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제의 말씀에 이어서 계속해서 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놋’ 이라는 땅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주의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을 떠난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이루는 가문은 어떻게 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7-18절의 말씀입니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가인이 여호와 하나님의 앞을 떠나서 살아가는데, 아들도 낳고 성도 쌓고 후손들도 계속 잘 태어나고, 뭔가 큰 어려움이 없이 잘 살아갑니다.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죠.
그런데 여기서 이 흐름을 깨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라멕이라는 사람입니다.
19절-22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라멕은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이 라멕이라는 사람에게 자녀들이 태어나는데 보통 사람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야발이라는 사람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즉 지금의 축산업을 하는 사람들의 시조가 되는 사람입니다.
유발이라는 사람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음악가들의 시조가 되는 사람이죠.
그리고 두발가인이라는 사람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즉, 대장장이의 시조가 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만 본다면 이 가인의 가문은 매우 훌륭한 가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23절부터 뭔가 분위기가 좀 달라집니다.
23-24절의 말씀입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가인의 후손 중에 라멕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고 아내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인을 저지른 이유가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그 사람을 죽이면 됩니까? 안됩니까? 당연히 안 됩니다.
그런데 라멕은 자기의 분노와 혈기로 상대방을 죽였습니다.
어제 우리가 함께 살펴봤던 가인과 매우 비슷하지요?
내가 분하고 억울할 때에 조심하고 죄를 잘 다스려야 하는데 라멕은 가인과 똑같이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죄가 원하는대로 감정적으로 행동을 했고 결국 상대방을 죽이게 된 것이죠.
그런데 라멕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자기 멋대로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원래 가인에게 이 이야기를 하신 분은 누구시죠? 하나님이십니다.
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선고받자 가인이 하나님께 긍휼을 구했고, 하나님이 가인을 보호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내용이죠.
그런데 지금 이 말은 누가 라멕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아닙니다. 바로 라멕 자신입니다.
라멕 자신이 스스로 ‘나를 건드리는 자는 벌을 칠십 칠배나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마라!’라고 아주 거칠고 거만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보고 일컫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안하무인입니다.
자기 말고는 눈에 뵈는 게 없는 그런 교만한 사람이지요.
자 그렇다면, 라멕이 이렇게까지 죄악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16절의 말씀에서 나온 것처럼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자신의 가정을 세웠고 자신의 가문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죄악이 라멕의 시대에 이르러 더욱 커졌고 시간이 흘러 노아의 시대에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거대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쩔 수 없이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실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홍수 심판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사람을 이렇게 심판하시는게 말이 되냐? 그렇게 사랑하신다고 하시더니 이건 너무하신 것이 아니냐?
사랑 안하시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또 다르게 생각을 해보면 하나님이 자신이 만드신,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 세상과 사람을 심판하시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사랑하시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심판을 하실 정도면 얼마나 이 세상의 죄악이 가득했다는 뜻일까요?
실로 노아의 시대에 하늘에서 내렸던 비는 하나님의 아픔과 슬픔의 눈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죄와 심판의 시작점이 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여호와 하나님의 앞을 떠나서 살았기 때문이죠.
반대로 오늘 본문의 뒷부분에 보시면 가인의 가문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가문이 나옵니다.
바로 셋이라는 사람의 가문입니다.
25-26절의 말씀입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아벨 대신에 셋이라는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 셋은 어떤 사람인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노아라는 사람의 선조가 되는 사람으로 에노스라는 사람의 아버지입니다.
구체적으로 이 셋이라는 사람이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셋과 에노스로 인하여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았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요.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5장의 말씀을 보시면요, 이 셋의 가문의 족보가 나오는데, 가인의 족보와 같이 화려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조상이니, 무엇을 하는 사람의 조상이니 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고 누가 몇 세를 살고 누구를 낳고 죽었더라, 몇 세를 살고 누구를 낳고 죽었더라, 뭐 이런 내용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지요.
다만 에녹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라는 기록 정도가 특별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인의 가문은 이 세상에서의 성공, 이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고 인정받는 것이 삶의 중요한 목표였다면 셋의 가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삶의 중요한 목표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가문이 더 훌륭한 가문일까요? 당연히 셋의 가문입니다.
이 세상이 우리를 인정해 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 주시는 것이 중요하지요.
우리가 수요일마다 성경개관 강의하고 있습니다.
이번주 지난주에 사무엘상하를 공부했고 이번주에 열왕기상하를 공부했습니다.
우리 한글 성경에서는 여호수아부터 에스더까지의 책을 역사서로 구분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를 역사서라고 구분하지 않고 전기 예언서라고 구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언서로 구분하고 있는 책들을 후기 예언서라고 구분합니다.
왜 유대인들은 역사서라고 하지 않고 굳이 예언서라고 할까요?
이 책들이 그냥 일반적인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중심으로 예언자적인 관점에서 기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쉽게 설명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이라는 왕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아합 왕은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잘 다스린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잘못 다스린 사람이었을까요?
우리가 일반적인 세상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 아합 왕은 그리 잘못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합 왕 때에 이스라엘은 많은 나라들을 점령했고 또한 다른 나라들로부터 조공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합 왕 때에 이스라엘 나라는 부강했습니다.
북이스라엘에 여로보암 2세라는 왕도 있었는데요, 이 여로보암 2세의 시대에도 이스라엘은 영토가 많이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세상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 여로보암 2세도 그리 잘못한 왕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훌륭한 왕이었지요.
그런데 예언자적인 관점으로 기록된 성경 열왕기상하서에서는 이 왕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이들이 영토를 얼마나 확장하고 얼마나 많은 나라들을 점령했는지는 하나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이들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잘못된 길을 걸어간 왕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 평가를 하시면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좋은 평가를 한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가인과 셋의 가문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인의 가문이 셋의 가문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보이고 훌륭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그 모든 일들을 이루었다면 그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셋의 가문처럼 세상이 보기에는 화려하지 않고 큰 족적을 남긴 것 같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면 그 사람은, 그리고 그 가문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훌륭한 가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인정을 받기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후손들이 누구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세상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앞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명문 가문을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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