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우리가 가진 네 개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다양한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각 복음서들이 묘사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초점이 조금씩 다르죠.
그 중에서 오늘 함께 읽은 마태복음은 특별히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복음서인데, 그들의 약속된 메시아로 오신, 왕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구약의 메시아에 관련된 예언의 말씀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고, 유대적 관습들에 대한 설명을 많이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약속된 메시아로 오신, 왕이신 예수님은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이죠?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말하는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통치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세워가셨는가?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과 같이 크게 세 가지 사역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셨습니다.
본론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셨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을 가르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가셨습니다.
아니, 당시에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율법교사 등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었습니까?
그런데 굳이 예수님께서 왜 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셔야 했을까요?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진리일까요?
성경을 열심히 많이 읽었다고 해서 진리를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요?
이단들도 성경을 가지고 있구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매우 열심히 읽고 암송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른 길을 갔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그릇된 길을 걸어갔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따르고 있는가?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가르치셨을까?
많은 내용들이 있지만 몇 구절만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 5:21-22절의 말씀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우리가 이 율법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야 우리에게 죄가 있는 것이고 그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법을 주실 때에 “너희가 다른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라는 의미로 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법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22절의 말씀과 같이 우리가 실질적으로 살인이라는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 안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면 이미 죄를 지은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그냥 아무 것도 없는 진공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쌓아둔 것이 표현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우리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인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주셨을 때에 그 의미는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의 근본 의미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설명해주셨습니다.
간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 5:27-28절의 말씀입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보면 간음이라는 행위만 하지 않으면 괜찮은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간음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는 의미로 이 말씀을 주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셨을 때에 그 진정한 의미는 간음이라는 행동 뿐만 아니라 마음이나 생각으로도 음욕을 품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다른 사람을 나의 욕망을 채울 대상으로 보지 말고 나의 형제나 자매와 같이 사랑으로 대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의 근본 의미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설명해주셨습니다.
하나만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 5:38-42절의 말씀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여러분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이 말씀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하나님께서 당한 대로 갚아주라는 의미로 이 법을 주셨을까요?
우리가 사형 제도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형이라는 제도를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좋아서 사형 제도를 만들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등의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르게 되면 당신도 똑같이 생명을 잃을 수 있으니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뜻이죠.
즉,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 사형 제도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율법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에는 당한 그대로 보복을 해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가해자의 입장에 있을 때에,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려고 할 때에, 한 번 잘 생각해보라는 것이죠.
내가 만약 홧김에 잘못해서 상대방을 때렸는데 상대방의 눈을 다치게 했다면 나도 눈을 다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상대방의 생명을 잃게 만든다면 내 생명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이런 법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자,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말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고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내가 피해자이고 다른 사람 때문에 내 눈이 상했다고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법대로 똑같이 보복을 해야 하는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당한 그대로 갚아주지 말고 관용하고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대방이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십 리를 동행해주어라. 나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을 관용하고 용서해 주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즉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이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진정한 뜻은 당한대로 갚아주라는 뜻이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에서는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이고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상대방을 용서해주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문자적으로는 똑같은 말인데 예수님께서 그 율법의 근본 정신을 해석해 주시니까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오지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반응을 했죠.
마 7:28-29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사람들이 그동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얼마나 많이 들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가르침은 별로 권위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들어도 진리에 의한 감동이 없고 생명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고 가르치자 사람들은 진리에 감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치심에 놀라면서 와! 진짜 예수님은 뭔가 다르구나! 예수님에게는 권위가 있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욕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 그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이는 도구가 됩니다.
우리의 생각과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셨습니다.
복음이 뭐죠? 굿 뉴스. 즉 좋은 소식이죠.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식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이렇게 정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말을 조금 덧붙이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좋은 소식,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결정적으로 계시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곧 복음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 복음,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어떻게 전파하셨을까요?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실을 믿으세요!” 라고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말과 함께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죠.
로마서 5:7-8절의 말씀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심지어 그 사람이 정말 나보다 착하거나 선하다면 한번 쯤 생각해 볼 수는 있겠지요.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나쁜 짓을 저지른 죄인이라면, 나와 원수가 된 사람이라면 더욱 불가능한 일이죠.
만약 어떤 사람이 흉악한 죄인인데 그 사람을 대신해서 자신이 처벌을 받는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거나 그 죄인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의인일 때가 아니라 죄인일 때에,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제정신이 아니셨을까요? 아니면 우리를 진짜 사랑해서 그러셨을까요?
당연히 우리를 진짜로 사랑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죠.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죄인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두 명의 강도가 함께 달렸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은 예수님을 끝까지 비방했고 한 명은 예수님께 자비를 구했습니다. 이 자비를 구한 사람의 입장에서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아마도 대부분의 범죄자들이 그랬듯이 어렸을 때에 불행한 가정에서 성장했을 것입니다.
사랑과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자라다가 어느 순간 범죄의 길로 빠져들었고, 계속해서 죄를 짓다가 결국에는 법정 최고형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이 강도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신은 참 재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랑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짓만 저지르다가 미움을 받으며 살았는데, 마지막 죽음의 순간까지도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저주와 경멸을 받는구나!
정말 내 인생은 의미가 없다. 참 재수가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며 십자가에 매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에 눈을 들어서 옆을 보았는데 한 분이 함께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죠.
이 강도는 마지막 힘을 다 짜내어 예수님께 말을 겁니다.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여기서 보시면 이 강도는 ‘나도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않고 ‘나를 기억해주십시오’까지만 이야기를 합니다.
아마도 자신과 같은 죄인이 감히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흉악한 죄인이라서 면목이 없지만, 혹시나 가능하다면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해주십시오’라는 심정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강도에게 하나님의 폭포수와 같은 은혜가 쏟아집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내가 너를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가는 곳에 너도 함께 데리고 가겠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순간만큼은 예수님이 이 강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었습니다. 이 강도는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도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는 흉악한 죄인이고 재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런 죄인인 자신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옆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당하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가장 낮고 가장 고통스러운 곳까지 내려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자신의 삶과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아가야한다고 하면 매우 어렵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상대방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이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파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곧 복음을 전파하는 삶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삶입니다.
요 13:34-35절의 말씀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따라서 서로를 사랑할 때에 모든 사람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강원도 홍천에 있는 도심리라는 마을에 가면 도심리 교회가 있습니다.
거기서 농촌 목회를 열심히 하고 계시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목사님이 처음 도심리에 갔을 때에는 마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분이 목사님인 줄 알고 동네 사람들이 반상회 때에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들어와서 살되, 장애인 시설 하지 말고, 교회 만들지 말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예수 믿으라고 하지 말아라”
원래 이 목사님께서는 교회가 아니라 선교사님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선교센터를 운영하기 위해 그곳에 들어갔기 때문에 알겠다고, 그런 일 하지 않겠다고 이야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오기가 생기잖아요. 그래서 마음 속으로 ‘내가 말로 하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예수님의 사랑으로 마을 전체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집집마다 다니며 전구도 갈아주고, 농사일도 도와드리고, 보일러도 고쳐주고, 온갖 잡일을 다 도와주며 마을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 몇 년 후에 마을 사람들이 반장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반장으로 또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러다보니 몇 년 후에는 또 이장을 하라고 해서 이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우리 동네에도 교회가 하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동네 분들이 이야기를 하셔서 도심리 교회라는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세우자고 해서 세운 교회가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세우자고 해서 세운 교회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열심히 사랑하고 섬겼더니 교회가 세워지고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죠.
몇 년 동안 그 목사님과 교제하면서 청년들을 데리고 농촌봉사활동을 하러 도심리에 갔었습니다.
그 때에 그 목사님께서 농활 10계명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의도를 갖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내가 이 어르신들에게 예수님을 믿게 해야지! 교회에 다니도록 만들어야지! 이런 의도를 가지고 상대방에게 접근을 하면 상대방이 귀신같이 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히려 부작용이 생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의도를 가지지 말고 그저 예수님의 사랑으로 마을 어르신들을 사랑하고 도와드리고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삶입니다.
오늘도 우리 가족을, 우리 자녀들을, 우리 부모님을, 우리 교우들을,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그저 사랑하셨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천국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랑의 행함과 진실함이 있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셨습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셨습니다.
이들은 곧 오늘 본문 24-25절에 나오는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 등이었습니다.
이런 병든 자들, 귀신 들린 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소외되고 외롭고 사회적으로 격리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도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는 사회적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고치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저는 예전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면 이 세상에 이렇게 힘들고 병들고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이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세상을 가만히 놔두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더라구요.
신 15:11절 말씀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땅 가운데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계속해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외롭고 병들고 힘든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회적 사각지대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 모두가 건강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부유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연약한 사람이 있을 때에 우리의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 때에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 사랑을 주고 받으면서 사랑이신 하나님을 배워가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모든 병든 자들과 약한 자들을 있게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고치시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셨습니다.
결론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사역, 진리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우리들에게 똑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에 응답함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 진리와 사랑이 가득한 세상을 확장시켜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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