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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

1. 예수의 삶과 사역, 대개 예수의 삶이라 하면 4복음서에 제시된 바의 지상 사역만 떠올리게 되나 그분의 전 사역은 모든 시대에 걸쳐 일어나므로 여러 각도에서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나는...있다' 의 형식으로 다양하게 말씀하신 것에는 그분의 절대적인 존재의 의미가 기본적으로 담겨 있다(요8:58). 그러므로 그분이 영원에 속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사실로서 성경은 그분이 이미 존재하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요1:1) 하나님과 함께 영화를 누리셨고(요. 17:5) 창세 전부터 세상의 구세주로서 미리 알리신 바 되었다고 단언하고 있다(벧전1:20). 그분이 사람과 피조물의 영역에 더욱 직접적으로 관련되시는 일은 바로 창조의 사역이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요1:3:고전8:6;히1:2) 그분 안에서 함께 서게 되었다(골 1:17). 그분의 존재에 대한 증거는 구약성경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성육신하기 전의 그리스도와 관련된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그는 그리스도를 보고 있었다(요12:41). 또한 예언자들도 특별히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언급함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였다(벧전1:11). 이렇듯 예언적인 성격을 띠는 주요 성구로는 창3:15;신18:15,18;시2,16,22,110;17:14;9:6-7,11;42:1-4;52:13-53:12;61:1-2;23:5-6;미5:2 등이 있다. 나아가 직접적으로 메시야에 대해 말하지는 않지만 중대한 방식으로 그분을 암시하는 언약적 말씀들도 있다(창 12:3;삼하7:12-16), 그리고 성육신을 미리 보이시기라도 하듯이 성자께서는 때로 신실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사자나 언약의 사자로서 자신을 가시적으로 나타내 보이셨다(창18:1-19:1;삿13장),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내시기 위해 몸소 인성을 취하셨으며(요1:14,18) 사람들을 죄에서 속량하심으로 그들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막10:45), 그리고 사람들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하심으로 그들을 도우시기 위해 인성을 취하셨다(히2:17-18). 오늘날에도 그분은 여전히 신인으로서 영광 중에 계신다. 성육신은 아직도 계속되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히7:25;요일2:1). 예수는 지상에서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심으로써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엡1:22;4:15), 그리고 성령을 통해 성도들의 삶과 봉사를 인도하신다(마28:20).

성육신의 목적 중 한 가지는 주님이 지상에 계실 때 성취되지 않고 그분의 재림때까지 유보되었다. 예수께서 재림하시면 그분의 왕적 통치가 심판 사역에 뒤이어 소개될 것이다(마25:31-34). 이 재림에 관하여는 서신서들이 주요 진리로 다루고 있고(빌3:20-21;살후1:7-10), 요한 계시록도 중심 주제로 다루고 있다. 천년왕국 이후에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과 함께 축복의 영원한 나라로 향할 것인 바 그곳에는 죄악이나 죽음의 침입이 없을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지상 지역. 오래 전부터 예고되었던 그리스도께서 때가 차매 강림하셨다(갈4:4).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등장과 사역을 위해 적당한 배경을 미리 마련해 놓으셨다. 세계는 헬라의 언어와 문화의 전파를 통해 그리고 로마의 조직력을 통해 단단히 동질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루어 놓으신 복음이 사방으로 퍼져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강림은 모세의 율법이 인간의 죄악성을 지적한 후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깨달을 역사적 시점에 일어났다. 사람들은 영적 구원을 갈망하며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이렇듯 성육신이 일어날 환경을 섭리하신 하나님은 예수의 모친으로서 동정녀 마리아를 조심스럽게 택하시는 일을 시행하신다. 구세주의 탄생은 자연적인 것이었으나 그의 수태는 성령의 능력을 입은 초자연적인 것이었다(마1:18;눅1:35). 한편 아우구스투스 역시 하나님이 선택하신 도구의 궤도 속에 들어간다. 그는 과세를 위해 천하를 호적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의 탄생이 예언된 바로 그 장소에서 이루어지게끔 동조하게 된다(미5:2;눅2:1-7), 목동들은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나섰고 마침내 찾은 아기 예수를 보고 기뻐함으로써 다가올 날에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할 유대인들의 겸손함을 나타내 주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원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암시가 동방 박사들의 방문에서 보여지는 듯하다. 이와는 반대로 헤롯은 나사렛 예수를 미워하고 반대하여 죽음으로 몰고갈 사람들로 상징된다. 또한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나 그 성경을 이루실 분에 대해서는 냉담한 율법학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자기 땅에 오신 예수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거부하는 국가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스도 사건을 보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성육신이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셨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던 분이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2:6-7).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는 말씀을 마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전령자이거나 고대의 예언자이다'와 같은 말씀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분은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스스로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영원하신 성자(Son of Gol)이시다.
성경에는 '신인' (God-man)이라는 표현이 실제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진리를 잘 나타내 준다. 하나님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실 도구로 만드시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곧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나 죄는 없으셨고 그 인성에 신성을 결합하심으로 그분 자신의 본성을 간직하신 채 한 실제 사람이 되셨다.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간격에 다리가 놓였으니 첫번째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의해서요, 두번째는 그분의 중재적 사역에 의해서이다. 예수의 소년 시절은 성육신이라는 진리의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그분이 지니고 있는 신성은 배움의 과정이 필요한 인성을 덮어가리지 않았다. 그분은 몸과 지식과 지혜가 자라가서 그분이 알고 있는 바를 올바로 사용할 수 있게끔 되었다. 예수는 부모에게 명령하지 않고 순종하심으로써 이에 관련된 율법을 만족시키셨다. 성경의 기록은 소년 예수가 어렸을 때에도 놀라운 이적을 행했다고 엉터리 과장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분이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과정을 강조하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의 특별한 관계를 의식하고 계셨다는 점을 강조하였다(눅2:49).
예수는 세례를 받으실 때 앞으로 열리게 될 그의 사역을 하나님께 인증받으셨고 그 성취를 위해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으셨다. 이제 준비의 날은 완전히 끝났으므로 더 이상 은둔하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셨다. 세례 의식을 통해 예수는 그가 구속하러 오신 사람들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에서 모든 의를 이루셨다(마3:15), 세례에 밀접히 연관되는 것은 바로 예수가 당하신 시험이다. 시험 역시 상징적인 특성을 지니는 것으로서, 첫번째 아담은 시험을 당했을 때 실패했지만 마지막 아담은 배고픔과 광야에서의 시달림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겨내셨다. 사탄은 시험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을 막아내려 하였다. 즉 예수께서 인간의 입장을 버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특별한 관계에 의존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과 같이 되겠다고 선택하신 그의 결정에서 한치도 움직이려 하지 않으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라는 말씀이 그의 첫번째 시험에 대한 대답이셨다. 그분은 다음의 두 시험에서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지켜야 할 의무를 인용하심으로써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존해야 하는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에 대한 이유를 밝히셨다(마4:7,10). 이렇듯 세례로 무장을 하시고 시험의 시련으로 단련되신 후에야 비로소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할 채비를 갖추셨다. 이 사건들이 있기 전에는 교훈의 말씀이나 능력의 사역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건들이 있은 직후에 예수는 성부께서 맡기신 일을 수행하시기 위해 성령의 권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셨다(눅4:14). 예수의 공생애는 짧다. 이 공생애의 길이는 복음서에 기록된 자료들을 보고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이점에 관해서는 요한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요한복음에 제시된 유월절의 수를 볼 때(요2:23;5:1;6:4;13:1) 공생애의 기간은 적어도 2년을 초과하며 아마 3년이 넘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가 사역을 행한 장소에 대해서도 공관복음서를 보충해 준다.
공관복음서는 주로 갈릴리 사역에 중점을 두었고 이와 더불어 두로와 시돈(마15:21-28), 가이사랴 빌립보(16:13이하), 데가볼리의 이방인 도시들(막7:31), 사마리아(눅9:51-56;17:11), 베뢰아라고 알려진 요단 강 동부 지역(막10:1) 등을 방문하신 일들에 주의하였다. 반면 요한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몇 차례 방문하신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사실 요한은 예수의 유대 사역을 설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공관복음서도 예수의 유대 사역을 알리고는 있지만(마23:37; 눅10:38-42) 그다지 많은 정보를 주지 않고 있다.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예수는 가버나움을 그의 활동 본부로 삼으셨다. 그분은 이곳에서 출발하여 대개 제자들을 동반한 채 도시와 읍과 마을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전도하셨다. 이러한 여행의 예들이 성경 본문에 제시되어 있다(막1:38;6:6;눅8:1).
예수의 사역의 일부는 병고침과 축사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각색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고 귀신에 붙들려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적은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낼 뿐 아니라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 속에 '약속된 그분'이 오셨음을 증거해준다(마11:2-6; 눅4:16-19). 즉 이 이적들은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자, 곧 구세주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개시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갈릴리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이적을 보고도 그리스도를 기부하는 모습을 보시게 된다(마11:20-24). 이러한 여행 중에 예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인 '하나님의 나라' 라는 말은 더욱 구체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이따금씩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는 천국을 장차 있을 것으로 말씀하셨지만(마25:31 이하)또한 천국을 현재 있는 것으로 말씀하기도 하셨다(눅11:20), 후자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그 이유는 천국이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으신 행동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러한 방식으로 사탄의 왕국을 침범하신 정도만큼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와있었다. 그러나 천국에 대한 가르침 중 개인의 삶이 관련되는 보다 영적이고 적극적인 측면에서 볼 때, 천국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능력에 강제적으로 복종하게 하거나 인성을 침범하는 것에 있지 않다. 물론 제자도의 법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그 제자도를 실천할 개인이 동의하기까지 기다려주신다.
예수의 제자 중 어떤 제자도 강제로 제자가 된 사람은 없으며 오히려 사랑과 능력에 감화되어 제자가 되었다. 우리가 예수 자신과 천국과의 관계를 더 명확히 조사해보면, 예수는 천국을 소개하셨을 뿐 아니라(어떤 의미에서는 세례 요한도 천국을 소개하였다) 천국을 완벽하게 체현(embodyment)하셨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천국의 설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따르는 것이다(마6:10).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야말로 예수 사역의 주요 동기였다는 것은 너무도 확실하다(마12:50; 막14:36;요4:34). 물론 예수께서는 능력과 영광 중에 재림하심으로써 천국의 최종적인 국면을 여실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천국의 현재적 측면으로 들어오는 길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그분이 이루신 구원의 사역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얻게 된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동안에도 사람들은 그분의 구원 사역을 미리 내다보고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이 천국의 현재적 측면에 들어올 수 있었다.
주님의 가르치심 중 많은 부분이 예화로 전달되었다. 이 예화들은 주로 자연이나 일상 생활에서 소재를 빌어온 비유들로 구성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와 같다." 이러한 교훈 방법은 듣는 이들의 관심을기울이게 하며 영적인 적용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교훈함으로써 진리가 어느 정도 가리워지긴 했으나이러한 교훈 방법은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영적인소경됨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었고, 믿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호기심을 갖게 함으로써 다음에 직접적인 교훈을받을 때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하였다.
예수의 사역은 초기에는 주로 대중들을 향해 이루어졌다. 그분은 회당이건 시내 거리이건 호숫가이건간에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셨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행 10:38)라고 묘사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사역 기간 중 마지막 해는 주로 당신이 선택하신 열두 제자를 교훈하시는 일로 보내셨다. 이렇게 예수께서 강조점을 달리 두신 이유는 대중의 반응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사실 이 당시에 따르던 무리들이 많이 물러갔었다;요6:15,66) 예수 자신과 그분의 사역에대해서 제자들을 교훈하시기 위함이었다. 이 제자들은 거의가 갈릴리인들이었고 어부가 많았다. 이들은예수께서 무리에게 강화하신 것을 들음으로써 많은진리를 배웠고 그분이 병자를 고쳐주시고 귀신들린자들을 풀어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낄 수있었다. 그리고 특별히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심을 받았을 때 더욱 귀한 것을 배웠다(눅9:1-6).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의 승천 이후에 교회 생활에서 담당해야 할역할을 준비하기 위해 예수께로부터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예수의 초기 사역 동안에 제자들이 보고 들은 것은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확인하게 해주었다(마16:16).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걸어야 할 고난과 죽음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마16:21-23). 이러한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견이 예수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것이었지만 베드로에게는 주님이 잊혀지게 될 어떤일로 보였다. 주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생각이 이러했으니 다른 제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그들은 예수께서 외적인 힘과 영광을 지닌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으나 주님이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일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당황하고혼란스러워 했다. 주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인이 제자들에게 들려졌으나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주께서 앞으로 죽음을 당하실것이라는 예언이 제자들에게는 너무도 힘겨웠기 때문이다. 변화산상에서도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께서 앞으로 당하실 죽음과 그 후의 영광에 대해 논의하시는 것을 보았으나 아직도 예수의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예수는 이에 대해재차 교훈하셔야만 했다(막10:33-45).
제자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슬퍼하는 모습은 그들이 예수의 죽음에 대해 받아들이고는 있었지만 죽음이후에 올 부활을 바라보지 못했으며 또한 예수의 죽음 자체가 얼마나 큰 영적 부요를 가져다 줄지 깨닫지못했음을 보여준다. 부활 이후에 제자들의 마음은 주의 가르침에 대해 더욱 많이 열려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구약성경을 열어서 자기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셨고 하나님의 목적을계시해 주셨다(눅24:26-27,44). 제자들을 위해 인내와시간을 투자하신 그리스도는 결국 보답을 받으실 수있었다.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전도의 능력을 주시자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효과적인 도구로 쓰임받았고 기독교 교회의 지도자로서 사용되게 된 것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의 지혜와 앞을보시는 눈이 얼마나 깊고 밝은지를 알 수 있다.
열두 제자들과 다른 태도로써 예수를 대한 자들은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다. 율법학자들은 유대 전통과 율법에 능통하였고, 바리새인들은 유대주의의 유전을 매우 엄격하게 지키려 하였다. 이들은 보통 함께행동하였는데 예수와 여러 번 많은 문제를 놓고 충돌하게 된다. 그들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선언하시며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시는 것을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소중하게 지켜온 유전들을 예수께서 거부하시고 또한안식일에 자비를 행하심으로써 안식일을 파기하시는것을 보고 분개한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있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고 있는 그분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그들은 예수의 모든 이적과 완벽하신 삶을 보면서도 그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진리보다 전통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보내신 그리스도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그들과 원수 관계에 있던 사두개인들과 더불어 음모를 꾸미게 된다.
변화산 사건이 있은 후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데 주력해 오신 그리스도는 그 와중에도 십자가의 여정을 마치기 위해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셨다(눅9:51). 이 후기의 사역 기간 동안에 여러 가지 감동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즉 예루살렘으로의 승리의 입성, 성전 정화, 주의 만찬에 대한 교훈, 겟세마네에서의 번민, 체포되고 능욕받으심, 십자가에 달리심, 부활하심, 다시 나타나심, 승천하심 등의 사건이 있었다. 이 모든 사건에서 예수는 언제나 중심 인물로 남아 있었다. 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예수는 스스로 증거받으시고 또한 증거를 주셨다. 그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는데 이바지했다. 십자가는 사람들이 예수를 못박으라고 결정한 것이지만 이 일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작정하신 것이었고 또한 아버지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였다. 십자가는 사람들의 죄를 도말해 주었으나 어떤 사람들의 죄는 더욱 드러나 보이게 만들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인간의 날은 폭력과 신성모독 속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날은 밝아오기 시작했다. 부활은 세계와 어둠의 세력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었다.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는 정당성을 인정받으셨고 그의 주장도 밝게 빛나게 되었다.
3. 예수의 이름과 칭호 및 사역. 예수를 지칭하는데 사용된 용어들을 고찰해 보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된다. '예수’는 복음서의 일화들에서 주로 사용되었는데 직접 화법에서 사용된 예는 드물다. 예수는 '구세주' (마1:21)를 의미하며, 히브리어의 '여호수아' 라는 이름과 언어학적으로 관계가 있다. 영역 KJV의 히브리서 4:8에서는 축어적으로 묘사하여 '여호수아' 대신에 '예수' 를 사용하고 있다. '예수'는 신약성경의 서신서에서 대부분 다른 용어와 합해져서 사용되나 가끔 단독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특히 히브리서에서 그러하다. 이렇듯 단독으로 사용한 것은 아마도 인성이 그분 존재의 계속적인 요소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라는 이름 그대로 간단하게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은 합법적이나 오로지 그 이름 하나만 사용하는 것은 성경이 그분에 관해 제시하고 있는 포괄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데 부족함이 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라는 의미로, 히브리어 '메시야'에 해당한다. 이 말의 칭호로서의 기능은 '그리스도' 라는 말이 종종 '약속된 그리스도', 즉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야' 의 개념을 충족시키는 분의 의미로도 제시된다는 사실에 강조된다. 우리 주님도 그리스도라는 말을 누가복음 24:46에서 자신에 대해 사용하셨다. 한편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라는 말의 의미를 확대하여 교회를 가리키는 데 사용하였다(고전12:12),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친밀한 유대 관계를 강조하였다. 또한 흥미로운 점은 '그리스도' 라는 말이 예수의 개인적인 이름으로서 사용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아마도 초대 교회 시대일 것이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서두에서도 그 예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아마 우리 주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셔서 제자들도 그렇게 표현하였을 것이다(요17:3).
신약성경의 서신서에서는 그리스도라는 한 단어만으로 주님의 이름을 표현한 예가 많이 있다(고전15:3). 복음서를 읽다 보면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이 있는데 바로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알려지시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셨다는 점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계하셨고(마16:20), 마귀들에게도 자기에 대해 함부로 증거하지 못하게 하셨다(눅4:41). 만일 이 칭호가 유대인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사용되다 보면 민중들은 예수가 자기들에게 국가적 자유와 그에 수반되는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 정치적인 메시야라고 기대하여 흥분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의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예수는 자신에게 '메시야' 라는 칭호가 사용되는 것을 제지하셨고 다만 사도들과 함께 계실 때는 이 칭호를 반기셨다(마16:16),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예수의 수태와 관련하여 단 한번 사용되었다(마1:23).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뜻의 히브리어로, 특히 예수의 탄생을 묘사하는 데 적합한 단어이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교회에서 그리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아마도 예수와 그리스도라는 명칭에 밀려났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인들은 이름뿐만 아니라 거주지로도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수께서는 '나사렛 사람'으로도 불리셨는데 이는 그분이 나사렛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기 때문이다(눅24:1).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의 제자들을 가리켜 이렇게 불렀을 때는 비난의 뜻이 담겨 있다.
한편 예수께서 자신을 일컬으실 때 가장 자주 사용하신 칭호는 '인자' 이다. 이것은 성육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즉 다니엘 7:13에서 '인자' 라는 칭호가 사용된 이래로 이 말은 권위의 개념과 연결된다. 비록 '인자'가 종종 예수의 인성을 강조할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하늘의 존재이신 그분의 초월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인자'는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아들'은 그분의 신성을 강조한다는 식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참고, 눅22:69-70), '메시야' 보다는 '인자'를 공적으로 사용하심으로써, 예수는 그의 사역이 정치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상상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스스로 '인자' 라고 자신을 부르심으로써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시는 의미를 이 칭호에 담아 넣으실 수가 있었다. 교회는 '인자' 라는 단어를 주께서만 사용하실 권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주를 경외하는 마음에서 이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행7:56에서 스데반이 사용한 경우는 예외이다). 예수에 대한 호칭 중 가장 친숙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 이다. 예수는 요한복음에서만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고(요 5:25;10:36;11:4) 다른 곳에서는 그와 동등한 칭호인 '아들'을 사용하셨다(11:27). 이 '아들' 이라는 칭호는 특히 성부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일 때와 성자의 독특함을 부각시킬 때 가장 적합하다. 공관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말이 쓰인 곳마다 매번 그것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이에 대해 보스(Geerhardus Vos)는 4가지 의미로 나누어 구별했다.
(1) 생득적(生得的)인 개념, 사람으로 태어나신 예수의 신적 기원을 강조한다.
(2) 종교 윤리적인 개념. 그리스도가 인간 생활을 영위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과 가지시는 자식으로서의 관계로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관계와 유사하다.
(3) 메시야의 개념. 구약성경에서 약속되신 분, 곧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기름부으심을 받으신 분임을 나타낸다.
(4) 삼위일체, 혹은 본체론적 개념. 성자 하나님의 성부 하나님께 대한 독특한 관계를 나타낸다.
위의 4가지 의미 중 가장 고수준의 아들됨을 나타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네번째 개념이다. 예수의 사역과정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는 칭호는 '다윗의 자손'이다(마21:9, 눅18:38). 이 칭호는 특히 예수를 다윗 언약이 성취된 분으로 보는 메시야적 칭호이다. '다윗의 자손'은 이스라엘에게 자유와 평화와 영광을 가져다주고 나라를 세우실 분으로 기대되었다(참고. 마1:1;눅1:32-33). 예수가 '하나님' 이라고 공공연히 선언하는 성구들도 있다(요1:1,18;20:28;롬9:5;딛2:13;히1:8), 이렇듯 '하나님' 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성구수가 비교적 작은 것은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신 성부께 복종하는 위치에 있고 그분의 신성이 인성에 의해 가리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분을 직접적으로 하나님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분의 신성을 서술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또한 초기 히브리 성도들이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도 예수를 '하나님' 이라고 자주 부르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한편 예수를 믿는 초기 신자들의 믿음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칭호는 ‘주’ 이다(행2:36;10:36;롬10:9;고전 8:6;12:3;빌2:11).‘주'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나타내며 신자 개개인, 곧 교회 지체들과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심을 의미한다. 예수를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주'가 단지 존경을 나타내는 칭호여서 나리(sir)의 의미로 번역되었다(요4:11). 그러나 구세주를 깊이 사모하는 이들에게 '주'는 충성과 복종을 암시하는 커다란 의미를 지녔다(요20:28;행22:10). 예수의 지상 사역 동안에도 많이 사용된 '주' 라는 칭호는 부활이라는 중대한 사건이 있은 후에는 한층 강화된 의미로 쓰였고 더욱 자주 사용되었다. 어떤 칭호들은 그리스도의 인격보다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더욱 관계된다. 그중 하나가 '말씀' (요1:1,14; 요일 1:1)이라는 칭호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이요, 전능자의 목적과 본성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분이며 인간의 낮은 지혜와 비교할 수 없으신 하나님의 높은 지혜를 펼쳐 보이시는 분임을 나타낸다. 다음으로 '선생' 이라는 칭호를 들 수 있는데 예수께서는 육신으로 계실 때 관례적으로 '선생' 이라고 많이 불리셨다. 이 칭호는 예수의 가르침의 위력과 권한을 증거해준다. 예수는 랍비 훈련을 받지도 않으셨지만 그 하시는 말씀에서 빛나는 지혜가 흘러나옴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다. '종' 이라는 칭호는 빌립보서 2:7에서 바울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나,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셨다는 점은 초대 교회에 의해 널리 인정되었다(마12:17-21). 그리스도도 자신이하나님의 '종'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은 마가복음10:45 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 중 가장 중심되는 것은 바로 '구주'로서의 사역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 라는 이름이'구주'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았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이 세상에 오시게 된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가 구주임을 알리는 성구를 들자면누가복음 2:11 과 요한복음 4:42 를 들 수 있다. '구주'라는 칭호는 예수께서 인간을 모든 고뇌와 죄악으로부터 구원해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구주'는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온전함과 축복의상태를 인간이 누릴 수 있게 해주고, 그 안에서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준다는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의 치유 기사에 사용된 동사형태는 구주의 치유하시는 손길을 받고 이미 온전한상태에 있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예수의 구원하시는사역은 '하나님의 어린양 (요1:29,36. 참고. 계5:6)이라는 칭호에서도 표현된다. 베드로도 예수를 ‘어린양이라고 표현함으로써 그의 죄없으신 자격을 특별히 강조하였다(벧전1:19).
'대제사장'이라는 칭호는 히브리서에만 약 10여 차례 나타난다. 여기서 예수의 사역은 하늘 성소 곧 하나님의 존전에서, 이땅 위에 있는 그의 죽음의 열매들이 보존될 수 있도록 중재하시는 것으로 묘사된다(히9:11-12). 주님의 사역을 총괄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 라고 할 수 있다(딤전2:5). '중보자' 라는 칭호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죄라는 장애물이 놓여있는데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이 제거하실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해 준다. 바울 사도는 예수에대하여 '마지막 아담' (고전15:45)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아담의 실수로 인해 초래하게 된 죄의결과들을 예수께서 해결해 주신 것을 암시한다(참고.롬5:12-21). 그리고 모든 신자들은 새로 피조된 삶으로인해 부활의 영광을 소유하게 될 것임을 암시해 준다.어떤 의미에서 신자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 영광을 소유하고 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이름과 칭호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분의 사역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해 주는 것은 바로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칭호일 것이다.
예수의 선지자적 사역은 특히 예수께서 육으로 계실동안 하신 일, 곧 하나님의 나라와 다가올 심판을 선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격려하신 일과 관련된다.지금도 예수는 성령을 통해서 교회에게 말씀하심으로진정하고도 신실한 증인이 되신다. 제사장으로서 우리 주님은 단번에 자신을 드리심으로 짐승의 희생 제사를 폐하시고 우리의 죄를 영원히 도말해 주셨다(히9:260. 예수는 자비하고 충성된 제사장으로서, 죄와 불법으로 둘러싸인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사역하신다(히 2:17;4:15-16. 한편 왕이라는 말은 특히 주께서 다시 오사 세상 왕국을 밀어내시고 은혜와 주권으로 다스리실 미래의 행동과 관련된다(계11:15). 그분은 보통 통치자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시다.
4. 예수의 인격.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예수행동을 지켜보고 그분을 따라다니면서 강하고 신비한 인성을 느낀 제자들은 놀라움에 가득차 위와 같이 물어보았을 것이다. 그분의 인격 중 어떤 요소가다른 요소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그렇게 말할 경우 그분의 완벽하심을 깨뜨리게 되기때문이다. 예수는 완전무결하셨다. 결국 이 완전하심이 예수 인격의 핵심이다. 만일 그분이 믿을 만하지않은 분이었다면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복음의 호소는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타인을 대하실 때그 어떤 이중성도 없으셨다. 그분은 속이실 수 없는분이었다. 그분은 진리이셨다. 그리스도는 용기있는분이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유명한 중용의 가르침을 펴면서, 용기란 비겁과 무모함의 중간에놓여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기준으로 예수를 평가해 볼 때 그분의 인격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 안에서는 그 어떤 사나운 불안정성도, 그 어떤 복종적인 태만함도 발견할 수 없기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육체적인 용기를 가지셨다. 이것이 없었다면 그렇게 단독으로 성전 정화를 행하실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념의 용기를 가지셨다. 예수의 가장담대한 제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도 궁지에 몰리자주님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죽음을 불사하고산헤드린 앞에서 자신의 인성과 사역을 고백하셨다.사람들은 종종 동료들의 동정과 도움에 힘입어 용기를 내곤 하지만 예수께서는 오직 혼자서 마지막 시련에 직면하셔야만 했다. 주님은 사람들을 대하실 때 굉장히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셨다. 복음서에서 쓰였던 '농장'이라는 단어가 서신에서는 '사랑' 이라고 표현되었다. 예수는 목자 없는 양이 버려진 대중들을 보시며 자신의 존재 깊숙이 동정심을 느끼셨다. 이 동정심으로 인해 그분은 사람들의 음식과 건강이라는 육체적 필요를 채워주셨고, 진정으로 거룩한 삶의 비밀을 보여주시려 애쓰셨다. 예수의 동정심은 단순한 감정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행동으로의 요청이요, 궁핍한 사람들을 위한 사심없는 헌신으로의 요청이었다. 그분은 대중을 대하실 때나 개인을 대하실 때나 똑같은 정도의 동정심을 갖고 대하셨다. 예수에게서 효능이 나갔을 때 그분은 그 손실로 인해 후회하지 않으셨다. 사랑은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랑없는 자를 사랑하시고 그들을 언제까지나 극도로 사랑하시는 것. 바로 이것이 바울이 말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 (엡3:18)이다. 이것은 죽음을 통해 증명된 사랑이며-"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갈2:20)-아직도 살아있는 사랑이다.
예수는 겸손으로 옷입으신 분이다. 그분은 이러한 자신의 성품에 대해 꾸밈없이 말씀하실 수 있었다(마 11:29), 그리스도는 그 당시 허약한 점으로 경멸받던 겸손을 고귀한 것으로 만들어 놓으셨다. 우주를 창조하신 분,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 장차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게 될 분이셨으나 예수는 이러한 점들로 인해 높임받지 않으셨다. 기본적으로 예수의 겸손은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러 오셨다. 주님의 인격은 완벽함과 죄없으심으로 관 씌워지셨다. 주님의 완벽하심은 단순히 죄없으심이 아니다. 그것은 주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에 하늘의 거룩함을 고취시키는 것이다. 혹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분노하시고 그들을 혹독히 비난하신 점을 들어 그분이 적어도 완벽하시지 못한 흔적을 드러내셨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의로운 분노의 능력이 없는 인격은 불완전한 인격이다. 만일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드러내시는 데 실패했다면 진리의 대표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못하신 것이 될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과 꼭 같았으니, 하나님은 사악함에 대해 날마다 분노하신다.
5. 예수가 미친 영향. 그렇게 짧은 삶을 살고 지리적으로도 제한된 영역 안에 계셨고, 당시에는 세상에서 별로 주목받지도 못하신 분이 지금껏 인간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힘으로 선을 이루어 오셨다. 모든 성경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필수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성경 중 가장 짧고 개인적인 서신인 빌레몬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오셨다는 점에 영감받아 기록되었다. 복음서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를 묘사하고 있으며, 서신서들은 성령 안에 계시는 그분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교회가 확장되는 승리의 이야기들을 기술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그분이 다시금 역사에 나타나심으로 영광의 승리를 얻을 것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예수가 성도에게 미치신 영향은 너무도 철저하고 포괄적이어서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이 되었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그들은 믿음으로 예수를 알게 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분이 그들의 마음으로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었다. 그러나 예수를 영접함으로 그들은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가치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렇듯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정상적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시는가 하는 것은 다소의 사울의 예를 통해 볼 수 있다. 그리스도가 아니었으면 세상은 그에 대해 결코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갔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친숙한 이름으로 기억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손길을 느낀 죄인들은 이후에 결코 이전과 똑같이 존재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던 당시의 지도자들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15:22), 그리스도는 세계의 양심이다. 그분은 세상의 빛이시므로 사람들이 그 빛 앞에 섰다가 돌아서 버리면 그들은 더욱더 깊은 어두움 가운데로 걷게 되고 희망이 없게 된다.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는 조직화된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셨다. 그분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가르치셨고, 영혼의 가치와 인성의 귀중함을 교훈하셨다. 이로 인해 여성의 지위가 꾸준히 향상되어 왔고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으며 어린아이들이 사랑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정부와 사회 단체들이 크게 사회 봉사에 참여하는 것도 사실은 그리스도의 이름과 정신으로 행동하는 기독교 교회에 자극을 받아서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각종 예술품도 하나님의 아들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소망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들을 내놓을 수 있었다.
베토벤은 헨델을 모든 시대의 가장 훌륭한 작곡자라고 평하면서 누구든 헨델이 메시야의 성육신을 생각하고 눈물을 쏟은 것처럼 감동받지 않고서는 결코 '메시야'란 작품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독교 국가에 있는 모든 교회의 하늘을 찌르는 뾰족탑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조용히 증거해 주고 있다. 도덕가들과 철학자들도 설사 그리스도가 영혼의 구원자이심을 믿지 않는다 해도 그분을 인류의 가장 커다란 희망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있다. 이는 그들 역시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동경하고 있다는 반증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