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욕 covetousness
이익을 탐하는 욕심을 의미하는 말이다. 히브리어 원어상으로는 '어떤 활동으로부터 얻어지는 개인적 이익' 을 말한다. 히브리어 '베차'는 '자르다, 잘라내다' 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잘라내는 일, 즉 오늘날의 속어로 표현하면 '떼어먹는 것' (rip-off), 따라서 탐냄, 혹은 탐욕스러움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이 단어가 나타나는 문맥들은 개인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욕구와 관련하여 그 욕구가하나님을 향한 사심 없는 헌신과 직접적으로 대립됨을 강조하는 바(겔33:31), 그것의 가장 파멸적인 결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무디게 되는 것으로나타난다.
이욘 Ijon
유다 왕 아사의 요청에 의해 아람 왕 벤하닷이 빼앗은 납달리 지역에 있던 이스라엘의 한 성읍이다(왕상15:20;대하16:4),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치리하던 때에 이곳은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 3세에 의해 또다시 점령되어 주민들이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갔다(왕하 15:29).단의 서북쪽 1.3km 지점인 오늘날의 '델 에드 딥빈' 이이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울다 languish
'꽃이나 잎이 지기시작하다 쇠약하여지다' 라는 말이다. 이 단어는 레바논과 같은 풍요로운 땅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선 황폐하게 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비유적 표현으로 언급된다(1:4).
이웃 neighbor
친구, 가까운 관계, 또는 근처에서 사는 사람. 아브라함의 언약(창12:1-3)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도덕적인 의무를 세웠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웃들에게 관심을 갖도록 명령받았다. 아홉번째와 열번째 계명(출20:16-17;신5:20-21)은 이웃을 중상모략하는 것을 금하였고, 이웃의 아내, 종, 가축, 또는 재산 등을 탐하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하였다. 사람은 자신의 이웃을 속이거나 그로부터 늑탈하지 않아야 했다(레19:11-13), 이웃을 상하게 한 사람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의보응으로 처벌되었다(레24:19-20). 이웃을 업신여기는것은 죄이며(잠14:21, 공동번역 '배고픈 사람을'), 이웃을 도덕적으로 나쁜 길로 인도하는 것(16:29-30) 또는이웃을 속이고도 “내가 희롱하였노라" (26:19, 공동번역'장난삼아 그랬다' 하는 것도 죄이다. 심지어 이웃을해할 생각을 품는 것까지도 허용되지 않았다(슥8:17).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와 같이(눅10:25-37), 이웃의 개념을 이방인들, 그리고 인류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시켰다. 사도 바울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이 최고의(supreme) 계명이라고 선포하였다(롬13:9-10).
이원론 Dualism
성경 교리의 몇 가지 특징적 주제들을 보다 잘 이해하려면 이원론적 사상과 대조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이원론' 이란 용어는 신학과 철학의 역사에서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으나 그 기본 개념은 상호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몇몇 경우에는 상호 대립하는 두 원리들을 구분하는것이다. 그리하여 신학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영적인 악의 원리나 물질적인 세계와 대립하는 것으로,철학에서는 정신이 물질과 대립하는 것으로, 심리학에서는 영혼이나 마음이 육체와 대립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1. 하나님과 악의 세력. '이원론' 이란 용어는1700년에 간행된 하이드의 책(Historia ReligionisVeterum Persarum)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지만바사(페르샤) 종교 전체를 이원론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문제는 전문가들 사이에 논란이 있다. 그러나조로아스터교의 어떤 시기에 본성적으로 악한 존재,선한 창조자에게 기원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악의 창시자에 대한 신앙이 존재하였다는 것은명백하다. 그런데 이 악한 존재는 선한 영의 피조물과 대립되는 피조물을 존재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사의 영향을 통해 이런 견해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 악의 존재와 그 창조적 능력에 대한 이같은 신앙은 선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믿음으로 완화된다하더라도 성경 저자들로서는 수용할 수 없었다. 사탄과 악의 모든 세력은 하나님에게 종속된다고 성경 저자들은 믿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최후 승리에서만 하나님에게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재의활동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타락한 피조물된 그존재성 자체에서 하나님에게 종속된다고 믿었다(특히 욥1-2장;골1:16-17 참조).
2. 하나님과 세계. 고대의 많은 우주 창조 신화들은 하나님이나 신들이 형상 없는 선재하는 물질에 질서와 형상을 부여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자체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닌 물질은 아무리 하나님의 손에 순응적이라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활동에 한계를 부과하며, 결국 언제나주어진 물질을 다루어야 하는 인간의 창조적 활동과 동화시키게 된다. 성경적 창조 개념에서는 하나님과 세계는 엄격히 구분되며 범신론은 철저히 배격되면서도 세계는 그 형상뿐만 아니라 그 존재성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히11:3. 참조. 마카비2서7:28).
3. 정신과 물질, 이원론은 정신(혹은 영)과 물질을 절대적으로 구분하고 정신은 선한 것으로, 물질은 악한 것이거나 정신의 방해물로 간주하는 경향이 짙은 철학에서 보다 뚜렷이 나타난다.
정신(혹은 영)과 대조하여 물질을 이렇듯 도덕적으로 낮게 평가하는 견해는 기독교의 창조 교리 및 성경적인 죄에 대한 이해와는 상반된다. 상황은 이원론이 묘사하는 것보다 더 나으면서도 동시에 더못하다. 한편으로 물질은 본래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다. 창조주는 그가 지으신 모든 것을 좋게(신하계) 보셨다(창1:31).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에게 반역한 나쁜 결과는 물질 영역만이 아닌 정신(혹은 영)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하늘에는 많은 악한 영들이 존재하며(엡6:12), 가장 무서운 죄는 영적인 죄이다. 성경은 정신과 물질의 형이상학적 구분을 절대 용인하지 않는다. 히브리적 역동설(dynamism)은 세계를 정태적(靜的)인 실체의 관점에서 보기보다 순수한 영적인 힘을 사용하는 만큼 물질적 요인도 사용하는 신의 섭리의 항상(恒常的) 활동의 관점에서 본다. 에너지와 물질의 상호관계에 대한 현대 과학적 개념들은 플라톤주의적, 혹은 관념론적 이원론보다 성경적 관점에 더 가깝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요4:24) '말씀은 육신이 되었다' (요1:14).
4. 영혼과 육체. 이원론을 피한 히브리적 사고의 중요한 예는 인간에 관한 성경적 교리이다. 헬라 사상 및 이에 영향을 받은 많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현인들은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간주하고 ‘육체를 무덤'으로 여겼다. 이 현인들은 육적인 모든 것에서 벗어남으로써 영혼을 해방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육체에 갇혀 있는 영혼이 아닌, 육과 영의 통일체이다. 부활의 경우에도 이와 마찬가지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지만 부활의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육체를 지닐 것이다(고전15:35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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