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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에비구레오 / 에비아삽 / 에산 / 에살핫돈 / 에서

에비구레오 Epicurus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사상을 대표하고 있으며,스도이고(스토아 학파와 더불어 아덴에서 바울과 쟁론을 벌였던 학파의 창시자이다(행17:18), 에피쿠로스(B. C. 341-270)는 쾌락(ataraxia, 평정상태, 혼란이 없는 상태)을 인생의 주된 목표라고 말하였다. 그가 말하고 있쾌락은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만족이나 육욕적인 것이 아니라 미신적 공포, 혹은 죽음에 대한 염려, 그리고모든 고통 등에서 벗어난 마음의 평정 상태에 도달함으로써 얻는 정신적 행복을 참 행복이라고 말하였다.
에피쿠로스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인간이 평정 상태에 도달하도록 도와줄 수는 없는 존재로, 즉 신과 인간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그의 견해에 대해 근거가 되는 이론은 원자론이었다. 그는 원자론을 통하여 신의 개입이필요없는 세계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신에 대한 공포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말하고 있는 공포는 사물의 본질을 지각한 사람에게라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하였다. 데모크리투스의 원자론에 자극받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거기에 일종의 물활론을 결합시켜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즉 원자들은 계속해서끊이지 않고 운동을 하며, 또한 정해진 궤도를 이탈하려는 힘을 가지고 있어서 모든 형체의 실체들, 즉 동 ·식물과 인간 등을 만들어 내고 그것들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한다. 이렇듯 세상은 어떤 신(神)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고 있으며,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어떤 목적이나 계획에 의해 세상은 다스려지지 않는다.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미래는 어떤 의미로도 정해져 있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자신을 넘어선의지나 힘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거기에는 영혼조차도 원자들의 합성물로 보고 있으며, 영혼을 이루는 그원자에는 미래의 존재가 없으므로 그 평정은 이생에서 이루어야 한다.
에피쿠로스는 이와 같은 사상에 근거하여 죽음 이후의 생에 관한 교의(敎義)란, 그것이 축복을 약속하건고통을 예상하건 간에 모두 거짓이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이런 사상을 지닌 그들 학파에게는 사도행전 17장에서의 바울의 심판과 부활에 대한 메시지가 자신들이 믿고 있던 사상과는 정반대의 사상으로 들렸음에 틀림없다.

에비아삽 Ebiasaph

레위의 아들인 그핫 자손으로 고라의 증손이다(대상6:23,37;9:19), 출애굽기 6:24에서는 '아비아삽' 으로도 불리웠다.

 

에산 Eshan 

헤브론 산지에 위치한 유다의 한 성읍(수15:52), 오늘날 헤브론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약 16km 지점에 위치해 있는 '키르베트 삼마'와 동일시된다.

 

에살핫돈 Esarhaddon
B. C. 681-669년까지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치하였던 왕으로 산헤립의 아들이며, 앗수르바니팔의 아버지이다. 그는 장남이 아니었음에도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어 왕위를 보장받고 있었다(왕하19:37:37:38). 그러나 그의 형제들인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에 의해 아버지 산헤립 왕이 살해되자 그들은 왕위를 쟁취하기 위해서 서로 싸워야 했다. 에살핫돈은 마침내 '하니갈 바흐' 전투에서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을 물리치고 내란을 진정시키고, B. C. 681년 앗수르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왕하19:35-37;대하32:21;사37:37-38). 그가 통치하던 당시는 정벌 또는 회유 정책을 사용하여 북쪽과 서쪽의 중요한 국경을 통해서 침 들어오는 르인들과 메대인들을 평정하고 동부 지중해 섬과 해안에 거주하는 열세 명의 왕들, 그리고 두로, 시돈 등 본토의 열두 왕들에게 조공을 받았다. 이때가 앗수르의 영토가 최대로 확장되던 시기이다. 유다의 므낫세 역시 조공을 바치는 왕들 중 한 사람이었으며, B. C. 8세기의 서한이 니느웨에서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은 십 마네가 유다인들에 의해 보내졌다' 라고 기록된 글이 보인다. 선지자들과 역사가들은 므낫세의 통치가 역사상 유례없이 악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들이 이같이 언급했던 것도(왕하21:9) 에살핫돈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에살핫돈은 므낫세를 포함해서 그에게 조공을 바치는 자들에게 앗수르를 그들의 신으로 인정하도록 강요하였으며,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앗수르에게 복종할 것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만일이 조건을 수행하지 않게 되면 누구라도 침략과 유배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애굽을 견제하는 일에 치중하여 군사 계획을 세웠다.
애굽은 계속적으로 팔레스타인과 수리아가 앗수르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했었다. 애굽에 대한 그의 첫번째 원정(B. C. 675)은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곧 이어진 재공격(B. C. 673,671)으로 애굽의 수도 멤피스를 정복하고, 바로 다르하카(다르하가 -왕하19:9, 애굽 제25왕조 최후의 왕)를 남쪽 누비아로 쫓아냈다.
에살핫돈은 B. C. 669년에 애굽의 반란을 진압하러 가던 도중 하란에서 병들어 죽고, 그 뒤를 아들인 앗수르바니팔이 대신하였다. 친바벨론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알려진 에살핫돈은 그의 아버지 산헤립에 의해 파괴된 바벨론의 시가 및 신전의 재건에 전력하였고,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였기에 그가 바벨론을 통치하는데에는 많은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역대하 11에서 므낫세가 바벨론에 끌려갔다는 기록은 그런 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사마리아에 이방인들을 이주시킨 앗수르 왕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가 에살핫돈임을 밝히고 있다(왕하17:24;스4:2).

에서 Esau 

이삭이 리브가에게서 낳은 아들로서, 야곱의 쌍동이 형이다(창25:2426;27:1,32,42). 그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붉고 털이 많은 이유로 '에서' 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후에 장자의 특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며 “그 붉은 것을 내게 먹게 하라" (창25:30)고 하여 '에돔' '붉다' 뜻)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경은 이들이 모태에 있을 때부터 서로 싸웠다는 것과 출생시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로 보건대 이들, 즉 야곱의 후손들(이스라엘 민족)과 에서의 후손들에돔 족속들. 참고. 신2:4과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 것임을 미리 암시해 준다. 즉 야곱과 에서의 생애에서 뿐만 아니라 이후 후손들까지도 다툼의 역사가 계속되리라는 것과 에서가 장자였지만 야곱이 그를 지배하리라는 것도 암시하고 있다(창25:23). 이예언은 다른 본문에서도 되풀이 되어 인용되고 있다(렘49:8;욥1:6;롬9:10-13).
에서는 성장하면서 능숙한 사냥꾼이 되어 고기를 좋아하는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나 장자권을 경홀히 여겨 야곱의 팥죽 한 그릇과 그것을 맞바꿔버렸다(창25:34;히12:16.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확실히 빼앗긴 계기는 이삭의 임종 축복을 받을 때 어머니 리브가의 계략에 의해 야곱에게 축복을 빼앗긴 때였다(창27:39-40). 그러나 에서를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도망했던 야곱이 20년 후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오히려 그를 따뜻이 영접하였으며(창33:416, 사이가 좋아져 이삭이 죽자 야곱과 함께 장사를 치렀다(35:29). 에서의 노년에 대한 사실은 더 이상 알려져 있지 않다. 청년의 때에 에서가 내렸던 근시안적인 이기심과 성급함은 야곱과의 화해에서 보여준 관대와 관용에 의해 상쇄되지만, 이들 형제끼리의 다툼의 역사는 후손들의 역사에서도 계속되었다.
에돔과 이스라엘은 항상 적대 관계에 있었으며,서로 멸시하고 미워하였다. 다윗의 때부터 B. C. 120년경의 하스몬가(家)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싸움은계속되었고, 선지자들은 수없이 에돔의 냉혹한 행동을 비난하였다(사34:5-9; 렘49:7-22;겔25:12-14; 옵1장;암1:6). 에서의 일에 대해서는 말라기서 1:2-4과 사도 바울에 의하여 해석되었는데, 바울은 "하나님의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서게 하기 위해서” (롬9:11-12)라고 언급하면서하나님의 선택 교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는 에서를 가리켜 '망령된 자',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자' 라고 결론짓고 있다(히12: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