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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예스라히야 / 예식 / 예언(자)(하다) / 예절 / 예정(하다)

예스라히야 Jezrahiah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예루살렘 성벽의 낙성식에서 악사들을 감독한 사람으로(느12:42), 역대상 7:3의 '이스라히야와 동일인이다.

예식 service

예법에 의하여 행하는 격식을 뜻하며, 유월절에 관한 하나님의 지시와 이 예식을 준수할 것에 대한 요구의 말씀에 사용되었다(출12:25-26).

예언/-자/-하다 prophesy

예언하는 능력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비밀한 계시를 깨닫고, 앞일을 예고하는 능력으로 성령의 은사이다(고전13:2). <참조> 대언자, 선지자

 

예절

예의 범절을 뜻하는 말로, 예의 바르다는 것은 주제넘지 않고 심중에 자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말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예절을 지켜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마지막 장에서 개인적인 문안 인사를 하면서 특히 뵈뵈를 천거하고 성도들이 주 안에서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도록 권한다(롬16:2).


예정/-하다 predestinate
1. 성경적 어휘
영어의 '예정' 은 불가타(벌게이트)역이 헬라어 프로오리조를 번역한 프리데스티노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신약이 주로 하나님과 관련해서 사용하는 프로오리조는 사람의 상황, 또는 상황에 대해서 사람을 정한다는 개념을 표현한다. 신약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결정하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져다주시는 복과 운명은 하나님 자신의 의지이며, 하나님의 선한 기쁨이고, 하나님 자신의 사려깊은 앞선 결심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예정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언급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신약이 하나님의 의지에 대해 말하는 그 유일한 의미는 아니다.성경은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목격하신 것을 계시적 명령을 통해 드리내시기나 사람들의 환경을 통해드러내신다. 성경에 깃든 하나님의 의지는 법과 계획을 포함한다.
구약은 추상적이며 보편화된 형태로서의 예정의개념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특별한 일에 있어서는 계획하고 결정하신다는 것을자주 말하고 있다(시139:16;사14:24-27;19:17;46:10;렘49:20;단4:24), 신약에서 사용된 단어들의 용법은 사람의 운명과 환경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해서 예정을 정의하려고 하는 전통적 방법에 더 호의적이다.하나님의 우주적 계획과 통치에 관한 더 광범위한 면이 일반적으로 '섭리' 라고 하는 것 속에 포함되고 있다. 성경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예정에 관한 의미를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하나님의 계획 속에 그 위치를 잡아야 할 것이다.
2. 성경적 진술(표현)
(1) 구약에서 구약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격적이며, 능력이 많고 계획하시는 일은 무슨 일이나 성취하시는 분이며, 또한 그분의 힘은 무궁하며, 목적하신대로 완전히 이루시고야 마는 분으로 소개한다(욥9:12;23:13;시33:10;사14:27;43:13;단4:35). 그분은 그가세우신 목적(시 16:4)에 따라 모든 것을 명령하시고, 지도하시며, 왕들의 생각(시21:1)과 모든 사람들의 계획적인 말과 행위들로부터 겉으로 보기에 아무렇게나일어나는 일을 포함하여 크고 작은 모든 일을 결정하고 계시는 모든 상황의 주님이시다(잠16:1,9;21:1). 하나님은 능치 못할 일이 없는 분이시다(창 18:14;렘32:17). 사람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생각은 아주 어리석은 것이다(시 2:1-4). 이사야 선지자의예언은 하나님의 계획이 역사 속에서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하는 것을 구약의 다른 어떤 책보다더 강조하고 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목적은 영원하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현재와 미래의 사건을 '오래전에', '태초부터 계획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비교. 사22:11;37:26;44:6-8;46:10). 또 모든 사건을 다스리시는 분은 그분밖에는 아무도 없으며, 그가 예언하신 사건의 출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사14:24-27;44:24-45. 비교, 왕상22:17-38;시33:10;잠19:21:21:30), 밖으로 보기에는 믿을 수 없는 이제 막 일어나는 일을 예언하는 여호와의 능력은 역사를 주관함으로써 입증된다. 반면에 이러한 사실들을 예언하지 못하는 우상들의 무능함은 그들이 아무것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사 44:68:45:21:48:12-14), 때때로 여호와는 그가 그 일들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진행하고 있는 상황을 바꾸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예를 들면, 그분은 후회하셨을 때 이전 행위를 바꾸셨다(창6:5;렘 18:8,10:26:3,13;욜2:13;욘4:2). 그러나 성경적 문맥에서, 이러한 신인동형론의 요점과 목적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실제로 인격적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실제로 모든 것을 정하시며 인간의 일을 조종하신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목적을 가지고 다스린다는 것, 즉 하나님 스스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작정하신 바대로 이루신다는 것은 성경의 이야기 가운데 최초복음(창3:15)과 아브라함에게 하신(창12:3) 약속으로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이 주제는 가나안에서의 보호와 복지에 대한 광야의 약속을 통해서(신28:1-14),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의 사역이 성공할 것이라는 메시야적 영광의 예언의 모습에서 발전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주제는 ‘사람의 아들' (인자)의 통치를 시작하시기 위해서 이방 세계 제국의 흥망과 성쇠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해 보여주신 다니엘의 환상에서 그 절정에 다다른다.
구약성경이 그의 언약의 백성이자 그의 구원 사역의 목적과 수단이 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을 설명하는 것은 인간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라는 점에서이다. 이러한 선택은 과분한 것이고(신7:6;겔16:1), 완전히 은혜인 것이다. 또 이 선택은 목적론적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축복받기로 운명지어졌고, 그래서 다른 민족들에게 축복이 되어야 한다(비교 시 67편:사2:2-4;11: 9,60;슥8:20;14:16). 그러나 그 구원은 잠시 동안은 배타적이었다. 즉 이스라엘의 선택은 나머지 다른 민족들에 대한 고의적인 간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신7:6;시 147:19;암3:2;롬9:4; 엡2:11), 천년 이상 동안 하나님은 그들을 언약의 바깥쪽에 놓아두셨고, 선택받은 백성에게 대항하는 그들의 민족적 범죄와 악행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게 하셨다(암1:3-2:3. 참고. 사13-19장).
(2) 신약에서 신약의 저자들은 하나님께서는 일들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시고, 그의 목적하시는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역사를 다스리신다는 구약의 신앙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예수의 사역과 그리스도인의 다스림이 이전에 주셨던 성경적 예언의 성취를 표현한다는 것과(마1:22;2:15,23;4:14;8:17;12:17) 하나님의 궁극의 목적이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교훈하기로 되어 있다는 한결같은 그들의 주장은 이것으로서 충분히 입증된다(롬15:4; 고전10:11;딤후3:15). 그러나 선택의 개념이 새롭게 발전되고 있다.
선택의 개념은 국가적 이스라엘이 아니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데 계속해서 개별화되고 있다(시65:4). 구약은 선택을 하나님의 역사적 부르심과 동일시하였다(비교. 느9:7). 그러나 신약은 선택을 창세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예정된 하나님의 행동으로 표현함으로써 두 가지 사실들과 구별했다(마25:34;엡1:4;딤후1:9). 사람에게 주신 모든 구원의 은혜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선택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신약의 일관된 개념이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통치하시기로(행2:23-24;3:20;4:28) 정해지셨다는 것만이 아니라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과 관련해서 주신 은혜의 열매라고 하는 자기의 믿음을 강하게 증거하고 있다(행 2:47;11:18,21-23;14:27; 15:17이하;16:14;18:27).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이 아버지가 그에게 주신 자들을 구원하도록 보내셨다고 말씀하신다(요6:37;17:2,6,9,24;18:9). 그들은 그의 양이고 그분의 것이다(10:14,26;13:1). 주님은 그들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셨다(17:20). 주님께서는 그들을 성령으로 이끄실 것이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며, 아버지와 교제하게 하며(10:28), 그들을 지키고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며(6:39;10:28;17:11,15;18:9), 그들을 영광으로 이끌며 (14:2), 마지막 날에 그들의 몸을 부활시키실 것이다(6:39). 그러므로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해서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것이 여기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이 원리에 대한 아주 충분한 설명을 바울의 서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은 영원부터 하나님이 교회를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셨다고 선언한다(엡3:3-11). 계획의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워지며(롬8:9), 또한 그렇게 새로워진 사람들의 공동체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야만 한다는 것이다(엡4:13),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이러한 운명을 공유하도록 예정하셨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누릴 수 있는 것이다(롬8:28;엡 1:3; 살후2:13;딤후19벤전1:1). 이 선택은 완전히 은혜이다(딤후 1:9). 왜냐하면 이것으로부터 믿음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효과적인 부르심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르심은 공의(롬8:30), 성화(살전2:13), 영화(롬8:30)를 요구한다. 바울은 이 가르침을 현재의 안정과 최종적 구원을 보장해 주기 위하여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고 있다.
3. 선택과 영벌
영벌은 예레미야서 6:30에서 철을 제련하는 것으로부터 끌어낸 비유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참고, 사 1:22), 그 개념은 타락의 결과로 인해서 하나님의 시험에 통과하지 못해서 거절되었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신약성경에서도 나타난다. 그것은 이방 세계(롬1:28)에 관해서 사용되었고,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고전9:27;고후13:5. 참고, 딤후3:8;딛1:16). 어거스틴 이후로 기독교의 신학은 역사 속에서 특별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거절이 아니라, 하나님은 영원부터 그들을 통과시키기 위한 결정으로서 영벌을 말해왔다(벧전2:8;유4절). 그리하여 그것은 선택과 영벌을 함께 구성하는 것으로서 예정을 정의하는데 보편적이 된 것이다. 영벌이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이나 목적에 포함되어야만 하는지에 관해 논의가 있다. 어떤 사람은 로마서 9:17, 21;11:7에 근거해서 그 포함을 정당화하고 있다. 실제로 로마서 9:22을 보면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무정함과 구원하시지 않음이 예정하시는 결과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