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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빌라델비아 / 빌라도 / 빌레도 / 빌레몬 / 빌레몬서

빌라델비아 Philadelphia

소아시아 서쪽의 루디아 지방에 있는 도시로서 요한계시록에 있는 일곱 교회 중 하나이다(계1:11:3:7), B. C. 150년경 버가모의 왕 아툴루스 2세 필라델포스(B. C. 159-138)가 헬레니즘식 도시로 건설한후 자신의 이름을 따서 빌라델비아로 명명하였다. 지진이 빈번하게 발생하긴 했지만 무역로의 교차점이었고 전략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곳이었다. A, D. 17년의 심한 지진으로 이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많은주민들은 주변 시골로 이주해 갔다. 그 후 티베리우스황제에 의해 재건되어 '네오카이사레아'로 불리웠다.'플라비아' 라는 글자가 찍힌 동전이 베스파시안 황제치하시에 사용되었으며, 카라칼라 시대(214년경)부터이 도시는 황제 숭배와 관련되어 '신전 문지기' (네오코로스)라고 불렸다. A.D.5세기에는 이교 숭배와 축제가 성하여 '작은 아덴' 이란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빌라델비아는 행정구역상 사데 지방에 속하였고 농업과 더불어 직물과 피혁 생산으로 산업이 발전하였다. 이 지역의 기독교의 시작과 초대교회사에 관한 구체적 증거는 없으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내용으로 볼때 이 교회 신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충성했고(계3:8)서머나 교회와 함께 칭찬받은 교회였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9의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의 말씀으로 보아 그 지역에는 스스로를 유대인이라고 내세우는 사탄에 속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들은 이교적인 생활에 빠지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해를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빌라델비아는 A. D. 1391년 함락될 때까지 오스만 트루크의 세력과 맞서 싸우던 기독교의 보루요 수호지이기도했다. 지금은 터키의 알라세히르라는 도시가 자리잡고 있으며, 사데의 남동 45km, 트몰루스 산맥의 북쪽과헤르무스 강(지금의 게디츠) 서안에 있다.

빌라도 Pilate 

그리스도께서사역하시던 당시에 유다에 부임한 제5대 로마 총독으로서, 로마 관리 중에서 사도신경("본디오 빌라도에게고난을 받으사")에 나오는 유일한 인물이다. 이로 인해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형을선고한 비겁하고 나약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네 복음서, 특히 요한복음은 이 슬프고도 영광스러운 사건들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다. 빌라도는 또한 사도행전(행3:13;4:27; 13:28)에서도 언급되고 있으며, 디모데전서6:13은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를 증거하셨다'고 말한다. 본디오는 그의 성(姓)으로서, 이는 그가 본디(Ponti)라는 로마 가문 혹은 씨족 출신이었음을 보여준다. 빌라도라는 이름은 '창으로 무장한 사람' 을 뜻하는 라틴어 필라투스(Pilatus)에서 유래했음이 틀림없다. 이 외에 그의 초년이 말년에 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는 메이엔스의 왕 티루스의 서자였는데, 왕이 그를 볼모로 로마에 보냈으며, 로마에서 살인을 저지른 그는 다시 소아시아의 본도로 보내졌으며, 이곳에서 그는 반역의 무리들을 진압한 공로로 로마 황제의 총애를 얻어 유다 총독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전설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그는 로마의 많은 명문 가문의 자제들과 같이 행정업무를 위한 훈련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그의 정치적수완 때문이거나 정치적 보상의 일환으로 디베료 황제는 그에게 말썽많은 유대인들을 다스리는 어려운과제를 맡겼다. 유다에는 빌라도 이전과 이후에 이런통치자들이 연달아 부임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들은징세와 재정 문제를 책임지고 있었으나 팔레스타인통치는 어려움이 많아 총독은 로마 황제에게 직접 책임을 졌으며, 빌라도가 예수에 대해 행사했던 것과 같은 최고 사법권도 갖고 있었다. 그의 영토는 유다, 사마리아 및 옛 이두매를 포함하였다.
대부분의 총독들은 유다와 같은 변경 지역에 주재하는 것을 꺼려하였으나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학대하는 일을 즐겨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유대인들의 상대가 되지 못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의 빈번했던 무모하고 변덕스러운 행동들이 보여주듯이 그는 결코 이들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가 부임 즉시 '불법무도' 한로마의 군대 깃발을 거룩한 도성에 들여놓음으로써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슬렸다고 전한다. 또한 그는 로마 신들의 이름과 형상이 새겨진 황금 방패들을 성전안에 걸어 놓기도 하고, 성전세의 일부를 수로 건설비에 충당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 성경은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었던 끔찍한 사건을 전해주고 있는데(눅13:1), 이 사건은 로마 군인들이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고 있던 갈릴리 사람들을 살해했음을 뜻한다.
이런 무서운 사건들은 빌라도가 예수의 재판에서 했던 역할과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재판정에서 그는 마치 유대인들의 손에 든 진흙같았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태도는 유대인들이 자주 로마에 불만을 제기했던 탓에 유대인들에 대한 그의 두려움이 커졌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예수의 재판이 있던 유월절 기간에 빌라도는 그의 습관대로 질서 유지를 위해 예루살렘에 내려와 있었다. 그의 평상시의 본부는 가이사랴에 있었다. 유대 법정에서 예수를 단죄했던 유대인들은 이른 아침 예수를 성전 근처의 헤롯 왕궁에 머물고 있던 빌라도에게로 끌고 갔다. 그는 놀랍게도 이른 아침 새벽에 심문을 하도록 허락하였다(요 18:28). 심문 벽두부터 그는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스르고 예수를 석방할 것인가, 아니면 무고한 사람 예수에게 죄를 지울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 끝에 개인적 심문을 마친 후 예수의 무죄를 선언하였다. 그는 예수를 헤롯에게 보내기로 했고 채찍을 가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 기대하여 채찍을 가하기도 하였다. 최종적으로 그는 유대인들에게 예수와 한 거친 정치범 중에 선택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 다른 왕이 없나이다'는 군중들의 외침 소리를 들은 그는 정의보다는 정치를 생각하여 무죄한 사람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하였다. 그가 손을 씻은 행위는 그의 책임을 무겁게 해 주었을 따름이다.
성경은 일반적으로 그의 종말에 관하여 침묵을 지킨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6년 후 빌라도가 소규모의 대단치도 않은 종교적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사마리아에 군대를 파견하고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되었을 때 그의 정치 경력은 종말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마리아인들은 시리아의 특사 비텔리우스에게 자신들이 당한 억울함을 호소했으며, 이를 다 들은 비텔리우스는 빌라도를 로마로 보냈다. 빌라도가 로마로 가던 도중 그의 친구 디베료 황제는 죽었고, 빌라도의 이름은 로마의 공식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유세비우스는 그후 곧 '불운으로 실의에 빠진' 빌라도는 자살하였다고 전한다. 빌라도가 어디서 어떻게 자살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전설들이 있다. 익히 알려진 한 전설에 의하면 그는 비엔나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다른 한 전설은 루케른 호수와 가까운 오늘날 빌라도 산으로 알려진 곳에서 정치적 고독을 달랬으나, 실의와 절망으로 몇년을 보내다가 절벽에서 호수로 뛰어들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빌레도 Philetus

후메내오와 함께 기록된 초기 교회의 거짓 교사들 중 한 사람(딤후 2:17)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부활하신 것을 부정하고,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며 진리에서 떠나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린 영적인 부활을 주장한 영지주의자였다. <참조> 후메내오

빌레몬 Philemon 

골로새 교회 신자로서 노에 오네시모의 주인이며, 그에 관한 문제로 바울로부터 서신을 받았다(19절). 바울의 3차전도여행시 에베소에서 바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것으로 보이며(19절), 골로새로 돌아와서는 열심히 전도하고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개방했다(2절). 그는 상당한 부자로서 오네시모 이외에도 여러 종을 두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금품을 훔쳐 도망했다(18절). 이에 대해 바울은 빌레몬에게 회심한 오네시모를 사랑으로 받아주라고 편지했다. 후에 빌레몬은 감독이 되었다가 로마 황제 네로의 박해 때 온 가족과 함께 순교했다는 전설이 있다.

빌레몬서 The Epistle to the Philemon

바울에 의해 쓰여진 편지로 신약성경의 18번째 책이다. 바울의 글 가운데 가장 분량이 적고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와 함께 바울의 옥중서신에 속하며, 목회서신이 아닌 순수한 개인 편지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 서신의 수신자는 '빌레몬, 압비아, 아킴보, 빌레몬 집에서 모임을 갖는 교회' 이다.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였으며, 아킴보는 그의 아들이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더리 있다. 아킴보는 상당한 지위를 가졌던 인물로 보이나 안정된 성격을 지녔던 것 같지는 않다(골4:17). 이 당시 기독교 공동체는 가정집을 중심으로 조직되는 것이 한 관례였던 바, 빌레몬의 집을 교회로 사용했던 것도 이러한 초기 교회의 관례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바울이 옥중에서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이다. 골로새의 거부인 빌레몬은 노예 오네시모를 데리고 있었는데 오네시모는 주인의 물건을 훔쳐 당시 법죄자의 은신처인 로마로 도망쳤다(본 18-19절), 오네시모가 로마의 감옥에서 바울을 만난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 또 다른 죄를 저지른 모양이었다. 바울의 전도로 그리스도인이 된 오네시모 (10절) 바울을 위해 일했으며, 바울도 그를 곁에 두고 싶었으나(13,16절), 주인인 빌레몬에게 보내기로 마음먹고 이 중재의 편지와 함께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로 보냈다. 당시 노예의 생사(生死)는 주인의 권한에 달린 것이기에 상당한 위험이 따랐을 것이므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친절히 받아줄 것(17절)과 오네시모가 책임져야 될 모든 것을 보상해 주겠다고 약속했다(18절). 오네시모는 골로새서를 가지고 가는 두기고와 함께 동행하였다(4:9).
본서의 내용 구조는 문안 인사(1-3절), 빌레몬을 위한 감사의 기도(47절), 오네시모에 대한 요구(8-21절), 끝인사(22-25절)로 되어 있다. 본서는 노예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데서 그 의의가 크다. '오네시모'는 '유익함'을 뜻하는 바, 바울은 11-12절에서 오네시모의 이름의 뜻을 이용하여 “이제는 나와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라고 말한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서 '잠시 떠나게 되었다고 말한 바울은 이어서 노예 해방이 형제애의 가장 진실한 표시임을 강력히 암시한다. 바울이 노예 제도의 타당성 여부를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노예 제도의 개혁,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애, 복음에 기초한 인격 존중의 정신과 사랑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빌레몬서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