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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WILL CHURCH/성경사전

(성경사전) 이소할 / 이스가 / 이스라 / 이스라엘

이소할 Jezoar

유다 자손으로 아스홀과 헬라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대상4:5-7).

이스가 Iscah

데라의 후손으로 하란의 딸이며 밀가의 자매이다(창11:27-29).

이스라 Izrah

다윗이 군대를 12개의 부대로 개편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오월 다섯째 장관을 맡은 삼훗이 이스라 출신이었다(대상27:8).

이스라엘 Israel

성경의 용례는 다음과 같다 : (1)한 개인으로서 이삭의 아들 <보라> 야곱, (2) 그의 자손들인 히브리 12지파들, (3) 유다지파 하에 있던 남쪽의 반대편으로서 북쪽의 10개 지파들을 가리키며 에브라임 지파가 이끌었다. 야곱이 주의 천사와 씨름을 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 이름을 주셨다(창32:28;호12:4). 이 개인적인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이 싸우신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치료하신다''그가 하나님과 겨룬다' 등이다. 이후의 야곱은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주신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경험을 한 변화된 사람이었다.

그의 열두 아들들은 글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아들들이었으나(창12:5:45:21), 이스라엘은 그들 각각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49:7,160.'이스라엘의 아들들' 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원하신 백성 전체를 의미하게 되었다(32:32:34:7). 그리하여 얍복 강에서의 야곱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이 세운 나라의 기초가 되었다. 이스라엘 역사의 연대기적 개요는 다음과 같다.
1. 포로기 이전 시대
(1) 족장시대 B. C. 2000-1720
(2) 애굽시대 1720-1290
(3) 출애굽과 광야시대 1290-1250

(4) 정착기 1250-1020
(5) 통일왕국시대 1020-922
(6) 분열왕국시대 922-587
① 이스라엘 왕국 922-721
② 유다 왕국 922-587
(7) 바벨론 포로기 597/587-539/538
2. 포로기 이후 시대
(1) 바사 시대 539-331
(2) 헬레니즘 시대 331-168
(3) 마카베오 시대 168-63
(4) 로마 시대 63-A. D. 400
이 개요는 학문적으로 받아들여진 여러 가지 연대 개요들 가운데 하나이다.
1. 바벨론 포로 이전 시대
(1) 족장과 애굽의 시대(창세기 12-50장). 이스라엘 민족의 근원은 메소포타미아 계곡으로부터 시작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계곡의 남쪽에 있는 우르와 관련되어 있었다. B. C. 2000년경 하늘의 부르심을 좇은 아브라함은 그의 가족과 함께 우르를 떠나 하란에 도착하였다. 하란에 머무는 동안 그의 아버지인 데라는 죽게 되고 그의 형제 나홀은 하란에 머물기로 하였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는 최종적으로 그의 가정을 이루어 가나안까지 이동하였다. 그 후 그들에게는 약속의 자손인 이삭이 태어났고 그는 나홀의 손녀인 리브가와 결혼하였다.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서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는데, 야곱은 그의 길을 다시 하란으로 향하여 리브가의 오빠인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과 결혼하였다. 야곱과 그의 아내들에게서 열두 아들이 태어났고, 이들은 애굽으로 이주하여 후에 열두 지파가 되어 아브라함에게 처음에 주어진 약속의 성취를 위한 기초가 되었다. 3. C. 1290년 모세가 애굽에서 이끌고 나온 민족은 바로 이들의 후손들이었다.
(2) 출애굽과 광야의 시대(출1-24,32-34장;민10-14장).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배반자인 모세를러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을 때부터 시작된 시내산의 경험의 산물이다. 애굽의 고센을 떠나 홍해의 기적 등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모세의 지도에 의하여 시내 반도에 도착한 후 히브리인들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출22:24)과의 언약을 비준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땅이 없었던 이스라엘은 존재를 갖게 되었다. 11개월간 그들은 시내산에 머물렀다. 비록 비평가들은 그들이 머물렀던 기간을 더 오래 추정하지만 그들의 율법(the Torah)이 형성된 것은 이 기간동안이었다. 어쨌든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계속하여 다투는 언약의 백성으로서 시내산을 떠났다. 광야의 시험은 40년간 이루어졌고, 이 용어는 한 세대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이 기간동안 출애굽한 세대는 다 죽었는데 그 이유는 구원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까지 인도하실 것을 믿지 않고 거절한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었다.
(3) 정착 시대(수1-24장삿1-16장). 마침내 그들은 요단강 동편 지역을 통하여 가나안에 들어갔다. 이스라엘인들의 정착 사업은 가나안 지역의 중간에서 시작하여 남단을 거쳐 북단에서 끝났다고 기록되었다. 여호수아는 각 지파에게 땅을 나누어 주고 언약을 새롭게 하였다(수24장). 거의 2세기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언약궤를 중심으로 한 자치적인 지파들로써 공통된 예배의 신앙을 중심으로 원만한 관계 속에서 연합되어 있었다.그들 위에 기드온과 삼손같은 남자 사사와 드보라 같은 여자 사사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사사들로서 출현하였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단결 의식은 점차로 사라져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기'까지 하였다(삿21:15). 
(4) 통일왕국(삼상1-3,8-15장;삼하1-6,9-20장;왕상14,6-8,11장). 그러나 사사시대로 들어와서 지파들이 연합되지 않았으므로 통일된 경제적, 정치적, 또는 군사적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블레셋의 위협이 나타나는 등 다른 요인들로 인하여 왕 제도의 설립을 요구하게 되다. B.C. 약 1020년경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군주국가가 되었다. 사울은 종종 사사로서 행동하였으나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13. C. 1020-1000)이었다. 사사들처럼 그도 하나님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다스리는 권세를 위임받았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그는 용맹하게 블레셋과 싸웠으며 종국에는 싸우다가 죽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이스라엘을 완전한 군주국가로 성장시킨 다윗을 위한 길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다윗 왕은(B. C. 1000-965) 비록 그 관계가 빈약한 것이긴 하였지만 백성들을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군주국가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하도록 한 영예를 받고 있다. 그는 남방과 북방을 연합시킨 후 예루살렘을 왕국의 수도로 삼고 블레셋을 정복하였고, 이스라엘의 국경과 무역을 넓혔으며, B. C. 587년 유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되기까지 아달랴(B. C. 842-837)를 제외하고는 예외없는 왕의 혈통을 세웠다. 다윗의 아들로서 왕위계승자는 솔로몬(B.C.965-922)이었다. 솔로몬은 다윗이 축적한 모든 것을 물려받았으나 그것을 발전시키거나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그는 일시적으로 무역을 진흥하였으며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죽자 그의 유산은 왕국의 분열이었다. 그 후로 우리는 북방을 이스라엘, 남방을 유다라고 말한다.
(5) 다윗왕조(열왕기서;아모스;호세아;이사야1-39장;미가;예레미야). 북방은 남방보다 국제적 정치 관계에 더욱 넓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는 고대 동서무역 통로가 이스르엘 계곡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지났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은 유다보다 면적이 넓고 인구도 많았다. 이스라엘이 더 넓게 국제 관계에 연결된 것은 유다보다 더 급속하게 정치적으로 멸망당할 운명이었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B. C. 721년에 앗시리아에 의하여 멸망된 반면, 유다는 597년부터 시작하여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1세(B. C. 922-901)의 통치 때부터 남방과 분리된 권력으로서 출현하였으나 더욱 소요가 많은 나라가 되었다. 2세기에 걸쳐 존재하는 동안 19명의 왕들이 통치하였으며 쿠데타가 일어나 8번의 왕위 계승 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에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둔 것으로 기억된다(왕상12:28-33). 여기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 성전과 맞서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있었다.
B. C. 9세기에 오므리(B. C. 876-869)로부터 시작하여 여호람(B. C. 849-842)으로 끝맺는 오므리 왕조가 형성되었다. 아마도 이 기간동안의 주요 문제는 가나안의 풍요의 신 바알을 숭배하는 바알 신앙이 여호와 신앙과 공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고 공공연하게 출현한 것이다. 이 문제는 아합 왕(B. C. 869-850) 때에 선지자 엘리아의 예언과 함께 특별하게 언급되었고 여호와 숭배자들은 바알과 여호와를 동시에 심길 수 없었다. 한편 예후(B. C. 842815)는 바알 신앙에 대항하여싸움을 일으켰다. 그는 성공적으로 여호람 왕을 내어쫓고(오므리 왕조가 끝남) 이스라엘 전역에서 바알 신앙을 도말하는 일을 선동하였다. 여호람만 죽었을 뿐아니라 여왕 이세벨과 수많은 바알 제사장들, 그리고그의 즉위년에 그의 친족을 방문하려고 잠시 들른 유다 왕 아하시야도 죽였다.
바알 신앙에 대한 싸움은 8세기 후반부에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선지자 운동이 일어나게 된 주요 요인이되었다. 거의 50년간 남방에서는 이사야(B. C. 742-701)와 미가(B. C. 724701), 북방에서는 아모스(B. C. 750년경)와 호세아(B. C.745년경)가 예언하였다. 아모스는 특별히 사회 정의를 강조했다. 그는 특별히 이스라엘이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책임을 인식할 것에 관심을두었다(암3:1-2), 그는 이스라엘이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암7-9장에 기록된 다섯 가지 계시를 참고하라).
성경에서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유일한 북방 선지자 호세아는 '헤세드' (언약적 충성) 신학을 제안한 이스라엘의 B. C. 8세기의 선지자였다. 그의 아내 고멜과의 관계를 비유로 하여 그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께충성할 것을 권면하였다(호1-3장). 여호와의 사랑에대하여 이스라엘을 확신시키면서 호세아는 이스라엘에게 이 나라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배반함으로써 오는 임박한 심판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선지자들이 본 위험들은 B. C. 8세기 초엽에 이스라엘에서 실현되었다. 이스라엘의 왕 호세아(B. C. 732-722)는 애굽이이스라엘을 방어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앗시리아에대한 반역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살만에셀 5세가 이끄는 앗시리아의 군대가 이스라엘에 쳐 들어와 급속하게 사마리아 부근 지역을 점령하였다. 사마리아의포위는 3년간 지속되었다. 그 사이에 살만에셀 5세는죽었고, 사르곤 2세가 앗시리아의 왕위를 이어B. C. 722년에 사마리아를 멸망시켰다. 앗시리아의 정책에 따라 수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미지의 지역으로 유배되었고 다른 점령 지역의 사람들이 사마리아로 유배되었다(왕하17장). 이 정책은 민족주의를 말살하고 정치적 소요를 예방하려는 의도였다. 이스라엘의 경우 이 정책은 종국에는 혼혈민족을 출현시켜 ‘순수한' 유대인의 멸시를 받게 되었다. B. C. 722년 사마리아의 멸망은 통일왕국의 일부분인 이스라엘의 종말을 표시하였다.
B. C. 922년 솔로몬의 죽음은 분리된 남방 왕국으로서의 유다가 시작된 기점이 되었다. 솔로몬은 그의 아들 르호보암(B. C, 922-915)에게 유다의 보좌를 넘겨주있다. 르호보암은 언급된 한 경우만 제외하고는B. C. 922년부터 B. C. 587년까지 이 나라를 다스린 다윗 왕조 중에서 이스라엘보다 더 안정된 나라를 통치한 왕이었다. B. C. 842년 예후의 반란으로 야기된 이스라엘의 위기 동안 유다의 왕 아하시야(B. C. 842)가죽었다. 아하시야의 죽음은 왕의 어머니인 아달랴(B. C. 842-837)가 왕위를 찬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아달랴의 5년간의 통치는 다윗 혈통의 왕위 계승에 있어서 유일한 중단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기간동안 유다에도 바알 신앙을 세우려는 체계적인 시도가있었다는 점이다. 남방 왕국에서의 바알 신앙은 부분적으로나마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졌고, 따라서여호와의 제사장들이 어린 왕 요아스(B. C. 837-800)를보좌에 앉혔을 때 여호와 신앙을 대신하여 바알 종교가 이룬 발전은 급속히 퇴보하였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B. C. 8세기 때의 유다는 활동하고 있던 선지자들의 정신을 공유하였었다. 웃시야 왕의 사망(B. C. 742) 때에 여호와의 선지자로서 위임을받은(사6장) 예루살렘의 이사야는 세 번의 정치적 위기 때에 예언자이자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아하스 왕(B. C. 735-715)의 통치 기간동안 시리아이스라엘 동맹이 가져온 위기의 때인 B. C. 735년에 대변하였고(사7장), 히스기야 왕 통치 기간(B. C. 715-689)에 이사야는 두 번의 정치적 위기 때에 대변자가 되었다. B.C.711년에 그는 애굽이 주도하여 앗시리아에대항하는 반역에 반대하여 경고하였으며, B. C. 701년그는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을 때(왕하18-19장;사36-37장) 여호와의 대변자가 되었다.이사야는 여호와를 신뢰하고 여호와께서 억압하는 자들을 대항하여 싸우시도록 하라고 제안하였다. 이사야의 하나님은 거룩함의 개념으로서 가장 잘 묘사되는 오직 한 분이셨다.
모레셋의 미가(B. C. 724-701)는 또 다른 유다의B. C, 8세기경의 선지자였다. 여러 측면에서 볼 때 미가는 다른 8세기 선지자들이 지니고 있는 근본 정신이 결핍된 듯 보인다. 그러나 미가서 6:18은 여호와의 삐성이 언약에 대한 그들의 지속적인 기질과 범법으로 인하여 심판을 받게 되는 법정의 장면을 뛰어나게 묘시한 것이다. 이 문단의 절정인 8절은 아마도 현대 해석자들이 갖고 있는 것 중에서 8세기 선지자들의 신앙을 가장 잘 정의한 것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B. C. 8세기에 멸망한 반면 유다는 B. C. 7세기와 B. C. 6세기 초까지 존속했다. B. C. 7세기의 유다는 참담하기도 하고 숭고하기도 하다. 므낫세의 긴 통치기간 동안 유다는 배타적인 여호와 신앙에 대한 관심을 대부분 버렸다.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처형되었고 바알 신앙이 권장되었다. 앗시리아의 점성술과 관련된 풍습들이 병합되었고, 사람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일이 다시 실행되었다. 진정 이것은 유다 역사의 암흑기였다.
그러나 므낫세를 바로 뒤이은 왕 요시야(B. C. 640-609)는 므낫세가 행한 퇴행을 역전시켰다. 요시야 치세 기간인 최소한 B. C. 621년 초에 신명기에 따르는 개혁이 일어났다. 이 개혁에는 이중적인 초점이 있었다. 하나는 요시야가 메소포타미아와 애굽의 권력이 약해진 상황을 틈타 남방과 북방을 새로이 통일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기대는 바알 신앙을 배격하려는 종교적 열의를 동반하였다. 모든 제사의식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도록 한 명령도 심지어 바알 신앙적인 '높은 곳'을 사용하는 것을 예방하며, 바알 신앙을 동조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도록 모든 제사 활동이 감시될 수 있는 곳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그의 소망이 동기가 된 것이었다. 이 개혁은 여호와 신앙과 유대주의를 발전시키는 장기적인 운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 개혁을 일으킨 초기의 힘은 B. C. 609년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애굽의 바로느고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죽음으로써 중지되었다(왕하 23:29).
요시야의 죽음 이후로 이 국가는 더 이상 효과적인 개혁을 지속할 지도자를 갖지 못했다. 여호야김(B.C. 609-598)은 종주국인 바벨론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도착하기도 전에 여호야김은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B. C. 598-597)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리하여 B. C. 597년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을 때 여호야긴은 포로로 끌려갔다. 그를 대신하여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를 내세웠다(B. C. 597-587), B. C. 587년에 바벨론에 대항한 그의 반역은 B. C. 587년에 느부갓네살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약탈과 함께 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을 초래하였다. 이로써 유다 왕국은 끝나고 바벨론 포로(B.C. 597/587-530/538)가 시작되었다.

2. 바벨론 포로 시대(에스겔, 이시야 40-55장). 바벨론 포로는 B. C. 597년 예루살렘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유배함으로써 시작되었고, B. C. 587년과 13. C. 582년에 추가되었다(렘52:30), 이에 포함된 사람의 수는적었으나(렘52:30에 의하면 4,000명), 이 사건은 이 민족의 삶에 있어 중요한 시대였다. 기본적인 생활로 보자면 못사는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어느정도 사회적, 경제적인 자유를 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으로부터 격리되었기 때문에 이 이국 땅에서 여호와의 찬송을 부르기를 거의 소망할 수 없었다(시137편).
바벨론 포로 기간은 비교적 짧았음에도 불구하고이 민족의 종교적 발달에 있어서 한 분기점이 되었다.가장 중요한 것은 포로 기간동안과 바로 직후까지 율법서(the Torah)가 기본적인 면에서 현대의 형태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유대주의와 유대인을 진정으로 '책의 민족'이라 부르는 기초가 되었다. 이에부가하여 바벨론 포로 전의 선지자들과 관련된 대다수의 기록들, 구약의 역사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편집된 글들(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 그리고 선지자 에스겔의 글, 제 2의 이사야로 알려진 인물의 예언서 등 다른 글들이 포함되었다. 에스겔은 그의관심에 있어서 매우 강력한 독립주의자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스라엘 발전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여호와께서 완전한 기동력을 지니셔서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에만 국한되지 않으신다는 인식을증가시켰다(겔1-3장). 그의 메시지는 종종 정말 해석하기 어렵지만 그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며(겔33-39장), 또한 회복될 예루살렘에 대한 믿음의 청사진을 제시하였다(겔40-48장).
이사야 40-55장의 예언들은 바벨론 포로의 끝(B.C. 540)에 관련된 상황을 설명하고 그 백성을 제 2의 출애굽을 맞이하도록 준비시키며(사40장), 또한 그들의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역할에 대하여 인식시키고자 하였다(42:14;49:1-6;50:49;52:13-53:12). 이사야서의 이 장들은 성경의 유일신 사상(44:6;45:5), 곧 여호와의 보편성과 피할 수 없이 결합되는 개념에 대하여 첫번째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를 제공한다(42:6;45:22). 바벨론 포로 기간동안 유대주의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회당이라는 기관이 설립되었다. 예루살렘의 성전에 모일 수 없게 되자 회당은 이들 공동체에게사회적, 교육적, 그리고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중요한 것은 회당은 결코 희생 제사가 드려질 수 있는 장소가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 D.70년 로마가 예루살렘에 재건된 성전을 파괴하자 회당은 유대인이 정착하는 어느 곳에서나 유대주의를 보존해 주었다.
3. 바벨론 포로 이후 시대
(1) 페르시아 시대(스1,5-6,9-10장;느1-6,89,13장;학개 스가랴오바댜;말라기;욥기;전도서;잠언;룻;요나;에스더). 유다의 바벨론 포로기 이후 시대는 B. C. 539년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바벨론을 침공했을 때로부터 시작된다. B. C. 538년 초에 고레스는 포로들이 고향으로돌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는 명령을 내린다(스1:2-4;6:35). 그리하여 여호야긴의 후손인 스룹바벨의 지도 아래 수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되돌아왔다. 불행하게도 스룹바벨은 이유를 알 수 없이 실종되는데, 이것은 아마도 몇몇 유대인들이 스룹바벨을 고대하는메시야로 생각하는 것과 연관된 잠재적인 위험성을페르시아가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학2:20-23). 예루살렘에 돌아오는 즉시로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착수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은 조금 밖에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근본적으로는 선지자 학개 스가랴의 영향으로 인하여 성전은 B. C. 520년에서 515년까지 재건되었고 성전 예배가 다시 구성되었다.
성은 느헤미야(B. C. 445년과 B. C. 432년 두 차례에걸쳐 유다 지방의 페르시아 총독으로 임명됨)가 성벽을 재건하고 보수하기까지 무방비 상태였었다. 같은시기에 에스라 (모세 5경의 율법사이며 첫번째의 서기관)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공동체 생활의 중심에 율법서(the Torah)를 위치시키는 중요성에 대한 감명을주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현대의 유대주의가 탄생되었다. 성전의 완성(B. C. 515)과 느헤미야의 첫 방문(B. C. 445) 사이의 기간동안 여러 선지자들이 일어나이 시기에 대한 각각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짧은 오바다의 선포는 유다 민족이 포로로 끌려갔을 그들의 땅과 집들을 탈취한 에돔 족속에 대한 증오의 노래이다. 요엘은 에돔과 애굽에게는 멸망을 유다에게는보존을 의미하게 될 여호와의 날을 강조한다. 밀리기는 예배의 개혁의 필요성을 말하고, 제사장의 활동들을 정죄하고, 유대인들이 비유대인과 결혼한 것과 그당시 편만했던 경건 개념을 규탄하였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학 활동중의 하나는 욥기서, 전도서, 잠언, 추가된 몇 편의 시편(1,32,34,37,4991,112,119,128편)으로 성경에서 대표되는 지혜문학과 관련된 것이다. 이 글들은 잠언 22:1723:11과 같이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로부터 그 표현이나 사상을 대다수 빌려와서 이스라엘화시킨 것이며, 청소년에게 주로 관련되어 있고(전12:18 노년에대한 풍자),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삶의기초가 됨을 인식함으로써 건강하고 생산적인 삶을살도록 권면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욥은 사랑하는 자들을 잃고 재산을 빼앗기고 그의신체적인 건강에 심한 공격을 받음으로 겪은 어려움들을 이야기한다. 그의 고통스러운 시련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권에 대한 그의 신념을 굳게 지켰다. 다만 그가 이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할 수 없어 답답해 하는 것은 인내하는 그의성격에 위배된 것이었다. 욥기는 무고한 자들이 고통받는 것에 대한 이유를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만약사람이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순복한다면 그는아주 비참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의미있는 관계를 경험하게 되리라는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의미를 내포한 이 책은 고통은 죄의 산물이요 보상은 옳은행동의 산물이라는 욥의 친구가 주장한 생각을 직접적으로 반증한다.
반면에 전도서는 매우 다른 종류의 책이다. 근본적으로 저자는 삶을 의미없는 것으로 묘사한다(전1:2 '헛되다'). 그의 관심은 어느 인생길이 삶에 의미를 주면서 성공적으로 추구될 수 있는가에 있다. 쾌락(2:1-11),지혜(2:12-16), 부(4:13-6:12), 그리고 종교적 서약(5:1-6)의 길이 추구되었으나 모두가 허망한 길이었다. 의미있는 삶에 가장 가까운 제안은 이해할 수 없는 때에라도 주어진 삶에 순응할 때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전도서 3:1-8이다. 아마도 이러한 순응을 통하여 그들은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자신들을 발견하게 되며 따라서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잠언은 체계적인 분석이 불가능하다. 이 책은 수많은 주제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룬다. 짧고 간결한격언으로도 하고, 31장의 경우에서는 긴 시로도 표현한다. 주제의 방향은 삶의 수여자이신 여호와로부터(잠1:1-7), 히를 제어하는 것의 중요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16:28). 이 책은 사업(6:1-5)과 친구(18:24)에 대하여 주의할 점들을 강조하며, 근면(6:6-11)과 게으름(24:30-34)을 대비시킨다. 이 책에 대한 개요 또는 분류는 어렵지만 독특한 히브리인의 감각에서 보면 이 책은 지혜이다.
유대주의가 발전하면서 여호와께서는 비유대인들에게도 필요되는가에 관한 피할 수 없는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룻기와 요나서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의신앙의 울타리 안에 모든 인류를 포함하도록 권면하는 반면, 에스더서는 매우 민족주의적인 부림 축제를지지하고, 여호와께서는 외국의 적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시는 유대인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소극적인애국심을 권장한다. 이러한 갈등은 신약 시대에까지지속되었다(행15장).
(2) 그리스 시대. B. C. 336년 마게도냐 필립이 살해되자 19세된 그의 아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교육받은 알렉산더가 왕위를 계승하여 후에 알렉산더대왕으로 지명된다. 그는 2년 동안 그의 권력을 강화한 후 헬레스폰트를 건너 단일한 그리스 제국을 건설하려는 그의 노력을 시작하였다. B. C. 323년 예기치못하게 그가 죽게 되었는데, 그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그러나 그가 죽었을 때 그는 그가 정복한 지역에지울 수 없는 헬라의 흔적들을 남겨놓았다. 가나안 지역도 이 영향을 강력하게 느꼈음이 틀림없다. 헬라화의 부분적인 결과로 약 B. C. 300년경 연대기 형식의 역사가 쓰여졌다. 역대기, 에스라서, 느헤미야서가 이러한 글들이었다. 열왕기서나 사무엘서와는 달리 역대기는 유다와 다윗 왕조의 업적을 강조하고 있다. 이책은 그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많은 사건들, 예를 들면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 같은 것들은 무시하였다. 연대기 저자들은 알렉산더의 헬라화 운동에 직면하여여호와 신앙의 순결성을 권장하였다. 이와 밀접히 관련하여 역대기서 저자는 예루살렘의 예배 의식의 우월성과 사마리아인들의 예배 의식과의 갈등 관계에초점을 맞추고 있다.
(3) 마카비 시대(단1-7,12장;시편). 묵시의 시대는B. C. 200년으로부터 A. D. 100년까지의 시기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기간동안 유대인들은 종교적, 정치적으로 핍박을 당하였다. 이 상황을 기술하기 위하여 신실한 유대인 공동체 가운데서 임박한 여호와의 중재(仲裁)에 대한 소망을 약속하는 매우 상징적이며 해석하기 힘든 문학이 발달하였다.
묵시의 시대가 출현하는 것은 B. C. 4세기 알렉산더의 가나안 정복으로 말미암은 사건들과 일치한다. B. C. 323년 알렉산더가 죽게 되자 그의 거대한 왕국에 소요가 일어났다. 가나안 지역의 통치권은 그의 후계자들인 셀류쿠스와 프톨레미 사이의 경쟁 대상이 되었다. B. C. 200년부터 198년까지의 전쟁의 결과로 셀류쿠스파의 통치자인 안티오쿠스 3세(B. C. 223-187)가가나안의 통치권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권력의 변화가 가져온 중요성은 그의 후계자인 안티오쿠스 4세(B. C. 187-175)에 의하여 분명하게 되었는데, 그는 유대주의를 말살하려고 하였다. 그가 이 신앙을 없이하려 했던 시도는 제사장 맛다디야와 그의 네 아들에 의하여 주도되는 반란을 야기했다. 네 아들 중 하나인 유다 마카비는 이 반란의 군사적 계획자였으며, 그의 개인적인 이름을 따라 그 반란을 마카비 반란이라고 일컫는다. 그 반란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더욱 성공적이었다. B. C. 165년에 유다 마카비는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했고, 그곳을 정결하게 하여 여호와께 대한예배를 다시 조직했다(하누카 축제의 기원이 됨). 다니엘서는 분명 묵시록으로서 이 시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B.C. 142년 유대인들에게는 셀류쿠스가 부과한 모든 세금이 면제되었고, B. C. 129년에는 모든 셀류쿠스의 군사들이 그 나라에서 철수했다. 다시 한번 유대인들은 그들의 영토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렸다.
시편은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150편 중 대부분이 바벨론 포로 이전 시대의 것이다(시29편). 몇 편은 바벨론 포로 시대의 것이며(시137편), 몇 편은 포로 이후의 것이다(시119편), 두번째 성전의 찬미가로서의 시편은 특별히 그 나라의 다양한 역사적 시대를 통하여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이 민족을 묘사한다는 점과 그 나라가 접하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과 상황들을 밝게 해 준다는 점에 있어서 그 중요성을 지닌다.
(4) 로마 시대. 마카비 반란으로 진정한 자유를 얻었으나 하스모니아 왕조의 통치는 지속적으로 내부적 충돌을 안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유대인들과 비유대인들의 국제 결혼이 갈등을 야기시켰다. 이러한 갈등과 불안은 B. C. 63년에 절정에 이르렀고, 계속되는 소요에 이두매와 나바티아의 왕까지 포함되자 로마의 장군 폼페이가 유다로 출정하였다.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유다 나라는 로마의 팔레스타인 도로 편성되어 A. D. 4세기까지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가 정복하기 이전의 유대 역사는 분명히 바벨론 포로 이후 시대의 한 역사적 시기가 될 것이며, 그들의 발전을 추적해 보면 부요한 역사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대의 시작은 구약 성경의 역사에 외부적인 한계선을 그었다.
4. 영적 이스라엘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업의 확장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신자들이 하나로 모인 교회. 이것은 구약의 종교적 또는 세속적인 모임에 대한 언급들 그리고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의 지역적인 모임들과는 대비되며, 결코 건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과 야곱의 아들로부터 나온 열두 지파에 속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구약시대에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믿음의 봉사를 위하여 그들을 그 분의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이었다. 성경은 분명하게 그리스도께서 실패한 유다 왕국을 대신하여 그분의 하늘 왕국을 세우시려고 이 땅에 내려오셨다고 기록한다(마21:43).
신약 전체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왕국, 또는 하늘 왕국으로 언급된다. 왕국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실제적인 존재, 곧 하나님 또는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신 분이자 왕국을 인격화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표현된다. 바울은 유전된 이스라엘과 참된 이스라엘 곧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긍휼과 평강을 받아들인 하나님의 백성을 구분한다(갈6:16. 영적 이스라엘 곧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유대인들을 대신하였다(롬 9:6-13;벧전2:9).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도 영적 이스라엘에 포함된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스라엘의 운명처럼 나뉜다. 이것은 로마서 11:25-36, 고린도후서 3:16과 같은 문단의 해석에 달려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은 이스라엘과 더불어 시작되어 예수의 생애, 죽으심, 그리고 부활에서 절정을 이룬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하나님의 선택의 역사는 예수에 대한 그들의 거절을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에 의존하기보다는 사람의 성취에 의존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포함하며, '모든 이스라엘' 의 구속에서 절정을 이룰 것이다(롬11:26. 해석이 달라지는 부분은 '모든 이스라엘'의 의미이다.
영적 이스라엘은 교회인가? 아브라함 때로부터 세상 끝까지의 모든 세대의 이스라엘인가? 세상 끝에 있을 유대인들인가? 아니면 마지막 날에 교회로 들어오거나 교회에 속한 믿는 유대인들 중 남은 자들인가? 많은 해석들이 있었으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택의 은혜 안에서 그들이 나온 종족이나 전통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하여 문을 여시고 계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