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셀렙 / 셀렛 / 셀롯 / 셀사

셀렙 Sheleph

셈의 후손이며 욕단의 아들(창10:26;대상1:20)로, 아라비아 남부에 거주하였고, 이 부족의 조상이 되었다. '셀렙' 은 아라비아어 '살라프' 와 같고, 예멘의 다른 이름으로 스바어 비문에도 나타난다. 또한 예멘의 수도 사나아에서 북쪽으로 96km 정도 떨어진 술라프란 곳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확한 위치는 아니더라도 이 부족이 예멘의 어느 한 곳에 살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셀렛 Seled

유다 지파 나답의 장자로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대상2:30).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기업을 잇지 못하고 죽는 것은 큰 불행이었다.

셀롯 Zelotes

로마의 통치에 반항하던 유대의 애국정당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을 지칭하는 이 말은 시몬 베드로와 구별하기 위해 셀롯인 시몬이라고 쓰여졌다(눅6:15;행1:13). 이들은 열심당이라고도 불리워졌다. 이 명칭의 아람어 원형 '카나'는 '시기하다' 라는 동사에서 온 말로, 열심당원들은 자신들을 우상숭배와 배교, 율법위반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와 심판의 대행자로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독점적, 배타적 입장을 가진 국수적 단체였다. '가나안인 시몬' 이라는 명칭은 아람어형에서 유래되었는데 신약에서 언급되었다(마10:4;막3:18. 참고. '열심당').
당시의 역사서에 의하면 A. D.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는 열심당류의 집단들이 성행했고, 폼페이 시대 이후로 계속되어 온 로마에 대한 민족적 저항운동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열심당의 기본 동기와 중심이론은 이스라엘의 유일하시고 참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열심' (행 21:20)이었으며 이것이 지나쳐 율법을 범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자처했고,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동족까지도 기꺼이 살해하고자 했다. A. D, 6-7년 열심당의 저항운동이 시작되었을 당시 이 집단은 바리새파의 급진좌파에 속했던 것으로 보이며, 젊은이들 사이에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들은 유다 산지의 동쪽 끝에 자리잡은 동굴과 은둔지에 기거하면서 로마 군대와 관헌들, 로마에 동조하는 부유한 유대인들의 주택을 습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열심당은 안식일 준수 계명과 정결법을 엄격히 지킴으로써 타인과 자신들을 구별하였고 이교도들에게도 할례를 강요했다. 마사다 요새에는 제례 욕실과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어느 누구도 왕이나 주로 섬길 수 없다는 십계명 중 제1계명을 철저히 고집하였고,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납부하는 것을 하나님께 대한 배신과 우상숭배로 여겼다. 이스라엘의 자유를 위해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공동으로 활동해야 하며,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이교도와 유대범법자들을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메시야의 도래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고대하는 종말론적 사고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A. D.74년 마사다 요새 방어자들의 자결과 135년의 커다란 민족적 패배 이후 이 집단은 해체되었고, 이들의 이같은 열심은 새로운 신학적 용어로 재정리되고 대치되었다(참고. 벧전 3:13:7 3:19).

셀사 Zelzah

베냐민 영토의 경계에 위치한 성읍으로 근처에 라헬의 무덤이 있었다(삼상10:2). 창세기 35:19에 의하면 라헬의 무덤은 '에브랏’곧 '베들레헴' 에 있고, 예레미야 31:15에 의하면 라마에서 가까운 곳으로 보이는데 정확한 위치는 분명하지 않다. 또한 셀라와 같은 곳으로도(수18:28) 추정되는데, 이곳은 오늘날의 예루살렘 북서쪽 3km 지점에 있는 '키르베트 살라'로 여겨진다. 이곳은 특히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었음을 확증해 주는 세 개의 표적 가운데 하나가 나타난 장소로 유명하다. 사울이 부친의 나귀를 찾으려고 돌아다니던 중 사무엘 선지자에게 물으러 갔다가 그에게서 왕이 되는 기름 부음을 받고 그의 지시대로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지 곁에 가서 부친의 나귀를 찾게 되었다(삼상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