도는 보다 공고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779년 칼 대제의 헤리스탈 법령은 십일조 제도의 또 다른 발전 단계를 보여준다. 여기서는 십일조가 제국법으로 확립되어 국가의 강제력으로 시행되었다. 헤리스탈 법령은 모든 사람이 십일조를 내고 감독이 이를 목회구에 분배해야 한다고 정했다. 칼 대제의 이러한 조치는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구왕 피핀은 마인츠의 룰루스 감독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풍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각자가 자비를 베풀고 가난한 자를 먹이도록 하라고 말하면서 모든 사람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십일조를 납부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십일조 제도는 칼 대제가 역점을 둔 목회구(parish) 체제의 정립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목회구에 속한 모든 자는 십일조를 자신이 속한 목회구에 내야 했으며, 목회구에 속한 자만이 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성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중세적인 목회구 강제가 확립되었다. 프랑크 제국에서는 십일조법이 새로 개종된 작센족에게도 적용되었다. <작센 지역의 법령>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든 사람이 사제들에게 현물과 노동의 십일조를 바치라고 명령했다. 

프랑크 제국에서 확립된 십일조법은 이후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십일조법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수용과 함께 도입되었으며 종종 격렬한 투쟁을 거쳐 정착되었다. 포르투갈에서는 11세기에, 덴마크와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에서는 13세기에 비로서 십일조법이 시행되었다. 십일조법이 제정된 이후 프랑스 혁명에 이르기까지 수세기 동안 십일조는 전 유럽의 경제와 재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제도가 되었다.

또한 십일조법의 발전은 교회법, 특히 교황의 법령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교황들은 십일조 제도를 공고화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다양한 역사적 상황에 따라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조항들을 만들어냈다. 

 

 

2. 사유교회와 평신도의 십일조 전유

 

사유교회는 초기 중세에서 평신도, 수도원, 사제 혹은 주교가 사적으로 소유한 교회이다. 사유교회의 주인은 이러한 법적인 지위로 인해 포괄적인 지배권과 사용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유교회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최근에는 이 제도가 고대 후기의 경제적인 발전과 관련되어 나타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미 388년의 법령에서는 공적교회(publicae ecclesiae)와 사적교회(privatae ecclesiae)의 구분이 존재했으며 이집트 파피루스 자료에도 상속 가능한 교회와 수도원의 사적 소유가 나타난다. 서방세계에서는 사적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이 471년에 처음 이탈리아와 관련되어 언급ㄷ되는데, 갈리아(541)와 스페인(546)에서도 발견된다. 평신도의 사적교회는 프랑크 정복 이전 갈리아에서, 스페인에서는 서고트족이 가톨릭교회로 개종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사유교회는 교회를 세운 자와 그 상속자의 권리의 확대를 통해 초기 중세시대에 출현했으며, 프랑크 왕국에는 700년경, 랑고바르드족에서는 8세기에 널리 확산되었다. 

88세기에 완전히 발전된 사유교회에서는 교회의 소유자가 교회의 토지와 수입에 속하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처분하고 상속할 수 있었다. 그는 교회의 유지와 사제의 생활만 보장된다면, 교회와 그 재산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교회에서 일할 사제를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었고, 성직자인 경우에는 예배도 주관할 수 있었다. 사유교회의 성직자는 보통 주인에게 예속된 자로 상당 부분 주인에게 의존했다. 

십일조가 모든 사람에게 의무적으로 규정되면서 사유교회의 수익은 십일조 권리의 소유 여부에 따라 크게 좌우 되었다. 원래 십일조의 분배는 교황 겔라시우스의 이론에 따라 감독, 지역 성직자, 가난한 자, 교회건물과 기물에 4분의 1씩 배당되었다. 하지만 사유교회에서는 십일조 수입의 3분의 2를 사유교회의 주인이 전유했으며(decimae dominicae), 3분의 1은 사유교회의 성직자에게 분배되었다(decimae parrochiales). 따라서 사유교회를 통해 지주나 제후 등 평신도가 십일조의 상당 부분을 전유할 수 있었다. 프랑크 제국에서는 경건왕 루드비히(813/814-840) 때에 사유교회의 주인이 되는 귀족들이 사유교회의 십일조를 전유할 권리를 주장했으며, 아헨 법령(818/819)은 사유교회의 주인은  자신에게 예속된 자를 성직자로 임명할 수 없고, 토지에서 나오는 소출을 통해 성직자에게 생활을 보장해 줄 것을 명하는 대신 성직자를 자유롭게 임명할 수 있고 십일조를 받을 권리를 인정했다. 사유교회의 주인으로서 귀족과 제후들에게 십일조의 권리를 인정하면서 9세기부터 식민지 개쳑과 새로운 토지 획득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원시림에 세워진 소예배당과 소교회는 개척지 개발을 위한 거점이 되었으며, 이 지역에서 거둬들인 십일조는 광범위한 사회활동을 위한 토대를 제공했다. 

중세 후반기의 그레고리우스 개혁자들은 십일조가 평신도의 손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평신도가 지배하는 사유교회체제를 공격했으며, 성직매매라는 관점에서 십일조의 평신도 전유를 맹렬히 비판했다. 그레고리우스 개혁운동으로 인해 귀족 소유의 사유교회들이 성직제도들과 융합되었으며, 다수의 평신도들은 십일조 권리를 포기하고 십일조를 교회의 소유로 환원시켰다. 하지만 교회는 십일조의 평신도 전유를 완전히 근절시킬 수 없었다.  1179년 제3차 라테란 교회회의는 적법한 방식으로 십일조의 권리를 소유한 평신도들이 계속해서 십일조를 거두어들일 수 있다고 인정했다. 다만 새로운 토지의 획득 및 식민지 개척을 통해 얻어지는 추가적인 십일조 수입은 평신도가 아니라 전적으로 교회의 기관들에게 귀속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럼에도 새로운 토지에 대한 십일조가 평신도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따. 

14세기와 15세기에는 주교와 수도원들이 유동성 재화와 현금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십일조의 권리를 평신도에게 이전하는 일이 더욱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는 십일조가 토지에 귀속되며 십일조 부과대상이 되는 토지 사용권자의 인격에 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십일조는 세금이 아니라 다른 재화와 마찬가지로 교역의 일반 법칙에 따르는 재화로 이해되었다. 뿐만 아니라 십일조의 권리를 임대하는 일도 가능해졌다. 십일조를 거두는 데는 많은 경비와 인력이 필요했으며, 십일조의 권리를 임대할 경우 수확에 관계없이 고정된 수입을 기대할 수 있고 십일조를 모아들이는 과정에서 작은 분쟁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반면 임차인도 수확 직전에 지대가 올라갔기 때문에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3. 헌금의 분화와 남용

중세 시대에는 교권이 강력해지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교회 재정을 조달하는 일이 가능해졌고, 다양한 형태의 헌금이 부과되고 거두어들여졌으며 이로 인한 부담과 폐해가 컸다. 그 대표적인 경우는 십일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드리는 감사의 표시고 이해되었고 이러한 개념을 기초로 신자들의 모든 소득행위가 십일조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십일조는 다양한 형태로 분화되었으며 십일조는 특히 토지경제가 주축이 되었던 초기 중세와 고중세 시대에 토지경제의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십일조는 대인 십일조와 대물 십일조로 구분되었는데, 전자는 수공업이나 교역행위를 통해 얻은 개인소득의 10분의 1이라면, 후자는 모든 생산물과 관련되지만, 실제로는 농업생산물에 한정되었다. 대물 십일조는 다시 소출의 십일조, 피의 십일조, 큰 십일조, 작은 십일조 등으로 나누어졌고, 서로 결합되어 세분되었다. 이를테면 소출의 십일조는 대물 십일조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주요 곡물과 포도주, 건초와 여울에 부과되는 십일조는 큰 십일조라 불리고, 과일, 너트, 콩, 완두콩, 채소, 양귀비 등에 부과되는 십일조는 작은 십일조라 일컬어졌다. 전자는 부과하기 쉬웠고 적재가 용이했으며 재정적인 수익이 컸으므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지만, 후자는 일일이 수집하여 관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10세기와 11세기에 이르면 헌금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결국 징수가 포기되었다. 피의 십일조는 모든 짐승, 소와 양부터 가금과 거위에 부과되었으며, 소출의 십일조보다는 토지경제에 보다 덜 부담을 주었다. 큰 십일조는 뿔이 있는 짐승에 부과되었다면 작은 십일조는 양, 염소, 돼지에 적용되었으며 기름의 십일조도 포함했다. 오직 새로 태어난 짐승에게만 십일조를 거두었으며, 농장에서 나오는 모든 짐승의 소산물, 즉 우유, 꿀, 양모도 피의 십일조에 속했다. 따라서 피의 십일조는 파악하고 거두기가 어려웠고 징수가 포기되든지 현금으로 대체되었다. 또한 옛 십일조와 새 십일조(decimae novales)가 구분되었는데, 후자는 새롭게 얻은 개척지 지역에 부과하는 연보였다.

모든 체계적인 설명과 분류에도 불구하고 18세기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십일조는 규정하거나 확정하기 어려운 연보였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관습법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대물 십일조는 신자의 개인적인 의무와 관련되지 않았으므로 새롭게 얻어지는 소출에 대해서는 이것이 십일조에 속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이 계속 제기되었다. 관습법은 지역마다 시대마다 달랐으므로 어느 재화에 어느 정도에 십일조를 부과해야 하는지는 지역과 마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다양하고 복잡한 십일조의 종류는 농민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십일조의 종류뿐만 아니라 십일조 징수 방식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소출의 큰 십일조의 경우에는 어느 시점에 어떻게 납부해야 하느냐가 가장 큰 문제였다. 지역마다 마을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대체로 십일조는 추수와 함께 거두었고, 징수자는 십일조의 운송을 관리해서 자기 창고와 곳간에 쌓았다. 십일조 징수를 위해 추수는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 시작될 수 있었고, 십일조 징수자와 관리인은 10번째 단마다 표시를 해서 특별히 거두었다. 작업을 끝내는 표시도 징수자에 의해 주어졌고, 농부들이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경우에는 성문을 닫았다. "십일조 거부 운동"은 항상 존재했으며, 십일조를 거두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실랑이가 일어났다. 이를테면 농부들은 징수자의 승인 없이 추수를 시작하거나, 십일조 규례에서 허용하는 것보다 일찍 들에 나가서 늦게 돌아왔다. 십일조를 덜 내려는 이러한 농민들의 시도는 강력히 저지되었고, 농민들은 십일조 징수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교황과 교회 지도자들이 십일조 제도를 악용하여 부담을 가중시키는 일도 많았다. 예를 들면 교회는 십일조 이외에도 구일조(nona)를 부과하기도 했다. 교회가 빌려준 재산에 대해서는 십일조를 제외한 10분의 9에다 9분의 1을 구일조로 부과하여 결국 교회는 모든 수입의 5분의 1을 거두어들였다.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부과하는 교황의 십일조는 대표적인 십일조 제도의 남용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십일조를 세속 정부에게 양도한 첫 사례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731-41)가 롬바르드족에 대해 교황청을 보호한 대가로 칼 마르텔에게 보상한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12세기에 들어서야 국가의 유익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십일조 보조금이 법적이고 제도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1187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교황은 제3차 십자군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성전에 참여하지 않은 모든 자들에게 "살라딘세"라고 하는 특별 십일조를 부과했다. 이러한 형태의 세금은 후대에도 계속 부과되었다. 또한 교황이 정치적 투쟁에서 지원을 받은 세속 군주를 돕기 위해 간헐적으로 교회록에 부과하는 "교황의 십일조"가 있었다. 하지만 교황의 십일조는 대부분 투르크족과의 전쟁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살라딘세와 크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보니파키우스 8세의 <선언>(1301)은 교황의 십일조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시칠리아 왕국을 지원하기 위해 징수한 이 십일조는 지금까지 면제 대상이 되었던 종교 기관에 부과되었기 때문에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나병원, 여관, 구빈원과 구걸에 의존하는 수도원, 일정 수입 이하의 성직자를 제외한 모든 교회록에 세금을 부과하여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내도록 했다. 이 문서는 십일조의 대상과 징수와 납부방법을 자세히 규정하였다. 예를 들면 연못, 목초지, 사냥터 등을 판매하여 수익을 얻은 경우에는 소유기간에 따라 수익을 나누어 3을 곱한 금액에 십일조를 계산하며, 성직록을 이전했을 때에는 이 과정에서 수익을 더 많이 얻은 자에게 십일조를 부과하도록 했다. 

교황의 십일조는 오랜 동안 지속되었는데, 이는 십자군을 위해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황청 재정의 중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십자군의 종식과 함께 이 세금은 정당성을 가질 수 없었다. 세속 정부는 이 세금을 반대했고, 14세기의 교황청의 분열로 인한 교황권의 몰락과 연관되어 폐기되었다. 하지만 투르크족을 격퇴하기 위한 교황의 십일조는 16,17세기에도 계속해서 부과되었다. 

중세교회의 헌금과 교회재정의 폐해는 십일조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중세시대에는 십일조 이외에도 많은 헌금이 부과되고 거둬들여졌는데 여기서는 대표적인 것만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중세시대에는 교황권의 성장과 더불어 다양한 형태의 기부금과 세금이 교황청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베드로의 은전(Peterspfennig)은 원래 로마에 모인 잉글랜드 순례자의 여관을 위한 자발적인 사랑의 연보였지만, 일부 국가들에서는 교황의 봉토에 기초한 교회세가 되었다. 많은 세속군주들, 이를테면 잉글랜드와 폴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나폴리, 아라곤, 포르투갈의 왕들은 왕의 칭호나 왕국을 교황청으로부터 봉토로 받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국세를 바쳤다. 또한 이들 나라에서는 모든 가정에서 베드로의 은전이 베드로의 데나리온(denarius St. Petri)으로 거둬들여졌다. 

또한 교황권이 강화되고 강력한 중앙집권이 확립되면서, 교황은 교회의 다양한 목회행위에 대해 세금을 부과했다. 로마에서는 모든 종류의 목회행위에 대해 세부적으로 세금이 부과되었다. 13세기 중엽 이후에는 감독이 서품을 받을 때, 심지어 교황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 감독의 서품일지라도, 이에 대한 세금이 존재했다. 이러한 "서품사례"(Servitien)는 13세기에는 교황에 대한 선물로 출현했지만, 14세기에는 자발적인 기부에서 법적인 의무에 기초한 세금으로 변화했다. 대주교에 대해서는 영대비(Palliengelder)라고 불리는 서품사례가 납부되었다. 서품사례(Servitien) 이외에도 공석인 감독좌에 새로 감독이 임명되었을 때 임직 후 첫 1년의 수입을 교황에게 바치는 "첫해사례"(Annaten)가 있었다. 이밖에도 결혼의 장애 등을 제거하는 면제세금(Texen for Dispense), 공문서를 발행할 때 부과하는 문서세(Kanzelgebohren), 수도원에 대한 보호금(Schutzabgaben)가 있었다. 

교황청뿐만 아니라 관구와 목회구에서 부과하는 헌금도 다양한 종류가 있었다. 감독은 토지 기증을 통해 이루어지는 감독의 식탁비(mensa eposcopalis)를 사용하였고, 이밖에도 10세기 말에는 참사회의 공동식탁비(mensa communis)가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또한 감독은 겔라시우스의 분배 원리에 따라 십일조의 4분의 1을 배당받았다. 이는 감독좌성당의 영예를 위한 연보로 평신도와 성직자가 지불했으며, 12세기부터는 성당세(Cathedraticum)로 불렸다. 또한 매년 열리는 교회회의를 위한 교회회의세(Synodaticum)가 존재했으며, 감독들은 교황에 속하지 아니한 봉토에 대해 첫해사례를 부과했다. 

 

교황과 감독들은 헌금을 현물 대신 화폐로 받기를 원했으며, 특히 로마로 가는 헌금의 경우에는 현금납부가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중세말기에 화폐경제가 발전하면서 현금 납부가 더욱 용이해졌고, 당시 발전하던 은행들은 교황청에게 많은 도움을 제공했다. 하지만 목회구 차원에서는 현물연보가 중요했는데 이는 주로 절기와 관련되었다(Reichnisse 혹은 Kirchtrachten). 이 헌금은 주로 예배와 목회활동에 대한 사례로 목회구 사제와 하위 성직자의 생활을 위한 연보였지만 예배를 위해서도 드려졌다. 이 헌금은 다양한 형태가 존재했는데, 예를 들면 부활절 달걀, 부활절 양, 바르돌로매 축일 곡물단, 교회당봉헌 빵, 만성절일 빵 등이 있었다. 

또한 중세시대에는 목회사례(Stolgebihren)가 교회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사제가 입는 영대(stola)에서 이름을 딴 이 헌금은 세례, 장례, 결혼, 성찬, 고해, 마지막 도유를 비롯한 목회활동에 대한 사례비로 주어졌다. 초기 중세기대에 그레고리우스 1세는 이러한 사례금을 비도덕적이라고 배격했지만, 사유교회의 영역에서 관용적으로 발전되었으며, 사유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에도 적용되었다. 결국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목회사례를 칭송할 만한 관행으로 인정했고, 이 헌금은 오늘날까지 존속한다. 

마지막으로 중세교회에서 교회재정과 관련된 가장 널리 알려진 폐해로 루터의 종교개혁의 외적인 요인이 되었던 면죄부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면죄부는 참회서의 특정한 죄들에 대해 부과한 교회적 형벌을 참회금으로 대체하는 과정과 관련된다. 다만 면죄부는 고행성사 밖에서 허용되었고, 선행, 본질적으로는 교회적 목적을 위한 기부금을 통해 기부자에게 현세적인 형벌뿐만 아니라 연옥에서의 형벌의 면제를 약속했다. 면죄부는 11세기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교황이 면죄부를 대대적으로 부여한 관행은 1095년 우르바누스 2세가 십자군 가담이 다른 모든 고행을 대신하는 방법을 인정할 때 시작되었다. 12세기 말엽 인노켄티우스 3세는 면죄부를 전투에 참여한 사람만이 아니라 자금이나 조언으로 기여한 사람들에게까지 확대했다. 교황청의 관용이 확대되면서 면죄부는 개인들이 죽음을 앞두고 고해신부들로부터 완전한 면제를 받는 특권으로 활용되기 시작했으며, 1344년에 이르면 이러한 특권이 사용되는 횟수가 증가했다. 또한 면죄부의 발행은 1300년 교황 보니파키우스에 의해 시작된 희년제도와 연결되었다. 보니파키우스는 100년마다 완전 면죄부를 주었으나, 1343년 클레멘트 6세는 그 기간을 50년으로, 1389년에 우르바누스 6세는 33년으로, 1470년 파울루스 2세는 25년으로 줄였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면죄부를 교회의 재우너으로 이용하려는 유혹은 더욱 커졌으며, 교황 레오 10세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또한 세속권력도 면죄부 사업에 관여했다. 면죄부의 수입은 대개 셋으로 나누어 3분의 1은 로마로 보냈고, 3분의 1은 지역교회의 목적을 위해, 3분의 1은 면죄부를 발행한 세속권력의 창고로 들어갔다. 

 

 

III. 초기 근대와 근대의 종교세와 자발적 기부 모델(16세기-현재)

 

종세교회에서는 초대교회의 자발적 기부모델이 강제적, 법제적 모델로 변화되었으며, 교권이 신장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부과금이 징수되었으며, 헌금과 교회재정의 남용과 폐해도 컸다. 살라딘세나 교황의 십일조, 면죄부, 세속 권력의 십일조 전유, 십일조 권리의 양도와 상속 등은 대표적인 폐해 사례로 말할 수 있다. 이로 인해 경제적인 부담은 가중되었고, 민중뿐만 아니라 지배층에서도 교회재정과 헌금제도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주요한 문제들이 되었다.

종교개혁으로 서방 기독교 세계에는 교황교회에서 분리된 새로운 교회들이 출현했으며, 이 교회들은 고유한 신학과 예배와 목회 전통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개혁이 제도화되면서 개혁자들은 세속 군주에게 의존했으며, 독일과 영국,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개신교회는 국가교회로 발전했다. 이러한 교회들에서는 종교개혁 이전의 헌금제도들을 상당 부분 받아들였으며, 헌금은 국가의 강제력을 통해 거둬들여졌다. 하지만 국가교회의 특권을 누리지 못했던 소수파 특히 개혁교회는 자유교회로 상장하였으며, 여기서는 초대교회의 자발적 기부모델이 발전되었다. 특히 미국에서는 국가교회를 인정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하여, 가톨릭교회를 포함한 모든 교회가 자유교회의 모델을 따라야 했다. 이러한 미국적 모델은 오늘날 세계 전역에 확산되었으며, 교회와 국가의 급진적인 분리 혹은 종교적 소수파로의 존재 등으로 인해 어떠한 국가적 보조도 기대할 수 없는 곳에서 가장 효과적인 교회재정형태가 되었다. 

유럽에서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십일조가 폐기되면서 교회재정과 헌금제도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교회재정의 근간이 되었던 십일조 체제가 붕괴하고, 목회사례 등 전통적인 헌금제도가 약화되자, 독일을 비롯한 일부 국가에서는 교회세 제도를 수립하여 교회의 재정적 손실을 보완해주었다. 교회세는 오늘날 국가와 교회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지 않는 국가에서 존재하는 교회재정 형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독일의 사례를 중점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1. 종교개혁과 십일조 거부 운동

 

먼저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요인으로 면죄부라는 교회의 헌금과 교회재정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513년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와 할버스타트의 행정관이 되고, 1514년에는 마인츠 대주교가 된 알프레히트는 거대한 봉토의 획득과 대주교의 영대비로 상당한 금액을 로마로 지불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3만 굴덴을 푸거가로부터 차용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알프레히트가 성 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위해 거둬들인 면죄부 수입의 절반을 푸거가에 대한 채무상환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요한테첼의 설교의 영향으로 많은 비텐베르크의 고해자들이 면죄부를 구입했고, 루터가 면죄부를 정면으로 공격하고 95개조를 제시하면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올랐다. 

면죄부 외에 종교개혁 시대에 광범한 저항을 받은 교회재정의 문제는 십일조의 폐해였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독일의 여러 지역에서는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1476년, 1492년, 1502년, 1513년에 농민들의 폭동이 일어났지만 무자비하게 진압되었으며, 잉글랜드에서는 1381년 와트 타일러와 존 베일이 이끄는 민란이 일어났었다. 또한 종교개혁의 결정적인 시기였던 1521년 이후 독일 남부에서는 십일조 거부운동이 빈번히 일어났다. 

1523년 여름 스위스 취리히의 급진주의자들, 특히 농촌 사제들인 요한네스 브뢰틀리와 빌헬름 로이블린은 의회에서 십일조의 문제를 제기하고, 십일조와 사유재산이 성서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1519년부터 십일조는 하나님의 권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의무적으로 징수할 수 없고, 자발적으로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520년 후스의 <교회론>을 읽고는 교회에 대한 기부금으로서 십일조의 원래 목적을 회복하기를 희망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급진주의자들이 십일조의 성경적 근거를 부인하고 강제적인 징수를 거부하자, 츠빙글리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정의>라는 설교를 하고 이를 출판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정의를 구분하고, 십일조는 인간의 정의라는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525년 8월 취리히 의회의 자문을 받고 츠빙글리는 신약성경에서 십일조는 확증되지 않으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그는 기능적인 면에서 십일조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십일조는 공동체의 교회적, 목회적 필요를 재정적으로 부담하기 위한 세금이다. 공동체는 십일조를 적법하게 권위를 가진 자에게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 의회가 십일조를 거둘 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취리히 의회가 십일조의 원래적인 목적을 회복시키고 적법하게 사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신자들의 공동체가 주권을 지니고 있는 십일조 기구를 조직할 책임이 있다고 역설했다. 

1524-25년의 농민전쟁에서는 십일조 거부를 넘어서서 십일조의 징수와 권리의 주체를 농촌공동체에 두려는 열망이 표현되었다. 농민들의 개혁요구를 요약한 <12조항>의 첫 번째 조항에서는 거룩한 복음을 인간적인 첨가와 교리나 계명 없이 순수하고 명확하게 선포할 수 있는 목사를 선출하고 임명하고 또한 부적절한 행동을 한 경우에 폐위시킬 수 있는 공동체의 권위와 힘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한다. 십일조에 대한 요구는 두 번째 조항에서 표현되었다. 여기서는 "십일조는 구약성경에서 제정된 것이고 신약성경에서 완성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곡물에 대한 정당한 십일조를 기꺼이 지불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어서 십일조는 하나님에게 드리며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에게 나누어야 한다고 전제한 후, 십일조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들에게 속한 것이므로 공동체가 대표자를 선출하여 십일조를 거두어들이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십일조의 분배는 공동체의 동의를 얻어 이루어지는데, 십일조의 주요 부분은 공동체에서 선출한 목사와 그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나머지는 부락의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위해 사용하며, 그래도 남은 것이 있다면 보관하였다가 전쟁의 부담에 대비하도록 했다. 

<12조항>에서는 농촌공동체가 십일조 구매자의 지위를 가지고 십일조에 대한 주장을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동체는 십일조의 권리를 정당하게 구입한 자들에게는 보상을 약속하고 적절한 계약조건과 시간에 이를 다시 사들일 것이며, 상속으로 십일조의 권리를 물려받은 경우에는 십일조를 지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작은 십일조, 특히 피의 십일조는 인간이 만들어낸 부적절한 십일조이므로 지불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농민들의 십일조 개혁의 요구에 대해 마르틴 루터는 부정적으로 답변했다. 마르틴 루터는 1524년의 <상업과 고리대>라는 글에서 십일조를 정당한 연보라고 칭송했다. 그 이유는 십일조는 소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다른 모든 형태의 이자 계산은 경제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농민전쟁의 지도자들의 <12조항>에 대해 응답하기 위해 저술한 <슈바벤 농민 12조항에 대한 평화에의 권고>에서 이러한 원리를 기초로 십일조는 행정관의 정당한 수입이라고 선언한다. 십일조와 관련된 두 번째 조항에 대해 루터는 "그들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제후들의 것인 십일조를 전유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사용하려고 한다."라고 공격했다. 십일조의 징수는 신앙과는 무관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행위이다. 십일조를 납부하는 것은 미사나 가톨릭교회를 인정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십일조로 인해 양심의 고통을 느낄 필요가 없다. 경제적인 행위는 교황교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루터는 제후들이 복음적 신앙에 따라 개혁을 추진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설교자를 선출하고 예배를 드린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때 필요한 목회자와 복음에 합당한 새로운 제도들을 위해서는 십일조가 아니라 농민들 자신의 헌금으로 지원해야 한다. 제후들이 농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루터의 십일조에 대한 견해가 다음 시대를 지배하게 되었다. 십일조는 교회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아무런 의무가 없는 사적인 수입이라는 생각이 광범하게 수용되었다. 

1560년대에 남프랑스에 종교개혁을 도입하려는 투쟁에서는 십일조 거부운동과 이에 대한 억압이 반복해서 일어났다. 1524년 프랑소아 1세는 리옹지역의 루터파의 확산에 대해 경고하면서 루터파가 십일조를 더 이상 납부하지 않으려 한다고 공격했다. 십일조 거부 운동은 론탈을 넘어 1540년에는 님에까지 전파되었으며, 1550년 이후에는 세븐까지 확산되었다. 1560년에는 론 강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남프랑스 전 지역에서 십일조 거부 운동이 전개되었다. 종교개혁기의 십일조 거부운동은 농민층 가운데 십일조에 대한 불만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농민들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십일조는 200년 이상 지속되다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폐지되기 시작했다. 

 

 

2. 개신교회의 헌금제도 

중세 말기 가톨릭교회의 수입은 십일조, 토지, 종교적인 사례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황청은 다양한 세금을 거둬들였으며, 면죄부 판매와 희년 행사를 통해서나 교황령에서 수익을 얻었다. 추기경과 대주교와 주교들은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재원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자보다는 후자가 수입과 부라는 측면에서 더 중요했다. 목회구 차원에서는 십일조가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도시에서는 종교적 활동에 대한 사례가 십일조를 보완해주었다. 이러한 수입에서 세속 군주들이 개입하지 않은 부분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교황청의 성직자에 대한 세금을 모두 로마로 보내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를 국가적인 사업을 위해 사용하거나 십일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또한 귀족들은 수도원의 창설자, 후견인 혹은 임대인으로서 교회 재산문제에 관여했다. 

개신교 종교개혁은 이전의 교회재정제도와는 결정적인 단절을 보여주었다. 세속 군주들과 제후들, 도시들은 더 이상 교회 재산을 전유하는 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개혁자들은 이러한 전유를 정당화했다. 루터는 면죄부에 대한 공격을 통해 교황이 부과한 세금을 납부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으며, 수도원의 해체를 주장함으로써 세속 군주들이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도록 도왔다. 처음에 루터는 이렇게 몰수한 재산을 동동헌금함에 비축하여 가난한 자들의 구제와 교역자의 생활보장을 위해 사용하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1525년 말에 이르면 루터는 작센 선제후에게 교회의 수입이 국가에 속되며, 교역자, 학교, 자선에 필요한 부분을 떼어낸 다음, 나머지는 세속 군주가 차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츠빙글리와 부처는 교회 재산은 종교 공동체에 속하며 세속 군주는 그것을 관리하기만 할 뿐이라고 역설했다. 세속 군주들이 루터의 견해를 선호했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성립된 교회들은 종교개혁 이전의 헌금제도를 상당 부분 받아들였다. 이러한 현상은 국가교회로 발전하는 정도에 따라 더 심화되었다. 세속 군주들은 정부의 권위와 교회법정을 통해 교회체제를 인도할 의무가 있다고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교황에 대한 헌금, 감독에 대한 헌금은 폐지되었다. 군주들이 수도원을 폐쇄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므로 교회를 운영할 재원은 충분했다. 하지만 목회구 차원에서는 관행적인 헌금, 즉 십일조와 목회사례와 절기 헌물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지리상의 발견과 현물경제에서 화폐경제로의 변화로 인해 나타난 인플레이션으로 많은 목회자들은 심각한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개신교 교회법은 교회의 헌금을 목회구 차원에서 보유하고, 목회구의 재정을 확보하는데 특별한 관심을 두었다. 

지역 교회의 재정을 위해서는 공동헌금함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23년 라이스니히의 헌금함 규례는 루터의 자문을 받아 만들어졌고 루터의 승인을 받은 규례이다. 라이스니히 규례는 최초의 헌금함 규례로 이후의 규례의 모형이 되었으며, 개신교회가 목회구 차원에서 교회재정을 어떻게 개혁하려고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규례는 만인제사장론에 근거하여 목회구의 신도회가 공동헌금함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공동헌금함의 재산과 재원은 소득, 재산, 권리, 돈, 재화로 이루어지면, 과거에 교회재산에서 나오는 모든 수입과 신자들의 다양한 헌금과 기부금을 모두 공동헌금함에 모으도록 했다. 또한 교회에는 통이나 궤 두 개를 설치하여 치즈, 달걀, 고기 등 음식이나 물품을 받고 동전을 위한 작은 함을 한두 개 설치하도록 했다. 신자들이 교회에 모일 때마다 2명의 위원이 각 사람에게 가난한 자들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고, 이렇게 해서 얻은 헌금과 헌물을 헌금궤나 헌금함에 넣고, 음식은 매일매일 분배하고 상하지 않을 것들은 다음 주일까지 보관하였다가 나눠주도록 정했다. 

라이스니히 규례는 공동헌금함의 관리에 대해서도 상세히 규정했다. 매년 1월 13일 다음 주일에 공동츼회가 모여 공동모금함을 위해 10명의 위원을 선출하는데, 2명은 귀족으로부터, 2명은 시의원으로부터, 3명은 읍민으로부터, 3명은 농민으로부터 선출한다. 공동모금함은 교회의 가장 안전한 곳에 두되 4개의 서로 다른 자물쇠로 잠그고, 열쇠는 귀족, 시의원, 읍민, 농민 위원이 하나씩 보관한다. 위원들은 매주일 11시부터 만과 2시간 전까지 모여 회의를 열고, 원본 서류, 회의록, 회계부(물품목록 포함) 등 3가지 장부를 마련하며, 두 명의 위원을 선정하여 교회당, 다리, 목사관, 학교, 성구 보관소, 여관 등을 담당하도록 한다. 또한 이 두 명의 위원은 신자들이 교회에 모일 때마다 2개의 자루 혹은 헌금접시를 들고 가난한 자를 위한 헌금을 거두어 헌금함에 넣으며, 이 헌금함의 열쇠는 공동헌금함에 보관된다. 매 주일 10명의 위원이 모인 가운데 헌금함을열어 회계부에 기록하고 공동헌금함에 넣는다. 

라이스니히 규례에서는 이렇게 공동헌금함에 모인 헌금의 용도가 자세히 규정되었다. 이 규례는 우선 비거주자나 거지나 구걸하는 자들은 제외된다는 것을 밝힌 다음, 목회자, 교회사찰, 학교, 가난한 자들, 공동 건물, 곡물의 비축을 위해 헌금을 사용할 수 있다고 정했다. 또한 모아진 헌금이 이 모든 경비에 미치지 못하면, 모든 귀족, 시의원, 수공업자, 지주, 이 목회구의 읍과 부락에 거주하는 민중들이 자신과 아내와 자녀를 위해 매년 세금을 내서 필요한 모든 금액을 채우도록 정했다. 이 규례는 이러한 기부는 갖가지 방법으로 터무니없고 참을 수 없는 세금과 할당금을 부과하던 이전의 관행과 비교할 때 진정한 기독교인의 자유의 표현이라고 선언한다. 

마지막으로 라이스니히 규례는 1월 13일 다음 주일, 성 우르바누스의 날(5월 25일) 다음 주일, 성 미카엘의 날(9월 29일) 다음 주일, 이렇게 1년에 3번 공동의회를 가져 공동체의 협약을 낭독하고, 10명의 위원이 회의록과 회계보고를 하며 공동헌금함의 제반 사항에 대해 토의를 가지고, 마지막으로 공동헌금함이 쇠퇴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도록 결정을 내리도록 정했다. 연례보고는 1월 13일 다음 주일에 행해지며 이때 새로 10명이 위원이 선출된다. 

공동헌금함은 교회세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헌금제도로 종교개혁 초기에 나타났지만, 국가교회가 발전되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29년 라이스니히의 시찰 규례는 "모든 목회구민은 성례에 참여할 수 있으며, 12세가 되면 분기에 한 번 목회자에게 1페니를 줄 의무가 있다." 고 정했다. 이 헌금은 성례를 받을 때 주어지지 않고 분기별로 주어졌으므로 교회세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3.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국가교회의 헌금제도의 발전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의 개혁에 직접적인 자극을 주었다. 가톨릭 종교개혁의 초점이 되었던 트렌트 공의회(1545-63)는 교리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교회 재정을 포함한 목회 영역의 폐해도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공의회는 헌금제도에 근본적인 변화를 주지 않고 전통적인 교회재정을 그대로 유지했다. 특별히 면죄부, 목회사례, 십일조와 다른 부과금들은 존속되었다. 공의회에 참석한 감독들은 급진적인 입장을 따른다면 교회재정이 붕괴하리라고 염려했다. 새로운 부과금으로는 신학교헌금이 있었다. 이는 공의회 때 강력하게 요구된 사제 교육의 개선을 위해 감독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신학교 건립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으로, 모든 성직록, 교회건물, 종단, 교우회에서 거둘 수 있었다. 

교황청 재정은 르네상스 기간부터 조정을 거쳐 계속적으로 발전했다. 교황령의 세금은 주요한 재원이 되었으며, 16세기에는 4배나 증가했다. 종교적인 수입도 2배 증가했는데, 교황청의 수입원은 대부분 이탈리아에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교황청 수입의 상당 부분은 로마의 재건에 사용되었고, 가톨릭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는 군주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순수하게 종교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예를 들면 신학교 헌금이나 선교회 지원비 등은 16세기 말 교황청 지출의 1%에 불과했다. 

종교개혁이 제도적으로 정착하면서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국가교회 형태로 발전했다. 국가교회에서는 헌금 의무는 국가의 강제력으로 집행되었으며, 종교개혁 이전에 교회법으로 존재했던 헌금 관련 규정들이 국가법으로 변용되어 존속하게 되었다. 반면 박해 가운데 있거나 가톨릭 제후로부터 암묵적인 인정을 받지만 언제라도 박해가 일어날 수 있는 이른바 "십자가 밑의 교회"는 신자들의 자발적 기부에 의존하였고, 고유한 재정원리와 법을 지닌 순수한 교회법적인 기관으로 존재했다. 독일에서는 니더라인 지역의 개혁파 교회들이 이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독일의 루터교회는 제후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이 제후들은 1555년 아우그스부르크 평화협정을 계기로 국가교회의 재정ㅇ르 위헤서부터 조직했다. 개혁파 제후들도 개혁 신앙에 따라 교회를 조직할 때, 일반적인 규례들, 특히 교회 헌금과 관련된 규례에서는 루터교의 모형을 따랐다. 개혁교회는 1648년 베스트팔리아 조약을 통해 처음으로 관용을 얻어 제국의 합법적인 종교기관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16세기와 17세기의 독일의 제후국들은 루터교 교회법의 위로부터 조직된 교회에 상응하는 절대주의 국가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자율적인 법을 지니고 고유의 세금징수권을 가진 교회공동체를 인정하기 어려웠따. 

스칸디나비아에서는 군주들이 개혁을 빌미로 재산과 권력을 탈취했다. 덴마크는 1520년대 초에 이미 교회재산이 귀족에게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1530년대 말에는 감독의 재산들이 왕실에게로 들어갔으며, 수도원들이 느리게 환속되고 있었다. 왕실은 새로운 감독들과 그 가정을 위한 재원만 교회에게 돌려주었다. 스웨덴의 구스타부스 바사는 교회재산의 탈취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다. 1527년부터 1540년 사이에 왕실은 대부분의 교회재산을 전유했다. 처음 10년 동안에는 수도원과 감독 관구가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그 다음에는 목회구의 재산까지 왕실의 손에 들어갔다. 왕실은 또한 교역자에게 적절한 사례금을 지급한다는 약속 하에 십일조도 전유했다. 구스타부스의 재임 초에는 왕실의 소유지는 3.754개이며, 교회의 소유지는 14,340개였지만, 임기가 끝나면서 왕실의 소유지는 18,936개가 되었고 교회의 소유지는 하나도 없었다. 

잉글랜드에서도 정도는 다르지만 스웨덴과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잉글랜드 왕실은 2549년에서 1553년 사이에 대부분의 목회구의 헌금을 탈취했고, 1547년 참사회가 해체되었다. 하지만 재정 수입에서 결정적인 것은 수도원의 해체로, 그 이후 판매와 기증의 형태로 목회구 십일조의 상당 부분이 평신도의 손에 들어갔다. 감독들은 일부 소유와 권한을 보전할 수 있었고,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의 교회재정제도는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보수적인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튵더 시대에 성직자들은 교회재정을 전유하려는 세속 군주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고위 성직자들은 가장 수익성이 좋은 장원의 3분의 1을 상실했고, 나머지도 왕실과 지주계급에게 장기간 불리한 조건으로 임대해야 했다. 성직자의 빈곤에 대한 경고는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그 측근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했다. 

반면 개혁주의 교회는 루터교나 성공회보다는 과거의 교회재정모델과 더욱 철저하게 결별하였다. 제네바는 1536년 수도사제를 추방하고 감독의 관할권에서 독립했다. 수도원의 해체로 생긴 수입은 시의회에 들어갔고 그 후로 시의회는 새로운 교회의 목회자의 사례비를 지급했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국가교회가 될지라도 국가로부터 확고한 지원을 받기 어려웠다. 이를테면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회가 국교가 되었지만, 옛 교회의 재원을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평신도 귀족들이 이미 종교개혁 이전에 이 재원에서 수익을 얻었기 때문에 감독구를 개혁하여 목회자에게 주는 사례금을 개선하기 어려웠으며, 각 성직록의 소출의 3분의 1만 개혁교회가 사용할 수 있었다. 1573년 내전의 종식 이후에야 개혁교회는 옛 교회의 재원을 사용할 수 있었다.                                                                                           

 

 

4. 십일조 폐지와 교회세

종교개혁으로 성립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헌금제도와 교회재정 구조는 18세기 말과 19세기 초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가톨릭교회의 헌금제도는 트렌트 공의회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으며, 개신교회도 초기의 제도와 차이가 없었다. 양 교회에서는 중세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옛 헌금들, 이를테면 십일조, 목회사례, 절기헌물, 또한 목회구로부터의 자발적이면서도 의무적인 헌금이 교회재정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헌금제도와 교회재정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788년 여름 루이 16세가 삼부회 소집에 동의하고 삼부회 준비의 일환으로 <진정서>가 작성되었는데, 여기서는 십일조의 원리 자체가 공격 대상이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주로 다음 세가지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 (1) 부담의 경감 (2) 통일적인 과세에 따른 법으로 규정된 징수 (3) 교황청 유지, 교회건물 유지와 예배 비용, 가난한 자의 구제 등 일반적으로 인정된 목적에 따른 헌금 사용. 하지만 1789년 초여름에 대중적인 소요가 일어나면서, 십일조 거부와 폐지의 구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1789년 7월 추수기를 맞이하여 대다수 농민들은 어떠한 연보와 세금도 납부하지 않고 십일조도 지불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표명했다. 8월 4일 국민의회는 십일조를 포함한 모든 봉건제도를 폐기할 것을 결의했다. 8월 11일 국민의회는 모든 종류의 십일조를 폐기하는 법령을 반포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십일조의 목적은 존속되어야 한다는 점도 함께 밝혔다. 

1789년 11월 2일에는 교회와 국가의 새로운 관계가 정립되었다. 그 해 12월에 정부는 교회재산을 몰수하여 교회토지에서 탈취한 재원을 바탕으로 새로운 화폐를 발행하였고, 1790년 2월에는 수도서원을 폐지했으며, 7월에는 "성직자 기본법"을 반포하여 프랑스 교회를 재조직하였다.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에서 십일조의 궁극적인 폐지는 1790년 4월 14/20일 법령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1791년 3월 11일 시행령을 통해 실제적으로 적용되었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십일조는 철저하게 폐기되었기 때문에 왕정복고 때에도 십일조의 복원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프랑스 혁명으로 일어난 변화는 프랑스에 한정되지 않고 유럽의 다른 국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일부 지역은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여기서는 봉건적 부담의 폐기가 프랑스 법령으로 직접적으로 이루어졌다. 다른 지역도 프랑스 혁명 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1848년 이후에는 십일조가 근본적으로 약화되었다. 19세기에는 모든 유럽 국가에서 십일조가 폐지되었는데, 영국에서는 1925/1936년에야 십일조법이 폐기되었다. 

유럽의 국가들은 십일조의 폐기를 통해 일어난 교회수입의 손실을 교회세를 통해 보상했다. 십일조는 기원에 따르면 현물경제적인 토지에 대한 세금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비해 교회세는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했던 화폐경제와 산업화에 적합한 형태였다. 교회세 제도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는데, 여기서는 몇 나라의 사례만 간단히 언급하고 독일의 교회세 제도를 중점적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교회세가 의무적이며,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세를 납부하지 않으면 교회에 의해 재판에 회부된다. 교회세를 납부하지 않을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겠다는 의사를 문서로 표현하면 된다. 오스트리아의 교회세는 대략 소득의 1% 정도가 된다. 덴마크는 덴마크 국교회에 속한 모든 자가 소득의 1% 정도를 교회세로 납부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핀란드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1%-2.25%를 납부하며 교회세는 일반 세금제도와 통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 시대에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이 맺은 라테란 조약에 따라 가톨릭 성직자에게 월급을 지불했다. 1984년에는 <1000분의 8법>이 제정되어 세금납부자는 납부할 세금의 0.8%를 종교단체나 정부가 운영하는 사회복지기관에 기부할 수 있게 되었는데, 현재는 이탈리아 정부, 가톨릭교회, 왈도파, 유대인, 루터교, 안식교, 하나님의 성회 등이 이 기부금을 받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국가교회가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주가 세금을 통해 가톨릭교회, 옛 가톨릭교회, 개신교회를 지원하는데, 구체적인 시행방법은 주마다 다르다. 

이제 독일의 교회세 제도를 살펴보자. 1803년 제국회의의 결정에 따라 교회재산이 국가로 귀속되었다. 개신교 영방교회는 종교개혁 시기에 교회재산이 국가로 넘어갔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가톨릭교회에게는 타격이 컸다. 19세기 독일의 국가들은 교회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십일조의 폐지와 교회재산의 귀속에 대한 보상책을 찾았다. 화폐경제의 발전과 산업화의 진전, 또한 십일조의 폐기와 함께 목회사례의 해체와 공동체사례로의 전환 및 정교의 분리로 인한 교회재정의 감소를 해결하기 위해 현대적인 의미의 교회세가 만들어졌다. 

최초로 교회세를 법제화시킨 국가들은 립페(1827), 올덴베르크(1831), 작센-알텐부르크(1837)과 왕령 작센(1838)이다. 19세기 후반에는 헤센(1875), 뷔르템베르크(1887), 바덴(1888), 바이에른(1892)이 교회세법을 만들었고, 1905/6년에는 프로이센이 그 뒤를 이었다. 이 시기의 교회세 제도는 크게 3가지 형태로 나눠진다. (1) 지역교회세 체제는 오직 지역교회만이 세금의 권리 주체가 되는 제도이며, (2) 영방교회세 체제는 영방교회(가톨릭교회의 경우에는 관구)만이 세금의 권리주체가 될 수 있고, (3) 혼합체제는 지역교회와 영방교회가 모두 세금의 권리주체가 된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독일 헌금제도의 근본적인 형태가 형성되었다. 바이마르 국회는 급진적인 정교분리를 요구하는 흐름이 존재했으며, 타협점이 마련되었다. 1919년 바이마르 헌법은 종교단체가 일반 과세표준에 따라 영방법이 정하는 세금을 부과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국가는 교회와 공조하여 교회세를 거두며, 교회세의 상한선을 소득세와 재산세의 8% 내지 10%로 정했다. 1919년에 결정된 교회세 제도는 교회법과 국가법이 혼합된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바이마르 헌법의 교회세 조항은 국가사회주의의 반-교회적인 법률과 행정으로 변화를 겪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연방공화국 헌법에서 다시 복원되었으며, 오늘날의 교회세 제도는 바이마르 헌법에 규정된 기본 골격을 유지하고 있다. 

 

 

5. 자유교회의 자발적 기부 모델

종교개혁 이후 국가교회에서 시행된 헌금제도는 프랑스 혁명 이후 십일조의 폐지를 통해 교회세 제도로 변모했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계기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다른 신앙을 지닌 국가권력 아래에서 소수파로 존재했던 종파는 또 다른 헌금모델, 즉 자발적인 기부 모델을 발전시켰다. 이 모델은 개혁파 신앙을 가진 칼뱅주의적 교회에서 두드러지게 발전했다. 국가교회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다수파로부터 박해의 위협 가운데 소수파로 생존해야 했던 지역에서, 개혁교회는 밑에서부터, 지역공동체로부터 교회를 세웠으며, 루터교처럼 이론적이고 교리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교회생활과 교회법 차원에서도 공동체 사상을 강조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개혁교회에서는 초대교회처럼 신자들의 자발적인 기부에 의존하는 헌금모델이 발전되었다. 

종교개혁기의 일부 지역의 개혁교회처럼, 종교개혁의 산물로 국가로부터 관용되면서도 서유럽의 국가교회와 민족교회가 누리는 정치, 경제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교회를 자유교회라고 부를 수 있다. 자유교회의 이념적 뿌리는 재세례파 전통에서 유래한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 칼뱅주의의 하나님의 주권과 이중예정의 가르침, 위클리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인격적 신앙, 선민사상과 성경의 권위 등 세 흐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자유교회 전통에서는 자발적 기부모델이 계발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이러한 모델이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유교회가 특히 발전했던 지역은 영, 미권 지역인데, 잉글랜드의 자유교회의 역사는 청교도 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잉글랜드 국교회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중도의 길을 걸으려고 했으며, 이러한 국가교회의 노선에 반대하고 개혁을 철저히 시행하려고 하는 모든 집단을 통틀어 청교도라고 부른다. 잉글랜드에서는 1689년 관용령을 통해 비국교도에게 예배와 집회의 자유가 인정되기 시작했는데, 비국교도의 대표적인 집단이었던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는 후에 잉글랜드 자유교회로 알려졌다. 또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 세 교회 이외에도 퀘이커, 유니테리언파, 감리교회가 독립적인 기관으로 성장했다.

미국에서는 유럽에서 건너온 정착민과 이주민들이 이질적인 형태의 유럽 기독교를 이식하였고, 이들은 독자적인 미국교회의 전통을 만들어갔다. 정착 초기 남부에서는 영국 국교회, 뉴잉글랜드에서는 회중교회가 국교회로 발전했다. 하지만 중부에서는 초기부터 종교적 다양성이 광범하게 나타나 국교화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또한 남부와 북부에서도 국교회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출현하여 국교회 체제에 도전했다. 미국은 지리적으로 대양을 두고 유럽과 격리되었기 때문에 유럽의 국가교회가 식민지 지교회와 결속을 유지하기 어려웠으며, 노동력이 귀한 정착지 상황에서 경제적 번영에 대한 욕구가 증가하자 신앙적 차이는 종종 무시되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미국에서는 국교회를 인정하지 않고 정교분리를 생활원리로 삼는 혁명적인 진보가 일어났다. 

1760년대와 1770년에 식민지와 본국 사이의 마찰이 커지면서 결국 미국 독립전쟁(1775-1783)이 일어났고, 미국은 1776년 독립을 선언하고 1783년 파리 조약을 통해 독립을 인정받았다. 1787년에 제정된 미국헌법은 "미국에서는 어떤 공직이나 공적인 책임에 대한 자격요건으로 어떠한 종교심사도 요구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으며, 1791년 헌법의 제1수정 조항은 "의회는 종교의 국교화를 고려하거나 종교의 자유로운 실천을 금지하는 어떤 법률도 제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국가교회는 40년 후에야 실제적으로 폐기되었다. 

남부에 자리를 잡은 영국 국교회의 경우는 독립전쟁 때에 영국을 지지했기 때문에 미국이 승리하자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1779년 영국 국교회가 처음 뿌리를 내린 버지니아 주에서는 영국 국교회 성직자에 대한 사례비가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 1780년에는 비국교도 교역자들도 혼인선언을 할 수 있게 되었고 1785년에는 토마스 제퍼슨의 영향으로 종교자유법이 통과되었다. 결국 영국 국교회는 1789년 미합중국 개신교 감독교회라는 이름으로 영국 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독립적인 미국 교회를 설립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회중교회가 국가교회로 발전한 뉴잉글랜드에서는 국교회 폐지에 상당한 기간이 필요했다. 1784년에는 감리교회와 침례교회의 영향으로 비국교도 교회의 신자는 교회세를 자신의 교회에 낼 수 있도록 하는 관용령이 결의되었다. 1818년에는 침례교회, 감리교회, 유니테리언파, 만민구원파와 퀘이커파의 영향으로 어떠한 기독교 종파나 예배형태도 특혜를 누릴 수 없다는 헌법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코네티컷에서는 1818년, 뉴햄프셔에서는 1819년에 국교회가 폐지되었다. 최종적으로 메사추세츠에서도 1831년 정교분리의 원리가 확인되고 1833년 헌법이 수정되면서 회중교회는 국가교회의 지위를 상실했다. 이로써 미국에서는 가톨릭교회를 포함한 모든 교회가 실질적인 자유교회가 되었다. 

또한 유럽에서도 경건주의나 각성운동의 영향으로 국가교회에서 독립된 자유교회들이 발전했다. 친첸도르프의 모라비아 교회나 영국의 감리교회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말할 수 있다. 

이렇게 국가교회에서 자유교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교회세 모델에서 자발적 기부 모델로 헌금과 교회재정이 변용되는지, 또한 자발적 기부 모델이 어떠한 논리와 과정을 거쳐 자유교회에 장착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은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다. 이를테면 잉글랜드 청교도들은 십일조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으며, 영국 국교회의 목사가 적대적이거나 설교를 하지 않으려하고 설교할 수도 없는 교구를 위해 오후 설교자들을 파송하고 이들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했다. 또한 17세기에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예정론에 대한 논쟁을 통해 정치적인 공동체와 단절한 다음에, 공동체 구성원의 기부의 의무를 강조함으로써 재정적으로 독립적인 공동체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사상들이 자유교회 전통에서 어떻게 성립되고 신학적으로, 실천적으로 발전하며 한국 교회에까지 이어지는지를 추적하는 일은 방대하지만 의미 있는 연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다만 여기서는 근대에 이르러 기독교가 유럽과 북미를 넘어 타문화권, 타종교권으로 확대되면서 자유교회는 온 세계로 확대되었으며, 자유교회의 확대와 함께 자발적 기부의 헌금 모델도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되지 않는 모든 지역에서, 또한 기독교가 소수파로 존재하고 심지어 박해를 받는 지역에서 가능하고 적합한 모델이 되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나가는 말

 

지금까지 초대교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헌금과 교회재정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헌금제도는 징수 방법에서는 초대교회의 자발적 기부 모델, 중세 서방교회의 강제적, 봉건적 모델, 근대의 국가교회적 교회세 모델과 자유교회의 자발적 기부 모델로 변화를 거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헌금의 종류로는 초대교회에서는 맏물과 십일조를 주축으로 하여 이밖에도 서원제, 예물 등이 존재했다. 이밖에도 여럭 가지 형태의 헌금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중세교회의 십일조, 큰 십일조, 작은 십일조, 구일조, 교황의 십일조 등으로 나뉘고 이밖에도 교황이 부과하는 베드로의 은전, 서품사례, 영대비, 첫해사례, 문서세, 면제세금, 보호세, 감독이 부과하는 성당세, 교회회의세, 목회구 차원의 절기 헌물, 목회사례 등이 있었다. 교회재정과 관련되어 가장 큰 폐해 사례는 면죄부일 것이다.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개신교회에서는 교황과 관련된 세금이 제외되었고 국가교회로 발전하면서 국가가 헌금징수의 주체로 발전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통한 십일조의 폐지는 서유럽의 교회의 교회재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다양한 교회세가 발전했다. 

헌금의 용도에서는 초대교회에서는 모고히자 생활과 가난한 자 구제가 두 가지 주요한 축이었고, 교황 겔라시우스가 제시한 감독, 지역 성직자, 교회 건물과 예배 기물, 빈민 구호 등 4분법이 고전적인 분배원리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중세시대 사유교회의 등장으로 사유교회의 주인이 3분의 2를 차지하고 3분의 1을 지역 성직자에게 배분한 것은 대표적인 헌금의 남용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비록 십자군에 참여한다 할지라도 십일조를 세속군주를 지원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도 커다란 폐해였다. 

이제 과거의 역사를 토대로 오늘날 한국교회가 건전하고 투명한 교회재정을 확립하고 바르게 헌금을 사용하기 위해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1) 한국교회는 건전한 교회재정을 이루기 위해 균형 있게 헌금을 사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먼저 가난한 자의 구제가 헌금의 주요 목적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한국교회는 헌금의 용도에서 구제와 사회봉사의 비율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구제뿐만 아니라 목회자 생활비와 교회건물과 예배라는 항목도 헌금의 주요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는 겔라시우스의 원리와는 또 다른 분배원리가 필요할 것이다. 규모마다 다를 수도 있고, 항목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한국교회가 모범적으로 따라야 하며 현실성을 지닌 분배원리가 제시되고 실천되었으면 좋겠다. 

2) 헌금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시고 자발적으로 드려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가 기본적으로 강제적, 법적인 모델이 아니라 자발적 기부 모델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이러한 점이 훼손되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부들의 사상을 따른다면 십일조를 너무 율법적으로 가르칠 필요는 없다고 보인다. 오히려 모든 것을 바치라는 주님의 명령과 수입의 10분의 1이 하나의 기준이 된다는 점을 역동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교부들은 가난한 자의 구제를 최우선으로 헌금을 강조했고 실제로 그렇게 행했다. 오늘날에도 헌신과 헌금에 대한 가르침과 설교가 구제와 사회봉사와 직결될 수 있다면 설득력이 더 커지리라고 본다. 또한 오늘날에는 청지기 사상과 함께 검소와 절제를 미덕으로 하는 청빈 사상에 역점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생태계의 보전과 부의 분재,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는 청지기 사상이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재조정하여 소박하고 단순하고 작은 것에 만족하는 결단 안에 자리 잡을 때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3) 큰 교회와 작은 교회, 도시 교회와 농촌 교회의 격차는 예나 지금이나 계속되는 문제였다. 작은 교회에서도 헌금의 남용과 폐해가 일어날 수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큰 교회가 교회재정에서 바로 서는 것이 개혁의 핵심적인 문제다. 큰 교회가 큰 교회로서 지닌 사회적이고 신앙적인 책임을 깊이 인식하고 건전하고 투명한 교회재정을 위해 노력할 때, 한국교회 전체가 공신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교회적 차원에서는 미자립교회와 농촌교회 목회자의 생활비, 목회자 노후대책에 대해 보다 심각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목회자 생활비가 초대교회(신약성경도 포함)에서 처음부터 강조되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움이 컸다. 헌금에서 목회자 생활비를 중요한 항목으로 인정한다면, 거둬들인 헌금을 청지기 사상에 따라 바르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생활비를 충분히 고려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미자립교회나 작은 교회의 목회자의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다고 본다. 결국 이것은 개교회 차원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요, 목회자 생활비만이라도 교회가 서로서로 나누고 채울 수 있는 합리적인 구조와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4) 마지막으로 헌금과 교회재정의 문제는 지도자와 정책의 문제요, 이에 대해서는 계속적인 성찰과 반성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헌신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교회에서 이러한 헌신의 열정이 흐려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할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 한국교회가 가졌던 헌신의 사례를 소개하여 한국교회에서 다시 한 번 이러한 헌신의 열정이 가득 찰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을 나누며 이 글을 마치는 것이 좋겠다. 

 

이 지방에 있는 우리의 70개 교회들 중에서 조금이라도 해외 자금이 사용된 곳은 이 교회 외에 단 하나의 교회만 있을 뿐이며, 이 교회에는 비용의 3분의 1 정도를 지원하고 있다. 이 경우에는 우리의 통상적인 원칙에서 벗어난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그것도 오직 3분의 1 정도를 지원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나머지 3분의 2를 모으려고 영웅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많은 경우에 그들은 풍족한 중에 내는 것이 아니라 과부의 동전 두 개를 낸다. 특히 지난번 헌금 때는 사람들이 힘에 넘치게 헌금했다. 약정한 돈을 헌금한 후에, 사람들은 그들의 시계(이곳에서 시계는 희귀한 것이기 때문에 본국보다 훨씬 더 귀중하게 여겨진다)를 헌금했고, 젊은 여인들은 귀걸이를, 부인들은 무엇이든 가지고 있는 것을 헌금했다. 19쌍의 결혼반지를 바쳤다. 한국에서는 결혼반지들이 쌍으로 되어 있다.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많은 일꾼들이 필요하게 되자, 사람들은 자원봉사를 하여 상당한 비용을 절감하였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대의를 향한 그들의 헌신에 대한 가장 좋은 시금석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한국 '양반'이 낡은 옷을 입고 나와서 일한다면 이는 시대 변화의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 이 사람들은 지체 높은 교회의 직원들로부터 가장 낮은 새 신자에 이르기까지, 또한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흥에 겨워 먼지와 열기 속에서 일하며 이 예사롭지 않은 일을 손쉽게 하고 있다. 여성들도 이 일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남자들과 함께 일할 수 없었지만, 교회에 사용될 약 20톤의 기와가 마을 건너편 쪽에 있어서, 이 일을 시작했다. 이 여성들의 무리는 개미들이 줄을 선 것처럼 빠르게 왕복하며 20톤의 기와를 교회 부지에 다 옮겼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느 날 몇 명의 과부가 함께 모였다. 마을의 주관심사는 교회였고 그들도 물론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말했다. "그래, 우리는 힘을 다해 헌금했고, 할당된 기와를 옮겼다. 하지만 다른 여자들은 그것도 하고 또한 남편을 도와 주었다. 우리는 무언가 더 해야만 한다. 자, 회반죽에 필요한 물을 나르자." 이렇게 일은 진전되었다. 배후에 이 같은 정신이 있는데, 진전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샤록스, "선천의 '거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