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GOODWILL CHURCH/Christianity

이슬람 바로알기 #1

1. 무슬림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까?

 

1. 우리의 이웃으로 다가오는 무슬림

 

이슬람과 무슬림이란 말의 정의가 아주 다양하다. 이집트에서 아랍 혁명이 일어난 뒤 동일한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들이 다른 무슬림들이 믿는 이슬람이 진짜가 아니라고 했고 요르단의 이슬람학 교수는 오늘날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그대로 잘 지켜 행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한국에서 만나는 무슬림들 중에는 온건한 무슬림도 있고 과격한 무슬림도 있다. 수염을 기른 무슬림 모두가 과격한 무슬림이 아니지만 대체로 이슬람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무슬림들이고 그들 중 일부가 과격한데 특히 지하드를 하는 살라피 무슬림들은 고지식하고 꽉 막혀 있다.

 

이슬람은 610년 아랍인 무함마드가 시작한 종교이고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유대교와 기독교를 완성시킨 종교라고 믿는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하늘로부터 내려 받았다는 꾸란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무함마드 역시 성경의 예언자가 아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슬람에 대한 연구가 일천하다보니 정확성이 결여된 정보들이 너무 많이 퍼졌고 이를 올바로 바로 잡으려는 시도를 하지만 시일이 오래 걸리는 것이다.

이슬람이 7세기에 태동하였고 이슬람은 주변의 유대교와 기독교 및 지역 관습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한 아랍인의 종교였으나 정복사업을 통하여 한때는 아바리아 반도는 물론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스페인, 그리고 일부 인도 대륙까지 퍼져가면서 세계 종교로 변모해 갔다. 사실 많은 책들이 이슬람의 확산이 빠르다고는 하나 오늘날 아랍 국가에서 수년간 인구 통계를 실시하지 못한 나라들이 많아 무슬림의 인구 통계는 정확성이 없다. 그러나 한류의 확산, 한국의 무역 증대와 산유국으로부터 원유도입 그리고 이슬람국가와의 교류 확대는 자연스럽게 무슬림의 한국입국을 증가시켜 주고 있고 일부 무슬림은 한국의 체류비자를 얻으려고 한국 여성과 혼인을 하고 있다. 아프간 사태 이후 주한 아랍 대사들을 중심으로 한국-아랍소사이어티 재단이 발족되었고 이제는 이런 공식적인 재단을 통하여 한국 사회 안에서 이슬람과 이슬람 문화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고 아랍의 대학생들과 한국의 대학생들 간의 상호 교류를 주선하였다. 그동안 한국 정부의 대 중동 및 이슬람국가와의 외교는 한국의 원유수입과 한국기업의 건설수주 및 한국 상품의 수출과 맞물려 있었다. 그러다보니 한국 정부와 고위급 인사들이 이슬람에 대한 바른 인식과 주권 외교를 펼치기 보다는 이슬람 편향의 자세를 갖기도 했다.

 

우리의 이슬람과의 관계는 국제 사회라는 틀 속에서 우리가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슬람은 정치와 종교, 사회와 문화, 국제 외교 등 다양한 영역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을 단순히 종교로만 보게 되면 우리의 이슬람에 대한 해법은 단편적인 처방에 머물고 말 것이다. 사실 이슬람은 메시지와 가치(사회적인 윤리)와 율법(형법 등)이 어우러져 있다. 이슬람 율법(샤리아)은 교리들을 포함하고 인간과 알라간의 관계에 의한 제도(기도, 금식, 구빈 등),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에 의한 제도(혼인, 이혼, 매매 등), 인간과 사회간의 관계에 의한 제도(지하드, 슈라, 윤리, 형벌)를 포함한다. 지하드 역시 이슬람 율법과 관련되어 있고 일부 학자들은 지하드를 사회 종교적 운동이라고 했다. 지하드를 주창한 이집트의 사이드 꾸뜹은 알라의 율법을 세우는데 장애가 되는 기관이나 국가를 제거하는 것도 지하드라고 했다. 그는 꾸란에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는 말이 있다고 하면서 비이슬람적인 사회를 무너뜨리는 것은 이 꾸란 구절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은 사이드 꾸뜹의 영향을 받은 무슬림들이 많고 또 이슬람을 정치에 이용하는 정치적 이슬람이 아랍 이슬람 세계에 대유행이다.

 

 

2. 무슬림과 관계를 열고 친해지기

 

우리와 종교와 문화가 전혀 다른 무슬림과는 관계를 열기가 그리 쉽지 않다. 더구나 그들에게 신뢰를 가지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무슬림과의 관계를 맺으려면 우선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한다. 무슬림들 중에는 세상을 향해 닫힌 사고를 갖는 사람들도 있다. 무슬림과의 관계를 쌓기 위해서는 먼저 다리를 놓을 수 있는 것을 찾아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서로 간의 공통된 인간적인 관심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인간이 갖는 공통된 무제들이 있따. 또 이슬람과 꾸란의 "알라"와 기독교와 성경의 "하나님"이 그 개념에서 서로 차이가 나지만 이들 간의 공통된 부분(창조주, 초월한 분 등)은 무슬림과 대화를 나누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꾸란과 이슬람이 성경과 기독교에서 어느 부분에서 서로 차이가 나는지를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점에서 그들과 차이가 나는지를 알아야 그들이 복음을 더 정확하고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들 중 일부는 꾸란에 나오는 "이싸"를 예수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무슬림을 처음 접하는 기독교인들은 혼동하기 쉽다. 무슬림들이 꾸란에도 예수가 있다는 말을 일부 기독교인들도 그 말을 그대로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꾸란과 성경에서 사용되는 어휘가 유사하거나 동일하더라도 그 개념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실 무슬림이 믿는 꾸란의 "이싸"는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와 여러 면에서 서로 다르다. 꾸란에서 이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인간 피조물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하늘로 올리어 갔다고 한다. 이슬람의 전승에 따르면 이싸가 다시 와서 십자가를 다 부수고 돼지를 죽이며 이싸가 이슬람을 전파한다고 말한다. 꾸란의 이싸는 성육신하지 않았고 인간과 그의 본성이 같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꾸란에서 말하는 "이싸"가 성경의 예수와 유사한 점이 있지만 서로 다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무슬림과 기독교인 간에 "루흐" 즉 영에 대한 개념에서도 서로 차이가 난다.

 

무슬림은 알라가 인간과 동물에게 루흐를 주어서 생명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일부 무슬림들은 태아가 120일이 되면 태아에게 루흐가 들어가므로 그 때부터 낙태는 안된다고 했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인간과 동물이 죽으면 루흐는 몸에서 떠난다고 믿는다. 무슬림들의 루흐에 대한 인식을 보면 나프스(혼)와 같은 말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슬림들은 알라를 루흐라고 하지 않는다. 이슬람에서 "루흐"는 "혼"이나 (지브릴) 천사를 가리키지만 아랍어 성경에서 "루흐"는 "영spirit"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경은 인간의 영은 하나님에 의하여 만들어졌고 하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가르친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영이 거듭나므로 우리의 삶이 달라진다.

 

2007년에 우드베리와 슈빈, 마크스가 '기독교인이 된 무슬림' 700여명에게 실시한 연구에서,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한 원인들 중 첫째는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고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원인으로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하늘의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intimacy)를 갖는 것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했다고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러나고 우리 자신이 각자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을 때 전도가 일어난다. 한국인들이 개신교보다는 가톨릭을 더 많이 신뢰한다고 한다. 미국의 일부 기독교인들도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사회적인 필요와 영적 필요를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느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아랍인 교회를 갔더니 육적인 기독교인이 많았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기독교인들의 돌봄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예수를 믿기 전 10년동안 이슬람에 대한 질문들이 많았다고 한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면 10명 중 8명은 1년 안에 이슬람으로 되돌아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도 있지만 자신이 속한 가족과 사회, 배우자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혼자 먹고 사는 일이 간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슬림들은 자신의 문화를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무슬림이 교회에 나오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을 양육하고 제자 훈련을 해야 그들이 다시는 이슬람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이 성경대로 산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헌신되고 주를 위하여 충성하는 모습이 무슬림 개종자에게 보여야 한다.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어려서부터 반기독교적인 정서에서 살아왔고 기독교에 대한 변증적인 지식을 배웠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편견이 많다. 더구나 이슬람 사회가 지금은 타크피르(상대를 카피르(알라를 믿지 않거나 이슬람의 율법을 어긴 자)로 단죄함) 문화에 휩싸여 있어서 이슬람에 대하여 잘못 말했을 때 이슬람 사회의 지탄이 크고 또 일부 이슬람 국가에서는 만일 그가 다른 종교로 개종하면 자신이 속한 가족과 공동체를 떠나서 아내와 이혼을 당하고 자녀들을 만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에 섣불리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으려 한다. 그럼에도 지금은 이슬람 국가에서 꿈에서 예수님이 교회에 가라고 해서 스스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는 사람이 있고 교회 홈페이지에다가 자신이 이슬람을 버리고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반적으로 무슬림과의 전도는 교제가 어느 정도 이뤄진 다음에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이런 경우 전도자는 대부분 자신이 기독교인인 것을 밝힌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 전도가 먼저 일어나고 제자 훈련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고 또 무슬림이 직접 교회나 기독교인에게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 교회에 찾아온 무슬림을 주일 대예배로 인도하기 보다는 소 예배실을 사용하여 얼마 동안 무슬림들이 교회에 적응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좋다. 국내에서 디아스포라 예배는 그 형식이 기존 예배와 큰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무슬림이 처음 교회에 발을 디뎠을 때 교회는 다음과 같은 자료들이 비치되어 있으면 좋다. (1) 무슬림의 문화에 익숙한 내용과 관련된 성경의 메시지(가령 누가 복음 15장 탕자의 이야기는 이슬람의 문화와 유사한 내용이 많다) (2) 무슬림의 세계관과 밀접하게 관련된 성경 본문 읽기(무슬림들에게 거부감이 적은 누가복음의 구절들이나 구약의 잠언과 찬세기 구절 등) (3) 이슬람의 신앙과 차이가 나는 본질적인 문제를 다룬 자료 등이다.

 

무슬림과의 사역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애(compassion)가 필요하다. 히브리어 헤세드는 선함과 친절이라는 말인데 인간의 헤세드는 (1) 남에게 호의와 은택을 베푸는 친절(삼상 20:15), (2) 낮고 비천한 자, 궁핍한 자 그리고 불쌍한 자에게 베푸는 친절과 자비(잠언 20:28), (3) 하나님에 대한 사랑(렘 2:2, 호 6:4) 등의 의미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헤세드는 하나님이 피조물의 필요에 자신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나님이 베푸는 친절과 인자이기 때문에 (1) 적들과 불화로부터 구해주는 인자하심(창 19:19), (2) 죄로부터 구속해주는 인자하심(미 7:20), (3) 하나님의 친절(민 14:18), (4) 친절의 행위들과 자비들(창 32:11) 등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슬림과의 만남에서도 하나님의 인애(헤세드)를 잊지 말아야 하고 그들의 사회적인 필요를 채워주고 그들과 복음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무슬림과의 만남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지한다.

 

 

3. 성경을 가르치기

 

무슬림에 대한 전도는 성육신적이고 수용자 중심어야 한다. 복음을 듣게 될 무슬림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갖고 있는 문화와 세계관, 사고방식을 무슬림들에게 강요하지 않으려면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하고 무슬림의 용어들에 익숙해져야 한다. 전도된 무슬림을 양육하려면 그가 이전에 이해하는 개념과 어휘들을 사용해 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무슬림이 이해하는 개념과 성경이 가르치는 개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먼저 알아 놓아야 한다. 가령 아랍어 비르birr라는 말은 아랍어 성경에서는 의(righteousness)라는 의미이지만 이슬람에서는 재물이나 유익한 것, 즐거움과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의미이다.

 

무슬림과의 만남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는 좀 더 겸손한 태도를 갖고 무슬림의 말에는 우리가 인내하는 태도를 갖는다. 이슬람 초기부터 기독교인들은 적절하게 무슬림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성경을 서구인들의 신학으로 전할 때 무슬림들은 서구적인 성경 해석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예를 들면 이삭과 이스마엘을 각각 유대인과 무슬림으로 대입시킨 후 이스마엘은 저주받았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슬림 전도에 도움이 안 되었다. 무슬림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이스마엘(꾸란에는 '이스마일'이라고 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하나는 이슬람이 기독교, 유대교와 더불어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것을 강조하는 경우이다. 이런 시각은 종교 간의 공통점을 통하여 대화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으나 성경의 이스마엘과 꾸란의 이스마일이 서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이슬람에 대한 동일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콥트 정교회와 개신교가 구약보다는 신약에서 더 큰 차이를 보이고 가톨릭이 이슬람과 더 많은 대화를 했다.

 

무슬림 사이에서도 꾸란에 대한 해석이 달랐다. 7세기 꾸란이 내려온 뒤 8세기의 사회 역사적인 상황context과 오늘날 무슬림들의 필요와 현대적인 관심사를 고려하면서 꾸란 텍스트를 주서갛자는 좀 더 융통성 있는 컨텍스트 중심의 주석 방식을 택하는 무슬림들이 있다. 이들은 꾸란의 의미를 무슬림의 삶과 어떻게 관련시키느냐가 주된 관심사였다. 매일 매일 실제 삶에 적용하고 다른 시기, 환경, 특히 현대 시대의 필요와 관심과 연결된 주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무슬림 주석가와 법학자들은 윤리적 율법적 내용을 주석할 때 그리고 꾸란의 특정한 법적 판단이 우주적으로 적용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결정할 때 오직 언어적 기준만을 의존했다.

 

그런데 꾸란이 내려온 당시에 주어진 법적 판단은 사회적 역사적 컨텍스트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늘날과 관련되지 않거나 오늘날 그런 법률적 판단(ruling)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꾸란의 윤리적-율법적 내용에 대한 해석에서 무슬림들 사이에 다음 세 가지 접근 방법이 나타났다.

 

(1) 텍스트 중심(엄격한 문자주의와 율법주의적인 접근)

(2) 준 텍스트

(3) 컨텍스트 중심(인간 이성에 의한 해석)

 

위와 같은 분류는 꾸란 주석가들이 다음 두 가지를 어느 정도로 의존하느냐 따라 결정된다. 그 하나는 텍스트의 의미를 결정하기 위하여 언어적 규준에만 의존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오늘의 현대적인 컨텍스트는 물론 꾸란의 역사적 사회적 컨텍스트를 고려하자는 것이다. 텍스트 중심의 무슬림은 텍스트를 엄격하게 따른다고 주장하고 텍스트에 대한 문자적 접근을 채택한다. 텍스트 중심의 무슬림들은 현대적인 필요를 도외시하였고 다만 무슬림들을 인도하는 것은 꾸란이라고 했다. 이들은 꾸란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꾸란에서 남자가 4명의 여자와 혼인할 수 있다고 말하면 그 텍스트가 계시된 사회 역사적인 컨텍스트를 고려할 필요 없이, 영원히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왜 꾸란이 7세기 메카에서 4명의 부인과 혼인하는 것을 허용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텍스트 중심의 무슬림들로는 오늘날 전통주의자traditionalist와 살라피들에게서 볼 수 있다.

 

준 텍스트 중심의 무슬림들은 사회 역사적인 컨텍스트를 무시한다는 점에서는 텍스트 중심의 무슬림들과 같으나 자주 변증적인 담화에서 다소 현대적인 말로 윤리적 법적 내용을 한 묶음으로 포장해버린다. 이들은 대개 현대 신부흥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인데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 인도아대륙의 자마이트 이슬라미 그리고 모더니스트들이 여기에 속한다.

 

컨텍스트 중심의 무슬림들은 꾸란의 윤리적 법적 내용의 사회적 역사적 컨텍스트를 강조하고 이에 따른 주석을 한다. 그들은 꾸란의 윤리적인 내용이 계시되고 해석되고 적용되는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경제적 컨텍스트에 비추어서 이해하자고 주장한다. 그리고 윤리적 법적 컨텍스트에서 어느 것이 변화가능하고 어느 것이 변화가 불가능한지 결정하는데 현대 무슬림 학자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자유를 부여했다. 컨텍스트 중심의 무슬림드로는 파즈룰 라흐만Fazlur Rahman과 같은 신 모더니스트 그리고 이즈 티하드(개인의 법적 판단)를 옹호하는 자 등 소위 진보적인 무슬림들이고 더 일반적으로는 오늘날 리버럴Liberal 무슬림들이 여기에 속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이해와 해서이 성경에 부합되는지를 먼저 살피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다. 특히 아랍 기독교인들의 공동체가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지도 잘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탈 서구 신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우리가 이해하는 시학과 그와 관련된 개념들이 이슬람 신학과 어떤 차이가 있고 그들의 세계관과 문화 인식이 우리와 어느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무슬림과의 만남은 추상적인 교리보다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성경에 계시된 그리스도의 인격에 더 관심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인격, 행하신 일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가능하면 추상적인 논리는 피하고 비유, 스토리, 예화를 사용하고 '이야기'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자녀를 못 낳는 부부의 이야기'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이야기'는 무슬림들의 문화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서 무슬림과 나누기에 아주 좋다.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인 사가랴와 아론의 자손인 엘리사벳이 둘 다 제사장 가문(누가복음 1:5)인데 제사장 가문은 정결과 깨끗함의 상징이었고 명예스런 가문이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자녀가 없는 것은 이스라엘의 수치(창 16:4, 11:29-32, 30:1,23)이었다. 창세기 30장 23절에서 라헬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자녀를 통하여 구원의 때까지 생명을 이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자녀를 못 낳으면 멸시당하고 부끄러움을 당했다. 창세기에는 하갈이 여주인을 멸시한 이야기도 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창 16:4). 누가복음에서 엘리사벳은 자신의 수태가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생각했다. 수태 전에는 부끄러움을 당한 비천한 여자엿으나 수태 후에는 하나님이 그녀의 부끄러움을 없애 주셨다(눅 1:25)고 했다. 엘리사벳은 그녀의 부끄러움을 없애시려고 하나님께서 자녀를 갖게 하셨다고 고백했다. 또한 누가복음 15:11-32은 참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잘 알려주는 본문이다. 이 성경 본문은 무슬림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체로 되어있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의 진수가 들어있다. 무슬림들이 싫어하는 돼지와 무슬림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족에 대한 충성, 명예(체면)에 대한 내용들도 들어있다.

 

무슬림들은 아버지가 상속하시기 전에 자녀들이 아버지 재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아버지에게 불명예와 수치로 여겼다.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가버려 아버지의 체면이 손상되었다. 그런데 체면이 손상된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누가복음 15:20). 글너데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결론을 열어두고 있다. 그 결론의 하나로서 우리는 무슬림에게 만일 네가 큰 아들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으냐? 만일 이 이야기속이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에 어떻게 반응하겠느냐? 고 물을 수 있다. 이처럼 누가(Luke)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소통시키는데 명예-수치 세계관을 사용하고 있다. 무슬림과 의사솥오에서 우리가 수치와 명예 세계관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수치-명예가 무슬림들의 주요 세계관이라는 사실이고 민속 무슬림들에게는 두려움-능력 세계관이 더 많이 연관되어 있다.

 

 

4. 무슬림과 다리 놓기

 

무슬림과의 교제 그리고 전도에는 반드시 무슬림과 이슬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무슬림과 이슬람은 서로 떼어 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슬림들이 이슬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꾸란 주석가 이븐 카시르는 이슬람교를 알라와 함께한 종교라고 하면서 (1) 기본적으로 알라의 한 분 되심을 인정하고 진지한 헌신으로 행동하는 것 (2) 부차적으로 무함마드 커뮤니티에 연루되어 알라가 전해준 규범이라고 정의했다. 이들의 이슬람에 대한 정의를 보면 개인으로서 알라에게 헌신하는 무슬림과 무함마드 커뮤니티에 속한 무슬림 두 가지로 나뉘는데 이슬람에 대한 접근에서도 우리는 개인으로서의 무슬림과 커뮤니티 속의 무슬림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아랍혁명이 일어난 아랍 국가에서는 이슬람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슬람의 율법이 무엇이냐를 두고 무슬림들끼리 대립하고 있다. 이집트의 경우, 이슬람 종교를 정치에 이용하는 무슬림형제단들이 집권한 후 일반 이집트 무슬림들은 무슬림 형제단이 말하는 '이슬람'을 믿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또 다른 이슬람주의 그룹인 살라피 무슬림들은 무슬림형제단의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회개해서 알라에게 되돌아오고 그들이 잘못을 고치지 않는 한 무슬림 형제단과의 화해는 잇을 수 없다고 말했다. 둘째, 무슬림들이 말하는 내용이 이슬랄믱 교리, 역사, 오늘의 현실과 맞는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정통 무슬림들은 꾸란이 창조되지 않았고 무함마드가 문맹이며 하늘에 있던 모경을 지브릴 천사가 무함마드에게 내려 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꾸란이 무함마드에 의하여 낭송되었을 때 아랍어나 아람어 등 인가의 언어를 사용하였고 무함마드의 극히 사적인 문제들도 꾸란에 나오고 있어서 꾸란이 내려올 때 무함마드는 그저 타자기 역할을 했다는 무슬림의 주장은 틀렸다는 것이다. 또 꾸란이 무함마드 사후에 기록되었는데 당시에는 15가 자음으로 28개 소리를 표기했으므로 그 부정확성이 분명히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무슬림들이 갖고 있는 꾸란은 무함마드 사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무함마드 당시의 꾸란은 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고 있다. 무함마드가 낭송한 것을 들었던 아랍인들에 의하여 꾸란이 나중에 기록으로 남겨졌기 때문에 아랍인들의 기억력에 의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꾸란 구절들의 초기 내용은 뼈나 나무에 적힌 것들이어서 어느 부분이 손실되었는지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알라의 말이 책이 된 것이 꾸란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우리가 무슬림을 이해하는데 세 가지 통로가 있는데 하나는 꾸란이고 그 다음은 하디스이고 그 다음은 무슬림의 속담이다. 일부 서구 선교사들은 꾸란을 다리로 하여 복음을 전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꾸란 구절을 인용하여 대화를 시작하면 무슬림들은 그 기독교인이 꾸란에 더 많은 신뢰를 두는 것으로 오해한다. 구란 본래의 정확한 의미를 찾기보다 꾸란을 대화를 위한 다리로 성급하게 사용했던 내부자(insider) 접근 방식도 잠시 성경의 진리를 타협하여 단기적인 유익을 줄 수 있을지 모르나 이것은 권장할만한 방법이 아니다. 한 대 낙타 전도법이 좋다고 했으나 그 낙타 전도법은 전도를 위한 내용이 아니고 전도하기 전 단계에 사용될 내용이고 또 해당 꾸란 구절의 의미가 정확하게 해석되지 못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꾸란은 반기독교적이고 꾸란에는 예수가 없고 기독론도 없다. 내부자 운동의 과도한 상황화가 일부 이슬람 의례를 따르로 '이싸 모스크'를 만들어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내부자의 꾸란 이해는 잘못된 꾸란 이해에 근거하므로 혹시 꾸란을 아랍어로 읽을 수 있는 무슬림이라면 금방 그 허점을 알게 된다.

 

결국 성경에 적합한 선교학적 해석학을 개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성경이 우리의 선교를 알게 해주고 선교를 만들어주고 선교를 지도해 주고 비평해 주어야 한다. 또 우리의 선교는 특정 시간에 특정 상황에서 교회와 특정 사람들을 통하여 시행되므로 선교가 우리의 성경 읽기를 강화해주는 것이다. 이 말은 성경을 선교학적으로 읽고 또 우리의 선교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꾸란을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믿고 성경은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어로 번역된 꾸란 번역서들 중에서 제대로 정확하게 번역된 책은 아직 없다. 물론 한국의 교회 안에서 꾸란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한 때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국내 교회에 증폭되었을 때 무슬림을 강사로 세우거나 무슬림들의 글을 교인들에게 읽힌 적이 있었으나 교회가 이런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이슬람이 이슬람의 참 모습이 아닐때가 많고 그들이 진실을 덮어 버리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들 중의 하나는 꾸란을 해석하는 기독교인들의 관점이 달랐다. 그 중 하나는 꾸란을 성경의 연장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꾸란의 본래 의미를 찾아내서 꾸란의 주제와 신학적 담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증하는 사람들이다. 만일 성경의 연장 선상에서 꾸란의 구절들을 해석하려고 하면 꾸란 본래의 의미를 찾아내기 어렵다. 꾸란을 깊이 연구하면 꾸란이 성경과 연속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꾸란이 성경을 부인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할 때 꾸란에 너무 의존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선교사들은 꾸란보다는 성경의 메시지를 직접 선포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성경의 복음은 선포되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입증되어야 한다. 이슬람과 꾸란을 전공하는 기독교 학자들이 꾸란과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을 뽑아 서로 유사한 점과 다른 점을 연구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토라에서 꾸란으로 옮겨갔다는 이론을 내세우면 꾸란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깊이 연구할 수 없다고 했다. 혹자는꾸란에 나오는 유수프의 이야기는 무함마드 시대 때 토라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나 그와 유사한 이야기가 전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의 스토리가 꾸란에서 달라진 것은 서로 별개의 내용들이 함께 짜 맞춰지기도 하고 제외되기도 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들려지거나 읽혀질 경우 오직 한 가지 문맥(context)이 아닐 수 있었다. 꾸란은 유수프의 이야기를 성경의 요셉 이야기의 다른 버전(version)으로 보는 것은 문화적인 결정이다. 꾸란의 유수프와 성경의 요셉 이야기에서 수많은 형식상의 근친을 발견했음에도 이들 간에는 주제와 신학적, 윤리적인 면에서 동일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무슬림들을 이해하려면 무함마드의 말과 행동이 들어 있는 하디스hadith나 그의 생애를 기록한 시라sira가 도움이 된다. 오늘날 "무함마드가 그렇게 말했다"고 하는 내용들의 일부는 부카리와 같은 하디스 학자들이 모아 놓은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슬람에서 구두 전승은 종교학자나 그의 가족들, 친구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것이었고 많은 무슬림들의 목표는 이런 전승을 그들 삶의 구석구석에 실천해 보려고 했다. 그래서 극보수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처럼 턱수염도 기르고 여성들은 얼굴을 가리는 니깝을 쓰도록 강요바당ㅆ다. 하디스에 나오는 내용 중에 "알라와 마지막 날을 믿는 자라면 선한 말을 하게 하거나 침묵하게 하라. 알라와 마지막 날을 믿는 자라면 그의 이웃을 존대하라. 알라와 마지막 날을 믿는 자라면 그의 손님을 존대하라."고 했다. 여기서 이웃을 존경하고 높이는 것은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말이고 또, 손님을 존경하고 높인다는 것은 자신의 얼굴에 웃음을 띠고 손님에게 공손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런 하디스는 무슬림들이 남에게 공손하게 서로 말하라는 것을 강조하지만 결구 무함마드의 말이므로 성경의 메시지는 아니다. 하디스의 내용을 통하여 무슬림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슬람이 알라와 무함마드의 종교라는 것이다. 무함마드를 빼 놓고 이슬람을 말할 수 없다. 꾸란과 하디스를 사용하여 무슬림과 대화를 하려면 아랍어를 적어도 10여년 이상 배워야 하고 꾸란 주석의 역사와 꾸란에 대한 언어적, 신학적, 수사학적 이해를 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더구나 이런 정도의 학문을 국내에서 체계적으로 배우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이집트의 문화적 특징을 알려고 하면 파라오 문화, 기독교 문화, 이슬람 문화 이 세 가지를 살펴보아야 하지만 만일 이집트인들의 가치관을 알려고 하면 그들의 민간 속담을 알아야 한다. 아랍 속담은 무슬림들 사이에 내려오는 것으로서 아랍 국가마다 유사한 속담과 나라마다 다른 속담들이 있다. 속담은 오랜 세월 무슬림의 삶이 우러나오는 경험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므로 항상 숨은 이야기가 들어있고 교훈과 도덕이 담겨있다. 무슬림과 대화에서 그들의 속담을 알면 그 의미 전달이 배가가 된다. 무슬림들이 알고 있는 속담 속에 들어 있는 공유된 경험을 통하여 우리의 대화에 속도감을 더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꾸란과 하디스 등을 알려면 '꾸란의 이해'와 '한국인과 소통을 위한 아랍 문화' 그리고 '아랍의 종교'등의 책을 읽어보면 좋고 이슬람의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는 '이슬람 문명의 이해'가 좋다.

그동안 무슬림들 속에서 사역하는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학은 공부했으나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 신학을 배운 사람이 많지 않았고 성경을 주해하는 실력은 강할 수 있으나 아랍 무슬림 상황 속에서 성경의 메시지를 전하는 능력과 관심은 매우 적었다.

 

 

5. 기도와 성령의 인도하심

 

무슬림에 대한 전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꼽으라 하면 그것은 기도이다. 그런데 무슬림들이 믿는 '알라'는 영이 아니다. 무슬림들에게 기도는 의식적인 기도이고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영적인 대화와 다르다. 무슬림들은 무하마드의 행위 모범을 따라가는 것에 관심을 가지나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행하심에 따르고 그를 닮아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기에 무슬림들에게 전도하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한다. 무슬림을 위하여 기도할 때 (1) 하나님이 그들을 가까이 이끄시도록(요 6:44) (2) 그들의 마음이 복음의 좋은 토양이 되도록(눅 8:15) (3) 그들이 복음을 듣도록(행 28:28) (4) 하나님이 무슬림들 사이에 일할 일꾼을 세우시도록(마 9:36-38)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슬림에게 전도하려는 사람은 그와 같이 기도할 기도의 동역자를 필요로 한다. 한편, 무슬림이 말하는 "믿음"은 구원의 믿음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구원받는 믿음saving faith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있다. 그러나 이슬람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있지 않다. 우리가 이런 구원받는 믿음을 가졌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 복음을 전해야 한다. 무슬림들에게 알마시흐는 이싸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나 아랍어 성경에서 알마시흐(메시아)는 구세주로서 왕이요 예언자요 제사장이다. 무슬림들이 사용하는 "알마시흐"와 아랍인 기독교인이 사용하는 "알마시흐"는 어휘는 같으나 그 개념이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꾸란과 성경에 나오는 유사한 어휘들이 복음을 실어 나르는 접촉점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으나 이들 간의 차이를 정확히 모르면 완벽하게 복음을 전달하기 어렵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복음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의 충만함을 느끼고 그리스도를 구주로서 주님으로서 신뢰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이슬람 법학자 알샤피이는 믿음에 대한 정의를 마음으로 승인하고 입으로 공개적인 고백을 하며 종교적인 의무를 준수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슬람 신학자 알아쉬아리는 믿음을 말과 행함으로 구분하였다.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믿음으로 이슬람의 믿음을 바라보면 이슬람은 종교적인 의무나 행위를 믿음의 구성요소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 다섯 번 기도하는 무슬림들에게는 기독교인들이 자주 기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고 '신실한 신앙인'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기독교인들은 성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나 무슬림은 성령으로 예배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슬림 주변에 살고 있는 아랍 기독교인들은 무슬림들의 영향을 받아 "영"과 "성령"에 대한 이해가 다소 불안정한 경우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무슬림을 향한 기도와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무슬림과의 대화에서는 "예/아니오"와 같이 단답형 질문보다는 무슬림에게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 더 낫다. 바울은 구원의 믿음을 그리스도를 믿고 헌신하는 것(행 16:31, 골 2:5) 혹은 하나님을 믿고 헌신하는 것(롬 4:24, 살전 1:8) 이라고 했다. 바울은 믿음을 진리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정서적인 동의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의지적인 결단이라고 이해하고 그 증거로서 사랑(고전 13:2, 갈 5:6)과 순종(롬 1:5, 16:26), 선행(살전 1:3, 딛 2:14, 3:8) 등이 생겨난다고 했다. 구원의 믿음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행하심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슬림들에게 그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 하나님의 것을 더 많이 이해하게 하고 기독교인에게 주신 기업의 풍성함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그들에게 생기도록 우리가 기도하자(에베소서 1:18).

 

사실 무슬림에게 믿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이야기는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나의 삶이 어떻게 변화 받았는지'를 무슬림과 나누는 "나 자신의 간증"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렇다면, 무슬림을 대상으로 한 전도의 원리는 무엇인가? 첫째, 얕은 곳에서 수영하라. 이슬람 종교와 문화에 가장 많이 물들어 있는 무슬림에게 외국인이 전도하는 것은 그다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낮은 수위의 수영장에서 수영하듯, 세속적인 무슬림이나 이슬람 율법을 강조하지 않는 무슬림에게 다가가 전도하는 것이 이슬람에 광신적인 사람보다 더 낫다. 둘째, 낚싯대 뿐만 아니라 그물로 고기를 잡아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슬림들과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은 오직 깊은 관계 전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정을 쌓는 것이 개종이나 회심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무슬림은 개인보다는 커뮤니티 중심이라는 것을 알면, 그들에 대한 접근에서도 개인 전도는 물론 커뮤니티 전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이슬람 커뮤니티를 바라보고 사역의 기회를 찾아 그물을 던질 필요가 있다. 즉, 전체를 보고 씨를 넓게 뿌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정 전도법에 따르다보면 소수의 사람을 만날 수 있으나 무슬림 가족이나 커뮤니티 전채를 대상으로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번에 사역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무슬림 한 사람이 전도를 통하여 주님께 돌아오기도 하지만 씨를 넓게 뿌리면 천 명 중 몇 명은 복음에 적극 반응한다. 이런 예로써 가령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모바일(SMS 성경구절 보내기)과 인터넷을 통한 선교(SNS 외)를 들 수 있다. 셋째, 전도자를 세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아라.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아랍인을 지도자로 세우는데 훈련을 계속하는 것이고 또 무슬림이었다가 예수를 믿게 된 개종자를 통하여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그러려면 최소한 그들과 자주 만나도록 계획하고, 그가 그리스도 제자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다른 그룹과도 네트워크를 만들어주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게 한다.

 

2011년 과거 무슬림이었다가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된 73명에 대한 예수님의 부활, 신성, 성육신에 대하여 설문조사 결과(Mofid Wasef, 2011), 꾸란이나 아랍 기독교인들의 책보다 성경이 무슬림이 개종하는데 가장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앞으로 무슬림 개종을 위한 자료라면 그것이 성경적으로 정확한지 확인해 보아야 하고 또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자료이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계에서 사용하는 이슬람에 대한 자료들이 이슬람 세계의 사실과 현실에 맞는 내용인지 그리고 서구에서 만들어진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이슬람을 잘 모르는 번역자의 오류들을 찾아 수정하는 작업들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무슬림이 쓴 이슬람 서적들이 완벽하다고 할 수 없고 교회가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으니 한국교회는 성도들이 이슬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돕는 자료들을 만들고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고 제자로 양육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자료들을 담아내야 한다. 지금은 동역과 협력이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야 하고 그 동역의 바탕에는 각자의 은사들을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슬람교 바로알고 전도하기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세계선교부 이슬람대책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