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깃도(Megiddo)
아마도 군대의 주둔지를 의미하는 장소의 이름인 것 같다. 므깃도는 갈멜 산맥을 지나는 중요한 통로들을 지켜 온 이래로 가나안에서는 가장 전략적인 도시들 중 하나였다. 이 지역은 이집트를 메소포타미아와 심지어 그 이상의 지역들까지도 연결시켜 주었던 국제적인 해안 교통로를 낀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현재 '엘무테스엘림’ 으로 불리는 므깃도는 B. C. 4천년부터 페르시아 제국 때까지 존속했는데 그 기간 중 대략 25개의 다른 영토들을 장악했었다. 족장들의 시대로부터 사사들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B. C. 2000-1100) 그 도시는 이집트의 지배하에서 눈부시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황금시대는 약 B. C. 1125년에 므깃도가 망하면서 끝나고 말았다. 여호수아(수12:21)의 부분적인 정복 이후에 그 도시는 므낫세(수17:11)에게로 할당되어졌다. 그러나 그 도시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들은 원래 그곳에 거하던 거민들 때문에 결코 안전하지 않았다. 므깃도 거민들의 강력한 힘으로 인해 므깃도는 이스라엘이 강성해진 후에야 복속되었다(삿1:27). 드보라와 바룩은 아마도 언덕 주위로 흐르는 오늘날의 와디(wadi)퀴나(Quina)로 보이는 므깃도 물가에서 가나안 사람들과 그들의 지도자인 야빈 왕과 시스라를 맞아 싸웠다(삿5:19).
므깃도가 이스라엘 국가에 복속되었던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마도 다윗시대에 즈음해서는 이 도시가 이스라엘의 방어와 안전을 위한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속하였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이 도시를 자신의 중요한 요새 도시들인 하솔과 게셀의 형태를 따라서 6개의 방들이 딸린 견고한 성문을 갖추어 증축했기 때문이다(왕상9:15). 므깃도는 솔로몬의 보좌관 바아나(왕상 4:12)의 사법권 아래 있었다. 분리된 전제군주 통치 기간 중에 므깃도를 지배한 힘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그리고 또다시 앗시리아로 넘어갔다. 여로보암 1세의 통치 5년에(B. C. 920년경) 시삭이 므깃도를 포함한 해안의 교통로를 점령하면서 갑자기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지배는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나중에 그곳은 유다 왕 아하시야가 요람의 피살을 목격하고 도망하는 중 예후의 명령에 의해 죽임을 당한 장소이기도 했다(B. C. 843, 왕하9:27). 그로부터 한 세기 정도 지난 후에 티글랏빌레셀 3세는 므깃도 지역을 정복하고 앗시리아 제국의 행정구역 속에 포함시켰다. 대략 B. C. 650년 이후에 이 도시는 더 이상 강성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전략상 중요한 지역이었다.
요시야는 애굽 왕 바로느고가 유브라데 강 하수로 올라와 므깃도에 이르렀을 때(B. C. 609) 그를 방비하려 하였다. 이에 바로느고는 그들의 진군이 유다를 치려는 것이 아님을 요시야에게 전했다. 하지만 요시야는 군대를 돌이키지 않았고 결국 바로느고의 궁수들이 쏜 화살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죽었다(왕하23:29-30;대하35:22-24). 신약성경에서 므깃도 산(아마겟돈)은 주의 마지막 날에 있을 최후의 전투를 위해 세상의 왕들이 모이게 될 장소이다. 초기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좌절을 맛보았던 바로 그곳이 세상 끝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할 장소가 될 것이다(계 16:16).
므나(mina)
구약시대에 금이나 은, 보석과 같은 것의 중량을 달 때 사용되던 중량의 한 단위인 마네(50세겔, 약 770g)에서 유래된 그리스-로마 화폐 단위의 하나로 100드라크마에 해당된다. 예수의 비유에서 언급된 므나는(눅19:13,16,18) 한 드라크마가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것을 감안하여 볼 때 상당히 큰 액수였다.
므나헴(Menahem)
이스라엘 왕. 가디의 아들로 수도 사마리아에 올라가 살룸 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왕하15:14). 그 후 디르사에서 돌아왔을 때 딥사의 주민들이 자신을 환영하지 않았고 성문을 열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죽이고 임산부의 배를 가르는 등 잔인한 보복을 감행하였다(15:16). 이는 자신의 적대세력을 제거함으로 이스라엘을 평정하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여로보암 2세의 아들 스가랴가 재위 6개월만에 살룸에게 살해당했고(왕하14:29;15:8-10) 그 살룸 역시 재위 1개월만에 므나헴 자신이 살해하는 등 국가적으로 혼란기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왕위가 굳건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앗수르 왕 불이 쳐들어오자 이스라엘 부자들에게은 50세겔씩 토색하여 마련한 은 일천 달란트를 주어 침공하지 않기를 청하고 자신의 왕위가 굳건하여질 수 있게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왕하15:19-20). 이러한 관계는 이미 이스라엘이 앗수르와 종속관계에 들어갔음을 시사해 주며 이스라엘의 멸망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1세의 죄악을 그대로 답습하여 악한 길로 갔으며 여로보암을 좇은 다른 왕들처럼 비난을 면치 못했다(15:18). 그는 10년간 통치하고 죽었으며, 그의 아들 브가히야가 그의 왕위를 계승하였다(15:22).
므낫세1(Manasseh)
1. 요셉이 애굽에서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에게서 얻은 큰 아들(창41:51). 야곱(이스라엘)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여기고 받아들였다(창 48:5). 그러나 야곱이 동생 에브라임을 더 총애하여 더 큰 축복을 내린 탓에 므낫세는 장자의 권리를 잃게 되었다(창48:14), 므낫세 개인 신상에 관하여 성경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2. 포로 귀환 직후 포로기에 취했던 이방인 아내를 돌려보내라는 명령을 받았던 일반 이스라엘인 중 바핫모압 자손(스10:30)과, 동일한 명령을 받았던 하숨 자손(스10:33) 가운데 한 사람.
므낫세2(Manasseh)
히스기야 왕과 헵시바 사이에서 난 므낫세는 12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55년간 통치하였다(왕하21:1;대하33:1). 므낫세 왕은 B. C. 696년에서 686년까지 부왕 히스기야와 함께 공동섭정을 하였고 686년에서 642년까지는 단독으로 통치하였던 유다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위하였던 왕이다.
므낫세 왕은 그 부친 히스기야 왕이 헐어버린 신당을 다시 세우며 오히려 이스라엘 왕 아합을 본받아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진 뜰에 일월성신을 위한 단을 쌓고, 또 그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고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는 등 우상숭배에 빠졌다(왕하21:3-6). 더구나 므낫세 왕은 예루살렘에서 무죄한 자들을 많이 죽이기까지 하였다(왕하21:16).
반앗수르 정책을 폈던 므낫세 왕은 쇠사슬로 결박당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위기에 직면한 므낫세 왕은 하나님께 회개하였으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되자 예루살렘성을 요새화하고 우상숭배를 척결하며 여호와 신앙을 회복시켰다(대하 33:11-17). 그러나 므낫세 왕의 종교개혁은 피상적인데 그쳤고 그의 아들 대에는 그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던 것으로 보인다(대하33:21-23). 신약에는 예수의 족보 가운데 언급되어 있다(마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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