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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Christianity

성경에 나타나는 헌금

 

성서에 나타나는 헌금에 대한 소고

김병모(호남신학대학교, 신약학)

출처 : 2008년 한국 개신교인의 헌금 실태 조사 및 연구 논문 자료집(바른교회아카데미)

 

I. 들어가는 말

돈의 힘은 대단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이 돈에게 부여해 준 힘은 대단하다. 오죽하면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눅 16:13)고 결고하실까! 오늘날 철저하게 상업화된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더하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교회에서도 돈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커져서 심한 경우에는 "돈이 없어서 교회에 못 다니겠다"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교회에서의 돈의 문제는 다름 아닌 직-간접적인 헌금의 문제와 직결된다. 

일반적으로 교인들은 헌금을 많이 하면 복도 많이 받고 헌금을 적게 하면 복도 적게 받는다는 통념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헌금을 가능한 한 많이 하려고 애쓴다. 복을 받으려면 최소한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는 꼭 해야 한다는,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된다는 부담감도 적잖이 갖고 있다. 심한 경우에는 은행대출금에서까지 십일조를 떼기도 한다고 한다. 이처럼 교인들에게는 헌금을 복과 저주 또는 상과 벌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 헌금을 내는 것으로 자기의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 헌금이 제대로 사용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것은 자기의 일이 아니라 교회의 일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또 헌금하고 난 후에 자기에게 남아 있는 돈은 자기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더불어 살라'는 하나님의 큰 뜻보다는 '나부터 살고 보자'는 사감의 작은 뜻이 더 먼저 이루어지게 된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교인들에게 헌금을 많이 하라고, 최소한 십일조는 꼭 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정당하게 번 소득이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신 23:18). 그저 많이 내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가르친다. 그래서인지 그 헌금의 사용에 대해서도 깊이 관여하지 못하게 한다. 교회에 낸 것으로 교인들의 할 일은 다 끝났다고, 그 사용에 대해서도 깊이 관여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서 그렇게 모아진 헌금의 대부분을 교회 건축, 유지, 확장 및 목회자에게 사용한다. 그 결과 '가난한 교인들과 이웃들의 생활고를 해결해 주고 가난한 교회들과 목회자들의 존립을 도와 주라"는 하나님의 큰 뜻보다는 '우리 교회부터 살고 보자'는 사람의 작은 뜻이 더 먼저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헌금이 무엇인지, 헌금은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지, 헌금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헌금은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헌금을 통해서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한 데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글에서 성서에 나타나는 헌금에 대한 주요 언급들을 살펴보면서 헌금과 관련된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을 성서적으로 재검토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먼저 이글에서는 편의상 '헌금'을 헌금, 헌물, 제물 등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대표 용어로 사용함을 밝힌다. 만약에 우리에게 익숙한 대로 교회의 공적 예배의 봉헌 순서 때에 드리는 것만을 헌금으로 규정한다면, 성서에서 헌금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게 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헌금'이라는 용어를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성전/교회 안에서건 밖에서건 간에 또 제사/예배와 관련되건 되지 않건 간에 하나님께 드린 것이면 다 헌금으로 본다. 또 그것이 돈이건 곡식이건 가축이건 다른 어떤 것이건 간에 하나님께 드린 것이면 다 헌금으로 본다. 또 하나님의 종이나 백성이나 다른 민족에게 준 것도 그것이 하나님의 규정/말씀/뜻에 순종해서 준 것이면 다 헌금으로 본다. 즉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하나님께 드린 것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사용한 것도 비록 그 장소, 방식, 형태, 대상, 용도 등이 서로 다르더라도 다 헌금으로 본다.

제2장과 제3장에서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헌금의 주요 유형들을 살펴보고, 제 4장에서는 그것들을 헌금의 종류, 방식, 용도, 의의를 기준으로 분류 및 정리한다. 제5장에서는 헌금의 모범적인 예로서 바울 교회들의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연보를 살펴본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우리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숙고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 몇 가지 사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II.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헌금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헌금의 주요 유형들은 다음과 같다.

 


1. 생명의 속전(출 30:11-16)

모세가 인구조사를 할 때, 20세 이상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반 세겔을 바쳐야 했다. 이 반 세겔은 '생명의 속전'이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이 반 세겔이 인구조사에 동반되는 죽음의 질병으로부터 그들의 생명을 구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생명의 속전은 부자라고 더 내거나 가난하다고 덜 내거나 할 수 없었고, 모두가 똑같이 반 세겔씩 냈다. 이 생명의 속적은 성막 봉사에 사용되었다. 관련 기록을 보면, 성소의 받침을 만드는데(출 38:25-28), 성전을 수리하는데(왕하 12:4-16; 대하 24:4-14), 성전 제사를 지내는데(느 10:32f) 사용되었다. 유대교에서는 이 생명의 속전을 성전세와 동일시했으며, 이 성전세는 예수님 당시에도 여전히 유효했다(마 17:24-27).

 


2. 첫 열매

태의 첫 열매(아들, 가축)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쳐야 했다(출 13:2). 그런데 하나님은 첫 아들은 레위인으로, 첫 가축은 레위인의 가축으로 대체할 수 있게 해 주셨다(민 3:41). 그래서 첫 아들은 은 5세겔로 대속하고, 부정한 가축의 첫 새끼도 대속했다. 하지만 소 양 염소의 새끼는 대속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야 했다. 이 태의 첫 열매는 제사장에게 주어졌다(민 18:15-18).
땅의 첫 열매(곡식, 과일)도 하나님께 바쳐야 했고, 이 땅의 첫 열매도 제사장에게 주어졌다(민 18:12f).

 


3. 십일조

십일조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는 창 14:20에 나온다. 두 번째 언급은 야곱이 하나님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지켜주시고 돌봐주시고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고 서원하는 창 28:20-22에 나온다. 그런데 이 두 경우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체적으로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아브람과 야곱에게 개인적으로 해당되는 특수한 경우이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해당되는 십일조는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의 십일조(민 18:21-24)
땅의 소산(곡식, 과일)의 십분의 일과 가축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쳐야 했다. 바치는 방법과 관련해서 살펴보면, 땅의 소산은 값의 오분의 일을 더 지불하면 무를 수 있었지만, 가축은 절대로 무를 수 없었다(레 27:30-33). 이 십분의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친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십일조'라고 불렸다. 하나님은 이 십일조를 다른 기업 없이 오직 성막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에게 그들의 '기업'으로 주셨다.

2) 레위인의 십일조(민 18:25-32)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레위인에게는 그들의 기업의 수확이었다. 그래서 그들도 그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쳐야 했다. 이 십분의 일은 '이스라엘의 십일조'의 십분의 일이기 때문에 '십일조의 십일조' 또는 레위인이 바친 것이기 때문에 '레위인의 십일조'라고 불렸다. 만약에 레위인이 이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성물인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더럽힌 죄로 죽음의 벌을 받아야 했다. 이 십일조는 제사장에게 주어졌다.

3) 잔치의 십일조(신 14:22-27)
이스라엘은 매 해 땅의 소산의 십분의 일을 예루살렘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 만약에 예루살렘까지의 길이 너무 멀고 험해서 땅의 소산을 그대로 가져갈 수 없을 때에는, 그 소산을 팔아 그 돈을 갖고 예루살렘에 가서 원하는 대로 소든 포도주든 다시 사도 됐다. 이 십분의 일은 보통 '잔치의 십일조'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이 십일조는 당사자의 가족과 이웃 레위인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즉 하나님 앞에서 함께 즐겁게 식사하는, 흥겹게 잔치하는 용도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 십일조를 행하면서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워야 했다."
앞의 이스라엘의 십일조와 이 잔치의 십일조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한 십일조가 예를 들어 예루살렘으로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상황에서 이전의 용도 대신에 새로운 용도를 갖게 됨으로써 두 용도(레위인 후원과 잔치)를 갖게 된 것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각각의 용도를 갖고 있는 두 십일조인가? 십일조는 많은 양이었을 것이므로 그 중의 일부만 잔치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레위인에게 주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대교에서는 제1십일조와 제2십일조 두 개의 십일조로 이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4) 구제의 십일조(신 14:28f; 26:12-15)
이스라엘은 매 삼 년마다 그 해 땅의 소산의 십분의 일을 각자가 살고 있는 성에 모아서 그 성에서 사는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가 배부르게 먹게 해 줘야 했다. 그래서 이 십 분의 일은 보통 '구제의 십일조'라고 부른다. 이 구제의 십일조는 바로 앞의 잔치의 십일조와 같은 십일조인 것으로 보인다. 즉 한 십일조가 첫째 해와 둘째 해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당사자의 잔치에, 셋째 해에는 각자의 성에서 어려운 이웃의 구제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것은 바로 이 구제의 십일조와 관련해서 복이 언급된다는 점이다. "그러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이 구제의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신 26:12-15에도 나온다. 특이한 것은 여기에서도 바로 이 구제의 십일조와 관련해서 복이 언급된다는 점이다. 당사자는 하나님께 '내가 그 십일조를 사사로이 먹거나 다른 데에 쓰거나 그냥 쌓아두거나 하지 않고 하나님이 명령 하신대로 어려운 이웃에게 다 주었으니까, 이스라엘 백성과 이 땅에 복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

십일조와 복을 밀접하게 연관시키는 또 다른 본문은 말 3:8-12이다. 이 본문에 의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해서 즉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지 않아서 저주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이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전의 창조에 양식이 있게 하면, 하늘의 문을 열고 그들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런데 이 십일조는 하나님의 전의 창고에 보관하는 것으로 봐서, 위의 구제의 십일조와는 다른 십일조인 것으로 보인다. 즉 이스라엘 및 레위인의 십일조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잔치 및 구제의 십일조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및 레위인의 십일조도 복과 연관되어 있다.

 


4. 5대 제사의 제물(레 1-7장)

1) 번제물
제물은 소 양 염소의 수컷 또는 비둘기 새끼였다. 당사자가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직접 잡았다. 제사장은 피는 제단에 뿌리고 제물은 전부를 제단에서 불살랐다. 그러면 죄가 용서되었다.

2) 소제물
제물은 곡식과 기름과 유향과 소금이었다. 가루로 또는 화덕에 구워서 또는 철판에 부쳐서 또는 냄비에 삶아서 드렸다. 일부는 제사장에 의해서 제단에서 불살라졌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

3) 화목제물
제물은 소 양 염소의 수컷 또는 암컷이었다. 당사자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직접 잡았다. 제사장은 피는 제단에 뿌리고 제물의 기름(내장에 덮인 기름, 내장에 붙은 기름, 두 콩팥, 그 위의 기름, 간에 덮인 꺼풀 등)은 제단에서 불살랐다.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는 제사장의 몫이었고, 나머지는 당사자의 몫이었다.(그는 감사제물인 경우에는 당일에, 서원제물이나 자원제물인 경우에는 당일과 이튿날에 다 먹어야 했다).
감사제물은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 또는 유교병과 함께 드렸다. 이것들 중에서 하나씩은 거제로 드려진 후에 제사장에게 주어졌다.

4) 속죄제물
속죄제물은 누가 죄를 지었느냐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1) 제사장의 경우 - 제물은 수송아지였다. 당사자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직접 잡았다. 제사장은 피는 손가락에 찍어 성소 휘장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는 번제단 밑에 쏟았고, 기름은 번제단에서 불살랐고, 나머지는 진영 밖 재 버리는 곳에서 모두 불살랐다.
(2) 이스라엘 회중의 경우 - 제물은 수송아지였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직접 잡았다. 제사장은 피는 손가락에 찍어 성소 휘장에 일곱 번 뿌리고 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는 번제단 밑에 쏟았고, 기름은 번제단에서 불살랐고, 나머지는 진영 밖 재 버리는 곳에서 모두 불살랐다. 제사장이 속죄하면, 죄가 용서되었다.
(3) 족장의 경우 - 제물은 숫염소였다. 당사자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직접 잡았다. 제사장은 피는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는 번제단 밑에 쏟았고, 기름은 번제단에서 불살랐다. 제사장이 속죄하면 죄가 용서되었다. 고기는 제사장의 몫이었다.
(4) 평민의 경우 - 제물은 암염소 또는 암양이었다. 당사자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직접 잡았다. 제사장은 피는 번제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는 번제단 밑에 쏟았고, 기름은 번제단에서 불살랐다. 제사장이 속죄하면, 죄가 용서 되었다. 고기는 제사장의 몫이었다.

그럴 여력이 없으면, 산비둘기 또는 집비들기 두 마리를 하나는 속죄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드렸다. 제사장은 속죄제물의 목을 비틀어 끊고 피는 제단 곁에 뿌리고 나머지는 제단 밑에 쏟았고, 번제물은 제단에서 불살랐다. 제사장이 속죄하면, 죄가 용서되었다.
이럴 여력도 없으면,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속죄제물로 드렸다. 제사장은 한 움큼을 제단에서 불살랐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

 

5) 속건제물
속건제물은 누구의 것에 죄를 지었느냐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1) 하나님의 성물의 경우 - 제물은 숫양이었다. 당사자는 성물에 그 성물의 오분의 일을 더해서 보상으로 제사장에게 주고, 제사장이 정하는 값어치의 숫양을 속건제물로 제사장에게 가져갔다. 제사장이 속죄하면, 죄가 용서되었다. 고기는 제사장의 몫이었다.
(2) 이웃의 물건의 경우 - 제물은 숫양이었다. 당사자는 물건에 그 물건의 오분의 일을 더해서 보상으로 주인에게 주고, 제사장이 정하는 값어치의 숫양을 속건제물로 제사장에게 가져갔다. 제사장이 속죄하면, 죄가 용서 되었다. 고기는 제사장의 몫이었다.

 


5. 성막/성전 건축 예물

 

1) 성막 건축 예물(출 35:4-36:7)

성막 건축에 필요한 재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바치되, 자원해서(35:5,21,22,29; 36:3) 바쳤다. 또 그 재료를 다룰 재능이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 재료로 성막과 성막에 필요한 기구를 만들었다. 

 

2) 제 1성전 건축 예물(대상 29:1-19)

다윗은 성전 건축에 필요한 재료를 힘을 다해서, 즐겁게 드렸다(2, 17절). 그의 제안에 지도자들과 백성들도 즐겁게, 자원하여, 정성껏 드렸다(6, 9, 14, 17절).

 

3) 제 2성전 건축 예물

성전 건축은 소홀히 하면서 자기의 집을 먼저 지었다가 학개에게 호된 책망을 받은 유대인들은 산에 가서 나무를 잘라다가 제 2성전 건축을 재개했다(학 1:8; 에 5:1).

 

 

III.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헌금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헌금의 주요 유형들은 다음과 같다. 

복음서를 보면, 성전세, 십일조, 성전 헌금 등이 나온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함께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셨다(마 17:24-27). 즉 성전세는 예수님 당시에도 여전히 유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작은 소득까지도 십일조를 했다. 예수님도 십일조는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다만 형식과 외형만 있고 내용과 정신은 없는 십일조 생활을 비판하시면서 내용과 정신도 있는 십일조 행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23:23; 눅 11:42; 18:12). 즉 십일조도 예수님 당시에 여전히 유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예수님은 사람들이 성전의 헌금함에 헌금을 넣는 것을 지켜보시다가 부자들의 많은 헌금보다도 가난한 과부의 적은 헌금을 더 인정해 주셨다(막 12:41-44; 눅 21:1-4). 즉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들이 성전에 나아올 때 헌금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 특별히 두드러지는 헌금은 다음의 두 경우이다. 

 

1. 예루살렘교회의 헌금(행 2:44f; 4:32-5:11)

믿는 사람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소유를 조금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것을 서로 통용했다. 집과 밭이 있는 사람은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에게 갖다 주었고, 이들은 그 돈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그 결과 그들 중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바나바는 긍정적인 사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부정적인 사례로 제시되어 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자기의 집과 밭을 의무적으로 처분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5:3f에 의하면, 아나니아는 그의 땅을 팔거나 팔지 않을 자유를, 팔았더라도 그 돈을 사도들에게 내거나 내지 않을 자유를, 내더라도 다 내거나 일부만 낼 자유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12:12을 보면, 마가 요한의 어머니는 예루살렘에 여전히 자기의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헌금은 형식상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주는 형식을 취했고, 용도상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데 사용되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2. 바울 교회들의 헌금

 

1)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연보(롬 15:25-32; 고전 16:1-4; 고후 8f; 갈 2:10)

 

바울이 갈라디아, 마게도냐, 아가야, 아시아에 세운 교회들은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연보했다. 그들은 매 주 첫날에 연보를 모았다(고전 16:2). 그들은 각자의 형편대로,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연보했다(고전 16:2; 고후 8:11f). 그들은 자원해서, 기쁘게, 힘껏 연보했다는 자세로 연보했다(고후 8:5). 그리고 나중에 바울과 교회들의 대표자들로 하여금 이 연보를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하게 했다. 이 연보는 교회들이 교회에게 주는 형식을 취했고, 앞의 경우와 똑같이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데 사용되었다. 

바울과 그의 교회들은 이 연보사역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데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고전 16:3f; 고후 8:18-23). 바울은 연보하는 교회들의 대표자들로 하여금 이 사역에 직접 참여하게 함으로써 이 사역을 둘러싸고 의혹 및 비난이 제기되지 않도록 적절한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했다. 

 

2) 빌립보교회의 바울 후원(빌 4:10-20)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 두 차례에 걸쳐서 재정적인 후원을 했고,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또 다시 재정적인 후원을 했다. 바울은 이 후원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스러운 향기이고 마음에 드는 제물'이라고 한다(18절). 본질적으로 보면, 단지 바울에게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린 것이라는 말이다. 그들의 부족을 채워주는 주체도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19절의 언급도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헌금은 교회가 개인에게 주는 즉 교회가 개인을 후원하는 형식을 취했고, 복음사역자인 바울의 필요를 채우는데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신약성서에는 개인이 개인에게 주는 형식도 나온다. 예를 들면,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수산나를 비롯한 여러 여인들이 자기의 소유로 예수님을 섬겼다(눅 8:2f). 예루살렘교회의 헌금의 경우에서처럼 사도들에게 주는 것을 헌금이라고 본다면, 이 경우에서처럼 예수님께 드리는 것도 즉 예수님의 생활을 돌봐드리는 것도 헌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원리를 조금 더 확장하면, 믿는 자의 생활을 돌봐주는 것까지도 헌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예수님은 아주 '작은 자'에게 해 준 것이 곧 당신께 해 드린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마 25:31-26).

 

 

VI. 헌금의 종류, 방식, 용도 및 의의

 

이 장에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성서에 나오는 헌금의 주요 유형들을 헌금의 종류, 방식, 용도, 의의를 기준으로 분류 및 정리한다.

 

1. 헌금의 종류

 

구약시대의 생명의 속전, 첫 열매, 이스라엘 및 레위인의 십일조, 잔치 및 구제의 십일조는 모두가 해마다 바쳐야 하는 일반적으로 의무적이고 정기적인 헌금이었다. 번제, 소제, 화목제(감사제, 서원제, 자원제), 속죄제, 속건제의 제물은 그럴 필요가 발생했을 때 각 당사자가 바치는 특수하고 비정기적인 헌금이었다. 성막, 제1성전, 제2성전 건축 예물은 이스라엘의 2,000여년의 역사 가운데 통틀어 단 세 차례 바쳐진 아주 특수하고 희귀한 헌금이었다. 

신약시대의 성전세와 십일조는 유대사회에서는 모두가 해마다 바쳐야 하는 일반적이고 의무적이고 정기적인 헌금이었다. 예루살렘교회의 헌금, 바울교회들의 헌금(예루살렘교회를 위한 연보, 빌립보교회의 바울 후원)은 그럴 필요가 생겼을 때 바친 특수하고 자발적이고 비정기적인 헌금이었다. 여인들이 예수님을 돌봐드린 것, 그리스도인들이 '작은 자'를 돌봐주는 것도 그럴 필요가 생겼을 때 바친 특수하고 자발적이고 비정기적인 헌금이었다. 

 

2. 헌금의 방식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대부분의 헌금을 성전으로 또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 및 레위인에게로 가져갔다. 그런데 구제의 십일조의 경우에는 특이하게도 각자가 살고 있는 성에 모았다.

예수님 당시에도 성전세와 십일조는 성전으로 가져갔을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교회의 헌금은 사도들에게, 바울교회들의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연보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빌립보교회의 후원은 바울에게 직접 전해졌다. 또 여인들의 돌봄도 예수님에게, 그리스도인들의 돌봄도 '작은 자'에게 직접 전해졌다. 

 

3. 헌금의 용도

 

1) 하나님 - 각종 희생저물의 피와 기름, 번제물의 전부, 소제물의 일부, 속죄제물(제사장과 회중의 경우)의 전부 등은 다 하나님께 드려졌다. 이것은 사람이 먹거나 처분할 수 없었다. 

 

2) 성막/성전 건축, 유지 및 성막/성전 제사 - 성막/성전 건축 예물, 생명의 속전 등은 성막/성전을 건축, 유지하고 성막/성전 제사를 지내는 데에 사용되었다. 

 

3) 사역자 보수 -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레위인에게, 레위인의 십일조는 제사장에게 보수로 지불되었다(민 18:31). 또 태의 첫 열매(소 양 염소의 새끼는 제외), 땅의 첫 열매, 소제물의 일부, 화목제물의 일부, 속죄제물의 일부(족장과 평민의 경우), 속건제물 등도 제사장의 몫으로 주어졌다. 신약시대의 빌립보교회의 후원은 바울에게, 여인들의 후원은 예수님에게 주어졌다. 

 

4) 잔치 - 잔치의 십일조의 대부분은 당사자에게 되돌려져서 그의 잔치에 사용되었다. 

 

5) 구제 - 구제의 십일조는 각 성에 사는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졌다. 신약시대의 예루살렘교회의 헌금과 바울교회들의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연보는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자에게 주어졌고, 그리스도인들의 돌봄의 후원은 '작은 자'에게 주어졌다. 

 

4. 헌금의 의의

 

헌금의 정신은 신구약성서를 통틀어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이 모든 물건이 다 주의 손에서 왔사오니 다 주의 것이니이다"(대상 29:14, 16)라는 다윗의 고백에 잘 담겨 있다.

헌금은 우리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중요한 수단이다. 

 

1) 우리의 생명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우리의 삶의 터전인 땅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생명의 속전과 첫 아들을 드림으로써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고백하고, 가축과 땅의 첫 열매 및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우리의 삶의 터전인 땅도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고백한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우리에게 생명과 삶을 가능하게 해 주시는 우리의 왕으로 인정하고  경외하고 감사하면서 그 분의 충성스러운 백성으로 살아가게 된다. 

2) 또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과 제사장에게 줌으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만남과 교제의 장소인 성전 및 성전제도가 제 기능을 원활하게 발휘하게 된다. 빌립보교회가 바울을 후원함으로써 바울의 복음사역이 보다 원활하게 진행되게 되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3) 또 잔치의 십일조를 당사자에게 되돌려줌으로써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삶의 풍요와 기쁨을 깊이 체험하게 된다.

4) 또 구제의 십일조를 가난한 자에게 줌으로써, 예루살렘교회에서 땅과 집을 판 돈을 가난한 성도에게 줌으로써, 바울교회들이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자에게 연보를 줌으로써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돕고 돌보는, 하나님의 민족/가족으로서 더불어 사는 삶이 간으하게 된다. 또 살다가 실수로 이런 복된 삶을 파괴하는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께 속죄제물과 속건제물을 드리믕로써 그 죄를 용서받고 이런 복된 삶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은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된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제대로 바치고 그 헌금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제대로 사용함으로써 우리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게 된다. 헌금은 이토록이나 중요한 것이다. 

 

 

V. 헌금의 모범적인 예 - 바울교회들의 연보

 

바울 교회들의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연보는 헌금에 대한 이해, 헌금의 양, 헌금하는 자세, 헌금의 관리, 헌금의 사용 등 여러 면에서 헌금의 모범적인 예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이 연보에 대한 언급은 롬 15:25-32; 고전 16:1-4; 고후 8f; 갈 2:10 등에 나오는데, 이 장에서는 그 중에서 가장 길고 중요한 본문인 고후 8f을 중심으로 이 연보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특히 헌금에 대한 이해를 더 넓고 더 깊게 확장 및 심화하고자 한다. 

 

1. 연보에 대한 이해

바울은 연보를 지칭하는 데에 여러 단어들을 사용하는데, 그 단어 하나하나가 연보의 독특한 측면을 드러내 준다. 

 

1) Diakonia(섬김)

바울은 연보를 diakonia로 표현한다(8:4; 9:1,12f; 롬 15:21). 연보는 성도들의 부족을 보충해 주는 것이다(9:12). 제공자의 넉넉한 것으로 수혜자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줘서 모두를 균등하게 하는 것이다(8:13f). 롬 15:26에서도 연보는 성도들 중의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갈 2:10에서도 연보는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2) Charis(은혜)

바울은 연보를 charis로 표현한다(8:4,6,7,19; 고전 16:3). 연보는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charis를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다. 

charis는 고후 8f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8:1,4,6,7,9,16,19; 9:8,14,15에 나온다. 그런데 모두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가지의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마게도냐교회들 또는 고린도교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라는 의미이고(8:1,9; 9:8,14),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 모으고 있는 바울교회들의 연보라는 의미이고(8:4,6,7,19), 마지막 하나는 바울이 이 일과 관련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라는 의미이다(8:16; 9:15). 또 9:11f에 나오는 eucharistia(감사)라는 관련 단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 연보로 인해서 수혜자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charis라는 한 단어가 복음과 연보와 감사 모두에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울교회들에게 복음(charis)을 주셨다. 그들은 예루살렘교회에게 연보(charis)를 전달한다. 그러면 예루살렘교회는 하나님께 감사(eucharistia)를 드리게 된다. charis는 움직이고 있다. 하나님에게서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charis는 다시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께로 되돌아간다. 그런데 그냥 내려왔다가 그냥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사 55:10f의 비 또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이 땅에 내려와서 생명의 역사를 이룬 후에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지금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형태로 내려와서 바울교회들을 구원하고, 그들의 연보의 형태로 예루살렘교회로 전달돼서 그들과 예루살렘교회를 한 공동체가 되게 하고, 그런 후에 예루살렘교회의 감사의 형태로 다시 올라가는 것이다. 

이렇게 연보는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charis를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다. 즉 연보는 하나님의 charis를 확장하는 것이다. 

 

3) koinonia(교제, 공동체)

바울은 연보를 koinonia로 표현한다(8:4; 롬 15:26). 연보는 제공자와 수혜자 간에 koinonia가 이루어지게 한다. 9:13f을 보면, 이 연보로 인해서 예루살렘교회는 바울교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것과 "그들 및 모든 자들과 koinonia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고,그 결과 하나님께 영광을돌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그리고 이젠 그들도 바울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또 사모할 것이라고 한다.이렇게 연보는 제공자와 수혜자 간에 koinonia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4) eulogia(축복)

바울은 연보를 eulogia로 표현한다(9:5). 연보는 수혜자를 축복하는 마음으로 주는 축복의 선물이다. 아까워하면서 억지로 주는 것이 아니라 축복하면서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이렇게 연보는 하나님의 복이 수혜자에게 전달되게 하는 eulogia이다.

 

5) leitourgia(제사, 예배)

바울은 연보를 leitourgia로 표현한다(9:12). 이 단어는 유대 배경에서는 성전제사와 회당예배 등에 사용되었다. 즉 연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charis)가 고린도교회에게 흘러넘쳤다(9:8). 따라서 고린도교회는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려야 한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자기가 직접 그렇게 하는 대신에 예루살렘교회에게 연보(chris)를 전해 주고, 그 연보를 전해 받은 예루살렘교회가(고린도교회를 대신해서) 하나님꼐 감사(eucharistia)와 영광을 드리게 된다(9:11,13). 그렇게 되면 charis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사를 통해서 다시 하나님께로 흘러넘치게 된다(9:12). 이렇게 연보는 제공자가 수혜자를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것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2. 연보의 양, 자세, 관리 및 사용

 

1) 양

특정한 양을 기준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고전 16:2은 "수입에 따라"(소유에 따라, 가능한 만큼) 하라고 한다. 고후 8:11f도 "있는 대로"(가지고 있는 것에서) 하라고 한다. 빚을 내서 할 필요는 없다. 또는 빚을 내서 하지는 말라는 말이다(8:13f). 그럼 갖고 있는 것 중에서는 얼마나 해야 할까? 고후 9:7은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자기가 원하는 만큼) 하라고 한다. 이 문맥에서 이 말의 의미는 가능한 한 많이 하라는 것이다(9:5-10). 마게도냐교회들은 힘에 부칠 정도로 했다(8:3).

 

2) 자세 

연보는 단순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8:2; 9:11), 자원하여(8:3), 힘껏(8:3), 예물 뿐만 아니라 자기를 드리는 마음으로(8:5), 주께 드리는 마음으로(8:5), 사랑으로(8:8,24), 원해서(8:10; 9:2), 축복하면서(9:5f), 자기가 결정해서(9:7) 해야 한다. 또 연보에 대한 이해에서 살펴본 것처럼,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해 주는 마음으로, 한 공동체로서 서로 교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복을 비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8:9)는 권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자기를 희생하는 자세로 해야 한다. 

 

3) 관리

바울은 연보를 모으고 보관하고 전달하는 데에도 즉 연보를 관리하는 데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이 관련되면 이런저런 말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물론 사람들 앞에서도 조심했다(8:21). 그는 이 연보를 혼자서 관리하지 않았다. 또 자기 측근들과만 의논하지도 않았다. 그는 연보를 하는 교회들로 하여금 그들이 신뢰하는 그들의 대표자들을 뽑아서 그들도 이 일에 직접 동참하게 했다(8:19).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 안팎에서 제기될 수 있는 의혹과 비방을 차단하고자 했다(8:20). 고전 16:3f을 보면, 바울은 심지어 이 연보의 주체를 자기가 아니라 당사자 교회들로 여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그는 연보는 교회들의 대표자들이 가지고 가고, 만약에 그럴 필요가 있다면 자기도 그들과 함께 가겠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바울은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연보하는 당사자들도 그들의 대표자들을 통하여 연보 관리에 직접, 주체적으로 참여하게 했다는 것이다. 

 

4) 사용

이 연보는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서 모은 것이다(갈 2:10; 롬 15:26; 고전 16:3). 그리고 모아진 것 전부를 원래의 계획대로 고스란히 예루살렘교회에게 전달했다(롬 15:25; cf 행 24:17). 사적으로 또는 공적으로라도 다른 용도에는 조금도 사용되지 않았다(고후 12:16-18).

 

 

VI. 나가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성서에 나타나는 헌금의 주요 유형들을 살펴보고, 그것들을 헌금의 종류, 방식, 용도, 의의를 기준으로 분류 및 정리하고, 또 헌금의 모범적인 예로서 바울교회들의 연보를 살펴보았다. 이 성서적인 헌금 이해를 토대로 이 마지막 장에서는 우리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숙고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 몇 가지 사안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로, 성서적인 헌금 이해를 기준으로 우리의 헌금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한다. 교인도 그래야 하고 교회도 그래야 한다. 헌금은 내가 더 많은 복을 받는 수단도 아니고 나를 더 잘 봐 달라는 뇌물도 아니다. 헌금은 우리를 잘 돌봐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분을 섬기고 사랑하는 방편인 동시에 우리와 더불어 사는 이웃에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돌보고 사랑하는 방편이다. 이 헌금을 통해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은 내 개인의 작은 바람 또는 유익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 모두를 자비롭게 돌보시려는 하나님의 큰 바람이고 우리 공동체 모두의 유익이다. 이렇게 헌금은 하나님을 섬기고 종교제도(예배당 및 목회자)가 제 기능을 발휘하게 하고 가난한 자를 도와줌으로써 나를 포함한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수단이다. 내 헌금을 통해서 이 하나님의 뜻이 조금이라도 더 실현되면, 바로 그 헌금 때문에 하나님은 나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 모두에게 그만큼 더 많은 복을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헌금을 기본적으로 개인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둘째로, '생명의 속전' 유형의 헌금의 도입 여부를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헌금은 내가 살아있는 것에 대한, 하나님이 내 생명을 지켜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헌금이다. 이 헌금을 냄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호흡과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임을 해마다 새롭게 깨닫고 고백하고 감사하면서, 우리의 호흡과 삶을 하나님 앞에서 더 긍정하고 더 아끼고 더 사랑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생명경시의 풍조가 만얀한 이 시대에서도 우리의 생명을 아주 소중하게 여기며 최선을 다해서 돌보게 될 것이다. 

또 이 '생명의 속전'은 가난하다고 덜 내는 것도 아니고 부자라고 더 내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다 똑같이 내는 것이다. 이 헌금을 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모두를 똑같이 받으심을, 따라서 가난한 자든 부유한 자든 똑같이 소중한 존재임을,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근본적으로 동등함을 해마다 되새기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단지 재산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그 사람의 능력, 가치, 인격, 신앙을 판단하는 철저하게 맘몬주의화된 우리의 왜곡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는 데에 적잖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헌금의 근거와 양은 율법적으로가 아니라 복음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구약성서의 십일조 규정에 근거해서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아니면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재물 또는 헌금에 관한 가르침에 근거해서 새로운 의미의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 구약성서의 율법을 의식법과 도덕법으로 구분하고 의식법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완성되었다고 보는 일반적인 관점에 의하면, 십일조 규정은 이미 완성된 의식법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 헌금의 근거는 복음적으로도 충분히 뒷받침될 수 있다. 

또 우리는 어느 정도나 헌금을 해야 하는가? 소득의 십분의 일이면 되는가? 예수님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고 묻는 관리에게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눅 18:22)고 대답하셨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 관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에게도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또 예루살렘교회의 모습도 "믿는 무리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로 묘사되고 있다. 그렇다. 우리의 헌금의 양은 십분의 일이라는 단순 산술 수치를 훨씬 능가한다. 

 

넷째로, 헌금을 균형 있게 사용해야 한다. 즉, '성전과 제사장'에게 사용하는 것 못지않게 '잔치와 구제'에도 사용해야 한다. 대부분의 교회의 경우에는 헌금 사용이 예배당, 예배, 목회자에게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다. 그래서 '잔치 및 구제의 십일조'가 사용되던 그런 용도로는 즉 헌금자가 하나님 앞에서 가족들과 더불어 감사와 기쁨의 잔치를 하거나 헌금자가 가지가 살고 있는 성에서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에게 나누어 주던 그런 용도로는 거의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만약에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이 제1십일조(이스라엘과 레위인의 십일조)와 제2십일조(잔치와 구제의 십일조)를 드렸다면, 그들은 전체 소득의 십분의 일을 전적으로 잔치와 구제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런 잔치는 절대로 불필요한 낭비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이 주신 풍성한 삶을 온 몸으로 느끼는 가운데 그 분을 더욱 신뢰하게 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또 이런 구제도 절대로 하면 좋고 안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다. 구제는 하나님이 한 공동체의 가난한 자들을 돌보시는 수단이다. 그래서 구제가 제대로 실행되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더 이상 진짜 공동체로 존립할 수 없게 된다. 특히 이런 구제의 용도는 개인은 개인주의에, 교회는 개교회주의에 깊이 빠져 있어서 지역교회공동체도 교단공동체도 한국교회공동체도 공동체로서의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한국교회에게 큰 도전이 되어야 한다. 

 

다섯째로, 헌금을 교회로 집중시키는 방식에 대해서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모든 헌금은 교회에 내야 한다' 또는 '교회에 내는 것만이 헌금이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면, 교인들은 교회에 내고 난 나머지는 즉 십분의 구는 헌금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써도, 나를 위해서 써도 된다는 유혹을 받게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부를 즉 십분의 십 전부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 지극히 성서적이지 않은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성서에서 성전에, 제사장에게, 레위인에게, 가난한 자에게, 예루살렘교회에게, 바울에게, '작은 자'에게 준 것 모두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드린 헌금이라면, 우리의 경우에도 그렇지 않을까?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도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아닐까? 설령 이런 헌금 방식 때문에 교회에 재정적인 어려움이 생기게 되더라도, 우리는 교인들로 하여금 '십분의 일'만 하나님께 드리는 부분적인 삶이 아니라 '십분의 십'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전체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을 더 우선시해야 하지 않을까?

 

헌금은 참으로 유익한 것이다. 나 자신과 우리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모두에게 아주 유익한 것이다. 헌금을 함으로써 나 자신은 재물의 마수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가운데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게 된다. 또 헌금을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이고, 우리의 삶의 터전인 교회체제(예배당, 예배, 목회자)를 유지하고, 우리의 교회 공동체의 가난한 교우들을 돌보게 된다. 성서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가 헌금을 제대로 하고 그 헌금을 제대로 사용하면, 우리 모두를 하나님 앞과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한 가족으로 행복하게 살게 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 땅에서도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 그런 놀라운 일이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하루 속히 이루어지게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