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어로 보면
“εγω ειμι η αναστασις και η ζωη”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살 수 있고,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이죠.
즉,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 말이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에게 생명의 주관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서 ‘내가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존재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유대인들에게 이 예수는 이단이요 신성모독자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복음 1:1에서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은 이단도 아니고 신성모독자도 아니고 바로 너희가 믿고 섬기는 그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이렇게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까? 네! 맞는 말이죠.
오늘은 이 부활에 대해서 함께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크게 두 가지 종류의 부활이 나옵니다.
하나는 불완전한 부활이구요 하나는 완전한 부활입니다.
불완전한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나지만 또다시 죽음을 맞이하는 부활입니다.
이를 완전한 부활과 구분한다면 소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 완전한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난 후 완전히 죽음에서 자유로워지는 부활입니다. 다시 죽지 않는 부활이죠.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부활의 대표적인 예가 오늘 본문의 말씀에 등장하는 나사로이고 완전한 부활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먼저 불완전한 부활에 대해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사로와 그의 누이인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매우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살았던 동네의 이름은 ‘베다니’라는 곳인데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3km 지점 정도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자주 나사로의 집에 방문을 하시고 신세를 지기도 하셨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나사로의 집에 방문하면 마리아는 그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기느라 분주했지요.
베다니는 히브리어로는 ‘베트-아니’인데 이는 ‘가난한 자의 집’, 혹은 ‘고뇌 자의 집’이란 뜻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어떤 동네인지 아시겠지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살았던 동네입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문을 들으셨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사로의 병을 고치러 가신 것이 아니라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계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은 이후에야 비로소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빨리 안 가시고 이틀을 더 머무셨을까요? 왜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셨을까요?
예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당시의 사람들과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니까 바로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달려 나와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죠. 요한복음 11장 21절입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빨리 오셔서 우리 오라버니의 병을 고쳐주셨더라면 우리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텐데!”라는 원망이 섞인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 안에는 예수님이 병을 치료할 수는 있어도 죽은 사람은 살리지 못한다라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11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러자 또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11장 24절입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갑자기 왜 마지막 날 부활의 때가 등장하는가? 마르다는 바리새파적인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바리새파 사람들은 마지막 때의 부활과 천사와 영혼의 존재를 믿었지만 사두개파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마르다는 이렇게 유대적인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능력이 지금 당장 자신의 눈 앞에서 나타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마르다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요한복음 11:25-2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마지막 날에도 너희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겠지만 지금 내가 생명의 능력으로 너희 오라비인 나사로를 살려주겠다!” 라는 말이죠.
예수님이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했지만 마르다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사로 무덤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할 때에도 마르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11장 3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 이미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해서 냄새가 납니다! 죽은 것이 확실하니 돌을 옮기는 그런 헛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자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던지 이렇게까지 말씀하십니다.
11장 4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내가 한 말을 좀 믿어라!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시고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라고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그러자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이고 수건을 얼굴에 싼 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진짜로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만 보고 마르다가 참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마르다는 매우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도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을 할 정도의 사람입니다. 거의 베드로급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요.
다만, 한 가지, 이 대목에서 실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한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불가능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 사람들이 살아날 것이다!라는 바리새적인 신학 지식, 그리고 이미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하여 생명이 완전히 끊어졌다는 생물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의 능력을 한계지은 것이죠. 아니, 아마도 자신의 지식을 뛰어넘는 이 부분을 생각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많은 신학적 지식을 듣고 보고 배웁니다.
신앙의 연수가 쌓여가고 신학적 지식이 늘어갈수록 우리는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나의 지식 안에 가두어버리죠.
하나님의 능력을 나의 지식으로 제한해 버립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 분이라는 말은 A라는 상황에서 항상 B로 행동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우리를 향한 자비와 사랑 등 하나님의 성품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항상 어떤 상황에서 똑같이 행동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A라는 똑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이 때로는 B로 행동하실 수도 있고 때로는 C로 행동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며 우리를 향한 사랑과 자비하심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내 생각으로 제한하지 말고 항상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A라는 상황에서 나에게 B로 응답하셨던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는 C로 응답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판단과 행동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때로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길로 나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자,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마르다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방법으로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것은 불완전한 부활 즉 소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아난 나사로는 다시 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부활, 완전한 부활은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부활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후에 다시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 그런 부활이죠.
이에 대해서 매우 잘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 바로 고린도전서 15장 51-54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우리는 마지막 나팔이 울리는 순간에 홀연히 다 변화됩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부활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몸은 썩고 죽는 몸입니다. 이 몸이 마지막 나팔이 울리는 순간 썩지 아니할 몸, 죽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부활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마지막 나팔은 뭘까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요한에게 계시를 보여주십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알려주신다고 하시면서 먼저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 두루마리의 봉인들을 하나씩 떼시는데요, 이 봉인이 하나씩 떼어질 때마다 특정한 사건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첫 번째 인을 떼니까 흰 말과 그것을 탄 자가 등장하는데 그가 활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합니다.
두 번째 인을 떼니까 붉은 말과 그것을 탄 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땅에서 평화를 제하고 서로를 죽이게 합니다.
세 번째 인을 떼니까 검은 말과 그것을 탄 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손에 저울을 가지고 있는데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극심한 기근을 의미하는 것이죠.
네 번째 인을 떼니까 청황색 말과 그것을 탄 자가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사망이고 음부가 그 뒤를 따르는데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생명 있는 것들을 죽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니까 순교자의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께 자신들의 피를 갚아 달라고 탄원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잠시 동안 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섯째 인을 떼니까 큰 지진이 나고 해가 검어지고 달이 온통 피 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집니다.
그리고 일곱째 인을 떼니,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들고 등장합니다.
첫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습니다.
두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졌습니다.
세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물의 삼분의 일이 쓴 물이 되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네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렇게 됩니다.
다섯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무저갱을 열어 그 구멍에서 큰 화덕의 연기 같은 연기가 올라와 해와 공기가 그 구멍의 연기로 말미암아 어두워지며, 황충이 연기 가운데로부터 땅 위로 나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괴롭힙니다.
여섯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된 네 천사가 놓임을 받아 사람 삼분의 일을 죽입니다.
이제 몇 번째 나팔이죠? 일곱 번째 나팔, 즉 마지막 나팔입니다.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나님의 비밀이 성취되어 사람들이 홀연히 다 변화되어 더 이상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 전 마지막 때에 우리에게 이루어질 일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거 아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부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부활합니다.
요한복음 5장29절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즉, 더 이상 썩지 않고 죽지 않는 부활이 이루어지고 난 이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은 더 이상 썩지 않고 죽지 않는 몸을 가지고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죽지 않는 몸으로 영원히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초대교회에서 부활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했던 가장 중요한 교회의 중심 메시지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이 만났기 때문에 교회가 세워졌고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은 주일이 아니라 토요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릴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안식일 다음 날인 주일에 부활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을 완성하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초대교회 때부터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에 함께 모여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우리도 주일에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죠.
우리 교회는 주로 1년을 주기로 하는 절기를 지킵니다.
부활절이라는 절기가 있는데요, 전통적으로 우리는 이 부활절을 춘분 후 만월이 지난 바로 다음 주일로 지킵니다.
음력이죠. 그래서 매년 부활절의 날짜가 조금씩 바뀝니다.
우리는 부활절을 맞이하기 전에 사순절이라는 절기를 보냅니다.
이 사순절은 40일 동안 지키는 절기인데 원래 초기에는 부활절에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훈련을 받는 기간이었습니다.
세례를 받기에 가장 좋은 날은 부활절이죠. 따라서 초기 교회에서는 부활절에 세례를 주었고 그 전에 세례를 위한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사순절에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교육과 훈련을 받았고 다른 교인들도 이에 동참하며 함께 금식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쁨으로 부활절에 세례를 행하였습니다.
이처럼 초기 사순절은 세례와 매우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에 유아세례를 받았고 성인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순절의 초점이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참회하고 이에 동참하는 의미로 조금씩 변화되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주신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따라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그런 문화가 사순절 기간에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참회와 회개로 끝나는 절기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서로를 사랑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절기로 사순절을 지키면 참 좋겠지요?
이러한 사순절 절기는 40일 동안 지키는데요, 7주간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죠? 7주간이면 49일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40일이 될까요?
먼저 사순절은 월요일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재의 수요일이라고 하는 수요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2일이 빠져서 47일이 되지요.
그리고 7주간 중에서 주일은 다 뺍니다. 그러면 7일이 빠져서 딱 40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주일은 왜 뺄까요?
1년 주기로 부활주일은 한 번이지만, 사실 매 주일이 작은 부활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기뻐하고 축하하는 날이지 슬퍼하거나 참회하는 날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일은 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순절에서도 주일을 제외할 만큼 초대교회부터 항상 교회의 중심은 예수님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의 부활이 미래적으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한다는 사실 외에 지금 현재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요,
먼저 첫 번째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도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라고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아니,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아라!”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은 사람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죽음에 매여 계실 수 없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며 예수님께서는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셨다!”
이렇게 증언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사람들이 또 묻습니다.
“아니,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죽임을 당하셨는가?”
그러면 제자들이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다. 한 사람 아담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죄가 들어왔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완전한 제물로 단번에 하나님께 드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설명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시작으로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이 어떤 존재이신지,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게 해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님은 우리와 가까이 있지 않은, 그저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기만 하시는 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사실은 완전한 권세와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권세와 능력으로 지금도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죠.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닥칠 때에 이 사실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지?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이런 경험들 다들 있으시잖아요?
그런데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지금도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에 의심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초기 기독교는 로마에 의해서 엄청난 박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1차 박해는 로마의 네로 황제라는 사람에 의해서 발생했는데, 로마에 발생한 대 화제를 기독교인들의 소행으로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래서 이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도들 대부분이 이 때에 순교를 하게 되지요.
이렇게 매우 힘겨운 박해가 겨우 지나갔는데 또 A.D.90년경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또다시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사람들의 공포는 더욱 극심했습니다.
왜요? 이미 1차 박해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저희 때만 해도 학창시절에 매를 맞았습니다. 어떤 때에는 여러 명이 매를 맞는 경우가 있었지요. 그런데 매를 처음 맞는 사람이 더 공포스러울까요? 아니면 뒤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이 더 공포스러울까요?
당연히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매를 맞고 픽픽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계속 증폭되는 것이죠.
기독교인들이 처음 네로에 의해 박해를 받을 때에는 박해가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죠.
그런데 또다시 그런 박해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시작부터 너무 겁에 질려버렸습니다.
그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기록한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무섭고 두려운 책이 아니라 힘과 용기를 주는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요한이 기록했는데요, 당시 사도요한은 복음을 전하다가 밧모 섬이라는 곳에 유배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사도요한에게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 환상 중에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시며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시면서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흰 양털 같은 머리와 털을 하시고 불꽃 같은 눈을 하고 계셨으며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으며 오른손에는 일곱 별이 있고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 일곱 금 촛대는 무엇일까요?
당시 소아시아 지역에 있었던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 손에 있는 일곱 별은 무엇일까요?
일곱 교회의 사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시며 일곱 별을 오른 손에 쥐고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교회와 성도들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 1:17-20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나는 살아 있다! 그리고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내가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라구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너희의 눈에 보이는 그 로마의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아니다! 전에 죽었었지만 지금은 부활해서 살아 있는 내가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으며 일곱 교회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을 보살피고 있다!
이런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요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만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세상의 어떤 왕이나 대통령이나 권력자나 기업가나 강대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예전에 제가 사역을 했던 청년부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여름이 되어서 해외로 비전트립을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떤 청년이 너무 가고싶어 하는 거에요.
그런데 결단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이유가 회사 휴가 날짜가 안 맞을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청년부에서 비전트립을 떠나려고 하는 날짜는 7월 말인데, 회사 휴가는 늘 8월 첫째주에 있었다는 것이죠.
그 회사는 개인적으로 휴가를 내는 것이 아니라 회사에서 정한 날짜에 한번에 다 쉬도록 되어 있더라구요.
그래서 자기가 비전트립을 가려면 연차를 붙여서 써야 하는데, 바로 다음 주가 휴가니까 이게 너무 마음에 부담이 큰 거에요.
그래서 일단 함께 기도하자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얼마 후에 이 청년이 찾아와서 자기가 좀 눈치가 보이더라도 휴가 전주에 쉬겠다고 회사에 이야기를 하겠다고 결단을 했더라구요.
그리고 자기가 팀장도 하고싶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잘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채워주실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회사에서 휴가 계획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너무 놀라지 마세요.
그 청년이 회사를 꽤 오래 다녔는데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해에만 휴가를 자율적으로 사용하라고 결정이 된 거에요.
왜 그랬는지 그 청년도 모르고 회사 사람들도 모르고 제가 보기에는 사장도 몰랐을 거에요.
그런데 저는 알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해에 제가 또 그 청년에게 물어봤어요.
올해는 휴가가 어떻게 되었냐?
그런데 그 이전과 똑같이 8월 초에 모두 함께 쉰다고 하더라구요.
참 신기하죠?
예수님을 믿으면요, 이렇게 짜릿하고 스펙터클한 일들이 가끔 일어납니다.
그런데 만약 휴가가 그렇게 바뀌지 않았다고 해도 예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지금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 세상의 왕은,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바로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신앙고백이었으며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실, 그리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나의 삶과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나는 살아있는 자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내가 가졌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다”
그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예수님과 끝까지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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